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렌티 시티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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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테렌티 시티코프는 벨라루스 출신의 소련 공산당원이자 정치 장교였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레닌그라드, 볼호프, 카렐리야 전선에서 군사 회의 의원을 역임했고, 종전 후에는 연해군 집단 군사 회의 의원과 제1극동 전선 군사 회의 의원을 지냈다. 시티코프는 이후 북한 주재 소련 특명 전권 대사로 임명되어 김일성의 권력 부상을 지원하고 북한 정권 수립에 깊이 관여했다. 6.25 전쟁 발발 후 소환되었으며, 이후 헝가리 대사를 거쳐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 회의 국가 감독 위원회 의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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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렌티 시티코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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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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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이름 | Терентий Штыков |
출생일 | 1907년 2월 28일 |
출생지 | 러시아 제국 비텝스크 현 리우브키 (벨라루스 비텝스크 주 하라독 구 현재) |
사망일 | 1964년 10월 25일 (57세) |
사망지 | 레닌그라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소비에트 연방 |
소속 정당 |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1929–1964) |
군사 경력 | |
소속 | 붉은 군대 |
복무 기간 | 1939년–1959년 |
최종 계급 | 상장 (1944–1951), 소장 (1951–1964) |
주요 지휘 | 7군 (1939–1940), 북서부 전선 (1941–1942), 레닌그라드 전선 (1942–1943), 볼호프 전선 (1943–1944), 카렐리야 전선 (1944), 제1극동 전선 (1945) |
훈장 | 레닌 훈장 |
외교 경력 | |
직책 | 소련의 초대 북한 대사 |
수상 | 이오시프 스탈린 |
임기 시작 | 1948년 10월 10일 |
임기 종료 | 1950년 12월 13일 |
직책 2 | 소련의 헝가리 대사 |
수상 2 | 니키타 흐루쇼프 |
임기 시작 2 | 1959년 5월 29일 |
임기 종료 2 | 1960년 7월 5일 |
이전 대사 2 | 예브게니 그로모프 |
다음 대사 2 | 블라디미르 우스티노프 |
2. 생애
테렌티 시티코프는 1907년 벨라루스의 농부 가정에서 태어났다.[5] 1927년 직업 전문 학교를 졸업하고 레닌그라드의 기관차 수리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1929년 공산당에 가입하여 콤소몰 활동을 시작했고, 이오시프 스탈린의 측근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후원으로 빠르게 승진했다.[10] 소·핀 전쟁에 참전했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레닌그라드 인근 전선에서 정치 위원으로 복무하며 대장 계급까지 올랐다.[10]
1945년 8월, 극동 전선의 정치 위원으로서 키릴 메레츠코프 원수를 보좌하여 북한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았다.[10] 같은 해 9월부터 이오시프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북한 민간 행정을 총괄하게 되었다.[14] 표면상 평양 소련군정의 최고사령관은 이반 치스차코프였지만, 실제로는 시티코프가 소련 군정을 총지휘했다.[10][14]
시티코프는 김일성이 권력을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4]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수립 후에도 북한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4] 1946년 3월에는 북한의 토지 개혁을 주도하여 지주와 일본 협력자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무상 분배했다.[2] 같은 해 12월에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구성을 위한 선거 결과를 조작하기도 했다.[8] 1948년 초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은 주로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시티코프가 작성했다.[2]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후, 초대 북한 주재 소련 대사로 임명되었다.[2] 시티코프는 북한을 소련 블록과 한반도 남쪽의 미국 점령지 사이의 사회주의 완충국으로 만들려는 스탈린의 의도에 따라 북한의 정치적 사건들을 감독했다.[6]
1950년 1월, 김일성의 전쟁 승인 요청을 받았고,[21] 인천 상륙 작전 이후 군사적 상황이 악화되자 1951년 초 소환되었다. 소련 귀환 후 여러 직책을 역임하다가 1964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24]
2. 1. 초기 생애 및 공산당 활동
테렌티 시티코프는 1907년 동부 벨라루스의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5] 벨라루스 비쳅스크 주 고로도크 지구 류브코 마을 출신이다. 1927년에 직업 전문 학교를 졸업했다. 고교 졸업 후 레닌그라드의 기관차 수리공장에 취직하여 노동자로 근무하였다. 1929년 레닌그라드에서 공산당에 가입하여 콤소몰 활동을 시작했다.[5] 같은 해 공산당 레닌그라드시당에 입당했다.1936년부터 1938년까지 공장 당 위원회 부서기, 서기, 지구 회의 의장, 비보르크 지구 위원회 제1서기를 역임했다. 소련공산당 레닌그라드시 지구당 제1서기이자 소련공산당 중앙당 정치국원이었던 이오시프 스탈린의 측근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눈에 들어 그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이후 빠른 승진을 거듭하여 평당원에서 얼마 뒤 레닌그라드시당 제2서기로 올라갔다.[10] 1938년 레닌그라드 지역 위원회 제2비서가 되었으며,[5] 제1비서였던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후원을 받았다. 즈다노프의 지원으로 빠르게 승진했으며, 같은 해 9월 대숙청에서 잠시 지도적인 역할을 맡기도 했다. 시티코프가 즈다노프의 딸과 결혼하여 사위가 되었다는 소문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11] 소·핀 전쟁 당시 제7군 군사 회의 의원을 겸임했다.
2. 2.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시티코프는 레닌그라드 인근 여러 전선에서 정치 위원으로 복무했다. 전쟁 말에는 소비에트 연방에서 세 명뿐인 대장 정치 위원(소비에트 적군 정치 위원에게 허용된 최고 계급) 중 한 명이었다.[10] 1945년 8월 19일, 극동 전선의 정치 위원으로서 키릴 메레츠코프 원수를 보좌하여 북한에서 일본의 항복을 수락했다.[10]독소전 기간에는 레닌그라드 전선(1942년~1943년), 볼호프 전선(1943년~1944년), 카렐리야 전선(1944년)에서 군사 회의 의원(정치 장교)으로 활동했다. 1945년 4월부터 연해군 집단 군사 회의 의원을, 같은 해 8월부터 10월까지 제1극동 전선 군사 회의 의원을 역임했다.
2. 3. 소련 군정 지도자
1945년 4월, 시티코프는 보로실로프(오늘날 우수리스크)에 설치된 연해주군단(Maritime Group of Forces)으로 부임했다. 이곳은 8월 초 대일본전을 위해 제1극동전선군으로 개편되었고, 종전 후 9월 30일 연해주군관구(Primorsky Military District)로 다시 개편되었다. 시티코프는 이 기간 동안 사령관 키릴 메레츠코프 원수 휘하의 군사위원으로 있었다.[13]1945년 9월 20일, 이오시프 스탈린은 북한 민간 행정 지도를 연해주 군관구 군사평의회에 위임했는데, 이는 곧 시티코프가 총괄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14]
북한을 점령한 소련 제25군은 제1극동전선군(연해주군관구) 산하 부대였다. 표면상 평양 소련군정의 최고사령관은 25군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 대장이었지만, 실제로는 시티코프가 보로실로프와 평양을 오가며 소련 군정을 총지휘했다. 25군 군사위원 니콜라이 레베데프는 훗날 시티코프에 대해 "그가 조선에 있건 연해주군관구에 있건 또는 모스크바에 있건 간에 그의 참여 없이 38선 이북 조선에서 이뤄진 조치란 하나도 없었다"고 회고하였다.[10][14]
시티코프는 평양을 자주 방문하며 한반도 상황을 즈다노프와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그는 스탈린을 대신하여 "북한의 정치적 사건들을 매우 면밀히 감독했다".[6]
2. 4. 북한 정권 수립 및 정책 결정 관여
슈티코프는 김일성이 권력을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4]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 위원장이 된 후에도, 슈티코프는 북한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4]1946년 3월, 슈티코프는 북한의 토지 개혁을 주도했다.[2] 소련은 원래 대지주에게 보상하고 농민에게 토지를 판매하는 방식을 계획했다. 그러나 슈티코프는 지주와 일본 협력자로부터 토지를 몰수하여 보상 없이 가난하고 토지가 없는 농민에게 분배할 것을 제안했다. 이 개혁은 봉건적인 사회 경제 구조를 무너뜨렸고, 많은 북한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많은 부유한 지주와 협력자들이 남쪽으로 도망쳐 유혈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1946년 12월, 슈티코프와 다른 두 명의 소련 장군은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 구성을 위한 선거 결과를 조작했다.[8] 이들은 한국인의 의견을 듣지 않고 "정당 간의 정확한 의석 배분, 여성 의원의 수, 더 나아가 입법부의 정확한 사회적 구성"을 결정했다.[8]
1948년 초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은 주로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슈티코프가 작성했다.[2] 이 헌법은 두 사람이 초안을 편집하며 긴 논의를 거친 후에야 효력을 발휘했지만, 일부 조항은 나중에 소련 감독관에 의해 다시 작성되었다.
2. 5. 북조선 주재 대사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후, 초대 북한 주재 소련 대사로 임명되었다.[2] 이오시프 스탈린은 북한을 소련 블록과 한반도 남쪽의 미국 점령지 사이의 사회주의 완충국으로 만들려고 했다.시티코프는 1949년 1월 15~25일 중 남한의 군인과 경찰이 38선을 넘어 침입해 온 사건이 발생했다고 보고했다(1월 27일). 그러나 그는 대내외상황을 고려할 때 현시점에서 남한군의 침입이 있다고 믿기는 어렵다고 보고 남한의 38선 부근 병력 집결은 북한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견을 개진했다.[15] 2월 3일에는 38선 부근에서 일어난 북한군 초소에 대한 남한군의 공격에 관해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외무장관에게 보고했다. 그는 보고서에서 북한군은 1명당 소총 탄약이 3~10발 정도밖에 없어 대부분의 경우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고 지적하고 극동군구 사령부가 북한의 2개 여단에 대한 무기공급을 지연시키고 있는 바 무기가 조속히 공급될 수 있도록 몰로토프 외무장관이 개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16]
1950년 1월 17일 박헌영 관저에서 열린 리셉션에 참석하여, 김일성의 전쟁 승인 요청을 받았다.[21] 1월 29일에는 대한민국 정부의 비공개회의(1월 6일) 내용을 외무부에 보고했다.[22]
인천 상륙 작전에서의 유엔 개입 이후, 군사적 상황이 역전되자 전세 역전에 대한 책임으로 1951년 초 소환되었다.
2. 6. 소련 귀환 이후
1951년 초, 인천 상륙 작전으로 인한 전세 역전에 대한 문책성 인사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대사 직에서 해임되어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24] 1951년 2월 3일 소장으로 강등되었고 칼루가 주 부주석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노브고로드 주, 프리모르스키 지방의 제1서기를 역임했으며, 1959년에는 헝가리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시티코프의 강경한 스탈린주의는 야노시 카다르의 굴라시 공산주의 정책과 충돌했고, 1960년에 소환되었다. 1961년에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 회의 국가 감독 위원회 의장을 역임했다. 1963년 2월에는 당 중앙 위원회 러시아 공화국 담당 당·국가 감독 위원회 부의장을 지냈다.1964년 10월 25일, 휴가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심한 증세는 아니었으나 그날이 일요일이라 병원에 의사도 없고, 제때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것이 주된 사인이다. 김일성은 그가 사망했을 때 조전(弔電)조차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24][25]
3. 시티코프 일기
구소련 붕괴 후 공개된 "시티코프 일기"는 소련 군정의 북한 통치와 대남 공작에 대한 주요 내용들을 담고 있어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9] 이 일기에는 분단된 한반도에서 소련이 미군정 사이의 완충국을 만들려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의도와, 김일성의 권력 부상에 대한 시티코프의 역할 등이 기록되어 있다.
4. 유산 및 평가
슈티코프의 결정은 한반도와 전 세계에 매우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1945년부터 1950년까지 북한의 최고 지도자였음에도, 그는 자신의 정책에 대한 공을 한국인들에게 돌리도록 했다.[2] 박헌영과 같은 다른 한국 공산주의자들보다 김씨 일가에 대한 지지를 보인 것은 김씨 일가가 권력을 잡는 데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또한, 슈티코프는 1946년 북한의 토지 개혁을 주도했는데, 이는 남북한을 통틀어 가장 인기 있는 정책 중 하나였다.[2] 남한은 북한에 대한 짧은 유엔 점령 기간 동안 토지 개혁을 되돌렸고, 이는 북한 농민들 사이에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무엇보다도, 슈티코프가 김일성의 한반도 무력 통일 노력을 지지한 결정은 그의 경력에 종지부를 찍었다. 만약 슈티코프가 김일성의 팽창주의적 목표에 비우호적이었다면, 이오시프 스탈린이 한국 전쟁을 승인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았을 것이다. 전쟁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남한의 항복으로 끝나지는 않았지만, 김일성이 소련으로부터 효과적인 북한의 독립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슈티코프의 모든 행동은 오늘날 북한 관영 매체에서 김일성의 업적으로 치부되며, 심지어 남한 언론에서도 김일성이 토지 개혁의 원동력이었다고 추정한다.[2]
5. 수상 내역
훈장 | 수여 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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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년 4월 4일, 1957년 3월 12일, 미상 |
![]() | 1940년 3월 21일 |
![]() | 1944년 11월 2일 |
![]() | 1944년 3월 21일, 1944년 7월 29일, 1945년 9월 8일 |
![]() | 1942년 |
![]() | 1944년 |
![]() | 194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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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년 |
![]() | 1958년 |
![]() | 195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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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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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日成 중국에서 약탈, 도둑질 일삼아 / 러紙 김일성의 抗日운동 뒤집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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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1993-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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