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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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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테크노는 1980년대 초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시작된 전자 음악 장르이다. 후안 아킨스, 데릭 메이, 케빈 손더슨을 중심으로 한 디트로이트 테크노는 크라프트베르크, 조르조 모로더 등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 4/4 박자, 반복적인 리듬, 신시사이저와 드럼 머신을 사용하며, 미래주의적이고 기술적인 사운드를 특징으로 한다. 1980년대 후반 유럽에서 레이브 문화와 함께 인기를 얻었으며, 미니멀 테크노, 앰비언트 테크노 등 다양한 하위 장르로 발전했다. 1990년대에는 한국에서도 일본 테크노의 영향을 받아 테크노 씬이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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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노
장르 정보
스타일 기원하우스, 일렉트로, 신스팝, 하이-NRG, EBM, 유로 디스코, 이탈로 디스코, 포스트 디스코, 시카고 하우스, 인더스트리얼, 크라우트록
문화적 기원1980년대 중반, 미국 (디트로이트), 서독 (프랑크푸르트, 베를린)
파생 장르얼터너티브 댄스, 트랜스
하위 장르애시드 테크노, 앰비언트 테크노, 버밍엄 사운드, 블립 테크노, 디트로이트 테크노, 덥 테크노, 하드코어 테크노, 인더스트리얼 테크노, 미니멀 테크노
퓨전 장르아프로 테크, 일렉트로 클래시, 유로댄스, 곰, 게토테크, 하드베이퍼, IDM, 쿠두루, 샤펠, 테크스텝, 테크스타일, 테크 하우스, 토이타운 테크노
지역적 장면멕시코, 브라질 북부
지역적 장면 (세부)디트로이트
관련 토픽전자 악기, 컴퓨터 음악, 전자 음악 레코드 레이블 목록, 레이브, 프리 파티, 테크니발
다른 이름
일본어テクノ
영어Techno
악기

2. 역사적 배경

코드워 에순은 크라프트베르크를 테크노에 있어 머디 워터스롤링 스톤스에 해당하는 존재, 즉 기원이자 본질이라고 평가했다.[15] 후안 아킨스는 크라프트베르크조르조 모로더의 음악, 특히 도나 서머와의 협업과 모로더의 앨범 ''E=MC2'''에 초기부터 매료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1980년경 크라프트베르크, 텔렉스, 디보, 조르조 모로더, 개리 누먼의 음악만 담긴 테이프를 차에 싣고 다녔다고 회상했다.[25] 크라프트베르크의 음악은 "깔끔하고 정확"했으며, 사이키델릭한 "이상한 UFO 사운드"와는 대조적이었다.[16]

데릭 메이크라프트베르크 등 유럽 신시사이저 음악의 영향을 언급하며, "세련되고 깔끔했고, 마치 우주 공간 같았다. 디트로이트는 아름다움이 부족한 추한 혼란이었기에 우리는 이 음악에 매료되었다"고 말했다.[17] 그는 자신의 음악이 유럽 신시사이저 전통의 연장선에 있다고 보았다.[18] 또한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울트라복스도 영향을 주었다고 언급했다.[19] 케빈 손더슨은 유럽 음악의 영향보다는 전자 장비로 음악을 만드는 아이디어에 더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다.[18]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 디트로이트의 고등학교 클럽들은 젊은 프로모터들이 지역 댄스 음악 신을 발전시킨 장소였다. DJ들은 더 많은 관객을 유치하기 위해 협력하여 믹싱 기술과 사운드 시스템을 판매했다. 지역 교회, 빈 창고, 사무실, YMCA 강당은 음악이 육성된 초기 장소였다.[30]

후안 아킨스는 테크노 장르를 확립하는 데 기여한 인물로, "창시자"로 널리 인정받는다.[31] 1980년대 초, 아킨스는 사이버트론으로 활동하며 "클리어"(1983)와 "테크노 시티"(1984) 등의 곡을 발표했다.[34][35] 그는 앨빈 토플러에게서 영감을 받은 "테크노"라는 용어를 사용했다.[36] 이후 모델 500이라는 예명으로 음악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1985년 메트로플렉스 레코드 레이블을 설립했다.[38] 같은 해, 모델 500의 "No UFO's"는 최초의 테크노 작품으로 여겨지며 디트로이트 음악 신에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39][40][41][42][43]

2017년 디트로이트 프리메이슨 사원에서 공연하는 벨빌 3인조. 왼쪽부터 후안 아킨스, 케빈 손더슨, 데릭 메이


초기 테크노 프로듀서들은 유럽 신스팝 미학과 소울, 펑크, 디스코, 일렉트로를 결합하여 EDM을 새로운 영역으로 이끌었다. 이들은 모타운의 유산과 R&B 전통을 거부하고 기술적 실험을 받아들였다.[51][52][53][54]

1988년, 버진 레코드는 디트로이트 출신 레코드의 히트에 주목하여 편집 앨범 ''테크노! 디트로이트의 새로운 댄스 사운드''를 발매했다. 이 앨범은 영국 청중에게 "테크노"라는 단어를 소개했으며,[66][5] 테크노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유럽에서 음악과 프로듀서들이 발판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73]

1980년대 후반, 영국에서 하우스 음악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테크노는 더욱 발전했다. 1990년대 초, 영국에서는 레이브 이후의 DIY 기반 프리 파티 문화가 자리 잡았다.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는 영국에서 온 여행 사운드 시스템의 영향으로 인해 레이브가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대륙 전역으로 확장되었다.

1990년대 초 미국에서는 디트로이트, 뉴욕시, 시카고, 올랜도 등 지역적인 장면을 제외하고는 테크노에 대한 관심이 제한적이었다. 많은 디트로이트 출신 프로듀서들은 유럽으로 눈을 돌렸다.[101] 1990년부터 1992년 사이에 미국에서 제작된 테크노의 발전은 유럽, 특히 독일에서 테크노의 확장과 최종적인 분화에 박차를 가했다.[103][104]

1993~94년 레이브는 독일에서 주류 음악 현상이 되었다. 동시에 프랑크푸르트에서는 하르트하우스(Harthouse) 레이블이 대표하는 일렉트로 트랜스 음악이 대안으로 여겨졌다.[94] 1990년대 초, 테크노는 유럽에서 자극적인 사운드를 가진 첨단의 댄스 음악이라는 이미지와 함께 자리 잡게 되었다. 발생지인 미국에서는 언더그라운드 음악으로 남았고,[221] 오히려 유럽 국가들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92년, 유럽 레이브 이후 등장한 테크노의 특징을 더욱 발전시킨 것으로 하드 미니멀이 있다. 대표적인 아티스트로는 제프 밀스가 있다. 이후에도 테크노는 다양한 요소를 받아들이면서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현재에 이르렀다.

2. 1. 黎明期 (여명기)

코드워 에순은 크라프트베르크를 테크노에 있어 머디 워터스롤링 스톤스에 해당하는 존재, 즉 기원이자 본질이라고 평했다.[15] 후안 아킨스는 크라프트베르크와 조르조 모로더의 음악, 특히 도나 서머와의 협업과 모로더의 앨범 ''E=MC2'''에 초기부터 매료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1980년경 크라프트베르크, 텔렉스, 디보, 조르조 모로더, 개리 누먼의 음악만 담긴 테이프를 차에 싣고 다녔다고 회상했다.[25] 크라프트베르크의 음악은 "깔끔하고 정확"했으며, "사이키델릭"한 "이상한 UFO 사운드"와는 대조적이었다.[16]

데릭 메이는 크라프트베르크 등 유럽 신시사이저 음악의 영향을 언급하며, "세련되고 깔끔했고, 마치 우주 공간 같았다. 디트로이트는 아름다움이 부족한 추한 혼란이었기에 우리는 이 음악에 매료되었다"고 말했다.[17] 그는 자신의 음악이 유럽 신시사이저 전통의 연장선에 있다고 보았다.[18] 또한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울트라복스도 영향을 주었다고 언급했다.[19] YMO의 노래 "테크노폴리스"(1979)는 디트로이트 테크노 발전에 "흥미로운 기여"를 했으며, 아킨스와 데이비스가 사이버트론에서 탐구할 개념을 예고했다.[20]

케빈 손더슨은 유럽 음악의 영향보다는 전자 장비로 음악을 만드는 아이디어에 더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다.[18] 초기 디트로이트 테크노 아티스트들은 공상 과학 이미지를 통해 변화된 사회에 대한 비전을 표현했다.[21]

아킨스, 손더슨, 메이, 폴크스는 음악가, "믹스" 테이프 거래자, DJ 지망생으로서 공통된 관심사를 가졌다.[22] 그들은 1977년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DJ 찰스 "일렉트리파잉 모조(The Electrifying Mojo)" 존슨의 라디오 프로그램 ''미드나잇 펑크 어소시에이션(Midnight Funk Association)''을 통해 음악적 영감을 얻었다.[23] 모조의 프로그램은 조르지오 모로더, 크라프트베르크,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탱게린 드림 등의 전자 음악과 파르라멘트 펑카델릭의 펑크, 디보와 비-52스 등의 뉴 웨이브 음악을 함께 틀었다.[24] 아킨스는 모조가 디스코 대신 펑크 음악을 많이 틀었고, '(Not Just) Knee Deep'이 디스코 시대의 종말을 알렸다고 말했다.[25]

디트로이트에서 디스코가 잠시 유행했지만, 많은 이들이 믹싱을 시작했고, 후안 아킨스도 그중 하나였다. 아킨스는 메이에게 믹싱을 가르쳤고, 1981년 "매직 후안", 데릭 "메이데이"와 다른 세 명의 DJ는 딥 스페이스 사운드웍스(Deep Space Soundworks)[26][27](딥 스페이스(Deep Space)라고도 함)[28]라는 파티 크루를 결성했다. 그들은 모조에게 믹스를 제공했고, 다음 해에 실제로 그렇게 했다.[25]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 브랫츠, 샤리바리, 치아바티노, 코메레이즈, 게이블스, 하드웨어, 라파엘, 루머스, 스놉스, 위켄즈[29] 등의 고등학교 클럽들은 젊은 프로모터들이 지역 댄스 음악 신을 발전시켰다. DJ들은 더 많은 관객을 유치하기 위해 협력하여 믹싱 기술과 사운드 시스템을 판매했다. 지역 교회, 빈 창고, 사무실, YMCA 강당은 음악이 육성된 초기 장소였다.[30]

후안 아킨스는 테크노 장르를 확립하는 데 기여한 인물로, "창시자"로 널리 인정받는다.[31] 1995년 ''키보드 매거진''은 그를 키보드 음악 역사상 "12명의 중요 인물"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32]

1980년대 초, 아킨스는 리처드 데이비스(이후 존-5 추가)와 함께 사이버트론으로 녹음했다. 그들은 록과 일렉트로 영향을 받은 음악을 발표했는데, "클리어"(1983)와 "테크노 시티"(1984)가 성공적이었다.[34][35]

아킨스는 사이버트론의 음악을 묘사하기 위해 앨빈 토플러에게서 영감을 받은 "테크노"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크라프트베르크 등을 테크노로 분류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크라프트베르크와 사이버트론을 일렉트로로 간주한다.[36] 아킨스는 ''코스믹 카스''(1982)를 독특한 독일식 신시사이저 펑크로 여겼지만, 아프리카 밤바타의 "플래닛 록"(1982)을 듣고 더 우수한 예라고 생각하여 실험을 계속했고, 손더슨과 메이에게도 권유했다.[37]

아킨스는 모델 500이라는 예명으로 음악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1985년 메트로플렉스 레코드 레이블을 설립했다.[38] 같은 해, 모델 500의 "No UFO's"는 최초의 테크노 작품으로 여겨지며 디트로이트 음악 신에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39][40][41][42][43] 아킨스는 "No UFO's"가 시카고에서 히트할 줄 몰랐으며, 데릭 메이가 시카고에 레코드를 가져가 DJ들에게 주면서 알려졌다고 말했다.[25]

시퀀서와 신시사이저 가격이 저렴해지면서, 초기 프로듀서들은 유럽 신스팝 미학과 소울, 펑크, 디스코, 일렉트로를 결합하여 EDM을 미지의 영역으로 밀어붙였다. 그들은 모타운의 유산과 R&B 전통을 거부하고 기술적 실험을 받아들였다.[51][52][53][54]

1988년 데릭 메이는 모타운에 빚이 없는 "포스트 소울" 사운드로, 10년 후 다른 기자는 모타운의 비트 중심 스타일과 당시 음악 기술을 결합한 "소울풀한 그루브"로 해석했다.[52][53][55] 메이는 테크노 사운드를 "...조지 클린턴과 크라프트베르크가 시퀀서 하나만 가지고 엘리베이터에 갇힌 것 같다"라고 설명했다.[52][53] 후안 아킨스는 "기술처럼 들리는 음악이지, 음악처럼 들리는 기술이 아니다"라고 말했다.[56]

주목받은 최초의 디트로이트 작품 중 하나는 데릭 메이의 "스트링스 오브 라이프"(1987)였는데, 이 곡은 1987~1988년 하우스 음악 붐(참조 사랑의 두 번째 여름) 기간 동안 테크노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57]

1982년, 프랑크푸르트의 시티 뮤직 레코드 매장에서 일하던 DJ 탈라 2XLC는 디페쉬 모드, 프런트 242, 헤븐 17, 크라프트베르크, 뉴 오더와 같은 아티스트들을 분류하기 위해 "테크노"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단어는 기술적으로 제작된 댄스 음악을 간략하게 표현하는 약어로 사용되었다. 탈라의 분류는 스벤 베스를 포함한 다른 DJ들에게 참고 자료가 되었다.[77][78] 탈라는 1984년 프랑크푸르트의 노 네임 클럽에서 테크노클럽을 설립하면서 독일에서 이 용어를 더욱 대중화했다. 이 클럽은 1987년 도리안 그레이 클럽으로 이전했다.[77][78]

2. 2. 転機 (전환기)

1988년 중반, 영국에서 닐 러스턴과 데릭 메이가 제작한 컴필레이션 앨범 ''테크노! 디트로이트의 새로운 댄스 사운드''[64][65]가 발매되어 영국 청중에게 "테크노"라는 단어를 소개했다.[66][5] 원래 이 앨범의 가제는 ''디트로이트의 하우스 사운드''였으나, 후안 아킨스의 곡 "Techno Music"이 추가되면서 "테크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68] 러스턴, 아킨스, 메이, 케빈 샌더슨은 함께 앨범 이름을 결정했으며, 벨빌 3인조는 이 음악을 지역적인 하우스 브랜드로 부르는 것을 반대하고 이미 사용 중이던 "테크노"를 선호했다.[5][68][69]

이 앨범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이너 시티의 "빅 펀"(1988)은 1988년 가을 큰 인기를 얻으며 크로스오버 히트곡이 되었다.[96] 버진 레코드는 앨범 판매 부진에 실망했지만,[72] 이 앨범은 테크노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유럽에서 음악과 프로듀서들이 발판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73]

1988년, 버진 레코드는 디트로이트 출신 레코드의 히트에 주목하여 편집 앨범 발매를 결정했다. 홍보를 위해 영국 잡지 「더 페이스」(The Face)에서 디트로이트 특집 기사를 싣고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인터뷰 중 "여러분의 음악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라는 질문에 후안 아킨스가 "우리는 테크노라고 부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인터뷰 내용과 동일한 제목으로 앨범 「테크노! 디트로이트의 새로운 댄스 사운드」(Techno! - The New Dance Sound Of Detroit)가 발매되었다.[214][215][216] 이 앨범은 히트했고, 싱글로 발매된 이너 시티의 「빅 펀」(Big Fun)은 영국 댄스 차트 톱 10에 진입하며 전 세계적으로 600만 장의 대히트를 기록했다.[217] 이를 통해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테크노"라는 명칭이 확립되었다.

2. 3. 勃興期 (발흥기)

1980년대 후반, 영국에서 하우스 음악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마이크 피커링, 마크 무어, 콜린 페이버, 그레이엄 파크(DJ)와 같은 DJ들이 초창기 하우스 음악의 성공에 기여했다.[50]

초기 테크노 프로듀서들은 유럽 신스팝 미학과 소울, 펑크, 디스코, 일렉트로의 요소들을 결합하여 EDM을 새로운 영역으로 이끌었다. 이들은 모타운의 유산과 R&B와 소울의 전통적인 공식을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기술적 실험을 추구했다.[51][52][53][54]

이렇게 만들어진 디트로이트 사운드는 1988년 데릭 메이와 한 기자에 의해 모타운에 대한 빚이 없는 "포스트 소울" 사운드로 해석되었지만,[52][53] 10년 후 다른 기자는 모타운의 비트 중심 스타일과 당시의 음악 기술을 결합한 "소울풀한 그루브"로 해석했다.[55] 데릭 메이는 테크노 사운드를 "...디트로이트와 같다...완전한 실수다. 마치 조지 클린턴과 크라프트베르크가 시퀀서 하나만 가지고 엘리베이터에 갇힌 것 같다."라고 설명했다.[52][53]

1987년, 데릭 메이의 "스트링스 오브 라이프"는 1987~1988년 하우스 음악 붐(사랑의 두 번째 여름) 동안 영국과 독일에서 테크노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57] 프랭키 나클스에 따르면 이 곡은 메이의 가장 유명한 트랙이 되었으며, "폭발했다. 상상할 수 없는 힘과 에너지였다."라고 회상했다.[58]

롤랜드 TB-303: 애시드 하우스에서 두드러지게 사용된 베이스 라인 신시사이저이다.


1988년 영국에서는 하우스 음악이 큰 인기를 얻었고, 애시드 하우스가 점점 더 대중화되었다. 사운드 시스템 문화를 중심으로 한 창고 파티 하위 문화도 있었다. 같은 해, 대니 램플링과 폴 오큰폴드가 각각 슈움(Shoom)과 스펙트럼(Spectrum) 클럽을 열면서 발레아릭 파티 분위기가 런던으로 옮겨졌다. 두 클럽은 빠르게 애시드 하우스와 동의어가 되었고, MDMA의 사용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영국의 다른 중요한 클럽으로는 리즈의 백 투 베이직스(Back to Basics), 셰필드의 리드밀(Leadmill)과 뮤직 팩토리(Music Factory), 그리고 맨체스터의 해시엔다(The Haçienda)가 있었다.[59] 애시드 하우스 파티 열풍은 런던과 맨체스터에서 빠르게 확산되어 문화적 현상이 되었다. MDMA에 취한 클럽 출입자들은 밤새도록 운영되는 창고 파티로 피난처를 찾았다. 그러나 1년 만에 최대 1만 명이 '레이브'라고 불리는 최초의 상업적으로 조직된 대규모 파티에 참석했고, 미디어 폭풍이 뒤따랐다.[60]

하우스와 애시드 하우스의 성공은 디트로이트 사운드의 더 넓은 수용을 위한 길을 열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테크노는 처음에는 시카고, 뉴욕, 영국 북부의 소수의 하우스 음악 클럽에서 지원을 받았고, 런던 클럽은 나중에 따라잡았다.[61] 1987년에는 "Strings of Life"가 런던 클럽 출입자들이 하우스를 받아들이도록 도왔다고 한다.[62][63]

1988년 영국에서 발매된 ''테크노! 디트로이트의 새로운 댄스 사운드''[64][65]는 닐 러스턴과 데릭 메이가 제작한 앨범으로, 영국 청중에게 "테크노"라는 단어를 소개했다.[66][5] 이 앨범은 영국 음악 저널리즘에서 "테크노"라는 용어를 확립했지만, 당시 이 음악은 별개의 장르라기보다는 시카고 하우스에 대한 디트로이트식 해석으로 여겨졌다.[5][67] 러스턴은 벨빌 3인조가 이 음악을 "테크노"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했다고 말했다.[5][68][69]

상업적으로는 이 앨범은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이너 시티의 "빅 펀"(1988)은 1988년 가을 크로스오버 히트곡이 되었다.[96] 이 레코드는 또한 메이, 애킨스, 산더슨에게 업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인텔렉스"라는 테크노 슈퍼그룹 결성에 대한 ZTT 레코드와의 논의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룹이 계약을 최종적으로 확정하려는 찰나, 메이가 탑 오브 더 팝스 출연을 거부하면서 협상이 결렬되었다.[70]

버진 레코드가 러스턴의 컴필레이션의 저조한 판매에 실망했음에도 불구하고,[72] 이 레코드는 테크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으며, 유럽에서 발판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73] 이 앨범은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 레이브 시대에 등장한 시카고 하우스 및 다른 형태의 언더그라운드 댄스 음악과 디트로이트 사운드를 구분하는 역할을 했다.[74][75]

1988년 중반, 디트로이트의 발전은 뮤직 인스티튜트(MI)라는 나이트클럽의 개장으로 이어졌다. 이 장소는 조지 베이커와 얼턴 밀러가 확보했으며, 데릭 메이와 대릴 윈이 금요일 밤 DJ로 참여했고, 베이커와 셰즈 데이미어는 주로 동성애자들을 대상으로 토요일 밤 공연을 했다. 이 클럽은 1989년 11월 24일에 문을 닫았으며, 데릭 메이는 "Strings of Life"와 함께 시계탑 종소리 녹음을 틀었다.[76] MI는 짧은 기간 동안 운영되었지만, 올나잇 세트, 휑한 흰색 방, 그리고 "스마트 음료"가 구비된 주스 바로 국제적으로 알려졌다.[76]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의 도리안 그레이 입구. Talla 2XLC의 테크노클럽 댄스 이벤트가 열린 장소


1982년, 프랑크푸르트의 DJ 탈라 2XLC는 디페쉬 모드, 프런트 242, 헤븐 17, 크라프트베르크, 뉴 오더와 같은 아티스트들을 분류하기 위해 "테크노"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단어는 기술적으로 제작된 댄스 음악을 간략하게 표현하는 약어로 사용되었다. 탈라의 분류는 스벤 베스를 포함한 다른 DJ들에게 참고 자료가 되었다.[77][78] 탈라는 1984년 프랑크푸르트의 노 네임 클럽에서 테크노클럽을 설립하면서 독일에서 이 용어를 더욱 대중화했다. 이 클럽은 1987년 도리안 그레이 클럽으로 이전했다.[77][78] 탈라의 클럽은 지역 EBM 및 일렉트로닉 음악 신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92]

1987년까지 시카고 사운드를 기반으로 한 독일의 파티 문화는 이미 자리를 잡았다. 1980년대 후반에는 웨스트베를린에서도 애시드 하우스가 클럽과 디스코텍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매김했다.[80] 1988년에는 웨스트베를린에 불법 애시드 하우스 파티 장소인 우포(Ufo) 클럽(Ufo)이 문을 열었고 1990년까지 운영되었다.[81] 같은 시기 뮌헨에서는 네거할레(Negerhalle)(1983~1989)와 ETA-할레가 임시로 사용되던 낡은 공장 건물에 자리 잡으면서 독일의 "홀 문화"의 시작을 알리는 최초의 애시드 하우스 클럽으로 자리매김했다.[82][83]

1989년 7월, 드 모테와 다니엘 드 피시오토는 베를린 장벽 붕괴 몇 달 전 웨스트베를린에서 최초의 러브 퍼레이드를 개최했다.[84]

베를린의 트레조르(Tresor) 클럽 (1991–2005)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0년 10월 독일 재통일 이후, 동베를린에서는 자유로운 지하 테크노 파티가 급증했다.[81] 동독 DJ인 폴 반 다이크(Paul van Dyk)는 테크노가 통일 기간 동안 동서독 간의 사회적 연결을 재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언급했다.[85] 재통일된 베를린에서는 1991년부터 도시의 옛 동부 지역에 베를린 장벽의 기초 근처에 여러 장소가 문을 열었다. 대표적으로 ''트레조르''(1991년 설립), ''플래닛(Planet)''(1991–1993), ''벙커''(1992–1996), 그리고 ''E-Werk''(1993–1997) 등이 있다.[86][87] 당시 트레조르에서는 DJ 타니스에 의해 테크노 동호인들 사이에서 준군사복 유행이 시작되었다.[88] 이는 음악의 지하 미학에 대한 헌신의 표현이거나, UR의 준군사적 자세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89] 같은 시기에 독일 DJ들은 사운드의 속도와 거칠기를 강화하기 시작했고, 애시드가 가미된 테크노는 하드코어로 변모하기 시작했다.[90] DJ 타니스는 당시 "베를린은 항상 하드코어였다. 하드코어 히피, 하드코어 펑크, 그리고 이제 우리는 매우 하드코어한 하우스 사운드를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다.[86] 이 새로운 사운드는 네덜란드 가버(gabber)와 벨기에 하드코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 스타일 발전에 대한 다른 영향으로는 1980년대 중반의 유럽 EBM 그룹, 예를 들어 DAF, 프런트 242(Front 242), 그리고 니처 에브(Nitzer Ebb) 등이 있다.[91]

1994년 타니스(Tanith)


같은 시기에 프랑크푸르트에서도 변화가 일어났지만, 베를린 파티 장면에서 발견되는 평등주의적 접근 방식은 공유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디스코텍과 여러 클럽 주인과의 기존 계약에 중점을 두었다. 1988년 ''오멘(Omen)''이 문을 연 후, 프랑크푸르트 댄스 음악 장면은 클럽 경영진이 지배하는 것으로 알려졌고, 다른 주최자들이 시작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1990년대 초 스벤 베스(Sven Väth)는 록스타처럼 숭배받는 독일 최초의 DJ가 되었다. 그는 팬들이 그를 마주 보는 무대 중앙에서 공연했고, 오멘의 공동 소유주로서 그는 자신의 클럽을 운영한 최초의 테크노 DJ로 여겨진다.[92] 당시 몇 안 되는 진정한 대안 중 하나는 라인 강 다리 아래에 있는 마인츠의 브뤼켄코프프였다. 1992년까지 DJ 다그(DJ Dag) & 토르스텐 펜슬라우(Torsten Fenslau)는 프랑크푸르트 공항 근처의 고급 디스코텍인 도리안 그레이에서 일요일 아침 세션을 운영했다. 그들은 처음에 벨기에 뉴 비트(New Beat), 딥 하우스(Deep House), 시카고 하우스,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와 옐로(Yello)와 같은 신스팝 등 다양한 스타일을 믹스하여 플레이했고, 이러한 스타일의 조합에서 프랑크푸르트 트랜스 장면이 등장한 것으로 여겨진다.[92]

1990년, 독일 최초의 애프터아워스 테크노 클럽인 ''바발루 클럽(Babalu Club)''이 뮌헨에 문을 열었고, DJ 헬(DJ Hell), 모니카 크루제(Monika Kruse), 톰 노비(Tom Novy) 또는 우디(Woody)와 같은 주요 인물들이 모인 남부 독일 테크노 장면의 형성 장소가 되었다.[82][83][93]

1993~94년 레이브는 독일에서 주류 음악 현상이 되었고, "멜로디, 뉴에이지 요소, 지나치게 키치적인 화성과 음색"으로의 회귀를 보았다. 독일 지하 사운드에 대한 이러한 약화는 ''메이데이'' 파티 조직이 주도하는, 레코드 레이블 로우 스피릿(Low Spirit), 웨스트밤(WestBam), 마루샤(Marusha), 그리고 VIVA라는 음악 채널을 중심으로 한 독일 "레이브 기관"의 통합으로 이어졌다. 이때 독일 인기 음악 차트는 "Somewhere Over The Rainbow"와 "Tears Don't Lie"와 같은 곡들을 재해석한 로우 스피릿의 "팝-테크노" 독일 민요가 가득했고, 그중 많은 곡이 히트했다. 동시에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사이먼 레이놀즈가 "프랑크푸르트 출신 스벤 베스(Sven Väth)와 그의 하르트하우스(Harthouse) 레이블이 대표하는, 죽어가는 중산층 일렉트로 트랜스 음악"으로 묘사한 음악이 대안으로 여겨졌다.[94] 그러나 불법 레이브는 1990년대 중반 상업적인 대중 레이브에 대한 반동으로 독일 테크노 장면에서 다시 중요성을 얻었다.[95]

독일에서는 1990년대 초 등장한 하드 테크노 사운드를 팬들이 "Tekkno"(또는 "Brett")라고 부르기 시작했다.[81] 'k'의 개수가 다른 이러한 대체 철자는 음악의 강렬함을 강조하려는 반농담식 시도로 시작되었지만, 1990년대 중반에는 음악이 디트로이트의 "테크노"와는 완전히 별개이며, 프랑크푸르트에서 DJ이자 뮤지션인 Talla 2XLC가 부분적으로 육성한 1980년대 EBM 지향 클럽 신에서 유래했다는 논쟁적인 견해와 관련되게 되었다.[96]

어느 시점에 프랑크푸르트와 베를린의 신 사이에서 "누가 테크노를 정의하는가"에 대한 긴장이 고조되었다. DJ 타니스(Tanith)는 테크노라는 용어가 이미 독일에서 존재했지만, 상당 부분 정의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디미트리 헤게만은 Talla의 테크노클럽과 관련된 프랑크푸르트식 테크노의 정의가 베를린에서 사용되는 것과 다르다고 말했다.[92] 프랑크푸르트의 아르민 요너트는 테크노의 뿌리가 DAF, 카바레 볼테르, 수사이드와 같은 아티스트들에게 있다고 보았지만, 젊은 세대의 클럽 이용객들은 이전의 EBM과 인더스트리얼 음악을 구식으로 여겼다. 베를린 신은 대안을 제시했고, 많은 사람들이 "테크노 하우스"라고 불리는 수입된 사운드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SFB 4의 모니카 디틀의 라디오 쇼 덕분에 애시드 하우스가 인기를 얻으면서 베를린에서 EBM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타니스는 DAF나 니처 에브와 같은 이전의 접근 방식과 애시드 기반 댄스 음악을 구분했는데, 후자는 공격적이었고 "무언가에 반대하는 것"을 구체화했다고 느꼈지만, 애시드 하우스에 대해서는 "전자 음악이고, 재미있고, 좋다"고 말했다.[92] 1990년 봄, 타니스는 X-tasy Dance Project를 담당하는 동베를린 파티 주최자인 볼프람 노이게바우어(Wolle XDP)와 함께 독일 최초의 대규모 레이브 이벤트를 주최했다. 이러한 발전은 테크노 하우스와 관련된 사운드에서 벗어나 타니스와 볼레의 테크노지드 파티를 정의하게 된 강렬한 음악 믹스로 이어졌다.[92]

1990년대 초 미국에서는 디트로이트, 뉴욕시, 시카고, 올랜도 등 지역적인 장면을 제외하고는 테크노에 대한 관심이 제한적이었다. 미국의 기회 부족에 좌절한 많은 디트로이트 출신 프로듀서들은 유럽으로 눈을 돌렸다.[101] 이러한 디트로이트 출신 이민자들의 첫 물결은 곧 칼 크레이그, 옥타브 원, 제이 덴험, 케니 라킨, 스테이시 풀렌, 그리고 언더그라운드 레지스탕스의 제프 밀스, 마이크 뱅크스, 로버트 후드 등을 포함한 소위 "두 번째 물결"에 합류했다. 같은 시기에 디트로이트 근교(윈저)에서 리치 하우틴은 사업 파트너 존 아쿠아비바와 함께 테크노 레이블 플러스 8 레코드를 설립했다. 이 시기에 뉴욕의 여러 프로듀서들도 유럽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는데, 특히 프랭키 본즈, 레니 디, 조이 벨트람 등이 주목할 만하다.[102]

1990년부터 1992년 사이에 미국에서 제작된 테크노의 이러한 발전은 유럽, 특히 독일에서 테크노의 확장과 최종적인 분화에 박차를 가했다.[103][104] 1991년에 문을 연 베를린의 클럽 트레조어는 한때 테크노의 표준을 제시했으며, 베를린으로 이주한 많은 주요 디트로이트 프로듀서들이 이곳에서 공연을 펼쳤다.[105] 이 클럽은 산토니오 에콜스, 에디 파울크스, 블레이크 벡스터와 같은 디트로이트 아티스트들의 경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이들은 드. 모테와 타니스와 같은 베를린의 유명 DJ들과 함께 공연했다. "1990년대 초 독일의 성장하는 테크노 신은 테크노의 분산화의 시작"이었으며, "테크노는 베를린에 두 번째 논리적 중심지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 재통일된 베를린은 독일의 음악 수도로서의 지위를 되찾기 시작했다.[106]

독일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벨기에는 이 시대의 두 번째 테크노의 또 다른 중심지였다. 겐트에 기반을 둔 레이블 R&S 레코드는 벨트람과 C.J. 볼랜드와 같은 "10대 신동"들의 하드코어 테크노를 받아들였다.[107]

영국에서는 1987년 글래스고에 문을 연 서브 클럽[108]과 1990년 런던 사람들에게 문을 연 트레이드가 테크노를 영국에 알리는 데 기여한 장소였다. 트레이드는 '오리지널 올나잇 벤더'로 불린다.[109]

2004년 체크텍의 사운드 시스템


1990년대 초, 영국에서는 레이브 이후의 DIY 기반 프리 파티 문화가 자리 잡았다. 이는 다양한 도시 무단 점거 지역 출신의 창고 파티 참석자들과 정치적으로 영감을 받은 뉴에이지 트래블러들 사이의 연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뉴에이지 트래블러들은 농촌 축제 네트워크를 제공했고, 이는 무단 점거자와 레이버들에게 곧 채택되었다.[133] 당시 활동했던 주요 사운드 시스템으로는 루턴의 엑소더스, 브라이턴의 톤카, 셰필드의 스모크스크린, 노팅엄의 DiY, 베들램, 서커스 워프, LSDiesel, 그리고 런던의 스파이럴 트라이브가 있다. 이 프리 파티 시대의 정점은 1992년 5월에 나타났는데, 24시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홍보 없이도 35,000명 이상이 캐슬모튼 코먼 페스티벌에 모여 5일 동안 파티를 즐겼다.[134]

이 한 번의 행사가 1994년 형사 사법 및 공공 질서법 제정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135] 이로써 영국의 프리 파티 문화는 사실상 사멸했다. 이후 많은 여행 예술가들이 영국을 떠나 유럽, 미국, 인도고아, 태국의 코팡안,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 동부 해안으로 갔다.[134]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는 영국에서 온 여행 사운드 시스템의 영향으로 인해 레이브가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대륙 전역으로 확장되었다.

스파이럴 트라이브, 베들램, 그리고 다른 영국 사운드 시스템들은 협동적인 테크노 사상을 유럽, 특히 생활비가 저렴하고 프리 파티 이데올로기를 빠르게 받아들인 동유럽으로 가져왔다. 체코 공화국의 연례 체크텍 행사와 같은 유럽의 테크니발 프리 파티가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의 여러 사운드 시스템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그룹들은 대부분 암스테르담베를린과 같은 도시의 무단 점거 지역을 중심으로 쉽게 관객을 확보했다.[134]

1988년부터 1991년에 걸쳐 영국 북부에서 "세컨드 서머 오브 러브"라 불린 마약과 애시드 하우스가 결합된 문화 운동이 발생했다.[218] 당시 시카고 출신의 애시드 하우스 유행과 함께 디트로이트 출신의 테크노도 영국으로 흘러들어와 이 운동 초기부터 사용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영국에서 유럽 전역으로 점차 확대되었고, 강렬한 스타일을 가진 4/4박자 음악은 각 지역에서 현지 문화와 융합하여 하드코어, 저마너트랜스, 가버, 트랜스와 같은 새로운 음악을 탄생시켰다.[219][220] 영국에서는 1990년대에 들어 대규모 레이브의 빈번한 개최와 그에 대한 수요로 인해, 주로 과장된 음색과 빠른 브레이크비츠를 사용한 음악도 탄생했다. 1990년대 초 테크노는 유럽에서 자극적인 사운드를 가진 첨단의 댄스 음악이라는 이미지와 함께 자리 잡게 되었다. 테크노는 이러한 발전 과정을 거치면서, 발생지인 미국에서는 언더그라운드 음악으로 남았고,[221] 오히려 유럽 국가들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2. 4. 현재의 흐름

1990년, 유럽에서 레이브가 유행하던 무렵, 더 자극적인 사운드를 가진 테크노로 여겨지는 레코드들이 연이어 발매되어 유럽으로 유입되면서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224]. 대표적인 예로는 뉴욕 조이 벨트럼의 "Energy Flash"와 언더그라운드 레지스탕스(UR)의 작품 등이 있다. 현재 일반적으로 테크노라고 불리는 사운드가 정립된 것은 이 무렵으로 여겨진다.

1992년, 이러한 유럽 레이브 이후 등장한 테크노의 특징을 더욱 발전시킨 것으로 하드 미니멀이 있다. 대표적인 아티스트로는 다니엘 벨(Daniel Bell)과 제프 밀스가 있다. 밀스는 다른 디트로이트 아티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유럽을 순회하며 DJ 활동을 했고, 하드 테크노로 유럽에 영향을 준 UR의 전 멤버이기도 했다. 그는 "그때까지 미니멀이라고 불리는 음악을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말하며, DJ 플레이를 계속하는 동안 이 스타일을 발견했다고 한다[225]. 극단적으로 음의 수를 줄인 자신의 곡을 많이 사용하면서, 거의 폭력적으로 들리기도 하는 4/4박자와 퍼커션만으로 구성된 레코드를 계속해서 바꿔가며 DJ를 하는 스타일은 큰 충격을 주었고, 그의 음악은 많은 추종자를 만들어냈다.

이후에도 이러한 댄스 음악이 흘러나오는 장소의 사람들의 욕구대로, 테크노에 라틴 분위기가 도입되거나, 음악 제작에 PC가 사용되면서 더욱 복잡한 사운드의 샘플링 편집이 강조되고, 또 미니멀이 세련되어 하우스 음악에 가까워지는 등 다양한 요소를 받아들이면서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현재에 이르렀다. 2000년대 이후에는 무디맨과 테오 파리시(Theo Parrish) 등 새로운 세대의 뮤지션들도 등장하고 있다.

3. 주요 특징

테크노 음악은 여러 특징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초기 디트로이트 테크노는 유럽, 특히 크라프트베르크와 같은 신시사이저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코드워 에순은 크라프트베르크를 테크노의 기원으로 보았고, 후안 아킨스는 크라프트베르크조르조 모로더의 초기 음악에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했다.[15][25] 데릭 메이는 자신의 음악이 유럽 신시사이저 음악의 연속이라고 말하며,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울트라복스도 영향으로 언급했다.[18][19]

이들은 변화된 사회에 대한 비전을 표현하기 위해 공상 과학 이미지를 사용했다.[21] 또한, DJ 찰스 "일렉트리파잉 모조" 존슨이 진행한 라디오 프로그램 ''미드나잇 펑크 어소시에이션''은 전자 음악펑크, 뉴 웨이브 음악을 특징으로 하여, 아킨스, 손더슨, 메이 등에게 음악적 영감을 주었다.[23][24]

초기에는 디스코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믹싱을 시작하도록 영감을 받은 후안 아킨스는 데릭 메이에게 레코드 믹싱 방법을 가르쳤고, 1981년에는 딥 스페이스 사운드웍스(Deep Space Soundworks)라는 파티 크루를 결성했다.[26][27][28] 또한, 고등학교 클럽들은 젊은 프로모터들이 지역 댄스 음악 신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했다. DJ들은 더 많은 관객을 유치하기 위해 협력하여 믹싱 기술과 사운드 시스템을 판매했다.[30]

후안 아킨스는 "테크노"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메트로플렉스 레코드 레이블을 설립했고, 모델 500의 "No UFO's"는 최초의 테크노 작품으로 여겨진다.[38][39] 데릭 메이의 1987년 히트곡 "Strings of Life"는 하우스와 테크노 장르 모두에서 고전으로 여겨진다.[45][46][47] 1988년 영국에서 발매된 ''테크노! 디트로이트의 새로운 댄스 사운드''는 "테크노"라는 단어를 영국 청중에게 소개했다.[66] 같은 해, 디트로이트 시내의 뮤직 인스티튜트(MI)라는 나이트클럽이 개장하여 테크노 발전에 기여했다.[76]

테크노는 4/4 박자의 반복적인 리듬을 기반으로, 신시사이저드럼 머신을 중심으로 한 전자 악기를 사용하여 만들어진다. 미니멀한 구성이 특징이며, 초기 디트로이트 테크노는 싱코페이션과 폴리리듬을 사용하여 다른 변종들과 차별점을 두었다. 데릭 메이는 이를 "하이테크 부족주의"라고 표현하며, 매우 영적이고 타악기 중심적인 사운드라고 설명했다.[146]

테크노 음악 제작에는 루프 기반의 스텝 시퀀싱을 작곡 기법으로 활용하며, 음악가들은 즉흥적인 방식으로 작업하며 전자 음악 스튜디오를 하나의 큰 악기로 취급한다.[168] 여러 장비를 MIDI 시퀀서로 동기화하여 다양한 사운드와 효과를 만들어내고, 이를 조합하여 하나의 곡을 완성한다.[169] 초기 디트로이트 테크노 프로듀서들은 롤랜드 TR-808, 롤랜드 TR-909, 롤랜드 TB-303 등의 장비를 주로 사용했다.[170][171] 특히 롤랜드 TR-808은 데릭 메이가 선호하는 드럼 머신이었다.[170] 시간이 지나면서 빈티지 장비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고, 컴퓨터 기반의 에뮬레이터 소프트웨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3. 1. 음악적 특징

테크노는 4/4 박자의 반복적인 리듬을 기반으로, 신시사이저드럼 머신을 중심으로 한 전자 악기를 사용하여 만들어진다. 미니멀한 구성이 특징이며, 초기 디트로이트 테크노는 싱코페이션과 폴리리듬을 사용하여 다른 변종들과 차별점을 두었다. 데릭 메이(Derrick May)는 이를 "하이테크 부족주의"라고 표현하며, 매우 영적이고 타악기 중심적인 사운드라고 설명했다.[146]

테크노 음악 제작에는 다양한 기술이 사용되는데, 주로 루프 기반의 스텝 시퀀싱을 작곡 기법으로 활용한다. 음악가들은 즉흥적인 방식으로 작업하며, 전자 음악 스튜디오를 하나의 큰 악기로 취급한다.[168] 일반적인 스튜디오에서는 여러 장비를 MIDI 시퀀서로 동기화하여 다양한 사운드와 효과를 만들어내고, 이를 조합하여 하나의 곡을 완성한다.[169]

초기 디트로이트 테크노 프로듀서들은 롤랜드 TR-808, 롤랜드 TR-909, 롤랜드 TB-303 등의 장비를 주로 사용했다.[170][171] 특히 롤랜드 TR-808은 데릭 메이가 선호하는 드럼 머신이었다.[170] 시간이 지나면서 빈티지 장비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고, 이에 따라 컴퓨터 기반의 에뮬레이터 소프트웨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3. 2. 사회문화적 특징

초기 디트로이트 테크노는 사회, 정치적 메시지와 아프로퓨처리즘 사상을 반영했다. 코드워 에순은 크라프트베르크를 테크노의 기원으로 보았고, 후안 아킨스는 크라프트베르크조르조 모로더의 초기 음악에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했다.[15][25] 데릭 메이는 자신의 음악이 유럽 신시사이저 음악의 연속이라고 말하며,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울트라복스도 영향으로 언급했다.[18][19]

초기 디트로이트 테크노 아티스트들은 공상 과학 이미지를 사용하여 변화된 사회에 대한 비전을 표현했다.[21] 일렉트리파잉 모조가 진행한 라디오 프로그램 ''미드나잇 펑크 어소시에이션''은 전자 음악펑크, 뉴 웨이브 음악을 특징으로 하여, 아킨스, 손더슨, 메이 등에게 음악적 영감을 주었다.[23][24]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 여러 고등학교 클럽들은 젊은 프로모터들이 지역 댄스 음악 신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했다. DJ들은 더 많은 관객을 유치하기 위해 협력하여 믹싱 기술과 사운드 시스템을 판매했다.[30]

후안 아킨스는 "테크노"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메트로플렉스 레코드 레이블을 설립했고, 모델 500의 "No UFO's"는 최초의 테크노 작품으로 여겨진다.[38][39] 데릭 메이의 1987년 히트곡 "Strings of Life"는 하우스와 테크노 장르 모두에서 고전으로 여겨진다.[45][46][47]

1988년 영국에서 발매된 ''테크노! 디트로이트의 새로운 댄스 사운드''는 "테크노"라는 단어를 영국 청중에게 소개했다.[66] 1988년 중반, 디트로이트 시내의 뮤직 인스티튜트(MI)라는 나이트클럽이 개장하여 테크노 발전에 기여했다.[76]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0년 독일 재통일 이후, 동베를린에서는 자유로운 지하 테크노 파티가 급증했다.[81] 폴 반 다이크는 테크노가 통일 기간 동안 동서독 간의 사회적 연결을 재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언급했다.[85] 트레조르, E-Werk 등 여러 장소가 문을 열었다.[86][87]

4. 하위 장르

테크노는 1980년대 후반부터 영국과 유럽 대륙에서 다양한 하위 장르로 발전했다. 특히 1988년부터 1991년까지 영국 북부에서 발생한 "세컨드 서머 오브 러브"는 마약과 애시드 하우스가 결합된 문화 운동으로, 4/4박자 음악이 각 지역에서 현지 문화와 융합하여 하드코어, 저마너트랜스, 가버, 트랜스와 같은 새로운 음악을 탄생시켰다.[218][219][220]

1989년, 테크노 랩 유닛 테크노트로닉(Technotroonic)의 "Pump Up The Jam"이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하며 벨기에 테크노를 알렸다. 1990년에는 레이브 문화와 함께 조이 벨트럼의 "Energy Flash", 언더그라운드 레지스탕스(UR)의 작품 등 더욱 자극적인 사운드의 테크노가 유럽에 소개되었다.[224] 1992년에는 하드 미니멀이 등장했는데, 대표적인 아티스트로는 다니엘 벨과 제프 밀스가 있다.[225]

1990년대 이후에도 테크노는 라틴 음악, PC를 이용한 복잡한 샘플링, 미니멀리즘 등 다양한 요소를 받아들이며 발전했다. 2000년대에는 무디맨과 테오 파리시(Theo Parrish) 등 새로운 세대의 뮤지션들이 등장했다.

4. 1. 미니멀 테크노 (Minimal Techno)

로버트 후드(Robert Hood)를 중심으로 1990년대 초반에 등장한 미니멀 테크노는, 테크노가 지나치게 "레이브풍"으로 변질되고 개버와 같이 빨라지면서, 본래의 디트로이트 테크노가 가진 사회적 메시지와 소울적인 요소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반발로 나타났다.[113][114] 로버트 후드는 "기본적이고 간결하며 날것의 사운드. 드럼, 베이스라인, 펑키한 그루브만, 그리고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데 필요한 것"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테크노를 재해석했다.[114]

로버트 후드와 다니엘 벨은 당시 테크노에 "펑크"와 "느낌"이 부족하며, 감정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보컬과 피아노를 사용하는 것은 쉬운 해결책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본래의 언더그라운드 테크노로 돌아가고자 했다.[115]

1992년에는 하드 미니멀이 등장했는데, 이는 유럽 레이브 이후 테크노의 특징을 더욱 발전시킨 형태였다. 제프 밀스는 하드 테크노로 유럽에 영향을 준 UR의 전 멤버였다. 그는 극단적으로 음의 수를 줄인 곡들을 활용하여, 4/4박자와 퍼커션만으로 구성된 강렬한 사운드를 선보였다.[225]

로버트 후드, 2009년

4. 2. 앰비언트 테크노 (Ambient Techno)

앰비언트 음악 요소와 결합된 앰비언트 테크노는 "소파 테크노", 일렉트로니카[131]등의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으며, "정적인, 집에 머무는"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형태의 "포스트 레이브" 댄스 음악을 가리켰다.[132] 1990년대 초, 초기 "지성" 트렌드와 관련된 많은 레이블이 있었지만, 그 중 많은 레이블이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대표적인 아티스트로는 에이펙스 트윈, 오테커, LFO, 보즈 오브 캐나다, 오비탈 등이 있다.

4. 3. 하드코어 테크노 (Hardcore Techno)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0년 10월 독일 재통일 이후, 동베를린에서는 자유로운 지하 테크노 파티가 급증했다.[81] 동독 DJ인 폴 반 다이크(Paul van Dyk)는 테크노가 통일 기간 동안 동서독 간의 사회적 연결을 재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언급했다.[85] 같은 시기에 독일 DJ들은 사운드의 속도와 거칠기를 강화하기 시작했고, 애시드가 가미된 테크노는 하드코어로 변모하기 시작했다.[90] DJ 타니스는 당시 "베를린은 항상 하드코어였다. 하드코어 히피, 하드코어 펑크, 그리고 이제 우리는 매우 하드코어한 하우스 사운드를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다.[86]

이 새로운 사운드는 네덜란드 가버(gabber)와 벨기에 하드코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스타일들은 독특한 방식으로 언더그라운드 레지스턴스와 리치 호튼의 플러스 8 레코드(Plus 8 Records)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다. 이 스타일 발전에 대한 다른 영향으로는 1980년대 중반의 유럽 EBM 그룹, 예를 들어 DAF, 프런트 242(Front 242), 그리고 니처 에브(Nitzer Ebb) 등이 있다.[91]

독일에서는 1990년대 초 등장한 하드 테크노 사운드를 팬들이 "Tekkno"(또는 "Brett")라고 부르기 시작했다.[81] 'k'의 개수가 다른 이러한 대체 철자는 음악의 강렬함을 강조하려는 반농담식 시도로 시작되었지만, 1990년대 중반에는 이 음악이 디트로이트의 "테크노"와는 완전히 별개이며, 프랑크푸르트에서 DJ이자 뮤지션인 Talla 2XLC가 부분적으로 육성한 1980년대 EBM 지향 클럽 신에서 유래했다는 논쟁적인 견해와 관련되게 되었다.[96]

1988년부터 1991년에 걸쳐 영국 북부에서 "세컨드 서머 오브 러브(Second Summer of Love)"라 불린 마약과 애시드 하우스가 결합된 문화 운동이 발생했다.[218] 당시 시카고 출신의 애시드 하우스 유행과 함께 디트로이트 출신의 테크노도 영국으로 흘러들어와 이 운동 초기부터 사용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영국에서 유럽 전역으로 점차 확대되었고, 강렬한 스타일을 가진 4/4박자 음악은 각 지역에서 현지 문화와 융합하여 (하드코어, 저마너트랜스, 가버) 또는 트랜스와 같은 새로운 음악을 탄생시켰다.[219][220]

4. 4. 기타 하위 장르

1990년대 말, 게토테크(테크노의 미학과 힙합 및 하우스 음악을 결합한 스타일), 노르텍, 글리치, 디지털 하드코어, 일렉트로클래시[1] 및 소위 "노비트 테크노"[138]를 포함한 여러 포스트 테크노[137] 언더그라운드 스타일이 등장했다.

5. 한국의 테크노 씬

1990년대 초부터 한국에서 테크노 씬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켄 이시이(Ken Ishii)와 같은 일본 테크노 아티스트의 성공은 한국에도 영향을 주었다. 1993년부터 1995년까지 한국에서는 서브라임 레코즈(Sublime Records), 프로그맨 레코즈(Frogman Records)[231], 서브보이스(Subvoice), 토레마 레코즈(TOREMA RECORDS), 사이지지 레코즈(Syzygy Records) 등 테크노 레이블 활동이 시작되었다.

1994년,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일본)(Sony Music Entertainment (Japan) Inc.)는 "소니 테크노" 프로젝트를 통해 유럽 테크노 레이블의 음반을 한국에 판매했다. 1995년에는 테크노 전문 잡지 ele-king이 발행되기도 했다. 소니 테크노와 ele-king은 1990년대 후반에 활동을 종료했다.

디트로이트 테크노 2세대 제프 밀스가 도쿄에 거주하며 한국 테크노 씬에 영향을 주었고, 오케스트레이션을 활용한 테크노 붐도 일어났다.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는 이러한 시도에 대해 "흥미롭다"라고 언급했다.

6. 용어의 어원

후안 아킨스는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저서 《제3의 물결》(1980년 발행)에 등장하는 "테크노레벨스(Techno-rebels)"라는 용어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의 곡 제목 등에 사용했다.[226] 테크노라는 장르명이 굳어지기 전에는 단순히 하우스 음악, 또는 디트로이트의 하우스 음악이라고 불렸다.[227]

"테크노레벨스"는 일본어로 번역하면 "기술에 대한 반역자들"이 된다. 토플러는 산업혁명 이후의 대기업 중심 체제를 제2의 물결로 규정하고, 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기술혁신의 흐름을 제3의 물결로 보았다. 그는 혁신적이지만 때로는 위험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을 관리하고 활용하는 사람들을 "제3의 물결의 대리인", "다음 문명의 선도자"로 칭하며, "기술에 대한 반역자들"이라고 불렀다.[228]

한편, 크라프트베르크가 활동하던 1978년 일본의 아키 요시오(阿木譲)가 "테크노팝(Techno Pop)"이라는 용어를 전자 음악에 처음 사용했다는 설도 있다.[229] 후안 아킨스가 "Techno"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의 "테크노폴리스"(1979) 이후 5년 뒤인 1984년, 사이보트론 명의의 싱글 "Techno City"였다.[230]

7. 주요 테크노 아티스트

테크노 음악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여러 아티스트들이 존재한다.

1970년대 음악 프로듀서 조르지오 모로더(Giorgio Moroder)는 반복적인 댄스 리듬에 신시사이저를 사용하는 음악을 선보였다. 특히 1976년 도나 서머(Donna Summer)를 위해 제작한 "I Feel Love"는 하우스 뮤직과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의 중요한 이정표로 평가받는다.

1980년대 초, 미국 시카고의 클럽에서는 DJ들이 실험적인 플레이를 시도했다.[200][201] 이들은 DIY 방식으로 레코드를 제작하며 시카고 하우스와 애시드 하우스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켰다.[202][203][204][205][206]

1980년대 중반, 디트로이트에서는 후안 아킨스(Juan Atkins), 데릭 메이(Derrick May), 케빈 샌더슨(Kevin Saunderson) 등, "벨빌 스리"라 불리는 세 명의 아티스트가 시카고 하우스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음악을 선보였다.[207][208][209] 이들은 기존 하우스 뮤직의 쾌락적인 면과는 달리, 현실을 반영한 진지한 음악을 지향했다.[210]

1988년, 영국의 버진 레코드(Virgin Records)는 디트로이트 테크노 앨범 「테크노! 디트로이트의 새로운 댄스 사운드」(Techno! - The New Dance Sound Of Detroit)를 발매했다.[214][215][216] 이 앨범은 "테크노"라는 명칭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인너 시티의 「빅 펀」(Big Fun)은 영국 댄스 차트 톱 10에 진입하며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217]

1989년, 테크노 랩 유닛 테크노트로닉(Technotroonic)의 "Pump Up The Jam"은 전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하며 벨기에 테크노를 알렸다.

1990년대, 유럽에서는 레이브가 유행하며 더욱 자극적인 사운드의 테크노가 등장했다.[224] 조이 벨트럼(Joey Beltram)의 "Energy Flash"와 언더그라운드 레지스탕스(UR)의 작품 등이 대표적이다.

1992년에는 제프 밀스(Jeff Mills)와 다니엘 벨(Daniel Bell) 등이 하드 미니멀 테크노를 선보였다.

2000년대 이후에는 무디맨과 테오 파리시(Theo Parrish) 등 새로운 세대의 뮤지션들이 등장하고 있다.

1993년, 일본 아티스트 켄 이시이(Ken Ishii)는 R&S 레코즈(R&S Records)에서 앨범을 발매하며 유럽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7. 1. 디트로이트 테크노

디트로이트 테크노는 1980년대 초, 디트로이트에서 흑인 음악의 전통을 바탕으로 시카고 하우스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새로운 음악 운동이다. 후안 아킨스(Juan Atkins), 케빈 샌더슨(Kevin Saunderson), 데릭 메이(Derrick May), 에디 "플래싱" 폴크스(Eddie "Flashin" Fowlkes)는 신예 음악가, "믹스" 테이프 거래자, 지망생 DJ로서 공통된 관심사를 공유했다.[22] 이들은 DJ 찰스 "일렉트리파잉 모조(The Electrifying Mojo)" 존슨이 진행한 라디오 프로그램 ''미드나잇 펑크 어소시에이션(Midnight Funk Association)''을 통해 음악적 영감을 얻었다.[23] 모조의 프로그램은 조르지오 모로더, 크라프트베르크,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탱게린 드림과 같은 아티스트들의 전자 음악과 함께 파르라멘트 펑카델릭과 같은 아티스트들의 펑크 사운드, 디보, 비-52스와 같은 밴드들의 뉴 웨이브 음악을 특징으로 했다.[24]

디스코의 짧은 유행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믹싱을 시작했고, 후안 아킨스도 그중 한 명이었다. 아킨스는 메이에게 레코드 믹싱 방법을 가르쳤고, 1981년 "매직 후안", 데릭 "메이데이"는 에디 "플래싱" 폴크스를 포함한 다른 세 명의 DJ와 함께 딥 스페이스 사운드웍스(Deep Space Soundworks)[26][27](딥 스페이스라고도 함)[28]라는 파티 크루를 결성했다. 이들은 모조를 만나 그의 프로그램에 믹스를 제공할 것을 제안했고, 다음 해에 실제로 그렇게 했다.[25]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 브랫츠, 샤리바리, 치아바티노, 코메레이즈, 게이블스, 하드웨어, 라파엘, 루머스, 스놉스, 위켄즈[29]와 같은 고등학교 클럽들은 젊은 프로모터들이 지역 댄스 음악 신을 발전시키고 육성할 수 있도록 했다. 지역 신이 인기를 얻으면서 DJ들은 더 많은 관객을 유치하기를 바라는 클럽에 자신의 믹싱 기술과 사운드 시스템을 판매하기 위해 협력하기 시작했다. 지역 교회 활동 센터, 빈 창고, 사무실, YMCA 강당은 음악 형태가 육성된 초기 장소였다.[30]

메이와 손더슨과 같은 음악 프로듀서들은 시카고 클럽 신, 특히 하우스 음악의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한다.[44][45]

시퀀서와 신시사이저 가격이 저렴해짐에 따라 초기 프로듀서들은 유럽 신스팝 미학과 소울, 펑크, 디스코, 일렉트로의 요소들을 결합하여 EDM을 미지의 영역으로 밀어붙였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모타운의 유산과 R&B와 소울의 전통적인 공식을 거부하고 대신 기술적 실험을 받아들였다.[51][52][53][54]

1988년 데릭 메이는 모타운에 빚이 없는 "포스트 소울" 사운드로 해석되었지만,[52][53] 10년 후 다른 기자는 모타운의 비트 중심 스타일과 당시의 음악 기술을 결합한 "소울풀한 그루브"로 해석했다.[55] 메이는 테크노 사운드를 "...디트로이트와 같다...완전한 실수다. 마치 조지 클린턴과 크라프트베르크가 시퀀서 하나만 가지고 엘리베이터에 갇힌 것 같다."라고 설명했다.[52][53] 후안 아킨스는 "기술처럼 들리는 음악이지, 음악처럼 들리는 기술이 아니다. 즉, 여러분이 듣는 대부분의 음악은 여러분이 알고 있든 모르든 기술로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테크노 음악에서는 그것을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56]

1988년 중반 영국에서 발매된 ''테크노! 디트로이트의 새로운 댄스 사운드''[64][65]는 전 노던 소울 DJ이자 쿨 캣 레코드 사장인 닐 러스턴과 데릭 메이가 제작한 앨범으로, 영국 청중에게 "테크노"라는 단어를 소개했다.[66][5] 이 컴필레이션 앨범은 영국 음악 저널리즘에서 "테크노"라는 용어를 확립했지만, 당시 이 음악은 별개의 장르라기보다는 시카고 하우스에 대한 디트로이트식 해석으로 여겨졌다.[5][67]

버진 레코드는 러스턴의 컴필레이션의 저조한 판매에 실망했지만,[72] 이 레코드는 테크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으며, 음악과 프로듀서 모두에게 유럽에서 발판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73] 궁극적으로 이 앨범은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 레이브 시대에 등장한 시카고 하우스 및 다른 형태의 언더그라운드 댄스 음악과 디트로이트 사운드를 구분하는 역할을 했다.[74][75]

1988년 중반, 디트로이트의 발전은 디트로이트 시내 브로드웨이 1315번지에 위치한 뮤직 인스티튜트(MI)라는 나이트클럽의 개장으로 이어졌다. 조지 베이커(George Baker)와 얼턴 밀러(Alton Miller)가 확보했으며, 데릭 메이(Derrick May)와 대릴 윈(Darryl Wynn)이 금요일 밤 DJ로 참여했고, 베이커와 셰즈 데이미어(Chez Damier)는 주로 동성애자(Homosexuality)들을 대상으로 토요일 밤 공연을 했다. 1989년 11월 24일에 문을 닫았으며, 데릭 메이는 "Strings of Life"와 함께 시계탑 종소리 녹음을 틀었다.[76] MI는 짧은 기간 동안 운영되었지만, 올나잇 세트, 휑한 흰색 방, 그리고 "스마트 음료"(인스티튜트는 절대 술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가 구비된 주스 바로 국제적으로 알려졌다. 댄 시코(Dan Sicko)는 MI가 디트로이트의 초기 테크노 선구자들과 함께 "도시의 중요한 음악적 하위 문화 중 하나 – 국제적인 장면으로 서서히 성장하고 있던 문화 – 에 생명을 불어넣는 데 기여했다"고 지적했다.[76]

1990년대 초 미국에서는 디트로이트, 뉴욕시, 시카고, 올랜도 등 지역적인 장면을 제외하고는 테크노에 대한 관심이 제한적이었다. 1993년, 독일 테크노 레이블 트레저 레코드(Tresor Records)는 컴필레이션 앨범 ''트레저 II: 베를린 & 디트로이트 – 어 테크노 얼라이언스''(Tresor II: Berlin & Detroit – A Techno Alliance)를 발매했다.[110] 이 앨범은 디트로이트 사운드가 독일 테크노 신에 미친 영향을 보여주는 증거이자 두 도시 간의 "상호 존중 협약"을 기념하는 작품이었다.[104]

7. 1. 1. 1세대 (벨빌 3인조)

테크노 장르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로는 후안 애킨스(Juan Atkins)가 있으며, 그는 "창시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31] 1980년대 초, 애킨스는 리처드 데이비스(Richard Davis), 그리고 나중에 존-5(Jon-5)와 함께 사이버트론(Cybotron)이라는 그룹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록과 일렉트로(electro)의 영향을 받은 음악을 발표했는데,[33] 그중 가장 성공적인 곡은 "클리어"(1983)와 "테크노 시티"(1984)였다.[34][35]

애킨스는 사이버트론의 음악을 설명하기 위해 "테크노"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며, 이는 미래학자 알빈 토플러(Alvin Toffler)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애킨스는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와 같은 초기 신시사이저 기반 아티스트들을 테크노로 분류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크라프트베르크와 후안의 사이버트론 작품 모두 일렉트로로 간주한다.[36] 그는 사이버트론의 ''코스믹 카스(Cosmic Cars)''(1982)를 독특한 독일식 신시사이저 펑크로 생각했지만, 아프리카 밤바타(Afrika Bambaataa)의 "플래닛 록"(1982)을 듣고 자신이 구상한 음악의 더 나은 예라고 생각하여 실험적인 음악을 계속 추구하게 되었고, 케빈 샌더슨(Kevin Saunderson)과 데릭 메이(Derrick May)에게도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격려했다.[37]

이후 애킨스는 모델 500(Model 500)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고, 1985년에는 메트로플렉스 레코드 레이블을 설립했다.[38] 같은 해, 모델 500의 "No UFO's"가 발매되면서 디트로이트 음악 신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 곡은 일반적으로 최초의 테크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39][40][41][42][43]

1980년대 초중반, 디트로이트에서는 시카고 하우스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음악 운동이 일어났다.[207][208] 이 운동의 중심에는 후안 아킨스(Juan Atkins), 데릭 메이(Derrick May), 케빈 샌더슨(Kevin Saunderson)[209]이 있었는데, 이들은 같은 학교 출신의 음악 동료이자 DJ 그룹으로, "벨빌 스리"(세 사람이 만난 곳이 디트로이트 벨빌 지역이었기 때문)라고 불렸다. 이들은 시카고 하우스의 영향을 받았지만, 기존 하우스 뮤직의 쾌락적인 면과는 달리 엄혹한 현실을 반영한 진지한 음악을 추구했다.[210] 특히, 리더였던 후안 아킨스는 일렉트로 유닛 활동을 통해 이미 명성을 얻고 있었으며, 전자적인 사운드와 베이스라인, 그리고 아프로퓨처리즘(Afrofuturism)이라고 불리는 흑인 특유의 SF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면을 강조했다.[211]

하우스 뮤직을 접하기 전 디트로이트의 음악은 지역 유명 라디오 DJ인 엘렉트리파인 모조(Electrifyin' Mojo)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주로 접할 수 있었다. 디트로이트에서 전자 음악의 영향이 나타난 것은 그가 독특한 감각으로 선별한 유럽의 전자 악기를 사용한 음악을 선호했기 때문으로 보인다.[212][213]

7. 1. 2. 2세대

후안 애킨스는 테크노 장르 확립에 기여한 인물로, "창시자"로 널리 인정받는다.[31] 1980년대 초, 사이버트론 그룹으로 활동하며 "클리어"(1983), "테크노 시티"(1984) 등의 곡을 발표했다.[33][34][35] 알빈 토플러의 영향을 받아 "테크노"라는 용어를 사용했다.[36]

1985년, 모델 500이라는 예명으로 메트로플렉스 레코드 레이블을 설립하고, No UFO's를 발매하며 디트로이트 음악 신에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38][39][40][41][42][43] 데릭 메이의 1987년 히트곡 "Strings of Life"는 하우스와 테크노 장르 모두에서 고전으로 여겨진다.[45][46][47]

1990년대 초, 미국에서는 디트로이트, 뉴욕, 시카고, 올랜도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테크노에 대한 관심이 제한적이었다. 칼 크레이그, 옥타브 원, 제이 덴험, 케니 라킨, 스테이시 풀렌, 언더그라운드 레지스탕스 등 많은 디트로이트 출신 프로듀서들이 유럽으로 이주했고,[101] 리치 하우틴은 플러스 8 레코드를 설립했다.[102]

1991년, 베를린의 트레조어 클럽은 테크노의 중심지가 되었으며,[105] 디트로이트 아티스트들의 경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106] 벨기에는 R&S 레코드를 중심으로 또 다른 테크노 중심지로 부상했다.[107] 영국에서는 서브 클럽과 트레이드가 테크노를 알리는 데 기여했다.[108][109]

2세대 테크노 아티스트는 다음과 같다.

  • 언더그라운드 레지스탕스
  • 마이크 뱅크스
  • 칼 크레이그
  • 무디맨

7. 2. 미니멀 테크노



테크노가 계속 변형되면서 디트로이트의 여러 프로듀서들은 음악의 방향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 중 하나가 소위 미니멀 테크노였다(프로듀서 다니엘 벨은 이 용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며, 예술적 의미에서의 "미니멀리즘"이라는 용어가 너무 "예술적"이라고 생각했다).[112] 디트로이트 출신 프로듀서이자 UR의 전 멤버인 로버트 후드(Robert Hood)가 미니멀 테크노의 도래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진다.[113]

후드는 1990년대 초 테크노가 너무 "레이브풍"이 되어, 템포가 빨라지고 개버와 같은 경향이 등장하면서 원래 디트로이트 테크노의 사회적 논평과 소울이 가미된 사운드에서 멀어졌다고 설명한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후드와 다른 프로듀서들은 디트로이트 미학의 한 요소를 강조하여 "기본적이고 간결하며 날것의 사운드. 드럼, 베이스라인, 펑키한 그루브만, 그리고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데 필요한 것만"으로 테크노를 해석했다.[114]

후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미니멀 테크노


7. 3. 앰비언트 테크노

에이펙스 트윈, 오우테카, LFO, 보즈 오브 캐나다, 오비탈, 블랙독, B12는 앰비언트 테크노 음악가로 알려져 있다.

7. 4. 하드코어 테크노


  • 마크 트로네
  • 후지카와 요코

7. 5. 일본의 테크노

1993년, 일본 아티스트 켄 이시이(Ken Ishii)는 학생 시절 제작한 데모 테이프를 벨기에의 R&S 레코즈(R&S Records)에 보냈고, 이것이 채택되면서 일본 테크노 음악의 성공적인 시작을 알렸다. 그의 작품 "Pneuma"(1993년)와 "EXTRA"(1995년)는 유럽 음악 잡지 히트 차트에 오르기도 했다.[231]

같은 시기(1993년~1995년) 일본 내에서도 테크노와 인텔리전트 댄스 뮤직(IDM) 레이블 활동이 활발해졌다. 서브라임 레코즈(Sublime Records), 프로그맨 레코즈(Frogman Records)[231], 서브보이스(Subvoice), 토레마 레코즈(TOREMA RECORDS), 사이지지 레코즈(Syzygy Records) 등이 대표적이다. 1994년에는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일본)(Sony Music Entertainment (Japan) Inc.)에서 "소니 테크노" 프로젝트를 통해 유럽 테크노 레이블 음반을 일본에 발매했고, 1995년에는 테크노 전문 잡지 「ele-king」이 창간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두 프로젝트는 1990년대 후반에 모두 종료되었다.

디트로이트 테크노 2세대 제프 밀스가 도쿄에 거주하면서 영향을 주었고, 오케스트레이션을 활용한 테크노 붐이 일기도 했다.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는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그의 시도는 흥미롭다"라고 평가했다.

일본의 주요 테크노 음악가로는 전기그루브, 이시노 타쿠, 켄 이시이, 타나카 후미야, Q'HEY, DJ WADA, 카나모리 타츠야(DJ SHUFFLEMASTER), Subvoice, 토비 네이션, 스나하라 요시노리, CMJK, KAGAMI, DJ TASAKA, MAYURI, 신 니시무라, Newdeal, DJ SODEYAMA, Co-Fusion, 탄츠무직, 리오 아라이 등이 있다.

7. 6. 기타 테크노

코드워 에순은 크라프트베르크를 테크노의 기원으로 보았으며, 후안 아킨스는 크라프트베르크와 조르조 모로더의 초기 음악에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했다.[15] 데릭 메이는 자신의 음악이 유럽 신시사이저 음악의 직접적인 연속이라고 말하며,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울트라복스도 영향으로 언급했다.[17][18][19] 케빈 손더슨은 유럽 음악의 영향보다는 전자 장비로 음악을 만드는 것에 더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18]

이들은 공상 과학적인 이미지를 통해 사회 변화에 대한 비전을 표현했다.[21]

  • 로랑 가르니에
  • 조이 벨트람
  • 마이크 반 다이크
  • CJ 보랜드
  • 하드플로어
  • 테크네이지아
  • DJ 헬
  • 루크 슬레이터
  • 토마스 슈마허
  • 엘렌 앨리언
  • 플루크
  • 팬소닉
  • 어 개이 콜드 제럴드
  • 폴 반 다이크
  • 댄 커틴
  • 대런 에머슨
  • 언더월드
  • 케미컬 브라더스
  • 프로디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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