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다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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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르다 칸은 칭기즈 칸의 장남 주치의 아들이자 백장의 창시자이다. 조치의 영토 중 동부 지역을 상속받았으며, 동생 바투 칸이 킵차크 칸국을 다스리는 것을 도왔다. 1235년 루스 원정에 참여하고 쿠릴타이에 참석하여 구유크 칸의 즉위를 지지했다. 1250년대 중반 훌레구의 서정에 차남 크리를 파견했으며, 1251년 사망했다. 오르다 울루스는 명목상 조치 종가에 종속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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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다 칸 | |
---|---|
인물 정보 | |
이름 | 오르다 칸 |
출생 | 1206년경 |
사망 | 1251년 |
칭호 | 칸 |
가문 | |
가문 | 보르지긴 가문 |
아버지 | 조치 |
통치 | |
통치 기간 | 1226년 ~ 1251년 |
지위 | 황금 군단의 칸 (동부 지역, 백색 군단) |
이전 통치자 | 조치 |
다음 통치자 | 쿤 쿠란 |
기타 정보 | |
종교 | 불교 |
2. 생애
오르다는 주치의 장남이자 칭기즈 칸의 맏손자였다. 조치가 사망한 후, 오르다는 조치의 본거지인 이르티쉬강 상류 유역을 상속받았다.[6] 17세기 역사가이자 히바 칸국의 칸 아불가지는 칭기즈 칸의 명령에 따라 바투가 후계자로 지정되었다고 언급했으며, 16세기 호라즘 지방에서 성립된 역사서 『칭기즈 나메』에는 칭기즈가 오르다와 바투의 다툼을 중재하고, 바투를 조치의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8] 그는 바투를 조치 가문의 당주로 추대하는 쿠릴타이를 주재했으며, 이후에도 바투를 지원했다.[7]
1235년의 쿠릴타이에서 결정된 유럽 원정에 다른 형제들과 함께 참여했다.[9] 구유크 즉위가 결정된 쿠릴타이에는 바투를 대신하여 오르다가 참여하여, 차카타이 울루스의 당주 예스 몽케와 함께 구유크의 손을 잡았다.[7] 구유크가 대칸의 지위에 오른 직후, 테무게 옷치긴에 대한 조사를 몽케와 함께 진행했다.[10] 1250년대 중반 오르다는 차남 크리를 훌레구의 서정에 파견했고, 이후 그의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11]
오르다의 사후, 넷째 아들 콩기란이 오르다 울루스의 통치자가 되었다. 오르다는 조치의 생전부터 존경받았으며, 조치가 사망하고 바투가 조치 일문의 당주가 된 후에도 변함없이 존경받았다.[12] 오르다 울루스는 명목상 바투의 일족이 당주를 맡는 조치 종가에 종속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독립 상태에 있었다.[13]
2. 1. 가계 기원
올크누트 출신의 호엘룬은 옹기라트 부족 출신으로 메르키드 전사 예헤 칠레두와 결혼할 예정이었으나, 키야트 부족 출신의 예수게이 바가투르가 옹기라트에서 메르키드로 이동하는 호엘룬을 납치했다. 이 사건은 메르키드와 키야트 부족 간의 적대 행위를 촉발했다.테무진은 호엘룬과 예수게이의 결혼으로 태어났다. 테무진이 16세가 되었을 때 옹기라트 부족 출신의 보르테와 결혼했고, 메르키드는 테무진이 18세였을 때 보르테를 납치하여 복수했다. 테무진은 혈맹 자무카 및 양아버지 토그릴과 동맹을 맺었고, 테무진이 결성한 동맹에 의해 메르키드는 패배했으며 그의 아내 보르테는 되찾았다.
조치는 보르테가 풀려난 직후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으며, 칭기즈 칸은 항상 조치를 그의 장남으로 인정했지만, 일부 사람들에게는 테무진 보르지긴인지, 칠게르 뵈흐인지가 조치의 진짜 아버지인지 불확실하게 남아 있었다. 칭기즈 칸의 장남으로서 조치는 몽골 제국의 정당한 상속자로 선호되었다. 차카타이가 조치의 사생아 논쟁을 제기했지만 칭기즈 칸은 조치가 자신의 정당한 장남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칭기즈가 오고타이를 자신의 정당한 후계자로 지명했을 때 조치는 아버지에게 반항했고, 차가타이와 오고타이가 조치에게 보내졌지만 1227년 2월 조치가 죽기 전에 어떤 적대 행위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조치의 후손들은 칭기즈 칸 가문의 가장 오래된 분파였지만, 다른 경쟁 가문 구성원들에 의해 상속에 선호되지 않았다.
2. 2. 초기 생애와 백장 건국
'''오르다 이첸'''(ᠣᠷᠳᠠ ᠡᠵᠡᠨ|Orda Ejenmn) (~1251년)은 백장(白帳, White Horde)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조치의 장남이자 칭기즈 칸의 맏손자였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사망한 후 '''오르다 칸'''은 아버지의 영토 중 동부 지역을 상속받았다. 그는 형이었지만, 그의 동생 바투 칸이 전체 킵차크 칸국 (조치 울루스라고도 함)을 다스리는 것에 동의했다. 이 나라는 주로 발하슈 호수와 볼가 강 사이의 영토로 구성되었으며, 오르다는 결국 이 땅에 백장을 세웠다. 볼가 강 서쪽에는 그의 동생 바투의 영토가 있었는데, 그는 청장(靑帳, Blue Horde)의 첫 번째 통치자이자 킵차크 칸국의 최고 칸이 되었다.[1]구유크 칸은 테무게 오치긴이 불법적으로 왕위를 찬탈하려 하자, 1246년경 오르다와 몽케 칸에게 그를 조사하도록 명령했다.[1] 오르다 이첸은 조치의 장남이었으며, 그의 남동생으로는 바투, 베르케, 샤이반, 싱쿠르, 토가-티무르, 바울-테발이 있었다. 칭기즈 칸 사후 몽골 제국은 4개의 칸국으로 분할되었으며, 유럽 침공 이후 제국 내에 4개의 칸국이 더 세워졌다. 오르다 칸이 지휘하는 좌익의 공주들, 바투 칸이 지휘하는 청색 군단, 샤이반이 지휘하는 시비르 칸국, 그리고 볼가 불가리아를 중심으로 볼가강 상류에 위치한 토가-티무르가 지휘하는 칸국(이후 카심 칸국으로 알려짐)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형제였으며, 오르다 칸이 맏이였다. 오르다는 1237년부터 1242년까지 있었던 대규모 몽골의 루스 침공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남동생 바투 칸은 오르다의 뜻에 따라 조치 울루스에 대한 권한을 주장했다.[1]
2. 3. 몽골 제국의 확장과 유럽 원정
1235년 쿠릴타이에서 결정된 유럽 원정에서 오르다 칸은 차가타이 가문의 바이다르, 카단과 함께 폴란드 방면으로 진격했다.[9] 이들은 리투아니아 남서부 국경을 공격하고, 1241년 4월 산도미에시와 크라쿠프를 약탈했다.[6] 그러나 돌니실롱스크의 수도 브로츠와프 점령에는 실패했다.[6]브로츠와프를 포위하던 중, 오르다는 보헤미아 왕국의 벤체슬라우스 1세가 이끄는 5만 군대가 접근한다는 소식을 접했다.[6] 이에 오르다는 포위를 풀고 레그니차로 이동, 헨리 2세 경건공의 군대를 요격했다.[6] 이는 헨리 2세와 벤체슬라우스 1세의 군대가 합류하기 전이었다.[6]
레그니차 전투에서 오르다는 2만 명의 기마 궁수를 이끌고,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전술적 기동성과 궁술로 폴란드군을 압도했다. 연막을 이용해 망구다이의 가짜 후퇴를 은폐, 헨리 2세의 군대를 유인하여 각개격파했다. 헨리 2세는 전사했고, 그의 머리는 창에 꽂혀 레그니차에 전시되었다.[6]
벤체슬라우스 1세는 뒤늦게 도착했으나, 작센 공국의 마이센(독일 마이센에 대한 몽골 습격)이 공격받았다는 소식에 회군했다.[6] 한편, 오르다는 클로츠코 땅을 거쳐 보헤미아 왕국을 공격하려 했으나 국경에서 저지당했다.[6] 이후 오트무후프에서 카단, 바이다르와 합류, 모라바를 약탈하며 에스테르곰 인근에서 헝가리의 몽골 주력군과 합류했다.[6]
2. 4. 정치적 활동과 사망
오르다는 1251년 자신의 울루스(구역)를 통합하기 전에 사망했다. 그의 사후 손자 쾨추가 백장 칸국의 후계 계승을 연장했다.[6] 조치가 사망한 후, 오르다는 조치의 본거지인 이르티쉬강 상류 유역을 상속받았다.[6] 오르다는 바투를 조치 가문의 당주로 추대하는 쿠릴타이를 주재했으며, 이후에도 많은 장면에서 바투를 지원했다.[7] 17세기 역사가이자 히바 칸국의 칸이기도 한 아불가지는 칭기즈 칸의 명령에 따라 바투가 후계자로 지정되었다고 언급했으며, 16세기 호라즘 지방에서 성립된 역사서 『칭기즈 나메』에는 칭기즈가 오르다와 바투의 다툼을 중재하고, 바투를 조치의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8]1235년의 쿠릴타이에서 결정된 루스에 대한 원정에 다른 형제들과 함께 참여했다.[9] 구유크의 즉위가 결정된 쿠릴타이에는 결석한 바투를 대신하여 오르다가 참여하여, 차카타이 울루스의 당주를 맡은 예스 몽케와 함께 왕좌에 오른 구유크의 손을 잡았다.[7] 구유크가 대칸의 지위에 오른 직후, 대칸의 지위를 노린 테무게 옷치긴에 대한 조사를 몽케와 함께 진행했다.[10] 1250년대 중반 오르다는 차남 크리를 훌레구의 서정에 파견했고, 이후 사료에서 그의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11]
오르다의 사후, 넷째 아들 콩기란이 오르다 울루스의 통치자가 되었다. 오르다는 조치의 생전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조치가 사망하고 바투가 조치 일문의 당주가 된 후에도 변함없이 존경받았다.[12] 오르다 울루스는 명목상 바투의 일족이 당주를 맡는 조치 종가에 종속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독립 상태에 있었으며, 종가의 방침과 다른 행동을 취하기도 했다.[13]
3. 가족
집사와 티무르 왕조의 샤 루흐가 명하여 편찬한 계보 자료 『고귀 계보』에 따르면, 오르다의 생모는 콩기라트 부족 출신의 사르타크라는 이름의 대하툰이었고, 동복 형제로는 에센이 있었다.[14][15][16][17][18]
『금장 칸국의 몰락』을 저술한 사파르갈리에프는 몽골의 막내 상속 습관과 조치의 본거지를 상속한 점을 들어 오르다가 조치의 막내일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이는 많은 반론을 낳았다.[6] 튀르크 학자 그리고리예프는 오르다의 별명인 "에젠"이 통상 넷째 아들에게 붙는 이름이라는 점을 들어 오르다는 조치의 넷째 아들이라고 주장했다.[6]
3. 1. 아내와 자녀
라시드 앗딘은 집사에서 오르다에게 콩기라트 부족 출신의 츄케 하툰, 토바카네 하툰 등 세 명의 비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4][14][19] 오르다의 자식으로는 7명의 남자와 2명의 여자가 사료에서 확인된다.[20][21][22][23]- 사르타크타이
- 쿠리
- 쿠름시
- 콩쿠란
- 초르마카이
- 쿠토쿠이
- 프레구
『집사』 조치 칸 기의 오르다 조에 따르면, 오르다의 생모는 콩기라트 부족 출신의 사르타크(sartāq)라는 이름의 대하툰이었다.[14][15] 티무르 왕조의 샤 루흐의 명에 의해 편찬된 계보 자료 『고귀 계보』(Mu‘izz al-Ansāb fī Shajarat Salāṭīn Mughūl)에도 오르다는 콩기라트 부족 여성을 어머니로 하고, 동복 형제로는 에센(īsan)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6][17][18]
4. 오르다 가문
오르다의 아내와 자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그의 왕조는 여러 세대에 걸쳐 이어졌다. 그의 초기 후계자들은 일 칸국과 원 황제들에게 우호적이었다.
이름 | 비고 |
---|---|
사르타크타이 | |
투르크 칸/제왕 코니치 | 사르타크타이의 아들 |
바얀 | 코니치의 아들 |
사시 부카 | 바얀의 아들 |
바쉬르타이 | 코니치의 아들 |
차가안 부카 | 코니치의 아들 |
마투다이 | 코니치의 아들 |
쿠리 | |
툼켄 | 쿠리의 아들 |
투멘 | 쿠리의 아들 |
밍간 | 쿠리의 아들 |
아야치 | 쿠리의 아들 |
무살만 | 쿠리의 아들 |
쿠름시/크렘사 | |
콩쿠란 | |
초르마카이 | |
쿠투쿠이 | |
후레구 | |
테무르 부카 | 후레구의 아들 |
쾨벨레크 | 테무르 부카의 아들 |
참조
[1]
서적
Crusade and Christendom Annotated Documents in translation from Innocent III to the fall of Acre, 1187-1291
[2]
웹사이트
Handbook on history of Ukraine
http://history.frank[...]
[3]
서적
History of the Mongols: From the 9th to the 19th Century ...
文殿閣書莊
1888
[4]
서적
モンゴル帝国史研究正篇
東京大学出版会
2013-06
[5]
서적
ジュチ裔諸政権史の研究
[6]
간행물
カザフスタン中世史より
[7]
서적
ジュチ裔諸政権史の研究
[8]
간행물
カザフスタン中世史より
[9]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10]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11]
서적
ジュチ裔諸政権史の研究
[12]
간행물
カザフスタン中世史より
[13]
서적
ジュチ裔諸政権史の研究
[14]
문서
[15]
서적
[16]
서적
ジュチ裔諸政権史の研究
[17]
간행물
カザフスタン中世史より
[18]
문서
高貴系譜에는 조치의 諸子의 계도上에도 오르다의 詞書에도 「에센」이 載せられている가, 『집사』조치・한紀이나 『오족보』에는 그 이름은 確認되지 않는다.
[19]
서적
[20]
서적
ジュチ裔諸政権史の研究
[21]
문서
[22]
서적
[23]
문서
『[[집사]]』조치・한紀의 오르다의 条에 따르면, 체케・하툰, 토바카네・하툰과 또 한 명의 하툰도, 모두에 콘기라트 部族 出身이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또 한 명의 大하툰은 콘기라트 部族 出身의 오게・한(ūka khān ?)이라는 人物의 娘이지만, 당해 箇所가 資料中에서는(아라비아어版『집사』을 포함해)名前欄이 空白으로 되어 있어, 이름은 不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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