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우산틴 2세 막 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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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우산틴 2세 막 아다는 900년부터 943년까지 알바 왕국을 통치한 인물이다. 그는 878년 살해된 아에드 막 키나다의 아들이자 콘스탄틴 1세의 조카로, 900년 도날드 2세의 사망 이후 왕위에 올랐다. 그의 치세 동안 바이킹의 공격과 잉글랜드와의 갈등이 있었으며, 906년에는 교회 개혁을 위한 회의를 주최했다. 937년에는 브루난부르 전투에서 패배했고, 943년에는 퇴위하여 세인트 앤드루스 교회에서 수도원 생활을 했다. 그는 952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정치적 유산은 스코틀랜드 왕권의 새로운 형태를 창출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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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산틴 2세 막 아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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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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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기간 | 900년 4월 – 943년 |
계승 | 알바 (스코틀랜드)의 왕 |
선임자 | 돔날 2세 |
후임자 | 말 콜룸 1세 |
출생 추정 시기 | 879년 이전 |
사망 연도 | 952년 |
사망 장소 | 세인트 앤드루스, 스코틀랜드 |
자녀 | 일둘브, 알바 국왕 켈라크 딸 (1명 이상) |
왕가 | 알핀 |
아버지 | 아드, 픽트인의 왕 |
매장지 | 아이오나 |
2. 픽트족과 알바 왕국
바이킹 시대 이전 스코틀랜드 동부의 주요 세력은 북부 픽트족의 왕국인 포르트리우였으며, 9세기경에는 달 리아타의 게일족까지 이 왕국에 복속되었다. 포르트리우는 카우산틴 막 페르구사 가문이 789년경부터 지배했다.
그러나 839년, 바이킹 군대와의 전투에서 포르트리우의 왕 우엔을 비롯한 지도부가 대거 사망하면서[8] 왕국은 큰 혼란에 빠졌다. 약 10년간의 권력 투쟁 끝에 848년경 케네스 막 알핀이 패권을 장악했다.[9]
후대의 국가 신화는 케네스를 스코틀랜드 왕국의 창시자로 묘사하지만, 당대 기록들은 케네스와 그의 직계 후계자들(도날드 1세, 콘스탄틴 1세, 아에드)까지도 "픽트족의 왕"으로 칭했다.[10] 이는 케네스의 등장이 픽트족의 완전한 파괴라기보다는 지배 세력의 교체였음을 시사한다. 케네스의 후손들(알핀 가문)이 다스린 왕국은 테이 강 유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11][12], 점차 알바 왕국으로 발전하게 된다.
케네스의 아들 콘스탄틴 1세는 876년 바이킹과의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13], 후대에 마지막 픽트족 왕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이는 픽트족 중심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알바 왕국의 시대가 열렸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 1. 픽트족 왕국 포르트리우
바이킹 시대 이전 스코틀랜드 동부 지역을 지배했던 주요 왕국은 모레이 만 해안에 위치한 북부 픽트족 왕국인 포르트리우였다. 9세기 무렵에는 달 리아타의 게일족도 카우산틴 막 페르구사 가문 출신의 포르트리우 왕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카우산틴 가문은 789년부터 포르트리우를 다스렸으며, 만약 카우산틴이 오앵구스 1세의 친척이라면 그 지배는 7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포르트리우의 지배는 839년에 끝났다. 얼스터 연대기에 따르면, 바이킹 군대와의 전투에서 큰 패배를 겪었기 때문이다. 이 전투에서 포르트리우의 왕 우엔과 그의 동생 브란, 그리고 달 리아타 왕 아에드 막 보안타 등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8] 이 사건 이후 약 10년간 픽트족의 땅에서는 여러 가문이 권력을 잡기 위해 다투는 불안정한 시기가 이어졌다. 결국 848년경 케네스 막알핀이 최종 승자가 되었다.[9]
후대의 국가 신화에서는 케네스 막알핀을 스코틀랜드 왕국의 창시자로 묘사하며, 그가 843년에 픽트족을 정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9세기 스코틀랜드 역사 기록은 부족하며, 아일랜드 연대기와 10세기 '알바 왕 연대기'는 케네스가 픽트족의 왕이었고, 사망 당시에도 "픽트족의 왕"으로 불렸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의 동생 도날드 1세와 아들들인 콘스탄틴 1세, 아에드 역시 같은 칭호로 불렸다.[10]
케네스의 후손들이 다스린 왕국은 이전에 강력했던 포르트리우 왕국의 남쪽에 자리 잡았으며, 테이 강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했다. 이 가문은 아일랜드 기록에서 '클란 키네다 메크 알핀'("케네스 막알핀의 가문")으로 불렸다.[11] 케네스가 세운 왕국의 정확한 영토는 확실하지 않지만, 남쪽으로는 포스 만에서 북쪽으로는 마운스까지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왕국의 중심지는 오늘날의 미언스, 포파셔, 포파, 퍼스, 파이프, 킨로스 지역과 비슷했다. 주요 종교 중심지로는 왕국의 주교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덩켈드와 '셀 리그모나이드'(현재의 세인트 앤드루스)가 기록에 남아 있다.[12]
케네스의 아들인 콘스탄틴 1세는 876년에 사망했는데, 이는 874년 노섬브리아에서 북쪽으로 침입한 바이킹 군대와의 전투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후대의 왕 목록에서는 그를 70번째이자 마지막 픽트족 왕으로 기록하고 있다.[13]
2. 2. 카우산틴 가문과 케네스 막 알핀
바이킹 시대 이전 스코틀랜드 동부의 주요 왕국은 모레이 만 연안의 북부 픽트족 왕국인 포르트리우였다. 9세기경 달 리아타의 게일족은 카우산틴 막 페르구사 가문이 다스리는 포르트리우 왕에게 복종했다. 이 가문은 789년부터 포르트리우를 지배했으며, 카우산틴이 오앵구스 1세의 친족이었다면 730년대부터 지배했을 수도 있다.
카우산틴 가문의 지배는 839년 바이킹 군대에게 패배하면서 끝났다. 이 전투에서 포르트리우의 왕 우엔과 그의 형제 브란, 카우산틴의 조카, 그리고 달 리아타 왕 아에드 막 보안타 등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고 얼스터 연대기는 기록한다.[8] 이 사건 이후 약 10년간 여러 가문이 픽트족 영토의 지배권을 두고 다투는 불안정한 시기가 이어졌고, 848년경 케네스 막 알핀이 최종 승자로 부상했다.[9]
후대의 국가 신화는 케네스 막 알핀을 스코틀랜드 왕국의 창시자로 묘사하며, 그가 픽트족을 정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연 843년을 건국 시점으로 본다. 그러나 9세기 스코틀랜드 역사 기록은 부족하며, 아일랜드 연대기와 10세기 ''알바 왕 연대기''는 모두 케네스가 픽트족의 왕이었고 사망 당시에도 "픽트족의 왕"으로 불렸다고 기록한다. 케네스의 형제 도날드 1세와 아들들인 콘스탄틴 1세, 아에드 역시 같은 칭호로 불렸다.[10]
케네스의 후손들이 다스린 왕국은 알핀 가문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아일랜드 자료에서는 Clann Cináeda meic Ailpín|클란 키네다 메크 알핀sga("케네스 막 알핀의 후손")으로 언급된다.[11] 이 왕국은 이전 포르트리우 왕국의 남쪽, 테이 강 유역을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왕국의 정확한 범위는 불확실하지만, 남쪽으로는 포스 만에서 북쪽으로는 마운스 산맥까지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드루임 알반 너머 북부 산악 지대까지 영토가 확장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왕국의 중심부는 오늘날의 미언스, 포파셔, 퍼스, 파이프, 킨로스 지역과 비슷했다. 기록에 따르면 주요 종교 중심지는 왕국 주교좌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덩켈드와 '셀 리그모나이드'(오늘날의 세인트 앤드루스)였다.[12]
케네스의 아들 콘스탄틴 1세는 876년에 사망했는데, 874년 노섬브리아에서 북진한 바이킹 군대와의 전투에서 전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후대의 왕 목록에서는 그를 70번째이자 마지막 픽트족 왕으로 간주했다.[13]
3. 9세기 말 브리튼과 아일랜드 정세
9세기 말, 브리튼 제도는 다양한 왕국과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thumb의 남쪽 경계를, 점선 B는 약 925-945년경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의 남쪽 경계를 나타낸다.]]
잉글랜드에서는 899년 웨섹스의 알프레드 대왕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에드워드 1세가 템스강 남쪽을, 딸 애설플래드 부부가 머시아 지역을 통치하며 앵글로색슨 세력을 이끌었다. 반면 잉글랜드 동부의 데인족 왕국들은 동앵글리아와 노섬브리아 등지에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내부 상황은 다소 복잡하고 유동적이었다.[14]
아일랜드에서는 미데의 왕 플란 신나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는 카우산틴 2세의 이모 마엘 뮤레와 혼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한편, 더블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바이킹 및 노르드-게일족 세력은 내부 분열 등으로 약화되어 902년에는 아일랜드에서 추방되기도 했으며, 이들은 이후 브리튼 서부와 북부 등지로 흩어졌다.[15]
카우산틴이 통치하던 알바 왕국 주변의 상황도 복잡했다. 왕국의 남서쪽에는 브리튼족의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이 위치했는데, 북쪽으로는 레녹스, 동쪽으로는 포스강, 남쪽으로는 서던 업랜드까지 영토가 확장되어 있었다. 900년경에는 Dyfnwal 왕이 통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6]
스코틀랜드 서부 해안 지역, 즉 옛 달 리아다 왕국의 영역이었던 곳의 상황은 명확하지 않다. Áed mac Boanta 이후로는 기록된 게일족 왕이 없다. 프랑크 왕국의 ''베르티니아 연대기'' 기록에 따르면 849년경 노르드인들이 이 지역, 특히 내부 헤브리디스를 정복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17] 또한, 이 시기 스코틀랜드 북부의 북부 섬이나 서부의 서부 섬에 바이킹이나 노르드-게일족의 독립적인 왕국이 존재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18] 새로운 바이킹 그룹의 유입은 북유럽과 서유럽 전역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3. 1. 잉글랜드 왕국
899년 웨섹스의 왕 알프레드 대왕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에드워드 1세가 템스강 남쪽의 잉글랜드를 통치하게 되었다. 알프레드의 딸 애설플래드와 사위 애설레드는 머시아의 서부 잉글랜드 지역을 다스렸다.
한편, 잉글랜드 동부에 위치한 데인족 왕국의 상황은 명확하지 않다. 동앵글리아에서는 Eohric 왕이 통치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노섬브리아에서는 요크의 구스프리드 이후의 계승 관계가 불확실하다. 구스프리드의 뒤를 시프리두스와 크누트가 이었다는 점은 알려져 있으나, 이들이 공동으로 통치했는지 혹은 순차적으로 통치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당시 노섬브리아는 요크의 바이킹 왕들과 지역 통치자들 사이에 영토가 분할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예를 들어, Bamburgh에 기반을 둔 에드울프는 타인강 또는 티스강에서 북쪽의 포스강까지 이르는 지역을 통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4]
3. 2. 아일랜드 왕국
아일랜드에서는 카우산틴의 이모 마엘 뮤레Máel Muire ingen Cináedaga와 결혼한 플란 신나Flann Sinnaga가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900년 무렵은 더블린에 기반을 둔 바이킹과 노르드-게일족에게는 약세의 시기였다. 이 시기 더블린의 바이킹 세력은 두 명의 경쟁적인 지도자 아래 분열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894년에는 이들 중 한 그룹이 더블린을 떠나 브리튼의 아일랜드해 연안, 아마도 머지강과 클라이드 만 사이에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블린에 남아 있던 바이킹들은 902년, 플란 신나의 사위인 케르발 막 무레칸Cerball mac Muirecáinga에 의해 도시에서 쫓겨났으며, 이후 브리튼 서부와 북부 지역에서 활동하게 되었다.[15]3. 3. 바이킹의 활동
9세기 말과 10세기 초, 바이킹의 활동은 브리튼 제도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
아일랜드에서는 900년 무렵 더블린의 바이킹과 노르드-게일족 세력이 약화되어 있었으며, 두 명의 경쟁 지도자 아래 분열된 상태였다. 이미 894년, 한 무리의 바이킹이 더블린을 떠나 머지강과 클라이드 만 사이, 즉 브리튼의 아일랜드해 연안 지역에 정착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더블린에 남아 있던 바이킹 세력은 902년, 렌스터의 왕이자 플란 신나의 사위인 Cerball mac Muirecáin에 의해 도시에서 추방당했다. 이들은 이후 브리튼 서부와 북부 해안 지역으로 이동하여 활동을 이어갔다.[15]
잉글랜드 북부의 노섬브리아에서는 요크의 구스프리드 사후 시프리두스와 크누트가 바이킹 왕위를 계승했지만, 이들이 공동으로 통치했는지 차례로 통치했는지는 불확실하다. 당시 노섬브리아는 요크를 중심으로 한 바이킹 왕들과 지역 토착 세력으로 분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밤버그에 기반을 둔 에드울프와 같은 지역 통치자는 타인강 또는 티스강에서 북쪽의 포스강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4]
스코틀랜드 서부 해안과 섬 지역에서도 바이킹의 영향력이 확인된다. 프랑크 왕국의 기록인 ''베르티니아 연대기''는 849년에 노르드인들이 달 리아다 왕국의 해안 지역, 즉 내부 헤브리디스를 정복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17]
이처럼 9세기 말과 10세기 초는 북부 및 서부 유럽에서 새로운 바이킹 그룹이 지속적으로 도래하던 시기였다. 다만, 스코틀랜드의 서부 섬이나 북부 섬에 독립적인 바이킹 또는 노르드-게일족 왕국이 존재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논쟁이 있다.[18]
4. 콘스탄틴 2세의 초기 생애와 즉위
아에드의 아들인 카우산틴 2세는 아버지 아에드가 878년에 살해된 후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출생 연도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879년 이전일 가능성이 높으며, 그의 이름은 삼촌 카우산틴 1세의 통치 기간 중에 태어났을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19]
아버지 아에드의 사망 이후 혼란스러운 시기를 거쳐 기릭이 왕위에 올랐던 기간 동안, 카우산틴은 아일랜드에서 망명 생활을 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는 그의 이모 마엘 무이레가 당시 아일랜드의 대왕들과 혼인 관계였던 점에 근거한 추측이다.[24]
기릭이 889년에 사망한 후, 카우산틴의 사촌인 도날드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도날드 2세는 약 11년간 통치하며 바이킹과의 전쟁을 이어갔으나, 900년 미언스의 더노터에서 바이킹과 싸우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카우산틴 2세는 도날드 2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26]
4. 1. 아에드 막 키나다의 통치와 사망
아에드는 카우산틴 2세의 아버지로, 876년 그의 삼촌이자 이름이 같은 카우산틴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878년에 살해되었다. 아에드의 통치는 매우 짧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왕 목록에서는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카우산틴 2세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아버지 아에드가 사망한 다음 해인 879년 이후에 태어났을 가능성은 없다. 그의 이름 '카우산틴'은 삼촌 카우산틴 1세의 통치 기간 중에 태어났을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19]아에드가 사망한 후부터 도날드 2세(돔날 막 콘스탄틴)가 900년에 사망할 때까지 약 20년 동안의 기록은 아일랜드 연대기에서 찾아볼 수 없다.[20] 아에드와 도날드 2세 사이의 왕위 계승에 대한 기록은 《알바 왕들의 연대기》에서 혼란스럽게 나타나며, 다른 모든 왕 목록과 일치하지 않는다.[21] 《알바 왕들의 연대기》에 따르면 아에드의 뒤를 에오카이드가 이었으며, 그는 케네스 맥알핀의 손자이고 어떤 식으로든 기릭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모든 목록에서는 기릭이 아에드 다음에 통치했다고 기록하며 그를 칭송한다.[22] 기릭은 케네스 맥알핀의 친족으로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혼인을 통해 관련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이 시기 픽트랜드에서 일어난 주요 변화는 알렉스 울프와 아치 던컨에 의해 기릭의 통치와 연관 지어 설명되기도 한다.[23]
울프는 카우산틴과 그의 남동생 도날드가 기릭의 통치 기간 동안 아일랜드에서 망명 생활을 했을 수 있다고 추측한다. 아일랜드에는 그들의 이모 마엘 무이레가 있었는데, 그녀는 아일랜드의 대왕이었던 아에드 핀들리아와 플란 신나 두 사람과 연속으로 결혼했다.[24] 기릭은 889년에 사망했다. 만약 카우산틴이 망명 생활을 했다면, 그는 사촌인 도날드 2세가 왕이 된 후 픽트랜드로 돌아왔을 것이다. 도날드 2세의 성격은 11세기 플란 마이니스트레흐의 글에서 붙여진 별명 '다사흐타흐'(Dasachtach|다사흐타흐gd)에서 엿볼 수 있는데, 이는 폭력적인 미치광이나 미친 황소를 뜻하는 단어이다. 또한 《베르찬의 예언》에서는 그를 "유물을 중히 여기지 않을 거친 자"로 묘사하기도 했다.[25] 도날드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브리튼과 아일랜드의 바이킹 왕들과의 전쟁은 계속되었으며, 그는 900년 미언스의 더노터에서 바이킹과 싸우다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뒤를 이어 카우산틴 2세가 왕위에 올랐다.[26]
4. 2. 기릭 왕의 통치와 콘스탄틴의 망명
아에드는 878년에 살해되었고, 그의 짧은 통치는 대부분의 왕 목록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아에드의 사망 이후부터 그의 조카인 도날드 2세 (돔날 막 콘스탄틴)가 900년에 사망할 때까지 약 20년간의 기록 공백기가 존재하며, 이 시기 아일랜드 연대기에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20]아에드와 도날드 2세 사이의 통치에 대한 기록은 《알바 왕들의 연대기》에서 왜곡되어 있으며, 다른 모든 왕 목록과 일치하지 않는다.[21] 《연대기》는 아에드의 뒤를 에오카이드가 이었다고 기록하지만, 다른 대부분의 목록은 기릭이 아에드 이후에 통치했으며 그를 칭송한다.[22] 기릭은 케네스 맥알핀의 직접적인 친족은 아니지만, 혼인을 통해 왕가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역사학자 알렉스 울프와 아치 던컨은 이 시기 픽트랜드에서 일어난 주요 변화들을 기릭의 통치와 연관 짓기도 한다.[23]
울프는 콘스탄틴과 그의 남동생 도날드가 기릭의 통치 기간 동안 아일랜드에서 망명 생활을 했을 수 있다고 추측한다. 당시 그들의 이모인 마엘 무이레는 아일랜드의 대왕이었던 아에드 핀들리아와 플란 신나 두 사람과 연속으로 혼인한 상태였다.[24]
기릭은 889년에 사망했다. 만약 콘스탄틴이 실제로 망명 중이었다면, 그는 기릭의 사망 이후 사촌인 도날드 2세가 왕위에 오른 픽트랜드로 돌아왔을 것이다. 도날드 2세는 11세기 플란 마이니스트레흐의 기록에서 "다사흐타흐"(Dásachtach|다사흐타흐gla)라는 별칭으로 불렸는데, 이는 폭력적인 광인이나 미친 황소를 의미하는 단어이다.[25]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브리튼과 아일랜드의 바이킹 세력과의 전쟁은 계속되었으며, 도날드 2세는 900년 미언스의 더노터에서 바이킹과 싸우다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26] 그의 뒤를 이어 콘스탄틴 2세가 왕위에 올랐다.[26]
4. 3. 도날드 2세의 사망과 콘스탄틴의 즉위
기릭은 889년에 사망했다. 만약 콘스탄틴이 망명 생활을 했다면, 그는 사촌 도날드 2세가 왕이 된 픽트랜드로 돌아왔을 것이다.[24] 도날드 2세의 평판은 11세기 플란 마이니스트레흐의 저작에 붙은 Dásachtach|다사흐타흐gd라는 별칭에서 엿볼 수 있는데, 이는 폭력적인 미치광이나 미친 황소에게 사용되는 단어이다. 또한 "베르찬의 예언"에서는 그를 "유물을 중히 여기지 않을 거친 자"로 묘사하기도 했다.[25] 도날드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브리튼과 아일랜드의 바이킹 왕들과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그는 900년 미언스의 더노터에서 바이킹과 싸우다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콘스탄틴이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26]5. 바이킹과의 전쟁과 교회 개혁
카우산틴 2세의 통치 초기, 알바 왕국은 외부의 위협에 직면했다. 그의 치세 3년째 되던 해, 바이킹 세력이 던켈드를 포함한 왕국 전역을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28] 이는 당시 기록에서 처음으로 '알바(Alba)'라는 명칭이 사용된 사례이기도 하다. 카우산틴은 이에 맞서 904년 스라흐 에렌(Srath Erenn) 전투에서 침략자들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29]
이러한 외부 위협에 대응하는 동시에, 카우산틴은 왕국 내부의 질서를 확립하고자 노력했다. 906년, 그는 스콘 근처의 '믿음의 언덕'이라 불리는 곳에서 켈라크 주교와 중요한 회동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교회의 법과 규율, 그리고 복음서의 가르침을 지킬 것을 함께 맹세했다.[30] 이 사건은 이후 스코틀랜드 교회의 발전 방향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여겨진다.
5. 1. 던켈드 약탈과 초기 전투

카우산틴 2세의 통치 기간 중 알바 왕들의 연대기에 기록된 가장 초기의 사건은 그의 통치 3년째에 발생한 바이킹의 공격과 던켈드 및 "모든 알바"의 약탈이다. 이 기록은 키나드 막 알핀의 후손들이 다스리던 땅을 '픽타비아'로 묘사했던 연대기에서, 고대 아일랜드어 'Alba'의 라틴어 형태인 '알바니아(Albania)'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된 사례이기도 하다.[28] 이는 이후 알바 왕국을 지칭하는 용어가 된다.
이 공격을 감행한 노르드인들은 902년 더블린에서 추방된 바이킹 세력의 일부이거나, 900년에 카우산틴의 전임자인 도날 2세를 죽인 집단과 동일할 수 있다. 연대기는 이 노르드인들이 '스라흐 에렌(Srath Erenn)'에서 격퇴되었다고 기록한다. 이는 904년 얼스터 연대기의 기록과 일치하는데, 해당 기록에는 포르트리우(Fortriu)인들의 손에 이마르의 손자 이마르와 그의 많은 병력이 사망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이 이마르는 Uí Ímair 왕조의 시조인 이마르와는 다른 인물로 보이며, 그의 손자들 중 세 명은 카우산틴 통치 후반기에 다시 등장한다. 아일랜드 단편 연대기는 이 전투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하며, 알바인들이 단식과 기도를 통해 성 콜룸바의 중재를 구했고, 그 결과 노르드인들을 물리쳤다고 전한다. 904년의 스코트 연대기 기록 역시 이 전투를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29]
연대기에 기록된 다음 사건은 906년에 일어났다. 기록은 다음과 같다: "콘스탄틴 왕과 켈라크 주교는 스콘 왕립 도시 근처의 ''믿음의 언덕''에서 만나 신앙의 법과 규율, 교회와 복음서의 법을 ''pariter cum Scottis''로 지킬 것을 맹세했다."[30] 이 기록의 정확한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라틴어 텍스트에 있는 구절 ''pariter cum Scottis''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번역되어 왔다. 윌리엄 포브스 스킨과 앨런 오어 앤더슨은 이를 "게일족의 관습에 따라"로 읽어야 한다고 제안했는데, 이는 기릭이 세속적인 억압으로부터 교회를 해방시키고 아일랜드 관습을 채택했다는 왕 목록의 주장에 관련된다.[32] 그것은 "게일족과 함께"로 읽혀 동부 해안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서부 해안의 게일족의 참여나 존재를 시사한다.[33] 마지막으로, 그것은 합의가 아니라 "게일족의 관습"을 따르는 의식이었다고 제안한다.[34]
이 모임이 교회를 관할하는 아일랜드 법을 지키기로 합의했다는 생각은 드루임 알반 동쪽 땅의 게일화에 중요한 단계였다는 것을 시사한다.[35] 다른 사람들은 이 의식이 어떤 방식으로 콘스탄틴의 왕권을 지지하여 나중에 스콘에서 열린 왕의 즉위를 예고했다고 제안했다.[36] 또는 켈라크 주교가 기릭에 의해 임명되었다면 이 모임은 왕과 교회 사이의 균열을 치유하기 위한 의도였을 수 있다.[37]
5. 2. 904년 전투와 성 콜룸바 숭배
콘스탄틴 2세의 통치 기간 중 ''알바 왕들의 연대기''에 기록된 가장 이른 사건은 그의 치세 3년에 발생한 바이킹의 공격과 던켈드 및 "모든 알바니아" 약탈이다. 이 기록은 이전까지 키나드의 후손들이 다스리던 땅을 픽타비아로 묘사했던 것과 달리, 라틴어 형태의 고대 아일랜드어 'Alba'인 '알바니아'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사례이다.[28]
이 공격을 감행한 노르드인들은 902년 더블린에서 추방된 이들이거나, 900년에 도날(Domnall)을 물리쳤던 집단과 동일한 세력일 가능성이 있다. ''알바 왕들의 연대기''는 이 북부인들이 스라 에렌(Srath Erenn, 현대의 스트래선)에서 살해되었다고 기록한다. 이는 얼스터 연대기의 기록과도 일치하는데, 얼스터 연대기는 904년에 포트리우(Fortriu) 사람들에 의해 Í마르의 손자 Í마르와 많은 이들이 사망했다고 전한다. 이 Í마르는 Uí Ímair 왕조의 시조인 Í마르의 손자 중 한 명으로, 그의 다른 손자 세 명은 콘스탄틴 통치 후반기에 등장한다. ''아일랜드 단편 연대기''는 이 전투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하며, 알바인들이 단식하고 기도한 후 성 콜룸바의 중재 덕분에 노르드인들을 물리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904년의 ''스코트 연대기'' 기록에도 이 전투에 대한 언급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으나, 내용이 다소 불분명하다.[29] 이 전투에서의 승리는 성 콜룸바에 대한 숭배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의 유물들은 전투에서의 승리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예를 들어, 성 콜룸바의 유물을 보관했던 8세기의 모니머스크 유물함은 이후 전투에서 사용되기도 했다.[27]
5. 3. 906년 스콘 회의와 교회 개혁
알바 왕들의 연대기에 기록된 다음 사건은 906년에 일어났다. 기록은 다음과 같다:"콘스탄틴 왕과 켈라크 주교는 스콘 왕립 도시 근처의 '믿음의 언덕'에서 만나 신앙의 법과 규율, 교회와 복음서의 법을 'pariter cum Scottis'로 지킬 것을 맹세했다."[30]
이 기록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알바 왕들의 연대기''의 라틴어 원문에 나오는 'pariter cum Scottis' 구절은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다. 윌리엄 포브스 스킨과 앨런 오어 앤더슨은 이 구절을 "pariter cum Scottis|파리테르 쿰 스코티스la" 즉, "게일족의 관습에 따라"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기릭 왕이 교회를 세속적 압제에서 해방시키고 아일랜드 관습을 채택했다는 이전 왕 목록의 주장과 연결될 수 있다.[32] 다른 해석으로는 "게일족과 함께"로 번역하여, 동부 해안 주민뿐 아니라 서부 해안의 게일족도 회의에 참여했거나 존재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본다.[33] 마지막으로, 이것이 합의가 아니라 "게일족의 관습"을 따르는 의식이었다는 주장도 있다.[34]
이 회의가 교회를 관할하는 아일랜드 법을 따르기로 합의한 것이라면, 이는 드루임 알반 동쪽 지역의 게일화에 중요한 단계였음을 의미할 수 있다.[35] 다른 학자들은 이 의식이 콘스탄틴의 왕권을 지지하는 성격을 가졌으며, 훗날 스콘에서 왕의 즉위식이 열리게 되는 것을 예고한다고 보기도 한다.[36] 또는 켈라크 주교가 기릭 왕에 의해 임명된 인물이라면, 이 모임은 왕과 교회 사이의 갈등을 봉합하려는 의도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37]
6. 우이 이마르 가문의 복귀와 잉글랜드와의 갈등
910년대에 들어 아일랜드 해 지역에서는 우이 이마르 가문으로 알려진 바이킹 세력의 활동이 다시 활발해졌다. 특히 이마르의 손자로 여겨지는 라그날은 아일랜드에서의 활동을 거쳐 918년경에는 잉글랜드 북부의 요크를 점령하고 왕위를 노리는 등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했다.[42][43]
이러한 바이킹의 위협에 맞서 노섬브리아 북부를 다스리던 에알드레드는 북쪽의 알바 왕 콘스탄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45] 콘스탄틴은 에알드레드와 동맹을 맺고 남하하여 라그날의 군대와 타인 강 유역의 코브리지 근처에서 충돌했다. 코브리지 전투는 양측 모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지만[46], 이 사건은 콘스탄틴이 잉글랜드 북부 문제에 개입하고 바이킹 세력과 직접 대립했음을 보여준다. 이 전투 기록을 통해 당시 알바 왕국의 귀족을 지칭하는 모르매어라는 칭호가 처음으로 문헌에 등장하기도 했다.[47]
thumb; 코브리지하드리아누스 장벽 바로 남쪽에 위치]]
한편, 남쪽의 잉글랜드에서는 웨섹스의 에드워드 1세가 머시아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며 북쪽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44] 920년 혹은 921년경, 에드워드는 콘스탄틴을 포함한 북부의 여러 군주들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우위를 확인하려 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이 시기 기록에서 처음으로 콘스탄틴 왕국의 백성을 '스코타스'(Scottas)라고 칭했다.[48]
924년 에드워드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애설스탄이 혼란을 수습하고 925년 통일된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하면서[49], 콘스탄틴과 알바 왕국은 더욱 강력해진 남쪽의 이웃과 새로운 관계를 정립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6. 1. 우이 이마르 가문의 활동 재개
스코운에서의 사건 이후 약 10년간 기록은 드물지만, 911년 이후 머시아의 애설플래드가 아일랜드인 및 북부 통치자들과 동맹하여 노섬브리아의 아일랜드 해 연안에서 바이킹에 맞섰다는 기록이 있다. ''얼스터 연대기''는 이 시기 울라드 왕국의 아일랜드 함대가 잉글랜드 해안에서 바이킹에게 패배했다고 전한다.[38]914년 이후 아일랜드 해에서의 바이킹 함대 활동 보고가 증가했다. 916년경에는 우이 이마르 가문의 일원인 시트릭 캐흐와 라그날 휘하의 함대가 아일랜드에서 활발하게 움직였다. 이들은 904년에 살해된 이마르의 손자들로 추정된다. 시트릭은 레이스터 군대에 큰 패배를 안겼고, 917년에는 더블린을 다시 점령했다.[42] 이듬해 라그날은 아일랜드 해를 건너 요크에서 왕위를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43]
한편, 잉글랜드에서는 918년 6월 12일 머시아의 애설플래드가 태미스워스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노섬브리아인들과 항복 협상을 진행 중이었으나, 그녀의 죽음으로 협상은 중단되었고, 그녀의 오빠인 에드워드 1세가 머시아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는 데 집중하게 되었다.[44]
thumb; 코브리지하드리아누스 장벽 바로 남쪽에 위치]]
당시 노섬브리아 북부는 에알드레드가 통치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45] 라그날의 침략에 직면한 에알드레드는 북쪽으로 가 카우산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두 사람은 함께 남쪽으로 진군하여 라그날과 맞섰고, 타인 강변의 코브리지 근처, 아마도 데어 스트리트가 강을 건너는 지점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코브리지 전투는 결정적인 승패 없이 끝난 것으로 보이며, 오직 ''알바 왕들의 연대기''만이 카우산틴의 승리를 기록하고 있다.[46]
''얼스터 연대기''는 이 전투에서 알바의 왕이나 모르매어 중 사망자가 없었다고 기록하는데, 이는 '모르매어'라는 칭호가 처음으로 기록된 사례이다. 이는 당시 카우산틴 왕국에 자체적인 주교와 왕실 별장이 있었다는 사실 외에 왕국의 제도에 대한 몇 안 되는 단서 중 하나이다.[47]
코브리지 전투 이후 라그날은 잠시 세력을 재정비했다. 남쪽에서는 에드워드 1세가 빠르게 머시아를 장악하고, 피크 디스트릭트의 배크웰에 버러를 건설하여 북쪽으로의 군사 작전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919년, 라그날의 친척인 시트릭이 이끄는 더블린 군대가 북서부 머시아를 공격했으나 격퇴당했다. 920년 또는 921년, 에드워드는 라그날 및 다른 북부의 왕들과 만났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이 자리에서 왕들이 "에드워드를 아버지이자 영주로 선택했다"고 기록했다. 이 모임에는 카우산틴, 에알드레드, 그리고 스트래스클라이드의 왕 오와인 압 드브날이 참석했다. 이 기록에서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처음으로 카우산틴 왕국의 주민들을 지칭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에서 유래한 단어인 스코타스(Scottas)를 사용했다.[48]
에드워드는 924년에 사망했다. 그의 왕국은 잠시 분열되어 웨스트 색슨족은 앨프웨어드를, 머시아인들은 애설플래드의 궁정에서 자란 애설스탄을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앨프웨어드가 아버지 사망 몇 주 후에 사망하면서, 애설스탄은 925년에 에드워드의 모든 영토를 계승하여 왕위에 올랐다.[49]
6. 2. 코브리지 전투와 라그날과의 대립
914년 이후 아일랜드 해에서 바이킹 함대의 활동 보고가 늘어났다. 916년경에는 이마르의 손자로 알려진 시트릭 캐흐와 라그날 휘하의 함대가 아일랜드에서 매우 활발히 활동했다. 시트릭은 917년에 레이스터 군대에 큰 패배를 안기고 더블린을 다시 점령했다.[42] 이듬해인 918년, 라그날은 아일랜드 해를 건너 요크에서 왕위에 오르려 한 것으로 보인다.[43] 같은 해 6월 12일, 머시아의 애설플래드가 사망하면서 노섬브리아인들과의 항복 협상이 중단되었으며, 그녀의 오빠인 에드워드 1세는 머시아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44]thumb; 코브리지하드리아누스 장벽 바로 남쪽에 위치]]
당시 노섬브리아 북부, 혹은 왕국 전체는 913년부터 에드울프의 아들인 에알드레드가 통치했을 가능성이 높다.[45] 라그날의 침략에 직면한 에알드레드는 북쪽으로 이동하여 콘스탄틴 2세에게 도움을 구했다. 콘스탄틴과 에알드레드는 연합하여 라그날에 맞서 남쪽으로 진격했고, 타인 강 유역, 아마도 데어 스트리트가 강을 건너는 지점인 코브리지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코브리지 전투는 결정적인 승패 없이 끝난 것으로 보인다. 알바 왕들의 연대기만이 콘스탄틴의 승리를 기록하고 있다.[46]
얼스터 연대기는 이 전투에서 알바 왕국의 왕이나 모르매어 중 사망자가 없었다고 전한다. 이 기록은 '모르매어'라는 칭호가 문헌상 처음 등장한 사례로, 당시 콘스탄틴의 왕국이 자체적인 주교와 왕실 별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외에 왕국의 제도에 대한 거의 유일한 단서이다.[47]
코브리지 전투 이후 라그날은 잠시 숨을 돌렸다. 한편 남쪽에서는 에드워드 1세가 빠르게 머시아를 장악했고, 그의 군대가 북쪽을 쉽게 공격할 수 있도록 피크 디스트릭트의 배크웰에 버러(요새화된 정착지)를 건설했다. 919년에는 라그날의 친척인 시트릭이 이끄는 더블린의 군대가 북서부 머시아를 공격했다. 그러나 920년 또는 921년에 에드워드 1세는 라그날 및 다른 북부 왕들과 만났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이 자리에서 참석한 왕들은 "에드워드를 아버지이자 영주로 선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모임에는 콘스탄틴 2세, 에알드레드, 그리고 스트래스클라이드의 왕 오와인 압 드브날도 참석했다. 이 기록에서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콘스탄틴 왕국의 주민들을 묘사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에서 유래한 단어인 '스코타스'(Scotas)를 처음으로 사용했다.[48]
6. 3. 잉글랜드와의 관계 변화: 에드워드, 애설스탄
910년대에 들어 아일랜드 해 주변에서는 바이킹의 활동이 다시 활발해졌다. 916년경 시트릭 캐흐와 라그날이 이끄는 바이킹 함대가 아일랜드에서 세력을 떨쳤고, 라그날은 918년경 요크를 점령하고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43] 같은 해, 머시아를 다스리던 애설플래드가 사망하면서 그녀의 오빠인 웨섹스의 에드워드 1세가 머시아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했다.[44]이러한 상황에서 노섬브리아 북부를 다스리던 에알드레드는 남하하는 라그날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북쪽의 카우산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45] 카우산틴은 에알드레드와 연합하여 라그날의 군대와 타인 강 유역의 코브리지 근처에서 맞섰다. 코브리지 전투의 결과는 명확하지 않지만, ''알바 왕들의 연대기''는 카우산틴이 승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46] 이 전투는 카우산틴이 잉글랜드 북부 세력과 이해관계를 공유하며 협력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 전투 보고에서 카우산틴 왕국의 귀족을 나타내는 모르매어라는 칭호가 처음으로 기록되었다.[47]
thumb; 코브리지하드리아누스 장벽 바로 남쪽에 위치]]
한편, 머시아를 장악한 에드워드 1세는 북쪽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920년 혹은 921년, 에드워드는 피크 디스트릭트의 배크웰에서 카우산틴을 비롯하여 노섬브리아의 에알드레드, 스트래스클라이드의 오와인 압 드브날, 그리고 바이킹 지도자 라그날 등 여러 왕들과 회동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이 자리에서 왕들이 에드워드를 "아버지이자 영주로 선택했다"고 기록했다.[48] 이 기록은 당시 잉글랜드 측의 관점을 반영한 것일 수 있으나, 카우산틴이 에드워드의 우위를 일정 부분 인정했음을 시사한다. 또한 이 기록에서 처음으로 카우산틴의 왕국 백성들을 '스코타스(Scottas)', 즉 스코틀랜드인이라고 칭하는 용어가 사용되었다.[48]
924년 에드워드 1세가 사망하자 그의 왕국은 잠시 분열될 위기에 처했다. 웨스트 색슨족은 앨프웨어드를, 머시아인들은 애설플래드의 궁정에서 자란 애설스탄을 지지했다. 그러나 앨프웨어드가 아버지 사망 몇 주 만에 죽으면서, 애설스탄이 925년 에드워드의 모든 영토를 계승하여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했다.[49] 강력한 통일 잉글랜드 왕국의 등장은 카우산틴과의 관계에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7. 애설스탄의 침공과 브루난부르 전투
927년 이먼트 브리지 회담 이후 잉글랜드 왕국의 애설스탄은 북부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해 나갔다.[51][52] 934년, 애설스탄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알바 왕국을 침공했으며,[54] 이 침공 이후 콘스탄틴은 애설스탄의 궁정에 잠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으나,[55] 양측의 긴장은 해소되지 않았다.
결국 937년, 콘스탄틴은 더블린의 바이킹 왕 올라프 구드프리드손 및 스트라클라이드의 오와인과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를 침공했다.[58] 그러나 이 연합군은 브루난부르 전투에서 애설스탄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58] 이 전투는 당대에 "대 전투"로 불릴 만큼 격렬했으며,[58] 콘스탄틴은 이 전투에서 자신의 아들(클론맥노이스 연대기에 따르면 켈라흐(Cellach)라는 이름)을 잃는 큰 타격을 입었다.[58][59]
7. 1. 934년 애설스탄의 침공과 그 결과
927년 이먼트 브리지 회담 이후 약 7년간 북부 관련 기록은 거의 없다. 애설스탄의 궁정에는 웨일스 왕들이 참석했지만, 콘스탄틴이나 스트래스클라이드의 오와인은 참석하지 않았다. 이러한 기록 부재로 인해 934년 애설스탄이 콘스탄틴을 상대로 북쪽으로 군대를 이끈 정확한 이유는 불분명하다.[53]애설스탄의 침공은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간략하게 기록되었고, 존 오브 워스터, 윌리엄 오브 말름즈베리, 헨리 오브 헌팅던, 시메온 오브 더럼과 같은 후대의 연대기 작가들이 세부 내용을 덧붙였다. 애설스탄의 군대는 934년 5월 28일까지 윈체스터에 집결하기 시작하여 6월 7일에는 노팅엄으로 북진했다. 군대에는 하우웰 다, 이드왈 포엘, 모건 압 오와인 등 여러 웨일스 왕들이 동행했다. 머시아에서 군대는 체스터-르-스트리트로 이동한 뒤, 함대의 지원을 받으며 행군을 계속했다. 이 과정에서 오와인이 패배했으며, 시메온 오브 더럼은 군대가 북쪽으로 던노터와 포트리우까지 진격했고, 함대는 케이스네스(당시 서더랜드를 포함한 더 넓은 지역을 의미했을 수 있음)를 약탈했다고 기록했다. 콘스탄틴의 직접적인 통치력이 그토록 북쪽까지 미쳤을 가능성은 낮으므로, 이 공격은 그의 동맹 세력을 겨냥한 약탈 원정이었을 수 있다.[54]
침공 결과에 대한 기록은 엇갈린다. ''클론맥노이스 연대기''는 "스코틀랜드인들이 [애설스탄]을 큰 승리 없이 돌려보냈다"고 전하는 반면, 헨리 오브 헌팅던은 잉글랜드군이 아무런 저항에 부딪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존 오브 워스터에 따르면, 협상을 통해 문제가 해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콘스탄틴의 아들(아마도 인둘프)이 애설스탄에게 인질로 보내졌고, 콘스탄틴 자신도 애설스탄을 따라 남쪽으로 갔다고 기록했다. 실제로 콘스탄틴은 934년 9월 13일 버킹엄에서 애설스탄과 함께 있었으며, 그곳에서 발행된 헌장에 ''subregulus'', 즉 애설스탄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왕으로 서명했다. 이는 콘스탄틴이 이러한 지위로 기록된 유일한 사례이다.[55] 그러나 콘스탄틴이 실제로 애설스탄의 종주권을 인정했거나 스스로 복종했다고 여겼다는 다른 증거는 없다.
이듬해인 935년, 콘스탄틴은 다시 애설스탄의 궁정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사이렌세스터에서 열린 모임에서 여러 왕들 중 가장 먼저 증인으로 기록되었으며, 오와인과 하우웰 다 역시 외교 문서에 서명했다.[56] 하지만 같은 해 크리스마스에 오와인과 다른 웨일스 왕들은 애설스탄의 궁정에 있었지만, 콘스탄틴은 참석하지 않았다. 불과 2년도 채 되지 않아 콘스탄틴은 매우 다른 상황에서 잉글랜드와 마주하게 된다.[57]
7. 2. 브루난부르 전투와 콘스탄틴의 패배
935년 크리스마스에 스트라클라이드의 왕 오와인과 웨일스 왕들은 애설스탄의 궁정에 참석했지만, 콘스탄틴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는 불과 2년 전 애설스탄에게 복종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던 것과는 대조적인 상황이었다.[57]937년, 콘스탄틴은 오와인, 그리고 더블린의 바이킹 왕 올라프 구드프리드손과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를 침공했다. 이 연합군의 침공은 브루난부르 전투(''둔 브룬데'', ''Dún Brunde'')라는 대규모 전투로 이어졌다. 울스터 연대기는 이 전투를 "크고 슬픈, 끔찍한 전투가 잔인하게 벌어졌다... 그 안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노르드인들이 쓰러졌다. ... 그리고 다른 쪽에서는 많은 색슨족들이 쓰러졌지만, 색슨족의 왕 애설스탄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라고 기록했다.[58]
이 전투는 한 세대 후 잉글랜드에서 "대 전투"로 기억될 만큼 중요했으며,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평소의 간결한 서술 방식을 버리고 영웅적인 시의 형태로 애설스탄의 승리를 상세히 묘사했다. 이 전투에서 당시 60세 가량으로 "백발의 전사"였던 콘스탄틴은 아들을 잃는 비극을 겪었다.[58] 알바 왕의 연대기 역시 콘스탄틴의 아들이 전사했음을 확인해주며, 클론맥노이스 연대기는 그의 이름을 켈라흐(Cellach)라고 기록한다.
브루난부르 전투는 매우 유명하고 치열했지만, 전쟁의 향방을 결정짓지는 못했다. 전투가 벌어진 정확한 위치는 아직까지 불확실하며 여러 후보지가 제시되었는데, 그중 위럴 반도의 브롬보로가 가장 유력한 장소로 여겨진다.[59]
브루난부르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애설스탄의 영향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울스터 연대기에서 "서방 세계의 존엄성의 기둥"이라 칭송받던 애설스탄은 939년 10월 27일에 사망했고, 그의 동생 에드먼드 1세가 18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다. 애설스탄이 죽자마자 1년도 채 되지 않아, 아일랜드에서 돌아온 올라프 구드프리드손이 노섬브리아와 머시아의 데인로 지역을 점령하면서 애설스탄이 구축했던 왕국은 빠르게 흔들렸다. 에드먼드 1세는 콘스탄틴의 남은 통치 기간 동안 이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는 데 힘써야 했다.[60]
8. 퇴위와 말년
940년대 초, 60대 후반 또는 70대에 접어든 콘스탄틴 2세는 왕위에서 물러났다. 당시 알바 왕국의 왕위 계승 관습은 명확하지 않았으나, 케네스 막 알핀의 성인 후손이 선호되었다. 콘스탄틴의 아들 인둘프는 아직 어렸고, 확실한 후계자는 조카 말콤 1세였다. 콘스탄틴의 퇴위가 자발적이었는지, 혹은 장성한 조카 말콤 1세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불분명하며, 11세기의 ''베르찬의 예언''과 같은 기록은 비자발적인 퇴위였음을 시사한다.[63]
943년, 콘스탄틴은 결국 왕위를 말콤 1세에게 넘기고 세인트 앤드루스 교회로 추정되는 수도원으로 은퇴하여 수도원장으로 불렸다.[64] 그는 952년에 사망했으며,[67] 그의 통치는 이후 데이비드 혁명 이전까지 약 2세기 동안 유지될 스코틀랜드 왕국의 기틀을 마련하고 교회 개혁을 이끈 중요한 시기로 평가받는다.[68]
8. 1. 콘스탄틴의 퇴위와 수도원 생활
940년대 초, 콘스탄틴은 60대 후반이나 70대에 접어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알바 왕국은 역사가 길지 않아 왕위 계승에 대한 명확한 관습이 확립되지 않았지만, 픽트족과 아일랜드의 선례를 보면 케네스 막 알핀의 후손 중 성인 남성 후계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콘스탄틴의 아들 인둘프는 927년에 세례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아 940년대 초에는 왕위에 오르기에는 아직 어렸다. 따라서 확실한 상속자는 콘스탄틴의 조카인 말콤 1세였다. 말콤은 늦어도 901년 이전에 태어났으므로, 940년대에는 이미 장년이었고 왕위를 계승하기를 원했을 수 있다. 11세기에 쓰인 운문 역사서 ''베르찬의 예언''은 콘스탄틴의 퇴위가 자발적인 결정이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결국 콘스탄틴은 943년에 왕위에서 물러나 수도원으로 들어갔고, 말콤에게 왕국을 넘겨주었다.[63]콘스탄틴의 퇴위가 강제적이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메츠의 카트로에의 ''생애''와 ''베르찬의 예언''은 그를 독실한 왕으로 묘사한다. 그가 은퇴하여 수도원장으로 불렸던 수도원은 아마도 세인트 앤드루스 교회였을 것이다. 이 교회는 콘스탄틴의 통치 기간 동안 재건되었으며, 당시 개혁적인 켈리 데 (쿨디) 운동의 중심지였다. 켈리 데는 이후 12세기에 프랑스에서 새로운 수도회들이 들어오기 전까지 알바 왕국 전역의 많은 수도원을 관리했다.[64]
콘스탄틴이 은퇴한 지 7년 후, ''알바 왕들의 연대기''는 다음과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 "말콤 1세는 티스 강까지 잉글랜드를 약탈했고, 많은 사람들과 많은 가축 무리를 빼앗았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이것을 알비도소룸의 습격, 즉 나이닌디라고 불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콘스탄틴이 이 습격을 벌여 말콤 1세에게 왕위를 일주일 동안 주어 잉글랜드를 방문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고 말한다. 사실, 말콤 1세가 습격을 벌였지만, 내가 말했듯이 콘스탄틴이 그를 부추겼다."[65]
역사가 울프는 콘스탄틴과 이 습격을 연결하는 이야기가 현재는 사라진 사가나 시에서 유래한 후대의 추가 내용일 수 있다고 추측한다.[66]
콘스탄틴은 952년에 사망했으며, 아일랜드 연대기는 그의 죽음을 성직자들의 기록에 포함시켰다. 그의 아들 인둘프는 말콤 1세가 죽은 후 왕위에 올랐다. 콘스탄틴의 직계 후손 중 알바의 왕위에 오른 마지막 인물은 그의 증손자인 콘스탄틴 3세 (Constantín mac Cuiléin)였다. 다른 아들 한 명은 브루난부르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우스터의 존에 따르면 아믈라입 막 고프라이드가 콘스탄틴의 딸과 결혼했다고 한다. 콘스탄틴에게 다른 자녀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의 아내나 아내들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67]
콘스탄틴 시대에 형성된 왕국의 기본적인 틀은 12세기 데이비드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의 교회 개혁과 더불어, 그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유산은 이후 2세기 동안 지속될 새로운 형태의 스코틀랜드 왕권을 창조한 것이었다.[68]
8. 2. 콘스탄틴의 사망과 유산
940년대 초, 콘스탄틴은 60대 후반이나 70대에 접어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알바 왕국은 역사가 길지 않아 명확한 왕위 계승 규칙이 확립되지 않았지만, 픽트족과 아일랜드의 선례를 따라 케네스 막 알핀의 후손 중 성인 남성이 왕위를 잇는 경향이 있었다. 콘스탄틴의 살아남은 아들 인둘프는 940년대 초에는 왕위에 오르기에는 너무 어렸을 가능성이 크며(927년 세례 추정), 확실한 후계자는 조카인 말콤 1세였다. 말콤 1세는 901년 이전에 태어났으므로 940년대에는 이미 장성하여 왕위를 기대하고 있었을 수 있다. 11세기에 쓰인 운문 역사서 ''베르찬의 예언''은 콘스탄틴의 퇴위가 자발적인 결정이 아니었음을 시사하지만, 자의였든 타의였든 콘스탄틴은 943년에 왕위에서 물러나 수도원으로 들어갔고, 말콤 1세에게 왕국을 넘겨주었다.[63]콘스탄틴의 퇴위가 강제적이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메츠의 카트로에의 ''생애''와 ''베르찬의 예언''은 그를 신앙심 깊은 왕으로 묘사한다. 그가 은퇴하여 수도원장으로 불렸던 수도원은 세인트 앤드루스 교회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교회는 그의 통치 기간에 재건되었고, 개혁적인 켈리 데(쿨디) 운동 세력에게 주어졌다. 켈리 데는 이후 12세기에 프랑스에서 새로운 교단이 들어와 대체될 때까지 알바 왕국 전역의 많은 수도원을 관리했다.[64]
7년 후, ''알바 왕들의 연대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말콤 1세는 티스 강까지 잉글랜드를 약탈했고, 많은 사람들과 많은 가축 무리를 빼앗았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이것을 알비도소룸의 습격, 즉 나이닌디라고 불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콘스탄틴이 이 습격을 벌여 말콤 1세에게 왕위를 일주일 동안 주어 잉글랜드를 방문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고 말한다. 사실, 말콤 1세가 습격을 벌였지만, 내가 말했듯이 콘스탄틴이 그를 부추겼다.''[65]
역사학자 울프는 콘스탄틴과 이 습격을 연결하는 이야기가 후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현재는 소실된 사가나 시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66]
콘스탄틴은 952년에 사망했으며, 아일랜드 연대기는 그의 죽음을 성직자들 사이의 일로 기록했다. 그의 아들 인둘프는 말콤 1세 사후 왕위에 올랐다. 콘스탄틴의 확실한 후손 중 마지막으로 알바의 왕이 된 인물은 증손자인 콘스탄틴 3세(Constantín mac Cuiléin)였다. 다른 아들 한 명은 브루난부르 전투에서 사망했으며, 우스터의 존에 따르면 아믈라입 막 고프라이드가 콘스탄틴의 딸과 결혼했다고 한다. 콘스탄틴에게 다른 자녀가 더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의 아내나 아내들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67]
콘스탄틴 시대에 형성된 왕국의 구조는 12세기 데이비드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그의 교회 개혁과 더불어, 그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유산은 이후 2세기 동안 지속될 새로운 형태의 스코틀랜드 왕권을 창출했다는 점이다.[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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