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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익공 신경진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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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충익공 신경진 묘역은 임진왜란 때 순절한 신립 장군의 아들 신경진의 묘역이다. 신경진은 인조반정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훈련대장으로서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병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으나, 청나라와의 외교 문제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는 청에 사은사로 파견되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으며, 인조의 신임을 받아 친병을 장악하고 호위를 책임졌다. 신경진은 김류, 이귀, 최명길 등과 교류하였으며, 1643년 영의정 재임 중 사망하여 효종 2년에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원래 청주에 있었으나 아차산으로 이장되었으며, 묘역에는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박태유가 글씨를 쓴 신도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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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익공 신경진 묘역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묘역 정보
이름충익공 신경진 묘역
한자 표기忠翼公 申景禛 墓域
충익공 신경진 묘역
충익공 신경진 묘역
국가대한민국
위치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산69-1
문화재 지정 정보
유형유형문화재
지정 번호95
지정일1995년 1월 25일
묘역 구성
구성 요소분묘 1기, 석물 8기, 토지 402.2m²
시대조선 숙종 9년(1683년)

2. 생애

신경진의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군수(君受)이다. 임진왜란 때 충주에서 왜적과 싸우다 패하자 자결했던 신립(申砬, 1546∼1592) 장군의 큰아들이다. 부친의 공적으로 선전관(宣傳官)에 기용되었고 무과(武科)에 급제한 뒤 경력(經歷)으로 승진하였다. 태안군수ㆍ담양부사를 거쳐 부산첨사로 발탁되나 왜인과 접할 수 없다고 하여 면직을 주청, 갑산부사로 체직되었다. 그 뒤 남도병영 우후(虞候), 경원부사, 벽동군수로 옮겨졌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공조참의, 병조참지가 되었고, 곧 병조참판에 제수되어 훈련·호위·포도대장을 겸하였다. 얼마 뒤 정사공신(靖社功臣) 일등으로 책록되어 정헌대부(정2품)에 오르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져 비변사의 일을 겸하였다.

이듬해 이괄의 난(亂) 때 훈련대장으로 인조를 호위하고 적을 토벌하는 데에 공을 세웠으나 난이 평정된 뒤 이괄이 추대한 왕자 흥안군 제(瑅:선조의 10남)를 마음대로 처형했다고 하여 탄핵을 받기도 했다. 그 뒤 형조판서가 되어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를 강화도로 호종했고 이듬해 부원군에 봉해졌다. 1636년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병 때문에 체직되었고, 그 해 겨울 오랑캐가 침입하자 남한산성으로 피난하는 인조를 따라 산성의 동쪽 문을 굳건히 지켰다. 이듬해 다시 병조의 일을 맡았고, 최명길의 추천으로 우의정이 되었다.

1638년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좌의정에 승진하자 영의정 최명길과 논의, 승려 독보(獨步)를 명(明)에 은밀히 파견하여 청(淸)에 항복한 그간의 사정을 변명토록 하였다. 1641년 다시 사은사로 청에 다녀왔고, 1642년 영의정에 올랐다가 병으로 사퇴, 이듬해 3월 영의정에 재임명된 지 열흘이 못되어 사망했다.

신경진은 인조반정을 처음부터 계획·주도하여 왕의 절대신임을 받았고 친병을 장악하여 호위를 책임졌다. 청과의 외교에서 과도한 징벌과 잦은 내정간섭을 철회하는 성과를 올렸다. 또 김류(金瑬)·이귀(李貴)·최명길 등 문인과 널리 사귀었는데, 특히 부친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임진왜란 때 함께 자결한 김여물(金汝 )의 아들 김류와 절친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며 효종 2년(1651) 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원래 청주 땅에 있었으나 뒤에 경기 양주의 아차산으로 개장되었다.

비는 화강암 귀부(龜趺) 위에 대리석제 비신(碑身)과 개석(蓋石)을 얹은 형태로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예이다. 귀부는 비신에 비해 크고 둔중하며, 개석은 추녀 끝에 구름무늬를 새기고 지붕 위에 쌍룡이 틀고있는 모습을 새겼다. 비문은 전(前) 좌의정 송시열이 지었고, 글씨는 사간원 정언 박태유(朴泰維)가 썼는데 안진경(顔眞卿) 풍이 가미된 단정한 해서이다. "領議政平城府院君忠翼申公神道碑銘"이란 머리전서[頭篆]는 판돈녕부사 이정영(李正英)이 썼다.

2. 1. 초기 생애와 임진왜란

신경진의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군수(君受)이다. 임진왜란 때 충주에서 왜적과 싸우다 패하자 자결했던 신립(申砬, 1546∼1592) 장군의 큰아들이다. 부친의 공적으로 선전관(宣傳官)에 기용되었고 무과(武科)에 급제한 뒤 경력(經歷)으로 승진하였다. 태안군수ㆍ담양부사를 거쳐 부산첨사로 발탁되나 왜인과 접할 수 없다고 하여 면직을 주청, 갑산부사로 체직되었다. 그 뒤 남도병영 우후(虞候), 경원부사, 벽동군수로 옮겨졌다.

2. 2. 인조반정과 정사공신

신경진은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성공한 후 공조참의, 병조참지가 되었고, 곧 병조참판에 제수되어 훈련·호위·포도대장을 겸하였다. 얼마 뒤 정사공신(靖社功臣) 일등으로 책록되어 정헌대부(정2품)에 오르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져 비변사의 일을 겸하였다. 신경진은 인조반정을 처음부터 계획·주도하여 왕의 절대신임을 받았고 친병을 장악하여 호위를 책임졌다.

이듬해 이괄의 난 때 훈련대장으로 임금을 호위하고 적을 토벌하는 데에 공을 세웠으나, 난이 평정된 뒤 이괄이 추대한 왕자 흥안군 제(瑅:선조의 10남)를 마음대로 처형했다고 하여 탄핵을 받기도 했다.

2. 3. 관직 생활과 주요 활동

신경진은 부친 신립 장군의 공적으로 선전관(宣傳官)에 기용되었고 무과(武科)에 급제한 뒤 경력(經歷)으로 승진하였다. 태안군수, 담양부사를 거쳐 부산첨사로 발탁되었으나 왜인과 접할 수 없다고 하여 면직을 주청, 갑산부사로 체직되었다. 그 뒤 남도병영 우후(虞候), 경원부사, 벽동군수로 옮겨졌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공조참의, 병조참지가 되었고, 곧 병조참판에 제수되어 훈련·호위·포도대장을 겸하였다. 얼마 뒤 정사공신(靖社功臣) 일등으로 책록되어 정헌대부(正憲大夫, 정2품)에 오르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져 비변사의 일을 겸하였다.

이듬해 이괄의 난(亂) 때 훈련대장으로 인조를 호위하고 적을 토벌하는 데에 공을 세웠으나 난이 평정된 뒤 이괄이 추대한 왕자 흥안군 제(瑅:선조의 10남)를 마음대로 처형했다고 하여 탄핵을 받기도 했다. 그 뒤 형조판서가 되어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를 강화도로 호종했고 이듬해 부원군에 봉해졌다. 1636년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병 때문에 체직되었고, 그 해 겨울 오랑캐가 침입하자 남한산성으로 피난하는 인조를 따라 산성의 동쪽 문을 굳건히 지켰다. 이듬해 다시 병조의 일을 맡았고, 최명길의 추천으로 우의정이 되었다.

1638년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좌의정에 승진하자 영의정 최명길과 논의, 승려 독보(獨步)를 명(明)에 은밀히 파견하여 청(淸)에 항복한 그간의 사정을 변명토록 하였다. 1641년 다시 사은사로 청에 다녀왔고, 1642년 영의정에 올랐다가 병으로 사퇴, 이듬해 3월 영의정에 재임명된 지 열흘이 못되어 사망했다.

신경진은 인조반정을 처음부터 계획·주도하여 왕의 절대신임을 받았고 친병을 장악하여 호위를 책임졌다. 청과의 외교에서 과도한 징벌과 잦은 내정간섭을 철회하는 성과를 올렸다. 또 김류(金瑬)·이귀(李貴)·최명길 등 문인과 널리 사귀었는데, 특히 부친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임진왜란 때 함께 자결한 김여물(金汝 )의 아들 김류와 절친했다.

2. 3. 1. 이괄의 난 진압

내용이 없습니다.

2. 3. 2.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신경진은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황해도 평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다.

2. 3. 3. 대청 외교 활동

대청 외교 활동에 대한 원본 자료(`source`)가 제공되지 않았습니다. `summary`에 신경진의 청나라와의 외교 역할과 성과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라고 되어 있지만, `source`가 없으므로 내용을 생성할 수 없습니다.

2. 4. 말년과 사망

신경진은 1642년(인조 20) 영의정에 올랐다가 병으로 사퇴하였고, 이듬해 3월 영의정에 재임명되었으나 열흘이 못되어 사망했다. 인조반정을 처음부터 계획하고 주도하여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으며, 친병을 장악하여 호위를 책임졌다. 청나라와의 외교에서는 과도한 징벌과 잦은 내정간섭을 철회하는 성과를 올렸다. 김류(金瑬), 이귀(李貴), 최명길 등 문인과 널리 교류하였으며, 특히 부친 신립의 종사관으로 임진왜란 때 함께 자결한 김여물의 아들 김류와는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사후 시호는 충익(忠翼)이며 효종 2년(1651) 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원래 청주에 있었으나 이후 경기도 양주의 아차산으로 이장되었다. 묘역의 신도비는 화강암 귀부(龜趺) 위에 대리석제 비신(碑身)과 개석(蓋石)을 얹은 형태로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귀부는 비신에 비해 크고 둔중하며, 개석은 추녀 끝에 구름무늬를 새기고 지붕 위에 쌍룡이 틀고 있는 모습을 새겼다. 비문은 전(前) 좌의정 송시열이 지었고, 글씨는 사간원 정언 박태유가 썼는데 안진경 풍이 가미된 단정한 해서체이다. "領議政平城府院君忠翼申公神道碑銘"이란 머리전서[頭篆]는 판돈녕부사 이정영이 썼다.

3. 정치 활동과 외교 정책

신경진은 인조반정을 처음부터 계획·주도하여 인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고, 친병을 장악하여 호위를 책임졌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공조참의, 병조참지가 되었고, 곧 병조참판에 제수되어 훈련·호위·포도대장을 겸하였다. 얼마 뒤 정사공신(靖社功臣) 일등으로 책록되어 정헌대부(정2품)에 오르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져 비변사의 일을 겸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亂) 때 훈련대장으로 임금을 호위하고 적을 토벌하는 데에 공을 세웠으나, 난이 평정된 뒤 이괄이 추대한 왕자 흥안군(興安君) 제(瑅:선조의 10남)를 마음대로 처형했다고 하여 탄핵을 받기도 했다. 그 뒤 형조판서가 되어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를 강화도로 호종했고 이듬해 부원군에 봉해졌다. 1636년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병 때문에 체직되었고, 그 해 겨울 오랑캐가 침입하자 남한산성으로 피난하는 인조를 따라 산성의 동쪽 문을 굳건히 지켰다. 이듬해 다시 병조의 일을 맡았고, 최명길의 추천으로 우의정이 되었다.

1638년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좌의정에 승진하자 영의정 최명길과 논의, 승려 독보(獨步)를 명(明)에 은밀히 파견하여 청(淸)에 항복한 그간의 사정을 변명토록 하였다. 1641년 다시 사은사로 청에 다녀왔고, 1642년 영의정에 올랐다가 병으로 사퇴, 이듬해 3월 영의정에 재임명된 지 열흘이 못되어 사망했다.

청과의 외교에서 과도한 징벌과 잦은 내정간섭을 철회하는 성과를 올렸다. 김류, 이귀, 최명길 등 문인과 널리 사귀었는데, 특히 부친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임진왜란 때 함께 자결한 김여물의 아들 김류와 절친했다.

3. 1. 정치적 입장과 인맥

3. 2. 대청 외교 정책

4. 평가

신경진은 인조반정을 처음부터 계획·주도하여 인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고 친병을 장악하여 호위를 책임졌다. 청과의 외교에서 과도한 징벌과 잦은 내정간섭을 철회하는 성과를 올렸다. 김류, 이귀, 최명길 등 문인과 널리 사귀었는데, 특히 부친의 종사관으로 임진왜란 때 함께 자결한 김여물의 아들 김류와 절친했다.

임진왜란 때 충주에서 왜적과 싸우다 패하자 자결했던 신립 장군의 큰아들인 신경진은, 이괄의 난 때 훈련대장으로 임금을 호위하고 적을 토벌하는 데에 공을 세웠으나, 난이 평정된 뒤 흥안군 제를 마음대로 처형했다고 하여 탄핵을 받기도 했다. 1638년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좌의정에 승진하자 영의정 최명길과 논의, 승려 독보를 명나라에 은밀히 파견하여 청나라에 항복한 그간의 사정을 변명토록 하였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며 효종 2년(1651) 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4. 1. 긍정적 평가

4. 2. 부정적 평가

4. 3. 현대적 의의

5. 묘소와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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