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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빈시아 우트라마리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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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로빈시아 우트라마리누(Províncias Ultramarinas)는 1951년 6월 11일부터 1974년 카네이션 혁명까지 포르투갈의 해외 영토를 지칭하는 공식 명칭이었다. 이는 포르투갈이 다대륙 국가이며 해외 영토가 포르투갈의 일부라는 다대륙주의 사상을 반영했다. 프로빈시아 우트라마리누는 앙골라, 카보베르데, 기니, 마카오, 모잠비크, 상투메 프린시페, 티모르, 인도(고아, 다망, 디우)를 포함했으며, 카네이션 혁명 이후 대부분 독립했다. 이 용어는 19세기부터 사용된 '해외 지배령'과 20세기 초의 '해외 주'를 거쳐 1933년 살라자르 정권에 의해 '식민지'로 대체되었으나, 1951년 국제 연합의 반식민지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다시 공식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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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빈시아 우트라마리누

2. 역사

19세기 초, 포르투갈 해외 영토는 "해외 지배령"으로 불렸지만, 행정 개혁으로 "해외 주"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는 포르투갈이 다대륙 국가이며, 그 영토가 포르투갈 국가의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다대륙주의 사상과 일치했다. 해외 식민지는 이미 포르투갈 정체성의 한 요소로 여겨졌다. 행정적으로 해외 주로 분류되었지만, 포르투갈령 인도는 "국가"라는 명예 칭호를 유지했다.

20세기에는 이러한 영토의 대부분이 "식민지"로 불렸지만, "해외 주"라는 용어는 공식 명칭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살라자르가 이끈 에스타두 노부 정권의 기본 법령 중 하나인 포르투갈 식민법은 1933년 6월 13일에 통과되었으며, 영토의 공식 명칭에서 "해외 주"를 삭제하고 "식민지"로 완전히 대체했다. 앙골라와 모잠비크 식민지는 다시 주(province)로 세분되었다.

1951년 살라자르 정부는 남은 식민지를 유지하고 국제 연합의 반식민지 요구를 달래기 위해 "해외 주" 명칭을 다시 공식화했다.[1] 1970년에는 앙골라모잠비크 주가 각각 "국가"라는 명예 칭호를 받았다.[2][3]

이후 재분류된 영토는 다음과 같다.



1974년 카네이션 혁명으로 에스타두 노부 정권이 몰락하고, 포르투갈 아프리카는 급속히 탈식민지화되었으며, 포르투갈령 티모르인도네시아에 병합되었다.

1976년, 마카오는 "포르투갈 행정 하의 중국 영토"로 인정받아 더 많은 행정적, 재정적, 경제적 자율성을 부여받았다. 3년 후, 포르투갈과 중국은 마카오의 명칭을 "포르투갈 (임시) 행정 하의 중국 영토"로 변경하는 데 합의했다. 이 분류는 마카오 문제에 관한 공동 선언과 1999년 포르투갈에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의 마카오 주권 이양까지 지속되었다.

2. 1. 용어의 등장과 변천

"프로빈시아 우트라마리누"라는 표현은 19세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19세기 초, 포르투갈 해외 영토는 "해외 지배령"으로 불렸지만, 행정 개혁으로 "해외 주"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는 포르투갈이 다대륙 국가이며, 그 영토가 포르투갈 국가의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다원적 대륙주의 사상과 일치했다. 해외 식민지는 이미 포르투갈 정체성의 한 요소로 여겨졌다.

다원적 대륙주의를 국가 이념으로 삼은 안토니우 살라자르.


20세기에는 이러한 영토의 대부분이 "식민지"로 불렸지만, "해외 주"라는 용어는 공식 명칭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1933년 수립된 이스타두 노부(포르투갈 제2공화국)의 파시스트 독재 정권 시절, 에스타도 노부의 지도자였던 안토니우 살라자르는 포르투갈을 식민제국이 아닌 다원적 대륙주의의 이념에 부합한다고 보았다.[4][5][11] 포르투갈 식민법은 살라자르가 이끈 에스타두 노부 정권의 기본 법령 중 하나로 1933년 6월 13일에 통과되었으며, 영토의 공식 명칭에서 "해외 주"를 삭제하고 "식민지"로 완전히 대체했다.

이 명칭은 1951년 살라자르 정부의 정책의 일환으로 다시 공식화되었는데, 이는 남은 식민지를 유지하고 국제 연합의 반식민지 요구를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1] 1970년에는 앙골라모잠비크 주가 각각 "국가"라는 명예 칭호를 받았다.[2][3]

2. 2. 식민지 독립 과정

1947년 인도가 독립한 이후, 포르투갈은 자국의 영토를 인도에 양도하라는 요청을 거부했다. 1954년 다드라 나가르하벨리에서 공산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의 반란이 일어나 포르투갈 군대가 항복했고,[14] 자유 다드라 나가르하벨리 정부가 수립되어 1961년까지 지역을 통치했다.[15][16] 자와할랄 네루는 인도 고아에서도 민중 운동과 국제 사회의 압박을 통해 고아를 수복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1961년 비제이 작전을 개시해 고아를 병합했다.[17] 고아는 병합 직후 인도군의 직접 통치를 받았으나, 1962년 고아 지방의회를 설립해 통치권을 민간에 이양했다.[18] 이 두 차례의 전쟁으로 포르투갈은 인도에 있던 프로빈시아 우트라마리누를 모두 잃었고, 포르투갈령 인도도 멸망했다.

1961년부터 1974년까지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이 발발하여 포르투갈령 앙골라, 포르투갈령 모잠비크, 포르투갈령 기니 등 아프리카 식민지들이 독립했다.[1][2][3]

1974년 카네이션 혁명으로 에스타두 노부 정권이 몰락하면서, 포르투갈령 티모르는 아프리카 식민지화 해체와 더불어 인도네시아에 강제 병합되었다.[1]

카네이션 혁명포르투갈령 마카오의 법적 지위에 영향을 주었고, 새로운 포르투갈 정부의 탈식민지화 정책은 마카오 반환의 길을 열었다.[55] 포르투갈은 1974년 말 마카오에서 철수할 것을 제안했지만, 중화인민공화국홍콩에 대한 국제적, 지역적 신뢰를 유지하고 타이완과의 통일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거절했다.[55] 1976년 마카오 조직장정에 따라 마카오의 법적 명칭은 식민지에서 포르투갈 직할지로 변경되었고,[56] 같은 해, 마카오는 '포르투갈 행정 하의 중국 영토'로 인정받았고, 더 많은 행정적, 재정적, 경제적 자율성을 부여받았다. 3년 후, 포르투갈과 중국은 마카오의 명칭을 다시 "포르투갈 (임시) 행정 하의 중국 영토"로 변경하는 데 합의했다. 1987년 중화인민공화국과 포르투갈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포르투갈 공동선언을 발표했고, 4월 13일 선언이 비준되어 마카오는 "포르투갈 행정부가 다스리는 중국 영토"가 되었다.[57] 1993년 3월 13일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작성한 마카오 특별행정구 기본법이 채택되었고, 장쩌민이 이를 비준했다. 1999년 12월 20일 마카오가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반환되면서, 마카오의 법적 근거는 포르투갈이 작성한 마카오 조직법에서 마카오 특별행정구 기본법으로 변경되었다.

2. 2. 1. 인도

1954년 7월 22일, 다드라 나가르하벨리에서 공산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1954년 8월 11일 포르투갈 군대가 항복하면서 끝났고,[14] 자유 다드라 나가르하벨리 정부가 수립되어 1961년까지 지역을 통치했다.[15][16] 자와할랄 네루는 인도 고아에서도 민중 운동과 국제 사회의 압박을 통해 고아를 수복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1961년 12월 17일 비제이 작전을 개시해 고아를 병합했다.[17] 고아는 병합 직후 인도군의 직접 통치를 받았으나, 1962년 6월 8일 고아 지방의회를 설립해 통치권을 민간에 이양했다.[18] 이 두 차례의 전쟁으로 포르투갈은 인도에 있던 프로빈시아 우트라마리누를 모두 잃었고, 포르투갈령 인도도 멸망했다.

2. 2. 2. 아프리카

1961년부터 1974년까지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이 발발하여 포르투갈령 앙골라, 포르투갈령 모잠비크, 포르투갈령 기니 등 아프리카 식민지들이 독립했다.[1][2][3]

2. 2. 3. 동티모르

1974년 카네이션 혁명으로 에스타두 노부 정권이 몰락하면서, 포르투갈령 티모르는 아프리카 식민지화 해체와 더불어 인도네시아에 강제 병합되었다.[1]

2. 2. 4. 마카오

카네이션 혁명은 포르투갈령 마카오의 법적 지위에 영향을 주었고, 새로운 포르투갈 정부의 탈식민지화 정책은 마카오 반환의 길을 열었다.[55] 포르투갈은 1974년 말 마카오에서 철수할 것을 제안했지만, 중화인민공화국홍콩에 대한 국제적, 지역적 신뢰를 유지하고 타이완과의 통일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거절했다.[55]

1976년, 마카오 조직장정에 따라 마카오의 법적 명칭은 식민지에서 포르투갈 직할지로 변경되었다.[56] 같은 해, 마카오는 '포르투갈 행정 하의 중국 영토'로 인정받았고, 더 많은 행정적, 재정적, 경제적 자율성을 부여받았다. 3년 후, 포르투갈과 중국은 마카오의 명칭을 다시 "포르투갈 (임시) 행정 하의 중국 영토"로 변경하는 데 합의했다.

1987년, 중화인민공화국과 포르투갈 대표는 베이징에서 만나 중화인민공화국-포르투갈 공동선언을 발표했고, 4월 13일 선언이 비준되어 마카오는 "포르투갈 행정부가 다스리는 중국 영토"가 되었다.[57] 마카오 반환을 약속하는 1987년 리스본 합의서에서 중화인민공화국-포르투갈 공동선언이 발표되었고, 이 공동선언을 통해 마카오를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하기로 했다.

1993년 3월 13일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작성한 마카오 특별행정구 기본법이 채택되었고, 장쩌민이 이를 비준했다. 1999년 12월 20일 마카오가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반환되면서, 마카오의 법적 근거는 포르투갈이 작성한 마카오 조직법에서 마카오 특별행정구 기본법으로 변경되었다.

3. 영향

카네이션 혁명 이후 포르투갈의 탈식민지화 과정은 포르투갈 본국과 구 식민지 모두에게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포르투갈은 1974년 카네이션 혁명 이후 급진적인 정책 추진으로 정치·사회·경제적 혼란을 겪었다. 특히, 제1차 석유 파동, 유럽의 불황, 이전 식민지로부터 수십만 명의 해외 포르투갈인 귀환(retornadospt)은 경제 위기를 심화시켰다.[70]

구 식민지는 다대륙주의 사상에 따라 "해외 주"로 불리며 포르투갈 정체성의 일부로 여겨졌으나, 에스타두 노부 정권에서 "식민지"로 변경되었다. 1951년, 살라자르 정부는 식민지 유지 및 국제 연합의 반식민지 요구를 달래기 위해 "해외 주" 명칭을 다시 사용했다.[1]
1951년 재분류된 포르투갈의 해외 주



카네이션 혁명 이후, 포르투갈령 앙골라, 포르투갈령 모잠비크, 포르투갈령 티모르 등에서 백만 명 이상의 포르투갈 시민들이 본국으로 귀환했다.[72][73] 이들은 난민으로, 제한된 짐만 가지고 급히 식민지를 떠나야 했다.[77][78]

앙골라, 모잠비크, 동티모르 등 구 식민지는 독립 후에도 내전과 정치 불안정이 지속되었다. 특히 앙골라와 모잠비크는 냉전 시기 강대국 개입으로 내전이 격화되었다.

앙골라 내전 당시 작전 중인 남아프리카 공화국군.


모잠비크 내전 중이던 1986년 모잠비크 초대 대통령 사모라 마셸이 타고 있던 비행기가 추락했다. 이 사진은 추락 후 남은 잔해를 찍은 것이다.


동티모르의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 1999년 9월 10일 촬영되었다.


구 식민지 대부분은 경제적으로도 식민지 시절보다 열악했다. 정치 불안정과 포르투갈인 이주로 경제 활동이 침체되고, 식민지 시절 경제 구조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마카오포르투갈령 인도 지역을 제외한 옛 포르투갈 프로빈시아 우트라마리누는 모두 유엔 회원국이 되었다. 옛 포르투갈 아프리카 식민지 국가들은 독립 직후 아프리카 통일기구 회원국이 되었다.

3. 1. 포르투갈

포르투갈(Portugalpt)은 현재 해당 내용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3. 1. 1. 정치

1974년 카네이션 혁명 이후, 새로 수립된 정부를 이끌었던 군 운동은 급진적인 정책을 추구하였고, 1975년 3월 11일부터 1975년 11월 25일까지 진행된 이 시기를 "진행 중인 혁명 과정"이라고 부른다. 이 시기의 포르투갈은 극좌정치와 노동운동의 영향을 받았으며, 정치적 혼란, 우익과 좌익의 폭력,[58][59][60] 사회 불안정, 기업 국유화, 사유지 강제 점거 및 수용 등으로 특징지어졌다.[61]

카네이션 혁명 이후 온건파와 급진파 세력 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1975년 3월 11일 스피놀라를 따르는 포르투갈 우익이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실패로 끝났다. 1975년 3월 23일, 극우 단체인 포르투갈 해방군(ELP)은 RTP가 생중계한 기자회견에서 북부 군사 지역의 사령관이자 북부 지역의 COPCON 대표인 에우리코 코르바초 준장으로부터 "파시스트 조직"이라고 비난받았다.[62] 스피놀라는 브라질로 망명했다.[63]

1975년 11월 25일에는 극좌 세력의 쿠데타가 발생했다. 당시 극좌 세력은 포르투갈의 민주주의 전환기를 기반으로 포르투갈을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려고 시도했다.[64] 역사학자 마리아 이나시아 레졸라에 따르면, "1975년 11월 25일 쿠데타는 포르투갈 혁명 과정에서 가장 논란이 많고 어떤 면에서는 모호한 사건 중 하나"로 남아있으며, 쿠데타 시도 여부와 책임 소재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65]

3. 1. 2. 경제

포르투갈에서는 식민지 전쟁 기간 동안 정부 예산이 크게 증가했다. 군대에 대한 지출은 1961년 전쟁이 시작된 이래로 급증했는데, 특히 임시 예산이 군사비 증가의 주요 요인이었다.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사망한 이후 후임 마르셀루 카에타누는 1972년까지 아프리카 전쟁에 대한 군사비 지출을 꾸준히 늘렸다.[66] 1961년부터 1974년까지 포르투갈 전체 국가 지출의 22%(GDP의 약 3.1%)가 전쟁에 사용되었다.[67]

포르투갈 본토에서는 전쟁 기간 동안 경제 성장률이 6~11%였으나, 전후 기간에는 2~3%로 감소했다.[68] 1973년 포르투갈의 1인당 GDP는 EC-12 평균의 56%였으나, 혁명의 혼란이 극대화된 1975년에는 52%로 감소했다.[69] 카네이션 혁명 이후 포르투갈 정부의 혁명적인 경제 정책, 제1차 석유 파동, 유럽의 불황, 그리고 수십만 명의 해외 포르투갈인들이 이전 식민지로부터 귀환하면서 포르투갈은 1974년부터 1975년까지 경제 위기를 겪었다.[70]

3. 2. 구 식민지

19세기 초, 포르투갈 해외 영토는 "해외 지배령"으로 불렸지만, 행정 개혁으로 "해외 주"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는 포르투갈이 여러 대륙에 걸친 국가이며, 그 영토가 포르투갈의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다대륙주의 사상과 일치했다. 해외 식민지는 이미 포르투갈 정체성의 한 부분으로 여겨졌다. 행정적으로 해외 주로 분류되었지만, 인도의 포르투갈 식민지는 "국가"라는 명예 칭호를 유지했다.

20세기에도 이 영토 대부분은 "식민지"로 불렸지만, "해외 주"라는 용어는 공식 명칭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1933년 6월 13일,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이끈 에스타두 노부 정권의 기본 법령 중 하나인 포르투갈 식민법이 통과되면서 영토의 공식 명칭에서 "해외 주"가 삭제되고 "식민지"로 완전히 대체되었다. 앙골라모잠비크 식민지는 다시 주(province)로 세분되었다.

1951년, 살라자르 정부는 남은 식민지를 유지하고 국제 연합의 반식민지 요구를 달래기 위해 "해외 주"라는 명칭을 다시 공식화했다.[1] 1970년에는 앙골라와 모잠비크 주가 각각 "국가"라는 명예 칭호를 받았다.[2][3]
1951년 재분류된 포르투갈의 해외 주



이 분류는 1974년 카네이션 혁명으로 에스타두 노부 정권이 몰락하고, 포르투갈 아프리카의 급속한 아프리카 식민지화 해체 및 인도네시아의 포르투갈령 티모르 병합이 이루어질 때까지 지속되었다.

1976년, 마카오는 "포르투갈 행정 하의 중국 영토"로 인정받아 더 많은 행정적, 재정적, 경제적 자율성을 부여받았다. 3년 후, 포르투갈과 중국은 마카오의 명칭을 다시 "포르투갈 (임시) 행정 하의 중국 영토"로 변경하는 데 합의했다. 이 분류는 마카오 문제에 관한 공동 선언과 1999년 포르투갈에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의 마카오 주권 이양까지 지속되었다.

3. 2. 1. 레트로나도(Retornados)

카네이션 혁명 이후 탈식민지화 과정에서 혁명국가구원군이 관리하는 해외 식민지를 탈출한 포르투갈인들을 "레트로나도"(retornadospt)라고 부른다.[71] 1974년 5월부터 1970년대 말까지 포르투갈령 앙골라, 포르투갈령 모잠비크, 포르투갈령 티모르에서 온 백만 명 이상의 포르투갈 시민들이 난민으로 본래 영토를 떠났다.[72][73] 다른 유럽의 식민지와 달리, 포르투갈령 아프리카에 사는 포르투갈인들은 조상들이 대대로 아프리카에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땅과 강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다.[74][75] 이들에게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영토에서 곧 떠날 것이라는 전망은 거의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피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였고, 모잠비크에서 실패한 우익 정착민 반란이 일어났지만, 포르투갈 쿠데타 지도자들이 독립을 승인하면서 독립에 대한 포르투갈인들의 반항은 빠르게 소멸되었다.[76]

포르투갈령 모잠비크의 경우, 24/20 명령을 통해 포르투갈인들에게 24시간의 피난 시간과 20kg의 짐만 허용했다.[77][78] 포르투갈령 앙골라의 경우, MPLA와 포르투갈의 권력 이양 합의가 알려지자마자 포르투갈인들의 대탈출이 시작되어, 1975년 11월까지 300,000명 이상이 앙골라를 떠났고, 그들 중 대부분은 TAP 포르투갈 항공보잉 707 항공기를 타고 대피했다. 영국 공군도 비커스 VC10 여객기를 보내 6000여 명의 난민을 추가로 대피시켰다.[79]

3. 2. 2. 내전

앙골라 독립 전쟁 이후, 앙골라에서는 앙골라 해방인민운동앙골라 완전독립 민족동맹, 앙골라 민족해방전선 간의 앙골라 내전이 발발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앙골라 해방인민운동의 집권을 막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고,[80] 쿠바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개입 이전에 군사 고문을 파견하고, 개입 이후에는 특수부대를 파견해 앙골라 해방인민운동을 지원했다.[81][82] 유고슬라비아도 앙골라 해방인민운동을 지원했다.[83][84] 키팡곤도 전투에서 패배한 앙골라 민족해방전선은 자이르로 후퇴했고,[85][86] 앙골라 해방인민운동은 1975년 11월 11일 앙골라 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모잠비크에서는 루사카 협정 체결 이후 모잠비크 해방전선이 주도하는 모잠비크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로디지아는 모잠비크 정부를 불안정하게 만들기 위해 모잠비크를 공격하고, 중도 우익/우익 반공주의 단체인 RENAMO의 설립을 지원했다.[87][88][89][90][91] 플레차의 옛 부대원들도 RENAMO에 가담하거나 로디지아군에 합류했다.[92] 남아프리카 공화국도 모잠비크에 군대를 파견해 모잠비크 정부와 맞서 싸웠다.[93][94] 탄자니아, 소련, 쿠바, 동독, 북한은 모잠비크 정부를 지원했다.[95][96]

동티모르에서는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병합한 이후에도 동티모르 독립혁명전선이 저항을 계속했다.[97] 인도네시아는 "토벌과 섬멸" 작전을 펼쳤지만, 동티모르 독립혁명전선은 게릴라전을 지속했다.[98] 샤나나 구스망의 지도 하에 동티모르 독립혁명전선은 1980년대부터 회복하기 시작했다.[99] 1998년 이후 동티모르 독립 투표가 열렸지만, 친인도네시아계 주민들은 결과에 불복하며 1999년 동티모르 위기가 발생했다.[100] 국제 연합의 개입으로[101][102] 2002년 5월 20일 동티모르가 독립했다.

3. 2. 3. 경제

포르투갈인의 이주와 연이은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대부분의 옛 프로빈시아 우트라마리누 지역의 경제는 식민지 시절보다 열악했다. 앙골라의 경우 1976년부터 경제는 독립 전쟁과 그에 따른 해방 운동의 내부 싸움의 여파로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103] 1950년 이후 많은 백인 정착민들이 앙골라에 와서 앙골라 땅을 점령하여 지역 농민들의 현금 생산과 자급자족 작물 생산을 방해했다. 포르투갈인들은 앙골라인들에게 더 큰 산업이나 농업 기업을 운영하도록 허용하지 않았고, 앙골라 주민들에게 교육을 시키지도 않았다.[103] 또한, 앙골라의 산업은 식민지이자 경제의 지배권을 쥐고 있던 포르투갈과의 무역에 의존했다.[103]

기니비사우 역시 장기간의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경제 활동이 침체되고 사회 인프라가 악화되었으며 경제 불균형이 더 증가하였다.[104] 2020년 기니비사우의 주요 수출 품목은 생선, 캐슈넛, 밤바라땅콩이며 경제는 농업에 의존하고 있다.[105] 이는 프로빈시아 우트라마리누로 승격되었던 1951년의 경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3. 2. 4. 국제기구 가입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가 된 마카오인도의 영토가 된 옛 포르투갈령 인도 지역을 제외한 옛 포르투갈의 프로빈시아 우트라마리누는 모두 유엔의 회원국이다. 기니비사우가 1974년 9월 17일 회원국이 된 이후, 모잠비크(1975년), 카보베르데(1975년), 앙골라(1976년), 동티모르(2002년)가 모두 2023년 기준으로 유엔 회원국이다.[106]

옛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식민지 국가들은 독립 직후 아프리카 통일기구의 회원국이 되었다. 앙골라, 모잠비크, 카보베르데, 상투메 프린시페는 1975년 7월 18일에 아프리카 통일기구 회원국이 되었다.

4. 유산

마푸토 성모 수태 성당. 모잠비크 마푸토에 있는 성당으로, 1944년 완공되었다.


옛 프로빈시아 우트라마리누 지역들은 국교가 없지만, 포르투갈 식민 지배의 영향으로 로마 가톨릭 신자가 남아 있다.

앙골라 국립은행 건물. 1956년에 건축된 이 건물은 "포르투갈 식민지 건축양식"과 포르투갈 수아비 양식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포르투갈은 옛 식민지에 여러 건축물을 남겼으며, 이를 '포르투갈 식민지 건축양식'이라고 부른다.[131] 194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포르투갈에서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던 포르투갈 수아비 양식은 에스타두 노부 정권이 추구했던 민족주의적 가치를 현대의 기술과 건축기법에 접목시킨 것이다.[132] 그러나 1974년 카네이션 혁명 이후 포르투갈 수아비 양식은 쇠퇴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사이에 건립된 프로빈시아 우트라마리누의 건축물에는 앙골라 국립은행 건물 (1956년), 마푸토 중앙병원 (1958년), 카보베르데 프라이아 고등학교 건물 (1960년), 폴라나 교회 (1962년), 베이라 기차역 (1966년) 등이 있다.

4. 1. 언어

포르투갈어카보베르데,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상투메 프린시페의 공용어이며,[107] 동티모르에서는 테툼어와 공동 공용어로 인정되었고,[108][109] 마카오에서는 기본법 제1조 9항에 의거하여 중국어와 함께 공용어로 쓰이고 있다.[110] 인도고아주[111], 그리고 다만 디우에서는 약 10,000명 정도가 포르투갈어를 사용하고 있지만,[112] 고아주의 경우 "오리엔트 파운데이션"이라는 단체의 후원을 시작으로 학교에서도 포르투갈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113] 2014년 기준으로 약 1,500명의 학생들이 고아에서 포르투갈어 수업을 받고 있다.[114]

옛 프로빈시아 우트라마리누의 경우 각 식민지별로 방언이 발달했다. 예를 들어 앙골라계 포르투갈어의 경우, 열린 모음 / ʁ/와 /a/는 [a]에 병합되며, 마찬가지로 /ɐ/는 대부분의 비 강세 음절에서 발생하는 유럽 포르투갈어와 달리 강세가 없는 최종 음절에서만 나타나고 비음 /ɐ̃/는 개음 [ã]로 바뀐다. 동티모르계 포르투갈어의 경우 발음의 강조점이 다른데, 마카오, 포르투갈, PALOP 국가들이 사용하는 것처럼 동티모르의 지방 정부와 학교들은 포르투갈 표준어를 가르치는 데 엄격하다.[115]

1983년 포르투갈 외무장관 하이메 가마가 카보베르데를 국빈 방문했을 때, 2년마다 열리는 루소폰 국가 원수 및 정부 수반의 정상회담과 회원국 장관 간의 정기 회의 아이디어를 제안하면서 포르투갈어 국가들의 국제적인 공동체나 정치적 연합에 대한 실질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116] 1989년 국제 포르투갈어 연구소가 "문화, 교육, 정보와 과학 및 기술 지식에 대한 접근과 국제 포럼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수단으로서의 포르투갈어의 홍보, 보존, 강화와 전파"를 위해 설립되었으며,[117] 1996년 7월 17일 리스본에서 제1차 포르투갈어 사용국 공동체 정상회담이 개최되어 포르투갈어 사용국 공동체가 탄생했다.[118]

4. 2. 종교



옛 프로빈시아 우트라마리누 지역들은 국교가 없지만, 포르투갈 식민 지배의 영향으로 로마 가톨릭 신자가 남아 있다.

4. 3. 건축



포르투갈은 옛 식민지에 여러 건축물을 남겼으며, 이를 '포르투갈 식민지 건축양식'이라고 부른다.[131] 194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포르투갈에서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던 포르투갈 수아비 양식은 에스타두 노부 정권이 추구했던 민족주의적 가치를 현대의 기술과 건축기법에 접목시킨 것이다.[132] 그러나 1974년 카네이션 혁명 이후 포르투갈 수아비 양식은 쇠퇴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사이에 건립된 프로빈시아 우트라마리누의 건축물에는 앙골라 국립은행 건물 (1956년), 마푸토 중앙병원 (1958년), 카보베르데 프라이아 고등학교 건물 (1960년), 폴라나 교회 (1962년), 베이라 기차역 (1966년) 등이 있다.

5. 프로빈시아 목록

1951년 살라자르 정부는 남은 식민지를 유지하고 국제 연합의 반식민지 요구를 달래기 위해 식민지를 "해외 주"로 재분류했다.[1] 1970년에는 앙골라모잠비크 주가 각각 "국가"라는 명예 칭호를 받았다.[2][3]

해외 주로 재분류된 영토는 다음과 같다.



이 분류는 1974년 카네이션 혁명까지 지속되었으며, 이후 포르투갈 아프리카의 식민지 해체와 인도네시아의 포르투갈령 티모르 병합으로 이어졌다.

1976년, 마카오는 "포르투갈 행정 하의 중국 영토"로, 3년 후에는 "포르투갈 (임시) 행정 하의 중국 영토"로 변경되었다. 이 분류는 1999년 중화인민공화국으로의 마카오 주권 이양까지 지속되었다.

5. 1. 옛 식민지

19세기 초, 포르투갈의 해외 영토는 '해외 지배령'으로 불렸지만, 행정 개혁 이후 '해외 주'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는 포르투갈이 다대륙 국가이며, 그 영토가 포르투갈 국가의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다대륙주의 사상과 일치했다. 해외 식민지는 이미 포르투갈 정체성의 한 요소로 여겨졌다. 행정적으로 해외 주로 분류되었지만, 인도의 포르투갈 식민지는 '국가'라는 명예 칭호를 유지했다.[1]

20세기에는 이러한 영토의 대부분이 '식민지'로 불렸지만, '해외 주'라는 용어는 공식 명칭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살라자르가 이끈 에스타두 노부 정권의 기본 법령 중 하나인 포르투갈 식민법은 1933년 6월 13일에 통과되었으며, 영토의 공식 명칭에서 '해외 주'를 삭제하고 '식민지'로 완전히 대체했다. 앙골라와 모잠비크 식민지는 다시 주(province)로 세분되었다.

이 명칭은 1951년 살라자르 정부의 정책의 일환으로 다시 공식화되었는데, 이는 남은 식민지를 유지하고 국제 연합의 반식민지 요구를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1] 1970년에는 앙골라와 모잠비크 주가 각각 '국가'라는 명예 칭호를 받았다.[2][3]

이후 재분류된 영토는 다음과 같다.

이름시작해체이후 지위
앙골라1951년 6월 11일1975년 11월 11일앙골라 인민공화국
카보베르데1951년 6월 11일1974년 12월 19일카보베르데 공화국 (자치령)
1975년 7월 5일카보베르데
기니1951년 6월 11일1974년 12월 10일기니비사우
인도1946년 12월 18일1954년 8월 2일 (데 쥬레, 다드라 나가르하벨리)인도
1961년 12월 19일 (데 팩토, 안제디바섬, 다만 디우, 및 고아주)
1974년 12월 31일 (데 쥬레)
마카오1951년 6월 11일1976년 2월 17일마카오
1999년 12월 20일중화인민공화국 마카오 특별행정구
모잠비크1951년 6월 11일1974년 9월 20일모잠비크 지역 행정부
1975년 6월 15일모잠비크 인민공화국
상투메 프린시페1951년 6월 11일1974년 12월 21일상투메 프린시페주
1975년 7월 12일상투메 프린시페
티모르1951년 6월 11일1975년 11월 28일동티모르 민주공화국
1976년 7월 17일동티모르주
1999년 10월 25일유엔 동티모르 임시행정부



이 분류는 1974년 카네이션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이는 에스타두 노부 정권의 몰락, 포르투갈 아프리카의 급속한 아프리카 식민지화 해체 및 인도네시아의 포르투갈령 티모르 병합으로 이어졌다.

1976년, 마카오 영토는 '포르투갈 행정 하의 중국 영토'로 인정받았고, 더 많은 행정적, 재정적, 경제적 자율성을 부여받았다. 3년 후, 포르투갈과 중국은 마카오의 명칭을 다시 '포르투갈 (임시) 행정 하의 중국 영토'로 변경하는 데 합의했다. 이 분류는 마카오 문제에 관한 공동 선언과 1999년 포르투갈에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의 마카오 주권 이양까지 지속되었다.

5. 2. 인도 옛 소유지

1974년 12월 31일 (데 쥬레)고아주 카나코나다드라 나가르하벨리1946년 12월 18일1954년 8월 2일 (데 팩토)
1974년 12월 31일 (데 쥬레)1954년: 자유 다드라 나가르하벨리 정부1961년: 다드라 나가르하벨리
2020년: 다드라 나가르하벨리 다만 디우다만 디우1946년 12월 18일1961년 12월 19일 (데 팩토)
1974년 12월 31일 (데 쥬레)1961년: 고아 다만 디우1987년: 다만 디우
2020년 : 다드라 나가르하벨리 다만 디우고아1946년 12월 18일1961년 12월 19일 (데 팩토)
1974년 12월 31일 (데 쥬레)1961년: 고아 다만 디우1987년: 고아주



19세기 초, 포르투갈 해외 영토는 "해외 지배령"으로 불렸지만, 행정 개혁으로 인해 "해외 주"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는 포르투갈이 다대륙 국가로 존재하며, 그 영토가 포르투갈 국가의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다대륙주의 사상과 일치했다. 해외 식민지는 이미 포르투갈 정체성의 한 요소로 여겨졌다. 행정적으로 해외 주로 분류되었지만, 인도의 포르투갈 식민지는 "국가"라는 명예 칭호를 유지했다.

20세기에는 이러한 영토의 대부분이 "식민지"로 불렸지만, "해외 주"라는 용어는 공식 명칭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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