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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키쓰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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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키쓰의 난은 1441년, 아카마쓰 미쓰스케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를 암살한 사건이다. 아카마쓰 가문의 몰락과 요시노리의 공포 정치, 그리고 유우키 전투와 같은 사건들을 배경으로 한다.

난의 경과는 요시노리의 암살, 교토의 혼란, 막부의 대응, 아카마쓰 가문 토벌로 이어진다. 이 사건은 아시카가 쇼군의 권위 실추, 슈고 다이묘 세력 강화, 아카마쓰 가문의 재흥 시도와 좌절 등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가키쓰의 난은 일본 역사에서 쇼군 권력 약화와 전국 시대의 혼란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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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키쓰의 난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가키쓰의 난 발발 배경도
가키쓰의 난 발발 배경도
시기가키쓰 원년(1441년) 6월 ~ 9월
장소교토 및 하리마국
원인아카마쓰 미쓰스케의 아시카가 요시노리 암살
결과아시카가 요시노리 피살, 아카마쓰 씨 토벌
교전 세력
반군아카마쓰 씨
정부군무로마치 막부
지휘관 및 지도자
아카마쓰 씨아카마쓰 미쓰스케
아카마쓰 노리야스
아시카가 요시타카
무로마치 막부아시카가 요시노리
야마나 모치토요
호소카와 모치쓰네
아카마쓰 사다무라
아카마쓰 미쓰마사

2. 전사(前史)

아카마쓰 씨는 가마쿠라 시대 말기 아카마쓰 노리무라(엔신)가 고다이고 천황의 격문에 응하여 거병, 가마쿠라 막부 타도에 크게 공헌하여 슈고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은상에 대한 불만으로 남북조 시대의 쟁란에서는 초대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협력하여 무로마치 막부 창설의 공신이 되었고, 하리마 외에 비젠, 미사카를 슈고로서 영유하며 막부의 시시키 중 하나가 되었다.[1]

1427년(오에이 34년) 아카마쓰 미쓰스케가 아카마쓰 씨의 가독을 상속했을 때, 전 쇼군(4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는 하리마를 빼앗아 총신인 아카마쓰 모치사다 (미쓰스케의 종형제)에게 주려 했다. 이에 미쓰스케가 교토의 저택을 불태우고 영지로 철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1] 요시모치는 격노하여 미쓰스케를 치려 했지만 막부의 중신들은 이에 반대했다.[1] 그 와중에 모치사다는 쇼군 측실과의 밀통이 발각되어 처형당했고, 미쓰스케는 사면되어 3개국의 슈고직을 상속받았다.[1]

아시카가 요시노리는 1428년, 후계자 없이 사망한 아시카가 요시모치의 뒤를 이어 '제비뽑기'로 6대 쇼군에 취임했다. 초기에는 유력한 슈고 다이묘들의 의견을 따랐지만, 하타케야마 미쓰이에 등이 사망한 후 점차 독단적인 통치를 강화했다.[1]

요시노리는 쇼군 권력 강화를 위해 시바 씨, 하타케야마 씨 등 유력 슈고 다이묘 가문의 가독 상속에 개입했다. 1439년 에이쿄의 난을 일으켜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모치우지를 멸망시켰다. 히에이 산 엔랴쿠지와도 대립하여 굴복시켰지만, 승려들이 곤폰추도를 불태우고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1]

요시노리는 고다이고 천황 계통인 고난초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후시미노미야 사다나리 친왕의 일기 『칸몬고키』에는 요시노리가 "남방(고난초)의 계통을 끊어 버리겠다"고 언급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강압적인 통치로 인해 요시노리의 통치기는 "만인공포"(칸몬고키 에이쿄 7년 2월 8일 조)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1]

2. 1. 아카마쓰 가문의 융성과 몰락

아카마쓰 씨는 가마쿠라 시대 말기 아카마쓰 노리무라(엔신)가 고다이고 천황의 격문에 응하여 거병, 가마쿠라 막부 타도에 크게 공헌하여 슈고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은상에 대한 불만으로 남북조 시대의 쟁란에서는 초대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협력하여 무로마치 막부 창설의 공신이 되었고, 하리마 외에 비젠, 미사카를 슈고로서 영유하며 막부의 시시키 중 하나가 된 가문이다.[1]

오에이 34년(1427년) 아카마쓰 미쓰스케가 아카마쓰 씨의 가독을 상속했을 때, 전 쇼군(4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는 하리마를 빼앗아 총신인 아카마쓰 모치사다 (미쓰스케의 종형제)에게 주려 했다. 이에 미쓰스케가 교토의 저택을 불태우고 영지로 철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1] 요시모치는 격노하여 미쓰스케를 치려 했지만 막부의 중신들은 이에 반대했다.[1] 그 와중에 모치사다는 쇼군 측실과의 밀통이 발각되어 처형당했고, 미쓰스케는 사면되어 3개국의 슈고직을 상속받았다.[1]

2. 2. 아시카가 요시노리의 공포 정치

아시카가 요시노리는 1428년, 후계자 없이 사망한 아시카가 요시모치의 뒤를 이어 '제비뽑기'로 6대 쇼군에 취임했다. 초기에는 유력한 슈고 다이묘들의 의견을 따랐지만, 하타케야마 미쓰이에 등이 사망한 후 점차 독단적인 통치를 강화했다.[1]

요시노리는 쇼군 권력 강화를 위해 시바 씨, 하타케야마 씨 등 유력 슈고 다이묘 가문의 가독 상속에 개입했다. 1439년 에이쿄의 난을 일으켜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모치우지를 멸망시켰다. 히에이 산 엔랴쿠지와도 대립하여 굴복시켰지만, 승려들이 곤폰추도를 불태우고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1]

요시노리는 고다이고 천황 계통인 고난초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후시미노미야 사다나리 친왕의 일기 『칸몬고키』에는 요시노리가 "남방(고난초)의 계통을 끊어 버리겠다"고 언급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강압적인 통치로 인해 요시노리의 통치기는 "만인공포"(칸몬고키 에이쿄 7년 2월 8일 조)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1]

3. 난의 경과

1441년(가키쓰 원년) 6월 24일, 아카마쓰 미쓰스케의 아들 노리야스는 겟쇼 전투 승전 축하 연회를 열어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를 초대했다.[1] 이 연회에는 간레이 호소카와 모치유키를 비롯한 여러 수호 다이묘들과 공가의 오기마치산조 사네마사 등이 참석했다.

사루가쿠 공연 중 갑작스러운 소동과 함께 갑옷을 입은 무사들이 난입하여 요시노리를 살해했다.[2] 오오치 모치요, 교고쿠 다카즈 등이 저항했지만, 야마나 히데키와 교고쿠 다카즈는 즉사하고 오오치 모치요는 중상을 입고 며칠 뒤 사망했다.[3][4][5] 아카마쓰 씨 가신이 쇼군 토벌이 목적이며 다른 사람에게는 해를 끼칠 의사가 없음을 알리자 소란이 가라앉았다.

아카마쓰 미쓰스케는 아시카가 요시노리에 의해 영지를 몰수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고, 이는 자업자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6]

3. 1. 쇼군 암살

1441년 (가키쓰 원년) 6월 24일, 아카마쓰 미쓰스케의 아들 노리야스는 겟쇼 전투의 승전 축하 연회를 열어 마쓰바야시(아카마쓰 씨의 전통 연능)를 헌상하고 싶다며, 니시노토인 니조에 있는 저택으로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를 초대했다.[1] 『가키키』에 따르면, "오리의 새끼가 많이 태어났다"고 초대했다고 한다.

이 연회에는 간레이 호소카와 모치유키, 하타케야마 모치나가, 야마나 모치토요, 잇시키 노리치카, 호소카와 모치쓰네, 오오치 모치요, 교고쿠 다카즈, 야마나 히데키, 호소카와 모치하루, 아카마쓰 사다무라 등 요시노리의 개입으로 가독을 상속한 다이묘들이 참석했다. 그 외에 공가의 오기마치산조 사네마사(오기마치산조 킨토모의 아버지, 요시노리의 정실오기마치산조 윤코의 형) 등도 함께했다.

일행이 사루가쿠를 관람하던 중, 갑자기 이 풀려나고 안쪽에서 둔탁한 굉음이 들렸다. 요시노리가 "무슨 일인가"라고 묻자, 곁에 있던 오기마치산조 사네마사는 "천둥일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2] 그 직후, 미닫이가 열리고 갑옷을 입은 무사 수십 명이 연회장에 난입하여 요시노리를 살해했다. 요시노리의 목을 베어낸 것은 아사카 유키히데라고 전해진다.

연회장은 순식간에 피바다가 되었고, 대부분의 수호 다이묘와 근습들은 즉시 자리를 피했다.[3] 저항한 것은 수호 다이묘인 오오치 모치요, 교고쿠 다카즈, 근습인 호소카와 모치하루, 야마나 히데키, 주자 중의 토야마 씨, 공가의 오기마치산조 사네마사뿐이었다.[4] 야마나 히데키와 교고쿠 다카즈는 즉사했고, 오오치 모치요도 중상을 입고 며칠 뒤 사망했다. 호소카와 모치하루는 팔 하나가 잘렸고, 오기마치산조 사네마사는 헌상된 칼을 잡고 저항했지만 베여 쓰러졌다.[5]

뜰에 대기하고 있던 쇼군 경호의 주자와 아카마쓰 씨의 무사 사이에 칼부림이 벌어졌고, 담을 넘어 도망치려는 다이묘들로 저택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카마쓰 씨의 가신이 쇼군을 토벌하는 것이 본래의 뜻이며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의사가 없음을 알리자 소란이 가라앉았고, 부상자를 옮기고 여러 다이묘는 퇴출했다.

아카마쓰 미쓰스케는 아시카가 요시노리에 의해 멀어졌고, 1437년(에이쿄 9년)에는 하리마, 미마사카의 영지를 몰수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1440년(에이쿄 12년) 3월에는 셋츠의 아카마쓰 요시마사(미쓰스케의 동생) 영지가 몰수되어 아카마쓰 씨 서류인 아카마쓰 사다무라에게 주어졌다. 이 때문에 5월 경 미쓰스케는 병을 핑계로 출사하지 않았다.

사다나리 친왕은 『간몬일기』에서 "아카마쓰를 토벌하려는 계획이 드러나서 (아카마쓰를) 토벌했다고 한다"며, "자업자득의 결과로, 무력하구나. 쇼군이 이와 같이 개죽음을 맞이한 것은 예로부터 그 예를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평했다.[6]

3. 2. 교토의 혼란과 막부의 대응

호소카와 모치유키


아시카가 요시노리 암살 직후, 간레이 호소카와 모치유키는 즉시 조정에 참내하여 이 변고를 알렸다.[4] 같은 날 밤, 요시노리의 아들 11명 중 당시 살아있던 8명은 적자 센야차마루(후의 아시카가 요시카쓰)가 있던 만도코로(정소) 집사 이세 사다쿠니의 저택에 모였다. 이들은 각각 유모에게 맡겨져 있었으나, 아카마츠 씨가 납치하여 차기 쇼군으로 옹립할 것을 경계하여 센야차마루의 유모인 사다쿠니의 허락을 받아 감시 하에 두었다.[5]

그러나 여러 다이묘들은 저택으로 도망쳐 돌아가 문을 닫고 칩거했다. 이들은 아카마츠 씨가 이렇게 중대한 사건을 일으킨 이상, 반드시 동조하는 다이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형세를 관망했다. 사다나리 친왕 또한 "여러 다이묘"가 관여한 것이 아니냐고 추측했다. 하지만 요시노리 암살은 아카마츠 씨의 단독 범행이었다. 미쓰스케 등 아카마츠 일족은 곧 막부군의 토벌군이 올 것을 예상하고 저택에서 자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밤이 되어도 막부군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영지로 돌아가 저항하기로 결심하고, 저택에 불을 지른 뒤 쇼군의 목을 창 끝에 내걸고 대열을 지어 교토를 떠났다. 이를 방해하는 다이묘는 아무도 없었다.

다음 25일, 모치유키는 평정을 열고 요시노리의 적자 센야차마루(아시카가 요시카쓰)를 차기 쇼군으로 결정하고, 요시노리 시대에 실각한 사람들을 사면했다.

26일, 요시카츠를 사다쿠니의 저택에서 무로마치도노로 옮겼다. 이때 요시카츠의 동생 6명도 함께 무로마치도노로 옮겨졌다(『겐나이키』).[5]

모치유키는 하리마로 토벌군 파견을 계획했지만, 강압적인 쇼군이 사망한 것에 여러 다이묘들이 혼란에 빠져 토벌군은 쉽게 편성되지 않았다. 토지인에서 열린 요시노리의 장례식에는 모치유키만 참석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겐나이키』).[6] 게다가 미쓰스케로부터 모치유키에게 도전장까지 보내졌다.[7]

쇼군이 살해되었을 때 간레이임에도 싸우지 않고 가장 먼저 도망치려 했던 모치유키의 모습은 비웃음을 샀고, 모치유키가 미쓰스케와 결탁하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러나 이러한 막부의 늦은 대응에는 아카마츠 씨에게 유리하도록 사태를 수습하려 했던 모치유키의 의도가 있었다는 시각도 있다.

3. 3. 아카마쓰 가문 토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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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마치 막부가 아카마쓰 가문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호소카와 모치토요, 아카마쓰 사다무라, 아카마쓰 미쓰마사의 대군은 셋쓰에서, 야마나 모치토요 등 야마나 일족은 다지마, 호키에서 하리마, 비젠, 미마사카로 침공했다.

7월 11일, 대군이 출발했지만, 사실상의 총대장이었던 야마나 모치토요는 좀처럼 교토를 움직이지 않았다. 그 사이에 모치토요 휘하의 병사들이 '진립'이라고 칭하며 낙중(교토)의 토쿠라·전당포를 습격하여 재물을 강탈했다. 게다가 간레이·호소카와 모치유키의 군사들에게서 강매를 하는 문제를 일으켜, 며칠이 지나서야 모치토요가 사과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7월 초순, 야마나 노리키요가 호키에서 미마사카로 침입했다. 이 지역의 구니진은 거의 저항하지 않았고, 미마사카는 야마나 세력에게 제압되었다.

호소카와 모치토요, 아카마쓰 사다무라 등의 대군은 셋쓰국 니시노미야까지 진출했고, 7월 25일에 아카마쓰 노리야스는 막부군에게 야습을 가했지만, 아군끼리 싸움이 일어나 퇴각했다(고미쇼 합전). 대군은 전의가 낮았고, 다지마 쪽의 야마나 모치토요가 움직이지 않아 진군을 멈춰버렸다.

7월 26일, 모치유키는 아카마쓰 토벌을 위한 치벌윤지를 조정에 주청했다.[9] 하지만, 조정에서는 아시카가 요시노리의 공포 정치를 끝낸 아카마쓰 미쓰스케에 대한 동정이 강했고, 윤지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9] 그 때문에, 모치유키는 에이쿄의 난에서 모치우지 토벌 윤지의 선례를 내세워 조정에 윤지를 탄원했다.[9] 공가 중에는 미쓰스케를 동정하거나, 아카마쓰 씨는 쇼군가의 가신이기 때문에 토벌하는 데 윤지는 필요 없다고 반대하는 논의도 있었지만, 고하나조노 천황은 적극적이었고, 스스로 윤지를 첨삭하여 이를 인정했다.

7월 28일, 모치토요가 드디어 교토를 출발하여 다지마로 향했다.

8월 1일, 아카마쓰 토벌 윤지가 천황으로부터 오기마치산조 사네야스를 통해, 공인 봉행인 이오 타메타네에게 전달되었다(『건내기』).[9]

8월 19일, 셋쓰의 대군이 움직여, 호소카와 모치토요, 아카마쓰 사다무라는 육로로, 호소카와 모치치카(호소카와 나리하루의 아버지)는 해로로 시오야의 노리야스 진을 공격했다. 노리야스는 진을 포기하고 게자카로 후퇴했고, 대군은 드디어 하리마로 들어갔다.

8월 24일, 노리야스는 역습을 가했고, 양군은 격렬하게 싸웠다.

8월 25일, 막부군은 폭우 속에서 게자카의 진을 공격했다. 노리야스는 분전했지만, 다지마 쪽이 돌파되었다는 보고(허보)를 받고 전의를 상실하여 사카모토성으로 퇴각했다(히토마루즈카 전투).

8월 중순, 야마나 모치토요는 4500기를 이끌고 다지마·하리마 국경의 마유미 고개를 공격했고, 이 방면을 지키는 아카마쓰 요시마사와 수일간 공방을 벌였다.

8월 28일, 모치토요는 마유미 고개를 돌파했고, 퇴각하는 요시마사를 추격하며 사카모토성을 향해 진군했다.

8월 30일, 양군은 타하라구치에서 결전을 벌였고, 요시마사는 선전했지만 힘이 다해 패주했다.

9월 1일, 모치토요의 군세는 사카모토성에 이르러, 모치토요의 대군과 합류하여 포위했다. 수호소인 사카모토성은 요해지가 아니었고, 9월 3일 미쓰스케는 성을 버리고 시로야마성(효고현다쓰노시)으로 옮겨갔다. 아카마쓰 일족은 시로야마성에 농성했지만, 야마나 일족의 대군에 포위되었다.

9월 9일, 요시마사가 도망쳐 막부군에 항복했고, 하리마 구니진 다수도 아카마쓰 씨를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

9월 10일, 막부군이 총공격을 가했고, 각오를 다진 미쓰스케는 노리야스와 동생 노리시게를 성에서 탈출시키고 할복했다.

4. 난의 영향

가키쓰의 난 이후, 아시카가 요시노리가 암살되고 어린 쇼군들이 잇따라 즉위하면서 막부의 권위는 크게 약화되었다. 이와 더불어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야마나 모치토요를 필두로 한 슈고 다이묘들의 세력이 강화되었고, 이들 간의 권력 다툼이 심화되었다.[1][10] 한편, 난으로 몰락한 아카마쓰 가문은 가문 재건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1]

4. 1. 아시카가 쇼군 권위 실추

요시노리가 사망한 후, 어린 장남 요시카츠가 뒤를 이었지만, 요시카츠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하자 그 동생 요시마사가 뒤를 이었다. 어린 쇼군이 2대에 걸쳐 이어진 것으로, 아시카가 쇼군의 실권은 저하되었고, 절대적인 권력을 자랑했던 아시카가 쇼군은 요시노리 대에서 실질적으로 마지막이 되었다.[1]

요시노리 사후 막부의 혼란은 요시노리의 쇼군 친정 정책의 결과라는 시각도 있다.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쇼군이 있었기 때문에, 간레이 이하 막신들이 긴급 상황에 지도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1]

또한, 무라카미 겐지의 쿠가 키요미치가 요시노리의 죽음을 계기로 아시카가 요시미쓰 시대에 빼앗긴 겐지 장자의 지위를 되찾기 위해 활동하고 있었지만, 막부는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했다. 그 결과, 가키쓰 원년(1441년) 11월 2일에 기요미치가 조정으로부터 겐지 장자에 임명되었다.(『공경보임』)[1]

4. 2. 슈고 다이묘 세력 강화와 갈등 심화

가키쓰의 난 이후,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야마나 모치토요는 하리마 슈고직을 받는 등 야마나 가문의 세력이 크게 확대되었다. 이는 메이토쿠의 난으로 쇠퇴했던 야마나 가문이 다시 호소카와 씨와 세력을 다툴 정도로 성장했음을 의미한다.[10]

어린 쇼군들이 잇따라 즉위하면서, 성인이 될 때까지의 막부 정치는 슈고 다이묘들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가키쓰의 도쿠세이 잇키가 발생하여 도쿠세이령이 발포되기도 하였다. 하타케야마 모치쿠니가 간레이로 취임하면서, 아시카가 요시노리에게 처벌받았던 사람들의 복권을 추진하였고, 이는 호소카와 가문과의 대립을 불러일으켰다. 더불어 모치쿠니가 만쥬오마루를 새로운 가마쿠라 구보로 임명하면서 교토쿠의 난이 발발하는 원인이 되었다.[10]

4. 3. 아카마쓰 가문의 재흥 시도와 좌절

가키쓰의 난 이후, 아카마쓰씨의 남은 세력들은 가문 재건을 위해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미쓰스케의 동생 노리시게는 규슈로 도망쳐 한때 조선으로 건너가기도 했지만, 분안 5년(1448년)에 가와치에서 토벌되었다.[1] 교토쿠 3년(1454년)에는 미쓰스케의 조카인 아카마쓰 노리히사가 아카마쓰씨 재흥을 내걸고 하리마에 침입했지만, 모치토요에게 패하여 토벌되었다.[1]

가키쓰 3년(1443년) 9월, 고난초 세력이 어소에 난입하여 삼종의 신기 중 신새가 탈취되는 사건(긴케쓰의 변)이 발생했다.[2] 아카마쓰씨의 유신은 고난초 세력에 잠입하여, 조로쿠 원년(1457년) 12월에 신새를 탈환하고 고난초의 후예를 살해했다(조로쿠의 변).[2] 이 공로로, 도키카쓰의 아들 아카마쓰 마사노리는 아카마쓰씨의 재흥을 인정받아 가가 반국 수호로 임명되었다.[2] 오닌의 난에서는 아카마쓰씨가 야마나씨와 옛 영토 3국(하리마, 비젠, 미마사카)을 두고 다투어, 3국의 수호직을 되찾았다.[2]

5. 역사적 평가 및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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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서적 赤松円心・満祐 吉川弘文館 1988
[2] 논문 室町幕府の造仏事業と院派仏師 洛外雲居寺大像の造像を事例として 2002-03
[3] 서적 〈戦国〉期 上克下論 岩田書院 2012
[4] 서적 赤松円心・満祐 吉川弘文館
[5] 간행물 "「三魔」-足利義政初期における将軍近臣の動向" 戒光祥出版 1999
[6] 서적 赤松円心・満祐 吉川弘文館
[7] 서적 赤松円心・満祐 吉川弘文館
[8] 서적 人物を読む日本中世史 講談社
[9] 서적 赤松円心・満祐 吉川弘文館
[10] 간행물 足利義視と文正元年の政変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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