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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샤마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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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코샤마인 전쟁은 1457년, 일본인에 대항하여 아이누가 일으킨 무장 봉기이다. 홋카이도 하코다테시 시노리에서 일본인 대장장이와 아이누 남성 간의 갈등이 발단이 되었다. 오시마반도 수령 코샤마인을 중심으로 아이누가 봉기하여 일본인과 전투를 벌였으나, 다케다 노부히로에 의해 코샤마인이 사망하면서 진압되었다. 이 전쟁은 마쓰마에 번 형성의 기초가 되었으며, 이후에도 아이누와 일본인의 항쟁이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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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샤마인 전쟁
개요
명칭고샤마인의 난
다른 이름도난 12관의 싸움
일본어 명칭コシャマインの戦い (Koshamain no tatakai)
위치도난 12관 (현재의 에조 남부)
교전 세력
전투 주체아이누 (지도자: 고샤마인)
와진 (도난 12관의 영주)
주요 인물
아이누 측고샤마인
와진 측불명
시기
발생 시기1457년
원인
원인와진의 아이누에 대한 차별과 착취
전개
주요 사건고샤마인이 이끄는 아이누의 도난 12관 공격
와진의 방어 및 진압 시도
결과
결과와진의 승리, 아이누의 세력 약화
영향
영향와진의 에조 남부 지배 강화, 아이누와 와진 간의 갈등 심화
참고 문헌
참고 문헌고샤마인의 싸움에 관한 『신라지기록』의 사료적 검토 (쓰쿠바 대학교)
아이누 땅의 정복: 일본 확장의 생태와 문화, 1590-1800

2. 배경

2. 1. 사회적 배경

2. 2. 정치적 배경

2. 3. 갈등의 심화

3. 발단

3. 1. 시노리에서의 살인 사건

3. 2. 아이누 남성의 정체

4. 전개

1457년(고쇼 3년, 조로쿠 원년), 오닌의 난이 일어나기 정확히 10년 전에 일어난, 일본인에 대한 아이누의 무장 봉기이다.[3] 홋카이도하코다테시 센키자와 지소 관할 구역에 해당하는 시노리 (시코시, 시노리, 시호)의 일본인 대장장이와 손님인 아이누 남성 간의 말다툼이 발단이 되었다.[3] 오시마반도 동부의 수령 '''코샤마인'''(고사마견 (코사마이누라고도 불림)를 중심으로 한 아이누가 봉기하여 일본인을 크게 괴롭혔으나, 결국 평정되었고, 마쓰마에번 형성의 기초가 되었다.

도난 12관


제철 기술을 갖지 못했던 아이누는 철 제품을 무역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명나라나 오시마반도에서 도난으로 진출한 일본인(와토, 도난 12관 등을 참조)과 거래를 했다.[3] 그러나 1449년 토목의 변 이후, 명나라의 북방 민족에 대한 영향력이 저하되면서 명나라와의 무역이 급격히 쇠퇴하고, 일본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 한편, 안도 요시키의 자해로 안도씨 본가가 멸망하고, 도난 지역에 정치적 공백이 생겼다.[3]

그곳에서 아이누 남성 "옷카이"가 시노리의 대장장이에게 칼(마키리)을 주문했는데, 품질과 가격에 대해 다툼이 발생했다.[3] 화가 난 대장장이가 그 칼로 아이누 남성을 찔러 죽인 것이 이 전쟁의 발단이다.[3] "옷카이"에 대해서는 『신라지기』에서는 "을해(오쓰가이)"라고 표기되어 아이누어의 okkay(옷카이)에 해당한다. 『마쓰마에 연대기』에서는 "을해"를 "소년 이"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또한, 17세기 초 마쓰마에에 내항한 이탈리아인 안젤리스도 "소년"이라고 번역했으며, 같은 시기에 기록된 『마쓰마에의 언』에도 "와란베의 일"이라고 적혀 있다.[3] 『마쓰마에의 언』이 가장 오래된 옷카이를 기록한 문헌이며, 채집지가 도난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옷카이=소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3]

1456년 (고쇼 2년)에 발생한 이 살인 사건 이후, 수령 코샤마인을 중심으로 아이누가 단결하여 1457년 5월 일본인에게 전쟁을 시작했다. 이시카리의 무카와에서 시리베시의 요이치까지 넓은 범위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사건 현장인 시노리에 집결한 아이누 군은 고바야시 료케이의 관을 함락시켰다. 아이누 군은 더욱 진격을 계속하여, 일본인의 거점인 하나자와와 시모베츠를 제외한 도난 12관 중 10곳을 함락시켰지만,[3] 1458년 (조로쿠 2년)에 하나자와 관주 가키자키 스에시게가 파견한 스에시게 가신 다케다 노부히로에 의해 시치리하마에서 코샤마인 부자가 활로 사살되면서 아이누 군은 붕괴되었다.[3]

이 사건 전년까지 도난에 체류했던 안도 마사스에의 동향 등에서, 사건의 배경에 당시 북오우 지방에서의 난부 씨와 안도 씨의 항쟁을 보는 이리마다 노리오의 견해와, 다케다 노부히로와 게시마 이에마사에 의한 에조치 통일 과정을 복원하려는 고바야시 마코토의 설이 있다.[4]

아이누와 일본인의 항쟁은 이후에도 1세기에 걸쳐 계속되었지만, 최종적으로는 다케다 노부히로를 중심으로 한 일본인 측이 지배권을 얻었다. 그러나 노부히로의 후손에 의해 마쓰마에 번이 성립된 후에도 아이누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샤쿠샤인의 전쟁, 쿠나시리-메나시의 싸움).

4. 1. 아이누의 봉기

4. 2. 도난 12관 함락

4. 3. 코샤마인의 죽음과 아이누의 패배

5. 결과 및 영향

1457년 (고쇼 3년, 조로쿠 원년), 오닌의 난이 일어나기 10년 전에 발발한 아이누족의 무장 봉기이다. 홋카이도 하코다테시 센키자와 지소 관할 구역에 해당하는 시노리에서 일본인 대장장이와 아이누 남성 간의 말다툼이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3]

제철 기술이 없었던 아이누는 철 제품을 무역에 의존했는데, 1449년 토목의 변 이후 명나라와의 무역이 쇠퇴하면서 일본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 한편, 안도 요시키의 자해로 안도씨 본가가 멸망하면서 도난 지역에 정치적 공백이 발생했다.[3] 이러한 상황에서 시노리의 대장장이에게 칼을 주문한 아이누 남성 "옷카이"가 품질과 가격 문제로 다툼을 벌이다 살해당했다.[3]

1456년 (고쇼 2년) 발생한 이 사건을 계기로 오시마반도 동부의 수령 '''코샤마인'''(고사마견 (코사마이누라고도 불림)을 중심으로 아이누족이 단결하여 1457년 5월 일본인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이시카리의 무카와에서 시리베시의 요이치까지 넓은 범위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고바야시 료케이의 관을 비롯한 도난 12관 중 10곳이 함락되었다.[3] 그러나 1458년 (조로쿠 2년) 가키자키 스에시게가 파견한 다케다 노부히로에 의해 코샤마인 부자가 활로 사살되면서 아이누 군은 붕괴되었다.[3]

이 사건의 배경에는 당시 북오우 지방에서 벌어진 난부 씨와 안도 씨의 항쟁이 있었다는 견해[4]와 다케다 노부히로와 게시마 이에마사에 의한 에조치 통일 과정의 일환이었다는 설[4]이 존재한다.

이후에도 아이누와 일본인의 항쟁은 1세기 동안 이어졌지만, 결국 다케다 노부히로를 중심으로 한 일본인 측이 지배권을 확립했다. 하지만 마쓰마에 번 성립 이후에도 샤쿠샤인의 전쟁, 쿠나시리-메나시의 싸움과 같은 아이누의 대규모 봉기가 발생했다.

1994년 (헤이세이 6년)부터 매년 7월 상순, 홋카이도 가미노쿠니정의 이오산에서 아이누와 일본인 유지들이 참여하는 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5. 1. 마쓰마에 번의 성립

5. 2. 아이누와 일본인의 관계

5. 3. 위령제

6. 역사적 평가 및 의의

코샤마인 전쟁은 1457년(고쇼 3년, 조로쿠 원년), 오닌의 난이 일어나기 정확히 10년 전에 일어난, 일본인에 대한 아이누의 무장 봉기이다.[3] 홋카이도하코다테시 센키자와 지소 관할 구역에 해당하는 시노리 (시코시, 시노리, 시호)의 일본인 대장장이와 손님인 아이누 남성 간의 말다툼이 발단이 되었다.[3] 오시마반도 동부의 수령 '''코샤마인'''(고사마견 (코사마이누라고도 불림)을 중심으로 한 아이누가 봉기하여 일본인을 크게 괴롭혔으나, 결국 평정되었고, 마쓰마에번 형성의 기초가 되었다.[3]

제철 기술을 갖지 못했던 아이누는 철 제품을 무역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명나라나 오시마반도에서 도난으로 진출한 일본인(와토, 도난 12관 등을 참조)과 거래를 했다.[3] 그러나 1449년 토목의 변 이후, 명나라의 북방 민족에 대한 영향력이 저하되면서 명나라와의 무역이 급격히 쇠퇴하고, 일본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 한편, 안도 요시키의 자해로 안도씨 본가가 멸망하고, 도난 지역에 정치적 공백이 생겼다.[3]

이러한 상황에서 시노리의 대장장이에게 칼(마키리)을 주문한 아이누 남성 "옷카이"와 대장장이 사이에 품질과 가격 문제로 다툼이 발생했고, 대장장이가 아이누 남성을 칼로 찔러 죽이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3] 1456년 (고쇼 2년)에 발생한 이 살인 사건 이후, 수령 코샤마인을 중심으로 아이누는 단결하여 1457년 5월 일본인에게 전쟁을 시작했다.[3] 이시카리의 무카와에서 시리베시의 요이치까지 넓은 범위에서 전투가 벌어졌다.[3] 아이누 군은 고바야시 료케이의 관을 함락시키고, 일본인의 거점인 하나자와와 시모베츠를 제외한 도난 12관 중 10곳을 함락시키는 등 일본인들을 크게 위협했다.[3] 그러나 1458년 (조로쿠 2년)에 가키자키 스에시게가 파견한 스에시게 가신 다케다 노부히로에 의해 코샤마인 부자가 활로 사살되면서 아이누 군은 붕괴되었다.[3]

이 사건 전년까지 도난에 체류했던 안도 마사스에의 동향 등에서, 사건의 배경에 당시 북오우 지방에서의 난부 씨와 안도 씨의 항쟁을 보는 이리마다 노리오의 견해와, 다케다 노부히로와 게시마 이에마사에 의한 에조치 통일 과정을 복원하려는 고바야시 마코토의 설이 있다.[4]

아이누와 일본인의 항쟁은 이후에도 1세기에 걸쳐 계속되었지만, 최종적으로는 다케다 노부히로를 중심으로 한 일본인 측이 지배권을 얻었다. 그러나 노부히로의 후손에 의해 마쓰마에 번이 성립된 후에도 아이누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샤쿠샤인의 전쟁, 쿠나시리-메나시의 싸움).

1994년 (헤이세이 6년)부터 매년 7월 상순, 홋카이도 가미노쿠니정의 이오산에서, 아이누와 일본인의 유지가 참여하는 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6. 1. 중세 일본-아이누 관계사에서의 중요성

6. 2. 홋카이도 역사에 미친 영향

참조

[1] 웹사이트 https://tsukuba.repo[...] University of Tsukuba 2016-11-13
[2] 서적 The Conquest of Ainu Lands: Ecology and Culture in Japanese Expansion,1590-1800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3] 문서 평산(2018)p.88
[4] 문서 입간전타『북해의 내해세계』(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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