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타임라인 바로가기

브라이언 엡스타인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타임라인 바로가기

1. 개요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1934년 리버풀에서 태어나 배우를 꿈꾸며 왕립연극학교에 진학했으나, 가업인 음반 가게를 물려받아 NEMS(North End Music Stores)의 사장이 되었다. 그는 비틀즈를 발굴하여 매니저가 되었고, 밴드의 이미지 변신과 성공을 이끌었다. 1967년 펜토바르비탈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은 비틀즈 해체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잉글랜드의 게이 - 티투스 오츠
    티투스 오츠는 17세기 후반 가톨릭 음모 사건을 조작하여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고발하고 처형에 이르게 한 잉글랜드의 인물이다.
  • 영국의 성소수자 기업인 - 캐머런 매킨토시
    영국의 뮤지컬 제작자인 캐머런 매킨토시는 《캣츠》, 《레 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 등 세계적인 뮤지컬 제작을 통해 뮤지컬 산업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뮤지컬 산업에 기여한 공로로 기사 작위를 받았다.
  • 영국의 성소수자 기업인 - 앤 리스터
    앤 리스터는 "젠틀맨 잭"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영국의 지주이자 사업가, 여행가, 일기 작가로, 여성들과 낭만적인 관계를 맺었으며 500만 단어에 달하는 일기를 통해 사생활과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를 남겼다.
브라이언 엡스타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65년 그랜드 갈라 뒤 디스크에서 비틀즈의 에디슨 상을 수상하는 엡스타인
1965년 그랜드 갈라 뒤 디스크에서 에디슨 상을 수상하는 엡스타인
본명브라이언 새뮤얼 엡스타인
출생일1934년 9월 19일
출생지잉글랜드, 리버풀
사망일1967년 8월 27일 (향년 32세)
사망지잉글랜드, 런던
사망 원인바르비투르산염 및 알코올 급성 복합 약물 중독
직업사업가
개인 매니저
기획자
활동 기간1961년–1967년
웹사이트brianepstein.com
학력레킨 칼리지
리버풀 칼리지
클레이즈모어 스쿨
왕립 극예술 아카데미
담당 아티스트

2. 가족과 생애

엡스타인의 출생지인 리버풀 로드니 스트리트 4번지의 기념패


엡스타인은 1934년 9월 19일 리버풀 로드니 스트리트의 산부인과에서 아버지 해리와 어머니 퀴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6년에는 남동생 클라이브가 태어났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가족은 사우스포트 등으로 피난했다가 전쟁이 끝날 무렵 리버풀의 퀸즈 드라이브 197번지로 돌아왔다.[79][80]

어렸을 때 배우가 꿈이었던 엡스타인은 왕립연극학교(RADA)에 진학했지만, 3학기만에 그만두고 리버풀로 돌아왔다. 1950년 9월, 집안의 가구점에서 일하며 주급 5파운드로 가구를 판매했지만, 곧 일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81][82] 1952년 12월에는 징병되어 육군에 입대했지만, 군기 위반과 동성애 성향으로 인해 제대했다.

이후 가구점의 레코드 판매 사업을 담당하게 되었고, 1956년 다시 배우의 꿈을 좇아 런던의 왕립 연극 학교에 입학했다. 수잔나 요크, 앨버트 피니, 피터 오툴 등이 동기였으나, 3학기에 좌절하고 다시 리버풀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가게 "NEMS"에서 레코드 판매를 책임지게 되었고, 1961년 8월 3일부터 『머지 비트』지에 음악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엡스타인의 아버지 쪽 조부인 아이작 엡스타인은 리투아니아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유대인이었다. 아이작은 아들 해리와 함께 리버풀의 월턴 로드에서 가구점을 운영했으며, 폴 매카트니의 가족은 그곳에서 피아노를 구입했다고 한다.[79]

2. 1. 가계

엡스타인의 할아버지 아이작 엡스타인은 리투아니아계 유대인이었다. 그는 1890년대에 당시 러시아 제국의 일부였던 지역에서 18세의 나이로 영국에 도착했다.[2] 그의 할머니 디나는 드레이퍼인 조셉과 에스더 하이먼의 딸이었다. 에스더 하이먼은 1871년 또는 1872년경 장남 야곱과 함께 러시아에서 영국으로 이민을 왔다. 하이먼 가족은 6명의 다른 자녀를 두었다.

아이작 엡스타인은 1900년 맨체스터에서 디나 하이먼과 결혼했다.[3] 1901년 아이작과 디나는 아이작이 설립한 가구 판매점 위에 있는 리버풀의 80 월튼 로드에 아이작의 여동생 레이첼 엡스타인과 함께 살고 있었다.[4] 디나와 아이작의 셋째 아들 해리 엡스타인은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아버지가 되었다.

결국 가족은 리버풀의 앤필드 지역에 있는 27 앤필드 로드에 있는 더 큰 집으로 이사했다. 해리와 그의 형제 레슬리가 가업에 합류한 후, 아이작 엡스타인은 엡스타인 앤 선즈를 설립했다. 그는 악기 및 가전 제품과 같은 다양한 다른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 62/72 월튼 로드의 인접한 상점을 인수하여 가구 사업을 확장했다. 그들은 확장된 사업을 NEMS(노스 엔드 뮤직 스토어)라고 불렀으며 관대한 신용 조건을 제공했다. 폴 매카트니의 아버지는 한때 그들에게서 피아노를 샀다.[79] 엡스타인의 어머니 말카(가족들은 말카가 히브리어로 "여왕"을 의미하기 때문에 "퀴니"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역시 셰필드 베니어 회사를 소유한 하이먼 가구 사업에 관여했다. 해리와 퀴니는 1933년에 결혼했다.[80]

2. 2. 유년 시절과 교육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1934년 9월 19일 리버풀 로드니 스트리트 4번지에서 태어났다. 해리와 퀴니 부부는 브라이언의 22개월 후에 클라이브라는 아들을 더 낳았다.[5]

제2차 세계 대전 중 엡스타인 가족은 사우스포트로 이사했는데, 브라이언은 게으름과 저조한 학업 성적으로 두 학교에서 퇴학당했지만 1945년 리버풀로 돌아왔다. 엡스타인 가족은 리버풀의 차일드월에 있는 퀸즈 드라이브 197번지에 살았으며, 그곳에서 이후 30년 동안 거주했다.[6]

엡스타인의 부모는 그를 도싯의 클레이즈모어 학교, 리버풀 칼리지, 켄트의 유대인 학교 등 여러 기숙 학교로 옮겨 다녔다. 그는 슈롭셔 웰링턴의 Wrekin College에서 2년을 보냈고, 그곳에서 바이올린을 배웠다.[7] Wrekin에서 엡스타인은 엄격한 문화에 시달렸으며, 이는 억압된 동성애의 결과일 수도 있다. 엡스타인은 예술, 특히 연극에 대한 사랑을 키웠고, 이것은 그가 학교에서 일관되게 성공한 유일한 과목이었다.

16번째 생일을 맞기 직전에 그는 아버지에게 긴 편지를 보내 드레스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말했지만 해리 엡스타인은 완강히 반대했고, 다른 회사에서 6개월간의 견습 생활을 마친 후[8] 그의 아들은 결국 주당 5파운드의 임금을 받으며 가족의 가구점에서 "의무를 다해야" 했다.[5]

1952년 12월, 엡스타인은 징병제에 따라 영국 징병되어 로열 육군 군수 군단의 데이터 입력 사무원으로 징집되었고, 1953년 봄 런던의 리젠트 파크 근처 올버니 스트리트 병영에 배치되었으며, 군 복무 급여를 수령하지 않아 자주 질책을 받았다. 1954년 1월까지 엡스타인은 수많은 육군 정신과 의사들을 만났고, 그들은 조기 의병 제대를 권고했다.

1956년 가을, 엡스타인은 런던의 로열 드라마 예술 아카데미(RADA)에서 2년 과정에 등록했다. 그의 RADA 동기생으로는 배우 수잔나 요크, 앨버트 피니, 피터 오툴 등이 있었지만, 엡스타인은 세 번째 학기가 끝나고 중퇴했는데,[16] 그는 "학생 생활을 즐기기에는 너무 사업가가 되었고, 학생으로 있는 것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9]

1957년 4월 말, RADA 학생이었던 엡스타인은 스위스 코티지 역 근처에서 잠복 경찰관에게 성관계를 요구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당시 영국에서 남성의 동성 성행위는 불법이었다.) 그는 다음 날 메릴본 법원에 출두하여 무죄를 주장했다. 그는 2년의 보호 관찰을 선고받았다. 1958년 5월, 그는 보호 관찰 중 리버풀에서 우연한 성 파트너에게 폭행을 당하고 입막음 돈을 갈취당했다. 엡스타인은 이 만남을 경찰에 신고했고, 이는 그가 법정에서 증언하고 가족에게 자신의 성적 성향을 밝히도록 강요했다.

2. 3. 군 복무와 동성애 성향

1952년 12월, 엡스타인은 징병제에 따라 영국 징병되어 로열 육군 군수 군단의 데이터 입력 사무원으로 징집되었고, 1953년 봄 런던의 리젠트 파크 근처 올버니 스트리트 병영에 배치되었다. 군 복무 급여를 수령하지 않아 자주 질책을 받았다.[5] 엡스타인은 이 배치를 통해 런던의 고급 문화를 처음 접하게 되었고, 현지 친척들을 방문하기도 했다.[7] 1954년 1월, 엡스타인은 수많은 육군 정신과 의사들을 만났고, 그들은 조기 의병 제대를 권고했다.[7]

리버풀로 돌아온 후, 엡스타인은 호일레이크에 있는 클래런던 가구점의 책임자가 되었고, 1955년에는 NEMS의 이사로 임명되었다.[5] 1956년 9월, 그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런던으로 여행을 갔지만, 그곳에 도착한 지 불과 하루 만에 여권, 출생 증명서, 수표책, 손목시계, 소지한 모든 돈을 도난당했다. 그는 부모님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아, 기차표를 살 만큼 돈을 벌 때까지 백화점 점원으로 일했다.[8] 집에 돌아온 그는 엡스타인 가의 친구인 정신과 의사에게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고백했고, 그 의사는 해리 엡스타인에게 그의 아들이 가능한 한 빨리 리버풀을 떠나야 한다고 제안했다. 면담 중 엡스타인은 배우가 되고 싶다는 포부를 드러냈고, 부모님은 그가 런던으로 가서 공부하는 것을 허락했다.[5][8]

1957년 4월 말, 로열 드라마 예술 아카데미(RADA) 학생이었던 엡스타인은 스위스 코티지 역 근처에서 잠복 경찰관에게 성관계를 요구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당시 영국에서 남성의 동성 성행위는 불법이었다.) 그는 다음 날 메릴본 법원에 출두하여 무죄를 주장했다. 그는 2년의 보호 관찰을 선고받았다.[16] 1958년 5월, 그는 보호 관찰 중 리버풀에서 우연한 성 파트너에게 폭행을 당하고 입막음 돈을 갈취당했다. 엡스타인은 이 만남을 경찰에 신고했고, 이는 그가 법정에서 증언하고 가족에게 자신의 성적 성향을 밝히도록 강요했다.[16] 법원은 재판 중 엡스타인의 신원을 밝히는 것을 언론에 보도 금지했다. 그의 공격자는 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엡스타인은 기소되지 않았다.[16]

3. 비틀즈와의 만남

1961년 말, 비틀즈의 한 팬이 엡스타인에게 독일에서 제작된 비틀즈의 음반을 요구했으나, 엡스타인은 그 음반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비틀즈가 그의 가게로부터 멀지 않은 캐번 클럽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비틀즈의 공연에 감명을 받았다. 그는 비틀즈의 음반을 자신의 가게에서 팔기를 원했고, 비틀즈는 아직 매니저가 없으며 매니저를 찾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또한 비틀즈의 궁극적 목표는 잉글랜드의 음반사와 계약을 맺는 것이었고, 엡스타인은 비틀즈의 매니저가 되었다.[5]

엡스타인은 그의 수완을 발휘하여 비틀즈가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음악을 연주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그는 잉글랜드 북부의 대형 음반 가게의 사장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여러 음반사들과 계약을 시도했다. 1962년 1월 1일 데카 레코드의 오디션을 보았지만, 데카 레코드 측은 엡스타인이 접촉한 여러 음반사와 같이 비틀즈를 거절했다.

데카 레코드는 엡스타인에게 오디션에서 녹음했던 비틀즈의 데모 테이프를 제공했고, 엡스타인은 이를 이용해서 홍보에 나섰지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엡스타인은 실제 녹음은 이 데모 테이프보다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 새로운 시험 음반을 만들기로 하였다. 시험 음반을 만들어준 사람은 EMI 그룹팔로폰 레코드에서 일하는 녹음 기술자 조지 마틴이었고, 엡스타인은 조지 마틴을 찾아가 시험 음반을 들려주었다. 마틴은 이 음반을 듣고, 비틀즈에게 오디션 기회를 제공했다.

비틀즈는 EMI의 오디션을 통과했으며, 팔로폰과 계약을 맺었다. 드러머 피트 베스트는 마틴의 요구에 부흥하지 못했으며, 비틀즈 멤버는 그를 탈퇴시키고 새 밴드를 찾고 있던 링고 스타로 교체한다.

1963년 비틀즈는 영국과 유럽에서 큰 인기를 얻었으며, 1964년에는 미국에서도 큰 인기를 얻게 된다.

엡스타인이 비틀즈를 알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 레이먼드 존스 설: 엡스타인의 자서전 "지하실 가득한 소음"에 따르면, 1961년10월 28일 토니 셰리단(반주가 비틀즈)의 싱글 "마이 보니"를 레이먼드 존스라는 비틀즈 팬이 그의 가게에 사러 왔을 때 비틀즈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설은 현재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여겨진다.
  • 머지 비트 설: 엡스타인은 1961년8월 3일 발행된 머지 비트 3호부터 음악 칼럼을 담당했지만, 그 전 호인 2호(당시 머지 비트는 격주간지)의 톱 기사에서 비틀즈를 특집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엡스타인이 2주 전에 발행된 톱 기사를 몰랐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의견이 있다.
  • 새로운 아이템 설: 대중 음악에 관심이 없고 클래식과 오페라를 좋아했던 엡스타인이 머지 비트지를 통해 당시 인기가 있던 비트 그룹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의견이 있다. 앨리스터 테일러는 리버풀에서 매년 여름 열리는 비틀즈 컨벤션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지역에서 레코드 가게를 경영하던 엡스타인이 "새로운 아이템"을 찾고 있었고, 가게 근처에 있는 캐번 클럽에 출연하고 있던 비틀즈에 관심을 가져 계약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앨리스터 테일러는 자신의 저서 『시크릿 히스토리』에서 "레이먼드 존스라는 것은, 손님들이 원하고 있는 비틀즈 레코드라는 것을 입수하고 싶어서, 내가 적당히 생각해 낸 가공의 인물일 뿐이다."라고 썼지만, 나중에 레이먼드 존스 본인이 나타나 테일러의 설을 뒤엎었기 때문에, 현재는 당초의 설(레이먼드 존스 설)이 지지받고 있다.

3. 1. 비틀즈 발견

엡스타인은 처음에 ''머지 비트(Mersey Beat)''의 기사와 그의 상업 미술가 동료인 토니 부스가 리버풀 주변에 만든 수많은 포스터를 통해 비틀즈를 알게 되었고,[12] 이후 ''머지 비트'' 편집장 빌 해리(Bill Harry)에게 그들이 누구인지 물었다. 해리는 이전에 엡스타인에게 NEMS에서 잡지를 판매하도록 설득했는데, 비틀즈는 이 잡지의 두 번째 호 표지에 실렸다. 비틀즈는 독일에서 토니 셰리던(Tony Sheridan)과 함께 "마이 보니(My Bonnie)" 싱글을 녹음했고, 발매 몇 달 후 엡스타인은 개인 비서 앨리스터 테일러(Alistair Taylor)에게 이에 대해 물었다.[13] 엡스타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고객인 레이먼드 존스가 NEMS 상점에 들어와 "마이 보니" 싱글을 달라고 했고, 이로 인해 엡스타인은 이 그룹에 대해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13] 테일러는 나중에 정기 고객이었던 존스의 이름을 사용하여 싱글을 주문하고 계약금을 지불했으며, 엡스타인이 이를 알아차리고 더 많은 사본을 주문할 것을 알았다고 주장했다.[14] 해리와 폴 매카트니는 나중에 엡스타인의 이야기를 부인했는데, 해리는 비틀즈에 대해 오랫동안 엡스타인과 이야기를 나눴고, 이 그룹을 ''머지 비트''에서 가장 많이 홍보했으며, 매카트니는 "브라이언은 비틀즈가 누구인지 완벽하게 알고 있었어요. 그들은 ''머지 비트'' 두 번째 호 표지에 나왔었잖아요."라고 말했다.[15] 1961년 8월 3일, 엡스타인은 ''머지 비트''에 "세상을 멈추고, 그 안의 모든 것을 들어라: NEMS의 브라이언 엡스타인"이라는 고정 음악 칼럼을 시작했다.

비틀즈는 1961년 11월 9일 더 캐번 클럽(The Cavern Club)에서 점심 콘서트를 열 예정이었다.[16] 클럽 소유주인 시트너에 따르면, 엡스타인은 이전에 토요일 밤에 클럽을 여러 번 방문했고, 한 번은 시트너에게 자신의 21번째 생일 파티를 위해 그룹을 예약해 달라고 요청했다. 엡스타인은 해리에게 엡스타인과 그의 비서 테일러가 비틀즈의 공연을 볼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클럽은 엡스타인과 테일러가 줄을 서지 않고 입장하도록 허용했다. 그들은 문 앞에 있던 팬들의 줄을 건너 클럽의 PA 시스템(public address system)을 통해 레지던트 디스크 자키인 밥 울러가 환영 메시지를 발표하는 것을 들었다. "오늘 관객 중에 유명한 분이 계십니다. NEMS 소유주인 브라이언 엡스타인 씨 ..." 엡스타인은 나중에 공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즉시 그들의 음악, 비트, 무대에서의 유머 감각에 충격을 받았고, 심지어 그들을 만난 후에도 그들의 개인적인 매력에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어요."[5]

공연 후, 엡스타인과 테일러는 그룹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탈의실(그는 나중에 "빗자루 보관함만큼이나 큰" 곳이라고 묘사했다)로 들어갔다.[17] 비틀즈는 모두 NEMS의 정기 고객이었기 때문에 즉시 엡스타인을 알아봤지만, 그가 그들의 공연에 대해 축하하기도 전에 조지 해리슨이 "엡스타인 씨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라고 말했다. 엡스타인은 "그냥 인사하러 왔어요. 당신들의 공연이 마음에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단순히 인사를 고개로 하는 테일러를 소개했고, 테일러는 "수고했어요, 그럼 안녕히"라고 말하고 떠났다. 엡스타인과 테일러는 점심을 먹으러 갔고, 식사 중에 엡스타인은 테일러에게 그 그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테일러는 솔직히 그들이 "정말 끔찍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에게는 "놀라운" 무언가가 있다고 대답했다. 엡스타인은 한참 동안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다가 "내 생각엔 그들은 엄청난 존재들이야!"라고 외쳤다.[5] 나중에 엡스타인이 계산을 치르면서 테일러의 팔을 잡고 "내가 그들을 매니지해야 할까요?"라고 말했다.

비틀즈는 다음 3주 동안 더 캐번 클럽에서 공연했고, 엡스타인은 항상 그들을 보기 위해 그곳에 있었다. 그는 앨런 윌리엄스(그들의 이전 프로모터/매니저)에게 연락하여 윌리엄스가 더 이상 그 그룹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윌리엄스는 엡스타인에게 함부르크 콘서트 수익률 때문에 그룹이 지불을 거부했기에 "그들을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라고 조언했다.[18]

한편, 엡스타인이 비틀즈를 알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 레이먼드 존스 설: 엡스타인의 자서전 "지하실 가득한 소음"에 따르면, 1961년10월 28일 토니 셰리단(반주가 비틀즈)의 싱글 "마이 보니"를 레이먼드 존스라는 비틀즈 팬이 그의 가게에 사러 왔을 때 비틀즈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설은 현재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여겨진다.
  • 머지 비트 설: 엡스타인은 1961년8월 3일 발행된 머지 비트 3호부터 음악 칼럼을 담당했지만, 그 전 호인 2호(당시 머지 비트는 격주간지)의 톱 기사에서 비틀즈를 특집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엡스타인이 2주 전에 발행된 톱 기사를 몰랐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의견이 있다.
  • 새로운 아이템 설: 대중 음악에 관심이 없고 클래식과 오페라를 좋아했던 엡스타인이 머지 비트지를 통해 당시 인기가 있던 비트 그룹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의견이 있다. 앨리스터 테일러는 리버풀에서 매년 여름 열리는 비틀즈 컨벤션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지역에서 레코드 가게를 경영하던 엡스타인이 "새로운 아이템"을 찾고 있었고, 가게 근처에 있는 캐번 클럽에 출연하고 있던 비틀즈에 관심을 가져 계약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앨리스터 테일러는 자신의 저서 『시크릿 히스토리』에서 "레이먼드 존스라는 것은, 손님들이 원하고 있는 비틀즈 레코드라는 것을 입수하고 싶어서, 내가 적당히 생각해 낸 가공의 인물일 뿐이다."라고 썼지만, 나중에 레이먼드 존스 본인이 나타나 테일러의 설을 뒤엎었기 때문에, 현재는 당초의 설(레이먼드 존스 설)이 지지받고 있다.

3. 2. 매니지먼트 계약

1961년 12월 10일, 엡스타인은 비틀즈의 2대 매니저로 취임했다.[5] 1962년 1월 24일, 피트 베스트의 자택에서 엡스타인은 비틀즈와 5년간의 매니지먼트 계약을 체결했다.[5] 그러나 엡스타인은 서명하지 않고, 언제든지 계약을 해제할 수 있는 권리를 비틀즈에게 부여했다.[5]

엡스타인은 자서전에서 비틀즈 멤버들이 장래에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밝혔다. 한편, 엡스타인 이전에 비틀즈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했던 앨런 윌리엄스와 비틀즈 사이에 금전 문제가 발생한 적이 있었다. 엡스타인은 윌리엄스로부터 "그들은 돈에 얽매이니 계약을 할 때는 주의하라. 문제로 재산을 잃을 가능성도 있으니, 언제든지 그들을 잘라낼 수 있도록 준비해두어라"라는 조언을 받았다. 또한, 엡스타인이 비틀즈에게 접근했을 당시, 베스트의 어머니 모나가 비틀즈의 매니저와 비슷한 활동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엡스타인은 베스트의 자택에서 계약을 맺으려 했다. 만약 엡스타인이 서명을 했다면, 모나로부터 항의를 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엡스타인은 서명을 단념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테일러는 저서 『시크릿 히스토리』에서 이 풍설을 부정하고 있다. "계약한 것은 피트의 집이 아니라, NEMS의 사무실이 있던 화이트 채플이었다." 계약서는 이야기가 정리된 직후 화이트 채플에서 작성되었으며, 완성되자 4명은 바로 서명했다고 적혀있다. 테일러의 이름은 증인으로서 계약서에 서명되어 있다.

1961년 12월 3일 NEMS에서 열린 그룹과의 회의에서 엡스타인은 비틀즈 매니지먼트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존 레논, 조지 해리슨, 피트 베스트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늦게 도착했다. 폴 매카트니 또한 "목욕을 하고 있었다"고 해리슨이 설명했기 때문에 늦었다. 엡스타인은 화가 났지만, 해리슨은 "늦었을지라도 그는 매우 깨끗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그를 달랬다.[19] 레논은 울러에게 엡스타인에 대한 의견을 말해달라고 회의에 초대했지만, 울러를 소개하면서 "이 사람은 우리 아빠야"라고 말했다. 엡스타인은 짧은 회의 동안 매니저가 있는지 물었을 뿐이었다. 그들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지금 벌어지는 모든 일들로 보아 누군가는 당신들을 돌봐야 할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는 1961년 12월 6일12월 10일에 그룹과 추가 회의를 가졌다.

매카트니, 해리슨, 베스트는 21세 미만이었고 계약을 위해 부모의 동의가 필요했다. 베스트와 그의 어머니인 모나 베스트는 캐스바 커피 클럽의 소유주였는데, 엡스타인이 사업가이고, 비싼 정장을 입고, 큰 차를 소유했기 때문에 다른 비틀즈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엡스타인의 전문적인 이미지에 감명을 받았다. 베스트의 어머니는 엡스타인이 "그들(비틀즈)에게 좋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매카트니의 아버지는 유대인 매니저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며 아들에게 재정에 주의하라고 경고했다.[20] 레논의 고모이자 후견인인 미미 스미스는 엡스타인이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면 흥미를 잃을 것이라고 믿고 반대했지만, 막 21살이 된 레논은 고모의 조언을 무시했다.

비틀즈는 1962년 1월 24일 엡스타인과 5년 계약을 체결하여 수입의 10~15%를 지급했다. 그들은 1962년 10월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여 엡스타인이 밴드를 얼마나 돕는지에 따라 수입의 15%, 20%, 또는 25%를 받도록 했다. 비틀즈는 그 후 다양한 비용을 공제한 후 남은 수입을 공유하게 되었다. 엡스타인은 이후 매니지먼트 회사인 NEMS Enterprises를 설립했으며, 부모에게 그룹을 관리하는 것은 파트타임 직업일 뿐 가족 사업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5]

비틀즈는 엡스타인의 첫 번째 매니지먼트 계약에 서명했지만, 엡스타인은 서명하지 않았다. 그는 나중에 테일러에게 "만약 그들이 계약을 파기하고 싶다면, 그들은 나를 붙잡을 수 있지만, 나는 그들을 붙잡을 수 없다"고 말했다.[5] 계약에는 엡스타인이 특정 재정적 임계값에 도달한 후 그룹 총수입의 25%를 매니지먼트 수수료로 받는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 비틀즈는 더 적은 비율을 요구했지만, 엡스타인은 아무런 대가 없이 몇 달 동안 그들의 비용을 지불해 왔다고 지적했다. 1962년 10월 1일, "러브 미 두" 발매 4일 전, 엡스타인은 레논과 매카트니와 3년 NEMS 출판 계약을 체결했다.[21]

4. 비틀즈의 매니저로서

1961년 말, 비틀즈의 한 팬이 엡스타인에게 독일에서 제작된 비틀즈의 음반을 요구했지만, 엡스타인은 그 음반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비틀즈가 자신의 가게에서 멀지 않은 캐번 클럽에서 공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비틀즈의 공연에 감명을 받았다. 엡스타인은 비틀즈의 음반을 자신의 가게에서 팔기를 원했고, 비틀즈는 아직 매니저가 없으며 매니저를 찾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비틀즈의 궁극적 목표는 잉글랜드의 음반사와 계약을 맺는 것이었고, 엡스타인은 비틀즈의 매니저가 되었다.

엡스타인은 그의 수완을 발휘하여 비틀즈가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음악을 연주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잉글랜드 북부의 대형 음반 가게 사장이라는 위치를 이용하여, 여러 음반사들과 계약을 시도했다. 1962년 1월 1일 데카 레코드의 오디션을 보았지만, 데카 레코드 측은 엡스타인이 접촉한 다른 음반사들과 마찬가지로 비틀즈를 거절했다.[31]

1963년 비틀즈는 영국과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1964년에는 미국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엡스타인은 게리 앤 더 페이스메이커스와 같은 다른 밴드와 가수들과도 계약을 진행하여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매니지먼트 회사인 NEMS 엔터프라이시스(음반 가게 이름을 따라 지었다)를 설립했으며, 후에는 비 지스, 지미 핸드릭스, 크림이 계약하기도 했다.

비틀즈는 1966년 5월 1일 엠파이어 풀에서 영국에서의 마지막 공식 라이브 공연을 펼쳤다. 이후 엡스타인의 매니지먼트 업무는 그들의 경력 변화를 반영하도록 바뀌었다. 그는 비틀즈에게 투어를 계속하도록 압력을 가했지만, 그들은 완강히 거절했다.[2]

4. 1. 이미지 변신과 무대 매너

엡스타인은 비틀즈에게 양복과 넥타이를 착용하게 하고, 무대에서 욕설, 흡연, 음주, 식사를 금지시켰다. 또한 공연 마지막에 하는 유명한, 일제히 허리 굽혀 인사하는 동작도 엡스타인이 제안했다.[5] 엡스타인의 RADA 훈련을 반영한다고 믿은 맥카트니는 이 제안에 가장 먼저 동의했다.

엡스타인은 비틀즈를 친구이자 재단사인 베노 도른에게 데려갔고,[24][25] 도른은 그들이 이전에 본 디자인을 바탕으로 비틀즈에게 처음 양복을 만들어 주었다.[26] 레논은 양복과 넥타이를 입는 것을 꺼렸지만, "누군가 나에게 돈을 지불한다면 양복을 입을 것"이라고 말했다.[28]

이러한 변화는 비틀즈가 대중에게 더 쉽게 받아들여지는 데 도움이 되었다. 비틀즈는 더 좋은 곳에서 공연하게 되었고,[30] 수입도 늘었다.[30] 또한, 예약 기록을 위해 수첩 대신 일정을 사용하면서 더욱 체계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30]

4. 2. 음반 계약과 데뷔

1961년 말, 비틀즈의 한 팬이 엡스타인에게 독일에서 제작된 비틀즈의 음반을 요구했지만, 엡스타인은 그 음반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비틀즈가 자신의 가게에서 멀지 않은 캐번 클럽에서 공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비틀즈의 공연에 감명을 받았다. 그는 비틀즈의 음반을 자신의 가게에서 팔기를 원했고, 비틀즈는 아직 매니저가 없으며 매니저를 찾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또한 비틀즈의 궁극적 목표는 잉글랜드의 음반사와 계약을 맺는 것이었고, 엡스타인은 비틀즈의 매니저가 되었다.

엡스타인은 그의 수완을 발휘하여 비틀즈가 좀 더 나은 자리에서 음악을 연주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그는 잉글랜드 북부의 대형 음반 가게의 사장이라는 위치를 이용하여, 여러 음반사들과 계약을 시도했다. 1962년 1월 1일 데카 레코드의 오디션을 보았지만, 데카 레코드 측은 엡스타인이 접촉한 여러 음반사와 같이 비틀즈를 거절했다.[31]

엡스타인이 비틀즈의 첫 음반 계약을 체결했음을 발표하기 위해 리버풀의 ''머지 비트'' 신문에 보낸 전보


비틀즈를 만난 직후, 엡스타인은 음반 계약을 확보하기 위해 런던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음반 회사들을 방문했지만, 컬럼비아 레코드(Columbia), 파이 레코드(Pye), 필립스 레코드(Philips), 오리올 레코드 (UK)(Oriole), 데카 레코드(Decca) 등 많은 회사들이 그를 거절했다. 1961년 12월 13일, 엡스타인의 초대로 데카의 마이크 스미스가 런던에서 리버풀로 가서 캐번에서 비틀즈의 공연을 관람했고, 이는 1962년 1월 1일 런던에서 오디션을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비틀즈의 데카 오디션 참조). 데카는 한 달 뒤 엡스타인에게 오디션 테이프가 거절되었다고 통보했다.

데카 레코드는 엡스타인에게 오디션에서 녹음했던 비틀즈의 데모 테이프를 제공했고, 엡스타인은 이를 이용해서 홍보에 나섰지만 흥미를 가진 사람은 계속해서 나타나지 않았다. 엡스타인은 실제 녹음은 이 데모 테이프보다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 새로운 시험 음반을 만들기로 하였다. 1962년 2월 초, 엡스타인은 런던 옥스퍼드 스트리트 363번지에 있는 HMV 매장(EMI 소유)을 방문하여 데카 테이프를 78 rpm 아세테이트로 옮겼다. 짐 포이라는 HMV 디스크 커터는 녹음을 마음에 들어했고, 엡스타인에게 EMI의 음반 출판 부서 책임자인 시드 콜먼에게 연락할 것을 제안했는데, 이 부서는 출판 회사인 Ardmore & Beechwood를 관리했다. 콜먼과 그의 동료 킴 베넷은 비틀즈의 "라이크 드리머스 두" 녹음을 마음에 들어했고, EMI가 레논-매카트니의 오리지널 곡을 녹음하게 하려 했으며, Ardmore & Beechwood가 출판권을 유지하게 했다. 그들은 엡스타인을 EMI팔로폰 레이블의 A&R 매니저인 조지 마틴에게 보냈다. 엡스타인은 2월 13일에 마틴을 만나 데카 오디션의 아세테이트를 들려주었다. 엡스타인은 낙관적인 분위기로 회의를 마쳤지만, 마틴은 "엉망인 테이프"에 "전혀 감명받지 않았다".

마틴은 나중에 비틀즈가 국제적으로 유명해질 것이라는 엡스타인의 확신이 그를 마침내 음반 계약을 제안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EMI 전무 이사 L. G. 우드가 1962년 5월에 마틴에게 비틀즈와 계약을 체결하라고 지시했는데, 그 주된 이유는 레논-매카트니의 곡 출판에 대한 Ardmore & Beechwood의 지속적인 관심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마틴은 5월 9일에 엡스타인과 다시 만나 비틀즈가 첫 해에 6곡(3개의 양면 싱글 발매와 동일)을 녹음하도록 EMI 표준 녹음 계약을 제안했다. 계약서에 서명한 후, 엡스타인은 즉시 비틀즈(함부르크에 있었음)와 리버풀의 음악 잡지 ''머지 비트''에 전보를 보냈다.

녹음 계약에 따라 비틀즈는 판매된 각 음반에 대해 페니(영국 데시멀 이전 동전) (1d)를 받게 되었고, 이는 네 명의 멤버에게 분배되어 각 멤버는 복사본당 파딩(영국 동전)을 받았다. 로열티는 영국 외에서 판매된 싱글의 경우 더욱 감소하여, 그룹은 싱글당 페니의 절반을 받았고, 이는 다시 그룹 전체에 분배되었다. 마틴은 첫 녹음 세션을 1962년 6월 6일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갖도록 계획했다.

4. 3. 피트 베스트 해고와 링고 스타 영입

1962년 6월 6일, 비틀즈의 첫 녹음 세션 후, 조지 마틴은 드러머 피트 베스트 대신 경험 많은 세션 드러머를 쓰는 것이 녹음의 질을 높일 것이라고 생각했다.[5] 레논, 매카트니, 해리슨은 베스트를 교체하기로 결정하고, 엡스타인에게 베스트를 해고하고 링고 스타를 영입하도록 요청했다.[5] 엡스타인은 이 결정에 대해 고민하며, 캐번 클럽의 디스크 자키 밥 울러에게 의견을 물었다. 울러는 베스트가 팬들에게 매우 인기가 많기 때문에 교체를 반대할 것이라고 답했다.[5]

엡스타인은 비틀즈 멤버 전원에게 매니지먼트를 제공해야 한다는 계약 때문에 베스트를 해고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변호사와 상담한 결과, 비틀즈가 계약 조건에 따라 베스트를 내쫓을 수 없으며, 법적으로 해산 후 스타와 함께 재결성해야 한다는 조언을 받았다.[5] 엡스타인은 베스트에게 다른 밴드 자리를 알아봐 주겠다고 약속하며, 머지비츠(The Merseybeats)의 드러머 자리를 제안하기도 했다.[5]

한편, 스타는 로리 스톰(Rory Storm) 앤 더 허리케인즈와 함께 스케그네스(Skegness)에 있는 부틀린스(Butlins) 휴양 단지에서 연주하고 있었다. 엡스타인은 스타가 비틀즈에 합류할 때까지 임시 드러머를 찾았는데, 조 브라운(Joe Brown) (가수)의 드러머 바비 그레이엄 등이 거론되었다.[32] 더 빅 쓰리의 조니 허친슨(Johnny Hutchinson)에게도 제안했지만, 그는 베스트와의 친분 때문에 거절했다.[32] 허친슨은 베스트가 해고된 당일 저녁 공연과 이후 두 번의 공연에서 스타가 합류할 때까지 비틀즈의 임시 드러머로 활동했다.[32]

1962년 8월 16일, 엡스타인은 베스트를 해고하고, 그 이유로 비틀즈 멤버들과 조지 마틴이 베스트의 드럼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5] 이로써 밴드의 라인업이 확정되었고, 엡스타인은 변호사에게 비틀즈를 위한 새로운 매니지먼트 계약 작성을 요청했다.[5]

4. 4. 비틀마니아와 세계적 성공

1961년 말, 비틀즈의 한 팬이 엡스타인에게 독일에서 제작된 비틀즈의 음반을 요구했으나, 엡스타인은 그 음반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비틀즈가 자신의 가게에서 멀지 않은 캐번 클럽에서 공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비틀즈의 공연에 감명을 받았다. 그는 비틀즈의 음반을 자신의 가게에서 팔기를 원했고, 비틀즈는 아직 매니저가 없으며 매니저를 찾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또한 비틀즈의 궁극적인 목표는 잉글랜드의 음반사와 계약을 맺는 것이었고, 엡스타인은 비틀즈의 매니저가 되었다.

엡스타인은 그의 수완을 발휘하여 비틀즈가 좀 더 나은 자리에서 음악을 연주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그는 잉글랜드 북부의 대형 음반 가게 사장이라는 위치를 이용하여, 여러 음반사와 계약을 시도했다. 1962년 1월 1일 데카 레코드 오디션을 보았지만, 데카 레코드 측은 엡스타인이 접촉한 여러 음반사와 같이 비틀즈를 거절했다.

데카 레코드는 엡스타인에게 오디션에서 녹음했던 비틀즈의 데모 테이프를 제공했고, 엡스타인은 이를 이용해서 홍보에 나섰지만 흥미를 가진 사람은 계속해서 나타나지 않았다. 엡스타인은 실제 녹음은 이 데모 테이프보다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 새로운 시험 음반을 만들기로 하였다. 시험 음반을 만들어준 사람은 EMI 그룹팔로폰 레코드에서 일하는 녹음 기술자 조지 마틴이 록 밴드를 찾고 있다는 말을 전해 주었으며, 엡스타인은 조지 마틴을 찾아가 시험 음반을 들려주었다. 마틴은 이 음반을 듣고 비틀즈에게 오디션 기회를 제공했다.

비틀즈는 EMI 오디션을 통과했으며, 팔로폰과 계약을 맺었다. 드러머 피트 베스트는 마틴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으며, 비틀즈 멤버는 그를 추방시키고 새 밴드를 찾고 있던 링고 스타로 교체했다.

1963년 동안, 비틀즈는 영국과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그 이듬해인 1964년에는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된다. 이러한 인기와 더불어, 엡스타인은 게리 앤 더 페이스메이커스와 같은 다른 밴드와 가수들과도 계약을 진행했다. 이 가수들도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엡스타인은 매니지먼트 회사인 NEMS 엔터프라이시스(음반 가게 이름을 따라 지었다)를 설립했으며, 후에 이 회사에는 비 지스, 지미 핸드릭스, 크림이 계약하기도 했다.

4. 5. 투어 중단과 활동 변화

비틀즈는 1966년 5월 1일 엠파이어 풀, 웸블리 파크에서 열린 NME 연례 인기 투표 수상자 콘서트에서 영국에서의 마지막 공식 라이브 공연을 펼쳤다. 콘서트는 텔레비전으로 방송되었지만, 엡스타인과 ABC TV가 조건에 합의하지 못해 비틀즈가 연주하는 동안 카메라가 꺼졌다. 그러나 그들이 상을 받는 모습은 촬영되었다.[1]

1963년에서 1965년 사이 비틀즈의 빡빡한 일정은 투어, 텔레비전 출연 및 영화 작업으로 엡스타인을 매우 바쁘게 만들었다. 비틀즈의 마지막 라이브 콘서트는 1966년 8월 29일 샌프란시스코의 캔들스틱 파크에서 열렸다. 이후 엡스타인의 매니지먼트 업무는 그들의 경력 변화를 반영하도록 바뀌었다. 그는 비틀즈에게 투어를 계속하도록 압력을 가했지만, 그들은 완강히 거절했다.[2]

5. 다른 아티스트 매니지먼트

1963년 비틀즈가 영국과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1964년에는 미국에서도 큰 인기를 얻으면서, 엡스타인은 게리 앤 더 페이스메이커스와 같은 다른 밴드 및 가수들과도 계약을 맺었다. 이 가수들 역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엡스타인은 자신의 매니지먼트 회사인 NEMS 엔터프라이시스(음반 가게 이름을 따서 지음)를 설립했으며, 이후 이 회사에는 비 지스, 지미 핸드릭스, 크림이 계약하기도 했다.[46][47]

1965년 런던에 정착한 엡스타인은 몬머스 스트리트에 사무실을 임대했으며, 이후 샤프츠베리 애비뉴에 있는 세빌 극장의 임대권을 매입했다. 그는 "외설적인" 내용이나 누드를 포함하여 검열관의 심기를 건드린 작품에서 아놀드 웨스커와 같은 작가들의 새로운 작품을 홍보했다. 1966년 엡스타인은 이 극장을 다양한 미국 공연이 펼쳐지는 음악 공연장으로 재창조했다. 1967년 2월 20일, 엡스타인은 전날 레논스타와 함께 참석한 척 베리 콘서트가 끝나기 직전에 안전 방화막을 내린 세빌 극장 매니저 마이클 불록을 해고했다. 두 명의 팬이 춤을 추기 위해 무대로 올라갔고, 방화막이 내려오면서 그들은 무대에서 밀려났다. 불록이 명령을 내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책임을 졌다.[48]

비틀즈의 성공 이후 엡스타인은 영국에서 여러 음악 관련 TV 프로그램에 출연 요청을 받았다. 그는 또한 미국 텔레비전 쇼 ''헐러벌루''의 정기적인 부분을 진행했으며, 영국에서 출연 장면을 촬영했다.[5][49]

1965년 1월 8일 엡스타인이 틴 뮤직 프로그램 ''헐러벌루''를 진행하고 있다

6. 사업적 문제와 실수

엡스타인은 비틀즈의 매니저로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지만, 몇 가지 사업적인 문제와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그는 비틀즈 멤버들에게 평생 주급 50파운드를 제안했지만, 멤버들은 자신들의 가치가 그보다 훨씬 높다고 생각하여 거절했다.[34] 1964년 리버풀에서 런던으로 이전한 NEMS는 25명의 직원을 두고 비틀즈의 콘서트를 기획하고, 다른 그룹을 오프닝 무대에 섭외하는 등 프로모터, 섭외 담당자, 매니저로서 많은 돈을 벌었다.[35] 엡스타인은 공연 당일 '숨겨진' 수수료를 받는 방식으로 세금 일부를 회피하기도 했다.[35]

아길 스트리트에 있는 기념 명판, 소호, 런던


엡스타인은 제리 앤 더 페이스메이커스, 빌리 J. 크레이머, 더 다코타스, 더 포어모스트, 더 서클, 실라 블랙, 토미 퀵클리, 사운즈 인코퍼레이티드 등 여러 아티스트들을 성공적으로 관리했다.[36] 1965년부터 1966년까지는 무디 블루스를 관리하기도 했다.[37] 그는 '패키지 투어'를 통해 소속 아티스트들을 영국 전역에 보냈는데, 각 공연자의 짧은 세트와 사회자 또는 코미디언이 번갈아 출연하는 방식이었다.[60] 엡스타인은 투어 그룹의 일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미국 왕복 항공료를 직접 지불하기도 했다.[38]

1966년 비틀즈는 필리핀에서 이멜다 마르코스의 초대를 거절하여 호텔에서 쫓겨나고 공항으로 이동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40] 엡스타인은 마닐라 공연 수익을 세무 당국에 넘겨주고 세금 채권을 작성해야 했다.[40]

엡스타인은 빅 루이스 기구를 NEMS에 추가하고, 로버트 스티그우드를 매니저로 데려왔다.[60] 그는 스티그우드에게 NEMS 경영권 판매를 제안했지만, 소속 아티스트들에게는 알리지 않았다.[60] 앨런 클라인의 관리하에 있는 롤링 스톤스처럼 더 상업적으로 유리한 조건에서 혜택을 받는 다른 아티스트들을 보며, 폴 매카트니는 NEMS 재정에 더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41] 엡스타인 사후, 클라이브 엡스타인이 NEMS 경영권을 인수했고, 스티그우드가 경영권 인수를 시도했지만 비틀즈 멤버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41]

존 레논은 엡스타인이 정직하지 않았다고 불평했지만, 다른 인터뷰에서는 그를 신뢰했다고 말했다.[41] 엡스타인은 자신을 "사업가로서 공정하다"고 평가하며, "아이디어 뒤에 있는 재정보다는 아이디어에 너무 신경을 쓰는 편"이라고 말했다.[42] 타임에 따르면 엡스타인은 비틀즈를 관리하면서 5년 동안 1400만달러를 벌었다.[43]

6. 1. 상품 판매권 관리 실패

비틀즈가 영국에서 전국적인 성공을 거두기 전, 엡스타인은 한 회사(사촌들이 운영하며 처음에는 팬클럽 회원들을 대상으로 함)[44]가 비틀즈 스웨터를 30실링(1.50파운드)에, 배지를 6 페니(2½p)에 생산하도록 허용했다. 그룹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스웨터 15,000벌과 배지 50,000개를 판매했다. 1963년 11월 비틀마니아 열풍이 영국을 휩쓸자 엡스타인은 플라스틱 기타, 드럼, 디스크 랙, 배지, 벨트 및 기타 상품에 비틀즈 이름을 사용하려는 참신한 상품 회사들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엡스타인은 비틀즈가 어떤 제품도 직접적으로 홍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NEMS 엔터프라이즈를 통해 그는 허가 없이 이미 많은 회사들이 제품을 판매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정한 가격으로 양질의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회사들에게 재량권을 부여했다.

비틀즈가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 상품 판매업자들은 비틀즈 시계, 펜, 라이터, 플라스틱 가발, 팔찌, 게임 등 많은 제품을 엡스타인에게 제안했지만, 그는 모두 거절했다. 이는 그가 이미 NEMS의 변호사인 데이비드 제이콥스에게 영국 내 상품 판매 권리의 90%를 니키 번에게 넘기도록 허용했기 때문이다. 이는 나중에 재앙적인 실수로 간주되었는데, 엡스타인, NEMS, 비틀즈에게 단 10%만 남았기 때문이다.[45] 하지만 데이비드 제이콥스는 1964년 8월 엡스타인의 지시에 따라 로열티 비율을 49%로 재협상했다.

그런 다음 번은 엡스타인의 영국 내 스트람삭트(Stramsact) 상품 판매를 인수했고, 미국에 셀타브(비틀즈를 거꾸로 철자)를 설립했다. 비틀즈가 플라자 호텔에 머무는 동안, 엡스타인은 프로모터, 소매업자, 텔레비전 해설자, 사기꾼들의 전화와 방문으로 더욱 시달렸다.

그룹이 미국에서 판매하는 음반 수를 염두에 두고 캐피톨 레코드는 유창한 요크셔 출신 여성 웬디 핸슨을 플라자 호텔로 보내 엡스타인의 비서 역할을 하며 그의 전화를 걸러내도록 했다. 핸슨은 나중에 런던의 엡스타인 사무실(NEMS 사무실과 별개)에서 엡스타인과 단독으로 일했다. 레논은 나중에 "사업 면에서 그는 [엡스타인] 우리를 셀타브 건으로 속였다"라고 말했다. 맥카트니는 수년 후 "그[엡스타인]는 아버지에게 사업 조언을 구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리버풀에서 가구점을 운영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6. 2. 노던 송스와 저작권 분쟁

1963년 비틀즈는 딕 제임스 뮤직(DJM)과 출판 계약을 맺었고, 딕 제임스는 노던 송스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제임스와 그의 재정 파트너이자 회계사인 찰스 실버는 각각 주식의 25%를 받았다. 레논매카트니는 각각 20%를 받았고, 엡스타인은 나머지 10%를 받았다.[4] 비틀즈의 PRS(공연권 협회) 수입이 급증하자 엡스타인은 회계사 제임스 트레버 이셔우드에게 레논과 매카트니가 져야 할 세금을 피할 방법을 고안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셔우드는 노던 송스의 주식 시장 상장을 제안했다. 그는 또한 엡스타인에게 상장 기간 동안 레논과 매카트니가 이셔우드 자신의 집 근처인 에셔로 이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레논, 해리슨, 스타는 동의했지만, 엡스타인과 매카트니는 런던에 머물렀다.[5]

7. 사생활

엡스타인은 가족, 친구, 사업 동료들에게 친절하고 배려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1962년 8월 23일, 존 레논신시아 파월과 결혼했을 때 엡스타인은 신랑 들러리를 섰고, 결혼 축하 점심 식사 비용을 지불했다. 신시아가 임신했을 때 엡스타인은 병원에 개인 병실을 마련해주었고, 레논 부부가 살 집이 필요했을 때는 리버풀 Falkner Street 36번지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를 내주었다. 또한 엡스타인은 줄리안의 대부가 되었다.

7. 1. 동성애와 사회적 억압

엡스타인의 성적 지향은 그가 사망한 지 몇 년 후에야 대중에게 알려졌지만, 그의 친구들과 사업 파트너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엡스타인은 영국 육군에 복무할 때 재단사에게 의뢰하여 장교 제복을 만들게 했다. 그는 런던의 술집을 돌아다닐 때 제복을 입었지만, 어느 날 밤 피카딜리의 육군 해군 클럽에서 장교 사칭 혐의로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엡스타인은 육군 군법 회의에 회부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육군 정신과 의사를 만나기로 동의했고, 정신과 의사는 엡스타인의 성적 지향성을 알게 되었다. 10개월 후 그는 "정신적, 감정적으로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의학적 사유로 육군에서 제대했다. 엡스타인은 나중에 자신의 첫 동성애 경험은 제대 후 리버풀로 돌아왔을 때였다고 진술했다.[16]

엡스타인은 RADA에서 1년 동안 연기를 공부했지만, 런던 스위스 코티지의 남자 공중 화장실 밖에서 "지속적인 추파" 혐의로 체포된 직후 중퇴했다. 코티징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행위는 특히 커밍아웃하지 못한 게이와 양성애 남성이 만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공 장소 중 하나였다.[50] 리버풀에도 몇 개의 게이 바가 있었지만, 엡스타인은 리버풀보다 동성애에 대한 태도가 더 관대했던 암스테르담, 토레몰리노스, 바르셀로나 또는 주말에 맨체스터와 같은 곳으로 휴가를 갔다.[50]

생전에 공개된 적은 없지만, 엡스타인은 동성애자였다. 존 레논에게 매력을 느껴 연애 감정을 품었지만, 개인적인 감정에 근거하여 행동한 흔적은 거의 없다. 1963년 4월, 두 사람은 4일간의 스페인 여행을 떠났다. 이 당시, 두 사람이 성관계를 가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레논은 이 소문을 항상 부인했으며, 1980년 플레이보이 잡지 인터뷰에서는 "결코 정점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꽤 강렬한 관계였다"고 답했다. 매카트니도 레논과 엡스타인의 관계는 플라토닉했다고 말했다. 영화 『우리들의 시간』(1991)은 이 스페인 여행을 소재로 한 픽션이다.

레논의 오랜 친구인 피트 쇼튼은 저서에서 엡스타인의 제안을 받은 레논이 어느 정도의 성적 요구를 받아들여 자위를 시켜줬다고 주장했다. 전기 작가인 헌터 데이비스도 레논이 "어떤 건지 시험 삼아 해보자"고 한 번의 행위에 동의했다고 회상한다. 작가 앨버트 골드먼은 저서에서 이러한 주장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며, 두 사람의 관계가 장기간 지속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을 아는 사람은 거의 모두 이 주장을 부인하고 있다. 엡스타인의 오랜 비서였던 테일러는 저서에서 "레논과의 관계는 없었고, 4명과는 모두 동등한 입장이 되도록 상당한 배려를 했다"고 기술했다. 엡스타인은 비틀즈의 매니지먼트에 관해서는 일관되게 공정했으며, 멤버들 사이에 긴장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했다.

레논은 그러한 소문 등에 민감했다. 1963년 6월 18일, 매카트니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당시 리버풀에서 DJ를 하던 밥 울러가 엡스타인과의 스페인 여행을 언급하자 레논은 격노하여 울러의 얼굴을 여러 번 구타했다. 다음 날 엡스타인이 사과했고, 울러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상황이 마무리되었다. 정보가 신문사에 전달되었을 때, 레논은 "술 취한 싸움이야, 진심이 아니야"라고 해명했다. 레논은 울러에게 전보를 보내 "어쨌든 잘못했다, 이상 그것뿐"이라고 형식적으로 사과했다. 1969년에도 레논은 고인이 된 엡스타인과의 관계를 계속 부인했기에, 이 사건은 인터뷰어에게 오랫동안 금기시되었다.

7. 2. 약물 의존

엡스타인은 매니지먼트 경력을 시작한 후, 당시 처방전 없이 구할 수 있었던 흥분제인 프렐루딘을 복용하기 시작했다.[53] 레논, 매카트니, 해리슨, 스타 역시 함부르크 시절부터 복용했다. 엡스타인은 잦은 콘서트 투어 동안 밤에 잠을 자기 위해 약물을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1964년, 피터 브라운은 엡스타인이 파티에서 자주 기침을 하는 것을 보고 약을 너무 많이 복용한다고 의심했는데, 아무도 모르게 입에 약을 넣는 방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매카트니는 런던의 늦은 밤 클럽에서 엡스타인을 자주 만났고, 엡스타인이 종종 이를 갈았으며(아마도 이갈이 때문일 것이다), 한 번은 그에게 "으으, 약"이라고 말하는 것을 기억했다. 엡스타인은 카브로말, 바르비투르산염 유사 진정제/수면제에도 의존하게 되었다.

엡스타인이 살다가 나중에 사망한 런던 채플 스트리트 24번지


1964년, 뉴욕에서 밥 딜런에게 대마초를 소개받은 후, 엡스타인은 매카트니에게 거울 앞에서 자신을 가리키며 "유대인!"이라고 반복해서 말하며 크게 웃는 모습이 목격되었는데, 매카트니는 이를 매우 재미있고 "매우 자유로운"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엡스타인은 나중에 1960년대 마약계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비틀즈의 앨범 ''Sgt. Pepper''가 녹음된 4개월 동안, 엡스타인은 휴가를 보내거나 Putney에 있는 프라이어리 클리닉에서 약물 사용을 억제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채플 스트리트 24번지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열린 ''Sgt. Pepper'' 발매 기념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프라이어리를 떠났지만, 파티 직후 프라이어리로 돌아갔다.[53]

엡스타인은 1967년 7월 24일 ''The Times''에 실린 광고에 자신의 이름을 추가했는데, 이 광고는 대마초 합법화, 소지 혐의로 투옥된 모든 수감자의 석방, 그리고 마리화나의 의학적 사용에 대한 연구를 촉구했다. 이 광고는 소마라는 단체에서 후원했으며, 비틀즈, 스코틀랜드 정신과 의사 R. D. Laing, 16명의 의사, 그리고 두 명의 국회의원을 포함한 65명이 서명했다.[54] 엡스타인은 광고에 대한 질문에 "내 생각에는 대마초 흡연이 음주보다 확실히 덜 해롭습니다. 저는 둘 다 중독되지 않았지만, 술에 매우 취해본 적도 있고, '하이'해본 적도 있습니다."라고 답했다.[60] 1967년 6월, 매카트니가 LSD 사용을 인정하자, 엡스타인은 언론에 그를 옹호하며 자신도 그 약물을 복용했다고 밝혔다.

7. 3. 도박

1965년 8월, 비틀즈와 엡스타인은 엘비스 프레슬리로스앤젤레스 자택을 방문했는데, 엘비스의 매니저인 톰 파커 대령이 룰렛 휠과 여러 팩의 카드들을 준비했다. 엡스타인은 도박을 매우 좋아하기로 알려져 있었기에, 즉시 게임을 하고 싶어 했다.[55] 폴 매카트니는 엡스타인이 가장 좋아했던 카지노인 ''커즌 하우스 클럽''[55] 등 런던의 도박 클럽을 자주 방문했고, 그곳에서 엡스타인과 자주 마주쳤다고 한다. 그는 엡스타인이 100GBP짜리 던힐 라이터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카드 게임 중에 잃는 것을 한 번 보았다. 엡스타인은 바카라나 슈 드 페르(프랑스에서 바카라가 처음 소개되었을 때의 원형)를 하면서 종종 수천 파운드를 잃었지만, 커즌 하우스에서 저녁 내내 머물면서 비싼 식사를 하고 고급 와인을 마셨다. 클럽은 엡스타인에게 청구서를 제시하지 않았는데, 그가 카지노에서 워낙 많은 돈을 잃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8. 사망

1967년 8월,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바르비투르산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58] 엡스타인은 평소 일과 개인사에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수면제, 진정제 등의 약물을 복용했고, 1967년 비틀즈가 매니저 계약을 연장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껴 약물 사용이 더욱 증가했다. 검시 결과 엡스타인의 사인은 오랜 기간 동안의 과다 약물 복용으로 인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자살로 판명되지는 않았다.[58]

''데일리 미러'' 헤드라인: "EPSTEIN (팝의 비틀 제작 왕자) 32세에 사망"


엡스타인은 1967년 8월 27일, 잠긴 침실에서 수면제인 카브리탈(바르비투르산염 펜토바르비탈과 브롬화물 카르브로말의 결합)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58] 그의 집사는 잠긴 침실 문을 통해 엡스타인을 깨울 수 없게 되자 엡스타인의 PA인 조앤 피터슨에게 전화를 걸면서 발견되었다. 엡스타인은 파자마를 입은 채로 두 번째 싱글 침대에 다양한 서신이 흩어져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61] 법정 심리에서 그의 죽음은 사고로 공식 판결되었으며, 그의 체내에 카브리탈과 알코올이 점차적으로 축적되어 발생했다.[61] 그는 잠을 자기 위해 6개의 카브리탈 알약을 복용했는데, 이는 그에게는 아마도 정상적이었지만 알코올과 결합하면 내성이 감소하는 것으로 밝혀졌다.[58]

비틀즈는 당시 북웨일스의 뱅고어에서 인도 구루 마하리쉬 마헤쉬 요기와 함께 수련회를 하고 있었다.[62] 엡스타인은 이전에 8월 은행 휴일 이후 뱅고어로 여행하기로 동의했었다.[62]

검시관 가빈 서스턴은 웨스트민스터 심리에서 엡스타인의 죽음은 카브리탈 과다 복용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하고 우발적인 죽음으로 판결했다. 병리학자 도널드 티어는 엡스타인이 카브리탈 형태로 브롬화물을 오랫동안 복용해 왔으며 엡스타인의 혈중 바르비투르산염 수치가 "낮은 치명 수준"이라고 진술했다.[63]

비틀즈는 엡스타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그의 가족에게 사생활을 허용하고 팬과 언론의 관심을 피하기 위해서였다.[28] 엡스타인은 리버풀 에인트리의 롱 레인 유대인 묘지 섹션 A 무덤 H12에 묻혔다.[65] 몇 주 후인 10월 17일, 비틀즈 네 명 모두는 뉴 런던 시나고그에서 엡스타인을 위한 추모 예배에 참석했다.[28]

비틀즈를 비롯한 여러 가수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많은 사람들은 당시 비틀즈의 구심점 역할이었던 그의 죽음을 비틀즈 해체의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

9. 유산과 평가

엡스타인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업무와 개인사에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약물에 의존하게 되었다. 1967년 비틀즈와의 매니저 계약이 만료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약물 사용이 더욱 증가했고, 결국 바르비투르산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 검시 결과는 장기간의 약물 복용에 의한 사망으로, 자살은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67][68]

많은 사람들은 비틀즈의 구심점이었던 그의 죽음을 비틀즈 해체의 원인 중 하나로 꼽는다. 존 레논은 1970년 ''롤링 스톤'' 인터뷰에서 엡스타인의 죽음이 비틀즈의 종말을 알리는 시작이었다고 언급하며, "그때 우리가 어려움에 처했음을 알았다 ... 나는 '이제 우리는 끝났어'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71] 폴 매카트니는 1997년 BBC 다큐멘터리 인터뷰에서 "만약 누군가가 제5의 비틀이었다면, 그건 브라이언이었다."라고 말했다.[70]

엡스타인은 로큰롤 명예의 전당의 "비(非) 연주자 부문"에 2014년에야 헌액되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앤드루 루그 올드햄은 공동 헌액에 반발하여 참석을 거부했다.[69] 마틴 루이스는 엡스타인의 명예의 전당 헌액을 청원하는 공식 웹사이트를 만들었다.[5]

신시아 레논은 2006년 인터뷰에서 "내 생각에 브라이언은 잊혀진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마치 그가 [비틀즈] 이야기에서 지워진 것 같아요. 나는 그들이 브라이언 없이는 어디에도 갈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16]

엡스타인이 비틀즈에게 미친 영향과 그의 복잡한 사생활은 계속해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2013년에는 그래픽 소설 ''The Fifth Beatle: The Brian Epstein Story''가 출간되었고, 영화와 텔레비전 시리즈 제작도 진행 중이다.[73][74]

2022년 8월 27일, 그의 사망 55주년을 기념하여 리버풀에 그의 동상이 공개되었다. 동상은 그의 가족이 운영했던 NEMS 음반 가게 옛터 근처에 세워졌다.[77]

리버풀 화이트채플에 있는 브라이언 엡스타인 동상

참조

[1] 웹사이트 Pronunciation by the Beatles https://www.youtube.[...] 2018-05-26
[2] 웹사이트 50 years after 'SGT. Pepper's,' how Jews helped fill a Beatle's lonely heart https://www.timesofi[...]
[3] 문서 Free BMD GRO marriage registration: March quarter 1900, district of Prestwich: EPSTEIN, Isaac, married HYMAN, Dinah: ref 8d 479
[4] 문서 1901 census (England)
[5] 웹사이트 Mr. Brian Epstein http://www.brianepst[...] Springtime! 2008-04-18
[6] 서적 The Rough Guide to The Beatles https://books.google[...] Rough Guides 2003-10-28
[7] 웹사이트 Frankly Speaking: Brian Epstein (time: 11.27) https://www.bbc.co.u[...] BBC 2011-07-02
[8] 웹사이트 Frankly Speaking: Brian Epstein (time: 10.12) https://www.bbc.co.u[...] BBC 2011-07-02
[9] 웹사이트 Frankly Speaking: Brian Epstein (time: 11.00) https://www.bbc.co.u[...] BBC 2011-07-02
[10] 웹사이트 Frankly Speaking: Brian Epstein (time: 10.43) https://www.bbc.co.u[...] BBC 2011-07-02
[11] 웹사이트 Frankly Speaking: Brian Epstein (time: 27.19) https://www.bbc.co.u[...] BBC 2011-07-02
[12] 웹사이트 Brian Epstein's Office Poster Collection {{!}} Buy Original Artwork of The Beatles Posters http://thebeatlespos[...] 2016-11-03
[13] 웹사이트 The Man Behind the Beatles https://www.momentma[...] 2019-06-13
[14] 웹사이트 Alistair Taylor – Hello Goodbye http://www.liddypool[...] Liddypool 2008-10-18
[15] 웹사이트 The Birth of Mersey Beat (p5) http://www.triumphpc[...] Bill Harry/Mersey Beat Ltd. 2009-06-12
[16] 뉴스 Nowhere Man https://www.washingt[...] 2008-04-19
[17] 문서 The Beatles Anthology
[18] 뉴스 Nowhere Man (p.3) https://www.washingt[...] 2011-05-26
[19] 웹사이트 Frankly Speaking: Brian Epstein (time: 06.45) https://www.bbc.co.u[...] BBC 2011-07-02
[20] 문서 The Beatles et al. (2000)
[21] 웹사이트 Actual Contract http://www.beatlemon[...] Beatle Money 2008-04-18
[22] 서적 Rockin' in Time: a social history of rock-and-roll Pearson
[23] 웹사이트 Frankly Speaking: Brian Epstein (time: 04.58) https://www.bbc.co.u[...] BBC 2011-07-02
[24] 서적 The Beatles Anthology Chronicle Books
[25] 서적 With the Beatles John Blake Publishing
[26] 서적 Tune in: The Beatles: All These Years Crown/Archetype
[27] 웹사이트 Frankly Speaking: Brian Epstein (time: 05.32) https://www.bbc.co.u[...] BBC 2011-07-02
[28] 뉴스 Nowhere Man (p4) https://www.washingt[...] 2011-05-26
[29] 문서 The Beatles et al. (2000)
[30] 문서 The Beatles et al. (2000)
[31] 문서 Hill
[32] 웹사이트 Bill Harry on Pete Best's Sacking http://www.triumphpc[...] Triumphpc.com 2011-10-22
[33] 웹사이트 The Beatles Bible – NME Poll-Winners' show: The Beatles' final UK concert http://www.beatlesbi[...] 2016-08-16
[34] 뉴스 Epstein 'wanted Beatles fortune' http://news.bbc.co.u[...] 2011-05-26
[35] 웹사이트 Frankly Speaking: Brian Epstein (time: 00.47) https://www.bbc.co.u[...] BBC 2011-07-02
[36] 웹사이트 Frankly Speaking: Brian Epstein (time: 00.30) https://www.bbc.co.u[...] BBC 2011-07-02
[37] 간행물 The Moody Blues: The Magnificent Moodies 50th Anniversary Edition liner notes page 19
[38] 웹사이트 Frankly Speaking: Brian Epstein (time: 01.48) https://www.bbc.co.u[...] BBC 2011-07-02
[39] 웹사이트 Frankly Speaking: Brian Epstein (time: 02.29) https://www.bbc.co.u[...] BBC 2011-07-02
[40] 웹사이트 This Day in Music: 4 July http://www.gibson.co[...] This Day in Music 2011-07-04
[41] 뉴스 Epstein death query 1967-08-29
[42] 웹사이트 Frankly Speaking: Brian Epstein (time: 28.16) https://www.bbc.co.u[...] BBC 2011-07-02
[43] 간행물 Brian Epstein - The Promoter https://www.worldrad[...] 2024-03-12
[44] 문서 Mojo Magazine (2002). ''Special Limited Edition No. M-04951 '', p. 100
[45] 뉴스 Get Back and other setbacks https://www.theguard[...] 2011-05-26
[46] 웹사이트 Saville Theatre History http://www.arthurllo[...] Arthur Lloyd 2011-05-26
[47] 뉴스 1967: Beatles' manager Epstein dies http://news.bbc.co.u[...] BBC 1967-08-27
[48] 뉴스 Epstein sacks for ringing down the curtain on pop singer 1967-02-21
[49] 뉴스 Retro: What's All the Hullabaloo? https://www.latimes.[...] 2022-02-03
[50] 뉴스 Nowhere Man (p2) https://www.washingt[...] 2011-05-26
[51] 웹사이트 Frankly Speaking: Brian Epstein (time: 04.07) https://www.bbc.co.u[...] BBC 2011-07-02
[52] 서적 Beatlesongs Simon & Schuster Inc. 1989
[53] 웹사이트 Location of Epstein's Chapel Street house http://www.multimap.[...] multimap.com 2011-05-27
[54] 웹사이트 Paul McCartney's arrest in Japan https://web.archive.[...] 2011-05-27
[55] 뉴스 You Can Walk Across It on the Grass http://www.time.com/[...] Time Inc 2011-05-27
[56] 웹사이트 Peter Brown https://www.beatlesb[...] 2012-11-26
[57] 웹사이트 I Should Have Known Better: A Life in Pop Management--The Beatles, Brian Epstein and Elton John https://www.amazon.c[...] 2024-06-28
[58] 서적 Physicians' Desk Reference. Medical Economics Co 1979
[59] 웹사이트 The Beatles, Brian Epstein and me https://www.abc.net.[...] 2021-11-12
[60] 뉴스 Brian Epstein Dies at His Home 1967-08-28
[61] 뉴스 Brian Epstein died from 'incautious overdose' of drug, says Coroner 1967-09-09
[62] 뉴스 On This Day: 1967: Beatles' manager Epstein dies http://news.bbc.co.u[...] 1967-08-27
[63] 뉴스 Epstein Death Accidental 1967-09-09
[64] 문서 Ellis, Geoffrey, I Should Have Known Better; A Life in Pop Management, p. 133
[65] 문서 Wilson, Scott. ''Resting Places: The Burial Sites of More Than 14,000 Famous Persons'', 3d ed.: 2 (Kindle Locations 14267-14268). McFarland & Company, Inc., Publishers. Kindle Edition.
[66] 웹사이트 Bee Gees – Idea Liner Notes http://aln2.albumlin[...] Aln2.albumlinernotes.com 2013-11-01
[67] 웹사이트 MBE Chronicle http://www.brianepst[...] Springtime! 2011-05-27
[68] 문서 Ellis, Geoffrey, I Should Have Known Better; A Life in Pop Management, p. 55–56
[69] 뉴스 Rolling Stones' ex-manager explains Rock Hall induction boycott https://www.latimes.[...] 2020-03-12
[70] 웹사이트 McCartney's comments about the fifth Beatle http://www.brianepst[...] brianepstein.com 2011-05-27
[71] DVD "The Beatles Anthology" 2003
[72] 웹사이트 The Beatles' first contract sells for £240,000 http://www.liverpool[...] 2008-09-05
[73] 뉴스 IAR Exclusive Interview: Producer Vivek Tiwary talks 'The Fifth Beatle' http://www.iamrogue.[...] 2011-07-08
[74] 웹사이트 'The Fifth Beatle' Graphic Novel To Be Developed as Event TV Series By Sonar https://deadline.com[...] 2016-03-07
[75] 뉴스 We Can Work It Out: Beatles Manager Movie ‘Midas Man’ Gets Third Director To Finish Up Turbulent Production https://deadline.com[...]
[76] 웹사이트 Frankly Speaking: Brian Epstein (time: 08.20) https://www.bbc.co.u[...] BBC 1964-03-23
[77] 웹사이트 The lost world of Liverpool's record shops: how a huge part of our city's musical history faded from view https://www.liverpoo[...] 2019-05-25
[78] 뉴스 Brian Epstein: Statue of Beatles manager unveiled in Liverpool https://www.bbc.co.u[...] 2022-08-28
[79] 문서 エプスタイン(1972年)
[80] 문서 コールマン(1992年)
[81] 문서 エプスタイン(1972年)
[82] 문서 コールマン(1992年)
[83] 기타 電報全文は「レノンレターズ」(ハンター・デイヴィス著)にて明らかになった
[84] 웹인용 Mr. Brian Epstein http://www.brianepst[...] Springtime! 2011-05-16
[85] 웹인용 Mr. Brian Epstein http://www.brianepst[...] Springtime! 2011-05-26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