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마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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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마마쓰성은 15세기 히쿠마성으로 처음 축성되었으며, 이후 하마마쓰로 개칭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7년간 머물며,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패배 후 방어 거점으로 삼았다. 에도 시대에는 "출세의 성"으로 불리며, 많은 성주들이 막부의 요직을 거쳤다. 현재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1958년 재건된 천수와 천수문, 후지미 망루 등의 유적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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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마쓰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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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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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름 | 히쿠마성 (曳馬城) 슛세성 (出世城) |
위치 | 하마마쓰시, 시즈오카현, 일본 |
종류 | 일본 성 |
좌표 | 34°42′42.39″N 137°43′29.67″E |
축조 시기 | 1532년경, 1958년 재건 |
건축가 | 이마가와 씨 |
재료 | 나무, 돌 |
높이 | 3층 |
용도 | 박물관 |
상태 | 재건축, 박물관으로 사용 |
역사 | |
건설 시기 | 에이쇼 시대 (1504년 ~ 1520년) 추정 |
건설자 | 이마가와 사다스케? |
개축 | 도쿠가와 이에야스 |
지배 가문 | 이이오 씨 마쓰다이라 씨 호리오 씨 이노우에 씨 미즈노 씨 아오야마 씨 외 |
폐성 연도 | 1871년 (메이지 4년) |
구조 | |
성곽 구조 | 제곽식 평산성 |
천수 | 없음 (망루형 3중 4층, 철근 콘크리트 구조 모의 천수, 1958년 (쇼와 33년)) |
유적 | 석벽, 해자 |
문화재 | |
문화재 지정 | 하마마쓰성터 (하마마쓰시 지정 사적) |
재건축 | 모의 천수 |
2. 역사
1568년 오케하자마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가문에서 벗어나 하마마쓰를 공략하였다. 1570년 이에야스는 시나노의 다케다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거처를 오카자키성에서 하마마쓰 성으로 옮겼다. 당초 이에야스는 덴류강 인근 현재 이와타시 부근에 새로운 성을 쌓을 생각이었지만, 농성전 시 후퇴할 곳이 없다는 판단하에 히쿠마 성을 확장 개수하였다. 히쿠마라는 명칭은 패배를 암시하는 “말을 끈다”라는 의미가 있어, 하마마쓰 장원에서 유래한 하마마쓰 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573년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다케다 신겐에게 대패한 이에야스는 하마마쓰 성으로 도피, 성문을 열어 공성계를 폈다. 신겐의 군대는 이를 수상히 여겨 미카와 방면으로 향했다.
1582년 무렵 확장 공사가 마무리되었으나, 1586년 이에야스는 슨푸 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하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카이 지방에서 간토로 이봉되었고, 하마마쓰 성은 호리오 요시하루의 거성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호리오 가문은 이즈모국 마쓰에번으로 이봉되었고, 마쓰다이라 다다요리가 입성한다.
1609년 하마마쓰 성에서 열린 다과회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나 하마마쓰 번의 사쿠라이 마쓰다이라 가문은 영지가 몰수되었다. 하마마쓰 번은 슨푸번에 편입되었고, 도쿠가와 요리노부의 가신 미즈노 시게나카가 성주로 부임하였다. 1619년 도쿠가와 요리노부가 기이국 기슈번으로 이봉되자, 고리키 다다후사가 입성하였다. 이후 고리키 가문(1619년 ~ 1638년), 오규 마쓰다이라 가문(1638년 ~ 1644년), 오타 가문(1644년 ~ 1678년), 아오야마 가문(1678년 ~ 1702년), 혼조 마쓰다이라 가문(1702년 ~ 1729년, 1752년 ~ 1758년), 오코치·나가사와 마쓰다이라 가문(1729년 ~ 1752년), 이노우에 가문(1758년 ~ 1817년, 1845년 ~ 1868년), 미즈노 가문(1817년 ~ 1845년)이 성주를 역임했다.
2. 1. 초기 역사 (이마가와, 기라, 이이오 시대)
센고쿠 시대 에이쇼 연간(1504년 ~ 1520년) 무렵 도토미 이마가와 가문의 이마가와 사다스케가 사나루 호 동쪽 구릉지에 성을 쌓은 것이 하마마쓰성의 시작이라고 전해지며, 당시에는 '''히쿠마 성'''(曳馬城/引馬城)으로 불렸다. 그러나 축성에 관해서는 다른 설도 존재한다.도토미 국 슈고 시바 가문과 스루가 국 슈고 이마가와 가문과의 세력 다툼에서 히쿠마 성주 오코치 사다쓰나는 시바 가문 측에 가담하여 이마가와 가문에 대항했지만, 이마가와 우지치카에 패배하여 1517년 자결하였다. 이 무렵 성주는 이마가와 가문의 가신 이오 노리쓰라였다고 하며, 이오 노리쓰라가 성을 축성했다는 설도 있다.
무로마치 시대 중기에는 미카와국의 기라 씨가 히쿠마 성을 지배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시바 씨와 이마가와 씨가 항쟁하자, 기라 씨의 가신단은 시바 씨 측의 오코치 사다쓰나와 이마가와 씨 측의 이이오 노리쓰라(혹은 이이오 가네쓰라)로 나뉘어 다투었다. 시바 씨가 이마가와 씨에게 패배하면서 기라 씨는 하마마쓰 지배권을 잃었다. 1514년 이마가와 우지치카로부터 히쿠마 성을 받은 이이오 씨는 정식으로 이마가와 가신이 되었다.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전사하면서 이마가와 가문이 쇠퇴하자, 하마마쓰의 이이오 가문은 이마가와 가문에 반기를 들었다. 1565년 이마가와 가문은 이이오 가문을 공격하여 화친을 맺었다. 이후 하마마쓰 성주 이오 쓰라타쓰는 이마가와 우지자네에게 슨푸로 소환되어 살해되었다. 히쿠마 성은 성주 미망인을 중심으로 지켜지게 되었다.

이마가와 가문 쇠퇴 후, 성주 이이오 렌류는 이마가와 우지자네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혐의를 받아 1565년 이마가와 군에게 포위되었으나 함락되지 않았다. 이마가와 측의 화의 권고를 받아들인 렌류는 슨푸에 사죄하러 갔으나, 이는 계략이었고 렌류는 살해되었다. 이후 히쿠마 성은 렌류의 가신인 에마 씨가 지켰으나, 성내에서는 도쿠가와 파와 다케다 파로 분열되어 내분이 일어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조기에 공략되었다. 일설에는 렌류의 미망인 오타즈노 가타를 중심으로 이이오 씨 잔당이 성을 지켰으나, 이에야스의 항복 권유를 거절하고 저항하다 전사했다고 한다.
2. 2.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
157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케다 신겐의 침공에 대비하여 본거지를 오카자키 성에서 히쿠마 성으로 옮기고, 하마마쓰 장에서 유래한 하마마쓰성으로 개칭하였다.[7] 덴류 강 근처 미쓰케에 새로운 성을 축성하려 했으나, 오다 노부나가의 진언에 따라 히쿠마 성을 확장하였다. '히쿠마'라는 명칭이 패배를 연상시킨다는 이유였다.[7]1573년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다케다 신겐에게 대패하였으나, 공성계를 사용하여 하마마쓰성을 지켜냈다. 이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죽기 직전까지 몰렸고, 나츠메 요시노부 등 가신들의 도움으로 공성계를 펼쳐 야마가타 마사카게 부대의 추격을 따돌렸다.
1582년경 성의 확장 및 개수가 완료되었으나,[7] 1586년 이에야스는 슨푸 성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이에야스는 하마마쓰 성에서 29세부터 45세까지 17년간 머물렀다.
2. 3.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후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 호리오 요시하루와 그의 아들 호리오 타다우지가 하마마쓰 성주를 역임하였다.[2]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호리오 가문은 이즈모국으로 이봉되었다.[2] 에도 시대에는 도쿠가와 요리노부의 영지를 제외하고, 후다이 다이묘들이 성주를 역임하였다.[2] 에도 시대 하마마쓰 성주는 총 9가문 22대에 걸쳐 이어졌으며, 성의 개변 및 개수가 진행되었다.[5] 호리오 씨 재성기에 창건된 천수는 17세기 안에 소실되었고, 이후 천수문이 하마마쓰성을 대표하는 건물이 되었다.[5]하마마쓰 성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연관성 때문에 에도 막부에서 매우 명예로운 임명으로 여겨졌다. 하마마쓰를 통치한 25명의 다이묘 중 대부분은 더 높은 고쿠다카 등급으로 다른 영지로 이전되기 전에 짧은 기간 동안만 하마마쓰에 임명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로주, 교토 쇼시다이, 오사카 조다이, 지샤-부교 등 쇼군 행정부 내에서 고위직을 역임했기 때문에, 하마마쓰 성은 "출세의 성"이라는 별명을 얻었다.[2]
2. 4. 메이지 시대 이후
1873년 폐성령에 따라 성의 건물과 토지가 불하되었고, 산노마루와 니노마루는 택지화되었다.[6] 혼마루 일부는 개발을 면하여, 1950년 하마마쓰성 공원으로 개설되었다.[6] 1958년 하마마쓰 시민들의 모금을 토대로 철근콘크리트 구조물로 천수가 재건되었다.[2] 1959년 성터는 하마마쓰 시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천수 내부는 자료관으로 사용되며, 도쿠가와 이에야스 관련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성터 주변은 벚꽃 명소로도 알려져 있다. 2017년 속 일본 100명성에 선정되었다.[3]3. 구조
하마마쓰성은 남북 약 500미터, 동서 약 450미터 규모였다. 미카타가하라 고원의 자연 경사를 활용하여 천수각이 북서쪽의 가장 높은 지점에 위치하도록 설계되었으며, 자연적인 방어벽은 거의 없었다. 동쪽에는 혼마루, 그 다음에는 제2의 구루와, 제3의 구루와가 동남쪽으로 거의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석벽은 모양이 없는 돌을 사용한 '노즈라즈미' 양식으로 건설되었으며, 원래 히쿠마성의 요새 유적도 외부 방어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3. 1. 천수 구루와
천수각 주변은 천수 구루와라고 불리며, 혼마루에서 독립된 구역이다. 동서 56m, 남북 68m의 불규칙한 다각형으로, 동쪽에는 오테(大手)로 천수문(天守門)이, 서쪽에는 카라메테(搦手)로 우즈미몬(埋門)이 배치되어 있다. 주변은 하치마키(鉢巻) 돌담과 토담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토담에는 병풍접기 등의 요코야(横矢)와 무샤바시리(武者走り)가 설치되어 방어성이 높은 설계였다. 창건 당시에는 농성전을 상정한 장소였다고 생각된다.[6]16세기 말에 축조된 천수대가 남아 있으며, 1958년 복원 천수가 건설되었고, 2014년 천수문과 부근 토담이 복원되었다.
3. 1. 1. 천수

천수는 호리오 씨가 다스린 16세기 말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나, 에도 시대 초기에 소실되어 이후 재건되지 않았다.[6] 당시 천수의 모습을 전하는 자료는 남아 있지 않지만, 같은 호리오 씨가 다스린 마쓰에성은 창건 당시의 하마마쓰성 천수를 참고하여 설계되었으며, 양자의 관계가 주목받고 있다.[9]
노즈라 쌓기로 만들어진 천수 창건 당시의 천수대가 남아있다. 한 변 약 21m의 약간 찌그러진 사각형으로, 서쪽에는 하치만다이(八幡台)라고 불리는 돌출부와, 동쪽에는 쓰케야구라(付櫓)라고 불리는 튀어나온 부분이 있다. 천수대 상부는 안세이 대지진 이후와 부흥 천수 건설 시에 다시 쌓아올린 것으로 보이나, 창건 당시의 모습이 잘 남아있다.
현재 천수대에 세워진 건물은 1958년 4월 26일에 완성된 철근 콘크리트조의 부흥 천수이다. 지상 3층 지하 1층 건물로, 1-2층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하마마쓰에 얽힌 역사 자료를 전시하는 자료관, 3층은 전망대로 사용되고 있다. 1956년 1월에 결성된 하마마쓰성 재건 기성 동맹회가 모금 운동을 전개하여, 모인 돈으로 당시 금액 1395.6만엔을 투입하여 건설되었다.[10] 부흥 천수는 나고야 공업대학에서 명예 교수를 역임한 키도 히사시에 의해 설계되었으며, 마루오카성 천수를 모델로 삼았다.[10] 건설할 때 천수대에 대해 2/3 정도의 크기로 지어졌기 때문에, 사적의 천수보다 작은 건물이 되었다.[11]
3. 1. 2. 천수문
천수문은 16세기 말에 세워진 누문으로[6], 천수 구루와의 동쪽에 위치한다. 개축·개수되었지만 폐성 시까지 존속했다. 에도 시대 초기에 천수가 소실된 이후에는 하마마쓰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었으며, 에도 시대를 통틀어 하마마쓰성을 대표하는 건물이었다.철거되기 전의 천수문의 도면이나 옛 사진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안세이 대지진의 피해 상황을 나타낸 그림과 2009년부터 실시된 발굴 조사의 결과를 바탕으로 2014년에 복원되었다.
3. 1. 3. 우즈미몬
천수 구루와 서쪽에 위치하며, 서단 성 구루와 연결되었다. 하마마쓰시는 "유구가 잔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므로, 다른 유구의 조사와 정비의 진척 상황에 따라 역사적 검증에 기초한 복원 계획을 검토한다"라고 밝혔다.[10]3. 2. 혼마루
혼마루는 천수각 동쪽에 한 단 낮게 위치했으며, 토루와 띠 모양의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북쪽에는 후지미 망루, 동쪽에는 혼마루 뒷문, 남동쪽 모퉁이에는 히시 망루, 남쪽에는 철문과 다몬 망루가 있었다. 에도 시대 초기에는 도쿠가와 쇼군 가문 전용 오나리 어전이 있었으나, 에도 시대 중기에는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폐성 후, 혼마루 서쪽 절반은 하마마쓰성 공원이 되어 후지미 망루 석축 등 유구가 남아 있다. 그러나 동쪽 절반은 1960년대에 혼마루 지형을 깎아 조성했기 때문에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으며, 뒷문, 히시 망루, 철문, 다몬 망루 유구도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도로와 시청이 들어섰다.
3. 2. 1. 후지미 망루
후지미 망루는 하마마쓰성 혼마루의 북쪽에 위치한 망루로, 현재는 석축과 초석의 일부가 남아 있다. 망루의 북쪽은 두꺼운 흙벽 없이 기둥을 드러낸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전방에 자갈이 깔린 어전풍의 건물로, 17세기 중~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12] 18세기 후반 이후의 개수를 거쳐 비교적 장기간 사용되었으며, 후지산을 바라보며 다도 등을 열었다고 추측된다.[12]3. 2. 2. 다몬 망루
다몬 망루는 혼마루와 시미즈곽 사이에 있는 동서로 긴 평옥의 긴 건물이였다. 동쪽에는 혼마루로 향하는 정문인 철문이 설치되어 있었다.폐성 후 망루와 석축 대부분이 사라졌지만, 2014년에 정원로 옹벽 안쪽에서 호리오 씨 시대의 석축 일부가 발견되었으며, 2020년 혼마루 남광장 정비에 맞춰 공개되었다.
3. 3. 시미즈 구루와
혼마루 남쪽을 가늘고 길게 둘러싼 띠 모양의 쿠루와로, 혼마루 방어를 위해 나카도테(中土手, 흙으로 쌓은 둑)를 가진 카라호리(마른 해자)가 있었으며, 동쪽에는 시미즈 문(清水門)이 있었다.[1]북쪽은 하마마츠성 공원으로 조성되었지만, 시미즈 문 터를 포함한 남쪽은 시가지화되었다.[1]
3. 4. 서단 성 구루와
서단 성곽은 천수각 서쪽에 있는 성곽으로, 토루와 토담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외단 성곽에 연결되는 단성문이 있었다.[1] 성곽 전체는 하마마쓰성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1]3. 5. 니노마루
하마마쓰성 니노마루는 혼마루 동쪽에 위치했으며, 번주가 정무와 일상생활을 하는 곳이었다. 동쪽에는 니노마루 뒷문, 남쪽에는 혼마루 정문이 있었다.[1] 니노마루 터는 옛 모토조 초등학교 부지와 시청 부지의 북쪽 절반에 해당한다.[1]3. 5. 1. 니노마루 어전
니노마루 어전은 매각되어 해체되었지만, 상세한 그림이 남아있어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다.3. 6. 산노마루
니노마루 남동쪽에 위치하며, 주위를 흙과 해자로 둘러싸고 중신들의 저택이 늘어서 있었다. 산노마루의 남쪽에는 하마마쓰성의 정문인 오테몬이 있었다.[1]폐성 후에는 흙의 철거와 해자 매립이 진행되어 완전히 시가지화되었다. 오테몬은 현재의 렌자쿠 교차점 부근에 있었다.[1]
4. 민속 자료
하마마쓰 성은 하마마쓰 성주가 막부 요직에 임명되는 일이 많아 "출세성"으로 불린다.
4. 1. 출세성
일반적으로 하마마쓰 성주가 막부의 요직에 임명된 일이 많은 탓에 하마마쓰 성은 '출세성'으로 불린다. 하지만 이노우에 마사모토처럼 불미스러운 일에 관여되어 좌천된 경우도 있다.대표적으로 알려진 출세 인물은 미즈노 다다쿠니이다. 그는 히젠 국 가라쓰번주였지만, 수도 에도에서 너무 멀어 출세길이 막혔다고 판단하여 막부 요인에게 접대와 뇌물 공세를 폈다. 그리하여 하마마쓰 번주 이노우에 마사모토는 좌천되고, 다다쿠니가 번주로 입성했다. 이후 다다쿠니는 지샤부교에 올랐으며, 1828년에는 막부 요직인 노중에 취임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29세부터 45세까지 17년 동안 하마마쓰 성에서 지냈다. 아네가와 전투, 나가시노 전투, 고마키·나가쿠테 전투는 모두 하마마쓰 성이 그의 거점이었을 때 벌어졌다.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에야스는 이곳으로 후퇴하여 최후의 결전을 벌이려 했으나, 이후 상황이 이에야스에게 유리하게 바뀌면서 살아남았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하마마쓰는 잠시 도쿠가와 요리노부가 통치했으며, 이후 에도 시대의 나머지 기간 동안 여러 후다이 다이묘가 성을 다스렸다. 하마마쓰는 도쿠가와 막부 창시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연관성 때문에 매우 명예로운 임명으로 여겨졌다. 하마마쓰를 통치한 25명의 ''다이묘'' 중 대부분은 더 높은 ''고쿠다카'' 등급으로 다른 영지로 이전되기 전에 짧은 기간 동안만 하마마쓰에 임명되었다. 많은 이들이 5명의 ''로주'', 2명의 ''교토 쇼시다이'', 2명의 ''오사카 조다이'', 4명의 ''지샤-부교''를 포함하여 쇼군 행정부 내 고위직을 역임했다. 이러한 이유로 하마마쓰 성은 "출세의 성"을 의미하는 ''슛세 성''이라는 별명을 얻었다.[2]
5. 교통
6. 주변 문화시설 및 관광명소
- 가모 마부치 기념관
- 쇼인테이 - 다실
- 아트시티 하마마쓰
- 하마나호
- 하마마쓰 과학관
- 하마마쓰 시 미술관
- 하마마쓰 시 박물관
- 하마마쓰 시 악기박물관
참조
[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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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Statue of Tokugawa Ieya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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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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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引馬城(浜松市中区元城町)梯郭状に配置された曲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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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経新聞
2015-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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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浜松城跡8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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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信長と同盟、今川・武田氏を撃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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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浜松城や忍城など選定=「続100名城」-日本城郭協会
時事通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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お城の現場より~発掘・復元の最前線【浜松城】出世城の下に埋まっていた豊臣時代の浜松城史
https://shirobito.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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浜松城公園歴史ゾーン整備基本計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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浜松城公園長期整備構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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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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財団法人浜松市文化振興財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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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現在の浜松城に残る家康期の「出世城」<家康編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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