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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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17세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이자 프로이센의 건설자였다. 그는 30년 전쟁 이후 황폐해진 영토를 물려받아 결혼, 군사적, 외교적 수완을 통해 프로이센을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군사적 지휘관으로서 페어벨린 전투에서 승리하며 스웨덴의 무적 신화를 깨뜨렸고, 상비군을 창설하여 프로이센군의 모델을 제시했다. 또한, 종교적 관용 정책과 위그노 난민 수용을 통해 국가 발전에 기여했으며, 포츠담 칙령을 발표하여 난민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그의 치세 동안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북동 유럽에서 지위를 굳건히 했으며, 그의 유산은 프로이센 왕국의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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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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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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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로이센 공 |
통치 기간 | 1640년 12월 1일 – 1688년 4월 29일 |
전임자 | 게오르크 빌헬름 |
후임자 | 프리드리히 3세 |
왕가 | 호엔촐레른 |
종교 | 칼뱅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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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과 사망 | |
출생일 | 1620년 2월 16일 |
출생지 | 슈타트슐로스, 베를린,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신성 로마 제국 |
사망일 | 1688년 4월 29일 |
사망지 | 슈타트슐로스, 포츠담,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신성 로마 제국 |
매장지 | 베를린 대성당 |
가족 관계 | |
아버지 | 게오르크 빌헬름 |
어머니 | 엘리자베트 샤를로테 폰 데어 팔츠 |
결혼과 자녀 | |
배우자 | 루이제 헨리에테 폰 오라니엔 (1646년 12월 7일 결혼, 1667년 6월 18일 사망) 도로테아 조피 폰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1668년 6월 13일 결혼) |
자녀 | 카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세자 프리드리히 1세, 프로이센의 왕 필리프 빌헬름, 브란덴부르크-슈베트 변경백 마리 아말리에, 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의 세습 공주 알베르트 프리드리히 변경백 카를 변경백 엘리자베트 조피, 작센-마이닝겐 공작부인 크리스티안 루트비히 변경백 |
2. 어린 시절
1620년 2월 16일, 베를린 근교 쾰른에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게오르크 빌헬름과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4세의 딸 엘리자베트 샤를로테 사이의 유일한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호엔촐레른 궁정에서 개혁교회 신앙으로 자랐다. 1627년, 30년 전쟁의 혼란을 피해 퀴스트린으로 이주했으며, 1634년부터 1638년까지는 네덜란드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당시 절대주의 통치자들처럼 각 영지의 신분회를 통해 특권을 지키려는 특권 귀족 계급과 끊임없이 대립했다. 그는 국회를 완전히 없애기보다는 그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방식을 택했다. 각 국회와 개별적으로 협상하여 세금 징수, 관리 임명, 군대 주둔, 사법권 행사 등의 권리를 확보하는 대신 귀족들의 기존 특권을 일부 인정해주었다. 또한 도시와 상륙 귀족 사이의 갈등을 이용하여 반대 세력을 약화시키고, 이를 통해 국가 제도를 개혁하고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할 재정 기반을 마련했다. 이 상비군은 점차 용병 중심에서 자국민 중심으로 변화하여, 그의 통치 말기에는 장교단의 상당수가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출신으로 채워졌다.
레이던 대학교에서 수학하며 강의에 성실히 참여했고, 항구 도시의 활발한 상업 활동을 경험했다. 네덜란드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당시로서는 드문 종교적 관용 정신과 상업 기반의 중요성에 대한 깊은 인상을 남겼다. 또한 오라녜 공 프레데릭 헨리크 밑에서 전쟁과 정치에 대해 배우기도 했다. 어린 시절, 스웨덴의 왕위 계승자였던 크리스티나와의 결혼이 제안되기도 했으나,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2]
1638년, 병든 아버지를 따라 스웨덴 침략군을 피해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1640년 12월 1일, 아버지 게오르크 빌헬름이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사망하자,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20세의 나이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자리를 계승했다. 그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 클레베 공작령, 마르크 백국, 그리고 프로이센 공작령을 상속받았다. 당시 브란덴부르크는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였기에 그는 프로이센에 머물렀다.
1642년에는 스웨덴의 여왕이 된 16세의 사촌 크리스티나에게 다시 청혼했지만, 그녀가 가톨릭에 동정적이었던 점 등이 이유가 되어 혼담은 결렬되었다. 1643년 브란덴부르크로 돌아와 처음으로 베를린을 방문하여 신하들로부터 충성을 맹세받았다.
외모는 침착하고 단단하며 견고한 인상이었고, 영웅적인 비율의 코가 두드러졌으며, 중년에는 비만해졌다.
3. 국내와 경제 정책
경제적으로는 네덜란드 공화국의 성공에 영향을 받아 해군 건설을 시도했다. 1675년부터 1679년까지 스웨덴-브란덴부르크 전쟁 중에는 네덜란드 선박을 빌려 발트해에서 사략선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1680년에는 전세 선박 두 척을 보내 아프리카 황금 해안에 교두보 식민지를 세웠고, 아프리카 무역 회사를 통해 서인도 제도 무역과 노예 무역으로 일부 이익을 얻었다. 이러한 대외 팽창 시도와 국내 경제 정책 모두 당시 유행하던 중상주의 사상을 따랐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영토 내 인구를 늘리고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적극적인 이민 정책을 펼쳤다. 특히 프랑스 왕국에서 낭트 칙령이 폐지되자 1685년 포츠담 칙령을 발표하여 위그노(프랑스 개신교도)들의 이주를 장려했다. 이 칙령으로 약 2만 명의 위그노들이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으로 이주했으며, 이들은 선진적인 기술과 문화를 가져와 국가의 산업 및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이민자들에게 면세 혜택과 보조금을 제공하며 정착을 도왔다.
30년 전쟁으로 황폐해진 수도 베를린의 재건에도 힘썼다. 기술자 요한 그레고르 멤하르트에게 의뢰하여 1650년부터 베를린 요새 건설을 시작했다. 이 요새는 당시 최신 기술인 북부 이탈리아식 성채 요새 모델을 따라 설계되었으며, 1683년에 최종 완공되었다.
행정 면에서는 요아힘 프리드리히 폰 블루멘탈이 이끄는 총전쟁국(General kriegs kommissariat)을 통해 군대를 관리하고 행정을 중앙 집권화했으며, 이를 통해 국가 수입 증대를 꾀했다.[2] 블루멘탈의 조언에 따라 귀족들에게 세금 면제 혜택을 주는 대신, 귀족들은 신분회(Estates-General)를 해산하는 데 동의했다. 또한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 공국 사이의 이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강과 운하를 연결하는 등 내부 개선 사업에도 투자했으며, 이는 훗날 프로이센 왕국의 기반 시설 확충으로 이어졌다.
3. 1. 군사적 업적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뛰어난 군 지휘관으로 평가받으며, 그가 만든 상비군은 이후 프로이센군의 기초가 되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포메라니아의 동부만을 얻게 되자, 군비 확장을 중요한 정책으로 삼았다. 1653년에는 지방 의회로부터 융커의 특권을 보장하는 대신 과세권을 승인받아 상비군 유지에 필요한 재정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클레베나 프로이센 등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과세를 성공시켜 이후 전쟁 수행의 기초를 다졌다.
1655년, 프로이센 공국의 종주국을 폴란드에서 스웨덴으로 변경한 그는 1656년 바르샤바 전투에서 스웨덴군과 연합하여 폴란드-러시아 연합군을 격파했다. 역사가 하요 홀본은 이 전투를 "프로이센 군사 역사의 시작"이라고 평가했다.[5] 이 승리 이후 라비아우 조약을 통해 프로이센의 주권을 획득했다(대홍수 시대). 프로이센 지배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이후에도 동맹 상대를 바꾸며 유틀란트나 포어포메라니아 등지에서 전투를 벌였다. 1660년 올리바 조약으로 프로이센에 대한 최종적인 지배권을 확보하고 쾨니히스베르크의 반란을 진압하며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국제적 지위를 높였다.
1672년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이 발발하자 처음에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중립을 지켰으나, 이후 네덜란드와 조약을 맺고 프랑스에서 이탈했다. 1673년 프랑스 원수 튀렌에게 영토를 공격받아 잠시 프랑스와 화해했지만, 1674년 다시 반 프랑스 노선으로 전환하여 알자스에서 제국군과 합류했다. 그러나 1675년 1월 5일 튀르크하임 전투에서 튀렌의 기습 공격을 받아 패배하고 알자스에서 철수해야 했다.
이후 프랑스 왕 루이 14세와 동맹을 맺은 스웨덴이 브란덴부르크를 침공하자,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15일 만에 250km를 행군하여 브란덴부르크로 돌아와 스웨덴군을 기습했다. 1675년 6월 18일 벌어진 페르벨린 전투에서 스웨덴군을 격파하며 스웨덴 군대의 무적 신화를 깨뜨렸다. 이어서 1676년부터 1679년까지 포메라니아, 동프로이센, 슈테틴 등지에서 스웨덴과 계속 싸웠다(스웨덴-브란덴부르크 전쟁). 또한 대 설매 작전 기간에는 프로이센 공국을 침공한 또 다른 스웨덴 군대를 격파했다.
1678년에는 함대를 이끌고 뤼겐 섬, 슈트랄준트, 그라이프스발트에 원정하여 발트해의 강자였던 스웨덴을 위협했다. 그는 함대를 더욱 강화하여 서아프리카 연안까지 원정대를 보내 기니에 그로스-프리드리히스베르크 식민지를 건설하고 노예 무역에 관여하기도 했다. 1679년 프랑스의 중재로 스웨덴과 생 제르맹 조약을 맺어 점령했던 포메라니아 영토 대부분을 반환했지만,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에서 스웨덴의 영향력을 완전히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군사 작전 시 광범위한 지침을 내리고 세부적인 의사 결정은 현장 지휘관에게 위임하는 방식을 사용했으며, 이는 훗날 독일군의 ''아우프트라크트탁틱''(임무형 지휘) 교리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그는 신속한 기동성을 활용하여 적을 격파하는 데 능숙했다.[6] 그가 사망한 1688년 당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상비군은 3만 명에 달했으며, 이는 이후 프로이센 왕국 발전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4. 외교 정책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외교 정책은 주로 영토 획득을 목표로 삼았다. 30년 전쟁 이후 황폐해진 영토를 재건하는 데 힘썼으며, 종교적 관용 정책을 통해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발전을 도모했다.[3]
스웨덴과 폴란드 사이에서 벌어진 제1차 북방 전쟁(또는 제2차 북방 전쟁, 1655-1660)에서는 처음에는 스웨덴과 동맹을 맺었다가(1655년), 1657년에는 폴란드 편으로 돌아섰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의 보조금을 활용하여 군대를 육성하기도 했다.[3] 그는 1656년 바르샤바 전투에서 스웨덴군과 함께 폴란드-러시아 연합군을 격파했고, 라비아우 조약을 통해 프로이센 공국의 주권을 잠정적으로 확보했다. 이후 동맹 상대를 바꾸며 전쟁을 지속했고, 벨라우 조약, 브롬베르크 조약을 거쳐 1660년 올리바 조약을 통해 프로이센 공국은 폴란드의 봉토 지위에서 벗어나 완전한 주권을 획득하게 되었다.[3][12] 또한 1666년에는 클레베, 율리히, 라벤스베르크 백국에 대한 지배권을 최종적으로 인정받았다.[2]
1672년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이 발발하자, 처음에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중립을 지키려 했으나, 곧 조카인 오렌지공 윌리엄이 이끄는 네덜란드 공화국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와 연합하여 프랑스에 대항했다. 그러나 1673년 프랑스 원수 튀렌의 공격을 받아 보셈 조약으로 잠시 프랑스와 강화했다.[4] 1674년 다시 반(反)프랑스 동맹에 가담하여 알자스에서 제국군과 합류했으나, 1675년 1월 5일 튀르크하임 전투에서 튀렌의 기습으로 패배하여 알자스에서 철수해야 했다.
이후 프랑스의 동맹국인 스웨덴이 브란덴부르크를 침공하자(스캐니아 전쟁),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북쪽으로 군대를 돌려 스웨덴과의 전쟁(스웨덴-브란덴부르크 전쟁)을 시작했다. 1675년 6월 18일 베를린 근교의 페어벨린에서 스웨덴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는 브란덴부르크 군대의 명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1679년까지 스웨덴령 포메라니아 전역과 동프로이센, 슈테틴 등지에서 스웨덴군과 싸웠다. 1678년에는 함대를 이끌고 뤼겐 섬, 슈트랄준트, 그라이프스발트를 점령하며 발트해에서 스웨덴의 영향력에 도전했다. 그의 함대는 서아프리카 기니 해안까지 원정하여 교역 거점(그로스-프리드리히스베르크)을 건설하고 노예 무역에 관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 이후 프랑스의 압력으로 체결된 1679년 생제르맹앙레 조약에서는 점령했던 스웨덴령 포메라니아 대부분(소중한 항구 슈체친 포함)을 스웨덴에 반환해야 했다.[4][13]
동맹국들에게 실망한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한때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제휴하여 프랑스가 라인란트 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용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1683년 오스만 제국이 빈을 공격했을 때 루이 14세가 암묵적으로 오스만 제국을 지지하자 프랑스와의 관계는 다시 냉각되었다. 결정적으로 1685년 루이 14세가 퐁텐블로 칙령으로 칼뱅파 위그노들을 추방하자,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같은 해 10월 29일 포츠담 칙령을 발표하여 프랑스에서 탈출한 위그노 난민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약 2만 명의 위그노가 브란덴부르크로 이주했으며, 이들은 프랑스의 선진 기술과 문화를 가져와 브란덴부르크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686년에는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 1세, 네덜란드 등과 함께 반프랑스 동맹인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에 가입하며 다시 한번 프랑스와 대립하는 노선을 분명히 했다.
5. 유산
프리드리히 빌헬름, 즉 '대선제후'는 반세기에 걸친 통치 기간(1640–1688) 동안 30년 전쟁으로 황폐해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을 북부 독일의 강대국으로 변모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전쟁, 질병, 이민으로 인구의 절반을 잃고 수도 베를린의 인구가 6천 명으로 급감했던 상황에서, 그는 흩어져 있던 호엔촐레른 가문의 영토들을 통합하고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의 성공적인 국가 재건과 뛰어난 군사 및 외교적 리더십은 그를 절대주의 시대의 중요한 통치자로 평가받으며, 종종 동시대의 프랑스 루이 14세,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 스웨덴의 카를 11세와 비교된다.
엄격한 칼뱅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톨릭과 유대인에게 관용적인 정책을 펼쳤다. 특히 1685년 포츠담 칙령을 통해 프랑스에서 추방된 약 2만 명의 위그노(프랑스 개신교도) 난민을 받아들였는데, 이들은 선진 기술과 자본을 가져와 브란덴부르크의 산업과 무역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각 지방에 총독과 재상을 두어 통치했지만, 이들은 모두 베를린의 중앙 정부에 보고하도록 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했다.
군사적으로는 강력한 상비군 건설에 힘썼는데, 그가 사망할 당시 병력은 3만 명에 달했다. 1668년에는 프로이센 참모본부의 전신이 되는 제도를 도입하여 군대의 효율적인 지휘 체계를 구축했으며, 이는 이후 다른 유럽 국가들의 군사 모델이 되었다. 막대한 군사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모직, 면, 린넨, 레이스, 비누, 종이, 철 등의 새로운 산업을 육성하는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또한 베를린을 해상 교통과 연결하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운하 건설과 같은 기반 시설 투자에도 힘썼으나, 항구와 선원 부족으로 해군력 강화에는 한계를 보였다. 문화적으로는 대학교를 설립하고 베를린 도서관을 세우는 등 학문 발전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의 통치에는 어두운 면도 존재한다. 1682년 네덜란드 상인 벤자민 라울레의 제안을 받아들여 브란덴부르크 아프리카 회사(BAC)를 설립하고 서아프리카의 브란덴부르크 골드 코스트에 식민지를 건설하려 했다. 이는 독일 국가로서는 최초로 대서양 노예 무역에 조직적으로 참여하려는 시도였으며, 경제적 이익을 위해 비인도적인 사업에 관여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이름은 후대에 건조된 두 척의 독일 제국 해군 군함, SMS 그로세르 쿠르퓌르스트 (1875년)와 SMS 그로세르 쿠르퓌르스트 (1913년), 그리고 해운 회사 노르트도이처 로이트가 건조하여 후에 미 해군에 편입된 여객선 그로세르 쿠르퓌르스트에 사용되었다.
그가 남긴 강력한 군대, 효율적인 행정 체계, 중상주의 정책, 그리고 그가 확립한 조세 제도와 종교적 관용 정책은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3세(훗날 프로이센의 초대 국왕 프리드리히 1세)가 프로이센 왕국을 선포하고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12][13]
6. 사망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말년에 류머티즘이나 천식으로 악화된 관절염으로 고통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병중에도 엄격하고 군대식에 가까운 일과를 소화했으며, 그의 생활 방식은 단순했고 궁정 역시 검소하게 유지되었다.
1688년 5월 9일,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68세의 나이로 포츠담에서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인 프리드리히 3세(훗날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1세)가 선제후가 되었다. 그가 남긴 3만 명 규모의 상비군과 정비된 세금 제도, 그리고 위그노 이민자를 받아들인 종교적 관용 정책 등은 이후 프로이센 왕국 발전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7. 혼인 관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은 나사우-오라녜의 루이제 헨리에테(1646년 결혼)였으며, 두 번째 부인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의 소피 도르테아(1668년 결혼)였다.
두 부인 모두 자율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고 현실적으로 행동하는 정치적 조언자로서 남편의 원정에 동행하기도 했다. 루이제 헨리에테는 자선 활동으로, 소피 도르테아는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각각 명성을 얻었으며, 자신의 봉토 수입으로 인상적인 궁궐 건물을 남겼다.
7. 1. 첫 번째 결혼


1646년 12월 7일,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헤이그에서 나사우-오라녜의 루이제 헨리에테 (1627–1667)와 첫 번째 결혼을 했다. 이는 율리히-베르크 계승 문제에 대한 부분적인 해결책으로, 그의 고문이었던 블루멘탈이 제안한 결혼이었다. 루이제 헨리에테는 네덜란드 공화국 총독 프리드리히 헨리크와 졸름스-브라운펠스의 아말리아의 딸이었으며, 침묵공 빌럼의 사촌 딸이기도 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루이제 헨리에테와 1667년에 사별했다.
루이제 헨리에테는 자율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현실적인 정치 고문이었으며, 남편의 원정에도 동행했다. 그녀는 자선 활동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자신의 봉토에서 얻은 수입으로 인상적인 궁궐 건물을 남기기도 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루이제 헨리에테 사이에는 5남 1녀, 총 여섯 자녀가 있었다.
#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빌헬름 하인리히 (1648년 5월 21일 – 1649년 10월 24일): 요절했다.
# 카를 에밀 (1655년 – 1674년)
# 프리드리히 (1657년 – 1713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이자 프로이센의 초대 왕이 되었다.
# 아말리에 (1664년 11월 19일 – 1665년 2월 1일): 유아기에 사망했다.
# 하인리히 (1664년 11월 19일 – 1664년 11월 26일): 아말리에의 쌍둥이 남동생으로, 유아기에 사망했다.
# 루이 (1666년 6월 8일 – 1687년 4월 7일): 루드비카 카롤리나 라지비우와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7. 2. 두 번째 결혼
1668년 6월 14일,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할레 근처 그뢰닝겐 성에서 도로테아 조피 폰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1636–1689)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그녀는 필리프 공작과 작센-라우엔부르크의 조피 헤드비히의 딸이었으며, 크리스티안 루드비히 공작의 미망인이었다.도로테아는 자율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현실적인 정치 고문이었으며, 남편의 원정에도 동행했다.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자신의 재산을 늘리고 국가 경제 강화에도 기여했으며, 자신의 봉토 수입으로 인상적인 궁궐 건물을 남겼다.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도로테아 조피 사이에는 7명의 자녀가 있었다.
이름 | 생몰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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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 빌헬름 | 1669년–1711년 | 마그데부르크 공국 총독, 브란덴부르크-슈베트 변경백 |
마리 아말리에 | 1670년–1739년 | 1687년 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 공세자 카를과 결혼, 1689년 작센-체이츠 공작 모리츠 빌헬름과 재혼 |
알베르트 프리드리히 | 1672년–1731년 | 성 요한 기사단 단장, 힌터폼메른 총독 |
카를 필리프 | 1673년–1695년 | |
엘리자베트 조피 | 1674년–1748년 | 1691년 쿠를란트 공작 프리드리히 카지미르와 결혼, 1703년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 변경백 크리스티안 에른스트와 재혼, 1714년 작센-마이닝겐 공작 에른스트 루드비히 1세와 세 번째 결혼 |
도르테아 | 1675년 6월 6일 – 1676년 9월 11일 | 요절 |
크리스티안 루드비히 | 1677년–1734년 | 할레 총독 |
도로테아는 선제후 가문을 잇지 못하는 자신의 아들들의 재산을 확보하기 위해 슈베트와 빌덴부르크(현재 폴란드령 스보브니체) 영지를 구입했다. 그녀의 아들들은 1701년 의붓아들인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프로이센 왕으로 즉위하자 프로이센의 왕자(Prinz in Preußende) 및 브란덴부르크 변경백(Markgraf zu Brandenburgde) 칭호를 받았고, 이 가문은 브란덴부르크-슈베트 변경백 가문으로 불리며 1788년까지 프로이센 왕가의 분가로 존속했다.
도로테아가 아들들의 수입 확보를 위해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영토 분할을 추진했다는 의혹[2]은 후대의 역사 연구를 통해 반박되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부정적 평가는 주로 그녀 사후에 카를 루드비히 폰 푈니츠 등이 퍼뜨린 전설에 기반한 것이며, 1차 사료에 근거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그러나 도로테아가 남편을 설득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을 프리드리히 3세와 자신의 아들들 사이에서 분할 상속하게 하는 약속을 일시적으로 받아냈던 것은 사실이며, 이 약속은 나중에 철회되었지만 프리드리히 3세가 즉위 후 10년 동안 이복 동생들과 분쟁을 겪는 원인이 되었다.[10] 선제후의 장남이자 계승자였던 프리드리히 3세가 계모 도로테아에 대해 경계심을 가졌던 점은 분명해 보인다.[10]
참조
[1]
간행물
Great Elector, The
[2]
간행물
Frederick William of Brandenburg
[3]
서적
Kriege und Krisen. Deutschland 1600–1715
Beck
[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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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rchiv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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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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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rchive.org/[...]
Princeton University Press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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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rman Way of War. From the Thirty Years War to the Third Re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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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Absolutism
[8]
서적
The Essentials of European History: 1648 to 1789
[9]
서적
Slavery Hinterland: Transatlantic Slavery and Continental Europe, 1680-1850
https://books.google[...]
Boydell & Brewer
[10]
서적
Die märkische Amazone Kurfürstin Dorothea von Brandenbu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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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成瀬、P48 - P49、ハフナー、P41、友清、P105。
[12]
문서
成瀬、P50 - P55。
[13]
문서
ハフナー、P35 - P37、友清、P132、P178 - P179、P190、P193、P199 - P201、P204、P214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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