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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로우지 켄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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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로우지 켄타로(1936년 ~ 1984년)는 일본의 학생운동가이자 사업가이다. 홋카이도 대학 재학 중 일본공산당에 입당하여 전학련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공산주의자동맹(분트) 및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전국위원회(혁공동 전국위)에 참여했다. 학생운동에서 물러난 후에는 요트 회사를 설립하고 이자카야를 운영하는 등 다양한 사업을 했으며, 도쿠다 도라오의 정치 입문을 지원하기도 했다. 1984년 직장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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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로우지 켄타로
기본 정보
본명당우 건태랑 (唐牛 健太郎)
가나카로우지 켄타로 (からうじ けんたろう)
로마자 표기Karōji Kentarō
별칭당우 군 (唐牛君)
생년월일1940년 1월 11일
사망일1984년 11월 6일 (44세)
출생지일본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사인익사
직업
직업학생운동가
학력
출신 학교도쿄 대학 문학부 윤리학과 졸업
활동
주요 활동전학련 위원장 대행, 아나르코 생디칼리슴 운동 참여

2. 생애

홋카이도 하코다테시 출신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우체국에서 보험 외교원으로 일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유카와 국민학교와 하코다테 시립 유카와 중학교를 거쳐, 1956년 홋카이도 하코다테히가시 고등학교(현재의 시립 하코다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홋카이도 대학 교양부(문류)에 입학했다.

같은 해 대학을 휴학하고 도쿄로 상경하여 후카가와의 인쇄 공장 등에서 일하며 스나가와 투쟁에 참여했다. 이듬해 근무하던 공장이 문을 닫자 하코다테로 돌아가 목재상점에서 일하다가 홋카이도 대학에 복학했다. 복학 후에는 시나리오 연구회에 가입했는데,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호사카 마사야스도 이 동아리 회원이었다.

대학 재학 중 교양부 자치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일본공산당에 입당했다. 전학련 제11회 정기 전국 대회에서 중앙 집행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이후 일본공산당이 주도하는 안보 투쟁 방식에 한계를 느끼고 공산주의자동맹(분트) 결성 대회에 참여하며 본격적인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2. 1. 학생운동 시절

홋카이도 대학교양부 재학 시절, 카로우지는 교양부 자치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일본공산당에 입당했다.[1] 전학련 제11회 정기 전국 대회에서는 중앙 집행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이후 일본공산당이 지도하는 안보 투쟁 방식에 한계를 느끼고 분트(공산주의자동맹) 결성 대회에 참여했다.[1]

1959년 5월, 분트 서기장 시마 시게오의 설득으로 삿포로에서 전학련 중앙집행위원장직을 수락했다. 당시 그 자리에는 홋카이도 대학 동기이자 훗날 문학부장이 되는 하이타니 케이조도 있었다.[1] 위원장 취임 후 첫 활동은 당시 방위청 장관 이노 시게지로의 도쿄 대학 내 조병학과 설치 발언에 항의하는 방위청 앞 시위를 지휘하는 것이었다.[1] 이 시위로 인해 당시 22세였던 카로우지는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체포되어 10일간 구류되었는데, 이는 위원장 취임 4일 만의 일이었고 그의 첫 구치소 경험이었다.[1]

카로우지 켄타로의 주요 체포 및 구류 이력 (학생운동 시절)
시기사건혐의결과비고
1959년 5월방위청 앞 시위 지휘공무집행방해10일 구류위원장 취임 4일 만
1960년 1월기시 노부스케 방미 저지 하네다 공항 점거 투쟁-체포 후 2월 보석 출소전학련 조직 약화
1960년 4월4.26 국회 돌입 투쟁-11월까지 장기 구류, 보석 출소홋카이도 대학 제적, 구류 중 칸바 미치코 사망 소식 접함, 옥중 위원장 재선
1963년안보 투쟁 관련 재판 항소심공무집행방해 등항소 기각, 우쓰노미야 형무소 수감1963년 11월 출소



1960년 1월, 당시 총리 기시 노부스케의 방미를 저지하기 위한 하네다 공항 로비 점거 투쟁을 주도하다 다시 체포되었고, 2월에 보석으로 풀려났다.[1] 이 투쟁으로 카로우지를 포함해 약 80명이 체포되었으며, 전학련 조직은 큰 타격을 입었다.[1] 맹우 시노하라 코이치로에 따르면, 보석 후 카로우지는 타나카 세이겐에게 불려가 공산당을 경계하라는 조언을 들었다고 한다.[1]

같은 해 4월, 60년 안보 투쟁의 주요 사건 중 하나인 '4.26 국회 돌입 투쟁'으로 세 번째 체포되어 11월까지 장기간 구류되었고, 이로 인해 홋카이도 대학에서 제적당했다.[1] 6월 15일, 국회 앞에서 전학련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여 도쿄 대학 학생 칸바 미치코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구치소에서 접했다.[1] 7월에는 옥중에서 전학련 위원장으로 재선되었으나,[1] 9월 19일 미일안전보장조약이 자연 승인되면서 분트의 활동은 급격히 위축되었다.[1] 카로우지는 안보 조약 승인 5개월 후인 11월 5일에야 보석으로 석방되었다.[1] 이 시기, 분트 활동의 공백 속에 트로츠키주의를 표방하는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전국위원회(혁공동 전국위)가 부상하고 있었다.[1]

1961년 1월, 카로우지는 돌연 혁공동 전국위에 가입하여 주변을 놀라게 했다.[1] 이 일로 같은 해 7월 전학련 제17회 정기 전국 대회에서 위원장직을 사임하고 국제부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1] 한편, 4월에는 첫 결혼을 하여 에고타에 신혼집을 마련했다.[1]

1962년 5월, 카로우지는 분트와 혁공동의 통합을 시도하며 공산주의 학생 동맹 결성을 추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일명 공학동 사건).[1]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혁공동 전국위에서 탈퇴하며 정치 활동 일선에서 물러났다.[1] 이후 전학련 활동에서도 손을 떼고 안보 투쟁 관련 공무집행방해 혐의 등에 대한 재판에 집중하는 한편, 타나카 세이겐이 운영하는 석유 판매 회사인 마루와산업에 촉탁 사원으로 입사했다.[1]

1963년 2월 26일, TBS 라디오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일그러진 청춘 - 전학련 투사의 그 후' (제작: 요시나가 하루코)에서 전 전학련 재정부장 토하라 요시노부는 시마 시게오와 카로우지가 타나카 세이겐으로부터 400만~500만 가량의 자금 지원을 받았으며 여전히 그의 비호 아래 있다고 폭로하여 큰 파장을 일으켰다.[1] 다만, 이후 토하라를 취재한 사노 신이치는 해당 프로그램이 요시나가 하루코에 의한 도청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1]

카로우지는 1963년 봄, 도쿄 고등재판소에서 항소가 기각되어 우쓰노미야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같은 해 11월에 출소했다.[1]

2. 2. 학생운동 이후의 삶

1965년 2월, 태평양 단독 횡단 경험이 있는 호리에 켄이치와 함께 요트 회사 호리에마린을 설립했다. 에노시마에 초보자 대상 요트 스쿨인 '렛츠코 세일링클럽'을 열었으며, 도쿄 신바시에 사무실을 개설하고 에노시마에서 배팅 센터도 운영했다. 1968년 1월에는 신바시(현재의 뉴신바시빌딩 자리)에 '이시카리'라는 이자카야를 열어 직접 경영했다. 같은 해 겨울, 이자카야 단골이었던 영상 작가 아베 히로히사의 권유로 바다사자 사냥 명인 시부타 카즈유키의 제자가 되기 위해 홋카이도 몬베쓰시로 향했다.

1969년 봄, "요트 학교 교장 노릇은 이제 질렸다"는 말을 남기고 아내와 이혼한 뒤 잠적했다.[2] 이후 도쿄에서 만난 후처와 함께 시코쿠 88개소 순례에 나섰으나(1개월 만에 27곳 방문), 히로시마, 가고시마를 거쳐 당시 일본 최남단이었던 요론섬으로 건너가 약 1년 반 동안 머물렀다.

1970년 7월, 다시 홋카이도로 돌아가 앗케시정에서 어부 견습 생활을 시작했다. 이 시기 '무츠고로'라는 별명의 하타 마사노리가 동물 왕국 설립을 준비 중이었는데, 카로우지도 참여하여 도왔다. 1971년 2월부터는 본격적인 어부가 되기 위해, 이전에 바다사자 사냥으로 인연을 맺었던 몬베쓰시에 정착하여 약 10년간 어부로 활동했다. 하지만 1977년 3월 1일, 소련의 일방적인 200해리 선언으로 카로우지가 타던 배가 감선 대상에 포함되었고, 결국 1978년 9월 41세의 나이로 어부 생활을 그만두었다.

1978년 11월,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고향 하코다테로 돌아가 지역 건설 회사에 취직했다. 당시 하코다테에서는 세이칸 터널 공사가 진행 중이었기에, 과거 전학련 동료들 사이에서는 카로우지가 터널 공사 현장에서 일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40세를 넘긴 카로우지는 체력적으로 힘든 노동을 할 수 없었고, 실제로는 자전거로 수도관 공사 현장을 돌며 사진 찍는 일을 했다. 1979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하코다테를 떠나 다시 상경했다. 1980년 4월에는 다시 홋카이도로 가서 엔가루의 홋카이도 가정학교를 방문했는데, 당시 활동가 동료에게 "홋카이도 가정학교를 세운 토메오카 코스케와 같은 일을 하고 싶었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1981년부터는 치바현 이치카와시로 이주하여 '엘름'이라는 사무용 컴퓨터 판매 회사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했다. 당시 사무용 컴퓨터는 대당 1000만이 넘는 고가품이었지만, 카로우지는 뛰어난 리더십과 화술로 영업 실적 1위를 기록했다.

1982년 3월, 오랜 지인인 시마 시게오를 통해 토쿠슈카이그룹의 창립자 토쿠다 토라오를 소개받았다. 토쿠다는 의료 개혁을 위해 정치를 바꿔야 한다는 신념으로 정계 진출을 결심한 상태였다. 카로우지는 일본정공 사장 이마자토 히로키에게 토쿠다 후원을 요청했고, 이마자토는 자민당니카이도 스스무에게 토쿠다를 소개했다.

같은 해 4월 말, 카로우지는 엘름을 퇴사하고 '현요사(炫耀社)'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불량 소년 갱생 시설과 국제 의료 센터 설립을 구상했으나 실현하지는 못했다. 5월부터는 토쿠다의 요청으로 삿포로토쿠슈카이병원 설립에 협력했다. 카로우지는 홋카이도 대학 동기인 전 에베츠 시의원 이토 고(伊藤豪)에게 의뢰하여 부지를 찾도록 했고, 삿포로시 시로이시구에서 유키지루시 유업 창업자 중 한 명인 쿠로사와 토리조의 땅을 찾아 병원을 지었다. 또한 사이타마현 하뉴시에도 토쿠슈카이 병원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여 1983년 9월 토쿠슈카이하뉴종합병원을 개원시켰다. 건설에는 이마자토 히로키도 협력했으며, 병원 부지는 일본정공 공장 부지였다.

이후 카로우지는 토쿠다의 선거 운동을 돕기 위해 아마미제도의 기카이섬으로 건너갔다. 1983년 12월에 치러진 제37회 중의원 총선거에서 토쿠다는 아마미 군도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야스오카 오키하루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 카로우지는 이 시기 직장암이 발병하여, 선거 기간 중 도쿄 암센터에 입원하며 선거 운동을 중단해야 했다.

2. 3. 도쿠다 도라오와의 만남과 정치 활동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도쿠다 도라오와의 만남과 정치 활동' 섹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원본 소스는 카로우지 켄타로의 말년 투병 과정과 사망, 장례식에 대한 내용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2. 4. 말년

암센터 퇴원 후 보소반도에 있는 카메다 종합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1983년 9월 퇴원하여 도쿄 이치가야의 자택으로 돌아갔으나, 같은 해 10월 키카이 섬 방문 중 암 재발이 확인되었다. 림프절 절제를 위해 다시 암센터를 찾았고, 11월 말 재입원했지만 이미 암은 전신으로 전이된 상태였다.

1984년 새해에는 아오키 마사히코의 어머니를 비롯해, 당시 자민당의 유망주로 꼽히던 가토 고이치, 신자유클럽 전 간사장 니시오카 다케오, 사회민주연합간 나오토 등이 병문안을 왔다. 카로우지는 가토, 니시오카, 간 세 사람과 함께 암센터 근처의 고급 요정 '신키라쿠'에서 식사를 했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외출이 되었다.

1984년 3월 4일 오후 8시 23분, 직장암으로 47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3월 5일 도쿄 나카노구의 호센지에서 경야(장례 전야의 밤샘)가 열렸으며, 시마 다케시, 니시베 스스무, 다나카 쇼지, 도쿠다 히사시, 이와미 타카오 등 생전에 교류했던 인물들이 참석했다. 그러나 장례식 도중 한 조문객이 다나카 쇼지와 카로우지의 관계를 문제 삼으면서 주먹다짐이 벌어지기도 했다. 다음 날인 6일, 가족끼리 조용히 치르는 밀장(密葬) 중에는 토리시마 근해에서 규모 7.6(진도 4)의 지진이 발생했다.

본 장례식은 3월 19일 아오야마 장례식장에서 비가 내리는 가운데 거행되었다. 이날 도쿄의 최저 기온은 1°C였고 비는 눈으로 바뀌었다. 장례식에는 홋카이도 몬베쓰에서 가고시마현 키카이 섬까지 전국 각지에서 조문객들이 모였으며, 제단에는 몬베쓰의 어부가 보낸 풍어 기원 깃발(大漁旗)이 장식되었다. 또한 카로우지와 교류가 있었던 후지모토 토시오의 아내인 가수 가토 토키코가 장례식장을 찾아와 추모곡으로 「지토세 여정」을 불렀다.

3. 평가

자유민주당 간사장을 지낸 가토 고이치는 카로우지 켄타로의 만년을 문병하고, 그의 추모집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옛날이었다면 카로우지 씨는 농민운동의 명지도자가 되었을 것이다. 인간을 보는 안목의 확실함, 날카로움, 따뜻함은 보수혁신의 틀을 넘어, 우리 '60년 안보 세대의 두목'이라고 부르기에 걸맞는 것이었다." 이는 카로우지가 지닌 리더십과 인간적인 매력이 이념적 경계를 넘어 인정받았음을 보여준다.

3. 1. 논란

1963년 TBS 라디오에서 방송된 요시나가 하루코 제작의 다큐멘터리 '일그러진 청춘 - 전학련 투사의 그 후'에서 전학련 재정부장 히가시하라 요시노부는 카로우지와 시마 나리히로가 다나카 세이겐으로부터 400만~500만 엔 가량의 자금 원조를 받았으며, 현재도 다나카의 비호 아래 있다고 폭로하여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다만, 이후 히가시하라를 취재한 사노 신이치는 해당 프로그램이 "요시나가에 의한 도청"이었다고 주장했다[1]. 카로우지는 1962년 정치 활동에서 물러난 뒤 다나카 세이겐이 경영하는 석유 판매 회사에 촉탁 신분으로 입사한 바 있다.

또한, 전학련 활동 자금이 부족해지자 카로우지는 여러 유명 인사들을 찾아가 기부를 요청했으나 그 반응은 각기 달랐다.

  • 쓰루미 슌스케로부터는 10만을 받았으나, 이후 쓰루미가 안보 조약 항의 표시로 대학 교수직을 사임하자 그의 부인 요코야마 사다코로부터 "그 10만 엔 돌려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 마쓰모토 지이치로는 "얼마나 필요한가?"라고 물었고, 카로우지가 "20만"이라고 답하자 이틀 뒤에 다시 오라고 했다. 약속한 날 찾아가자 그 자리에서 20만을 건네받았다.
  • 모리와키 마사미쓰는 "담보를 가져오라"고 요구했고, 심부름을 간 히가시하라 요시노부가 자신의 형이 소유한 고장 난 자전거를 가져가자 "이것으로 충분하다"며 10만을 내주었다.
  • 반면, 시미즈 이쿠타로는 "지금이야말로 국회로 가야 한다"는 등의 장황한 이야기만 할 뿐 자금 지원은 전혀 하지 않았다[3].
  • 테라야마 슈지는 한번 지원 의사를 밝혔다가 철회하기도 했다.

4. 기타

좋아하는 여배우는 사가 미치코, 다나카 유코, 남배우는 다카쿠라 켄, 스가와라 분타였다. 좋아하는 가수는 후지 케이코와 고바야시 아키라, 소설가 중에서는 쓰쓰이 야스타카를 꼽았다.

전학련의 활동 자금이 부족해지자, 카로우지는 여러 유명 인사에게 기부를 요청했으나 반응은 각기 달랐다.

인물기부 금액비고
쓰루미 슌스케10만쓰루미가 안보 투쟁 항의로 대학을 사임하자, 그의 아내 요코야마 사다코가 반환을 요구했다.[3]
마쓰모토 지이치로20만"얼마나 원하냐?"고 묻고 카로우지가 "20만"이라고 답하자, 이틀 뒤 약속대로 지급했다.[3]
모리와키 마사미쓰10만"담보를 가져오라"는 요구에 히가시하라 요시노부가 고장난 자전거를 가져가자 이를 담보로 인정하고 빌려주었다.[3]



반면, 시미즈 이쿠타로는 장황한 설명만 늘어놓고 자금을 지원하지 않았으며[3], 테라야마 슈지는 지원 의사를 밝혔다가 철회하기도 했다[3]. 이처럼 카로우지의 자금 모금 활동은 순탄치 않은 면도 있었다.

참조

[1] 서적 唐牛伝 小学館
[2] 서적 屋久島 日常としての旅路 麗沢大学出版会
[3] 간행물 蒟蒻問答 月刊WiLL 20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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