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프루이 라그랑주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조제프루이 라그랑주는 1736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태어나 1813년 파리에서 사망한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이다. 그는 변분법, 라그랑주 역학, 라그랑주 승수법, 라그랑주점 등을 개발하며 18세기와 19세기 수학과 역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라그랑주는 베를린 아카데미에서 활동하며 많은 논문을 발표했고,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미터법 제정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주요 업적으로는 변분법 창시, 라그랑주 역학 정립, 라그랑주 승수법 고안, 네 제곱수 정리 증명 등이 있으며, 에펠탑에 새겨진 과학자 중 한 명으로 기념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이탈리아의 불가지론자 - 움베르토 에코
움베르토 에코는 이탈리아의 소설가이자 철학자, 기호학자, 중세학자로, 기호학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으며 《장미의 이름》 등의 소설과 저서를 통해 문학 이론과 대중문화에 대한 독창적인 시각을 제시하고 동서양 지식 교류에 기여했다. - 이탈리아의 불가지론자 - 피에로 스라파
피에로 스라파는 고전 경제학 재해석과 신고전주의 경제학 비판, 자본 이론 모순 지적으로 '캠브리지 자본 논쟁'을 촉발한 이탈리아 경제학자로서, 신리카르도 학파의 기초를 다지고 마르크스 경제학, 포스트 케인즈 경제학 등 다양한 사조에 영향을 미쳤다. - 1736년 출생 - 제임스 와트
제임스 와트는 뉴커먼 기관을 개량하여 현대적인 증기 기관을 개발하고 효율성을 극적으로 높여 산업 혁명의 핵심 동력이 되었으며, 그의 업적은 와트(단위)로 기념된다. - 1736년 출생 - 패트릭 헨리
패트릭 헨리는 "자유를 달라,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연설로 유명한 미국의 변호사이자 정치가이며 미국 독립 혁명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인지세법에 대한 버지니아 결의안 제출, 제1차 대륙 회의 참석, 버지니아 주지사 역임, 미국 헌법 제정 반대 등의 활동을 펼쳤으나 노예 소유주였던 점과 헌법 반대 등으로 역사적 평가에 대한 논쟁이 있다. -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 갈릴레오 갈릴레이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이탈리아의 과학자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이론을 반박하고 망원경을 개량하여 천문학적 업적을 남겼으며 지동설을 옹호하다 종교재판에 회부되었지만 근대 과학 발전에 기여하여 "과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 조르다노 브루노
조르다노 브루노는 16세기 이탈리아 철학자, 수학자, 점성술사, 시인으로서, 혁신적인 무한 우주론과 다원 우주론을 주장하다 가톨릭교회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되어 화형당했으나, 그의 사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치며 사상의 자유의 상징이 되었다.
조제프루이 라그랑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출생 이름 | 주세페 루이지 라그란차 |
이름 | 조제프루이 라그랑주 |
출생일 | 1736년 1월 25일 |
출생지 | 토리노, 사르데냐 왕국 |
사망일 | 1813년 4월 10일 |
사망지 | 파리, 프랑스 제1제국 |
시민권 | 사르데냐 왕국 프랑스 제1제국 |
국적 | 이탈리아 프랑스 |
분야 | 수학 천문학 역학 |
소속 기관 | 에콜 노르말 에콜 폴리테크니크 |
모교 | 토리노 대학교 |
학문 지도 교수 | 레온하르트 오일러 (서신 교류) 조반니 바티스타 베카리아 |
주요 제자 | 조제프 푸리에 조반니 플라나 시메옹 드니 푸아송 |
알려진 업적 | 목록 참조 해석역학 변분법 천체역학 수학적 해석 정수론 방정식 이론 |
이름 표기 | |
프랑스어 | Joseph-Louis Lagrange |
이탈리아어 | 주세페 루이지 라그란차 |
일본어 | ジョゼフ=ルイ・ラグランジュ (조제프 루이 라그랑주) |
발음 | |
출생 시 이름 (이탈리아어) | , |
2. 생애
라그랑주의 삶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그가 그의 고향 토리노에서 보낸 기간이다(1736~1766). 두 번째는 그가 베를린 아카데미에서 많은 업적을 남기던 때이다(1766~1787). 세 번째는 그가 파리에서 죽기 전까지 보낸 시간이다(1787~1813). 처음 두 기간이 그가 활발히 연구하고 수많은 과학적 업적을 남기던 때이다. 1754년 변분법의 발견을 시작으로하여 1756년에 변분법을 역학에 응용했고, 1764년과 1766년에 파리 과학 아카데미가 주최한 대회에 자극을 받아 천체역학의 업적을 남겼다. 베를린에 있던 시기는 그가 미적분학뿐만 아니라 역학의 발전에도 많은 공헌을 하던 때이다.
외모는 중간 키에 약간 마른 체격이었으며, 밝은 파란 눈과 창백한 안색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격은 신경질적이고 소심했으며, 논쟁을 혐오하여 논쟁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한 일에 대한 공을 기꺼이 다른 사람에게 돌렸습니다.
그는 논문을 쓰기 시작하기 전에 항상 주제에 대해 생각했으며, 보통 한 번의 지움이나 수정 없이 바로 작성했습니다.
W. W. 라우스 볼[9]
1736년, 사르데냐 왕국의 토리노에서 태어났다. 출생 이름은 '''주세페 루이지 라그랑지아'''()이다.[24] 프로이센 왕국의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베를린 아카데미)의 레온하르트 오일러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당시 부르봉 왕조를 받드는 프랑스 왕국으로 이주하여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서 활동했다. 53세에 맞이한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라플라스, 앙투안 라부아지에 등과 함께 미터법 제정에 참여했다. 또한 에콜 폴리테크니크 교수와 원로원 의원을 역임했다.
프랑스 혁명에 따른 앙투안 라부아지에의 사형 집행에 대해서는 "그의 목을 베는 것은 순간이지만, 그와 같은 두뇌를 가진 자가 나타나려면 100년이 걸릴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생전 마리 앙투아네트(역시 프랑스 혁명과 관련하여 사형당함)의 수학 교사이기도 했으며, 그들의 처형을 애도하며 "왜 내가 남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평생 고통받았다고 한다. 같은 수학자이자 동시대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피에르시몽 라플라스는 당시의 정치 권력에 순응하여 현명하게 세상을 살아남았지만, 라그랑주의 이러한 기질은 그것과 대조적이었다.[25]
== 토리노 (1736-1766) ==
라그랑주는 프랑스인과 이탈리아인의 혈통을 물려받았다. 증조 할아버지는 토리노로 이주한 프랑스 육군 장교였다.[33] 1736년 토리노에서 주세페 로도비코 라그란치아(Giuseppe Lodovico Lagrangiait)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33] 그의 아버지는 사르데냐 왕국의 군자금을 맡고 있었는데, 좋은 사회적 지위와 부를 누렸다. 라그랑주의 어머니 테레사 그로스(Teresa Gros)는 토리노 주변의 작은 마을 캄비아노에 있던 외과의사의 외동딸이었다. 라그랑주는 11명의 어린 형제자녀 중 첫째였다. 가족은 매우 정직하게 살았으나, 라그랑주가 어릴 때 그의 아버지는 투기로 대부분의 재산을 잃었다. 어린 라그랑주는 그의 지위에 대한 스스로의 능력에 의존해야만 했다. 후에 라그랑주는 그 때의 가난이 아니였다면 자신은 수학을 직업으로 삼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하였다.[34] 1766년 베를린으로 떠나기 전까지 그의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가 되는 방향으로 자랐으나, 후에 불가지론자가 되었다.[34][11]
처음에 라그랑주의 아버지는 그가 법을 공부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17세때 우연히 발견한 에드먼드 핼리의 논문을 읽고 수학에 흥미를 가지게 되기 전까지는 그가 다니던 토리노 대학교에서 수학에 대해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35] 그는 아무한테도 도움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혼자서 수학공부를 하였으며, 그 해의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결국 완성된 수학자가 되었고, 포병학교의 교사가 될 수 있었다. 토리노 대학교에서 베카리아 아래에서 물리학을, 필리포 안토니오 레벨리(Filippo Antonio Revelliit)로부터 기하학을 배우기 시작하자 즉시 자신의 재능을 알게 되었다. 기하학에 끌려 수학을 공부하던 라그랑주는 17세에 해석학으로 방향을 바꿨으며 그 후 그 분야를 빠르게 발전시킨다.
1754년 라그랑주는 자신의 짧은 에세이를 기하학자 줄리오 데 파냐노(Giulio de Fagnanoit)에게 편지로 보냈다. 그 에세이는 그가 뉴턴의 이항정리와 두 함수의 곱에 대한 연속적인 미분 사이에서 발견한 유사성을 기반으로 발전시킨 미적분학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또한 그의 발견들이 이탈리아어로 번역되기 전에 레온하르트 오일러에게 라틴어로 서신을 교환하기도 했다. 하지만 1754년 8월 라그랑주는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와 요한 베르누이의 과학적 발견의 동일성을 보았으며 그는 사실 "발견"이 그들의 재산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의 발견을 배낀 것처럼 보이는 것에 대해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이러한 불행도 그를 낙담시키지는 못했다. 그는 1754년 10월 31일 등시곡선문제에 대해 연구한 내용을 파냐노에게 보냈다. 그 첫 에세이는 현재 사라졌지만 후에 같은 주제에 대해 쓰여진 두 개의 회고록이 남아있다.
1755년 12월 말, 파냐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1744년 로잔와 제네바에서 출판된 오일러의 논문 〈최대화 또는 최소화 곡선을 찾는 법〉(Methodus inveniendi lineas curvas maximi minimive proprietate gaudentes, sive solution problematis isoperimetrici latissimo sensu acceptila)에 대해서 썼다. 라그랑주는 이 분야의 결과에 대해서 굉장히 흥미를 갖고 있었으며 결국 변분법으로 발전시키게 된다(‘변분법’이라는 용어는 오일러가 1766년 만들었다). 1755년 8월 12일 오일러에게 어떤 문제에 대해서 순수하게 해석학적으로 접근한 것에 대해 라틴어로 쓰여진 요약을 보냈다. 이것은 그가 19세 밖에 되지 않았을 때 발견한 것이지만 그의 수학적 업적 중에서 가장 우수한 것으로 간주된다 (라그랑주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36]
샤를 에마뉘엘 3세는 1755년 라그랑주를 왕립 포병 이론 및 실습 군사학교의 "수학 조교수(Sostituto del Maestro di Matematica)"로 임명하여 미적분학과 역학 강의를 통해 피에몬테 군대의 벤자민 로빈스와 레온하르트 오일러의 탄도학 이론 조기 채택을 지원하게 했다. 이 직책에서 라그랑주는 공과대학에서 미적분학을 가르친 최초의 인물이었다. 학교의 군 사령관이자 유명한 포병 이론가인 알레산드로 파파치노 단토니에 따르면, 라그랑주는 그의 무심한 강의 스타일, 추상적인 추론, 그리고 포병 및 요새 공학 응용에 대한 무관심으로 문제가 되는 교수임이 입증되었다.[13] 이 학교에서 그의 제자 중 한 명은 프랑수아 다비에였다.[14]
=== 변분법 ===
라그랑주는 변분법의 창시자 중 한 명이다. 1754년부터 그는 등시곡선 문제를 연구하였고 함수의 극값을 찾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함수를 최대화하거나 최소화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라그랑주는 1754년과 1756년 사이에 레온하르트 오일러에게 그의 결과들을 설명하는 여러 편지들을 썼다. 그는 그의 “δ-알고리즘”의 윤곽을 밝혔고, 이것은 변분법의 오일러-라그랑주 방정식으로 이어졌으며 오일러의 초기 해석학을 상당히 간소화하였다.[15] 라그랑주는 그의 생각들을 고전역학의 문제들에 적용시켜 오일러와 피에르루이 모페르튀의 결과들을 일반화하였다.
오일러는 라그랑주의 결과들에 깊이 감명받았다. "라그랑주는 특유의 공손함으로 그가 이전에 쓴 같은 분야를 다루는 논문을 보류하고 있다. 젊은 이탈리아인은 그의 작업을 끝낼 시간을 가지고 반박의 여지가 없는 새로운 미적분학의 발명을 주장하려는 모양이다.”라고 오일러가 말했다고 전해진다.[16] 하지만 이 기사도적인 관점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라그랑주는 1762년과 1773년에 토리노 사회에서의 두 번의 회고에서 그의 방법을 출판했다.
=== 《토리노에서의 기타 연구》 ===
1758년, 라그랑주는 제자들의 도움으로 단체를 설립했는데, 이 단체는 결국 토리노 과학 아카데미라는 법인조직이 되었다. 그의 대부분의 초기 저작들은 《토리노에서의 기타 연구》(Miscellanea Taurinensiala)로 알려진 5권의 결과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 중 많은 부분이 정성들인 논문이었다. 첫 번째 책은 소리의 전달 이론에 대한 논문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에서 그는 아이작 뉴턴의 실수를 지적하고 있으며, 운동에 대한 일반적인 미분방정식을 얻었고, 그것을 직선 운동에 대해 적분했다.
이 책은 또한 가로로 진동하는 끈 문제의 완벽한 해답을 포함하고 있다. 이 논문에서 그는 브룩 테일러, 장 르 롱 달랑베르, 그리고 레온하르트 오일러가 기존에 제시한 해답에 일반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임의의 시간 ''t''에서 곡선의 형태가 으로 주어진다고 결론에 도달했다. 그 논문은 메아리, 맥놀이, 그리고 소리의 혼합에 대한 대가다운 논의를 포함하고 있다. 이 책의 다른 논문들은 점화수열, 확률, 그리고 변분법에 대해 다룬다.
두 번째 책은 첫 번째 책의 변분법에 대한 몇몇 논문의 결과들과 표기법을 구체화하는 긴 논문을 포함하고 있다. 그는 최소작용의 원리를 추론해내고 동역학의 다양한 문제의 해답을 제시함으로써 그 유용성을 설명했다.
세 번째 책은 변분법을 이용한 몇몇 동역학 문제의 해답을 포함하고 있다.
몇몇 논문들은 적분에 대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페르마의 문제: 완전제곱수가 아닌 정수 ''n''이 주어질 때 x2 n + 1 이 완전제곱수인 ''x''를 찾는 것; 그리고 상호 인력이 작용하는 세 물체의 운동에 대한 일반적인 미분방정식에 관한 논문들도 포함되어 있다.
다음으로 그가 한 일은 1764년에 달의 칭동에 대한 것이었고, 또 그는 가상일을 이용해 왜 항상 달의 한쪽 면만이 지구를 바라보는지 설명했다. 그의 해답은 그가 결국 공식적으로 1780년에 보이게 되는 일반화된 운동방정식의 근원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흥미롭다.
== 베를린 아카데미 (1766-1786) ==
1756년에 피에르루이 모페르튀의 도움으로 레온하르트 오일러는 라그랑주를 베를린 아카데미로 데려오려고 하였다. 이후 달랑베르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에게 라그랑주를 추천하며, 베를린의 명망 있는 자리를 위해 토리노를 떠나올 것을 요청했다.[17] 라그랑주는 두 제안을 모두 거절하며, 1765년에 "오일러가 있는 한 베를린은 나에게 전혀 맞지 않아 보입니다."라고 답했다.[17]
1766년 오일러가 베를린을 떠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자 프리드리히 2세는 라그랑주에게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수학자”를 왕궁으로 모시기를 바란다는 편지를 썼고, 라그랑주는 마침내 설득되었다. 그는 이후 20년을 프로이센에서 보냈으며, 베를린과 토리노에서 출판한 수많은 논문을 쓰고 라그랑주 역학을 저술했다. 1767년에는 사촌 비토리아 콩티(Vittoria Conti)와 결혼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자주 라그랑주와 규칙적인 삶의 장점에 대해 토론했으며, 라그랑주는 이 가르침을 받아들여 자신의 마음과 몸을 기계처럼 연구하고 실험을 통해 그가 죽지 않고 해낼 수 있는 정확한 양의 일을 계산했다. 매일 저녁 다음 날 할 정확한 일들을 정했으며, 일이 끝나면 그의 증명법이나 관심사에 대해 어떤 점을 개선할 수 있는지에 대해 간단한 분석을 하였다. 그는 언제나 논문을 작성하기 전에 그 주제들에 대해 깊이 생각했으며 글을 쓸 때에는 하나도 고치지 않고 바로 써내려갔다.[10]
베를린에서 지내는 동안 라그랑주의 건강은 좋지 않았으며, 그의 부인 비토리아의 건강은 훨씬 좋지 않았다. 수년간의 병치레 후 1783년 비토리아가 죽자 라그랑주는 의기소침해졌다. 1786년에는 프리드리히 2세가 죽고, 라그랑주에게 베를린의 날씨는 견디기 힘들었다.[10] 라그랑주는 베를린에서 보낸 20년 동안 토리노 과학원, 베를린 과학원, 프랑스 과학원(Académie française)에 100편에서 200편에 달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병으로 잠시 활동을 중단한 것을 제외하고는 평균적으로 한 달에 한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 프랑스 (1786-1813) ==
1786년에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하자 스페인과 나폴리 등 여러나라로부터 초청을 받았지만 루이 16세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여 파리로 이동하였다. 그는 프랑스에서 그의 방문을 대비하여 루브르에 만들어놓은 특별한 저택과 여러 구별되는 특전들을 전부다 받았으며, 또한 프랑스 과학 학술원의 회원이 되었는데 이곳은 나중에 프랑스 학사원이 된다. 그의 파리생활의 초반에는 그는 우울함에 사로잡혔으며, 심지어는 25년 넘게 작업한 《해석역학》의 복사본을 책상위에 열지 않은 상태로 그대로 놓았었다. 그의 프랑스 혁명에 대한 호기심은 그가 무기력증으로부터 나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 호기심은 점점 혁명이 발달해 가면서 위기감으로 변하게 되었다.
1792년에는 인생에 대한 헤아릴 수 없는 슬픔과 소심함에 빠져있다가 24살의 아델라이드(르네프랑수아즈아델라이드 르 모니에/Renée-Françoise-Adélaïde Le Monnier프랑스어)를 향한 열정으로 옮겨 갔는데 그녀는 그의 친구이며 천문학자인 모니에의 딸이었다. 그녀는 라그랑주와 결혼을 고집했고 헌신적인 부인이 되었으며 라그랑주와 사이가 좋았다.
1793년 9월에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1793년 10월의 포고령에서 모든 외국인들은 프랑스를 떠나야 했지만 그 당시 많은 다른 학자들과 함께 이미 학술원에서 쫓겨난 앙투안 라부아지에가 개입하여 라그랑주는 특별 면제되었다. 1794년 5월 4일, 라부아지에를 비롯한 27명의 세무사가 체포되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를 받고 그날 오후 기요틴에서 처형되었다. 라그랑주는 라부아지에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머리가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지만 이를 키우는데는 백년도 충분치 않을 것이다.''[37]
라그랑주는 프랑스에서 탈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위험에 처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나폴레옹 정부와 같은) 다른 혁명 정부들은 그에게 명예와 특별대우를 해주었다. 이러한 행운이나 안전은 그가 여러 해 전에 표명했던 그의 삶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모든 현자의 제일 원리중 하나는 그것이 아무리 비합리적일지라도 그가 살고 있는 나라의 법을 엄격하게 따르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37] 그가 가진 관점에 대한 놀라운 증언은 1796년 이탈리아 주재 프랑스 공관이 라그랑주 아버지에게 아들의 업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프랑스 공화국을 대신해 축하할 때 나타났다. "그의 천재성은 모든 인류를 명예롭게 하였고, 이런 사람을 낳은 피에몬트의 특별한 영광이다." 나폴레옹이 권력을 얻었을 때 프랑스의 과학 연구를 열렬히 장려했고, 그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후원자였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1799년 상원의원으로 임명된 그는 1802년 그의 조국인 피에몬테를 프랑스 땅으로 합병하는 Sénatus-consulte에 서명하는 첫 번째 사람이 되었다. 따라서 라그랑주는 프랑스 국적을 얻게 되었다.[31] 프랑스인들은 그가 프랑스의 수학자라고 하지만 이탈리아인들은 그가 이탈리아인이라고 계속 주장한다.[37]
=== 측정 단위 ===
1790년대에 라그랑주는 새로운 표준 측정 단위를 만드는 과정에 상당히 관여했다. 탈출을 준비할 때 무게 및 측량 개혁 위원회(''la Commission des Poids et Mesures)''의 위원장직을 제의받았다. 1794년 앙투안 라부아지에가 죽은 뒤로는 미터와 킬로그램을 표준 단위로 최종 선택하고 마침내 십진법 세분화가 1799년의 위원회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은 라그랑주의 영향력에 힘입은 바가 컸다.[18] 라그랑주는 또한 1795년에 경도국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었다.
=== 에콜 노르말 ===
1795년에 라그랑주는 새로이 세워진 에콜 노르말에 수학과 학과장으로써 4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임명되었다.[19] 그가 그곳에서 한 강의는 매우 기본적이었고 특별한 점이 없었지만 이것들을 책으로 묶어 출판되었는데 이는 교수들이 "국민 대표와 서로 간에 미리 쓴 강연을 읽거나 암기하여 말하지 않겠다고 서약"했기 때문이었다.[20] 또한 대의원들이 교수들이 어떻게 수업을 진행하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강의는 속기록으로 작성되었고 출판된 강의록이 상당수의 시민들의 관심을 끌 것이라고도 생각되었다.[20]
=== 에콜 폴리테크니크 ===
라그랑주는 1794년에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의 강의에 참석하는 행운을 누렸던 수학자들에 의하면 그의 강의는 형태나 내용 면에서 모두 완벽하였다. 매우 하찮은 요소들로부터 시작하여 그는 그의 청취자들이 모르는 문제의 범위까지 그들의 사고의 경계를 넓혔다. 그는 학생들에게 항상 대칭적인 기호로 표현된 일반적인 방법의 장점을 강조하였다.
그렇지만 라그랑주는 교사로서 성공적이지는 못하였다. 1795년에 그의 수업을 들은 조제프 푸리에는 다음과 같이 썼다.
: 그의 목소리는 매우 약합니다. 적어도 그는 흥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매우 두드러진 이탈리아 억양을 가지고 있으며 's'를 'z'처럼 발음합니다 [...]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를 제대로 평가할 능력이 없어 그를 환영하지 않지만, '교수들'이 그 부족함을 메워줍니다.[21]
=== 말년 ===
1810년, 라그랑주는 《해석역학》의 완전한 개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1813년 파리의 뤼 드 포부르 생토노레(rue du Faubourg Saint-Honoré) 128번지에서 죽기 전까지 2/3밖에 완성할 수 없었다. 그가 죽기 이틀 전에 나폴레옹은 그에게 화합의 제국 훈장 대십자장을 수여하였다. 파리의 판테온에 묻혔으며, 그의 묘비에 프랑스어로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 조제프루이 라그랑주. 상원의원. 제국의 백작.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수훈자. 화합의 제국훈장(Imperial Order of the Reunion)의 대십자장. 학사원과 경도국의 회원. 1736년 1월 25일 토리노 출생. 1813년 4월 10일 파리에서 생을 마감.

2. 1. 토리노 (1736-1766)
라그랑주는 프랑스인과 이탈리아인의 혈통을 물려받았다. 증조 할아버지는 토리노로 이주한 프랑스 육군 장교였다.[33] 1736년 토리노에서 주세페 로도비코 라그란치아(Giuseppe Lodovico Lagrangiait)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33] 그의 아버지는 사르데냐 왕국의 군자금을 맡고 있었는데, 좋은 사회적 지위와 부를 누렸다. 라그랑주의 어머니 테레사 그로스(Teresa Gros)는 토리노 주변의 작은 마을 캄비아노에 있던 외과의사의 외동딸이었다. 라그랑주는 11명의 어린 형제자녀 중 첫째였다. 가족은 매우 정직하게 살았으나, 라그랑주가 어릴 때 그의 아버지는 투기로 대부분의 재산을 잃었다. 어린 라그랑주는 그의 지위에 대한 스스로의 능력에 의존해야만 했다. 후에 라그랑주는 그 때의 가난이 아니였다면 자신은 수학을 직업으로 삼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하였다.[34] 1766년 베를린으로 떠나기 전까지 그의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가 되는 방향으로 자랐으나, 후에 불가지론자가 되었다.[34][11]처음에 라그랑주의 아버지는 그가 법을 공부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17세때 우연히 발견한 에드먼드 핼리의 논문을 읽고 수학에 흥미를 가지게 되기 전까지는 그가 다니던 토리노 대학교에서 수학에 대해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35] 그는 아무한테도 도움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혼자서 수학공부를 하였으며, 그 해의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결국 완성된 수학자가 되었고, 포병학교의 교사가 될 수 있었다. 토리노 대학교에서 베카리아 아래에서 물리학을, 필리포 안토니오 레벨리(Filippo Antonio Revelliit)로부터 기하학을 배우기 시작하자 즉시 자신의 재능을 알게 되었다. 기하학에 끌려 수학을 공부하던 라그랑주는 17세에 해석학으로 방향을 바꿨으며 그 후 그 분야를 빠르게 발전시킨다.
1754년 라그랑주는 자신의 짧은 에세이를 기하학자 줄리오 데 파냐노(Giulio de Fagnanoit)에게 편지로 보냈다. 그 에세이는 그가 뉴턴의 이항정리와 두 함수의 곱에 대한 연속적인 미분 사이에서 발견한 유사성을 기반으로 발전시킨 미적분학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또한 그의 발견들이 이탈리아어로 번역되기 전에 레온하르트 오일러에게 라틴어로 서신을 교환하기도 했다. 하지만 1754년 8월 라그랑주는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와 요한 베르누이의 과학적 발견의 동일성을 보았으며 그는 사실 "발견"이 그들의 재산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의 발견을 배낀 것처럼 보이는 것에 대해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이러한 불행도 그를 낙담시키지는 못했다. 그는 1754년 10월 31일 등시곡선문제에 대해 연구한 내용을 파냐노에게 보냈다. 그 첫 에세이는 현재 사라졌지만 후에 같은 주제에 대해 쓰여진 두 개의 회고록이 남아있다.
1755년 12월 말, 파냐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1744년 로잔와 제네바에서 출판된 오일러의 논문 〈최대화 또는 최소화 곡선을 찾는 법〉(Methodus inveniendi lineas curvas maximi minimive proprietate gaudentes, sive solution problematis isoperimetrici latissimo sensu acceptila)에 대해서 썼다. 라그랑주는 이 분야의 결과에 대해서 굉장히 흥미를 갖고 있었으며 결국 변분법으로 발전시키게 된다(‘변분법’이라는 용어는 오일러가 1766년 만들었다). 1755년 8월 12일 오일러에게 어떤 문제에 대해서 순수하게 해석학적으로 접근한 것에 대해 라틴어로 쓰여진 요약을 보냈다. 이것은 그가 19세 밖에 되지 않았을 때 발견한 것이지만 그의 수학적 업적 중에서 가장 우수한 것으로 간주된다 (라그랑주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36]
샤를 에마뉘엘 3세는 1755년 라그랑주를 왕립 포병 이론 및 실습 군사학교의 "수학 조교수(Sostituto del Maestro di Matematica)"로 임명하여 미적분학과 역학 강의를 통해 피에몬테 군대의 벤자민 로빈스와 레온하르트 오일러의 탄도학 이론 조기 채택을 지원하게 했다. 이 직책에서 라그랑주는 공과대학에서 미적분학을 가르친 최초의 인물이었다. 학교의 군 사령관이자 유명한 포병 이론가인 알레산드로 파파치노 단토니에 따르면, 라그랑주는 그의 무심한 강의 스타일, 추상적인 추론, 그리고 포병 및 요새 공학 응용에 대한 무관심으로 문제가 되는 교수임이 입증되었다.[13] 이 학교에서 그의 제자 중 한 명은 프랑수아 다비에였다.[14]
=== 변분법 ===
라그랑주는 변분법의 창시자 중 한 명이다. 1754년부터 그는 등시곡선 문제를 연구하였고 함수의 극값을 찾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함수를 최대화하거나 최소화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라그랑주는 1754년과 1756년 사이에 레온하르트 오일러에게 그의 결과들을 설명하는 여러 편지들을 썼다. 그는 그의 “δ-알고리즘”의 윤곽을 밝혔고, 이것은 변분법의 오일러-라그랑주 방정식으로 이어졌으며 오일러의 초기 해석학을 상당히 간소화하였다.[15] 라그랑주는 그의 생각들을 고전역학의 문제들에 적용시켜 오일러와 피에르루이 모페르튀의 결과들을 일반화하였다.
오일러는 라그랑주의 결과들에 깊이 감명받았다. "라그랑주는 특유의 공손함으로 그가 이전에 쓴 같은 분야를 다루는 논문을 보류하고 있다. 젊은 이탈리아인은 그의 작업을 끝낼 시간을 가지고 반박의 여지가 없는 새로운 미적분학의 발명을 주장하려는 모양이다.”라고 오일러가 말했다고 전해진다.[16] 하지만 이 기사도적인 관점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라그랑주는 1762년과 1773년에 토리노 사회에서의 두 번의 회고에서 그의 방법을 출판했다.
=== 《토리노에서의 기타 연구》 ===
1758년, 라그랑주는 제자들의 도움으로 단체를 설립했는데, 이 단체는 결국 토리노 과학 아카데미라는 법인조직이 되었다. 그의 대부분의 초기 저작들은 《토리노에서의 기타 연구》(Miscellanea Taurinensiala)로 알려진 5권의 결과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 중 많은 부분이 정성들인 논문이었다. 첫 번째 책은 소리의 전달 이론에 대한 논문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에서 그는 아이작 뉴턴의 실수를 지적하고 있으며, 운동에 대한 일반적인 미분방정식을 얻었고, 그것을 직선 운동에 대해 적분했다.
이 책은 또한 가로로 진동하는 끈 문제의 완벽한 해답을 포함하고 있다. 이 논문에서 그는 브룩 테일러, 장 르 롱 달랑베르, 그리고 레온하르트 오일러가 기존에 제시한 해답에 일반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임의의 시간 ''t''에서 곡선의 형태가 방정식 으로 주어진다고 결론에 도달했다. 그 논문은 메아리, 맥놀이, 그리고 소리의 혼합에 대한 대가다운 논의를 포함하고 있다. 이 책의 다른 논문들은 점화수열, 확률, 그리고 변분법에 대해 다룬다.
두 번째 책은 첫 번째 책의 변분법에 대한 몇몇 논문의 결과들과 표기법을 구체화하는 긴 논문을 포함하고 있다. 그는 최소작용의 원리를 추론해내고 동역학의 다양한 문제의 해답을 제시함으로써 그 유용성을 설명했다.
세 번째 책은 변분법을 이용한 몇몇 동역학 문제의 해답을 포함하고 있다.
몇몇 논문들은 적분에 대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페르마의 문제: 완전제곱수가 아닌 정수 ''n''이 주어질 때 x2 n + 1 이 완전제곱수인 ''x''를 찾는 것; 그리고 상호 인력이 작용하는 세 물체의 운동에 대한 일반적인 미분방정식에 관한 논문들도 포함되어 있다.
다음으로 그가 한 일은 1764년에 달의 칭동에 대한 것이었고, 또 그는 가상일을 이용해 왜 항상 달의 한쪽 면만이 지구를 바라보는지 설명했다. 그의 해답은 그가 결국 공식적으로 1780년에 보이게 되는 일반화된 운동방정식의 근원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흥미롭다.
2. 1. 1. 변분법
라그랑주는 변분법의 창시자 중 한 명이다. 1754년부터 그는 등시곡선 문제를 연구하였고 함수의 극값을 찾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함수를 최대화하거나 최소화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라그랑주는 1754년과 1756년 사이에 레온하르트 오일러에게 그의 결과들을 설명하는 여러 편지들을 썼다. 그는 그의 “δ-알고리즘”의 윤곽을 밝혔고, 이것은 변분법의 오일러-라그랑주 방정식으로 이어졌으며 오일러의 초기 해석학을 상당히 간소화하였다.[15] 라그랑주는 그의 생각들을 고전역학의 문제들에 적용시켜 오일러와 피에르루이 모페르튀의 결과들을 일반화하였다.오일러는 라그랑주의 결과들에 깊이 감명받았다. "라그랑주는 특유의 공손함으로 그가 이전에 쓴 같은 분야를 다루는 논문을 보류하고 있다. 젊은 이탈리아인은 그의 작업을 끝낼 시간을 가지고 반박의 여지가 없는 새로운 미적분학의 발명을 주장하려는 모양이다.”라고 오일러가 말했다고 전해진다.[16] 하지만 이 기사도적인 관점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라그랑주는 1762년과 1773년에 토리노 사회에서의 두 번의 회고에서 그의 방법을 출판했다.
2. 1. 2. 《토리노에서의 기타 연구》
1758년, 라그랑주는 제자들의 도움으로 단체를 설립했는데, 이 단체는 결국 토리노 과학 아카데미라는 법인조직이 되었다. 그의 대부분의 초기 저작들은 《토리노에서의 기타 연구》(Miscellanea Taurinensiala)로 알려진 5권의 결과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 중 많은 부분이 정성들인 논문이었다. 첫 번째 책은 소리의 전달 이론에 대한 논문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에서 그는 아이작 뉴턴의 실수를 지적하고 있으며, 운동에 대한 일반적인 미분방정식을 얻었고, 그것을 직선 운동에 대해 적분했다.이 책은 또한 가로로 진동하는 끈 문제의 완벽한 해답을 포함하고 있다. 이 논문에서 그는 브룩 테일러, 장 르 롱 달랑베르, 그리고 레온하르트 오일러가 기존에 제시한 해답에 일반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임의의 시간 ''t''에서 곡선의 형태가 방정식 으로 주어진다고 결론에 도달했다. 그 논문은 메아리, 맥놀이, 그리고 소리의 혼합에 대한 대가다운 논의를 포함하고 있다. 이 책의 다른 논문들은 점화수열, 확률, 그리고 변분법에 대해 다룬다.
두 번째 책은 첫 번째 책의 변분법에 대한 몇몇 논문의 결과들과 표기법을 구체화하는 긴 논문을 포함하고 있다. 그는 최소작용의 원리를 추론해내고 동역학의 다양한 문제의 해답을 제시함으로써 그 유용성을 설명했다.
세 번째 책은 변분법을 이용한 몇몇 동역학 문제의 해답을 포함하고 있다.
몇몇 논문들은 적분에 대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페르마의 문제: 완전제곱수가 아닌 정수 ''n''이 주어질 때 x2 n + 1 이 완전제곱수인 ''x''를 찾는 것; 그리고 상호 인력이 작용하는 세 물체의 운동에 대한 일반적인 미분방정식에 관한 논문들도 포함되어 있다.
다음으로 그가 한 일은 1764년에 달의 칭동에 대한 것이었고, 또 그는 가상일을 이용해 왜 항상 달의 한쪽 면만이 지구를 바라보는지 설명했다. 그의 해답은 그가 결국 공식적으로 1780년에 보이게 되는 일반화된 운동방정식의 근원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흥미롭다.
2. 2. 베를린 아카데미 (1766-1786)
1756년에 피에르루이 모페르튀의 도움으로 레온하르트 오일러는 라그랑주를 베를린 아카데미로 데려오려고 하였다. 이후 달랑베르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에게 라그랑주를 추천하며, 베를린의 명망 있는 자리를 위해 토리노를 떠나올 것을 요청했다.[17] 라그랑주는 두 제안을 모두 거절하며, 1765년에 "오일러가 있는 한 베를린은 나에게 전혀 맞지 않아 보입니다."라고 답했다.[17]1766년 오일러가 베를린을 떠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자 프리드리히 2세는 라그랑주에게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수학자”를 왕궁으로 모시기를 바란다는 편지를 썼고, 라그랑주는 마침내 설득되었다. 그는 이후 20년을 프로이센에서 보냈으며, 베를린과 토리노에서 출판한 수많은 논문을 쓰고 라그랑주 역학을 저술했다. 1767년에는 사촌 비토리아 콩티(Vittoria Conti)와 결혼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자주 라그랑주와 규칙적인 삶의 장점에 대해 토론했으며, 라그랑주는 이 가르침을 받아들여 자신의 마음과 몸을 기계처럼 연구하고 실험을 통해 그가 죽지 않고 해낼 수 있는 정확한 양의 일을 계산했다. 매일 저녁 다음 날 할 정확한 일들을 정했으며, 일이 끝나면 그의 증명법이나 관심사에 대해 어떤 점을 개선할 수 있는지에 대해 간단한 분석을 하였다. 그는 언제나 논문을 작성하기 전에 그 주제들에 대해 깊이 생각했으며 글을 쓸 때에는 하나도 고치지 않고 바로 써내려갔다.[10]
베를린에서 지내는 동안 라그랑주의 건강은 좋지 않았으며, 그의 부인 비토리아의 건강은 훨씬 좋지 않았다. 수년간의 병치레 후 1783년 비토리아가 죽자 라그랑주는 의기소침해졌다. 1786년에는 프리드리히 2세가 죽고, 라그랑주에게 베를린의 날씨는 견디기 힘들었다.[10] 라그랑주는 베를린에서 보낸 20년 동안 토리노 과학원, 베를린 과학원, 프랑스 과학원(Académie française)에 100편에서 200편에 달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병으로 잠시 활동을 중단한 것을 제외하고는 평균적으로 한 달에 한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2. 3. 프랑스 (1786-1813)
''이 머리가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지만 이를 키우는데는 백년도 충분치 않을 것이다.''[37]
라그랑주는 프랑스에서 탈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위험에 처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나폴레옹 정부와 같은) 다른 혁명 정부들은 그에게 명예와 특별대우를 해주었다. 이러한 행운이나 안전은 그가 여러 해 전에 표명했던 그의 삶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모든 현자의 제일 원리중 하나는 그것이 아무리 비합리적일지라도 그가 살고 있는 나라의 법을 엄격하게 따르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37] 그가 가진 관점에 대한 놀라운 증언은 1796년 이탈리아 주재 프랑스 공관이 라그랑주 아버지에게 아들의 업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프랑스 공화국을 대신해 축하할 때 나타났다. "그의 천재성은 모든 인류를 명예롭게 하였고, 이런 사람을 낳은 피에몬트의 특별한 영광이다." 나폴레옹이 권력을 얻었을 때 프랑스의 과학 연구를 열렬히 장려했고, 그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후원자였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1799년 상원의원으로 임명된 그는 1802년 그의 조국인 피에몬테를 프랑스 땅으로 합병하는 Sénatus-consulte에 서명하는 첫 번째 사람이 되었다. 따라서 라그랑주는 프랑스 국적을 얻게 되었다.[31] 프랑스인들은 그가 프랑스의 수학자라고 하지만 이탈리아인들은 그가 이탈리아인이라고 계속 주장한다.[37]
=== 측정 단위 ===
1790년대에 라그랑주는 새로운 표준 측정 단위를 만드는 과정에 상당히 관여했다. 탈출을 준비할 때 무게 및 측량 개혁 위원회(''la Commission des Poids et Mesures)''의 위원장직을 제의받았다. 1794년 앙투안 라부아지에가 죽은 뒤로는 미터와 킬로그램을 표준 단위로 최종 선택하고 마침내 십진법 세분화가 1799년의 위원회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은 라그랑주의 영향력에 힘입은 바가 컸다.[18] 라그랑주는 또한 1795년에 경도국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었다.
=== 에콜 노르말 ===
1795년에 라그랑주는 새로이 세워진 에콜 노르말에 수학과 학과장으로써 4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임명되었다.[19] 그가 그곳에서 한 강의는 매우 기본적이었고 특별한 점이 없었지만 이것들을 책으로 묶어 출판되었는데 이는 교수들이 "국민 대표와 서로 간에 미리 쓴 강연을 읽거나 암기하여 말하지 않겠다고 서약"했기 때문이었다.[20] 또한 대의원들이 교수들이 어떻게 수업을 진행하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강의는 속기록으로 작성되었고 출판된 강의록이 상당수의 시민들의 관심을 끌 것이라고도 생각되었다.[20]
=== 에콜 폴리테크니크 ===
라그랑주는 1794년에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의 강의에 참석하는 행운을 누렸던 수학자들에 의하면 그의 강의는 형태나 내용 면에서 모두 완벽하였다. 매우 하찮은 요소들로부터 시작하여 그는 그의 청취자들이 모르는 문제의 범위까지 그들의 사고의 경계를 넓혔다. 그는 학생들에게 항상 대칭적인 기호로 표현된 일반적인 방법의 장점을 강조하였다.
그렇지만 라그랑주는 교사로서 성공적이지는 못하였다. 1795년에 그의 수업을 들은 조제프 푸리에는 다음과 같이 썼다.
: 그의 목소리는 매우 약합니다. 적어도 그는 흥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매우 두드러진 이탈리아 억양을 가지고 있으며 's'를 'z'처럼 발음합니다 [...]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를 제대로 평가할 능력이 없어 그를 환영하지 않지만, '교수들'이 그 부족함을 메워줍니다.[21]
=== 말년 ===
1810년, 라그랑주는 《해석역학》의 완전한 개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1813년 파리의 뤼 드 포부르 생토노레(rue du Faubourg Saint-Honoré) 128번지에서 죽기 전까지 2/3밖에 완성할 수 없었다. 그가 죽기 이틀 전에 나폴레옹은 그에게 화합의 제국 훈장 대십자장을 수여하였다. 파리의 판테온에 묻혔으며, 그의 묘비에 프랑스어로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 조제프루이 라그랑주. 상원의원. 제국의 백작.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수훈자. 화합의 제국훈장(Imperial Order of the Reunion)의 대십자장. 학사원과 경도국의 회원. 1736년 1월 25일 토리노 출생. 1813년 4월 10일 파리에서 생을 마감.
2. 3. 1. 측정 단위
1790년대에 라그랑주는 새로운 표준 측정 단위를 만드는 과정에 상당히 관여했다. 탈출을 준비할 때 무게 및 측량 개혁 위원회(''la Commission des Poids et Mesures)''의 위원장직을 제의받았다. 1794년 앙투안 라부아지에가 죽은 뒤로는 미터와 킬로그램을 표준 단위로 최종 선택하고 마침내 십진법 세분화가 1799년의 위원회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은 라그랑주의 영향력에 힘입은 바가 컸다.[18] 라그랑주는 또한 1795년에 경도국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었다.2. 3. 2.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
1795년에 라그랑주는 새로이 세워진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에 수학과 학과장으로써 4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임명되었다.[19] 그가 그곳에서 한 강의는 매우 기본적이었고 특별한 점이 없었지만 이것들을 책으로 묶어 출판되었는데 이는 교수들이 "국민 대표와 서로 간에 미리 쓴 강연을 읽거나 암기하여 말하지 않겠다고 서약"했기 때문이었다.[20] 또한 대의원들이 교수들이 어떻게 수업을 진행하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강의는 속기록으로 작성되었고 출판된 강의록이 상당수의 시민들의 관심을 끌 것이라고도 생각되었다.[20]2. 3. 3. 에콜 폴리테크니크
라그랑주는 1794년에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의 강의에 참석하는 행운을 누렸던 수학자들에 의하면 그의 강의는 형태나 내용 면에서 모두 완벽하였다. 매우 하찮은 요소들로부터 시작하여 그는 그의 청취자들이 모르는 문제의 범위까지 그들의 사고의 경계를 넓혔다. 그는 학생들에게 항상 대칭적인 기호로 표현된 일반적인 방법의 장점을 강조하였다.그렇지만 라그랑주는 교사로서 성공적이지는 못하였다. 1795년에 그의 수업을 들은 조제프 푸리에는 다음과 같이 썼다.
: 그의 목소리는 매우 약합니다. 적어도 그는 흥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매우 두드러진 이탈리아 억양을 가지고 있으며 's'를 'z'처럼 발음합니다 [...]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를 제대로 평가할 능력이 없어 그를 환영하지 않지만, '교수들'이 그 부족함을 메워줍니다.[21]
2. 3. 4. 말년
1810년, 라그랑주는 《해석역학》의 완전한 개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1813년 파리의 뤼 드 포부르 생토노레(rue du Faubourg Saint-Honoré) 128번지에서 죽기 전까지 2/3밖에 완성할 수 없었다. 그가 죽기 이틀 전에 나폴레옹은 그에게 화합의 제국 훈장 대십자장을 수여하였다. 파리의 판테온에 묻혔으며, 그의 묘비에 프랑스어로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조제프루이 라그랑주. 상원의원. 제국의 백작.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수훈자. 화합의 제국훈장(Imperial Order of the Reunion)의 대십자장. 학사원과 경도국의 회원. 1736년 1월 25일 토리노 출생. 1813년 4월 10일 파리에서 생을 마감.
3. 주요 업적
라그랑주는 변분법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함수형의 극값을 구하는 오일러-라그랑주 방정식을 유도했다.[15] 그는 가능한 제약 조건을 포함하도록 이 방법을 확장하여 라그랑주 승수법을 고안했다.[16] 라그랑주는 미분 방정식을 푸는 방법으로 매개변수 변분법을 발명했고, 미분적분학을 확률 이론에 적용했으며, 대수 방정식의 해법을 연구했다. 그는 모든 자연수는 네 제곱수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27] 그의 논문 "해석 함수론(Théorie des fonctions analytiques)"은 군론의 기초를 일부 마련하여 갈루아를 예견했다. 미적분학에서 라그랑주는 보간법과 테일러 정리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개발했다. 그는 지구, 태양, 달의 삼체 문제(1764년)와 목성의 위성 운동(1766년)을 연구했고, 1772년에 이 문제에 대한 특수 해를 찾아 현재 라그랑주점으로 알려진 것을 발견했다. 라그랑주는 뉴턴 역학을 해석학의 한 분야인 라그랑주 역학으로 변환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역학적 "원리"를 변분법의 간단한 결과로 제시했다.[10]
라그랑주는 베를린에서 보낸 20년 동안 과학적으로 매우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는 『분석역학(Mécanique analytique)』을 저술했을 뿐만 아니라, 토리노 아카데미, 베를린 아카데미, 그리고 프랑스 아카데미에 100편에서 200편에 달하는 논문을 발표했다.[39]
- 수학
- * 범함수의 극값에 대한 오일러-라그랑주 방정식을 유도함으로써 변분법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또한 방법을 확장시켜 가능한 제한조건들을 고려함으로써 라그랑주 승수법에 도달했다.
- * 매개변수변환법으로 알려진 미분방정식의 해법을 발명했으며 이것은 미분법을 확률론에 적용시켜 방정식의 해에 관하여 중요한 기여를 했다.
- * 모든 자연수는 네 제곱수의 합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 * 그의 논문 《해석함수론》(Théorie des fonctions analytiques프랑스어)은 에바리스트 갈루아에 앞서 군론의 기초를 놓았다.
- * 미적분학에서, 라그랑주는 보간법과 테일러 급수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개발했다.
- *
- *
- *
- *
- *
231x231px - * 해석기하학의 여러 측면에 대한 논문도 많이 있다. 그중 1792년과 1793년에 쓴 두 편의 논문에서 그는 2차곡면 방정식(또는 이차곡면체)을 표준형으로 환원했다.
- * 1772년부터 1785년까지 그는 일련의 논문을 통해 편미분 방정식 과학을 창시했다. 이러한 결과의 상당 부분은 1794년에 출판된 오일러의 적분 미적분학 제2판에 수록되었다.
- *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의 미분적분학 강의는 1797년에 출판된 그의 논문 ''Théorie des fonctions analytiques''의 기초를 형성한다.
- ** 다소 유사한 방법이 앞서 1758년 런던에서 출판된 ''Residual Analysis''에서 존 랜던(John Landen영어)에 의해 사용되었다.
- ** 이 책은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 번째 부분은 함수의 일반 이론을 다루고 테일러 정리의 대수적 증명을 제시하지만, 그 타당성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두 번째 부분은 기하학적 응용에 관한 것이며, 세 번째 부분은 역학적 응용에 관한 것이다.
- ** 같은 맥락의 또 다른 논문은 1804년에 발행된 그의 ''Leçons sur le calcul des fonctions''이며, 두 번째 판은 1806년에 나왔다.
- ** 바로 이 책에서 라그랑주는 적분 제약 조건이 있는 변분법 문제의 맥락에서 그의 유명한 라그랑주 승수법을 공식화했다.
- ** 미분적분학과 변분법에 전념한 이러한 저술들은 코시, 야코비, 바이어슈트라스의 연구의 출발점으로 간주될 수 있다.
- * 수론에 관한 업적으로, 모든 자연수는 최대 네 개의 제곱수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정리는 '''라그랑주의 네 제곱수 정리'''로 알려져 있다(1770년).[27]
- * 윌슨의 정리의 증명 중 하나를 발견했다(1773년).[27]
- * 5차 이상의 방정식의 대수적인 풀이 방법에 대해서도 연구하여, 근(해)의 치환 등 군론의 선구가 되는 연구를 수행했고, 이러한 방정식을 풀 수 있는 조건을 제시했다고 여겨진다.[27]
- * 오일러의 약완전수에 관한 예상에 대해서는, 그 후 25년에 걸쳐 증명에 성공했다.[28]
- 변분법
- * 1754년부터 그는 등시곡선 문제를 연구하면서 함수의 극값을 찾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함수형(functional)을 최대화 및 최소화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 * 라그랑주는 1754년부터 1756년까지 레온하르트 오일러에게 여러 편의 편지를 써서 자신의 결과를 설명했다.
- * 그는 자신의 "δ-알고리즘"을 개괄하여 변분법의 오일러-라그랑주 방정식으로 이어졌고 오일러의 이전 해석학을 상당히 단순화했다.[15]
- * 라그랑주는 또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고전역학 문제에 적용하여 오일러와 피에르 루이 모페르튀의 결과를 일반화했다.
- * 오일러는 라그랑주의 결과에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다. "특유의 예의 바른 태도로 그는 이전에 쓴 논문(같은 내용의 일부를 다룬 논문)을 보류하여 젊은 이탈리아인이 자신의 연구를 완성하고 새로운 미적분학의 독보적인 발명을 주장할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고 말해지기도 했지만, 이러한 기사도적인 견해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16]
- * 라그랑주는 1762년과 1773년에 토리노 학회의 두 편의 회고록에 자신의 방법을 발표했다.
- 대수학
- * 이 시기에 그의 많은 논문들은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에 기여했는데, 그것들 중 여럿은 대수학의 문제들에 대한 것이었다.
- ** 이차 형식과 더 일반적인 대수적 형식을 이용한 정수 표기에 대한 논의
- ** 정교화 이론에 관한 소논문
- ** “임의의 유한군 G에 대해 그 부분군 H의 위수는 G의 위수를 나눈다.”라는 라그랑주의 정리
- ** 라그랑주 도출식을 통한 모든 차수의 대수적 방정식을 푸는 일반적인 과정에 대한 그의 1770년과 1771년의 논문.
이 방법은 포함된 보조적인 방정식이 원래 식보다 더 높은 차수를 가져서 5차 이상의 방정식에 대한 해의 일반식을 찾을 수 없었다.
이 방법의 중요성은 2, 3, 4차 방정식을 푸는 이미 알려져 있던 공식들을 하나의 원리로 표현하는 것에 있으며, 이것은 갈루아 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이 논문들에서는 임의의 차수의 이항방정식에 대한 완벽한 해답도 다루고 있다.
- ** 1773년에 라그랑주는 자코비안의 특별한 경우인 3차 함수 행렬식을 생각했다. 그는 또한 원점에 한 꼭짓점이 있는 사면체의 부피를 나머지 3개의 점의 좌표들로 만들어진 판별식의 절댓값의 1/6으로 나타낼 수 있음을 보였다.
- 정수론
- * 그의 초기 저술들 중 여럿은 또한 정수론의 문제들에 대한 것이다.
- ** 라그랑주는 펠 방정식 이 어떠한 완전제곱수가 아닌 정수 ''n''에 대해 자명하지 않은 정수해를 갖는다는 것을 처음으로 증명했다. (1766-1769)[38]
- ** 그는 바슈(Bachet)가 증명 없이 이야기한 “모든 양의 정수는 4개의 제곱수들의 합이다”라는 정리를 1770년에 증명했다.
- ** 그는 ''n'' 이 소수면 (''n'' -1)! + 1은 언제나 ''n''의 배수라는 윌슨의 정리를 1771년에 증명했다.
- ** 1773, 1775년, 그리고 1777년에 쓰여진 그의 저술들은 이전에는 증명되지 않았던 피에르 드 페르마의 몇몇 결과들에 대한 증명을 담고 있다.
- ** 1775년, 그의 《산술연구》(Recherches d'arithmétique프랑스어)에서 한 정수가 라는 형태로 표현될 때의 일반적인 문제를 다루기 위해 이항 이차 형식에 대한 일반적 정리를 만들었다.
- * 그는 연분수 이론에도 기여했다.
- 해석학
- * 해석기하학의 여러 사항들에 대한 수많은 그의 전문들이 있다. 그것들 중 조금 뒤인 1792년과 1793년에 쓰인 2편에서 그는 2차 곡면의 방정식들을 표준 형식 (수학)으로 축소시켰다.
- * 1772년부터 1785년에 그는 편미분 방정식들의 과학을 만들어낸 일련의 긴 저술들을 기고했다. 이들의 한 거대한 부분은 1794년에 출판된 오일러의 적분학의 2판에 정리되었다.
- * 그는 연분수의 정리에도 기여했다.
- * 후대에 라그랑주는 대수 형식의 연구에 미적분학의 기초를 두는 것을 선호하기보다는 무한소의 사용을 완전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1811년에 출판된 ''우리가 무한소 방법의 참뜻을 붙잡았을 때, 또 소수와 궁극적 비율의 기하학적인 방법이나 유도된 함수의 해석적 방법으로 그 결과의 정확성이 밝혔을 때, 우리는 무한히 작은 양들을 우리의 증명을 짧고 간결하게 만드는 확실하고 의미있는 방법으로 사용할 것이다./Mécanique Analytique}}''(해석역학) 제2판 서문에서 그는 무한소의 사용을 정당화하며 다음과 같이 결론짓습니다.
{{인용문프랑스어
- * 1798년에 출판된 그의 《달랑베르]]와 레온하르트 오일러가 각 물질계의 개별 부분의 운동을 추적한 것과 달리, 그는 계의 배열을 계의 자유도와 같은 수의 변수 x(일반화 좌표라 부름)로 결정하면, 계의 운동 에너지와 퍼텐셜 에너지를 그 변수로 표현할 수 있으며, 미분 방정식을 단순한 미분을 통해 유도할 수 있음을 보였다.
- ** 예를 들어, 강체 역학에서 그는 특정 문제의 고려를 현재 일반적으로 다음 형태로 쓰이는 일반 방정식으로 대체한다.
:
여기서 T는 계의 운동 에너지를, V는 계의 퍼텐셜 에너지를 나타낸다.
- ** 그런 다음 그는 이 방정식을 푸는 수단으로 라그랑주 승수 방법을 제시했는데, 이 방법이 처음으로 발표된 것은 아니었다.[23]
- ** 여기서 제시된 다른 사소한 정리들 중에서, 주어진 구속 조건 하에서 주어진 충격량에 의해 물질계에 전달되는 운동 에너지는 최대이고, 최소 작용의 원리라는 명제를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 ** 모든 분석이 매우 우아하여 윌리엄 로완 해밀턴 경은 이 저작을 과학적인 시라고 묘사할 수 있다고 말했다.
- ** 라그랑주는 역학이 실제로 시간과 공간의 점의 세 좌표라는 4차원 기하학과 유사한 순수 수학의 한 분야라고 언급했으며,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 ** 처음에는 이 책을 출판할 인쇄업체를 찾을 수 없었지만, 르장드르가 마침내 파리의 한 회사를 설득하여 1788년 라플라스, 쿠쟁, 르장드르(편집자), 콩도르세의 감독하에 출판되었다.[10]
역학 연구에서 라그랑주는 기존의 기하학적 접근을 배제하고, 달랑베르의 원리와 가상속도의 원리의 관점에서 최소 작용의 원리를 기반으로 순수하게 해석학적인 역학, 즉 해석역학**을 구축하여 뉴턴 역학의 발전과 성숙에 기여하였다.
- ** 예를 들어, 다른 원리를 도입하지 않고 해석학적 방법만으로 더 보편적인 에너지 등의 여러 보존 법칙을 유도하였다.
- ** 1788년에는 이러한 성과를 저서 『해석역학』(Mécanique analytique)으로 출판하였다.
- * 천문학에서는 레온하르트 오일러와 함께 라그랑주점(L1부터 L5의 5개의 해)의 발견에 기여하였다. 이것은 지구와 달과 같은 두 천체의 계에서, 세 번째 작은 천체가 이 두 천체와의 상대 위치를 바꾸지 않고 안정적으로 계속 운동할 수 있는 다섯 개의 위치 좌표점이다.
- 라그랑주 역학
- * 1772년과 1788년 사이에 라그랑주는 고전적인 뉴턴 역학을 간략화 시킨 식과 쉬운 계산들로 재구성했고 이러한 역학은 현재 라그랑주 역학이라 불린다.[39]
역학 연구에서 라그랑주는 기존의 기하학적 접근을 배제하고, 달랑베르의 원리와 가상속도의 원리의 관점에서 최소작용의 원리를 기반으로 순수하게 해석학적인 역학, 즉 해석역학**을 구축하여 뉴턴 역학의 발전과 성숙에 기여하였다.
- ** 예를 들어, 다른 원리를 도입하지 않고 해석학적 방법만으로 더 보편적인 에너지 등의 여러 보존 법칙을 유도하였다.
- ** 1788년에는 이러한 성과를 저서 『해석역학』(Mécanique analytique프랑스어)으로 출판하였다.
- * 이러한 다양한 논문들뿐만 아니라 라그랑주는 그의 위대한 논문 《해석역학》(역학]]을 유도해 낼 수 있다.[39]
- ** 이 책의 목적은 모든 대상은 내재적으로 하나의 원리에 포함된다는 것을 보이고 어떤 특정한 결과도 얻어낼 수 있는 일반화된 방정식을 제시하는 것이다.
- ** 그의 일반화 좌표를 사용하는 방법은 아마 그의 해석의 가장 기발한 결과일 것이다.
- ** 장 르 롱 달랑베르나 레온하르트 오일러가 했던 것처럼 물질계의 각 부분의 운동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는 만약 우리가 계의 자유도와 동일한 충분한 수의 변수들로 그 구성을 알 수 있다면 계의 운동 에너지와 위치 에너지는 그 변수들로 표현될 수 있고, 운동에 대한 미분방정식들도 따라서 간단한 미분으로 유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 ** 예를 들면, 강체의 동역학에서 그는 개별 문제에 관심을 두는 것 대신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방정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
4. 평가와 영향
오일러는 라그랑주를 베를린 과학 아카데미 선출을 위해 추천했고, 그는 1756년 9월 2일에 선출되었다.[29] 그는 1790년 에든버러 왕립학회 회원, 1806년에는 런던 왕립학회 회원 및 스웨덴 왕립과학원 외국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791년 5월 왕립학회 펠로우로 선출되었으며[29], 1808년 나폴레옹은 라그랑주를 레지옹 도뇌르 훈장 대장과 제국 백작으로 임명했다. 그는 파리에서 사망하기 일주일 전인 1813년에 앵페리알 드 라 뤼니옹 훈장 그랑 크루아를 수여받았으며, 프랑스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들에게 헌정된 영묘인 판테온에 묻혔다.[29]
라그랑주는 달의 칭동에 관한 논문으로 1764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상을 수상했다. 그는 또한 1772년, 1774년, 1778년의 상을 공동 수상하거나 단독 수상했다.
라그랑주는 에펠탑이 처음 개장했을 때 1단계에 있는 명판에 기념된 72명의 저명한 프랑스 과학자 중 한 명이다. 파리 5구에 있는 뤼 라그랑주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토리노에서는 그의 생가가 여전히 서 있는 거리가 비아 라그랑주로 명명되어 있다. 라그랑주라는 달의 크레이터와 1006 라그랑제아 소행성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5. 기타
조제프루이 라그랑주는 중간 키에 날씬한 체격이었으며, 창백한 푸른 눈과 핏기가 없는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신경질적이고 겁이 많은 성격으로, 논쟁을 몹시 싫어했다. 그는 논쟁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한 일을 다른 사람의 공으로 돌리기도 했다. 라그랑주는 완벽한 준비를 거쳐 논문을 수정 없이 쓸 수 있었다.
6. 상훈
레온하르트 오일러는 베를린 아카데미 회원 선거에서 라그랑주를 지지하여, 1756년 9월 2일에 선정되었다.[29] 1790년에는 에든버러 왕립 협회의 일원으로 선정되었고, 1806년에는 왕립 협회의 일원 및 스위스 왕립 과학 아카데미의 외국 회원으로 뽑혔다. 1808년, 나폴레옹은 라그랑주를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세훈자로 선정하고 제국의 백작지위를 수여하였다. 1813년에는 파리에서 죽기 1주일 전에 Ordre Impérial de la Réunion에서 최고 훈장을 받았다.[29]
라그랑주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서 달의 칭동에 관한 논문으로 1764년 상을 받았다. 1766년에는 학회가 목성의 위성의 운동에 관한 문제를 제안하였고, 그는 다시 상을 받았다. 그는 1772년, 1774년, 1778년에도 수상하였다.
라그랑주는 에펠탑 1층에 있는 명판에 기념되고 있는 72명의 저명한 프랑스 과학자 중 한 명이다. 파리 5구에는 라그랑주 가(街)(Rue Lagrange프랑스어)가 있으며, 토리노에 있는 그의 생가가 있는 거리 역시 라그랑주 가(Via Lagrangeit)이다. 달의 라그랑주 분화구도 그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다.
7. 같이 보기
참조
[1]
백과사전
Lagrange, Joseph Louis
http://www.lexico.co[...]
Oxford University Press
[2]
사전
Lagrange
http://dictionary.re[...]
[3]
사전
Lagrange
2019-08-06
[4]
사전
Lagrange
2019-08-06
[5]
백과사전
Joseph-Louis Lagrange, comte de l’Empire
https://www.britanni[...]
[6]
웹사이트
Luigi Lagrange
https://archive.org/[...]
Accademia delle Scienze di Torino
2014-01-02
[7]
웹사이트
Giuseppe Luigi Lagrange
http://www.treccani.[...]
Enciclopedia Italiana
2012-07-08
[8]
백과사전
Encyclopedia of Space and Astronomy
https://books.google[...]
[9]
서적
Joseph Louis Lagrange (1736–1813)
http://www.maths.tcd[...]
1908
[10]
웹사이트
Lagrange
http://www-gap.dcs.s[...]
[11]
서적
Mathematics and the Search for Knowledge
Oxford University Press
1986
[12]
학술지
IV. An Instance of the Excellence of the Modern ALGEBRA, in the Resolution of the Problem of finding the Foci of Optick Glasses universally
https://doi.org/10.1[...]
[13]
서적
The Heirs of Archimedes: Science and the Art of War through the Age of Enlightenment
MIT Press
2005
[14]
서적
Filosofia E Historia Da Ciência No Cone Sul. 3 Encontro
https://books.google[...]
AFHIC
2008
[15]
학술지
Isoperimetric Problems in the Variational Calculus of Euler and Lagrange
[16]
서적
The genesis of Mécanique analytique
[17]
서적
Optimal Control
https://books.google[...]
Springer
2000
[18]
서적
Mémoires de la classe des Sciences mathématiques et physiques de l'Institut de France, Année 1812, Seconde Partie
Firmin Didot
1816
[19]
서적
Séances des écoles normales, recueillies par des sténographes, et revues par les professeurs. Seconde partie. Débats. Tome premier
L. Reynier
1795
[20]
서적
Séances des Écoles normales, recueillies par des sténographes, et revues par les professeurs. Nouvelle édition. Leçons. Tome premier
Cercle-Social
1795
[21]
서적
Convolutions in French Mathematics, 1800–1840
https://books.google[...]
Birkhäuser
[22]
서적
Œuvres, t.1, 671–732
http://gdz.sub.uni-g[...]
[23]
서적
The Origins of Analytic Mechanics in the 18th Century
[24]
웹사이트
Joseph-Louis Lagrange, comte de l’Empire French mathematician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3-01-07
[25]
서적
重力と力学的世界
現代数学社
1981-01
[26]
일반
[27]
일반
[28]
일반
[29]
웹사이트
Library and Archive catalogue
https://collections.[...]
The Royal Society
2019-06-06
[30]
일반
[31]
웹사이트
Giuseppe Luigi Lagrange
http://www.treccani.[...]
Enciclopedia Italiana
2012-07-08
[32]
웹인용
우주와 천문학의 백과사전
http://books.google.[...]
2012-12-04
[33]
웹사이트
Joseph-Louis Lagrange
[34]
웹사이트
http://preview.brita[...]
[35]
서적
수학과 지식을 위한 탐구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
1986
[36]
백과사전
조제프루이 라그랑주
http://www.encyclope[...]
[37]
웹사이트
Lagrange
(URL 없음, Wayback Mac[...]
2007-03-25 # 아카이브 날짜로 설정
[38]
웹사이트
Solution d'un Probleme d'Arithmetique
http://gdz.sub.uni-g[...]
[39]
서적
18세기 해석역학의 기원
Hans Niels Jahnke (편집자)
200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