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 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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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남 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은 질병에서 중생을 구제해 준다는 약사불을 형상화한 불상이다. 고려 경종 2년(977)에 중수되었으며, 전체 높이는 93cm이다. 왼손에 약합을 들고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결한 모습이며, 광주 철불과 유사한 고려 초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명문에 따르면 보수되었으나, 실제 불상에는 손질 흔적이 없어 대좌나 광배를 추각했거나 관련 가구를 보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남시 교산동에 위치하며, 인근에서 광주 하사창리 철불이 출토되는 등 고려 초기에 이 지역에서 불교가 융성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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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 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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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이름 | 하남 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 |
영어 이름 | Rock-carved Seated Bhaisajyaguru Buddha in Gyosan-dong, Hanam |
지정 유형 | 보물 |
지정 번호 | 981 |
지정일 | 1989년 4월 10일 |
소재지 | 경기도 하남시 교산동 산10-3번지 선법사 |
시대 | 2년(977) |
소유자 | 선법사 |
관리자 | 선법사 |
추가 정보 (해제된 문화재) | |
지정 유형 (해제) | 유형문화재 |
지정 번호 (해제) | 59 |
지정일 (해제) | 1974년 9월 26일 |
해제일 | 1989년 4월 15일 |
2. 현지 안내문
太平二年丁丑七月二十九日중국어이라는 명문을 통해 고려 경종 2년(977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보존 상태가 비교적 좋아 고려 초기 불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3]
2. 1. 현지 안내문 내용
질병에서 모든 중생을 구제해 준다는 약사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바위 남쪽면에 전체 높이 93cm로 새겨져 있다. ‘태평 2년 정축 7월 29일’이라는 글을 통해 만든 시기가 고려 경종 2년(977년)임을 알 수 있다.[3]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있고 옷은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으며 옷주름 표현에서는 가지런함이 엿보인다. 손바닥을 위로 한 왼손에는 약그릇이 놓여져 있으며, 오른손은 손바닥이 정면을 향하고 손가락을 위로 하고 있다.[3]
몸 뒤편에 있는 광배(光背)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계단식으로 새기고 있으며, 주위에는 불꽃무늬가 둘러져 있다. 대좌(臺座)는 연꽃잎이 아래로 향한 모양의 하대석 위에 4개의 짧은 기둥으로 이루어진 중대석이 있으며, 그 위에 5잎의 활짝 핀 연꽃이 불신을 떠받치고 있다.[3]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은 이 불상은 만들어진 연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이 남아 있어 고려 초기 불상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3]
3. 지정 사유
이 마애불상은 고려의 중심 지역이었던 개경과 경기 지역의 고려 초기 불상의 한 예로, 광주 철불이 봉안되었던 사찰의 부속 암자나 원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규로 대표되는 당시의 정치·사회적 배경에서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10세기 전반에 제작되어 977년에 중수되었다.[4]
3. 1. 지정 사유 상세
이 마애불상은 손에 약합을 들고 있는 약사불로, 오른쪽 벽면에 ‘太平二年丁丑七月九日 古石佛在如賜乙 重脩爲今上 皇帝萬歲願(태평 2년 정축 7월 29일에 옛 석불을 중수하며 금상 황제의 만세를 원한다)’이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어 977년(고려 경종 2년)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체 높이는 93㎝이다.[4]약사불상은 무릎 위에 놓은 왼손으로 약합을 들었으며, 오른손은 가슴 높이로 올려 시무외인을 결하고 있다. 체구는 장대하고 소발의 머리에 갸름한 얼굴의 눈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간 두 눈과 오뚝한 코, 작은 입 등의 이목구비는 광주 철불을 비롯한 고려 초기 불상의 얼굴 모습과 유사한 특징을 보여준다. 특히 대의를 우견편단식으로 입은 대의의 단이 왼쪽 어깨에서 제쳐지는 표현은 전 적조사지 출토 철불좌상이나 포천시 출토 철불좌상에서 보이는 점이어서 흥미롭다.[4]
광배는 삼중원의 두광과 신광에 화염문이 새겨져 있고, 대좌는 삼단의 연화대좌로 상대의 연잎이 화려하다. 전체적으로 회화를 연상하게 하는 얕은 저부조로 조각되었으며 그 기법이 섬세하고 정교하다. 또한 양식적인 면에서 광주 철불을 비롯한 고려 초기 불상들과 유사하다.[4]
명문에서는 이 불상을 보수하였다고 하나, 이 불상 자체에 새로 손질을 가한 흔적이 없으므로 대좌나 광배 부분은 추각하였거나 이 불상과 관련된 가구 등을 보수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불상의 최초 조성 시기는 977년보다 30~40년 이른 10세기 전반 무렵일 것으로 추정된다.[4]
이 마애불상이 있는 곳은 지금은 하남시 교산동으로 행정구역 명칭이 바뀌었으나 원래는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교리에 해당한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하사창동의 절터에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광주 하사창리 철불이 출토되었고 춘궁동에는 두 기의 석탑이 전해오고 있어 고려 초기에 이 일대에서 불교가 융성했음을 알 수 있다.[4]
특히, 이 일대는 고려 초기 광주의 호족이었던 왕규의 근거지였다. 왕규는 원래 함규였는데 왕건으로부터 왕씨 성을 사성받아 왕규가 되었으며 딸 둘을 태조 왕건에게 출가시키고, 하나를 혜종에게 출가시키는 등 2대에 걸친 국구로서 막강한 세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고려의 사절로 중국을 다녀오기도 하였고 태조의 임종을 지켜본 신하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였다.[4]
그의 세력적 근거지였던 광주에서 출토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철불상은 고려 왕실과 외척 세력의 배경으로 창건되었을 거대한 규모의 사찰을 상상하게 한다. 이 약사불상 역시 이와 같은 정치, 사회적 배경에서 조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약사불상이 있던 사찰은 광주 철불이 봉안되었던 본 사찰의 부속 암자 혹은 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즉, 이 마애불상은 고려의 중심 지역이었던 개경과 경기 지역의 고려 초기 불상의 한 예라고 판단된다.[4]
3. 2. 명문의 해석과 의미
이 마애불상은 오른쪽에 새겨진 명문 '太平二年丁丑七月九日 古石佛在如賜乙 重脩爲今上 皇帝萬歲願|태평2년정축7월29일 고석불재여석을 중수위금상 황제만세원중국어'을 통해 977년(고려 경종 2년)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명문은 "태평 2년 정축 7월 29일에 옛 석불을 중수하며 금상 황제의 만세를 원한다"는 뜻이다.[4] 명문에서는 불상을 보수하였다고 하나, 불상 자체에는 새로 손질한 흔적이 없다. 따라서 대좌나 광배 부분을 추가로 새겼거나, 불상과 관련된 다른 부분을 보수했을 것으로 보인다. 불상의 최초 조성 시기는 977년보다 30~40년 정도 앞선 10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4]3. 3. 역사적 배경과 의의
하남 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은 977년(고려 경종 2년)에 중수되었음이 명문을 통해 확인된다. 명문에는 '太平二年丁丑七月九日 古石佛在如賜乙 重脩爲今上 皇帝萬歲願(태평2년정축7월29일고석 불재여석을중수위금상 황제만세원)'이라는 내용이 음각되어 있다.[4] 이는 옛 석불을 중수하며 황제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불상의 전체 높이는 93cm이다.[4]마애불은 약합을 든 약사불로, 고려 초기 불상의 특징을 보인다.[4] 무릎 위에 왼손으로 약합을 들고 오른손은 가슴 높이로 올려 시무외인을 하고 있다. 장대한 체구, 소발의 머리, 갸름한 얼굴, 위로 치켜 올라간 눈꼬리, 오뚝한 코, 작은 입 등은 광주 철불을 비롯한 고려 초기 불상들과 유사하다.[4] 특히 우견편단식으로 대의를 입고 왼쪽 어깨에서 대의 단이 제쳐지는 표현은 전 적조사지 출토 철불좌상이나 포천 출토 철불좌상에서도 나타난다.[4]
광배는 삼중원의 두광과 신광에 화염문이 새겨져 있고, 대좌는 삼단의 연화대좌로 상대의 연잎이 화려하다.[4] 전체적으로 얕은 저부조로 조각되었으며, 기법이 섬세하고 정교하다.[4] 양식적으로도 광주 철불을 비롯한 고려 초기 불상들과 유사하다.[4]
명문에는 불상을 보수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불상 자체에는 새로 손질한 흔적이 없다.[4] 따라서 대좌나 광배 부분을 추가로 조각했거나, 불상과 관련된 다른 부분을 보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4] 불상의 최초 조성 시기는 977년보다 30~40년 이른 10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4]
마애불상이 있는 곳은 원래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교리였으나, 현재는 하남시 교산동으로 행정구역이 변경되었다.[4] 이 근처 하사창동 절터에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광주 하사창리 철불이 출토되었고, 춘궁동에는 두 기의 석탑이 남아있어 고려 초 이 지역의 불교 융성을 보여준다.[4]
이 일대는 고려 초기 광주 호족이었던 왕규의 근거지였다.[4] 왕규는 왕건에게서 왕씨 성을 하사받았으며, 딸들을 왕건과 혜종에게 출가시키는 등 막강한 권력을 가졌다.[4] 그는 고려 사절로 중국을 방문하고 태조의 임종을 지킨 인물 중 하나였다.[4]
왕규의 세력 기반이었던 광주에서 출토된 철불상은 고려 왕실과 외척 세력의 지원으로 건립된 대규모 사찰의 존재를 짐작하게 한다.[4] 이 약사불상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약사불상이 있던 사찰은 광주 철불이 봉안되었던 본 사찰의 부속 암자나 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4] 즉, 이 마애불상은 개경과 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한 고려 초기 불상의 한 예시로 평가된다.[4]
4. 사진
이미 '사진' 섹션과 하위 섹션 '사진 자료'의 내용이 동일하므로, 하위 섹션의 내용을 포함하는 '사진' 섹션은 별도로 작성할 필요가 없다.
4. 1. 사진 자료
참조
[1]
간행물
문화공보부고시제758호
https://gjicp.ggcf.k[...]
문화공보부장관
1989-04-15
[2]
간행물
문화재청고시제2010-89호(국가지정문화재 보물지정)
http://gwanbo.mois.g[...]
문화재청
2010-08-25
[3]
기타
현지 안내문 인용
[4]
웹사이트
하남 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河南 校山洞 磨崖藥師如來坐像) -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http://gwanbo.mois.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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