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토 주교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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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렌토 주교후국은 102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에 의해 설립된 주교후국으로,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입하는 주요 도로를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중세 시대에는 티롤 백작, 합스부르크 가문 등 주변 세력과의 갈등 속에서 주교의 권위가 흔들리기도 했지만, 15세기 베르나르도 클레시오 주교 시기에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우며 번성했다. 1803년 세속화되어 트렌트 공국이 되었고,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 바이에른 왕국,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왕국을 거쳐 1814년 다시 오스트리아에 편입되었다. 1919년 생제르맹 조약에 따라 이탈리아 왕국에 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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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토 주교후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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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일반 명칭 | 트렌토 |
지위 | 주교후국 |
국가 | 신성 로마 제국 |
정치 체제 | 주교후국 |
수도 | 트렌토 |
공용어 | 라틴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라딘어 |
종교 | 천주교 |
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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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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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
시작 | 1027년 |
시작 사건 | 콘라트 2세에 의해 베로나 변경에서 분리됨 |
주요 사건 | 주교들 폐위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1236년) 코뮌으로 선언 (1425년) 트렌토 공의회 (1545–1563년) 나폴레옹 침공 (1796년) |
종료 | 1803년 |
종료 사건 | 세속화되어 티롤 백국으로 합병 |
이후 사건 | 신성 로마 제국 해체 (1806년 8월 6일) |
정치 | |
이전 국가 | 베로나 변경 |
이후 국가 | 티롤 백국 |
지도자 칭호 | 주교후 |
초대 지도자 | 울다리코 2세 (1027–1055년) |
마지막 지도자 | 에마누엘레 마리아 툰 (1800–1803년) |
2. 역사
트렌토 주교후국은 381년 아퀼레이아 공의회에 첫 주교가 참석한 기록이 있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초기에는 롬바르드 왕국과 이탈리아 왕국의 일부였으나, 951년 독일 왕 오토 1세가 이탈리아 왕 베렌가리오 2세를 상대로 원정을 벌인 이후 분리되었다.[1] 952년 베렌가리오는 베로나 변경백령을 오토 1세에게 할양해야 했고, 오토 1세는 동생인 바이에른 공작 바이에른의 하인리히 1세에게 이를 봉토로 주었다.[1]
1004년부터 황제 성 하인리히 2세와 그의 후계자 콘라트 2세는 베로나 변경백령 북동부의 여러 작은 영토를 분리하여 트렌토 교구에 양도했다.[1] 1027년 콘라트 2세는 브릭센 주교후국과 함께 트렌토를 주교후국으로 설립했다.[1] 이 국가는 황제의 군대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입하는 두 개의 고대 도로(클라우디아-아우구스타 가도와 알티나테 가도)를 이용하고, 자주 반란을 일으키는 세속 군주 대신 두 명의 주교에게 이 지역을 위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1]
트렌토 주교들은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였으며, 제국 의회에 참여할 권리를 누렸다.[1] 이들은 황제가 파문을 당했을 때에도 황제에게 충성을 유지했는데, 이는 보젠 주변 지역을 통제하는 티롤 백작, 에판 백작 등과 같은 세력의 증가하는 힘에 대항하기 위해 황제의 보호가 필요했기 때문이다.[1] 1172년 9월 20일, 아델프레토 주교는 아르코에서 카스텔바르코 영주들에게 살해당했다.[1] 그러나 1179년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와 그의 아들 호엔슈타우펜의 하인리히 6세에 의해 트렌토와 브릭센 주교후국의 우위가 다시 확립되었다.[1] 주교는 자신의 동전을 가질 권리와 통행세를 부과할 권리를 얻었다.[1]
오토 4세 황제의 친척인 페데리코 왕가 (1207–18) 주교는 주교후국을 재조직하고 개혁했다.[1] 그는 브릭센 주교와 동맹을 맺고 튜턴 기사단에게 광대한 영지를 허용함으로써 귀족의 힘을 좌절시키고 과거에 잃었던 영토의 상당 부분을 회복했다.[1] 또한 주교의 권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주교의 권위를 증명하는 모든 공식 문서를 '성 비길리우스의 책'(''코덱스 왕기아누스'')에 수집했다.[1] 비길리우스는 트렌토의 수호 성인이었다.[1] 더욱이 페데리코는 아디제 강을 통한 무역을 지원하고 중산층에게 양보했다.[1] 1208년 6월 19일 페데리코가 발행한 법령은 알프스 산맥 광업 산업에 관한 가장 오래된 공식 문서로 간주된다.[1] 도시는 새로운 성벽과 탑으로 둘러싸였고, 대성당 건설이 시작되었다.[1]
십자군 전쟁 중 성지에서 왕가가 사망하면서 그의 개혁은 중단되었다.[1] 1236년 황제 호엔슈타우펜의 프리드리히 2세는 주교를 폐위시키고 트렌토의 중요한 군사 지역에 대한 권한을 스스로 확보하여 트레비소 변경백령에 합병했다.[1] 행정은 베로나에서 그의 충실한 친구인 에첼리노 3세 다 로마노에게 위임되었다.[1]
13세기에는 티롤 백작이 혼란을 이용하여 ''포크트''로 두각을 나타냈고, 쿠어 주교령, 브릭센 주교령, 잘츠부르크 대주교령, 그리고 트렌토 자체에게 많은 손실을 입혔다. 카린티아 공작이었던 티롤의 마인하르트 2세 (1258–1295)는 1286년부터 트렌토와 브릭센 주교들을 완전히 자신의 권력 아래에 두었고, 다른 이탈리아 공국에서 영감을 얻은 더 현대적인 노선을 따라 새로운 국가를 재조직했다. 14세기에는 룩셈부르크의 카를 4세와 비텔스바흐의 루트비히 4세 사이의 분쟁 동안 주교후국은 여러 차례 파괴되었고, 일시적으로 후자의 바이에른 영토에 다시 합병되었다. 1363년 마르가레테 마울타슈 백작 부인이 그녀의 땅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인 루돌프 4세에게 양도하면서 티롤의 위협이 증가했다.
1419년, 주교 리히텐슈타인의 게오르크 1세는 티롤에 예속되는 것을 피하고자 황제에게 직접 복종했지만, 이는 15세기에 주교들이 도시와 시골에서 더 많은 권위를 잃는 것을 막지 못했다. 1425년 트렌토는 코뮌으로 선언되었고, 10년 후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나 오스트리아-티롤 군대가 공국의 영토를 침공했다. 이후 주교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결국 공국은 오스트리아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다.
1509년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전쟁으로 트렌토 공국 영토는 황폐해졌다. 이어서 1510년과 1512년에는 전염병이 발생했고, 1512년, 1519년, 1520년에는 기근이, 1521년에는 지진이 발생했다. 이러한 심각한 사건들은 합스부르크 통치에 대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1525년에는 ''바우언크리크'' 또는 "농민 반란"이라고 불리는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군은 미하엘 가이스마이어가 이끌었는데, 그는 브릭센과 트렌토의 모든 영토를 해방하고 평등주의 원칙에 기반한 사회적 자유 프로그램을 수립하는 복잡한 계획을 고안했다.[1] 그러나 반란군은 조직력이 부족했고, 1526년 오스트리아 용병과 베르나르도 클레시오 주교에 의해 쉽게 진압되었다. 클레시오 주교는 아이사크 계곡과 슈테르칭 전투에서 반란군을 맹렬하게 몰살했다. 반란 지도자들은 처형되었고, 단순 추종자들은 풀려났지만 이마에 "불명예의 낙인"이 찍혔다. 1532년 가이스마이어가 파도바에서 대공의 암살자에 의해 살해되면서 더 이상의 반란은 일어나지 않았다.[1]
베르나르도 클레시오 추기경은 트렌토 공국의 재건자로 여겨진다. 그는 막시밀리안 1세 황제의 고문이자 로테르담의 에라스뮈스의 친구였다. 1519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카를 5세 황제 선출, 1526년에는 그의 형제 페르디난트 1세의 보헤미아 왕 선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 그의 카리스마는 합스부르크 영토 사이에서 트렌토 국가의 종속적 지위를 되돌려 카스텔바르코와 로베레토의 영지를 얻게 했다.[1] 1528년에 발행된 그의 도시 조례는 1807년까지 사용되었다.[1] 클레시오의 통치 하에 트렌토는 새로운 도시 계획으로 개조되었고, 새로운 대성당인 S. 마리아 마조레가 세워졌다.[1] 이는 트리엔트 공의회 (1545–63)를 개최하기 위해 필요했으며, 1539년 클레시오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그의 후임자인 크리스토포로 마두루초 추기경에 의해 완공되었다.[1] 경제와 서비스도 크게 개선되었다.[1] 공의회 기간 동안 유명한 지식인과 학자들이 존재하면서 공국에서 르네상스가 확산되었다.[1] 반종교개혁의 도입은 프로테스탄트 사상이 독일어를 사용하는 인구에게 더 많은 추종자를 얻었기 때문에 독일어에 대한 이탈리아어의 회복을 가져왔다.[1]
하지만 이 "황금 시대"는 페르디난트 1세 황제에 의해 끝났다. 그는 트렌티네 영토를 침공하여 로베레토를 점령하고, 1567년에는 연맹 조약을 폐지한다고 선언했다. 분쟁은 1578년 황제 의회가 공국 주교의 종주권을 회복하면서 해결되었다.[1]
17세기, 트렌토 주교후국은 30년 전쟁의 경제적 여파와 베네치아 무역의 쇠퇴로 어려움을 겪었다. 1658년 카를로 에마누엘레 마두루초가 사망할 때까지 마두루초 가문(이들은 브릭센도 간접적으로 통제했다)이 주교후국을 통치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레오폴트 1세 황제는 그의 사촌이자 티롤과 전 오스트리아의 섭정이었던 대공 지기스문트 프란츠에게 주교후국을 할당했다.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관계는 1662년에 다시 정립되었다. 그러나 3년 후 지기스문트 프란츠가 사망했고, 주교후국은 합스부르크 가문 황제의 직접적인 영토에 포함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반독립적인 지위를 잃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으며, 1683년의 흑자, 트렌토의 부온콘실리오 성 완성, 아디제 계곡의 늪 건조 등이 이루어졌다. 획득한 토지에서는 쌀 재배가 도입되었다.[1]
18세기 초, 프랑스 공화국과 바이에른 군대가 트렌티노와 티롤을 침략했고, 1703년 9월에는 트렌토 자체가 6일 동안 폭격을 받았다. 그러나 주교후국 지위에 가장 위험한 위협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모든 세습 영토를 합스부르크 왕관 아래 재통합하려는 카를 6세 황제의 주장이었다. 주교들은 나폴레옹의 1796년 침략까지 증가하는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에 맞서 독립을 위한 투쟁을 계속했다.[1]
2. 1. 중세
트렌토 주교후국의 첫 번째 주교는 381년 아퀼레이아 공의회에 참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1] 이 지역은 롬바르드 왕국과 이탈리아 왕국의 일부였으나, 951년 독일 왕 오토 1세가 이탈리아 왕 베렌가리오 2세를 상대로 원정을 벌인 이후 분리되었다.[1] 952년 베렌가리오는 베로나 변경백령을 오토 1세에게 할양해야 했고, 오토 1세는 동생인 바이에른 공작 바이에른의 하인리히 1세에게 이를 봉토로 주었다.[1]1004년부터 황제 성 하인리히 2세와 그의 후계자 콘라트 2세는 베로나 변경백령 북동부의 여러 작은 영토를 분리하여 트렌토 교구에 양도했다.[1] 원래 바이에른 봉토였던 이 곳은 1027년 콘라트 2세에 의해 브릭센 주교후국과 함께 주교후국으로 설립되었다.[1] 이 국가들은 황제의 군대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입하는 두 개의 고대 도로, 클라우디아-아우구스타 가도와 알티나테 가도를 이용하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자주 반란을 일으키는 세속 군주 대신 두 명의 주교에게 이 지역을 위임했다.[1]
주교들은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였으며, 제국 의회에 참여할 권리를 누렸다.[1] 트렌토의 제후들은 황제가 파문을 당했을 때에도 황제에게 충성을 유지했다.[1] 이는 보젠 주변 지역을 통제하는 티롤 백작, 에판 백작 등과 같은 세력의 증가하는 힘에 대항하기 위해 황제의 보호가 필요했기 때문이다.[1] 이러한 상황에서 1172년 9월 20일, 아델프레토 주교는 아르코에서 카스텔바르코 영주들에게 살해당했다.[1] 그러나 트렌토와 브릭센 주교후국의 우위는 1179년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와 그의 아들 호엔슈타우펜의 하인리히 6세에 의해 다시 확립되었다.[1] 주교는 자신의 동전을 가질 권리와 통행세를 부과할 권리를 얻었다.[1]
오토 4세 황제의 친척인 페데리코 왕가 (1207–18) 주교는 주교후국을 재조직하고 개혁했다.[1] 그는 브릭센 주교와 동맹을 맺고 튜턴 기사단에게 광대한 영지를 허용함으로써 귀족의 힘을 좌절시키고 과거에 잃었던 영토의 상당 부분을 회복했다.[1] 또한 주교의 권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주교의 권위를 증명하는 모든 공식 문서를 '성 비길리우스의 책'(''코덱스 왕기아누스'')에 수집했다.[1] 비길리우스는 트렌토의 수호 성인이었다.[1] 더욱이 페데리코는 아디제 강을 통한 무역을 지원하고 중산층에게 양보했다.[1] 1208년 6월 19일 페데리코가 발행한 법령은 알프스 산맥 광업 산업에 관한 가장 오래된 공식 문서로 간주된다.[1] 도시는 새로운 성벽과 탑으로 둘러싸였고, 대성당 건설이 시작되었다.[1]
십자군 전쟁 중 성지에서 왕가가 사망하면서 그의 개혁은 중단되었다.[1] 1236년 황제 호엔슈타우펜의 프리드리히 2세는 주교를 폐위시키고 트렌토의 중요한 군사 지역에 대한 권한을 스스로 확보하여 트레비소 변경백령에 합병했다.[1] 행정은 베로나에서 그의 충실한 친구인 에첼리노 3세 다 로마노에게 위임되었다.[1]
13세기에는 티롤 백작이 혼란을 이용하여 ''포크트''로 두각을 나타냈고, 쿠어 주교령, 브릭센 주교령, 잘츠부르크 대주교령, 그리고 트렌토 자체에게 많은 손실을 입혔다. 카린티아 공작이었던 티롤의 마인하르트 2세 (1258–1295)는 1286년부터 트렌토와 브릭센 주교들을 완전히 자신의 권력 아래에 두었고, 다른 이탈리아 공국에서 영감을 얻은 더 현대적인 노선을 따라 새로운 국가를 재조직했다. 14세기에는 룩셈부르크의 카를 4세와 비텔스바흐의 루트비히 4세 사이의 분쟁 동안 주교후국은 여러 차례 파괴되었고, 일시적으로 후자의 바이에른 영토에 다시 합병되었다. 1363년 마르가레테 마울타슈 백작 부인이 그녀의 땅을 강력한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인 루돌프 4세에게 양도하면서 티롤의 위협이 증가했다.
2. 1. 1.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
951년 독일 왕 오토 1세가 이탈리아 왕 베렌가리오 2세를 상대로 원정을 벌인 후, 트렌토 지역은 롬바르드 왕국과 이탈리아 왕국에서 분리되었다. 952년 베렌가리오는 베로나 변경백령을 오토 1세에게 넘겨야 했고, 오토 1세는 이를 동생인 바이에른 공작 바이에른의 하인리히 1세에게 봉토로 주었다.[1]1004년부터 황제 성 하인리히 2세와 그의 후계자 콘라트 2세는 베로나 변경백령 북동부의 여러 작은 영토를 분리하여 트렌토 교구에 양도했다. 1027년 콘라트 2세는 이 지역을 주교후국으로 설립했다. 이 국가는 황제의 군대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입하는 두 개의 고대 도로(클라우디아-아우구스타 가도와 알티나테 가도)를 이용하고, 자주 반란을 일으키는 세속 군주 대신 두 명의 주교에게 이 지역을 위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1]
트렌토 주교들은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였으며, 제국 의회에 참여할 권리를 누렸다. 트렌토의 제후들은 황제가 파문을 당했을 때에도 황제에게 충성을 유지했는데, 이는 보젠 주변 지역을 통제하는 티롤 백작, 에판 백작 등과 같은 세력의 증가하는 힘에 대항하기 위해 황제의 보호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1172년 9월 20일, 아델프레토 주교는 아르코에서 카스텔바르코 영주들에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트렌토와 브릭센 주교후국의 우위는 1179년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와 그의 아들 호엔슈타우펜의 하인리히 6세에 의해 다시 확립되었다. 주교는 자신의 동전을 가질 권리와 통행세를 부과할 권리를 얻었다.[1]
주교후국은 오토 4세 황제의 친척인 페데리코 왕가 (1207–18) 주교에 의해 재조직되고 개혁되었다. 그는 브릭센 주교와 동맹을 맺고 튜턴 기사단에게 광대한 영지를 허용함으로써 귀족의 힘을 좌절시키고 과거에 잃었던 영토의 상당 부분을 회복했다. 그는 또한 주교의 권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주교의 권위를 증명하는 모든 공식 문서를 '성 비길리우스의 책'(''코덱스 왕기아누스'')에 수집했다. 비길리우스는 트렌토의 수호 성인이었다. 더욱이 페데리코는 알프스를 가로지르는 아디제 강을 통한 무역을 지원하고 중산층에게 양보했다. 1208년 6월 19일 페데리코가 발행한 법령은 알프스 산맥 광업 산업에 관한 가장 오래된 공식 문서로 간주된다. 도시는 새로운 성벽과 탑으로 둘러싸였고, 대성당 건설이 시작되었다.[1]
십자군 전쟁 중 성지에서 왕가가 사망하면서 그의 개혁은 중단되었다. 1236년 황제 호엔슈타우펜의 프리드리히 2세는 주교를 폐위시키고 트렌토의 중요한 군사 지역에 대한 권한을 스스로 확보하여 트레비소 변경백령에 합병했다. 행정은 그의 충실한 친구인 에첼리노 3세 다 로마노에게 베로나에서 위임되었다.[1]
13세기에는 티롤 백작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용하여 스스로 ''포크트''로 두각을 나타냈고, 이는 쿠어 주교령, 브릭센 주교령, 잘츠부르크 대주교령, 그리고 트렌토 자체에게 많은 손실을 입혔다. 카린티아 공작이었던 티롤의 마인하르트 2세 (1258–1295)는 1286년부터 트렌토와 브릭센 주교들을 완전히 자신의 권력 아래에 두었고, 다른 이탈리아 공국에서 영감을 얻은 더 현대적인 노선을 따라 새로운 국가를 재조직했다. 14세기에는 경쟁 황제 룩셈부르크의 카를 4세와 비텔스바흐의 루트비히 4세 사이의 분쟁 동안 주교후국은 여러 차례 파괴되었고, 일시적으로 후자의 바이에른 영토에 다시 합병되었다. 1363년 마르가레테 마울타슈 백작 부인이 그녀의 땅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인 루돌프 4세에게 양도하면서 티롤의 위협이 증가했다.[1]
2. 1. 2. 주변 세력과의 갈등
381년 아퀼레이아 공의회에 트렌토 주교후국의 첫 번째 주교가 참석했다는 기록이 있다. 951년 독일 왕 오토 1세가 이탈리아 왕 베렌가리오 2세를 상대로 원정을 벌인 후, 952년 베렌가리오는 베로나 변경백령을 오토에게 할양해야 했고, 오토는 동생인 바이에른 공작 바이에른의 하인리히 1세에게 봉토로 주었다.[1]1004년부터 황제 성 하인리히 2세와 그의 후계자 콘라트 2세는 베로나 변경백령 북동부의 여러 영토를 분리하여 트렌토 교구에 양도했다. 1027년 콘라트 2세는 이 지역을 브릭센 주교후국과 함께 주교후국으로 설립했다. 이는 황제의 군대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입하는 두 개의 고대 도로, 클라우디아-아우구스타 가도와 알티나테 가도를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반란을 일으키는 세속 군주 대신 두 명의 주교에게 지역을 위임했다.[1]
트렌토의 제후들은 황제가 파문을 당했을 때에도 황제에게 충성을 유지했다. 이는 보젠 주변 지역을 통제하는 티롤 백작, 에판 백작 등과 같은 세력의 힘이 커지는 것에 대항하기 위해 황제의 보호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1172년 9월 20일, 아델프레토 주교는 아르코에서 카스텔바르코 영주들에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트렌토와 브릭센 주교후국의 우위는 1179년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와 그의 아들 호엔슈타우펜의 하인리히 6세에 의해 다시 확립되었다. 주교는 자신의 동전을 가질 권리와 통행세를 부과할 권리를 얻었다.[1]
주교후국은 오토 4세 황제의 친척인 페데리코 왕가 (1207–18) 주교에 의해 재조직되고 개혁되었다. 그는 브릭센 주교와 동맹을 맺고 튜턴 기사단에게 광대한 영지를 허용하여 귀족의 힘을 좌절시키고 과거에 잃었던 영토를 회복했다. 또한 주교의 권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성 비길리우스의 책'(''코덱스 왕기아누스'')에 공식 문서를 수집했다. 비길리우스는 트렌토의 수호 성인이었다. 페데리코는 알프스를 가로지르는 아디제 강을 통한 무역을 지원하고 중산층에게 양보했다. 1208년 6월 19일 페데리코가 발행한 법령은 알프스 산맥 광업 산업에 관한 가장 오래된 공식 문서로 간주된다. 도시는 새로운 성벽과 탑으로 둘러싸였고, 대성당 건설이 시작되었다.[1]
십자군 전쟁 중 성지에서 왕가가 사망하면서 그의 개혁은 중단되었다. 1236년 황제 호엔슈타우펜의 프리드리히 2세는 주교를 폐위시키고 트렌토의 중요한 군사 지역에 대한 권한을 스스로 확보하여 트레비소 변경백령에 합병했다. 행정은 그의 친구인 에첼리노 3세 다 로마노에게 베로나에서 위임되었다.[1]
13세기에는 티롤 백작이 혼란을 이용하여 ''포크트''로 두각을 나타냈고, 쿠어 주교령, 브릭센 주교령, 잘츠부르크 대주교령, 트렌토 자체에게 많은 손실을 입혔다. 카린티아 공작이었던 티롤의 마인하르트 2세 (1258–1295)는 1286년부터 트렌토와 브릭센 주교들을 완전히 자신의 권력 아래에 두었고, 새로운 국가를 재조직했다. 14세기에는 룩셈부르크의 카를 4세와 비텔스바흐의 루트비히 4세 사이의 분쟁 동안 주교후국은 파괴되었고, 일시적으로 바이에른 영토에 합병되었다. 1363년 마르가레테 마울타슈 백작 부인이 그녀의 땅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인 루돌프 4세에게 양도하면서 티롤의 위협이 증가했다.[1]
2. 1. 3. 페데리코 왕가 주교 시대
오토 4세 황제의 친척인 페데리코 왕가 (1207–1218) 주교에 의해 주교후국은 재조직되고 개혁되었다. 페데리코 왕가는 브릭센 주교후국과 동맹을 맺고 튜턴 기사단에게 광대한 영지를 허용함으로써 모든 귀족의 힘을 좌절시키고 과거에 잃었던 영토의 상당 부분을 회복했다. 또한 주교의 권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주교의 권위를 증명하는 모든 공식 문서를 '성 비길리우스의 책'(''코덱스 왕기아누스'')에 수집했다. 비길리우스는 트렌토의 수호 성인이었다. 더욱이 페데리코는 아디제 강을 통한 무역을 지원하고 중산층에게 양보했다. 계곡의 건조는 이 지역이 와인 생산으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지역 중 하나가 되도록 했다. 1208년 6월 19일 페데리코가 발행한 법령은 알프스 산맥 광업 산업에 관한 가장 오래된 공식 문서로 간주된다. 도시는 새로운 성벽과 탑으로 둘러싸였고, 대성당 건설이 시작되었다.십자군 전쟁 중 성지에서 왕가가 사망하면서 그의 개혁은 중단되었다. 1236년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주교를 폐위시키고 트렌토의 중요한 군사 지역에 대한 권한을 스스로 확보하여 트레비소 변경백령에 합병했다. 행정은 그의 충실한 친구인 에첼리노 3세 다 로마노에게 베로나에서 위임되었다.
2. 1. 4. 프리드리히 2세 시대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십자군 전쟁 중 성지에서 페데리코 왕가가 사망하자 1236년 주교를 폐위시키고 트렌토의 중요한 군사 지역에 대한 권한을 스스로 확보하여 트레비소 변경백령에 합병했다. 행정은 그의 충실한 친구인 에첼리노 3세 다 로마노에게 베로나에서 위임되었다.2. 1. 5. 티롤 백작의 부상
트렌토의 주교들은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로서 제국 의회에 참여할 권리를 누렸다. 트렌토의 제후들은 황제가 파문을 당했을 때에도 황제에게 충성을 유지했는데, 이는 보젠 주변 지역을 통제하는 티롤 백작 등과 같은 세력의 힘이 커지는 것에 대항하기 위해 황제의 보호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1172년 9월 20일, 아델프레토 주교는 아르코에서 카스텔바르코 영주들에게 살해당하는 등, 귀족들에 대한 세속적 권위를 재확인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트렌토와 브릭센 주교후국의 우위는 1179년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와 그의 아들 호엔슈타우펜의 하인리히 6세에 의해 다시 확립되었다. 주교는 자신의 동전을 가질 권리와 통행세를 부과할 권리를 얻었다.오토 4세 황제의 친척인 페데리코 왕가 (1207–18) 주교는 주교후국을 재조직하고 개혁했다. 그는 브릭센 주교와 동맹을 맺고 튜턴 기사단에게 광대한 영지를 허용함으로써 모든 귀족의 힘을 좌절시키고 과거에 잃었던 영토의 상당 부분을 회복했다. 또한 주교의 권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주교의 권위를 증명하는 모든 공식 문서를 '성 비길리우스의 책'(''코덱스 왕기아누스'')에 수집했다. 비길리우스는 트렌토의 수호 성인이었다. 페데리코는 알프스를 가로지르는 아디제 강을 통한 무역을 지원하고 중산층에게 양보했다. 계곡의 건조는 이 지역이 와인 생산으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지역 중 하나가 되도록 했다. 1208년 6월 19일 페데리코가 발행한 법령은 알프스 산맥 광업 산업에 관한 가장 오래된 공식 문서로 간주된다. 도시는 새로운 성벽과 탑으로 둘러싸였고, 대성당 건설이 시작되었다.
십자군 전쟁 중 성지에서 왕가가 사망하면서 그의 개혁은 중단되었다. 1236년 호엔슈타우펜의 프리드리히 2세 황제는 주교를 폐위시키고 트렌토의 중요한 군사 지역에 대한 권한을 스스로 확보하여 트레비소 변경백령에 합병했다. 행정은 베로나에서 그의 충실한 친구인 에첼리노 3세 다 로마노에게 위임되었다.
13세기에는 티롤 백작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용하여 스스로 ''포크트''로 두각을 나타냈고, 이는 쿠어 주교령, 브릭센 주교령, 잘츠부르크 대주교령, 그리고 트렌토 자체에게 많은 손실을 입혔다. 카린티아 공작이었던 티롤의 마인하르트 2세 (1258–1295)는 1286년부터 트렌토와 브릭센 주교들을 완전히 자신의 권력 아래에 두었고, 다른 이탈리아 공국에서 영감을 얻은 더 현대적인 노선을 따라 새로운 국가를 재조직했다. 14세기에는 룩셈부르크의 카를 4세와 비텔스바흐의 루트비히 4세 사이의 분쟁 동안 주교후국은 여러 차례 파괴되었고, 일시적으로 후자의 바이에른 영토에 다시 합병되었다. 1363년 마르가레테 마울타슈 백작 부인이 그녀의 땅을 강력한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인 루돌프 4세에게 양도하면서 티롤의 위협이 증가했다.
2. 2. 근세
1509년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전쟁으로 트렌토 공국 영토는 황폐해졌다.[1] 1510년과 1512년에는 전염병이 발생했고, 1512년, 1519년, 1520년에는 기근이, 1521년에는 지진이 발생하여 합스부르크 통치에 대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1]베르나르도 클레시오 추기경은 트렌토 공국의 재건자로 여겨지며, 트리엔트 공의회 (1545–63)를 개최하여 르네상스 문화를 확산시키고 경제를 발전시켰다.[1] 그러나 페르디난트 1세는 트렌토 공국을 침공하고 연맹 조약을 폐지하는 등, 트렌토 공국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려 하였다.[1]
2. 2. 1.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관계
1419년, 주교 리히텐슈타인의 게오르크 1세는 티롤에 예속되는 것을 피하고 황제에게 직접 복종했지만, 이는 15세기에 주교들이 도시와 시골에서 더 많은 권위를 잃는 것을 막지 못했다. 1425년 트렌토는 코뮌으로 선언되었고, 10년 후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나 오스트리아-티롤 군대가 공국의 영토를 침공했다. 이듬해 주교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결국 공국은 오스트리아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다.[1]1511년 6월, 트렌토와 브릭센 두 공국은 오스트리아 영토 내에서 "영구적인 연맹" 국가의 지위를 받았다. 그러나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1516년 평화 조약으로 인해 공국은 거대한 합스부르크 영토 사이의 단절된 월경지로 축소되었다. 1525년에는 ''바우언크리크'' 또는 "농민 반란"이라고 불리는 반란이 일어났는데, 미하엘 가이스마이어가 이끌었으며, 그는 브릭센과 트렌토의 모든 영토를 해방하고 평등주의 원칙에 기반한 사회적 자유 프로그램을 수립하는 복잡한 계획을 고안했다.[1]
그러나 반란군은 조직력이 부족했고, 1526년 오스트리아 용병과 베르나르도 클레시오 주교에 의해 쉽게 진압되었다. 클레시오 주교는 아이사크 계곡과 슈테르칭 전투에서 반란군을 맹렬하게 몰살했다. 반란 지도자들은 처형되었고, 단순 추종자들은 풀려났지만 이마에 "불명예의 낙인"이 찍혔다. 1532년 가이스마이어가 파도바에서 대공의 암살자에 의해 살해되면서 더 이상의 반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약 천 명의 티롤과 트렌토 반란군은 모라비아의 아우슈피츠 근처로 피신하여 "형제 농장" (''Bruderhöfe'')을 설립했다.[1]
베르나르도 클레시오 추기경은 트렌토 공국의 진정한 재건자로 여겨진다. 그는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 1세 황제의 고문이자 로테르담의 에라스뮈스의 친구로서, 1519년 프랑크푸르트에서 합스부르크의 카를 5세 황제 선출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1526년에는 그의 형제 페르디난트 1세가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되는 데 기여했다. 그의 개인적인 카리스마는 합스부르크 영토 사이에서 트렌토 국가의 종속적 지위를 되돌려 카스텔바르코와 로베레토의 영지를 얻었다. 1528년에 발행된 그의 도시 조례는 1807년까지 사용되었다.[1]
그러나 이 "황금 시대"는 페르디난트 1세 황제에 의해 끝났다. 그는 트렌티네 영토를 침공하여 로베레토를 점령하고, 1567년에는 연맹 조약을 폐지한다고 선언했다. 분쟁은 1578년 황제 의회가 공국 주교의 종주권을 회복하면서 해결되었다.[1]
2. 2. 2. 시민들의 저항
1419년, 주교 리히텐슈타인의 게오르크 1세는 티롤에 예속되는 것을 피하고 황제에게 직접 복종했지만, 이는 15세기에 주교들이 도시와 시골에서 더 많은 권위를 잃는 것을 막지 못했다. 비록 시민들이 1407년에 공화국을 세우려는 시도가 유혈 진압되었지만 말이다. 1425년 트렌토는 코뮌으로 선언되었다. 10년 후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났고, 오스트리아-티롤 군대가 공국의 영토를 침공했다. 이듬해 주교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결국 공국은 오스트리아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다.1511년 6월, 트렌토와 브릭센 두 공국은 오스트리아 영토 내에서 "영구적인 연맹" 국가의 지위를 받았다. 그러나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1516년 평화 조약으로 인해 공국은 거대한 합스부르크 영토 사이의 단절된 월경지로 축소되었다. 1509년 베네치아와의 전쟁 중, 영토는 란츠크네흐트들이 비첸차에 대한 실패한 원정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황폐해졌다. 이어서 1510년과 1512년에 전염병이 발생했고, 1512년, 1519년, 1520년에는 기근이, 1521년에는 지진이 발생했다. 이러한 심각한 사건들은 합스부르크 통치에 대한 저항의 시작을 촉진했다. 1525년에는 ''바우언크리크'' 또는 "농민 반란"이라고 불리는 진정한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군은 미하엘 가이스마이어가 이끌었는데, 그는 브릭센과 트렌토의 모든 영토를 해방하고 평등주의 원칙("''Landesordnung''")에 기반한 사회적 자유 프로그램을 수립하는 복잡한 계획을 고안했다.
그러나 반란군은 조직력이 부족했고, 1526년 오스트리아 용병과 베르나르도 클레시오 주교에 의해 쉽게 진압되었다. 클레시오 주교는 아이사크 계곡과 슈테르칭 전투에서 반란군을 맹렬하게 몰살했다. 반란 지도자들은 참수, 교수형 또는 신체 절단을 당했고, 단순 추종자들은 풀려났지만 이마에 "불명예의 낙인"이 찍혔다. 1532년 가이스마이어가 파도바에서 대공의 암살자에 의해 살해되면서 더 이상의 반란에 대한 꿈은 끝났다. 약 천 명의 티롤과 트렌토 반란군은 모라비아의 아우슈피츠 근처로 피신하여 "형제 농장" (''Bruderhöfe'')을 설립했다.
2. 2. 3. 농민 반란
1407년 시민들이 공화국을 세우려는 시도가 유혈 진압되었지만, 1525년 트렌토는 코뮌으로 선언되었다. 10년 후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났고, 오스트리아-티롤 군대가 공국의 영토를 침공했다. 이듬해 주교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결국 공국은 오스트리아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다.[1]1509년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전쟁 중, 영토는 란츠크네흐트들이 비첸차에 대한 실패한 원정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황폐해졌다. 이어서 1510년과 1512년에는 전염병이 발생했고, 1512년, 1519년, 1520년에는 기근이, 1521년에는 지진이 발생했다. 이러한 심각한 사건들은 합스부르크 통치에 대한 저항의 시작을 촉진했다. 1525년에는 ''바우언크리크'' 또는 "농민 반란"이라고 불리는 진정한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군은 미하엘 가이스마이어가 이끌었는데, 그는 브릭센과 트렌토의 모든 영토를 해방하고 평등주의 원칙("''Landesordnung''")에 기반한 사회적 자유 프로그램을 수립하는 복잡한 계획을 고안했다.[1]
그러나 반란군은 조직력이 부족했고, 1526년 오스트리아 용병과 베르나르도 클레시오 주교에 의해 쉽게 진압되었다. 클레시오 주교는 아이사크 계곡과 슈테르칭 전투에서 반란군을 맹렬하게 몰살했다. 반란 지도자들은 참수, 교수형 또는 신체 절단을 당했고, 단순 추종자들은 풀려났지만 이마에 "불명예의 낙인"이 찍혔다. 1532년 가이스마이어가 파도바에서 대공의 암살자에 의해 살해되면서 더 이상의 반란에 대한 꿈은 끝났다. 약 천 명의 티롤과 트렌토 반란군은 모라비아의 아우슈피츠 근처로 피신하여 "형제 농장" (''Bruderhöfe'')을 설립했다.[1]
2. 2. 4. 베르나르도 클레시오 주교
베르나르도 클레시오 추기경은 트렌토 공국의 재건자(''Neubegründer'')로 여겨진다. 그는 막시밀리안 1세 황제의 고문이자 로테르담의 에라스뮈스의 친구였다. 1519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카를 5세 황제 선출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1526년에는 그의 형제 페르디난트 1세가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되는 데 기여했다. 그의 개인적인 카리스마는 합스부르크 영토 사이에서 트렌토 국가의 종속적 지위를 되돌려 카스텔바르코와 로베레토의 영지를 얻게 했다. 1528년에 발행된 그의 도시 조례는 1807년까지 사용되었다. 클레시오의 통치 하에 트렌토는 새로운 도시 계획으로 개조되었고, 새로운 대성당인 S. 마리아 마조레가 세워졌다. 이는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트리엔트 공의회 (1545–63)를 개최하기 위해 필요했으며, 1539년 클레시오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그의 후임자인 크리스토포로 마두루초 추기경에 의해 완공되었다. 또한 경제와 서비스도 크게 개선되었다. 공의회 기간 동안 유명한 지식인과 학자들이 존재하면서 공국에서 르네상스가 확산되었다. 반종교개혁의 도입은 독일어에 대한 이탈리아어의 일반적인 회복을 가져왔는데, 이는 프로테스탄트 사상이 독일어를 사용하는 인구에게 더 많은 추종자를 얻었기 때문이다.2. 2. 5. 트리엔트 공의회
베르나르도 클레시오 추기경은 트렌토 공국의 재건자로 여겨진다. 그는 막시밀리안 1세 황제의 고문이자 로테르담의 에라스뮈스의 친구였다. 1519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카를 5세 황제 선출, 1526년에는 그의 형제 페르디난트 1세의 보헤미아 왕 선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 그의 카리스마는 합스부르크 영토 사이에서 트렌토 국가의 종속적 지위를 되돌려 카스텔바르코와 로베레토의 영지를 얻게 했다.[1] 1528년에 발행된 그의 도시 조례는 1807년까지 사용되었다.[1]클레시오의 통치 하에 트렌토는 새로운 도시 계획으로 개조되었고, 새로운 대성당인 S. 마리아 마조레가 세워졌다.[1] 이는 트리엔트 공의회 (1545–63)를 개최하기 위해 필요했으며, 1539년 클레시오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그의 후임자인 크리스토포로 마두루초 추기경에 의해 완공되었다.[1] 경제와 서비스도 크게 개선되었다.[1] 공의회 기간 동안 유명한 지식인과 학자들이 존재하면서 공국에서 르네상스가 확산되었다.[1] 반종교개혁의 도입은 프로테스탄트 사상이 독일어를 사용하는 인구에게 더 많은 추종자를 얻었기 때문에 독일어에 대한 이탈리아어의 회복을 가져왔다.[1]
2. 2. 6.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 강화
1511년 6월, 트렌토와 브릭센 두 공국은 오스트리아 영토 내에서 "영구적인 연맹" 국가의 지위를 받았다. 그러나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1516년 평화 조약으로 인해 공국은 거대한 합스부르크 영토 사이의 단절된 월경지로 축소되었다. 1509년 베네치아와의 전쟁 중, 영토는 란츠크네흐트들이 비첸차에 대한 실패한 원정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황폐해졌다. 이어서 1510년과 1512년에 전염병이 발생했고, 1512년, 1519년, 1520년에는 기근이, 1521년에는 지진이 발생했다. 이러한 심각한 사건들은 합스부르크 통치에 대한 저항의 시작을 촉진했다. 1525년에는 진정한 반란이 일어났으며, 이를 ''바우언크리크'' 또는 "농민 반란"이라고 불렀다. 반란군은 미하엘 가이스마이어가 이끌었는데, 그는 브릭센과 트렌토의 모든 영토를 해방하고 평등주의 원칙("''Landesordnung''")에 기반한 사회적 자유 프로그램을 수립하는 복잡한 계획을 고안했다.[1]그러나 반란군은 조직력이 부족했고, 1526년 오스트리아 용병과 베르나르도 클레시오 주교에 의해 쉽게 진압되었다. 클레시오 주교는 아이사크 계곡과 슈테르칭 전투에서 반란군을 맹렬하게 몰살했다. 반란 지도자들은 참수, 교수형 또는 신체 절단을 당했고, 단순 추종자들은 풀려났지만 이마에 "불명예의 낙인"이 찍혔다. 1532년 가이스마이어가 파도바에서 대공의 암살자에 의해 살해되면서 더 이상의 반란에 대한 꿈은 끝났다. 약 천 명의 티롤과 트렌토 반란군은 모라비아의 아우슈피츠 근처로 피신하여 "형제 농장" (''Bruderhöfe'')을 설립했다.[1]
베르나르도 클레시오 추기경은 트렌토 공국의 진정한 재건자(''Neubegründer'')로 여겨진다. 그는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 1세 황제의 고문이자 로테르담의 에라스뮈스의 친구로서, 1519년 프랑크푸르트에서 합스부르크의 카를 5세 황제 선출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1526년에는 그의 형제 페르디난트 1세가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되는 데 기여했다. 그의 개인적인 카리스마는 합스부르크 영토 사이에서 트렌토 국가의 종속적 지위를 되돌려 카스텔바르코와 로베레토의 영지를 얻었다. 1528년에 발행된 그의 도시 조례는 1807년까지 사용되었다. 클레시오의 통치 하에 트렌토는 새로운 도시 계획으로 개조되었고, 새로운 대성당인 S. 마리아 마조레가 세워졌다. 이는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트리엔트 공의회 (1545–63)를 개최하기 위해 필요했고, 1539년 클레시오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그의 후임자인 크리스토포로 마두루초 추기경에 의해 완공되었다. 또한 경제와 서비스도 크게 개선되었다. 공의회 기간 동안 유명한 지식인과 학자들이 존재하면서 공국에서 르네상스의 확산을 촉진했다. 반종교개혁의 도입은 또한 독일어에 대한 이탈리아어의 일반적인 회복을 가져왔는데, 이는 프로테스탄트 사상이 독일어를 사용하는 인구에게 더 많은 추종자를 얻었기 때문이다.[1]
그러나 이 "황금 시대"는 페르디난트 1세 황제에 의해 끝났다. 그는 트렌티네 영토를 침공하여 로베레토를 점령하고, 1567년에는 연맹 조약을 폐지한다고 선언했다. 분쟁은 1578년 황제 의회가 공국 주교의 종주권을 회복하면서 해결되었다.[1]
2. 3. 근대
17세기, 트렌토 주교후국은 30년 전쟁의 경제적 여파와 베네치아 무역의 쇠퇴로 어려움을 겪었다. 1658년 카를로 에마누엘레 마두루초가 사망할 때까지 마두루초 가문(이들은 브릭센도 간접적으로 통제했다)이 주교후국을 통치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레오폴트 1세 황제는 그의 사촌 대공 지기스문트 프란츠에게 주교후국을 할당했다.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관계는 1662년에 다시 정립되었다. 그러나 3년 후 지기스문트 프란츠가 사망했고, 주교후국은 합스부르크 황제의 직접적인 영토에 포함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반독립적인 지위를 잃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으며, 1683년의 흑자, 트렌토의 부온콘실리오 성 완성, 아디제 계곡의 늪 건조, 획득한 토지에서 쌀 재배 도입과 같은 여러 발전이 있었다.[1]18세기 초에는 상황이 악화되어 프랑스 공화국과 바이에른 군대가 트렌티노와 티롤을 침략했고, 1703년 9월에는 트렌토 자체가 6일 동안 폭격을 받았다. 그러나 주교후국 지위에 가장 위험한 위협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 6세 황제가 모든 세습 영토를 합스부르크 왕관 아래 재통합하려는 주장이었다. 주교들은 나폴레옹의 1796년 침략까지 증가하는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에 맞서 독립을 위한 투쟁을 계속했다.[1]
2. 3. 1. 30년 전쟁과 경제 침체
17세기, 트렌토 주교후국은 30년 전쟁의 경제적 여파와 베네치아 무역의 쇠퇴로 어려움을 겪었다. 1658년 카를로 에마누엘레 마두루초가 사망할 때까지 마두루초 가문(이들은 브릭센도 간접적으로 통제했다)이 주교후국을 통치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레오폴트 1세 황제는 그의 사촌 대공 지기스문트 프란츠에게 주교후국을 할당했다.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관계는 1662년에 다시 정립되었다. 그러나 3년 후 지기스문트 프란츠가 사망했고, 주교후국은 합스부르크 황제의 직접적인 영토에 포함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반독립적인 지위를 잃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으며, 여러 가지 뛰어난 결과가 도출되었다. 1683년의 흑자, 트렌토의 부온콘실리오 성 완성, 아디제 계곡의 늪 건조 등이 그것이다. 획득한 토지에서는 쌀 재배가 도입되었다.18세기 초에는 상황이 악화되었다. 프랑스와 바이에른 군대가 트렌티노와 티롤을 침략했고, 1703년 9월에는 트렌토 자체가 6일 동안 폭격을 받았다. 그러나 주교후국 지위에 가장 위험한 위협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 6세 황제가 모든 세습 영토를 합스부르크 왕관 아래 재통합하려는 주장이었다. 주교들은 나폴레옹의 1796년 침략까지 증가하는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에 맞서 독립을 위한 투쟁을 계속했다.
2. 3. 2. 합스부르크 가문의 직접 통치
17세기, 트렌토 주교후국은 30년 전쟁의 경제적 여파와 베네치아 무역의 쇠퇴로 어려움을 겪었다. 1658년 카를로 에마누엘레 마두루초가 사망할 때까지 마두루초 가문(이들은 브릭센도 간접적으로 통제했다)이 주교후국을 통치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레오폴트 1세 황제는 그의 사촌이자 티롤과 전 오스트리아의 섭정이었던 대공 지기스문트 프란츠에게 주교후국을 할당했다.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관계는 1662년에 다시 정립되었다. 그러나 3년 후 지기스문트 프란츠가 사망했고, 주교후국은 합스부르크 가문 황제의 직접적인 영토에 포함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반독립적인 지위를 잃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으며, 여러 가지 뛰어난 결과가 도출되었다. 1683년의 흑자, 트렌토의 부온콘실리오 성 완성, 아디제 계곡의 늪 건조 등이 그것이다. 획득한 토지에서는 쌀 재배가 도입되었다.[1]18세기 초에는 상황이 악화되었다. 프랑스 공화국과 바이에른 군대가 트렌티노와 티롤을 침략했고, 1703년 9월에는 트렌토 자체가 6일 동안 폭격을 받았다. 그러나 주교후국 지위에 가장 위험한 위협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모든 세습 영토를 합스부르크 왕관 아래 재통합하려는 카를 6세 황제의 주장이었다. 주교들은 나폴레옹의 1796년 침략까지 증가하는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에 맞서 독립을 위한 투쟁을 계속했다.[1]
2. 3. 3. 18세기
18세기 초, 프랑스 공화국과 바이에른 군대가 트렌티노와 티롤을 침략했고, 1703년 9월에는 트렌토 자체가 6일 동안 폭격을 받았다. 그러나 주교후국 지위에 가장 위험한 위협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모든 세습 영토를 합스부르크 왕관 아래 재통합하려는 카를 6세 황제의 주장이었다. 주교들은 나폴레옹의 1796년 침략까지 증가하는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에 맞서 독립을 위한 투쟁을 계속했다.[1]3. 세속화와 이후
1801년 뤼네빌 조약으로 트렌토 주교후국은 세속화되어 오스트리아 제국의 티롤 백국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트렌토는 바이에른 왕국과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왕국에 잠시 편입되었다가, 1814년 다시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주민들이 많아 트렌티노는 이탈리아 통일주의 운동의 대상이 되었으나, 오스트리아는 1866년 이후에도 트렌토를 계속 지배했다. 1919년 생제르맹 조약을 통해 트렌토 주교령의 영토는 이탈리아 왕국에 귀속되었다.
3. 1. 나폴레옹 시대

1801년 뤼네빌 조약에 따라 1803년 주교후국은 세속화되어 트렌트 공국이 되었고, 이후 1804년부터 오스트리아 제국의 알프스 지역인 티롤 백국에 속하게 되었다. 트렌트는 1805년 프레스부르크 평화 조약에 따라 바이에른 왕국에 병합되었고, 1810년에는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왕국에 속했다가, 1814년 다시 오스트리아의 티롤 지역으로 편입되었다.
3. 2. 이탈리아 통일 운동
대부분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인구로 인해 트렌티노(''Venezia Tridentina'')는 이탈리아 통일주의 운동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1866년 제3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이후 인접한 베네토 지역을 할양한 후에도 티롤 지역(''Welschtirol'')에 속해 있었다.[1] 1919년 생제르맹 조약에 따라 이전 트렌트 주교령의 영토는 티롤 백국의 남부 지역과 함께 이탈리아 왕국에 귀속되었다.[1]
3. 3. 이탈리아 왕국 편입
1801년 뤼네빌 조약에 따라 1803년 주교후국은 세속화되어 트렌트 공국이 되었고, 이후 1804년부터 오스트리아 제국의 알프스 지역인 티롤 백국에 속하게 되었다. 1805년 프레스부르크 평화 조약에 따라 바이에른 왕국에 병합되었고, 1810년에는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왕국에 속했다가, 1814년 다시 오스트리아의 티롤 지역으로 편입되었다.대부분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인구로 인해 트렌티노(''Venezia Tridentina'')는 이탈리아 통일주의 운동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1866년 제3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이후 인접한 베네토 지역을 할양한 후에도 티롤 지역(''Welschtirol'')에 속해 있었다. 1919년 생제르맹 조약에 따라 이전 트렌트 주교령의 영토는 티롤 백국의 남부 지역과 함께 이탈리아 왕국에 귀속되었다.
4. 역대 주교 목록
이름 | 재임 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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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히 2세 | 1027년–1055년 (1022년부터 주교) |
아초 | 1055년–1065년 |
하인리히 1세 | 1068년–1082년 |
베르나르도 2세 | 1082년–1084년 |
아달베로 | 1084년–1106년 |
게르하르트 | 1106년–1120년 |
알베르토 1세 | 1120년–1124년 |
알트만 | 1124년–1149년 |
아르놀트 2세 | 1149년–1154년 |
에버하르트 | 1154년–1156년 |
알베르토 2세 | 1156년–1177년 |
잘로몬 | 1177년–1183년 |
알베르토 3세 디 마두루초 | 1184년–1188년 |
콘라트 2세 디 베세노 | 1188년–1205년 |
페데리코 완가 | 1207년–1218년 |
알베르토 4세 폰 라벤슈타인 | 1219년–1223년 |
제라르도 1세 오스칼리 | 1223년–1232년 |
알드리게토 디 카스텔캄포 | 1232년–1247년 |
에그노 폰 에판 | 1250년–1273년 |
하인리히 2세 | 1273년–1289년 |
필리프 부오나콜시 | 1289년–1303년 |
바르톨로뮤 퀘리니 | 1303년–1307년 |
하인리히 3세 폰 메츠 | 1310년–1336년 |
니콜라우스 아브라인 | 1338년–1347년 |
제라르도 2세 | 1347년–1348년 |
요한 3세 | 1348년–1349년 |
마인하르트 폰 노이하우스 | 1349년–1362년 |
알베르토 5세 폰 오르텐부르크 | 1363년–1390년 |
게오르크 1세 폰 리히텐슈타인 | 1390년–1419년 |
아르망 드 칠리 | 1421년 |
에른스트 아우어 | 1422년 |
하인리히 4세 플렉텔 | 1422년–1423년 |
알렉산데르 오브 마조비아 | 1424년–1444년 |
베네딕트 | 1444년–1446년 |
테오발트 폰 볼켄슈타인 | 1444년–1446년 (대립 주교) |
게오르크 2세 하크 폰 테메스발트 | 1446년–1465년 |
요하네스 힌더바흐 | 1465년–1486년 |
울리히 3세 폰 프룬츠베르크 | 1486년–1493년 |
울리히 4세 폰 리히텐슈타인 | 1493년–1505년 |
게오르크 2세 폰 네이데크 | 1505년–1514년 |
베르나르도 3세 클레시오 | 1514년–1539년 |
크리스토포로 마두루초 | 1539년–1567년 |
루도비코 마두루초 | 1567년–1600년 |
카를로 가우덴치오 마두루초 | 1600년–1629년 |
카를로 에마누엘레 마두루초 | 1629년–1658년 |
오스트리아의 지기스문트 프란체스 | 1659년–1665년 |
에른스트 아달베르트 폰 하라흐 | 1665년–1667년 |
지기스문트 알폰스 폰 툰 | 1668년–1677년 |
프란체스코 알베르티 디 폴라 | 1677년–1689년 |
주세페 비토리오 알베르티 디 엔노 | 1689년–1695년 |
요한 미하엘 그라프 폰 슈파우 | 1696년 3월 7일 - 1725년 4월 22일 |
조반니 베네데토 젠틸로티 | 1725년 9월 9일 - 1725년 9월 20일 |
안톤 도미니크 그라프 폰 볼켄슈타인 | 1725년 11월 26일 - 1730년 4월 5일 |
도미니크 안톤 그라프 폰 툰 | 1730년 6월 19일 - 1758년 9월 7일 |
레오폴트 에른스트 그라프 폰 피르미안[2] | 1748년 - 1758년 9월 7일 (?) |
프란체스코 펠리체 알베르티 디 엔노 | 1758년 9월 7일 (?) - 1762년 12월 31일 |
크리스토포로 프란체스코 시초 데 노리스 | 1763년 7월 2일 - 1776년 |
페터 미하엘 비길 그라프 폰 툰 운트 호엔슈타인 | 1776년 5월 29일 - 1800년 1월 17일 |
엠마누엘 마리아 그라프 폰 툰 운트 호엔슈타인 | 1800년 4월 2일 - 1802년 11월 6일 (1803년 2월까지 세속화된 공작으로 존속) |
참조
[1]
웹사이트
Trento
https://digilander.l[...]
2023-04-11
[2]
문서
Administr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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