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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투스 오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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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티투스 오츠는 1649년 잉글랜드에서 태어난 인물로, 17세기 후반 가톨릭 음모 사건을 조작하여 악명을 얻었다. 그는 잉글랜드 교회 사제로 서품받았으나, 이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가 다시 성공회로 돌아와 활동했다. 오츠는 가톨릭교도들이 찰스 2세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주장하며, 541명의 예수회를 포함한 가톨릭 교도들을 고발했다. 그의 거짓 증언으로 인해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처형되었으며, 이후 위증죄로 처벌받았다. 1689년 사면을 받았지만, 1705년 사망할 때까지 잊혀진 인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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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투스 오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고드프리 넬러의 오츠 초상화
고드프리 넬러의 오츠 초상화
이름티투스 오츠
출생일1649년 9월 15일
출생지잉글랜드 왕국 러틀랜드주 오컴
사망일1705년 7월 13일
사망지잉글랜드 왕국 런던
국적잉글랜드
직업사제
활동 기간1675년–1676년
알려진 이유구교도 음모 사건 날조
가족
부모새뮤얼 오츠
루시 오츠
군사 경력
소속잉글랜드
군종영국 해군
복무 기간1675년–1676년
계급해군 군종 장교

2. 초기 생애

티투스 오츠는 러틀랜드 오크햄에서 태어나[1][7] 여러 학교를 거쳐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학위를 마치지 못했다.[4][3] 그는 잉글랜드 교회 사제로 서품되었지만,[3] 초기 경력부터 위증 혐의로 기소되거나[3] 왕립 해군 군종 신부 시절 남색 혐의로 해고되는 등[5] 여러 차례 문제를 일으켰다. 이러한 불안정한 행보는 이후 가톨릭 교회로의 개종[7]과 반가톨릭 음모 주장으로 이어지는 복잡한 삶의 서막이 되었다.

2. 1. 출생 및 가계

티투스 오츠는 러틀랜드의 오크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사무엘 오츠(1610–1683)는 노리치의 리본 직조 가문 출신으로,[1][7] 케임브리지 대학교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를 졸업했다.[1] 사무엘 오츠는 잉글랜드 교회와 침례교 사이를 오가며 목사로 활동했다. 그는 잉글랜드 내전 중에는 침례교도가 되었으나,[2] 잉글랜드 왕정 복고 시기에는 다시 국교회로 돌아와 헤이스팅스의 올 세인츠 교회(1666–1674)에서 목사로 일했다.[2][3]

2. 2. 교육 및 성직 서품

오츠는 노스우드의 머천트 테일러스 학교와 다른 학교들에서 교육을 받았다. 1667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곤빌 앤 카이우스 칼리지에 입학했으나, 1669년 세인트 존스 칼리지로 옮겼고,[4] 같은 해 말 학위를 받지 못한 채 대학을 떠났다.[3] 그는 그다지 총명한 학생은 아니었으며, 가정교사에게 "매우 둔한 사람"으로 여겨졌지만 기억력은 좋았다.[2][7] 케임브리지 시절 그는 동성애 성향과 "거만하고 광신적인 태도"로 알려지기도 했다.[3]

오츠는 자신이 대학 학위를 가지고 있다고 거짓으로 주장하여 런던 주교로부터 설교 허가를 받았다.[3] 1670년 5월 29일, 그는 잉글랜드 교회의 사제로 서품되었다.

2. 3. 초기 경력 및 추문

러틀랜드의 오크햄 출신인 티투스 오츠는 노스우드의 머천트 테일러스 학교 등에서 교육받았다. 1667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곤빌 앤 카이우스 칼리지에 입학했으나, 1669년 세인트 존스 칼리지로 옮겼고 같은 해 학위 없이 학교를 떠났다.[4][3] 그는 총명하지 못하다는 평을 받았지만 기억력은 좋았으며,[2][7] 케임브리지 시절 동성애와 "거만하고 광신적인 태도"로 알려졌다.[3]

오츠는 학위를 가지고 있다고 속여 런던 주교로부터 설교 허가를 받았고,[3] 1670년 5월 29일 잉글랜드 교회의 사제로 서품되었다. 1673년부터 1674년까지 켄트 밥빙 교구의 목사로 일했으며, 이후에는 헤이스팅스의 올 세인츠 교회에서 아버지 밑에서 교구 사제로 활동했다. 이 시기 오츠는 헤이스팅스의 한 학교 교사를 학생과의 소돔 행위 혐의로 고발하여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 했으나, 혐의가 거짓으로 드러나면서 오히려 위증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감옥을 탈출하여 런던으로 도주했다.[3]

1675년, 오츠는 왕립 해군의 HMS 어드벤처 호의 군종 신부로 임명되었다.[5] 배를 타고 영국령 탕헤르를 방문했을 때 남색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이는 당시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였으나 성직자 신분 덕분에 처벌을 면했다.[5] 그는 1676년 해군에서 해고되었다.

1676년 8월, 오츠는 런던에서 체포되어 헤이스팅스로 송환되어 위증 혐의 재판을 받게 되었으나 다시 탈출하여 런던으로 돌아갔다.[3] 배우 매튜 메드본의 도움으로[6] 가톨릭 신자인 헨리 하워드, 노퍽 공작 집안의 개신교 신자들을 위한 성공회 군종 신부직을 얻었으나, 곧 그 자리도 잃었다.[3]

1677년 재의 수요일에 오츠는 가톨릭 교회로 개종했다.[7] 그러나 동시에, 침례교로 돌아간 아버지 사무엘을 통해 알게 된 이스라엘 통과 함께 반가톨릭 팸플릿을 공동 저술하기로 합의하는 모순적인 행보를 보였다.[8]

3. 예수회와의 관계

오츠는 프랑스의 생 오메르와 스페인 바야돌리드의 왕립 영국 대학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 입학하며 예수회와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학교 생활 중 여러 문제를 일으켜 결국 추방당했고, 이후 런던으로 돌아와 이스라엘 통과 함께 예수회에 대한 정보를 이용하려 했다.

3. 1. 가톨릭 개종 및 예수회 학교 입학

오츠는 프랑스의 생 오메르와 스페인 바야돌리드의 왕립 영국 대학에 있는 예수회와 연관을 맺었다. 그는 영국 예수회 수장이었던 리처드 스트레인지의 지원을 받아, 라틴어 실력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7] 바야돌리드의 사제 훈련 과정에 입학했다. 이후 그는 자신이 가톨릭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거짓 주장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학교에서 그의 부족한 라틴어 실력은 금방 드러났고, 잦은 신성모독적 발언과 영국 군주제에 대한 비판은 스승들과 다른 학생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새로운 지방 장관이었던 토마스 휘트브레드는 스트레인지보다 오츠에게 훨씬 엄격한 태도를 보였고, 결국 1678년 6월 오츠를 생 오메르에서 추방했다.[5]

3. 2. 이스라엘 통과의 만남

오츠는 프랑스의 생 오메르와 스페인 바야돌리드의 왕립 영국 대학에 있는 예수회와 관련을 맺었다. 그는 라틴어 실력이 부족했고[7], 잦은 신성 모독적 발언과 영국 군주제에 대한 공격으로 문제를 일으켰다. 결국 새로운 지방 장관 토마스 휘트브레드는 1678년 6월 오츠를 생 오메르에서 추방했다.[5]

런던으로 돌아온 오츠는 이스라엘 통과의 관계를 다시 이어갔다. 그는 예수회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가톨릭 신자인 척했으며, 생 오메르를 떠나기 전에 런던에서 열릴 예정인 예수회 회의에 대해 들었다고 주장했다.

4. 가톨릭 음모 사건 날조

1678년, 티투스 오츠는 이즈라엘 통과 함께 공모하여 잉글랜드의 가톨릭교도들이 국왕 찰스 2세를 암살하고 개신교 신자들을 학살하려 한다는 대규모 음모, 이른바 '가톨릭 음모 사건'(Popish Plot)을 날조했다. 오츠는 예수회를 비롯한 여러 가톨릭 수도회 인사들과 귀족들이 음모에 연루되었다고 주장하며 구체적인 인물들을 고발했다.[5]

오츠의 주장은 처음에는 일부 의심을 샀으나, 그의 확신에 찬 태도와 에드먼드 베리 고드프리 경의 미스터리한 죽음이 맞물리면서 반가톨릭 정서에 불을 지폈다. 이 사건으로 오츠는 일시적으로 영웅 대접을 받으며 부와 명예를 누렸지만, 그의 증언은 점차 신빙성을 잃어갔다. 국왕 찰스 2세조차 직접 심문을 통해 오츠의 주장에서 거짓을 간파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오츠의 거짓말로 인해 올리버 플런켓 대주교를 포함한 최소 15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처형되는 등 큰 사회적 혼란과 비극을 낳았다. 이 사건은 당시 잉글랜드의 정치적 불안과 종교적 갈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4. 1. 음모의 시작

오츠와 통은 찰스 2세 암살을 승인했다고 주장하는 잉글랜드 가톨릭 교회 지도자들을 비난하는 장문의 문서를 작성했다. 이들은 예수회가 암살 임무를 수행하기로 했다고 주장했다. 1678년 8월, 찰스 2세는 화학자 크리스토퍼 커크비와 이후 통으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노린다는 이 음모에 대해 경고를 받았다. 찰스 2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 문제를 자신의 장관 중 한 명인 토머스 오스본, 댄비 백작에게 넘겼다. 댄비 백작은 더 적극적으로 경청하려 했고, 통을 통해 오츠를 소개받았다.

국왕의 추밀원은 오츠를 심문했다. 1678년 9월 28일, 오츠는 541명의 예수회원을 포함하여 가톨릭 수도회의 여러 구성원과 수많은 가톨릭 귀족들에 대해 43가지 혐의를 제기했다. 그는 찰스 2세 암살을 계획했다고 주장하며 왕비 카타리나 드 브라간사의 주치의인 조지 웨이크먼 경과 메리 오브 모데나, 요크 공작 부인의 비서인 에드워드 콜먼을 고발했다.

오츠가 이름을 임의로 선택했거나 댄비 백작의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콜먼은 루이 14세의 고해 신부였던 프랑스 예수회 신부 페리에와 서신을 주고받은 사실이 드러나 유죄 판결을 받기에 충분했다. 반면 웨이크먼 경은 나중에 무죄로 풀려났다. 오츠의 평판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와 뛰어난 기억력은 의회에 놀랍도록 좋은 인상을 주었다. 그가 주요 예수회원이 작성했다고 주장한 다섯 통의 편지에 대해 "한눈에" 위조 작성자를 지목했을 때, 의회는 "경악"했다. 케니언이 지적했듯이, 오츠가 모든 편지를 직접 썼다면 이 편지들이 증거로서 가치가 없다는 점을 의회가 깨닫지 못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5]

오츠가 고발한 다른 인물들로는 윌리엄 포가티, 더블린의 피터 탤벗 대주교, 새뮤얼 페피스 국회의원, 존 벨라시스 제1대 벨라시스 남작 등이 있었다. 댄비 백작의 도움으로 고발 목록은 81개로 늘어났다. 오츠는 군인들을 배정받아, 과거 자신을 도왔던 사람들을 포함하여 예수회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1678년 9월 6일, 오츠와 통은 성공회 치안 판사 에드먼드 베리 고드프리 경에게 접근하여 그의 앞에서 혐의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는 진술서를 작성했다. 10월 12일, 고드프리 경이 실종되었고, 5일 후 그의 시신이 프림로즈 힐의 도랑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목이 졸리고 자신의 칼에 찔린 채 발견되었다. 오츠는 이 사건을 이용하여 "가톨릭교도"에 대한 대중적인 반감을 선동했고, 고드프리의 살해가 예수회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1678년 11월 24일, 오츠는 왕비가 국왕의 주치의와 함께 국왕을 독살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오츠는 돈을 위해서라면 어떤 말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던 "선장" 윌리엄 베드로의 도움을 받았다. 국왕은 오츠를 직접 심문했고, 그의 진술에서 여러 부정확성과 거짓말을 발견했다. 특히 오츠는 스페인 섭정인 돈 후안과 마드리드에서 면담했다고 경솔하게 주장했는데, 대륙 망명 시절 브뤼셀에서 돈 후안을 만난 적이 있던 국왕은 오츠가 그의 외모를 터무니없이 부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을 보고 그를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을 간파했다. 국왕은 오츠의 체포를 명령했다. 그러나 며칠 후, 입헌 위기의 위협 속에서 의회는 오츠의 석방을 강요했고, 오츠는 곧 화이트홀 궁전 내 국가 아파트에 거주하며 연간 1200GBP의 수당을 받게 되었다.

오츠는 큰 칭송을 받았다. 그는 문장원에 자신의 가문을 확인하고 문장을 만들어 줄 것을 요청했고, 결국 단절된 가문의 문장을 받았다. 심지어 오츠가 앤서니 애슐리 쿠퍼 제1대 샤프츠베리 백작의 딸과 결혼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4. 2. 국왕과 추밀원의 조사

1678년 8월, 찰스 2세는 화학자 크리스토퍼 커크비와 이즈라엘 통으로부터 자신의 암살 음모에 대한 경고를 받았다. 국왕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으나, 이 문제를 토머스 오스본, 댄비 백작에게 넘겼다. 댄비 백작은 통을 통해 오츠를 소개받았다.

1678년 9월 6일, 오츠와 통은 성공회 치안 판사 에드먼드 베리 고드프리 경 앞에서 혐의에 대한 진술서를 작성했다. 이후 9월 28일, 국왕의 추밀원은 오츠를 소환하여 심문했다. 이 자리에서 오츠는 541명의 예수회 회원을 포함한 가톨릭 수도회 인사들과 다수의 가톨릭 귀족들에 대해 총 43가지 혐의를 제기했다. 그는 카타리나 드 브라간사 여왕의 주치의인 조지 웨이크먼 경과 요크 공작 부인의 비서인 에드워드 콜먼이 국왕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고 고발했다.

비록 오츠가 이름을 임의로 선택했거나 댄비 백작의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도 제기되었지만, 에드워드 콜먼의 경우 루이 14세의 고해 신부였던 프랑스 예수회 신부 페리에와 서신을 주고받은 사실이 실제로 드러나면서 유죄 판결의 근거가 되었다. 반면 웨이크먼 경은 훗날 무죄로 풀려났다. 오츠 개인의 평판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확신에 찬 태도와 뛰어난 기억력은 의회에 예상외로 긍정적인 인상을 주었다. 특히 그가 주요 예수회 인사들이 작성했다고 주장한 다섯 통의 편지에 대해 즉석에서 작성자를 지목하자 의회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역사가 케니언이 지적했듯, 만약 오츠가 모든 편지를 직접 위조했다면 그 편지들이 증거로서 가치가 없다는 점을 당시 의회가 간과한 것은 의아한 부분이다.[5]

오츠가 고발한 인물에는 윌리엄 포가티, 더블린의 피터 탤벗 대주교, 새뮤얼 페피스 국회의원, 존 벨라시스 제1대 벨라시스 남작 등도 포함되었다. 댄비 백작의 개입으로 고발 대상자 목록은 총 81명으로 늘어났다. 오츠는 이 조사를 근거로 병력을 지원받아 과거 자신을 도왔던 이들을 포함한 예수회 회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1678년 11월 24일, 오츠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여왕이 국왕의 주치의와 공모하여 국왕을 독살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돈을 위해서라면 어떤 말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던 "선장" 윌리엄 베드로의 지원을 받았다. 국왕은 직접 오츠를 심문했으나, 심문 과정에서 오츠의 진술에 여러 부정확한 점과 명백한 거짓이 드러났다. 특히 오츠는 자신이 마드리드에서 스페인의 섭정 돈 후안을 만났다고 경솔하게 주장했는데, 과거 망명 시절 브뤼셀에서 돈 후안을 직접 만난 적이 있던 국왕은 오츠가 묘사하는 돈 후안의 외모가 실제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즉시 간파했다. 이에 국왕은 오츠의 체포를 명령했다.

4. 3. 에드먼드 베리 고드프리 경 살해 사건

1678년 9월 6일, 오츠와 통은 성공회 치안 판사 에드먼드 베리 고드프리 경에게 접근하여 그의 앞에서 혐의를 자세히 설명하는 진술서를 작성했다. 10월 12일, 고드프리가 실종되었고, 5일 후 그의 시신이 프림로즈 힐의 도랑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목이 졸려 죽었고 자신의 칼에 찔려 죽었다. 오츠는 그 후 이 사건을 이용하여 "가톨릭교도"에 대한 대중적인 캠페인을 시작했고, 고드프리의 살해는 예수회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4. 4. 여왕 연루 주장 및 국왕의 의심

1678년 11월 24일, 오츠는 여왕 카타리나 드 브라간사가 국왕의 주치의와 공모하여 찰스 2세를 독살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을 할 때 오츠는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말할 준비가 되어 있던 "선장" 윌리엄 베드로의 도움을 받았다. 국왕 찰스 2세는 오츠를 직접 심문했고, 그의 진술에서 여러 부정확한 점과 거짓말을 발견했다. 특히 오츠는 자신이 마드리드에서 스페인 섭정 돈 후안을 만났다고 경솔하게 주장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과거 브뤼셀에서 돈 후안을 직접 만난 적이 있던 국왕은 오츠가 묘사하는 돈 후안의 외모가 터무니없이 부정확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오츠가 그를 만난 적이 없음을 확신했다.

이에 국왕은 오츠의 체포를 명령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입헌 위기 발생 가능성을 우려한 의회가 개입하여 오츠의 석방을 강행했다. 석방된 오츠는 곧 화이트홀 궁전 내 국가 아파트를 제공받았으며, 연간 1200GBP의 수당까지 받게 되었다. 오츠는 대중의 칭찬을 받았고, 문장원에 자신의 가문을 확인하고 문장을 부여해 줄 것을 요청하여 결국 단절된 오래된 가문의 문장을 받았다. 심지어 오츠가 앤서니 애슐리 쿠퍼 제1대 샤프츠베리 백작의 딸과 결혼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4. 5. 여론의 변화와 희생자들

오츠의 거짓 증언으로 인해 거의 3년 동안 최소 15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처형된 후, 여론은 점차 오츠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의심의 분위기가 커지면서 마지막으로 주목받은 희생자는 로마 가톨릭 아마 대주교인 올리버 플런켓이었다. 그는 1681년 7월 1일에 교수, 거열형에 처해졌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대법원장인 윌리엄 스크로그스는 웨이크먼 재판 이후 점차 더 많은 사람들에게 무죄를 선언하기 시작했으며, 오츠와 그의 정치적 지지 세력이었던 휘그당에 대한 반발이 거세졌다.

5. 몰락과 처벌

거짓 음모를 통해 한때 권력의 중심에 섰던 티투스 오츠는 제임스 2세가 즉위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과거의 위증죄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극심한 형벌에 처해졌다. 그러나 명예혁명 이후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의 공동 통치 하에 사면되고 연금을 받았으나, 실추된 명예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대중에게 잊힌 채 생을 마감했다.

5. 1. 위증죄 재판과 형벌

1685년 요크 공작이 제임스 2세로 왕위에 오르자, 그는 오츠를 위증죄로 재판에 회부했다. 오츠는 유죄 판결을 받고 사제복을 박탈당했으며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남은 생애 동안 일 년에 다섯 번 런던 거리를 채찍질당하게" 되는 형벌이 내려졌다.[9]

형벌 집행 과정에서 오츠는 "완전한 증거에 따라 두 번의 끔찍한 위증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티투스 오츠"라는 글귀가 적힌 모자를 쓰고 감옥에서 끌려 나왔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홀 (현재 뉴 팰리스 야드) 문 앞의 목 조형물에 갇혔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에게 달걀을 던졌다. 다음 날에는 런던 시내에서 목 조형물에 갇혔으며, 셋째 날에는 옷이 벗겨진 채 수레에 묶여 올드게이트에서 뉴게이트까지 채찍질을 당했다. 그 다음 날에는 뉴게이트에서 타이번까지 같은 방식으로 채찍질을 당했다.

재판을 주재한 제프리스 판사는 오츠를 "인류의 수치"라고 비난했다. 그는 오츠의 위증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처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 재판들(특히 아일랜드 재판과 5명의 예수회원 재판)에서 오츠의 증언과 모순되는 증거들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점을 지적하며 "어쩌면 무고한 피를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유감을 표했다.[10] 오츠에게 내려진 형벌은 매우 가혹하여, 토머스 배빙턴 매콜리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제프리스와 다른 판사들이 위증죄에 사형을 선고할 수 없음을 공개적으로 후회했기 때문에, 이러한 잔혹한 처벌로 오츠를 죽이려 했다고 주장했다.

오츠는 이후 3년간 감옥에서 시간을 보냈다. 1689년, 프로테스탄트인 오렌지 공 윌리엄과 메리가 공동 왕위에 오르면서 그는 사면을 받았다. 또한 연금으로 연 260GBP를 받았으나, 그의 실추된 명성은 회복되지 못했다. 이 연금은 나중에 중단되었지만 1698년에 복원되어 연 300GBP로 인상되었다. 오츠는 1705년 7월 12일 또는 13일에 사망했으며, 당시에는 거의 잊힌 인물이었다.

5. 2. 사면과 사망

1685년 제임스 2세가 왕위에 오르자 티투스 오츠는 위증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사제복을 박탈당했으며, 종신형과 함께 주기적인 채찍질과 목 조형물 형벌이라는 가혹한 처벌을 선고받았다.[9] 제프리스 판사는 오츠를 "인류의 수치"라고 비난하며, 그의 위증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었음을 지적했다.[10] 오츠에게 내려진 형벌은 매우 혹독하여,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오츠는 3년간 감옥에서 복역했다. 그러나 1689년 명예혁명으로 오렌지 공 윌리엄과 메리가 공동 왕위에 오르면서 상황이 변했다. 오츠는 새로운 정권에 의해 사면되었고, 연금 260GBP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악명 높은 과거 행적 때문에 실추된 명성은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이 연금은 나중에 잠시 중단되었으나, 1698년에 다시 복원되었고 금액도 연 300GBP로 인상되었다. 티투스 오츠는 1705년 7월 12일 또는 13일에 사망했으며, 사망 당시에는 대중에게 거의 잊힌 인물이었다.

6. 대중문화 속의 티투스 오츠

프랜시스 바로우는 1682년경 팝피시 플롯과 오츠에 관한 만화를 만들었는데, 제목은 ''끔찍하고 지옥 같은 팝피시 음모에 대한 진실한 이야기''였다. 이 만화는 서명된 말풍선 만화의 가장 초창기 사례 중 하나로 여겨진다.[11]

오츠는 1969년 BBC TV 드라마 ''퍼스트 처칠스''에서 니콜라스 스미스가 연기했다. 2003년작 ''찰스 2세: 권력과 열정''에서는 에디 마산이 오츠를 연기했다.

참조

[1] 서적 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 1885–1900, vol. 41, Nichols-O'Dugan Macmillan & Co. 1895
[2] 서적 The Popish Plot: a study in the history of the reign of Charles II https://archive.org/[...] Duckworth and Co.
[3] ODNB Oates, Titus
[4] acad
[5] 서적 The Popish Plot Phoenix Press
[6] 문서 Medbourne was arrested under suspicion of involvement in the Popish Plot, he died in Newgate Prison in 1680.
[7] CathEncy Oates's Plot
[8] 간행물 Tonge, Israel (1621–1680) Oxford University Press 2004-09
[9] 서적 '1688: The First Modern Revolution' Yale University Press
[10] 서적 COBBETT'S COMPLETE COLLECTION OF STATE TRIALS VOL. 10 http://archive.org/d[...] T.C HANSARD,LONDON 1811
[11] 웹사이트 Francis Barlow https://www.lambiek.[...] Lambiek Comiclopedia 2019-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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