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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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니언은 1858년 아일랜드에서 결성된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IRB)을 지칭하며, 무장 혁명을 통해 아일랜드 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운동이다. 제임스 스티븐스, 존 오마호니 등이 주요 인물이며, 미국, 캐나다, 영국 등지에서 활동했다. 1867년 페니언 봉기가 실패한 후, 암살 및 폭탄 테러를 감행하며 영국 지배에 저항했다. 현대에는 북아일랜드에서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를 비하하는 용어로 사용되거나, 스코틀랜드 축구에서 셀틱 FC 서포터를 지칭하는 종교적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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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니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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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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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비밀 정치 조직 |
목표 | 아일랜드 독립 |
활동 기간 | 1858년 ~ 1916년 |
창립자 | 존 오마호니 제임스 스티븐스 |
주요 인물 | 존 오마호니 제임스 스티븐스 토머스 켈리 제레미아 오도노반 로사 찰스 키클햄 존 데보이 패트릭 포드 토머스 J. 클라크 |
관련 조직 | 피니언 형제단 (미국)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 (IRB) |
명칭 | |
영어 명칭 | Fenians |
아일랜드어 명칭 | Fíníní |
발음 (영어) | IPA: /ˈfiːniən/ |
관련 용어 | 페니언주의 |
역사 | |
창립 | 1858년 |
주요 사건 | 1867년 페니언 봉기 1866년 ~ 1871년 페니언 습격 |
해체 | 1916년 |
사상 | |
이념 | 아일랜드 공화주의 아일랜드 독립 민족주의 |
영향 | |
영향 | 아일랜드 독립 전쟁 아일랜드 자유국 설립 |
기타 | |
후계 단체 | 아일랜드 공화국군 (IRA) |
2. 역사
'''페니언주의'''(Fíníneachasga)는 오마호니에 따르면 두 가지 핵심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아일랜드가 독립할 자연권을 가진다는 것이고, 둘째는 이 권리가 오직 무장 혁명을 통해서만 쟁취될 수 있다는 것이다.[3][38] 이 명칭은 아일랜드 신화에 등장하는 핀 막 쿨과 관련된 전설적인 전사 집단인 피아나에서 유래했으며, 이들의 이야기는 페니언 주기로 알려져 있다.[4]
그러나 1860년대 영국의 정치 기득권은 '페니언주의'라는 용어를 본래 의미와 다르게 사용하기도 했다. 이들은 아일랜드 민족주의적 감정을 표현하거나 개신교 우위에 도전하는 모든 형태의 움직임, 심지어 소작농의 권리를 옹호하는 이들까지 '페니언'으로 지칭하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때로는 독립 공화국 수립이나 무력 사용을 명시적으로 주장하지 않은 소작권 연맹, 아일랜드 국민 토지 연맹, 아일랜드 의회당과 같은 조직에게까지 이 용어를 부정확하게 적용하기도 했다.[5] 당시 영국의 지배 계층은 페니언주의를 노동자 계급이나 아일랜드 민족주의 지지자들의 활동을 노동조합주의처럼 기존 사회 질서를 위협하고 문명을 전복시킬 수 있는 위험한 사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39]
2. 1. 아일랜드

1848년 반란에 참여했던 제임스 스티븐스는 반란 실패 후 파리로 건너가 활동했다. 그는 미국에 있는 존 오마호니를 비롯하여 국내외 다른 급진적 민족주의자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독립운동 조직을 구상했다.[38] 스티븐스는 스키버린에서 예레미야 오도노반(훗날 오도노반 로사로 알려짐) 등이 주축이 된 '피닉스 국가 문학 협회'와도 연계했다.
1858년 3월 17일, 스티븐스는 토마스 클라크 루비, 존 오리어리, 찰스 키컴과 함께 더블린 롬바드 스트리트에서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IRB)을 창설했다. IRB는 비밀결사 형태로 조직되어 무장 봉기를 통한 아일랜드 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삼았다. 존 오마호니에 따르면, 페니언주의는 아일랜드가 독립할 자연권을 가지며, 이 권리는 오직 무장 혁명을 통해서만 쟁취할 수 있다는 두 가지 원칙을 핵심으로 삼았다.[3][38] 이 명칭은 아일랜드 신화 속 핀 막 쿨과 관련된 전설적인 전사 집단인 피아나에서 유래했다.[4]
그러나 1860년대 영국 정치 기득권은 '페니언주의'라는 용어를 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 전반을 부정적으로 지칭하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이들은 아일랜드 독립 공화국 수립이나 무력 사용을 명시적으로 주장하지 않은 소작권 연맹, 아일랜드 국민 토지 연맹, 아일랜드 의회당 등 관련 없는 조직들에게도 이 용어를 부정확하게 적용하며 경계심을 드러냈다.[5][39]
1867년 페니언 봉기가 일어났으나, 조직이 미비했고 대중적 지지도 거의 얻지 못해 실패로 돌아갔다. 봉기를 지휘하기 위해 코크에 상륙하려던 아일랜드계 미국인 장교 대부분은 체포되었고, 전국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봉기는 경찰, 영국 육군, 지역 민병대에 의해 쉽게 진압되었다. 봉기 이후 페니언 암살단이 코크와 더블린에서 활동했으며, 1867년 10월에는 근무 중이던 더블린 수도 경찰 소속 경찰관 두 명을 사살하는 사건도 발생했다.[6]
1882년에는 IRB의 한 분파인 아일랜드 국민 불굴단이 피닉스 공원에서 영국 아일랜드 수석 비서관 프레데릭 캐번디시 경과 상임 차관 토마스 헨리 버크를 암살하는 피닉스 공원 살인 사건을 일으켰다.
2. 2. 미국
1848년 청년 아일랜드당 봉기에 참여했던 존 오마호니와 마이클 도히니는 미국으로 건너가 페니언 형제단을 설립했다.[7] 이는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IRB)의 미국 지부였다. 초기에 오마호니는 미국 내 활동을 통해 아일랜드의 제임스 스티븐스와 IRB에 자금을 지원했다.[7] 페니언 형제단은 토착주의자들의 의심 속에서도 빠르게 독립적인 조직으로 자리 잡았으며,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의 무장 반란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7]1865년, 오마호니의 지도력에 대한 도전이 발생하며 운동은 분열되었다. 한 파벌은 뉴욕의 부유한 상인이자 민주당과 더 밀접하게 연계된 윌리엄 B. 로버츠가 이끌었다. 로버츠 파는 아일랜드 해방을 위해 캐나다를 침공하여 인질로 삼으려는 페니언 습격 계획을 후원했다.[8]
1867년에는 새롭게 망명한 IRB 단원 데이비드 벨과 그의 주간지 ''아이리쉬 리퍼블릭''이 오마호니에게 또 다른 도전을 제기했다. 벨은 로버츠와 달리 공화당과 연합했으며, 흑인 참정권과 재건 시대 정책을 지지하며 미국 아일랜드인들의 정신을 "정화"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우리 국민은 편견의 비늘을 벗어 던지고 모든 사람이 '생명, 자유,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선언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9]
존 데보이의 기록에 따르면, 1866년 동안 여러 파벌을 재결합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고, 그 결과 제임스 스티븐스를 통합 조직의 회장으로 선출했다.[10] 스티븐스는 전년도 더블린에서 IRB 지도부 체포를 피했으며, "아일랜드 공화국의 깃발이 1867년 새해 첫날 전에 아일랜드 바람에 펄럭일 것"이라고 약속했다.[10] 1866년 말, IRB 망명자들과 아일랜드에 있었던 많은 미국 장교들이 뉴욕에서 스티븐스 주재 하에 회의를 열고 1867년 초 봉기를 결정했다.[10] 수천 정의 소총이 이후 아일랜드로 보내졌지만, 봉기가 시작되기에는 너무 늦게 도착하여 실제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고, 결국 봉기는 실패로 끝났다.[10] 페니언 습격 이후에는 클랜 나 게일이 주요 조직으로 부상했다.
2. 3. 캐나다
캐나다에서 '페니언'이라는 용어는 1860년대 아일랜드 급진주의자 집단, 특히 페니언 형제단의 미국 지부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들은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뉴브런즈윅 (예: 캄포벨로 섬)과 캐나다 식민지 (현재의 온타리오 남부 및 퀘벡주 미시스코이 군[40])를 대상으로 여러 차례 침략을 시도했다. 이러한 페니언 습격(Fenian Raids)은 1866년과 1870년 등 캐나다가 캐나다 연방으로 결성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페니언단의 궁극적인 목표는 캐나다를 인질로 삼아 영국이 아일랜드의 독립을 인정하도록 압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침략 시도로 인해, 캐나다 내에서 페니언을 지지하거나 협력하는 움직임은 아일랜드인들 사이에서도 매우 드물었다.몬트리올에서 페니언 운동을 시작했던 프랜시스 버나드 맥네미(Francis Bernard McNamee)의 사례는 당시의 복잡한 상황을 보여준다. 그는 공개적으로 영국 여왕에 대한 충성을 선언하고 페니언에 대항하여 캐나다를 방어하기 위한 아일랜드 민병대 창설을 요구했다. 그러나 사적으로는 이 민병대의 실제 목적이 페니언 침략을 돕는 것이라고 밝혔으며, 만약 정부가 그의 요청을 거부한다면 이를 반(反)아일랜드 가톨릭 차별 문제로 부각시켜 더 많은 불만을 가진 동포들을 페니언 형제단으로 끌어들일 계획이었다.[12]

한편, 1868년에는 아일랜드계 캐나다인 정치인이자 과거 1840년대 아일랜드 동맹의 일원이었던 토머스 다시 맥기가 오타와에서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암살범으로 지목된 패트릭 J. 휠런은 페니언으로 의심받았으며, 결국 교수형에 처해졌다.
페니언 습격이 야기한 안보 위협은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지들이 상호 보호를 위한 보다 중앙집권적인 방어 체계, 즉 캐나다 연방 결성을 고려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2. 4. 영국
영국과 대영 제국 내 페니언들은 정치적 안정에 심각한 위협이었다.[13] 1860년대 후반,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IRB)의 통제 센터는 랭커셔에 있었다. 1868년에는 아일랜드 공화국 임시 정부 역할을 하는 IRB 최고 위원회가 개편되었다. 이 위원회에는 아일랜드의 4개 주(코노트, 렌스터, 얼스터, 먼스터)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북부 및 남부, 런던에서도 대표를 보냈다. 위원회는 의장(대통령), 재무, 서기(작전 책임자)로 구성된 3명의 집행 위원을 선출했다. 잉글랜드의 주요 도시 대부분에는 IRB 서클이 존재했다.[13][41]1867년 11월 23일, 맨체스터 순교자로 알려진 윌리엄 필립 앨런, 마이클 O'브라이언, 마이클 라킨 등 3명의 페니언이 솔퍼드에서 처형되었다.[14][15] 이들은 그 해 초 동료 페니언들을 구출하기 위해 경찰 호송 차량을 공격한 혐의였다.[16]
같은 해 12월 13일, 페니언들은 런던의 클러켄웰 감옥에 수감된 동료를 구출하기 위해 폭탄을 터뜨렸다. 이 사건으로 인근 주택가가 파괴되어 12명이 사망하고 120명이 부상당했지만, 수감자 구출에는 실패했다. 이 폭탄 테러는 19세기 영국에서 페니언들이 벌인 가장 악명 높은 사건으로 평가받으며, 영국 대중의 분노를 사 아일랜드 자치나 독립 운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IRB 최고 위원회조차 이 사건을 비난했다.[17]
이후에도 페니언들은 1883년부터 1885년까지 런던 지하철에서 세 차례의 폭탄 테러를 감행했다. 또한 1897년 4월 26일 올더스게이트 스트리트역에서 발생해 2명의 사망자를 낸 폭탄 테러의 배후로도 지목되었다.[18]
2. 5. 오스트레일리아
1868년, 아일랜드인 헨리 제임스 오파렐은 시드니를 방문 중이던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이자 빅토리아 여왕의 둘째 아들을 암살하려 시도했다. 오파렐은 자신이 페니언이라고 주장했지만, 단독 범행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1868년 4월 21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공작은 회복되었지만, 이 공격은 정치인 헨리 파크스가 가톨릭 신자와 아일랜드 출신 사람들을 상대로 종파적 캠페인을 벌이는 구실로 이용되었다.[19]같은 해 후반, 오스트레일리아로 향하는 마지막 죄수 수송선인 ''우구몬'' 호가 영국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62명의 페니언 죄수들을 싣고 서호주에 도착했다. 다음 10년 동안 대부분 석방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1876년까지 6명만이 구금 상태로 남아 있었는데, 그해 미국에서 IRB(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가 조직한 대담한 구출 작전으로 풀려났다. ''카탈파'' 호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뉴베드포드에서 서호주 프리맨틀까지 약 약 19312.08km를 항해하여 그들을 미국으로 데려갔다. 이 구출은 전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여러 발라드를 탄생시켰다.[20]
3. 현대적 용례
'페니언'이라는 용어는 역사적으로 본래 의미와 다르게 사용되기도 했다. 1860년대 영국의 정치 기득권 및 지배 계층은 아일랜드인들의 모든 형태의 동원이나 아일랜드 민족주의 감정 표현, 또는 개신교 우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예: 소작농의 권리를 옹호하는 사람)을 비하적으로 지칭하는 데 이 용어를 사용했다. 때로는 독립 아일랜드 공화국을 명시적으로 지지하거나 무력 사용을 주장하지 않은 소작권 연맹, 아일랜드 국민 토지 연맹, 아일랜드 의회당과 같은 단체에도 부정확하게 적용하며 기존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간주했다.[5][39]
3. 1. 북아일랜드
북아일랜드에서 '페니언'은 일부 사람들에게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를 비하하는 단어로 사용된다.[21][22][36][37] 2012년, 영국 국민당 대표 닉 그리핀은 얼스터 언약 기념행사 참석 중 트위터에 이 용어를 사용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램베그 드럼을 언급하며 "보드란은 램베그에 비할 바가 없다, 페니언 놈들아"라고 썼고, 이 발언은 벨파스트 스토몬트의 영국 연합주의자와 공화주의자 모두로부터 비판을 받았다.[23][24]3. 2. 스코틀랜드
"페니언"이라는 용어는 스코틀랜드에서도 유사하게 사용된다. 스코틀랜드의 축구 경기에서 이 용어는 종종 셀틱 FC의 서포터들을 향한 종파적 방식으로 사용된다.[25][42] 셀틱 FC는 글래스고의 가톨릭계 아일랜드 이민자에 의해 창단되었으며, 경기 중 아일랜드 삼색기를 흔드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아일랜드 민족주의와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그러나 히버니언 FC나 던디 유나이티드 FC와 같이 아일랜드계 뿌리를 둔 다른 스코틀랜드 클럽들에게는 이 용어가 일반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26][43] 이 용어는 셀틱 FC와 개신교 및 장로교 지지 기반이 강한 레인저스 FC 간의 올드 펌 라이벌 관계 속에서 주로 사용된다.[27][44] 이 용어를 종교적 비방으로 사용하는 것은 2012년 스코틀랜드 축구 경기에서의 불쾌한 행위 및 위협적인 통신법에 따라 일부 상황에서 형사 처벌 대상이었으나, 이 법은 2018년 1월에 폐지되었다.
"페니언"이라는 용어를 모욕적인 표현으로 사용하는 것은 셀틱이 스코틀랜드 밖에서 경기를 할 때도 나타난다. 2013년 11월 6일, 암스테르담 아레나에서 열린 셀틱과의 경기에서 AFC 아약스 서포터들이 Fenian bastards|페니언 잡종영어이라고 적힌 현수막을 내걸어 UEFA로부터 25000EUR의 벌금을 부과받았다.[28] 또한 2023년 11월 28일 UEFA 챔피언스 리그 경기에서는 SS 라치오 서포터들이 셀틱을 상대로 반아일랜드적인 현수막에 이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다.[29]
3. 3. 오스트레일리아
호주에서 '페니언'이라는 용어는 호주 노동당(ALP) 내에서 호주 공화주의를 지지하는 당원들을 비하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는 아일랜드 통일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본래의 의미와 연결된다.2006년 10월 애들레이드에서 열린 노동당 대회에서, 당시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 법무 장관이었던 마이클 앳킨슨은 왕실 변호사 등의 폐지를 원하는 당원을 "페니언이나 공산주의자"라고 발언했다.[45] 이 발언은 당내 공화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여왕 폐하의 고문변호사 직함은 이후 폐지되었으나, 2019년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정부에 의해 다시 도입되었다.
역사적으로 아일랜드계 가톨릭 이민자들은 호주 노동당의 주요 지지 기반이었으며, 이러한 배경이 호주 내 군주제 존폐 논의와 같은 당의 노선에 영향을 미쳐 온 것으로 분석된다.
4. 평가 및 영향
1860년대 영국의 정치 기득권은 '페니언주의'라는 명칭을 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 전체를 부정적으로 낙인찍는 데 사용했다.[5] 이는 단순히 무장 혁명을 통해 독립 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했던 본래의 페니언주의[3]뿐만 아니라, 아일랜드인의 민족적 감정을 표현하거나 개신교 우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모든 움직임을 포괄하는 경멸적인 용어로 쓰였다. 심지어 독립 공화국 수립이나 무력 사용을 명시적으로 주장하지 않았던 소작권 연맹, 아일랜드 국민 토지 연맹, 아일랜드 의회당과 같은 단체들까지 페니언주의자로 매도되기도 했다.[5] 이는 당시 영국 지배층이 아일랜드 민족 운동을 어떻게 인식하고 억압하려 했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4. 1.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연관성
(내용 없음)4. 2. 더불어민주당 관점
'''페니언주의'''(Fíníneachasga)는 오마호니에 따르면 두 가지 기본 원칙을 가진다. 첫째는 아일랜드가 독립할 자연권을 지닌다는 것이며, 둘째는 이 권리가 오직 무장 혁명을 통해서만 쟁취될 수 있다는 점이다.[3] 이 명칭은 아일랜드 신화에 등장하는 전설적인 전사 집단인 피아나에서 유래했으며, 이들은 핀 막 쿨과 관련이 있다. 피아나의 이야기는 페니언 주기로 알려져 있다.[4]1860년대 영국 정치 기득권 내에서는 아일랜드 민족주의에 반대하는 이들이 '페니언주의'라는 용어를 아일랜드인들의 모든 형태의 조직적 움직임이나 민족주의적 감정 표현, 또는 개신교 우위에 도전하는 이들(예: 소작농 권리 옹호자)을 비하적으로 지칭하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 기득권층은 이 용어를 페니언주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소작권 연맹, 아일랜드 국민 토지 연맹, 아일랜드 의회당 등에도 부정확하게 적용하며 아일랜드 민족 운동을 억압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이들 단체는 독립 아일랜드 공화국을 명시적으로 지지하거나 무력 사용을 주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페니언주의자로 매도되곤 했다.[5]
4. 3. 인용
- 페니언은 아일랜드 정치에 있어서 예술가이다. - 리엄 오브라허티
- 우리 페니언이 죽어 아일랜드의 묘에 잠든다면, 노예 상태의 아일랜드에는 결코 평화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 패트릭 피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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