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쿰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테쿰세는 1764년에서 1771년 사이에 현재의 오하이오 지역에서 태어난 쇼니족의 지도자였다. 그는 폰티악의 전쟁 이후 미국 독립 전쟁 시기에 성장했으며, 부족의 땅을 지키기 위해 미국과 영국 사이의 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테쿰세는 여러 부족을 연합하여 미국 정착민의 확장에 저항하려 했으며, 1812년 전쟁에서 영국군과 동맹을 맺고 싸웠다. 그는 템스 전투에서 사망했지만, 그의 죽음 이후에도 미국, 원주민, 캐나다 역사에서 상징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768년 출생 - 루이 라자르 오슈
루이 라자르 오슈는 프랑스 혁명 시기의 군인으로, 혁명 전쟁에서 활약하며 여러 전투에 참여했고,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석방 후 군 사령관이 되었으나 29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 1768년 출생 - 마리아네 부르농빌
- 1813년 사망 - 조제프루이 라그랑주
조제프루이 라그랑주는 이탈리아 출신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로서 변분법, 라그랑주 역학 등을 개발하고 미터법 제정에 참여하며 18~19세기 수학과 역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에펠탑에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1813년 사망 - 조지 쇼 (생물학자)
영국의 생물학자이자 의사인 조지 쇼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교육받고 왕립 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오리너구리를 비롯한 호주 동물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 기술과 대영 박물관 자연사 부서에서의 한스 슬론 컬렉션 정리, 그리고 뉴홀랜드 동물지 및 일반 동물학 저술 등의 업적으로 현대 생물학 연구에 기여했다. - 아메리카 원주민 - 투팍 아마루 2세
투팍 아마루 2세는 페루 부왕령의 카시케로서 스페인 식민 지배에 저항하여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고, 그의 반란은 페루 독립 운동에 영향을 미치며 페루 사회와 문화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 아메리카 원주민 -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은 멕시코 치아파스 주에서 활동하는 원주민 무장단체로, 1994년 무장봉기를 통해 멕시코 정부의 불평등에 저항하며 토지 개혁과 자치권을 요구하고, 대안세계화 운동과 연계하여 비폭력적 저항과 정치적 운동을 지속하고 있다.
테쿰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 | |
이름 | 테쿰세 |
원어 이름 | Tecumseh, Tecumtha, Tekamthi |
출생 | 약 1768년 |
출생지 | 현재의 칠리코시, 오하이오 근처 |
사망 | 1813년 10월 5일 (약 45세) |
사망 장소 | 모라비안타운, 어퍼캐나다 |
사망 원인 | 템스 전투에서 전사 |
민족 | 쇼니족 |
관련 인물 | 치즈카우 (형제) 텐스콰타와 (형제) |
업적 | 미국 확장에 대한 아메리카 원주민 저항 조직 |
군사 정보 | |
소속 | 서부 연맹 테쿰세 연맹 |
복무 기간 | 1783년-1813년 |
참전 전투 | 북서 인디언 전쟁 1812년 전쟁 테쿰세 전쟁 |
국가 정보 | |
국가 | 테쿰세 연맹 |
직함 | 족장 |
재임 시작일 | 불명 |
재임 종료일 | 1813년 10월 5일 |
이전 지도자 | 텐스콰타와 |
2. 초기 생애
테쿰세는 1768년 3월경 오하이오주 중부의 매드 강 유역에 있는 올드 피카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쇼니족 언어로 "유성" 또는 "하늘을 가로지르는 표범", "매복하는 표범"을 의미한다.
1768년 포트 스탠윅스 조약에서 이로쿼이족은 오하이오 강 이남의 땅(현재의 켄터키)을 영국에 할양했는데, 이 지역은 쇼니족과 다른 부족들이 사냥터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쇼니족은 식민지 정착에 저항하기 위해 노력했고, 1774년 포인트 플레전트 전투에서 테쿰세의 아버지 푸케신와우가 사망했다. 전투 후 쇼니족은 켄터키를 식민지 주민들에게 넘겨주었다.[5]
1775년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많은 쇼니족은 영국과 동맹을 맺고 미국 정착민을 몰아내기 위해 켄터키를 습격했다.[5] 어린 테쿰세는 미국군의 반격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해야 했다. 1777년, 그의 가족은 사이오토 강에서 매드 강에 있는 키스포코 마을로 이주했다.[5]
1780년, 조지 로저스 클라크 장군이 이끄는 켄터키 민병대가 쇼니족 영토를 공격했다. 테쿰세는 피콰 전투를 목격했을 가능성이 있다. 쇼니족은 패배 후 마을과 농작물을 잃고 그레이트 마이애미 강 북서쪽으로 이주했다. 1782년, 클라크는 다시 쇼니족 마을을 파괴했고, 쇼니족은 현재의 오하이오주 벨폰테인 근처로 더 북쪽으로 후퇴해야 했다.[5]
2. 1. 출생과 가족
테쿰세는 현재의 오하이오 지역인 쇼니족 영토에서 1764년에서 1771년 사이에 태어났다. 가장 확실한 증거는 1768년 3월경에 태어났다는 것이다.[1] 쇼니족의 발음은 전통적으로 쇼니족이 아닌 자료에서는 "Tecumthé"로 표기되었다.[2] 그는 쇼니 부족의 키스포코 분파의 표범 씨족에서 태어났다. 쇼니어에서 그의 이름은 "나는 길을 건너간다"와 "슈팅 스타"로 번역되며, 표범 씨족과 관련된 유성을 지칭한다.[2]테쿰세는 현재의 오하이오주 칠리코테 근처인 사이오토 강 계곡에 있는 쇼니족 마을 칠리코테 또는 근처의 키스포코 마을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3] 테쿰세의 아버지인 푸케신와우는 키스포코 분파의 쇼니족 전쟁 추장이었다.[4] 테쿰세의 어머니인 메토아타스케는 페코위 분파와 거북이 씨족에 속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어떤 전승에서는 그녀가 머스코기족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어머니는 윌리엄 웨더포드의 혈족이었을 수 있다.[4] 테쿰세는 여덟 자녀 중 다섯째였다.[6] 그의 부모는 현재의 앨라배마에서 만났고 결혼했는데, 그곳은 많은 쇼니족이 17세기 비버 전쟁에서 이로쿼이족에 의해 오하이오 지방에서 쫓겨난 후 정착했던 곳이었다. 1759년경, 푸케신와우와 메토아타스케는 전통적인 고향에서 재결합하려는 쇼니족의 노력의 일환으로 오하이오 지방으로 이주했다.[5]
1763년,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승리한 후 대영 제국은 오하이오 지방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그해, 치세카우는 이 지역에 대한 영국의 통제를 저지하기 위한 범 부족적 노력인 폰티악의 전쟁에 참여했다. 테쿰세는 폰티악의 전쟁 이후 평화로운 10년 동안 태어났는데, 이때 푸케신와우는 사이오토에 있는 키스포코 마을의 추장이 되었을 것이다.
테쿰세의 가계도는 다음과 같다.[5]
조부 (키쿠아스카로와) | 조부 (웨이페케레카) | |
---|---|---|
조모 (게이타키피아시카) | 조모 (웨이라스케세) | |
부친 | 세리토카, 네서웨나 | |
모친 | 게이노와피아시카 |
2. 2. 어린 시절
테쿰세는 현재의 오하이오 지역인 쇼니족 영토에서 1764년에서 1771년 사이에 태어났으며, 가장 확실한 증거는 1768년 3월경에 태어났다는 것이다.[5] 그는 쇼니 부족의 키스포코 분파의 표범 씨족에서 태어났다. 쇼니어에서 그의 이름은 "나는 길을 건너간다"와 "슈팅 스타"로 번역되며, 표범 씨족과 관련된 유성을 지칭한다.[5]테쿰세는 현재의 오하이오주 칠리코테 근처인 사이오토 강 계곡에 있는 쇼니족 마을 칠리코테 또는 근처의 키스포코 마을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5] 그의 아버지인 푸케신와우는 키스포코 분파의 쇼니족 전쟁 추장이었다.[5] 어머니인 메토아타스케는 페코위 분파와 거북이 씨족에 속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어떤 전승에서는 그녀가 머스코기족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어머니는 윌리엄 웨더포드의 혈족이었을 수 있다.[5] 테쿰세는 여덟 자녀 중 다섯째였다.[5] 그의 부모는 현재의 앨라배마에서 만났고 결혼했는데, 그곳은 많은 쇼니족이 17세기 비버 전쟁에서 이로쿼이족에 의해 오하이오 지방에서 쫓겨난 후 정착했던 곳이었다. 1759년경, 푸케신와우와 메토아타스케는 전통적인 고향에서 재결합하려는 쇼니족의 노력의 일환으로 오하이오 지방으로 이주했다.[5]
1763년,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승리한 후 대영 제국은 오하이오 지방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그해, 치세카우는 이 지역에 대한 영국의 통제를 저지하기 위한 범 부족적 노력인 폰티악의 전쟁에 참여했다.[5] 테쿰세는 폰티악의 전쟁 이후 평화로운 10년 동안 태어났는데, 이때 푸케신와우는 사이오토에 있는 키스포코 마을의 추장이 되었을 것이다.[5] 1768년 포트 스탠윅스 조약에서 이로쿼이족은 오하이오 강 이남의 땅 (현재의 켄터키)을 영국에 할양했는데, 이 지역은 쇼니족과 다른 부족들이 사냥에 사용했다. 쇼니족은 식민지 점령에 대한 추가 저항을 조직하려 했으며, 1774년 포인트 플레전트 전투에서 푸케신와우가 사망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전투 후 쇼니족은 켄터키를 식민지 주민들에게 할양했다.[5]
1775년 미국 독립 전쟁이 영국과 미국의 식민지 사이에 시작되자 많은 쇼니족은 영국과 동맹을 맺고 미국 정착민을 몰아내기 위해 켄터키를 습격했다.[5] 싸울 정도로 어리지 않았던 테쿰세도 미국군의 반격에 직면하여 이주해야 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1777년, 그의 가족은 사이오토 강에서 현재의 오하이오주 스프링필드 근처인 매드 강에 있는 키스포코 마을로 이주했다.[5] 켄터키 민병대 사령관인 조지 로저스 클라크 장군은 1780년 쇼니족 영토에 대규모 원정을 이끌었다. 테쿰세는 8월 8일에 벌어진 피콰 전투를 목격했을 수도 있다. 쇼니족이 후퇴한 후 클라크는 그들의 마을과 농작물을 불태웠다. 쇼니족은 그레이트 마이애미 강을 따라 북서쪽으로 이주했지만, 클라크는 1782년에 다시 돌아와 그 마을들도 파괴하여 쇼니족이 현재의 오하이오주 벨폰테인 근처인 북쪽으로 더 후퇴하도록 강요했다.[5]
3. 인디언 전쟁과 연합의 형성
테쿰세가 태어난 시대, 백인 정착민들은 쇼니족의 영토였던 동부 지방에도 밀려들었고, 미국은 인디언의 영토를 무력으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백인들은 천이나 총 등 "물품"과 교환하여 인디언들의 땅을 "사들여", "자신들의 소유물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디언 사회의 규칙에서는, 땅은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위대한 영 아래 모든 것이 평등하며, 땅을 둘러싼 싸움은 인디언 사이에서도 있었지만, 성스러운 파이프를 돌려 마시며 평화를 맹세하면 어떤 분쟁도 해결할 수 있었다.
인디언의 관점에서 보면, 백인이 선물을 가지고 와서 "여기에 살게 해 달라"고 말해왔다면, 서로 "성스러운 파이프"를 돌려 마시고 "위대한 영"에게 이를 승낙받고, 인디언과 백인 모두 서로 도우며 그 땅에서 살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백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인디언들에게 그들의 땅에서 나가라고 명령하기 시작했다.
백인들은 땅을 "정당하게 구입했다"고 생각했기에, 인디언들이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하자, 무력으로 이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모두를 공유한다"는 문화에 입각한 인디언들에게, 이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성스러운 파이프"에 맹세한 평화를 깨뜨린 인디언 전사들은 침략자들에게 싸움을 걸었다. 오하이오 주변의 인디언 부족들은 쇼니족과 연합하는 등 싸웠지만, 미군(합중국군)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 잇따라 패배하여 약화되었고 영토를 빼앗겼다 (→인디언 전쟁).
1810년 8월 12일 빈센느에서 테쿰세가 미국 정부가 사기로 그들의 사냥터를 빼앗은 것을 비난하며 주지사 해리슨에게 한 연설은 이러한 인디언의 관점을 잘 보여준다. 테쿰세는 연설에서 "모든 인디언이 일치 단결하여 이 땅에 대한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악한 일"을 중단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어느 쪽도 땅을 팔 권리가 없다. 심지어는 서로에게도 팔 권리가 없다. 하물며 이 땅 전부를 원할 뿐만 아니라 적은 부분으로는 만족할 줄 모르는 이방인에게 팔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1]
포트 웨인 조약 이전 테쿰세는 "예언자의 형제"로 불렸다. 이후 그는 미국의 확장에 맞서기 위해 부족 연합을 구축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1810년 8월, 테쿰세는 빈센스에서 윌리엄 헨리 해리슨과 만나 포트 웨인 조약의 양도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며, 논쟁이 된 토지에 대한 미국의 정착을 반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조약에 서명한 추장들을 처벌하고, 더 이상의 양도를 막기 위해 부족들을 통합하고 있다고 말했다. 해리슨은 테쿰세의 요구를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에게 전달하겠지만 수용될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회의가 끝나자 테쿰세는 매디슨이 포트 웨인 조약을 철회하지 않으면 "당신과 나는 싸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테쿰세는 연합 구축을 위해 광범위하게 여행했다. 1810년 11월, 그는 어퍼 캐나다의 포트 말덴을 방문하여 영국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영국은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1811년 5월, 테쿰세는 오하이오를 방문하여 쇼니족, 와이앤도트족, 세네카족 사이에서 전사를 모집했다.
1811년 7월, 테쿰세는 다시 빈센스에서 해리슨을 만났다. 그는 6개월 동안 남쪽과 서쪽으로 약 약 4828.02km를 여행하며 동맹을 모집했다. 그는 1811년 대혜성과 뉴마드리드 지진을 연합의 징조로 해석했다. 많은 부족이 그의 접근 방식을 거부했지만, 무스코기족의 한 분파인 레드 스틱스는 테쿰세의 소집에 응답하여 크리크 전쟁 발발에 기여했다.
테쿰세가 프로펫타운을 장기간 비울 것이라고 해리슨에게 알린 것은 실수였다. 해리슨은 테쿰세의 부재를 틈타 1811년 9월, 약 1,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프로펫타운을 향해 진군했다. 11월 7일, 프로펫타운의 전사들은 해리슨의 야영지를 기습 공격하여 티피카누 전투가 시작되었다. 해리슨의 병사들은 자리를 지켰고, 예언자의 전사들은 후퇴했다. 다음 날 미국인들은 마을을 불태우고 빈센스로 돌아갔다.
티피카누 전투 이후 국경 폭력의 물결이 일어났다. 테쿰세는 전사들이 조기에 행동하는 것을 억제하려 했다. 미국이 1812년 6월 영국에 선전 포고를 할 때까지, 약 800명의 전사들이 재건된 프로펫타운 주변에 모였다. 테쿰세의 북서부 영토 전역의 아메리카 원주민 동맹은 약 3,500명의 전사를 헤아렸다.
3. 1. 인디언 전쟁
1783년 미국 독립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정복의 권리로 오하이오 강 북쪽의 토지를 주장했고, 영국은 파리 조약을 통해 그 지역에 대한 주장을 포기했다. 이에 쇼니족을 포함한 인디언들은 1783년 여름 로어 샌더스키에서 대규모 부족 연합 회의를 열었다. 특히 모호크의 조셉 브랜트는 인디언들이 그들의 땅을 지키기 위해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인디언의 땅은 모든 부족이 공동으로 소유하므로 모든 부족의 동의 없이는 미국에 더 이상 양도할 수 없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이 생각은 당시 15세였던 테쿰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1]하지만 미국은 각 부족과 개별적으로 거래하여 각 부족에게 별도의 토지 조약을 체결하도록 주장했다. 1786년 1월, 메코체 쇼니족 분파의 민간 지도자인 몰룬타는 포트 피니 조약에 서명하여 오하이오의 대부분을 미국인에게 넘겨주었다. 그해 말, 몰룬타는 켄터키 민병대에 의해 살해당했고, 새로운 국경 전쟁이 시작되었다.
18세가 된 테쿰세는 형 치시키(Cheeseekau)의 가르침을 받아 전사가 되었다. 테쿰세는 쇼니족이 잃어버린 땅으로 이주민들을 싣고 오하이오 강을 따라 내려가는 평저선에 대한 공격에 참여했다. 그는 쇼니족이 포로를 잔혹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는데, 이는 고문과 잔혹 행위에 대한 그의 평생의 혐오감을 보여주는 초기 징후였다. 1788년, 테쿰세와 치시키는 서쪽으로 이주하여 미주리주 케이프 지라르도 근처로 이사했지만, 식민지 개척자들이 이주해 오자 오래 머물지 못했다.
1789년 말 또는 1790년 초, 테쿰세는 치시키와 함께 현재 테네시주인 룩아웃 마운틴 근처의 치카마우가 체로키족과 함께 살기 위해 남쪽으로 여행했다. 치시키는 약 40명의 쇼니족을 이끌고 식민지 개척자들을 공격했고, 테쿰세도 그들 중 하나였다. 치카마우가족과 함께 거의 2년 동안 지내면서 테쿰세는 체로키 여인과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 관계는 짧았다.
1791년, 테쿰세는 노스웨스트 인디언 전쟁에 작은 지도자로 참여하기 위해 오하이오로 돌아왔다. 전쟁을 위해 결성된 노스웨스턴 연합은 쇼니족의 블루 재킷이 이끌었으며, 테쿰세가 몇 년 후에 만든 연합의 모델이 되었다. 그는 나중에 텐스콰타와로 알려진 그의 남동생 라라웨티카를 포함하여 8명의 추종자를 이끌었다. 테쿰세는 11월 4일 주요 인디언 승리(세인트 클레어의 패배)에 참여하지 못했는데, 당시 사냥을 하거나 정찰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그는 테네시에서 치시키와 재회하기 전에 다른 소규모 교전에 참여했다. 테쿰세는 1792년 테네시주 내슈빌 근처의 부캐넌 역에 대한 실패한 공격에서 치시키가 사망했을 때 그와 함께 있었다.
테쿰세는 1792년 말에 오하이오로 돌아와 몇 차례의 교전에서 더 싸웠다. 1794년, 그는 인디언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겨준 폴른 팀버스 전투에 참전했다. 원주민 연합은 붕괴되었고, 특히 블루 재킷이 미국과 평화를 맺기로 동의한 후 더욱 그러했다. 테쿰세는 오하이오의 약 3분의 2와 현재 인디애나의 일부가 미국에 양도된 그린빌 조약 (1795) 체결에 참석하지 않았다.
테쿰세가 태어난 시대, 확대되는 백인 정착민들은 쇼니족의 영토였던 동부 지방에도 밀려들었고, 미국은 인디언의 영토를 무력으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백인들은 천이나 총 등 "물품"과 교환하여 인디언들의 땅을 "사들여", "자신들의 소유물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이에 반해 인디언 사회의 규칙에서는, 땅은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위대한 영" 아래 모든 것이 평등하며, 평화의 맹세를 하면 은혜를 가져다주는 대지는 다른 부족과도 공유할 수 있었다.
인디언의 관점에서 보면, 백인이 선물을 가지고 와서 "여기에 살게 해 달라"고 말해왔다면, 서로 "성스러운 파이프"를 돌려 마시며 "위대한 영"에게 이를 승낙받고, 인디언과 백인 모두 서로 도우며 그 땅에서 살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백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인디언들에게 그들의 땅에서 나가라고 명령하기 시작했다.
백인들은 땅을 "정당하게 구입했다"고 생각했기에, 인디언들이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하자, 무력으로 이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모두를 공유한다"는 문화에 입각한 인디언들에게, 이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성스러운 파이프"에 맹세한 평화를 깨뜨린 인디언 전사들은 침략자들에게 싸움을 걸었다. 오하이오 주변의 인디언 부족들은 쇼니족과 연합하는 등 싸웠지만, 미군(합중국군)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 잇따라 패배하여 약화되었고 영토를 빼앗겼다.
1810년 8월 12일 빈센느에서 테쿰세가 미국 정부가 사기로 그들의 사냥터를 빼앗은 것을 비난하며 주지사 해리슨에게 한 연설은 이러한 인디언의 관점을 잘 보여준다. 테쿰세는 연설에서 "모든 인디언이 일치 단결하여 이 땅에 대한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악한 일"을 중단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어느 쪽도 땅을 팔 권리가 없다. 심지어는 서로에게도 팔 권리가 없다. 하물며 이 땅 전부를 원할 뿐만 아니라 적은 부분으로는 만족할 줄 모르는 이방인에게 팔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3. 2. 부족 연합의 형성
1783년 미국 독립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정복의 권리를 주장하며 오하이오 강 북쪽의 토지를 차지하려 했다. 영국은 파리 조약을 통해 해당 지역에 대한 주장을 포기했다. 이에 쇼니족을 비롯한 인디언 부족들은 로어 샌더스키에서 대규모 부족 연합 회의를 열었다. 모호크족의 조셉 브랜트는 인디언들이 땅을 지키기 위해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모든 부족의 동의 없이는 땅을 양도할 수 없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당시 15세였던 테쿰세는 이 주장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훗날 이 정책의 옹호자가 되었다.[1]미국은 각 부족과 개별적으로 거래하여 토지 조약을 체결하려 했다. 1786년, 메코체 쇼니족 분파의 지도자 몰룬타는 포트 피니 조약을 통해 오하이오 대부분을 미국에 넘겨주었다. 그러나 몰룬타는 켄터키 민병대에 의해 살해당했고, 새로운 국경 전쟁이 시작되었다.
18세가 된 테쿰세는 형 치시키(Cheeseekau)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전사가 되었다. 그는 쇼니족이 잃어버린 땅으로 이주민들을 싣고 오는 평저선을 공격하는 데 참여했다. 테쿰세는 포로를 잔혹하게 대하는 쇼니족의 방식에 충격을 받았고, 이는 그의 평생에 걸친 잔혹 행위에 대한 혐오감으로 이어졌다.[1] 1788년, 테쿰세와 그의 가족은 미주리주 케이프 지라르도 근처로 이주했지만, 식민지 개척자들의 이주로 인해 오래 머물지 못했다.
1789년 말 또는 1790년 초, 테쿰세는 치카마우가 체로키족과 함께 살기 위해 남쪽으로 여행했다. 치시키는 약 40명의 쇼니족을 이끌고 식민지 개척자들을 공격했고, 테쿰세도 그중 하나였다. 테쿰세는 치카마우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체로키 여인과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지만, 관계는 짧았다.
1791년, 테쿰세는 노스웨스트 인디언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오하이오로 돌아왔다. 그는 텐스콰타와로 알려진 동생 라라웨티카를 포함한 8명의 추종자를 이끌었다. 테쿰세는 1792년 테네시주 내슈빌 근처의 부캐넌 역 공격에서 치시키가 사망했을 때 그와 함께 있었다.
테쿰세는 1792년 말 오하이오로 돌아와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1794년, 그는 폴른 팀버스 전투에 참전했지만, 인디언 연합은 패배하고 붕괴되었다. 테쿰세는 그린빌 조약 (1795) 체결에 참석하지 않았다.
1796년까지 테쿰세는 약 250명의 사람들로 구성된 키스포코 밴드의 추장이 되었다. 그의 누이 테쿠마피스는 밴드의 주요 여성 추장이었다. 테쿰세는 마메이트와 결혼하여 아들 파우키사아를 낳았지만,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테쿰세의 밴드는 1798년 인디애나주 앤더슨 근처의 화이트 강을 따라 델라웨어 인디언 근처로 정착하여 8년 동안 살았다. 그는 이 기간 동안 두 번 더 결혼했다.
포트 웨인 조약 이전 테쿰세는 "예언자의 형제"로 불렸다. 이후 그는 미국의 확장에 맞서기 위해 부족 연합을 구축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1810년 8월, 테쿰세는 빈센스에서 윌리엄 헨리 해리슨과 만나 포트 웨인 양도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며, 논쟁이 된 토지에 대한 미국의 정착을 반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조약에 서명한 추장들을 처벌하고, 더 이상의 양도를 막기 위해 부족들을 통합하고 있다고 말했다. 해리슨은 테쿰세의 요구를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에게 전달하겠지만 수용될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회의가 끝나자 테쿰세는 매디슨이 포트 웨인 조약을 철회하지 않으면 "당신과 나는 싸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테쿰세는 연합 구축을 위해 광범위하게 여행했다. 1810년 11월, 그는 어퍼 캐나다의 포트 말덴을 방문하여 영국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영국은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1811년 5월, 테쿰세는 오하이오를 방문하여 쇼니족, 와이앤도트족, 세네카족 사이에서 전사를 모집했다.
1811년 7월, 테쿰세는 다시 빈센스에서 해리슨을 만났다. 그는 6개월 동안 남쪽과 서쪽으로 약 4800km를 여행하며 동맹을 모집했다. 그는 1811년 대혜성과 뉴마드리드 지진을 연합의 징조로 해석했다. 많은 부족이 그의 접근 방식을 거부했지만, 무스코기족의 한 분파인 레드 스틱스는 테쿰세의 소집에 응답하여 크리크 전쟁 발발에 기여했다.
테쿰세가 프로펫타운을 장기간 비울 것이라고 해리슨에게 알린 것은 실수였다. 해리슨은 테쿰세의 부재를 틈타 1811년 9월, 약 1,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프로펫타운을 향해 진군했다. 11월 7일, 프로펫타운의 전사들은 해리슨의 야영지를 기습 공격하여 티피카누 전투가 시작되었다. 해리슨의 병사들은 자리를 지켰고, 예언자의 전사들은 후퇴했다. 다음 날 미국인들은 마을을 불태우고 빈센스로 돌아갔다.
티피카누 전투 이후 국경 폭력의 물결이 일어났다. 테쿰세는 전사들이 조기에 행동하는 것을 억제하려 했다. 미국이 1812년 6월 영국에 선전 포고를 할 때까지, 약 800명의 전사들이 재건된 프로펫타운 주변에 모였다. 테쿰세의 북서부 영토 전역의 아메리카 원주민 동맹은 약 3,500명의 전사를 헤아렸다.
테쿰세가 태어난 시대, 백인 정착민들은 쇼니족의 영토였던 동부 지방에도 밀려들었고, 미국은 인디언의 영토를 무력으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백인들은 "물품"과 교환하여 인디언들의 땅을 "사들여", "자신들의 소유물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디언 사회의 규칙에서는, 땅은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위대한 영 아래 모든 것이 평등하며, 땅을 둘러싼 싸움은 인디언 사이에서도 있었지만, 성스러운 파이프를 돌려 마시며 평화를 맹세하면 어떤 분쟁도 해결할 수 있었다.
인디언의 생각에서 보면, 백인이 선물을 가지고 와서 "여기에 살게 해 달라"고 말해왔다면, 서로 "성스러운 파이프"를 돌려 마시고 "위대한 영"에게 이를 승낙받고, 인디언도 백인도 서로 도우며 그 땅에서 살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인디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땅은 누구의 것도 아니고, 그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기본 조건이었다.
그러나 백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인디언들에게 그들의 땅에서 나가라고 명령하기 시작했다. "명령받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간도 동물도 자연도 모두가 공유 문화 아래 있으며,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백인들은 땅을 "정당하게 구입했다"고 생각했기에, 인디언들이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하자, 무력으로 이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모두를 공유한다"는 문화에 입각한 인디언들에게, 이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땅이 백인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디언들에게, 정착민들은 "백인의 것"이 된 땅에 언제까지나 남아있는 그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더욱이 미국은 정착지 확장을 위해 육군을 보내 학살을 지원했다.
"성스러운 파이프"에 맹세한 평화를 깨뜨린 인디언 전사들은 침략자들에게 싸움을 걸었다. 오하이오 주변의 인디언 부족들은 쇼니족과 연합하는 등 싸웠지만, 미군(합중국군)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 잇따라 패배하여 약화되었고 영토를 빼앗겼다 (→인디언 전쟁).
4. 테쿰세의 전쟁
1811년, 테쿰세는 쇼니족의 젊은 전사로서 미국에 전쟁을 걸었다. 백인들은 테쿰세를 쇼니족의 "전투 사령관"(그런 직책은 존재하지 않음)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에, 테쿰세가 관여한 일련의 식민지 전쟁에 "테쿰세의 전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테쿰세 일행이 처음으로 미국에 도전한 전투는 "터피카누 전투"라고 불린다. 이 전투에서 윌리엄 헨리 해리슨이 이끄는 미국 정부군에게 패배한 테쿰세 일행은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캐나다로 도망쳤다.
쇼니족 연합은 캐나다에서 영국군과 동맹을 맺었다. 아이작 브록은 테쿰세의 지원을 얻기 위해 쇼니족에게 독립된 모국을 보장하고, 쇼니족과의 상의 없이 휴전 협상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테쿰세는 브록을 신뢰하고 존경하여 첫 만남 이후 "이것이 남자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브록은 테쿰세를 "인디언의 웰링턴 공"이라고 칭하며 "테쿰세보다 현명하고 용감한 전사는 없다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테쿰세 일행은 영국군과 함께 디트로이트를 공략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올리버 해저드 페리가 이끄는 미국군이 이리호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영국 측은 보급선이 끊기고 고전했다. 게다가 영국군 사령관이 전사하고 테쿰세에게 협조적이지 않은 헨리 프로크터(Henry Procter)가 후임으로 임명되면서, 테쿰세 일행은 영국의 후원을 잃고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다.
테쿰세는 윌리엄 헨리 해리슨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
I have brought eight hundred braves. You have that many in your hiding place. Bring them out and give me battle; you talked like a brave when we met at Vincennes, and I respected you; but now you hide behind logs and in the earth like a groundhog. Give me an answer.|ko|나는 800명의 용사들을 데리고 왔다. 너희는 너희의 은신처에 그들과 같은 숫자를 가지고 있다. 그들을 데리고 나와서 나와 싸워라; 너는 우리가 빈센스에서 만났을 때 용감하게 말했고, 나는 너를 존경했다; 그러나 이제 너는 땅다람쥐처럼 통나무 뒤와 땅 속에 숨어있다. 대답해 봐.영어
템스 전투 직전, 테쿰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결의를 다졌다.
Our lives are in the hands of the Great Spirit. We are determined to defend our lands, and if it is his will, we wish to leave our bones upon them.|ko|우리 목숨은 위대한 영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방어하기로 결심했고, 그분의 뜻이라면, 그 위에 우리의 뼈를 남기고 싶습니다.영어
4. 1. 터피카누 전투 (1811년)
1811년, 테쿰세는 미국에 맞서 싸운 쇼니족 전사였다. 이들이 처음으로 미국에 도전한 전투는 터피카누 전투로 불린다. 이 전투에서 윌리엄 헨리 해리슨이 이끄는 미국 정부군에게 패배한 테쿰세 일행은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캐나다로 도망쳤다.[6]4. 2. 1812년 전쟁


1812년 6월, 테쿰세는 1812년 전쟁에서 영국과 함께 하기 위해 앰허스트버그의 요새인 포트 몰든에 도착했다. 영국은 서부에 병력과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원주민 동맹은 어퍼 캐나다 방어에 필수적이었다.[6] 영국은 테쿰세를 가장 영향력 있는 인디언 동맹으로 즉시 인식하고 원주민 군대를 지휘하도록 그에게 의존했다. 그와 그의 전사들은 미국의 윌리엄 헐 장군이 캐나다로 건너와 포트 몰든을 점령하겠다고 위협하자 적의 위치를 정찰하고 조사했다. 7월 25일, 테쿰세의 전사들은 앰허스트버그 북쪽에서 미국인들과 소규모 전투를 벌였고, 이 전쟁에서 최초의 미국인 사망자를 냈다.
테쿰세는 국경의 미국 측, 디트로이트 남쪽의 헐의 보급선과 통신선을 차단하는 데 집중했다. 8월 5일, 그는 25명의 전사들을 이끌고 브라운스타운 전투에서 연이은 두 차례의 매복 작전을 펼쳐 훨씬 우세한 병력을 흩어지게 했다. 테쿰세는 헐의 발신 우편을 확보했는데, 그 안에는 헐 장군이 고립될까 두려워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8월 9일, 테쿰세는 마구아가 전투에서 영국 군인들과 합류하여 헐의 통신선을 다시 열려는 시도를 성공적으로 좌절시켰다. 이틀 후 헐은 앰허스트버그에서 마지막 병력을 철수시키면서 캐나다 침공 시도를 종료했다.
8월 14일, 어퍼캐나다의 영국 사령관인 아이작 브록 소장은 포트 맬든에 도착하여 헐을 포트 디트로이트에서 공격할 준비를 시작했다. 테쿰세는 브록의 계획을 듣고 동료들을 바라보며 "이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테쿰세와 브록은 "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는 즉각적인 우정을 형성했다." 브록이 테쿰세를 높이 평가한 것은 테쿰세가 영국 육군 준장으로 임명되었다는 대중적인 믿음에 기여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테쿰세는 약 530명의 전사를 이끌고 디트로이트 포위전에 참여했다. 한 이야기에 따르면 테쿰세는 자신의 병사들이 숲의 한 구멍을 반복해서 지나가게 하여 수천 명의 아메리카 원주민이 요새 밖에 있다는 인상을 주도록 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거의 모든 사람이 놀랍게도 헐은 8월 16일에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브록은 테쿰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 내 관심을 가장 많이 끈 사람은 쇼니족 추장 테쿰세('sic')로, 지난 2년 동안 우리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대한 적극적인 전쟁을 벌여왔다. 더 현명하거나 더 용감한 전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와 대화하는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브록은 테쿰세에게 영국이 아메리카 원주민의 토지 주장을 지지할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그는 상관에게 아메리카 원주민으로부터 "사기적으로 찬탈된" 토지의 반환은 어떠한 평화 조약에서도 고려되어야 한다고 썼다. 디트로이트 점령 소식은 어퍼캐나다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해 인디언 완충 국가를 창설하려는 영국의 논의를 부활시켰다. 이 지역에 잠시 머문 후 브록은 나이아가라 전선으로 돌아갔고, 몇 주 후 전투 중 전사했다. 한편, 영국은 임시 휴전을 협상하고 추가 공격을 중단했다. 테쿰세는 그의 연합이 다른 미국 요새를 공격해야 하고 영국의 지원이 필요했던 시기에 예상치 못한 영국-미국 휴전에 좌절했다. 1812년 9월, 그는 라운드헤드와 함께 600명의 전사를 이끌고 포트 웨인 공격을 지원했지만,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포위전은 실패했다. 포트 해리슨에 대한 또 다른 포위전도 실패했다. 테쿰세는 1812년 남은 기간 동안 프로펫스타운 지역에 머물면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전쟁 노력을 조정했다.

1813년 4월, 테쿰세는 앰허스트버그로 돌아왔다. 한편, 미국인들은 1813년 1월 프렌치타운 전투에서 패배를 겪은 후, 윌리엄 헨리 해리슨의 지휘하에 디트로이트로 밀려나고 있었다. 테쿰세와 라운드헤드는 약 1,200명의 전사들을 오하이오 주 마미 강을 따라 최근 건설된 미국 요새인 포트 메이그로 이끌었다. 영국군이 헨리 프로크터의 지휘 하에 요새를 포위하는 동안 인디언들은 처음에는 거의 활동을 하지 않았다. 요새 밖의 전투는 미국 증원군이 도착하여 영국 포병대를 공격한 후 5월 5일에 시작되었다. 테쿰세는 요새에서 나온 미국군의 공격을 이끌었고, 강을 건너 켄터키 민병대의 부대를 격파하는 것을 도왔다. 영국군과 아메리카 원주민은 요새 밖에서 미국인에게 큰 피해를 입혔지만, 요새를 점령하는 데는 실패했다. 프로크터의 캐나다 민병대와 테쿰세의 많은 전사들이 전투 후 떠났기 때문에 프로크터는 포위를 풀 수밖에 없었다.
테쿰세의 생애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 중 하나는 전투 후에 일어났다. 미국인 포로들은 근처의 포트 마이애미의 폐허로 끌려갔다. 한 무리의 인디언들이 포로들을 죽이기 시작했을 때, 테쿰세는 달려들어 학살을 막았다. 수그덴(1997)에 따르면, "미국인 포로에 대한 테쿰세의 방어는 그의 전설의 초석이 되었으며, 그의 본질적인 고귀함의 궁극적인 증거가 되었다." 일부 기록에는 테쿰세가 포로를 보호하지 못한 헨리 프로크터 장군을 질책했다고 나와 있지만, 이것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테쿰세와 프로크터는 1813년 7월 포트 메이그로 돌아왔다. 테쿰세는 2,500명의 전사를 데리고 왔는데, 이는 그가 이끌었던 가장 큰 규모의 병력이었다. 그들은 강력하게 방어된 요새를 점령할 희망이 거의 없었지만, 테쿰세는 미국인들을 공개 전투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는 요새의 가청 범위 내에서 가짜 전투를 벌여 미국인들이 도우러 나올 것을 기대했다. 이 계략은 실패했고 두 번째 포트 메이그 공방전은 풀렸다. 프로크터는 그 후 부대를 이끌고 샌더스키 강에서 포트 스티븐슨을 공격했고, 테쿰세는 잠재적인 미국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서쪽으로 갔다. 프로크터의 공격은 실패했고, 원정대는 앰허스트버그로 돌아왔다.
쇼니족 연합은 캐나다에서 영국군과 동맹을 맺었다. 이 사실이 미국군을 자극하여 1812년에는 미영 전쟁이 시작되었다. 아이작 브록은 테쿰세의 지원을 얻기 위해 쇼니족에게 독립된 모국을 보장하고, 쇼니족과의 상의 없이 휴전 협상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테쿰세는 브록을 신뢰하고 존경하여 첫 만남 이후 "이것이 남자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브록은 테쿰세를 "인디언의 웰링턴 공"이라고 칭하며 "테쿰세보다 현명하고 용감한 전사는 없다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브록이 1812년 10월 13일의 퀸스턴 하이츠 전투에서 전사한 후 10월 16일의 장례식에는 인디언들이 길 양쪽에 늘어섰다.
테쿰세 일행은 영국군과 함께 디트로이트를 공략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올리버 해저드 페리가 이끄는 미국군이 이리호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영국 측은 보급선이 끊기고 고전했다. 게다가 영국군 사령관이 전사하고 테쿰세에게 협조적이지 않은 헨리 프로크터(Henry Procter)가 후임으로 임명되면서, 테쿰세 일행은 영국의 후원을 잃고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다.
4. 3. 템스 전투와 죽음 (1813년)

1813년 9월 10일 이리 호 전투에서 미국 해군이 승리하자, 프로크터는 앰허스트버그에서 후퇴하기로 결정했다.[6] 테쿰세는 프로크터에게 머물면서 싸울 것을 간청했지만, 프로크터는 미국이 이리 호를 통제하게 되면서 앰허스트버그 방어가 어렵다고 주장하며, 채텀-켄트와 템스강을 따라 결사항전을 할 것을 약속했다.[6] 테쿰세는 마지못해 동의했고, 영국군은 앰허스트버그의 말덴 요새와 공공 건물을 불태운 다음 후퇴를 시작했고, 윌리엄 헨리 해리슨의 군대가 추격했다.[6]
테쿰세는 채텀에 도착하여 프로크터가 강을 따라 더 멀리 후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로크터는 모라비아타운의 델라웨어족 근처에서 결사항전을 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보냈다. 테쿰세는 계획 변경에 분노했지만, 미국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채텀에서 후위전을 이끌었고, 팔에 약간의 부상을 입었다.[6] 테쿰세의 절망한 동맹국 중 많은 사람들이 후퇴하는 동안 탈주하여 그에게 500명의 전사만 남겼다.[6] 프로크터와 테쿰세는 세 배 이상 많은 수의 미국인과 10월 5일 템스 전투에서 맞붙었다. 테쿰세는 미국군을 측면 공격하기를 바라며 오른쪽에 나무가 늘어선 곳에 자신의 병력을 배치했다.[6] 프로크터가 지휘하는 좌익은 거의 즉시 붕괴되었고, 프로크터는 전장을 도주했다.[6] 리처드 멘토 존슨 대령은 인디언에 대한 미국의 돌격을 이끌었다. 테쿰세는 치열한 전투에서 사망했고, 인디언들은 흩어졌다. 미국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6]

전투 후, 미군 병사들은 테쿰세의 시신을 벗기고 두피를 벗겼다. 다음 날, 테쿰세의 시신이 확실히 확인되었을 때, 다른 사람들은 기념품으로 피부를 벗겨냈다.[6] 그의 유해의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가장 초기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시신은 캐나다인들이 가져가 올드 샌드위치 타운에 묻혔다고 한다.[6] 나중 이야기에서는 그가 전장에 묻혔거나, 그의 시신이 비밀리에 옮겨져 다른 곳에 묻혔다고 한다.[6]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모라비아타운에서 싸웠던 오지브웨족의 오샤와노라는 사람이 1860년대에 테쿰세의 시신을 발굴하여 세인트 클레어 강의 세인트 앤 섬에 묻었다고 한다.[6] 1931년, 이 뼈들이 조사되었다. 테쿰세는 젊었을 때 승마 사고로 대퇴골이 부러져 그 이후로 절름발이로 걸었지만, 이 해골의 두 대퇴골은 부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1년에 테쿰세를 기리는 행사에서 유해는 인근 월폴 섬에 묻혔다.[6]
초기에 출판된 기록은 리처드 멘토 존슨이 테쿰세를 죽인 사람으로 식별했다. 1816년, 다른 기록은 다른 병사가 치명적인 총격을 가했다고 주장했다.[6] 이 문제는 존슨이 마틴 반 뷰런의 미국 부통령 후보였던 1830년대에 논란이 되었다. 존슨의 지지자들은 그를 테쿰세의 살해범으로 홍보하며 "럼프시 덤프시, 럼프시 덤프시, 존슨 대령이 테쿰세를 죽였다"와 같은 구호를 사용했다. 존슨의 반대자들은 이 주장에 반대하는 증언을 수집했으며, 수많은 다른 가능성이 언급되었다.[6] 존슨은 1837년에 부통령이 되었으며, 그의 명성은 테쿰세를 죽였다는 주장에 크게 기반을 두었다.[6]
테쿰세의 죽음은 그의 연합의 붕괴로 이어졌다. 남부 크릭 전쟁을 제외하고, 그의 추종자들은 더 이상 싸움을 거의 하지 않았다.[6] 1811년, 테쿰세는 쇼니족의 젊은 전사로서 미국에 전쟁을 걸었다. 백인들은 테쿰세를 쇼니족의 "전투 사령관"(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음)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에 테쿰세가 관여한 일련의 식민지 전쟁에 "테쿰세의 전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5. 테쿰세의 유산
테쿰세는 죽은 후 여러 형태로 추앙받았다. 쇼니 족은 그를 메시아적 인물로 묘사했고, 백인 정착민들은 그를 용맹한 전사이자 훌륭한 지도자로 묘사했다. 현대의 많은 역사가들은 테쿰세를 위대한 지도자로 칭송하며, 그의 이름을 딴 수많은 기념물, 지명, 학교 등이 존재한다.
테쿰세의 죽음 이후, "테쿰세의 저주"라고 불리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5. 1. 테쿰세의 저주
온타리오 테임즈 전투에서 테쿰세가 45세를 일기로 전사했을 때, "10의 자리가 짝수이고 1의 자리가 0인 해에 대통령이 되는 사람은 임기 중 죽을 것이다."라고 저주를 내렸는데, 실제 그의 말대로 7명의 대통령이 죽었다.[1]6. 테쿰세의 연설
테쿰세는 문자를 사용하지 않고 구전 문화를 중시하는 아메리카 원주민으로서 뛰어난 웅변가였다.[1] 그는 부족을 넘어 아메리카 원주민 동족에게 연설했으며, 그의 말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봉기하게 했다.[1] 그는 1810년 8월 12일 빈센느에서 미국 정부가 사기로 그들의 사냥터를 빼앗은 것을 비난하며 주지사 해리슨에게 연설했고,[1] 1806년에는 쇼니족의 토지에 대한 백인 정착민들의 침입에 항의했으며,[1] 1811년에는 "터피카누 전투"를 앞두고 동족들에게 호소했다.[1]
6. 1. 주요 연설 내용
1810년 8월 12일 빈센느에서 테쿰세가 미국 정부가 사기로 그들의 사냥터를 빼앗은 것을 비난하며 주지사 해리슨에게 한 연설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1]> “나는 쇼니족이다. 나의 선조들은 용맹스런 전사들이었다. 그들의 자손들 역시 용맹스런 전사들이다. (중략) 근래의 거래는 옳지 않다. 그것은 한쪽에 유리한 일방적인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팔아야 하는지를 모른다. 모든 사람을 위한 거래는 모든 사람이 관여해야 한다. 모든 인디언은 점유되지 않은 땅에 대해 동등한 권리가 있다. (후략)”
문자를 사용하지 않고 구전 문화를 중시하는 아메리카 원주민으로서 테쿰세 또한 뛰어난 웅변가였다. 테쿰세는 부족을 넘어 아메리카 원주민 동족에게 연설했으며, 그의 말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봉기하게 했다.[1]
1806년, 테쿰세는 쇼니족의 토지에 대한 백인 정착민들의 침입에 항의하며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1]
> 백인들(the white man)의 침략이라는 이 악을 저지하는 유일무이한 방법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일치단결하여 토지에 대한 공통적이고 평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밖에 없다. 토지라는 것은, 일찍이 분할된 적이 없었다. 그것은 우리 아메리카 원주민들 모두의 것이다.
>
> 어떤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도, 그것이 비록 같은 부족끼리라도, 토지를 팔아넘길 권리는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물며, 외부에서 들어온 백인에게 팔 권리는 단호히 없는 것이다.
1811년에는 그는 "터피카누 전투"를 앞두고 동족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1]
> 지금 피쿼트족은 어디에 있는가? 나라간셋족도, 모히칸족도, 포카노켓족도, 그 외 많은 우리 동족의 강력한 부족들은 어디로 가버린 것인가? 그들은 백인의 탐욕과 압박 앞에, 마치 여름 햇살 앞의 눈처럼 사라져버렸다.
>
> 우리는, 그것이 우리 차례가 된 지금, 싸우지도 않고 멸망해야 하는가. 대정령이 우리에게 주신 집, 토지, 선조의 잠든 묘지, 그리고 모든 우리에게 사랑스럽고 신성한 것,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가? 나는 여러분이 나에게 이렇게 외칠 것을 안다. "아니, 결코 그렇지 않다!"라고!
참조
[1]
서적
The War of 1812: America's Second War for Independence
Abelard-Schuman
[2]
웹사이트
9 Things You May Not Know About William Tecumseh Sherman
https://www.history.[...]
2023-04-23
[3]
간행물
New Names of Minor Planets
https://www.wgsbn-ia[...]
2024-04-29
[4]
뉴스
Civilization 7 makers work with Shawnee to bring sincere representation of the tribe to the game
https://apnews.com/a[...]
2024-10-04
[5]
서적
インディアンの「文明化」 ショーニー族の物語
刀水書房
2018-12-07
[6]
문서
See letters from Brock to Lt.-Gen. Prevost
1811-12-02, 1811-12-0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