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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 헤위에르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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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르 헤위에르달은 노르웨이의 탐험가, 인류학자, 작가로, 고대 문명 간의 교류와 확산에 대한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하며 대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그는 1947년 발사 나무 뗏목인 콩티키호를 타고 태평양을 횡단하며 남아메리카와 폴리네시아 간의 접촉 가능성을 입증하려 했으며, 파피루스 배 라 호와 라 2세를 이용해 대서양 횡단을 시도하고, 갈대 배 티그리스 호를 건조하여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인더스 문명의 교류 가능성을 탐구했다. 헤위에르달은 이스터 섬의 모아이 석상 연구, 몰디브 유적 조사, 아제르바이잔 암각화 연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으며, 그의 연구는 학계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실험 고고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대중의 고대 역사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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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르 헤위에르달 - 콘티키호
    콘티키호는 토르 헤위에르달이 남아메리카에서 폴리네시아로의 이주 가능성을 탐구하기 위해 발사나무로 만든 뗏목으로, 페루에서 출발하여 4,300마일을 항해한 후 투아모투 제도의 라로이아 환초에 좌초되었으며,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의 콘티키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토르 헤위에르달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헤위에르달, 2000년경
출생일1914년 10월 6일
출생지라르비크, 노르웨이
사망일2002년 4월 18일 (향년 87세)
사망지콜라 미케리, 이탈리아
분야민족지학
모험
모교오슬로 대학교
박사 지도 교수크리스티네 보네비에
히얄마르 브로흐
배우자리브 코케론-토르프 (1936년 결혼, 1947년 이혼)
이본 데데캄-시몬센 (1949년 결혼, 1969년 이혼)
자클린 비어 (1991년 결혼)
자녀5명
토르 헤위에르달 서명
수상
수상 내역뭉고 파크 메달 (1950년)

2. 생애

토르 헤위에르달은 노르웨이 라르비크에서 태어나 오슬로 대학교에서 동물학지리학을 공부했다. 그는 폴리네시아 문화와 역사에 대한 개인적인 연구를 통해, 뱌르네 크뢰펠리엔이 소유한 방대한 폴리네시아 관련 자료를 접하게 되었다.[4][5]

크리스티네 보네비와 얄마르 브로흐 교수의 후원으로, 헤위에르달은 태평양 섬들의 동물 이동 경로를 연구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다. 1936년 마르키즈 제도로 항해하기 직전, 오슬로 대학교에서 만난 리브 쿠체론-토르프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지만, 콘티키 탐험 직전 이혼했다.[8] 이후 1937년, 대학 졸업과 함께 아내와 폴리네시아 파투 히바 섬에서 생활하며 남아메리카 기원설을 떠올렸다.

나치 독일의 노르웨이 점령 이후, 1944년부터 핀마르크에서 자유 노르웨이군으로 복무했다.[9][10]

1949년에는 이본 데데캄-시몬센과 재혼하여 세 딸을 낳았으나, 1969년 이혼했다. 그는 이혼의 원인을 자신의 잦은 해외 체류와 자녀 양육에 대한 견해 차이로 꼽았다.[11] 1991년에는 재클린 베어와 세 번째 결혼을 하고 테네리페에서 살면서 페루 투쿰과 아조프 등지에서 고고학 프로젝트에 참여했다.[12]

2002년 4월 18일, 헤위에르달은 이탈리아 콜라 미체리에서 뇌종양으로 사망했다. 노르웨이 정부는 오슬로 대성당에서 국장을 거행했으며, 그는 콜라 미체리 자택 정원에 묻혔다. 그는 무신론자였다.[60][61]

토르 헤위에르달의 묘, 콜라 미체리

2. 1. 유년 시절과 교육

토르 헤위에르달은 노르웨이 라르비크에서 양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영향으로 헤위에르달은 어린 시절부터 동물학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집에 작은 박물관을 만들기도 했다.[80]

오슬로 대학교에서 동물학지리학을 공부했으며, 동시에 폴리네시아의 문화와 역사를 개인적으로 연구하며 당시 폴리네시아 관련 최대 규모의 서적 및 논문 컬렉션을 조사했다.[80]

그는 고립된 태평양 섬들을 방문하여 동물들의 이동 경로를 연구하고자 했다. 1936년 마르키즈 제도로 항해하기 직전, 대학 입학 전에 만난 첫 번째 아내와 결혼했으나, 이후 이혼했다. 슬하에 두 아들이 있었다.[80]

1937년, 대학 졸업 후 아내와 함께 폴리네시아 파투히바 섬에서 현지인처럼 생활하며 남아메리카 기원설을 떠올렸다.[80]

2. 2. 파투히바 섬 탐험 (1937-1938)

1936년, 리브 쿠체론 토르프와 결혼한 다음 날, 헤위에르달 부부는 파투 히바 섬으로 향했다. 표면적으로는 섬 간의 동물 종 확산을 연구하는 학문적인 임무를 띠었지만, 실제로는 "남태평양으로 도망쳐"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려 했다.[13]

부모로부터 탐험 자금을 지원받았지만, 섬에 도착했을 때는 "식량, 무기, 라디오"가 부족했다. 중간 기착지였던 타히티의 주민들은 마체테와 냄비를 가져가도록 설득했다.[8]

1937년 오모아 계곡의 파투 히바에 도착하여 섬의 산악 지대를 넘어 섬 동쪽의 작고 거의 버려진 계곡 중 한 곳에 정착했다. 그곳 우이아 계곡에 으로 덮인 기둥 위에 집을 지었다.[13]

원시적인 환경에서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고 살면서 동물학 및 식물학 표본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등 학문적인 목표를 달성해나갔다. 특이한 유물을 발견하고, 원주민의 구전 역사를 듣고, 탁월한 바람과 해류를 기록했다.[8]

이러한 환경에서, 한때 영광스러웠던 마르케사스 문화의 폐허에 둘러싸여 헤위에르달은 유럽 이전의 폴리네시아인남아메리카의 민족 및 문화 간의 콜럼버스 이전의 대양 횡단 접촉 가능성에 대한 이론을 처음으로 발전시켰다.[13]

겉보기에는 평화로운 상황이었지만, 다양한 열대 질병에 노출되고 기타 어려움을 겪으면서 1년 후 문명 세계로 돌아갔다. 그들은 함께 모험에 대한 기록을 썼다.[8]

마르케사스 제도 (대부분 파투 히바)에 머물렀던 사건들은 그의 책 ''På Jakt etter Paradiset'' (''천국의 사냥'') (1938)에 처음으로 실렸는데, 이 책은 노르웨이에서 출판되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번역되지 않았고 거의 잊혀졌다. 여러 해가 지난 후, 다른 모험과 다른 주제에 대한 책으로 명성을 얻은 헤위에르달은 이 항해에 대한 새로운 기록을 ''파투 히바'' (런던: 앨런 & 언윈, 1974)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파투 히바에서의 시간과 히바오아 및 모호타니로의 짧은 여행에 대한 이야기는 ''일곱 번째 날, 지구는 푸르렀다'' (랜덤 하우스, 1996)에도 실려 있다.

2. 3.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주어진 소스 문서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에 대한 내용이 없으므로, 해당 섹션에 작성할 내용이 없다.

2. 4. 결혼과 가족

헤위에르달은 1936년 마르키즈 제도로 함께 항해하기 전날, 오슬로 대학교에서 만나 경제학을 공부한 리브 쿠체론-토르프(1916–1969)와 결혼했다. 당시 헤위에르달은 22세였고 리브는 20세였다. 이 부부는 두 아들 토르 주니어(1938–2024)[6]와 비에른(1940–2021)을 두었다.[7] 이 결혼은 1947년 콘티키 탐험 직전에 이혼으로 끝났으며, 리브는 이 탐험을 조직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8]

1949년 헤위에르달은 이본 데데캄-시몬센(1924–2006)과 결혼했다. 그들은 세 딸, 아네트, 마리안, 헬레네 엘리자베스를 두었다. 그들은 1969년에 이혼했다. 헤위에르달은 그들의 별거 이유를 그가 집을 떠나 있었던 점과 자녀 양육에 대한 그들의 생각 차이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자서전에서 그는 그들의 별거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고 결론지었다.[11]

1991년, 헤위에르달은 세 번째 부인으로 재클린 베어(1932년생)와 결혼했다. 그들은 카나리아 제도의 테네리페에서 살았으며, 2002년 사망할 때까지 특히 페루 투쿰과 아조프에서 고고학 프로젝트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사망하기 전까지 사모아에서 고고학 프로젝트를 수행하길 바랐다.[12]

2. 5. 사망

헤위에르달은 2002년 4월 18일 이탈리아 리구리아 주 콜라 미체리에서 87세의 나이로 뇌종양으로 사망했다.[58] 그는 부활절 휴가를 가족들과 함께 보내기 위해 그곳을 방문했다. 진단을 받은 후, 그는 음식을 거부하거나 약을 복용하지 않음으로써 죽음을 준비했다.[59]

노르웨이 정부는 2002년 4월 26일 오슬로 대성당에서 그를 위한 국장을 거행했다. 그는 콜라 미체리의 자택 정원에 매장되었다.[1] 그는 무신론자였다.[60][61]

3. 주요 탐험

헤위에르달은 남아메리카와 폴리네시아 간의 문화적 교류를 증명하기 위해 콘티키 호 탐험(1947년)과 라 호 탐험(1969년, 1970년) 등 여러 차례 탐험을 했다.

1964년에는 남태평양 탐험의 공적으로 왕립 지리학회로부터 금메달(패트론스 메달)을 받았다.[81]

이 항해를 통해 남아메리카에서 폴리네시아로의 이주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음이 실증되었다고 일반적으로 생각되지만, 남아메리카의 태평양 측에는 훔볼트 해류라는 강력한 해류가 흐르고 있어, 바람을 거슬러 항해하는 능력을 갖지 못한 뗏목으로는 훔볼트 해류를 넘어 폴리네시아로의 무역풍을 타는 것은 어렵다. 실제로 콩티키 호는 군함에 예인되어 훔볼트 해류를 넘어선 해역(육지에서 약 80km)에서 표류 실험을 시작했으며, 이 점을 들어 실험 항해로서의 가치는 높지 않다고 지적된다.

현재 인류학자, 고고학자, 역사학자, 유전학자 등 대부분의 연구자는 고고학, 언어학, 자연인류학, 문화인류학적 지견, 그리고 유전자 분석 결과를 근거로 남아메리카로부터의 식민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폴리네시아로의 식민은 폴리네시아인이 고안한 바람을 거슬러 항해하는 능력을 가진 항해 카누를 사용하여, 타이완에서 동남아시아 도서부, 멜라네시아, 서폴리네시아, 동폴리네시아 순서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며, 바람을 거슬러 항해하는 기술을 갖지 못했던 남아메리카의 사람들이 자력으로 폴리네시아로 건너갔다는 증거는 없다고 생각한다.

한편, 훔볼트 해류를 뗏목으로 건너갈 수 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고 헤위에르달의 설을 옹호하는 의견도 있다. 특히 콜럼버스 이전부터 이미 오세아니아 일대에서 중남미 원산의 고구마가 재배되었던 것으로부터, 남아메리카에서 폴리네시아 방면으로의 문화적 영향은 전혀 없지는 않았다는 의견이다. 하지만, 이 점에 대해서도 남아메리카 원주민이 폴리네시아에 항해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폴리네시아인이 남아메리카 대륙에 내항하여 고구마를 가져왔다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러우며, 현재 연구자의 대다수는 그 가설을 지지하고 있다.

또한 최근에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의 언어학자 캐서린 클라 등은 북미 원주민 추마시족과 폴리네시아어 계통 언어의 어휘 비교 및 출토물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으로부터, 폴리네시아인과 북미 원주민의 문화적 접촉 가능성을 지적한 논문을 Current Anthropology지와 American Antiquity지에 투고했으며, American Antiquity지에 2005년 7월호에 게재되었다. 다만, 이 논문에서는 폴리네시아 측으로부터의 문화적 접촉 가능성은 시사할 수 있어도, 남아메리카 측으로부터의 능동적인 접촉의 증거는 되지 못한다.

"아즈텍 문명과 이집트 문명과의 유사성"에 대해서도, 각 문명이 발생한 연대가 너무 떨어져 있으며, "유사성은 우연에 불과하다"라는 설이 거의 주류이다. 특히 피라미드에 관해서는, 기술이 미발달한 단계에서 거대한 석조 건축물을 건설하려면 어쩔 수 없이 이 형태가 될 수밖에 없다는 유사성으로 생각된다. 다만, 미토콘드리아 DNA 하플로그룹 X 및 Y 염색체 하플로그룹 R1의 불가사의한 분포는, 이집트·유럽에서 아메리카로의 이주가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그의 설을 지지할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헤위에르달의 학설에는 부정적인 견해가 우세하지만, 자설을 실증하기 위해 모험을 감행한 헤위에르달의 업적 자체는 높이 평가받고 있다. 폴리네시아인의 동남아시아 기원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에게서도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시노즈카 요시히코도 그에 대한 경의를 표명하고 있다.

3. 1. 콘티키 호 탐험 (1947)

1947년, 헤위에르달과 5명의 동료 모험가들은 페루에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투아모투 제도까지 발사 나무와 기타 토착 재료로 제작한 뗏목인 콩티키호를 타고 항해했다. ''콩티키'' 원정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그린 잉카 제국 뗏목에 대한 오래된 보고서와 그림, 그리고 남아메리카폴리네시아 간의 접촉을 암시하는 원주민 전설 및 고고학적 증거에서 영감을 받았다.[14] ''콩티키''는 101일간 4,300해리(5,000마일 또는 8000km)[14]태평양 횡단 항해 끝에 1947년 8월 7일 투아모투 제도의 라로이아의 산호초에 부딪혔다. 헤위에르달은 어릴 때 적어도 두 번 익사할 뻔했고 물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그는 나중에 뗏목 항해에서 매번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고 말했다.[15]

  • -|]]|thumb|노르웨이 오슬로의 콩티키 박물관에 있는 ''콩티키''호


헤위에르달의 저서 ''콩티키 원정: 뗏목으로 남태평양 횡단기''는 70개 언어로 번역되었다.[16] 이 원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콩티키''는 1951년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2012년에는 각색 영화가 개봉되었으며, 역시 ''콩티키''라는 제목으로, 제85회 아카데미상에서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후보[17], 제70회 골든 글로브상에서 골든 글로브 외국어 영화상 후보로 지명되었다.[18] 노르웨이 영화가 아카데미상과 골든 글로브상 모두에 후보로 지명된 것은 처음이었다.[19]

1947년 당시에는 폴리네시아 섬 주민(폴리네시아인)의 기원이 미스터리였으며, 헤위에르달 자신도 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남아메리카 페루에 있는 석상과 폴리네시아에 있는 석상이 유사하다는 점, 식물의 명칭이 유사하다는 점 등을 근거로, 폴리네시아인의 기원은 남아메리카에 있다고 논문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이 설은 학계의 반대에 부딪혔다. 당시 기술로는 배로 왕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헤위에르달과 그의 팀은 남아메리카의 발사 나무 및 기타 현지 재료를 사용하여 잉카 제국 시대의 배를 본뜬 콩티키호를 건조하고, 페루에서 이스터 섬으로의 항해에 도전했다. 거석 문화가 잉카 제국에서 바다를 건너 이스터 섬으로 전해져, 동 섬에 남아있는 모아이 석상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실증하려 한 것이다. 콩티키는 잉카 제국의 태양신 비라코차의 다른 이름으로, 뗏목은 잉카 제국을 정복한 당시의 스페인 사람들이 그린 도면을 바탕으로 설계되었다.

콩티키호는 1947년 4월 28일에 5명의 동료와 1마리의 앵무새와 함께 출항하여, 예인선에 의해 훔볼트 해류를 넘은 후 표류하면서 이스터 섬을 목표로 했다. 일행은 출항 97일째에 투아모투 제도Puka-Puka영어를 바라보며 폴리네시아에 도착했지만, 출항 102일째인 1947년 8월 7일에 투아모투 제도의 라로이아 환초에서 콩티키호는 좌초되었다.

헤위에르달은 1948년에 표류 항해의 모습을 담은 저서 『콩티키호 탐험기』를 발표했다. 이 책은 62개 국어로 번역되어 2천만 부 이상 판매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또한, 그들의 항해를 그린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Kon-Tiki』는 1951년 아카데미상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상을 수상했다.

"표류"에는, 당시(1940년대)의 항법 기기나 보트 등도 사용했다. 또한, 아마추어 무선을 통해 노르웨이를 포함한 세계 각국과의 교신을 했다(콩티키호#개요). 식량은 실험을 명목으로 미국군으로부터 제공된 보존식을 비롯하여 해상에서 얻었다. 헤위에르달은 "인디오의 항해 기술을 입증하는 것이 목적이며, 우리가 인디오가 될 필요는 없다"라고 말하며, 처음에는 보존식을 준비하여 항해에 임할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뗏목의 로프가 파도에 닳아 끊어진다"거나 "발사가 물을 흡수하여 침몰할 것이다" 등, 항해 전에 제기된 부정적인 의견을 뒤집은 것으로 평판을 얻었다. 다만, 건조를 서두르기 위해 건조되지 않은 발사를 사용한 것이 우연히 좋은 결과를 낳았고, 건조된 발사를 사용했더라면, 해수 흡수가 빨라 침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헤위에르달은 인정하고 있다.

3. 2. 라 호 탐험 (1969-1970)

1969년과 1970년에 헤위에르달은 파피루스로 두 척의 배를 건조하여 아프리카 모로코에서 대서양을 횡단하려 했다. 고대 이집트의 그림과 모형을 바탕으로, 첫 번째 배인 '라'호(이집트의 태양신의 이름을 따서 명명)는 차드호 출신의 조선공들이 에티오피아타나호에서 얻은 파피루스 갈대를 사용하여 건조되었으며, 모로코 해안에서 대서양으로 진수되었다.[40] 라호의 선원에는 토르 헤위에르달(노르웨이), 노먼 베이커(미국), 카를로 마우리(이탈리아), 유리 센케비치(소련), 산티아고 제노베스(멕시코), 조르주 수리알(이집트), 압둘라 디브린(차드)이 포함되었다. 헤위에르달과 베이커만이 항해와 항해술 경험이 있었다. 제노베스는 아칼리 실험을 이끌게 되었다.

몇 주 후, '라'호는 물을 먹기 시작했다. 선원들은 이집트 배 건조 방법의 핵심 요소인 뱃머리를 물 위에 높게 유지하면서 유연성을 허용하는 스프링 역할을 하는 밧줄이 간과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40] 물과 폭풍으로 인해 6400km 이상 항해한 후 배가 쳐지고 부서졌다. 선원들은 카리브해 섬에서 160km 떨어진 곳에서 라호를 포기해야 했고, 요트에 의해 구조되었다.

이듬해인 1970년에는 볼리비아의 티티카카 호수 출신 데메트리오, 후안, 호세 리마치에 의해 에티오피아 파피루스로 유사한 선박인 '라 II'호가 건조되었으며, 이번에도 모로코에서 대서양을 성공적으로 건너게 되었다. 선원은 거의 동일했지만, 디브린 대신 일본 출신 오하라 게이와 모로코 출신 마다니 아이트 우하니가 합류했다. 배가 길을 잃었고, 국제 연합의 수색 및 구조 임무의 대상이 되었다. 수색에는 뉴질랜드의 루치 후를 포함한 국제적인 지원이 포함되었다. 이 배는 바베이도스에 도착하여, 선원들이 카나리아 해류를 이용하여 대서양 횡단을 할 수 있었음을 입증했다.[41] ''라 II''호는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의 콘티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콘티키 박물관에 있는 ''라 II''호


'라 탐험'이라는 책과 다큐멘터리 영화 '라'(1972)가 이 항해에 관해 제작되었다. 헤위에르달은 탐험의 주요 측면 외에도, 적어도 그들의 작은 떠다니는 섬에서라도 사람들이 협력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다양한 인종, 국적, 종교 및 정치적 관점을 대표하는 선원을 의도적으로 선택했다. 또한, 탐험대는 해양 오염 샘플을 채취하여 국제 연합에 보고서를 제출했다.[42]

4. 기타 연구 및 활동

헤위에르달은 이스터 섬 탐사, 오딘을 찾아서 프로젝트, 기마르의 피라미드 연구, 몰디브 유적 조사 등 다양한 연구 활동을 펼쳤다.

1955년부터 1956년까지 이스터 섬으로 노르웨이 고고학 탐험대를 조직하여 모아이 조각상 연구와 오롱고 등 주요 유적지를 조사했다. 그는 저서 ''아쿠-아쿠''를 통해 이스터 섬 탐사 내용을 대중에게 알렸다.

2001년부터 2002년까지는 오딘을 찾아서 프로젝트를 통해 러시아 아조프에서 발굴 작업을 진행했다. 헤위에르달은 북유럽 신화 속 오딘이 흑해 지역에서 기원했다는 가설을 세웠으나, 학계로부터 유사과학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1991년에는 테네리페 섬의 기마르의 피라미드를 연구하여 고대 태양 숭배자들이 건설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러나 라 라구나 대학교의 고고학 발굴 결과, 피라미드는 19세기에 건설된 것으로 밝혀졌다.

헤위에르달은 몰디브 섬의 유적을 조사하여 해를 향한 기초와 조각상들을 발견하고, 고대 항해 문명이 스리랑카에서 시작되어 남아메리카와 이스터 섬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4. 1. 이스터 섬 탐사 (1955-1956)

1955년부터 1956년까지, 헤위에르달은 이스터 섬으로의 노르웨이 고고학 탐험대를 조직했다. 탐험대에는 아르네 스크욜스볼드, 카일라일 스미스, 에드윈 페르돈, 곤잘로 피게로아[20], 윌리엄 멀로이 등 과학자들이 참여했다. 헤위에르달과 전문 고고학자들은 이스터 섬에서 여러 달을 보내며 모아이 조각, 운송, 건립 실험과 오롱고, 포이케 등 주요 유적지 발굴을 포함한 여러 고고학 유적지를 조사했다. 탐험대는 두 권의 대규모 과학 보고서(''이스터 섬 및 동태평양에 대한 노르웨이 고고학 탐험 보고서'')를 출판했고, 헤위에르달은 나중에 ''이스터 섬의 예술''이라는 세 번째 책을 추가했다. 헤위에르달의 대중적인 책 ''아쿠-아쿠''는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21]

''이스터 섬: 풀린 미스터리''(Random House, 1989)에서 헤위에르달은 섬의 역사에 대한 더 자세한 이론을 제시했다. 그는 원주민 증언과 고고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이 섬이 원래 남아메리카에서 온 하나우 에에페 ("긴 귀")에 의해 식민지화되었고, 16세기 중반에 폴리네시아인 하나우 모모코 ("짧은 귀")가 도착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독립적으로 왔거나 노동자로 수입되었을 수 있다. 헤위에르달에 따르면, 1722년 로게벤 제독이 섬을 발견했을 때와 1774년 제임스 쿡이 방문했을 때 사이에 무언가 일어났다. 로게벤은 백인, 인도인, 폴리네시아인이 비교적 조화롭고 번영하는 삶을 사는 것을 보았지만, 쿡은 주로 폴리네시아인으로 구성된 훨씬 작은 인구가 궁핍하게 사는 것을 보았다. 헤위에르달은 지배적인 "긴 귀"에 대한 "짧은 귀"의 봉기에 대한 구전 전통을 언급했다. "긴 귀"는 섬 동쪽 끝에 방어용 해자를 파고 장작으로 채웠다. 헤위에르달은 봉기 동안 "긴 귀"가 해자에 불을 지르고 뒤로 물러났지만, "짧은 귀"가 그 주변으로 돌아 뒤에서 공격하여 "긴 귀" 중 두 명을 제외한 모두를 불 속에 밀어 넣었다고 주장했다. 이 해자는 노르웨이 탐험대에 의해 발견되었고, 바위로 부분적으로 잘려 있었다. 불의 층은 발견되었지만 시체 파편은 없었다.

4. 2. 오딘을 찾아서 (2001-2002)

오딘을 찾아서(Jakten på Odin)는 토르 헤위에르달의 마지막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헤위에르달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오딘 가설을 수정했고, 2001년부터 2002년까지 러시아 아조프에서 발굴을 진행했다.[49] 아조프는 흑해 북동쪽 아조프 해 근처에 있다. 헤위에르달은 2년 전 카스피 해 아제르바이잔을 목표로 했으나, 그보다 북쪽인 아조프에서 스노리 스투를루손의 오딘 묘사와 일치하는 문명의 잔해를 찾고자 했다.

이 프로젝트는 노르웨이 역사학자, 고고학자, 언어학자들로부터 유사과학이라는 비난과 거센 비판을 받았다. 그들은 헤위에르달이 자료를 선택적으로 사용하고, 기본적인 과학적 방법론이 결여되었다고 비난했다.[50][51]

헤위에르달은 북유럽 신화 속 이름과 흑해 지역 지리적 이름 간 유사성에 기반하여 주장을 펼쳤다. 그는 ''아조프''와 ''에시르'', 우디와 오딘, 티르와 터키 등의 유사성을 제시했다. 그러나 언어학자와 역사학자들은 이는 단순한 우연이며 시대착오적이라고 반박한다. 아조프시는 헤위에르달이 에시르가 살았다고 주장한 시점보다 1,000년 이상 지난 후에야 그런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오딘을 찾아서' 프로젝트 관련 논란은 헤위에르달과 학계의 관계를 보여준다. 그의 이론은 과학적 인정을 거의 받지 못했고, 헤위에르달은 과학적 비판을 거부하며 대중 대상 책을 출판하는 데 집중했다. 2024년 현재, 헤위에르달의 오딘 가설은 역사학자, 고고학자, 언어학자들에게 입증되지 않았다.

4. 3. 기마르의 피라미드 연구 (1991)

1991년, 헤위에르달은 테네리페에서 기마르의 피라미드를 연구하여 그것들이 무작위로 쌓아놓은 돌무더기가 아니라 피라미드라고 주장했다. 카나리아 천체물리학 연구소(Instituto de Astrofísica de Canarias)의 천체물리학자 아파리시오, 벨몬테, 에스테반은 이 "피라미드"들이 천문학적으로 정렬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고대 기원이라는 확신을 가진 헤위에르달은 피라미드를 지은 고대인들이 태양 숭배자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52][53]

헤위에르달은 카나리아 피라미드가 고대 이집트와 마야 문명 사이의 항해에서 시간적, 지리적 기착지를 형성했다고 가설을 세웠으며, 이는 역사학자, 비전가, 고고학자, 천문학자, 그리고 역사에 대한 일반적인 관심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52][53]

1991년과 1998년 사이에 라 라구나 대학교의 고고학자들이 고고학적 발굴을 진행했다. 1996년 심포지엄에서 예비 결과가 발표되었으며, 피라미드의 연대를 입증하는 증거를 제시했다.[54] 앞선 지구물리학적 지오레이더 조사에 따르면, 피라미드에 인접한 8개의 위치(각각 면적 25m2)가 견고한 용암 바닥까지 층별로 조사되었다. 이를 통해 세 가지 특정 퇴적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 평균 두께 20cm의 층으로, 부엽토가 풍부한 흙으로 식물 잔해와 뿌리가 많았고, 경작 흔적이 뚜렷하게 식별되었으며, 20세기 후반의 광범위한 연대 측정 가능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 평균 두께 25cm의 층으로, 첫 번째 층과 유사한 성분이었으나 부엽토가 적고 작은 돌의 양이 더 많았다. 19세기와 20세기에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그 중 1848년의 공식 인장이 특히 언급할 만하다.

# 25cm에서 150cm 사이의 두께의 층으로, 작은 화산암으로 구성되었으며, 대부분 한 번의 움직임으로 제자리에 놓여져 아래의 울퉁불퉁한 돌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돌에는 유물이 거의 없었으며, 대부분 작은 수의 도자기 조각이 있었는데, 일부는 지역산이었고 일부는 수입산이었으며, 둘 다 대략 19세기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피라미드는 이 바닥층 위에 층서적으로 직접 서 있으며, 따라서 피라미드의 가장 이른 건설 연대를 19세기 내로 추정할 수 있다.[55]

또한, 피라미드 중 하나의 가장자리 아래에서 자연적인 용암 동굴이 발견되었다. 그곳은 벽으로 막혀 있었고 구안체스 시대의 유물을 산출했다. 피라미드가 동굴 위에 층서적으로 놓여 있기 때문에, 서기 600년에서 1000년 사이의 구안체스 유물은 동굴의 인간 사용 연대에 대한 결론을 뒷받침할 수 있을 뿐이다. 위 조사는 피라미드 자체가 19세기보다 오래될 수 없음을 나타낸다.[56]

4. 4. 몰디브 유적 조사

헤위에르달은 인도양의 몰디브 섬에서 발견된 언덕들을 조사했다. 그곳에서 그는 해를 향한 기초와 안뜰, 그리고 늘어진 귓불을 가진 조각상들을 발견했다. 헤위에르달은 이 발견들이 현재의 스리랑카에서 시작되어 몰디브를 식민지화하고 고대 남아메리카와 이스터 섬의 문화에 영향을 미치거나 설립한 항해 문명에 대한 자신의 이론과 일치한다고 믿었다. 그의 발견은 그의 저서 ''몰디브 미스터리''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5. 학문적 논쟁과 비판

헤위에르달의 학설은 1947년 당시 폴리네시아인의 기원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시작되었다. 그는 남아메리카 페루와 폴리네시아 석상의 유사성, 식물 명칭의 유사성 등을 근거로 폴리네시아인의 남아메리카 기원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기술로는 배를 이용한 왕래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학계의 반대에 부딪혔다.[81]

헤위에르달은 자신의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1947년 콩티키호 탐험을 감행했다. 콩티키호는 남아메리카의 발사 나무 등 현지 재료를 사용하여 잉카 제국 시대의 배를 본떠 만든 뗏목이었다. 이 탐험은 거석 문화가 잉카 제국에서 바다를 건너 이스터 섬으로 전해져 모아이 석상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였다. 콩티키호는 1947년 4월 28일 출항하여 102일 만인 8월 7일 투아모투 제도의 라로이아 환초에 좌초되었다.

이 항해를 통해 남아메리카에서 폴리네시아로의 이주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 어느 정도 증명되었지만, 훔볼트 해류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점과 콩티키호가 군함에 예인되어 실험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실험 항해로서의 가치는 낮게 평가되기도 한다.

현재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고고학, 언어학, 유전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폴리네시아인의 기원이 타이완에서 시작되어 동남아시아 도서부, 멜라네시아, 서폴리네시아, 동폴리네시아 순서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그러나 콜럼버스 이전부터 오세아니아에서 중남미 원산의 고구마가 재배되었다는 점,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의 언어학자 캐서린 클라 등의 연구에서 폴리네시아인과 북미 원주민의 문화적 접촉 가능성이 제기되는 등 남아메리카와 폴리네시아 간의 문화적 영향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

헤위에르달은 아즈텍 문명과 이집트 문명의 유사성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두 문명의 발생 연대가 크게 차이가 나고, 피라미드와 같은 건축물의 유사성은 기술적 한계에서 비롯된 우연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처럼 헤위에르달의 학설은 학계에서 대체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지만, 자신의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모험을 감행한 그의 업적은 높이 평가받고 있다. 폴리네시아인의 동남아시아 기원설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6. 유산 및 평가

헤위에르달의 연구는 오랫동안 과학계에서 주류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고대 역사와 인류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크게 높였다. 그는 고대 기술로도 장거리 항해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며 실험 고고학의 주요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노르웨이 오슬로의 뷔그되이 반도에 있는 콘 티키 박물관에는 콘 티키 탐험에 사용된 선박과 지도, 그리고 약 8,000권의 책을 소장한 도서관이 있다.

2000년에는 토르 헤위에르달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헤위에르달 본인이 설립에 동의한 이 연구소는 그의 아이디어와 원칙을 알리고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연구소는 헤위에르달의 고향인 노르웨이 라르비크에 위치해 있다. 라르비크 시 당국은 2007년 더 많은 방문객을 유치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들은 헤위에르달의 어린 시절 집을 구입하여 개조하고, 여름 말에 그를 기리는 연례 뗏목 경주를 개최하며, 헤위에르달 센터 개발을 시작했다.[62]

헤위에르달의 손자 올라브 헤위에르달은 2006년 6명의 선원과 함께 할아버지의 ''콘 티키'' 항해를 재현했다. 토르게이르 히가프가 조직한 이 항해는 탕가로아 탐험[63]으로 불렸으며, 헤위에르달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센터보드("과라[64]")를 이용한 항해를 더 잘 이해하며, 태평양 환경을 감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토르게이르 히가프의 탕가로아 탐험에 관한 책[65]은 2007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에는 60년 전 ''콘 티키'' 항해의 사진들이 다수 수록되었으며, 탕가로아 선원 안데르스 베르그(오슬로: 바자르 포르라그, 2007)의 사진이 삽화로 사용되었다. "탕가로아 탐험"[66]은 영어, 노르웨이어, 스웨덴어, 스페인어로 된 다큐멘터리 DVD로도 제작되었다.

폴 테루는 저서 ''오세아니아의 행복한 섬들''에서 폴리네시아 섬 문화를 페루 문화와 연결하려는 헤위에르달의 주장을 비판했다. 그러나 일부 폴리네시아 섬의 DNA를 페루 원주민과 비교한 최근 과학 연구는 헤위에르달의 이론에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 연구들은 폴리네시아가 아시아에서 기원했지만 남아메리카와의 접촉도 있었음을 시사한다. 지난 몇 년 동안 여러 논문에서 유전자 데이터를 통해 이스터 섬과의 접촉을 확인했다.[67][68][69] 최근 일부 연구자들은 남아메리카와의 접촉이 폴리네시아의 유전적, 문화적 요소에 더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70]

토르 헤위에르달의 흉상. 구이마르, 테네리페.


소행성 2473 헤위에르달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노르웨이 난센급 호위함인 HNoMS ''토르 헤위에르달'', ''MS 토르 헤위에르달''(현재 이름은 ''MS 바나 탈린''), 그리고 ''토르 헤위에르달''은 티그리스 원정대 참가자가 소유했던 독일의 3개 돛대를 가진 항해 훈련 선박이다. 헤위에르달 발리스(명왕성의 계곡)와 그가 태어난 마을인 라르비크에 있는 토르 헤위에르달 고등학교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구글은 헤위에르달의 100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구글 두들을 제작했다.[71]

헤위에르달은 수많은 상과 영예를 받았다.

7. 저서


  • På Jakt efter Paradiset영어 (1938); Fatu-Hiva: Back to Nature영어 (1974년에 영어 제목 변경).[79]
  • The Kon-Tiki Expedition: By Raft Across the South Seas영어 (Kon-Tiki ekspedisjonenno, Kon-Tiki: Across the Pacific in a Raft영어로도 알려져 있음), 1948.[79]
  • American Indians in the Pacific: The Theory Behind the Kon-Tiki Expedition영어 (시카고: 랜드 맥낼리, 1952), 821쪽.[79]
  • Aku-Aku: The Secret of Easter Island영어 (1957).[79]
  • Archaeology of Easter Island영어, 1권 (런던: 조지 앨런 앤 언윈, 1961), 2권 (1965)[79]
  • Sea Routes to Polynesia: American Indians and Early Asiatics in the Pacific영어 (시카고: 랜드 맥낼리, 1968), 232쪽.[79]
  • The Ra Expeditions영어[79]
  • Early Man and the Ocean: The Beginning of Navigation and Seaborn Civilizations영어 (1979)[79]
  • The Tigris Expedition: In Search of Our Beginnings영어[79]
  • The Maldive Mystery영어 (1986)[79]
  • Green Was the Earth on the Seventh Day: Memories and Journeys of a Lifetime영어[79]
  • Pyramids of Tucume: The Quest for Peru's Forgotten City영어[79]
  • Skjebnemøte vest for havetno [''운명은 바다 서쪽에서 만난다''], 1992 (노르웨이어 및 독일어만 해당) 아메리카 원주민이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백인 수염을 기른 신들, 기반 시설은 잉카인이 아닌 더 진보된 선조들에 의해 건설되었다.[79]
  • In the Footsteps of Adam: A Memoir영어 (공식판은 아바쿠스, 2001, 잉리드 크리스토퍼슨 번역)[79]
  • Ingen Grenserno (노르웨이어만 해당), 1999[79]
  • Jakten på Odinno (오딘에 대한 이론, 노르웨이어만 해당), 2001[79]
  • 『콩티키호 표류기』 미즈구치 시게오 역, 월요 서방, 1951년
  • * 신판 『콩 티키호 탐험기』 지쿠마쇼보 (지쿠마 총서, 지쿠마 문고에서 신장 재간), 편역으로 「세계 논픽션 전집」
  • * 그 외 가와데 문고, 2013년, 가와데 쇼보 신샤 「세계 탐험 기행 전집」, 신판 2023년
  • * 그 외 『콩치키호 표류기』 진구 테루오 역, 개성사 문고, 1976년, 아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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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신판 『악・악 - 고도 이스터 섬의 비밀』 사회사상사: 현대 교양 문고, 개정판 1992년
  • 『갈대 배 라호 항해기』 나가이 아츠시 역, 소우시샤, 197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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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투 히바 낙원을 찾아서』 상하, 야마다 아키라 역, 현대 교양 문고, 1976년
  • 『티그리스호 탐험기 문명의 기원을 찾아서』 상하, 오가와 히데오 · 타나카 쇼타로 역, 지쿠마쇼보, 1981년, 지쿠마 문고, 1989년
  • 『해양의 인류지 초기 항해·탐험·식민』 고쿠분 나오이치·키무라 노부요시 역, 호세이 대학 출판국, 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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