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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타미시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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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크타미시 칸은 칭기즈 칸의 후손으로, 14세기 후반 킵차크 칸국(골든 호드)의 칸이었다. 그는 티무르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잡고 킵차크 칸국을 재통합했으며, 모스크바를 공격하여 조공을 받았다. 그러나 티무르와의 갈등으로 여러 차례 전쟁을 겪으며 몰락했고, 결국 시베리아에서 사망했다. 그의 통치는 킵차크 칸국의 부흥을 가져왔지만, 티무르와의 전쟁으로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고, 그의 사후 킵차크 칸국은 분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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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타미시 칸
기본 정보
일러스트 연대기에 묘사된 토크타미시 (16세기)
일러스트 연대기에 묘사된 토크타미시 (16세기)
이름토크타미시
다른 이름




トクタミシュ
출생지백장 한국 (白帳汗國)
사망일1406년
사망지튜멘
종교수니파 이슬람교
통치
칭호
왕조보르지긴 가문
가문 유형왕조
백장 한국 칸 즉위1378년–1380년
백장 한국 칸 선임자티무르 말리크
백장 한국 칸 후임자본인 (금장 한국 칸으로 즉위)
금장 한국 칸 즉위1380년–1395년
금장 한국 칸 선임자아랍 샤
금장 한국 칸 후임자쿠유르추크, 티무르 쿠틀루그
시베리아 한국 칸 즉위1400년–1406년
시베리아 한국 칸 선임자없음
시베리아 한국 칸 후임자체케레
가족
아버지투이 콰자
어머니쿠탄-쿤체크
자녀잘랄 웃딘
카림 베르디
쾨베크
자바르 베르디
카디르 베르디

2. 혈통 및 가계

Toqtamiš qan|토크타미시 칸mn칭기즈 칸의 장남 조치의 13번째 아들 투카 티무르의 후손이다.[3] 톡타미시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 조치
  • * 투카 티무르
  • ** 우룽 티무르

사리차
* 쿠윤착
** 쿠틀룩 크와자
*** 투이 크와자
'''톡타미시'''

무인 알딘 나탄지(이전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익명의 인물"로 알려짐)에 따르면, 톡타미시의 어머니는 콩기라트 부족 출신의 쿠탄 쿤체크였다.[4]

톡타미시는 여러 아내들 중 마마이의 미망인과 결혼했는데, 이는 아마도 베르디벡의 딸이자 1370~1371년 사라이를 잠시 통치했던 툴룬벡 카눔과 동일인일 것이다. 그는 1386년 모호한 음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그녀를 처형했다.[38]

『무이즈 알 안사브』(Muʿizz al-ansāb)에 따르면, 톡타미시에게는 여덟 명의 아들과 다섯 명의 딸, 그리고 여섯 명의 손자가 있었다.[39]

이름비고
잘랄 알딘 (1380~1412)타가이 비카 소생, 1411~1412년 골든 호드의 칸
아부 사이드잘랄 알딘의 아들
아만벡잘랄 알딘의 아들
카림 베르디1409년, 1412~1413년, 1414년 골든 호드의 칸 (1417년 사망?)
사이드 아흐마드카림 베르디의 아들, 아마도 1416~1417년 골든 호드의 칸 (그는 사이드 아흐마드 칸(1432~1459)과는 다른 인물임)[40]
케벡1413~1414년 골든 호드의 칸
차가타이 술탄케벡의 딸
사라이 뮬크케벡의 딸
시린 비카케벡의 딸
자바르 베르디1414~1415년, 1416~1417년 골든 호드의 칸
카디르 베르디체르케스 첩 소생, 1419년 골든 호드의 칸
아부 사이드카디르 베르디의 아들
이스칸데르우룬 비카 소생
쿠추크 무하마드우룬 비카 소생 (그는 쿠추크 무함마드 칸(1434~1459)과는 다른 인물임)
말리카타가이 비카 소생
자니카타가이 비카 소생, 에디구와 결혼
사이드 비카타가이 비카 소생
바흐티 비카슈크르 비카 아가 소생
마이람 비카우룬 비카 소생


3. 권력 장악 과정

칭기즈 칸을 시조로 하는 죠치 울루스의 왕족 중, 칭기즈의 장남 죠치의 13남 토카 템르의 후손이다.[41] 13세기 중반 바투가 죠치 울루스를 중앙아시아에서 루시(러시아)에 이르는 대국으로 성장시켰을 때, 토카 템르는 킵차크 초원 동부(현재 카자흐스탄)에 해당하는 죠치 울루스 좌익에 영지를 분배받았다. 그는 바투의 형 오르다가 장이 되는 좌익 오르다 울루스에 속했다.

14세기 중반 오르다의 후손이 단절된 후, 좌익의 칸에 즉위한 토카 템르의 후손 오로스는, 같은 토카 템르의 후손이지만 계통을 달리하는 만기슈락(카스피해 동해안)의 장관 토이 호자와 대립하여 그를 살해했다.[41] 오로스는 바투 가문과 오르다 가문이 단절된 이후 혼란이 계속되는 죠치 울루스를 통합하고, 울루스의 좌우 양익의 재편을 목표했다. 토이 호자의 아들 토크타미시는 어렸기 때문에 목숨을 건졌고, 마웨라안나흐르(현재 우즈베키스탄)에서 권력을 확립한 차가타이 울루스 계열의 장수 티무르 휘하로 도망쳤다.[41]

1378년, 토크타미시는 티무르의 지원을 받아 킵차크 초원으로 돌아와 좌익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후 죠치 울루스 우익(동부)의 칸, 템르 멜릭(오로스의 아들이기도 함)을 아랄해 연안의 카라탈()에서 물리치고, 수도 사라이를 정복하여 죠치 울루스의 칸에 즉위했다.[42]

1380년에는 크리미아 반도를 근거지로 바투 울루스 서부에서 독립하고 있던 키야트 부의 마마이를 칼카 강 전투에서 토벌하여 죠치 울루스의 재통합을 달성했다.[42]

3. 1. 우루스 칸과의 대립

톡타미시의 아버지 투이 콰자는 망기쉬락 반도의 지방 통치자였다. 그는 오르다의 옛 울루스(중심지는 시그낙)의 칸이자 자신의 종주였던 우루스의 군대에 합류하여 전통적인 황금 호르드의 수도인 사라이를 정복하려는 원정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자신의 권위에 대한 반대를 불쾌하게 여기고 경계했던 우루스는 투이 콰자를 처형했다. 어린 톡타미시는 도망쳤다가 아버지를 살해한 자에게 항복했고, 어린 나이 때문에 용서받았다.[6]

1373년 우루스가 사라이에서 권력을 확립하는 동안, 톡타미시는 우루스의 반대자들을 모아 시그낙에서 자신을 칸으로 만들려고 시도했다. 우루스는 즉시 그들을 공격했고, 톡타미시는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와 항복하고 다시 용서받았다.[7] 1375년 우루스가 사라이를 장악하자 톡타미시는 다시 도망칠 기회를 얻었다. 그는 티무르(티무르 랑)의 궁정으로 피신하여 1376년에 도착했다. 티무르의 호의와 지원을 얻은 톡타미시는 1376년 시르다리야 강 유역의 오트라르와 사이람에 자리를 잡고 우루스 칸의 영토를 침략했다. 우루스의 아들 굴룩 부카가 톡타미시를 공격하여 패배시켰지만, 그 자신도 치명상을 입었다.

톡타미시는 다시 티무르에게 피신하여 적들과 싸우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다시 패배했는데, 이번에는 우루스의 아들 톡타키야에게 패했다. 부상을 입은 톡타미시는 시르다리야 강을 헤엄쳐 건너 도망쳐 다시 부하라에 있는 티무르의 궁정으로 갔다. 그는 우루스가 추격해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곧 우루스의 사절들이 도착하여 톡타미시의 인도를 요구했다. 티무르는 이를 거부하고 우루스에 대항하기 위해 자신의 군대를 모았다. 1376년에서 1377년 겨울에 3개월간의 대치 끝에 우루스는 고향으로 돌아갔고, 티무르의 군대는 오트라르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우루스의 죽음을 알게 된 티무르는 톡타미시를 새로운 칸으로 선포하고 자신의 수도인 사마르칸트로 돌아갔다.[8]

3. 2. 권력 장악

우루스는 그의 아들 똑타키야에게 칸의 자리를 물려주었으나, 똑타키야는 두 달 만에 죽었고, 이후 그의 다른 아들 티무르 맬릭이 칸이 되었다. 톡타미시는 티무르 맬릭에게 쉽게 패배하고 다시 한번 티무르의 궁정으로 도망쳤다. 티무르 맬릭이 술과 향락에 시간을 보내고 중요한 일들을 무시하며, 격분한 백성들이 톡타미시를 통치자로 원한다는 소식을 들은 티무르는 그의 군대를 사우란과 오트라르로 보냈고, 두 도시는 항복했다. 시그낙으로 진격하여, 카라탈에서 적을 물리치고, 1379년 자신의 에미르들에게 배신당한 티무르 맬릭을 사로잡아 처형했다. 톡타미시는 이제 시그낙에서 칸으로 즉위했고, 그 해 남은 기간 동안 권력을 확립하고 다음 목표인 사라이를 위한 자원을 확보하는 데 힘썼다.[9]

1380년, 톡타미시는 사라이와 황금 호르드의 중앙 및 서부 지역을 장악할 목적으로 서쪽으로 진격했다. 그의 군사력은 그의 이전 후원자 카간 베그(십반 울루스)와 카간 베그의 사촌이자 당시 칸이었던 아랍 샤를 위협했고, 두 사람 모두 톡타미시에게 복종했다. 사라이의 칸이 된 그는 볼가 강을 건너 황금 호르드 서쪽 지역의 강력한 베글레르베그 마마이를 제거하려 했다. 그 해 초 러시아군과의 쿨리코보 전투에서 패배하고 그의 꼭두각시 칸 툴락이 죽으면서 약화된 마마이는 1381년 가을, 톡타미시가 마마이의 여러 에미르들을 유인해낸 후 칼카 강에서 톡타미시에게 패배했다. 마마이는 크림 반도로 도망쳤지만, 결국 1380년 말이나 1381년 초에 추격해온 톡타미시의 부하들에게 제거되었다.[10]

톡타미시의 권력의 전 영역


도망자였던 톡타미시는 강력한 군주가 되었고, 20년 만에 황금 호르드의 양쪽(날개)을 모두 다스린 최초의 칸이 되었다. 1년 남짓 만에 그는 왼쪽(동쪽) 날개, 즉 과거 오르다 울루스(일부 페르시아 자료에서는 백색 호르드, 투르크 자료에서는 청색 호르드라고 함)를 장악했고, 그 후 오른쪽(서쪽) 날개, 즉 바투 울루스(일부 페르시아 자료에서는 청색 호르드, 투르크 자료에서는 백색 호르드라고 함)도 장악했다. 이는 오랜 분열과 내전 이후 황금 호르드의 위대함을 회복할 것을 약속했다. 톡타미시는 지혜와 자제심으로 권력을 공고히 했다. 이미 1381년 초에 그는 제노바 크림 공화국과 평화를 회복하여 안정적인 수입을 확보했다. 그는 과거에 부여된 특권을 확인함으로써 에미르와 부족장들의 협력을 구했다.[11]

4. 킵차크 칸국 통치

1378년, 티무르의 지원을 받아 킵차크 초원으로 돌아와 좌익의 지배자가 된 토크타미시는 아랄해 연안의 카라탈()에서 죠치 울루스 우익(동부)의 칸 템르 멜릭(오로스의 아들)을 물리치고, 수도 사라이를 정복하여 죠치 울루스의 칸에 즉위했다.[42]

1380년에는 크리미아 반도를 근거지로 바투 울루스 서부에서 독립하고 있던 키야트 부의 마마이를 칼카 강 전투에서 토벌하여 죠치 울루스를 재통합했다.[42]

4. 1. 모스크바 원정

1382년 모스크바 앞에서 토크타미시와 골든 호드의 군대가 집결하다.


토크타미시는 자신의 성공과 병력 및 부의 증가에 고무되어 러시아 공국들을 향했지만, 처음부터 갈등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블라디미르-수즈달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쿨리코보 전투에서 마마이를 물리쳤으나 막대한 손실을 입어 대규모 군대를 다시 모으기 어려웠기 때문에 대립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토크타미시를 새로운 칸이자 종주로 인정했지만, 풍부한 선물을 보냈음에도 조공 지불은 거부했다. 토크타미시의 사절 아크 콰자(Āq Khwāja)가 러시아 공국들을 칸의 궁정으로 초대하여 임명장을 확인하려 했을 때, 인구의 격렬한 적대감에 직면하여 니즈니 노브고로드에 도착한 후 돌아섰다.[12]

1382년, 토크타미시는 전쟁을 준비했다. 그는 적을 기습하기 위해 볼가 강에서 러시아 상인들을 체포하고 약탈하며 그들의 배를 몰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모든 군대와 함께 강을 건너 비밀리에 진격하려 했지만, 많은 관심을 끌었다. 랴잔 대공 올레그 이바노비치(Олег Иванович Рязанский)는 칸에게 호감을 얻고자 자신의 몸을 맡기고 오카 강의 여울을 지적했다. 수즈달 대공 드미트리 콘스탄티노비치(Дмитр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Нижегородский)도 쉽게 복종하여 그의 아들들인 바실리와 세묜을 토크타미시의 원정에 안내자로 보냈다. 모스크바 대공 드미트리는 복종하지 않았지만, 리투아니아 공작 오스테이(Ostej) 지휘하에 수도에 강력한 수비대를 남겨두고 더 안전한 코스트로마로 피신하여 더 많은 병력을 모으기를 바랐다. 세르푸호프를 점령한 후, 토크타미시의 군대는 1382년 8월 23일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모스크바를 포위했다. 사흘 후, 시민들은 니즈니 노브고로드의 바실리와 세묜에게 속아 항복했고, 토크타미시의 군대는 도시로 진입하여 학살하고 약탈했으며, 통치자의 반항에 대한 응징으로 도시를 파괴했다. 이 원정 중 몽골인들이 점령한 다른 도시로는 블라디미르, 즈베니고로드, 유리예프폴스키, 페레슬라블잘레스키, 드미트로프, 콜롬나, 모자이스크가 있다. 돌아오는 길에 토크타미시는 그 공작의 협조에도 불구하고 랴잔을 약탈했다.[13]

4. 2. 러시아 공국들과의 관계

러시아 공후들이 항복하고 공물 납부를 재개한 후, 토크타미시는 유화적인 정책을 펼쳤다. 모스크바의 드미트리는 랴잔을 파괴했지만 처벌받지 않았다. 트베르의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는 블라디미르 대공으로 임명되었으나, 토크타미시가 모스크바의 드미트리를 용서하면서 대공국을 차지하지 못했다. 드미트리는 아들 바실리 드미트리예비치를 인질로 보내고 공물을 약속했으며, 1383년에 이를 이행했다.[14]

같은 해 니즈니 노브고로드의 드미트리 콘스탄티노비치가 사망하자, 토크타미시는 공국을 그의 형제 보리스 콘스탄티노비치에게 주었지만, 수즈달은 드미트리의 아들 세묘느와 바실리에게 주었다. 1386년, 모스크바 드미트리의 아들 바실리는 몰다비아를 거쳐 리투아니아로 도망쳤다가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1389년 드미트리가 아들 바실리에게 블라디미르 대공국을 유언으로 남기자, 토크타미시는 사절 셰이크 아흐마드를 통해 이를 승인했다. 수즈달의 세묘느와 바실리는 삼촌 보리스를 니즈니 노브고로드에서 쫓아냈지만, 보리스는 토크타미시의 원정에 합류하여 1390년 칸으로부터 새로운 임명장을 받았다. 이후 러시아 출신 병사들은 중앙아시아에서 토크타미시를 위해 복무했다.[14]

1391년 토크타미시는 베그 투트를 보내 뱌트카를 황폐화시켰는데, 이는 볼가 강 연안 해적 우슈쿠이니크의 약탈에 대한 보복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해적들은 볼가르 지역을 공격했다. 토크타미시는 바실리 1세에게 니즈니 노브고로드 영지를 주었다. 1382년 모스크바를 약탈했음에도 불구하고, 토크타미시는 모스크바 통치자의 권력과 부를 강화하여 다른 러시아와 몽골 정치 체제를 병합하는 길을 닦는 데 기여했다.[15]

4. 3. 티무르와의 초기 갈등

1383년, 티무르가 페르시아 문제에 집중하는 동안, 토크타미시는 수피 왕조 아래 준자치 상태였던 호라즘에 대한 골든 호드의 권위를 회복했다. 이는 그의 이전 후원자를 자극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16] 토크타미시는 에미르들로부터 약탈을 위한 원정을 요구받았고, 선조들의 전통적인 야망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1384년-1385년 겨울, 그는 대규모 군대(5 투멘, 5만 명)를 이끌고 카프카스를 넘어 잘라이르 왕조의 아제르바이잔을 침략했다. 그는 타브리즈를 점령하고 10일 동안 약탈한 후, 약 20만 명의 노예(그중 수천 명은 파르스카하이크, 스유닉, 아르차크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를 포함한 약탈품을 가지고 철수했다.[17]

잘라이르 왕조의 약점을 이용하거나 골든 호드의 확장을 막기 위해, 티무르는 1386년 아제르바이잔을 정복했다. 1386년-1387년 겨울, 그는 카라바흐에서 겨울을 보냈는데, 1387년 봄 토크타미시가 산맥을 넘어 그에게 향했다. 기습을 당해 패배 직전이었지만, 티무르의 지휘관들은 티무르의 아들 미란 샤가 이끄는 증원군의 도움으로 토크타미시의 공격을 격퇴했다. 티무르는 포로들에게 놀라울 정도로 관대하게 대하며, 그들에게 음식과 옷을 제공하고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이것이 칭기즈칸 가문의 후손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는지, 아니면 불필요한 갈등을 완화하려는 시도였는지는 불분명하다.[18]

패배와 적대감을 완화하려는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토크타미시는 티무르를 계속 자극했다. 티무르가 페르시아에 있는 동안, 1387년-1388년 겨울 토크타미시는 중앙아시아를 휩쓸었고, 그의 군대 일부는 사우란을 포위하고, 다른 일부는 호라즘을 넘어 부하라를 포위했다. 티무르의 지휘관들은 사마르칸드와 다른 도시들을 방어할 준비를 했고, 티무르 자신은 1388년 2월 시라즈에서 사마르칸드로 돌아왔다. 적의 움직임을 알게 된 토크타미시의 군대는 후퇴했다. 티무르는 토크타미시와의 대결이 불가피하다고 확신했다. 그는 토크타미시와 결탁한 호라즘의 수피 왕조를 전복하고 1388년 수도인 (구)구르간지를 파괴했다. 토크타미시는 티무르 제국에 반대하는 연합을 구축하려 했고, 맘루크 술탄 바르쿠크를 포함한 이웃 통치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토크타미시는 1388년에 다시 사우란을 점령하려 했고, 1389년 1월 눈보라 속에서 티무르에게 쫓겨났지만, 그해 후반 다시 사우란을 공격했다. 이것 또한 실패했지만, 토크타미시의 군대는 인근 지역을 약탈하고 야시(현재 투르키스탄)를 약탈한 후, 티무르가 토크타미시의 선봉대를 물리치고 추격하여 시르다리야 강을 건너자 후퇴했다. 티무르는 시그낙을 점령했지만, 이후 동쪽의 토크타미시 동맹국들에게 주의를 돌렸다.[19]

5. 티무르와의 전쟁

토크타미시는 그의 전 보호자였던 티무르와의 갈등으로 인해 모든 업적을 잃고 몰락했다. 1389년 블라디미르 대공국을 모스크바 대공의 세습 재산으로 만들고, 1393년 니즈니 노브고로드를 장악하도록 허용하여 모스크바를 강화시켰다.[35] 또한 리투아니아가 칸을 세우고 폐위하는 데 관여하도록 하여, 이후 수십 년 동안 토크타미시의 아들들이 칸 자리에 오르는 선례를 남겼다.[36]

그러나 이러한 동맹은 토크타미시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1391년과 1395년에서 1396년 사이에 티무르가 황금 호르드의 핵심 영토를 두 차례 침공하면서 토크타미시의 권위는 크게 약화되었다. 이로 인해 토크타미시는 다른 칸들과 경쟁하게 되었고, 결국 1406년 시베리아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토크타미시 사후, 그의 숙적 에디구의 영향으로 칸의 권위가 잠시 강화되었지만, 1411년 이후 황금 호르드는 다시 장기간의 내전에 돌입하며 해체되었다. 티무르는 황금 호르드의 주요 도시들과 타나의 이탈리아 식민지를 파괴하여 경제 기반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고, 이는 황금 호르드의 번영과 생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37]

1378년, 토크타미시는 티무르의 지원을 받아 킵차크 초원으로 돌아와 좌익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후 죠치 울루스 우익(동부)의 칸 템르 멜릭을 아랄해 연안의 카라탈()에서 물리치고, 수도 사라이를 정복하여 죠치 울루스의 칸이 되었다.[42]

1380년에는 크림반도를 근거지로 독립하고 있던 마마이를 칼카 강 전투에서 격파하여 죠치 울루스를 재통합했다.[42] 토크타미시는 죠치 울루스의 세력을 회복하기 위해 1382년 모스크바 포위전에서 모스크바를 일시 점령했다.[43] 1385년부터 티무르가 페르시아 원정에 나선 틈을 타 티무르 제국 영토를 공격하여 호라즘을 점령했다.[44]

그러나 이로 인해 토크타미시는 티무르와 전면 대립하게 되었고, 1389년 이후 세 차례에 걸쳐 티무르의 원정을 받았다. 1395년에는 카프카스에서 침입한 티무르에게 테렉 강 전투에서 패배하고 수도 사라이가 파괴되면서 몰락했다. 이후 망기트 부의 장군 에디게는 템르 멜릭의 아들 템르 꾸뜨르크를 칸으로 추대했다.

5. 1. 1차 침공

티무르와 그의 군대가 토크타미시에 대한 전쟁을 시작하기 위해 모였다.


티무르는 주도권을 잡고 토크타미시의 핵심 영토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1391년 2월, 타슈켄트에서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출발하여 평화를 요청하는 토크타미시의 사절들을 무시하고 과거 오르다 울루스의 영토를 공격했다. 그러나 4개월 동안 이동하며 사냥을 하면서도 북쪽으로 후퇴하는 듯한 토크타미시를 따라잡지 못했다. 토볼의 발원지에 도착하고 나서야 티무르는 토크타미시가 우랄 강을 건너 서쪽으로 재편성하여 강 건너기를 방어할 계획임을 알게 되었다. 티무르는 우랄 강으로 진격하여 상류에서 더 멀리 건너 토크타미시가 볼가 강 방향으로 후퇴하게 만들었다. 토크타미시는 크림 반도, 볼가르, 심지어 러시아에서 증원군이 도착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를 먼저 막기 위해 티무르는 토크타미시를 따라잡아 1391년 6월 18일 콘두르차 강 전투를 벌였다. 격렬한 전투는 토크타미시 군대의 패주와 전장에서의 도주로 끝났다. 적과 볼가 강 사이에 갇힌 그의 많은 병사들이 사로잡히거나 학살당했다. 티무르와 그의 승리한 군대는 볼가 강둑에서 한 달 이상 축하했다. 놀랍게도 그는 고향으로 향하기 전에 그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20]

티무르는 그들의 요청에 따라 투카 티무르의 후손인 두 명의 왕자, 티무르 꾸틀룩과 쿤체 오글란, 그리고 망기트 에미르 에디구를 남겨두었다.[21] 이것은 때때로 티무르가 티무르 꾸틀룩을 칸으로 임명한 것으로 해석되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다.[22] 세 사람은 티무르 군대를 위해 추가 병력을 모집해야 했다. 쿤체 오글란만이 그의 서약을 지켜 다음 해 토크타미시를 버리고 그의 신병을 데리고 티무르에게 돌아왔다. 한편, 티무르 꾸틀룩과 에디구는 스스로 독립하여 추종자들을 늘리고 금장군의 왼쪽(동쪽) 날개에서 티무르 꾸틀룩을 칸으로 선포한 것으로 보인다. 콘두르차 전투에서 탈출한 토크타미시의 사령관 중 한 명인 베그 풀라드는 토크타미시가 죽었다고 예상하며 사라이에서 자신을 칸으로 선포했다.[23]

토크타미시는 살아남았고 여전히 충분한 권위와 병력을 지휘하여 반격할 수 있었다. 베그 풀라드를 사라이에서 물리치고 몰아낸 토크타미시는 그를 크림 반도로 추격하여 솔카트에서 포위한 후 결국 그를 죽였다. 크림 반도의 또 다른 잠재적인 도전자인 토크타미시의 사촌 타시 티무르는 일시적으로 토크타미시의 통치를 인정했지만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유지했다. 토크타미시는 에디구와도 비슷하게 행동하여 그의 복종을 대가로 그와 타협하고 동쪽에 자치권을 부여하여 티무르 꾸틀룩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켰다. 토크타미시는 1393년 폴란드 왕 야기에우워 2세에게 그의 아버지이자 리투아니아 대공 알기르다스가 과거 금장군으로부터 빼앗은 땅에 대한 조공을 요구할 만큼 강력하다고 느꼈다. 그의 요구는 받아들여졌다. 토크타미시는 마물루크 술탄 바르쿠크, 오스만 술탄 바예지드 1세, 그리고 조지아 왕 게오르기 7세에게 연락하여 다시 한번 반 티무르 동맹을 구축하려고 했다. 티무르는 조지아를 침략하여 보복했다. 그는 1394년 여름 자신의 에미르들과 문제가 있었던 것 같지만, 그 가을 토크타미시는 카프카스를 가로질러 쉬르반으로 침입할 수 있었다. 티무르의 접근은 즉각적인 후퇴를 야기했다.[24]

5. 2. 2차 침공

티무르에게 패한 토크타미시


티무르는 황금 호르드에 대한 두 번째 원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1395년 3월, 티무르는 대군을 이끌고 데르벤트(Derbent)로 진군하여 테렉 강(Terek)까지 지역을 황폐화시켰고, 그곳에서 토크타미시의 군대와 조우했다. 1395년 4월 15일~16일에 벌어진 테렉 강 전투(Battle of the Terek River)는 4년 전 콘두르차 전투(Battle of the Kondurcha)와 마찬가지로 치열했다. 티무르는 거의 포로로 잡힐 뻔했지만, 토크타미시의 에미르들 사이의 불화 덕분에 승리했다. 토크타미시는 북쪽 볼가르(Bolghar)를 거쳐 몰도바(Moldavia)로 도망쳤다.[25]

티무르 군대는 볼가 강에서 적군 일부를 붙잡아 강으로 몰아넣었다. 티무르는 예레츠(Yelets)까지 북쪽으로 진출한 후, 황금 호르드의 도시들을 황폐화시켰다. 아조프(Tana)에서 이탈리아 상인들로부터 선물을 받은 후, 모든 기독교인들을 노예로 삼고 시설들을 파괴했다. 1395년~1396년 겨울, 체르케스를 통과하여 볼가 강을 따라 (구) 아스트라한(Astrakhan)에서 사라이(Sarai), 굴리스탄(Gülistan)까지 도시들을 약탈하고 파괴했으며, 생존자들은 노예로 잡았다. 티무르는 1396년 봄에 데르벤트를 통해 사마르칸트(Samarkand)로 돌아갔다.[25][26]

토크타미시는 티무르의 공격에서 살아남았지만, 그의 위치는 매우 불안정해졌다. 수도 사라이는 티무르의 보호자인 퀴르추크의 손에 들어갔고, 아스트라한 지역과 황금 호르드의 동부 지역은 티무르 꿀틀룩(Tīmūr Qutluq)과 에디구(Edigu)의 통제하에 있었다. 그들은 곧 퀴르추크를 제거하고 1396년 또는 1397년에 사라이를 장악했다.[27]

한편, 토크타미시는 황금 호르드 남서부 지역에서 자신의 권위를 재확립하려 노력했다. 크림반도(Crimea)에서 자신을 칸으로 선포한 사촌 타시 티무르(Tāsh Tīmūr)를 죽이고, 1397년 페오도시야(Kaffa)를 포위했다. 1397년 말이나 1398년 초, 토크타미시는 잠시 라이벌들을 물리치고 사라이와 볼가 강 도시들을 장악했다. 그러나 토크타미시는 티무르 꿀틀룩에게 패배하여 키예프(Kiev)를 거쳐 리투아니아 대공국(Grand Duchy of Lithuania)의 비타우타스(Vytautas) 대공에게로 향했다.[27]

비타우타스빌뉴스(Vilnius)와 트라카이(Trakai) 근처에 토크타미시와 그의 추종자들을 정착시켰지만, 그들 중 많은 수가 그를 버리고 오스만 술탄 바예지드 1세(Bayezit I)의 봉사에 들어갔다. 토크타미시와 비타우타스는 조약을 체결했는데, 토크타미시는 비타우타스를 루테니아 땅의 합법적인 통치자로 확인하고, 그의 왕위 회복을 위한 군사 지원과 맞바꾸어 러시아 공국들의 조공을 약속했다.[28]

6. 몰락과 죽음

티무르 쿨룩은 리투아니아에 토크타미시를 보내라고 요구했지만, 비타우타스는 "차르 토크타미시를 포기하지 않겠지만, 차르 티무르 쿨룩을 직접 만나고 싶소."라며 거절했다.[29] 비타우타스와 토크타미시는 멜슈틴의 스피텍이 이끄는 폴란드 지원군과 함께 리투아니아와 몽골군을 합쳐 티무르 쿨룩과 에디구를 공격하려 했다. 1399년 여름, 이들은 보르스크라 강에서 티무르 쿨룩 군대와 만났고, 티무르 쿨룩은 에디구가 지원군을 데려올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협상을 시작했다. 티무르 쿨룩은 비타우타스에게 복종하고 조공을 바치는 척하며 3일간 시간을 끌었고, 그 사이 에디구가 지원군을 이끌고 도착했다. 1399년 8월 12일, 보르스크라 강 전투가 벌어졌다. 티무르 쿨룩과 에디구는 거짓 후퇴 전술로 비타우타스와 토크타미시 군대를 포위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토크타미시는 시베리아로 도망쳤고, 비타우타스는 살아남았지만 많은 왕자들이 전사했다.[30] 이 패배로 비타우타스의 아조프 해 지역 정책은 큰 타격을 입었다.[31]

샤디 베그(Shādī Beg)가 토크타미시를 죽임


토크타미시는 골든 호드 영토를 지나 시베리아 변방으로 갔다. 1400년에 이 지역 일부를 지배하게 되었고, 1405년에는 에디구와 다투던 티무르에게 잘 보이려 했다. 그러나 1405년 2월 티무르가 죽으면서 화해는 실패했다. 토크타미시는 에디구와 그의 꼭두각시 칸 샤디 베그의 미움을 샀다. 에디구는 1400년부터 1406년까지 토크타미시와 16번이나 싸웠다. 마지막 전투에서 토크타미시에게 패한 에디구는 자신이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려 토크타미시를 유인했고, 1406년 말 투멘 근처에서 창과 투창으로 공격하여 죽였다. 샤디 베그 칸은 토크타미시를 죽인 공을 차지하려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에디구나 그의 아들 누르 아드-딘을 칭송했다.[32] 러시아 연대기에는 그의 죽음이 1406년에 기록되었다.[33]

이후 토크타미시는 티무르와 화해하여 재기를 도모했지만, 1405년에 티무르가 죽자 후원을 잃고, 이듬해 서시베리아에서 유랑 생활을 하던 중 에디게에 의해 살해되었다.

7. 유산

1380년에서 1381년 사이에 토크타미시는 황금 호르드를 재통합하면서 20년간 지속된 끊임없는 내전 이후 이를 부흥시키고 안정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몽골 문자로 주화를 주조한 마지막 황금 호르드 칸이었다. 1382년 모스크바 함락은 2년 전 쿨리코보 전투에서 황금 호르드가 러시아 공국 지배에 입은 타격을 만회했다. 아제르바이잔 침공은 이전 칸들의 그 지역 착취 또는 정복에 대한 열망을 따랐다. 1385년 토크타미시는 그의 권력의 정점에 있었고 그의 미래와 황금 호르드의 미래는 밝아 보였다.

그러나 그는 그의 전 보호자 티무르와의 갈등에 개입하고 악화시킴으로써 그의 모든 업적을 무너뜨리고 스스로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모스크바를 약화시킨 후 동맹을 구하고자 1389년 블라디미르 대공국을 모스크바 대공의 세습 재산으로 만들고 1393년 니즈니 노브고로드를 장악하도록 허용하여 모스크바를 강화했다.[35] 그는 리투아니아가 황금 호르드의 정부와 정치에 관여하고, 칸을 세우고 폐위하는 선례를 남기도록 도왔으며, 그중 여러 명이 토크타미시의 아들들이었고 수십 년 동안 계속되었다.[36] 이러한 동맹은 토크타미시를 구하지 못했고, 그의 권위는 1391년과 1395년에서 1396년 사이에 티무르가 황금 호르드의 핵심 영토에 두 차례 대규모 침공을 가하면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로 인해 토크타미시는 라이벌 칸들과 경쟁하게 되었고, 결국 그를 완전히 몰아내고 1406년 시베리아에서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토크타미시가 칸의 권위를 상대적으로 공고히 한 것은 그의 사후 잠시 동안만 지속되었고, 대부분 그의 숙적 에디구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러나 1411년 이후 황금 호르드의 해체로 끝나는 또 다른 장기간의 내전이 시작되었다. 또한 티무르는 황금 호르드의 주요 도시 중심지와 타나의 이탈리아 식민지를 파괴함으로써 정치 체제의 무역 기반 경제에 심각하고 지속적인 타격을 입혔고, 번영과 생존에 대한 미래 전망에 여러 가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37]

1382년 토크타미시의 모스크바 공성전


토크타미시의 자녀 중 한 명은 그룬발트 전투로 알려진 자랄루딘이다.

15세기에 토크타미시의 후손들은 세력을 회복하여 에디게를 사망하게 만들었고, 사라이 칸의 자리를 티무르 쿨트룩의 후손 등 다른 토카 템르계 여러 가문과 다투었지만, 칸국을 분열시키지 않고 16세기까지는 역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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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Russian Embassies to the Georgian Kings, 1589–1605: Volumes I and II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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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서적 Medieval Russia, 980–1584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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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서적 Siberia, Siberia https://books.google[...]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97-10-29
[34] 서적 Полное собрание русских летописей https://books.google[...]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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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서적 (제목 정보 없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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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서적 (제목 정보 없음) 2010
[39] 서적 (제목 정보 없음) 2006
[40] 서적 (제목 정보 없음) 2008, 2016, 2010
[41] 서적 (제목 정보 없음) 1993
[42] 서적 (제목 정보 없음) 1993
[43] 서적 (제목 정보 없음) 1993
[44] 서적 (제목 정보 없음) 1993
[45] 서적 (제목 정보 없음)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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