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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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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패강진은 신라가 평양 일대를 다스리기 위해 설치한 행정 기관이다. 초기에는 개척지를 관리하는 군사 기지였으나, 평양 일대가 안정되면서 행정 기구로 변화했다. 패강진은 한산주와 별개로 취급되었으며, 평양 일대 개척을 통해 신라의 영토를 확장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신라 말기에는 쇠퇴하여 평양과 함께 황폐화되었고, 이후 고려와 조선 시대에 평양의 위상과 역할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 종래의 위치 및 성격에 대한 학설

종래에는 패강진의 위치를 지금의 황해북도 평산군이나 봉산군 일대로 비정해왔다. 평산 위치설은 특별한 근거가 없으며, 패강진 설치 당시 예성강 일대에는 이미 행정 체제가 확립되어 있었고 국방상의 위협도 없었기에 군진을 설치할 필요성이 낮았다는 문제점이 있다.[1] 봉산 위치설은 봉산이 평산보다 북쪽이고 패강에 더 가깝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되었다. 일부에서는 평산에서 봉산으로 위치를 옮겼다는 절충안도 제시되었다.[1]

패강진의 성격에 대해서는 발해의 남침을 막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이자 황해도 일대의 군정적 기관이라는 것이 통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통설은 패강진 설치 시점에 이미 황해도 전역에 행정 체제가 완비되어 있었으므로 군사적 통치 기관이 불필요했다는 점, 그리고 당시 신라와 발해는 실제로 국경을 접하고 있지 않았고, 양국 간에 전쟁이나 분쟁 기록도 없었다는 점에서 비판받고 있다.[1]

발해가 신라를 남침할 가능성이 있었다는 통념은 당시 정황과 고고학적 조사 결과에 의해 부정된다. 발해의 영토는 함경도 대부분과 의주 등 압록강 연안에 한정되어 있었고, 평안도 일대는 무주지였다.[1] 따라서 발해의 남침 위협은 근거가 없으며, 황해도 일대의 축성 기사도 행정적 차원이었을 뿐 국방상의 목적은 아니었다. 또한, 발해는 주적을 당나라로, 신라는 일본으로 삼고 있었고, 양국 간에는 동해안을 통해 활발한 외교 및 통상 교류가 있었다. 따라서 패강진이 발해의 남침 위협 때문에 설치되었다는 통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2. 1. 평산 위치설

종래에 지금의 황해북도 평산군에 비정되어 왔는데 딱히 근거는 없다. 무엇보다 패강진이 설치된 시기에 예성강 일대에는 군과 현 등의 행정 체제가 확립되어 있었고 별다른 국방상의 위협 요소도 없었으므로, 그런 곳에 또다시 군진을 두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나중에 평산에 진이 설치되기는 했지만 그건 패강진과 별개인 대곡진(大谷鎭)이다.[1]

2. 2. 봉산 위치설

봉산평산보다 훨씬 북쪽이고 패강에서도 가깝기 때문에, 봉산일대로 비정하는 설이 나왔다. 이 설은 《삼국사기》 지리지 한산주조에서 누락된 서북면 일대의 지역단위로 간주하고자 하는 견해에서 나왔다. 일각에서는 "처음에 평산에 있다가 북쪽으로 올라가 봉산으로 옮긴 것이다"라고 양 설을 절충하는 견해도 있다.[1]

2. 3. 종래의 패강진의 성격에 대한 통설

종래의 학설들은 패강진을 발해의 남침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로 간주하였다. 황해도 일대에 대한 군정적(軍政的) 성격의 기관으로 파악한 것이다.

2. 4. 반론

그러나 위치에 대한 반론으로 패강진이 설치된 시점에 이미 황해도 전역에 대한 군, 현 등의 행정 체제가 완비되었으므로 굳이 해당 지역에 대한 군사적인 통치 기관을 설치할 필요가 있느냐는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발해의 남침 위협에 대한 대응이라는 것도 발해와 신라가 완전히 접경을 이루고 있고 두 나라가 늘 적대적이어서 한쪽이 다른 한쪽을, 특히 국력이 강력한 발해가 상대적으로 약소국인 신라를 남침할 가능성이 있었다는 통념하에 이루어진 설이다. 그러나 이 또한 당시의 실제 정황이나 최근 북한 쪽의 고고학적인 조사에 의하면 부정되고 있는데 실제 발해가 한반도에 진출하기 시작한 연대는 760년에 수도를 상경 용천부로 천도하는 시기와 맞물려서 함경남도 북청 일대에 남경 남해부와 산하 3주(州)를 설치하면서부터였고 그나마 한반도 내에서 발해의 영토는 함경도 대부분과 함께 의주(義州) 등의 압록강 연안에 한정되어 있었으므로[1] 신라와 발해 사이에는 함경도를 제외하고 실제로 국경을 접한 곳이 없었고 평안도 일대는 무주지(無主地)였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일단 국경상으로 발해의 남침 가능성은 없었다. 실제 기록으로서도 신라와 발해는 전쟁은 커녕 가벼운 국경 분쟁조차 일으킨 기사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발해의 남침 위협에 대한 근거로 황해도 일대의 군현들에 대한 축성(築城) 기사를 들고 있지만 이는 행정 체제를 정비하고 치소를 설치하거나 마을 및 도시를 건설하기 위한 행정적 차원이지, 국방상의 차원은 아니다. 발해의 등주 공격 후 당나라의 요청에 의한 북벌도 신라로서는 발해와는 무관한 것으로 당시 두 나라는 국경을 접하고 있지도 않았다. 발해는 주적(主敵)을 당나라로, 신라는 일본으로 삼고 있었다. 흔히 압도적으로 강한 발해가 신라를 압박했다는 것도 발해가 신라의 10배에 가까운 영토를 보유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편견으로 실제로는 오히려 신라가 국력에서 발해에 다소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발해도 이를 경계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발해로서는 주적인 당나라도 사실 버거운 판에 남쪽에 또 다른 적을 만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서로 적대적이어서 교류가 없었다는 것과는 달리 사실은 동해안 축으로 양국 간에 외교, 통상(通商)적인 교류는 활발했었던 것이다.

이런 등의 이유로 패강진이 발해의 남침 위협 때문에 설치되었다는 통설은 낭설임을 알 수 있다.

3. 평양 위치설 - 패강진에 대한 새로운 이론

삼국사기 지리지 한주조에 따르면 지금의 황해도 지역은 전역에 군현이 설치되어 한산주에 소속되어 있었다. 삼국사기 등의 기록을 보면 한산주와 패강진은 별개의 행정구역으로 간주된 듯한 인상을 준다. 김헌창의 난 관련 기록에서 한산주와 패강을 별도로 언급하고, 인물 출신도 별도로 언급하는 등 패강진은 준주(準州)처럼 취급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지리지는 경덕왕 때를 기준으로 작성되어 패강진 설치 이후의 영역은 나타나지 않는다. 패강진의 영역은 신라의 공식 영토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며, 한산주 밖, 즉 발해압록강 연안만 영유하던 평안도 일대의 무주지에서 찾아야 한다.

신라는 황해도 일대를 완전히 영토화한 후, 옛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 일대로 진출을 추진했다. 안승의 귀순과 고구려 유민들의 신라 이주, 나당 전쟁 당시 고구려 부흥운동 지원 등으로 신라는 고구려에 대한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또한 신라는 고구려인들에게 여러 혜택을 제공하여 평양 일대 고구려인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2]

735년 성덕왕 34년에 당나라가 패강 일대의 신라 영유권을 인정하면서 신라는 대동강 이북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신라는 평양 지역을 정찰하고 관리했으며,[3] 혜공왕 때부터 본격적으로 영토화를 시작했다.[4] 선덕왕 때 평양으로의 이주를 독려했고, 새로 개척된 평양 일대를 다스리기 위해 설치한 기관이 바로 '''패강진'''이다.

3. 1. 평양 위치설의 근거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한산주와 패강진은 별개의 행정구역으로 간주된 듯하다. 김헌창의 난 때 김헌창 군에 항복한 주와 항전 중인 주를 구분해 열거하면서 한산주와 별도로 패강을 언급하고 있다. 인물 출신에 대해서도 한산과 패강을 별도로 언급하고 있다. 즉 패강진은 거의 준주(準州)로 취급된 모양이다.[2]

삼국사기 지리지는 패강진 설치 이전인 경덕왕 때를 기준으로 명시되어 있어 그 이후의 패강진이나 그 영역은 나오지 않는다. 아직 패강진 영역은 신라의 공식 영토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패강진 영역은 한산주 밖의 지역에서 찾아야 한다. 평안도 일대는 무주지에 속했다. 발해는 지금의 의주를 중심으로 압록강 연안만을 영유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신라는 경덕왕 때까지 14개 군현을 설치하는 것으로 대한 행정체제를 수립하고 개척하여 황해도 일대를 완전히 영토화하였다. 이후 신라는 거의 주인이 없는 평안도 일대, 특히 옛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 일대로 진출을 추진했다.

신라로서는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 일대를 영유해야 할 당위성이 있었다. 고구려 마지막 왕이었던 안승이 신라로 귀순했고 그 후에 고구려 유민 대다수가 신라로 건너왔으므로 고구려에 대한 정통성도 자신들에게 있다고 본 것이었다. 고구려 패망 이후 평양과 그 일대에는 몇몇 말갈족과 고구려 유민들이 살고 있었고 나당 전쟁 때 신라가 고구려 부흥운동을 후원한 예가 있으므로 평양 일대 고구려인들로서는 신라가 차라리 반가웠을 것이었다. 게다가 신라는 자국 지배하에 넘어온 고구려인들을 공민화하고 여러 혜택을 주는 조치들을 취했으므로[2] 더욱 그러했다.

패강 유역은 당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명목상 영토로 삼기는 했지만 실제 행정권을 주장하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735년 성덕왕 34년에 패강 일대의 신라 영유권을 당나라가 인정하는 것으로 당나라가 대동방 진출 정책을 사실상 폐기했으므로 신라는 대동강 이북 지역으로 진출을 고려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직후 신라는 몇몇 관리들을 보내 평양지역을 정찰하도록 하여[3] 이후 지속적으로 평양 일대를 관찰하며 관리했고 혜공왕 때 개척단을 파견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영토화를 개시했다.[4] 평양 일대로의 대량 이주는 혜공왕 다음의 선덕왕 3년에 선덕왕이 한산주 일대를 돌며 평양으로 이주를 독려하는 것으로 계속 이어졌고 이렇게 새로 개척된 평양 일대를 다스리기 위한 기관을 설치한 것이 바로 '''패강진'''이었다.

4. 패강진전

패강진전(浿江鎭典)은 평양 일대를 통치하는 패강진을 관리하는 행정 관청이다. 패강진은 초기에 새로운 개척지를 관리하기 위한 전초 군사 기지로 시작되었으나, 평양 일대가 점차 안정되면서 행정 기구로 변화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북쪽 변경 지역을 관할하는 특수 행정 구역이었기 때문에 군사적인 성격도 유지했다.[5]

4. 1. 패강진전의 조직과 기능

패강진전은 평양 일대를 통치하는 패강진을 관리하는 행정 관청이었다. 초기에 새로운 개척지를 관리하기 위한 전초 군사 기지로 시작된 패강진은 평양 일대가 점차 안정화되어감에 따라 행정 기구로 변화되어갔다. 그럼에도 패강진이 신라의 북변 지역을 관할하는 특수 행정 구역인 관계로 군진으로서의 성격도 같이 갖고 있었다.[5] 패강진전의 수령은 각 주(州)의 총독인 도독과 같은 급으로 도호(都護)라고도 불리는 두상대감(頭上大監, 6~9관등) 1명과 두상제감(頭上弟監, 10~13관등) 1명씩이 있는데, 각 민정과 군정을 맡아 주관하되 두상대감이 총괄하는 형태였다. 김암의 경우에서 보듯 두상대감은 패강진 일대의 농업 진흥의 임무도 같이 맡고 있었다. 평양 일대는 평야 지대이기 때문에 그 일대의 개간은 자영 농민으로 정착한 주민들의 생활 안정과 함께 새로운 세금 수취의 원천이 되어서 신라 조정의 재정을 든든하게 해 줬고 이는 신라 왕권의 강화에 도움이 되었다. 민정을 주관하는 두상대감 밑에는 대감(大監, 6~13관등) 7명과 보감(步監, 8~12관등) 1명이 두상대감을 보좌했다. 7명의 대감은 패강진 산하 7개 행정 단위의 지방관으로 파견되었다.

군사를 주관하는 두상제감은 패강진 내의 치안 유지와 개척 사업, 인근 말갈족들에 대한 회유와 단속을 맡고 있었다. 두상제감의 밑으로는 제감(弟監, 11관등) 1명과 소감(小監, 12~17관등) 6명이 보좌했다.

5. 패강진의 관할 범위와 신라의 북방 한계선

패강진의 관할 범위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후대의 기록을 통해 추정할 수밖에 없다. 패강진은 신라의 북방 한계선을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는데, 일반적으로 대동강에서 원산만까지로 알려져 있었다.[6]

하지만, 후삼국 시대 궁예에게 예성강 유역의 패서 지역과 평양성주 검용(黔用)이 투항하면서 13개 진이 설치되었다는 기록과, 정약용아방강역고에서 13개 진의 위치를 패수와 살수 사이로 비정한 것을 통해, 패강진의 영역이 더 넓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장도빈안주읍지(安州邑誌)를 근거로 평안남도 안주 일대까지 신라 영역이었다고 보았다.

5. 1. 패강진의 영역 추정

패강진의 영역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후대의 기록으로 대략적인 추정이 가능하다. 패강진의 행정 범위는 지금까지 대동강에서 원산만으로 알려졌던[6] 신라의 최대 북방 한계선의 기준점이 된다. 후삼국 시대에 예성강 연안의 패서 일대가 궁예에게 투항하자 평양성주 검용(黔用)이 같이 투항했는데, 그 지역까지 합쳐 13개 진을 설치했다고 한다. 정약용아방강역고에서 이 13개 진의 위치를 패수와 살수 사이의 지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단국대학교 초대 학장인 장도빈은 "신라사연구의 개요"에서 안주읍지(安州邑誌)를 근거로 평안남도 안주 일대까지가 신라의 영역이라고 주장했다.

6. 패강진의 이후

신라 말 패강진은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사실상 방치되었다. 비록 검용을 중심으로 자치적인 운영이 이루어졌으나, 강력한 지방 세력이 부재하여 잦은 외침에 시달렸고, 중심지인 평양은 황폐화되었다.[1]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하자 검용은 투항하였고, 고려 건국 후 평양은 서경으로 중요시되어 여러 차례 천도 시도가 있었다.[1] 조선 시대에는 평안도의 중심 도시 중 하나였으며, 현재의 평양직할시로 이어졌다.[1]

6. 1. 신라 말 패강진의 쇠퇴

신라 말기가 되자 신라의 행정 체제가 무너지면서 후진 변경 지역인 패강진은 방치되었다. 신라 장군 검용을 중심으로 독자적으로 운영되고는 있지만, 신라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강력한 호족 세력이 형성되지 못해 인근 말갈족들의 침입을 허용하였고, 패강진과 그 중심인 평양은 황폐화되었다.[1] 궁예의 후고구려가 패서 일대를 중심으로 나라를 세우자 검용은 여기에 바로 투항했고, 이에 궁예는 평양을 포함해 13개 진을 설치했다.[1] 고려가 들어섰을 때 평양은 중요시되어 서경(西京)으로 격상되었고, 고려 시대에 세 번에 걸쳐 서경으로의 천도가 시도되었다.[1] 조선 시대에 안주와 함께 평안도의 중심 도시가 되어 지금의 평양직할시가 되었다.[1]

6. 2. 고려 건국 이후

신라 말기가 되자 신라의 행정 체제가 무너지면서 후진 변경 지역인 패강진은 방치되었다. 신라 장군 검용을 중심으로 독자적으로 운영되고는 있지만, 신라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강력한 호족 세력이 형성되지 못해 인근 말갈족들의 침입을 허용하고 말았고 패강진과 그 중심인 평양은 황폐화되고 말았다. 궁예의 후고구려가 패서 일대를 중심으로 나라를 세우자 검용은 여기에 바로 투항했고, 이에 궁예는 평양을 포함해 13개 진을 설치했다. 고려가 들어섰을 때 평양은 중요시되어 서경(西京)으로 격상되었고, 고려 시대에 세 번에 걸쳐 서경으로의 천도가 시도되었다. 조선 시대에 안주와 함께 평안도의 중심 도시가 되어 지금의 평양직할시가 되었다.

참조

[1] 서적 아방강역고
[2] 서적 삼국사기
[3] 서적 삼국사기
[4] 서적 삼국사기
[5] 문서 당초 군사기지였던 진의 행정체제 변화
[6] 문서 삼국사기 지리지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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