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타가하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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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카타가하라 전투는 1572년, 다케다 신겐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영토를 침공하면서 벌어진 전투이다. 다케다 신겐은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도토미국으로 진격하여,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의 지원군을 포함하여 1만 1천 명의 병력으로 맞섰다. 전투는 다케다 군의 압도적인 전력으로 2시간 만에 도쿠가와 군의 대패로 끝났다. 이에야스는 가까스로 하마마츠 성으로 도망쳤고, 이 전투는 이에야스 생애 최대의 위기로 꼽힌다. 전투 이후 다케다 신겐은 병으로 사망하며 다케다 가문은 가이로 철수하고, 도쿠가와 가문은 이후 나가시노 전투에서 승리하며 세력을 회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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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타가하라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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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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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명칭 | 미카타가하라 전투 (三方ヶ原の戦い) |
로마자 표기 | Mikatagahara no tatakai |
전투 위치 | 도토미국 미카타가하라 주변 (현재 시즈오카현 하마마쓰시) |
구글 지도 검색어 | 미카타가하라 |
관련 전쟁 | 서상 작전 |
날짜 | 1573년 1월 25일 (겐키 3년 12월 22일) |
장소 | 미카타가하라, 도토미국, 일본 |
결과 | 다케다 가문의 승리 |
세부 결과 | 도쿠가와 이에야스 퇴각 다케다 신겐 철수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다케다 가문 |
교전국 2 | 도쿠가와 가문과 오다 가문 연합군 |
지휘관 및 지도자 | |
다케다 가문 | 다케다 신겐 다케다 가쓰요리 바바 노부하루 야마가타 마사카게 나이토 마사토요 사에구사 모리토모 오바타 마사모리 오야마다 노부시게 |
도쿠가와 및 오다 가문 |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카이 다다쓰구 이시카와 가즈마사 오쿠보 다다요 아마노 야스카게 혼다 다다카쓰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사쿠마 노부모리 다키가와 가즈마스 |
병력 규모 | |
다케다 가문 | 27,000 ~ 43,000명 (35,000명) |
도쿠가와 및 오다 가문 | 11,000 ~ 28,000명 (도쿠가와 8,000명, 오다 증원군 3,000명 포함) |
사상자 규모 | |
다케다 가문 | 200 ~ 3,000명 (500명 (우에스기가 문서), 100명 (마쓰다이라키)) |
도쿠가와 및 오다 가문 | 거의 전멸 (2,000명, 1,000명 (이노 문서), 수천명 (가이국지), 500명 (마쓰다이라키)) |
2. 전투의 경위
겐키 3년(1572년), 다케다 신겐은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오다 노부나가 토벌령에 호응하여 상락 작전을 개시했다. 신겐은 병력을 셋으로 나누어 도토미국, 미카와국, 미노국에 대한 동시 침공 작전을 감행했다.[2]
부대 | 병력 | 출발지 및 경로 | 주요 작전 |
---|---|---|---|
야마가타 마사카게 군세 | 5천 명 | 시나노국 스와군에서 동미카와로 침공 | 도쿠가와 가문의 지성을 공략하며 남진, 나가시노성 공략 후 도토미국 진입 |
아키야마 노부토모 군세 | 5천 명 | 다카토 성에서 동미노로 침공 | 이와무라 성 포위 및 함락 |
다케다 신겐 본대 | 2만 2천 명 (호조 가문 원군 2천 명 포함) | 고후시에서 출진하여 스와로 우회, 아오쿠즈레 고개 넘어 도토미국 침공 | 이누이성에서 바바 노부하루 별동대(5천 명) 분리, 본대는 후타마타성으로 향함 |
다케다 군은 총 3만여 명으로, 당시 다케다 가문의 최대 동원 병력이었다. 이들은 빠른 속도로 성들을 함락시켰다. 반면, 도쿠가와 가문의 최대 동원 병력은 1만 5천 명에 불과했고, 병력 분산으로 인해 도토미 방위에는 8천여 명밖에 동원할 수 없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노부나가 포위망으로 인해 긴키 각지의 반란 진압에 바빠 도쿠가와에게 즉시 원군을 보낼 수 없었다.[3] 이러한 상황에서 도쿠가와 군은 다케다 군의 기동력과 세 방향 동시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4]
10월 13일, 다다키 성을 함락시킨 바바 노부하루 부대는 도쿠가와 씨의 본성인 하마마츠 성과 지성인 가케가와 성, 다카텐진 성을 잇는 요충지인 후타마타 성을 포위했고, 다케다 신겐이 이끄는 다케다 군 본대도 후타마타 성으로 향했다. 10월 14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후타마타 성을 지키기 위해 정찰에 나섰지만, 히토코토자카에서 다케다 군 본대와 조우하여 패주했다. (히토코토자카 전투)[1]
10월 16일, 다케다 군 본대도 포위에 가담하여 항복을 권고했다. 후타마타 성에는 1,200명의 병력밖에 없었지만 이를 거부, 10월 18일부터 다케다 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11월 초순에 야마가타 마사카게 부대도 포위에 가담했고, 성의 식수원을 끊긴 것이 치명적이 되어 12월 19일, 목숨을 살려주는 것을 조건으로 개성・항복했다. (후타마타 성 전투) 이로 인해 도토미 국 북부가 다케다 영토가 되었다.[1]
후타마타 성 함락 직전, 사쿠마 노부모리와 다키가와 가즈마스 등이 이끄는 오다 가문의 원군 3천 명이 도착하여 도쿠가와 군은 1만 1천여 명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다케다 군과의 병력 차이가 컸기 때문에, 도쿠가와 군은 하마마쓰 성을 농성할 준비를 했다. 한편, 다케다 군은 12월 22일에 후타마타 성에서 출발하여 엔슈 평야를 지나 하마마쓰 성을 그냥 지나치고 호리에 성을 목표로 삼아 서진하여, 미카타가하라 대지를 통과하려고 하였다.
이에야스는 일부 가신의 반대를 물리치고, 농성전을 포기하고 미카타가하라에서 다케다 군의 배후를 치기로 결정, 하마마쓰 성에서 출격하였다. 같은 날 저녁에 미카타가하라 대지에 도착하였으나, 다케다 군은 어린진(魚鱗陣)을 펴고 도쿠가와 군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도쿠가와 군은 학익진(鶴翼陣)을 편 상태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병력·전술 면에서 떨어지는 도쿠가와 군은 단 2시간여의 전투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주하게 된다.
다케다 군의 사상자는 겨우 2백 명 정도였는데 비하여, 도쿠가와 군은 도리이 시로자에몬, 나루세 마사요시같은 유력 가신과 오다 군의 히라테 히로히데 등 많은 무장을 잃고 2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4] 도쿠가와 군을 유인하여 야전으로 끌어들인 것을 포함하여 전투는 대부분 다케다 군의 계산대로 진행되었으나, 다만 전투 개시 시각이 늦었기 때문에 도쿠가와 군을 궤멸시키지 못하고 이에야스도 놓치고 말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가신인 나쓰메 요시노부와 스즈키 규자부로가 이에야스의 대역을 맡은 사이, 몇 안 되는 병사의 호위를 받으며 하마마쓰성으로 도망쳤다. 이때, 이에야스는 너무 공포에 쌓인 나머지 대변을 봤다고 전해질 정도로, 후의 이가고에와 함께 이에야스 인생 최대의 위기로 꼽힌다.[4] 하마마쓰성에 돌아온 이에야스는 모든 성문을 열고 화톳불을 피우는 공성계를 썼다.
한편, 하마마쓰까지 추격해온 야마가타 마사카게는 공성계에 걸려들어 성내에 돌입하지 않고 철수하였다. 그날 밤, 이에야스는 오쿠보 다다요 등에게 명령하여 하마마쓰 성 북쪽 약 1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사이가가케 부근의 다케다 군 숙영지에 야습을 가하였다(사이가가케 전투(犀ヶ崖の戦い)). 혼란에 휩싸인 병사들이 절벽에 떨어져 죽는 등 다케다 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4]
2. 1. 배경
센고쿠 시대 가이의 다케다 가문은 시나노를 침공하여 영지를 확대하며 에치고의 우에스기 가문과 대립하였으나, 에이로쿠 4년(1561년)의 가와나카지마 전투를 계기로 방침을 전환하여 그때까지 동맹국이던 스루가의 이마가와 가문에 침공을 개시하였다.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이마가와 가문의 당주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와리의 오다 노부나가에게 패사하자, 이마가와 가문에 신종하고 있던 미카와의 마쓰다이라 모토야스(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다 가문과 동맹을 맺고 독립하였다.스루가에 침공한 다케다 가문은 스루가에서 미카와의 도쿠가와 씨와 이마가와 가문의 동맹국이었던 사가미의 호조 가문에게 협공 당하는 형세가 되었다. 이윽고 다케다 가문은 호조 가문을 격퇴하고 스루가를 확보하여, 도쿠가와 가문의 영지인 미카와·도토미 방면으로 침공을 개시하였다. 다케다 가문의 침공에 대해 도쿠가와 가문은 동맹국 오다 가문의 후원을 받으며 대항하여, 도카이도 지역에서는 오다·도쿠가와 연합군과 다케다 군의 대결 구도가 성립하게 되었다.
겐키 원년(1571년), 무로마치 막부 제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오다 노부나가 토벌령을 발령하고(제2차 노부나가 포위망), 다케다 신겐은 이에 응하는 형태로 겐키 2년에 도쿠가와 가문의 영지인 도토미·미카와에 대규모 침공을 감행하였다(단, 이때까지는 다케다 가문과 오다 가문이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다 가문은 도쿠가와 가문에게 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같은 해 말에는 호조 우지야스의 죽음을 계기로 호조 가문과 다케다 가문이 화의를 맺어 고소 동맹이 부활함에 따라 후방의 안전을 확보하게 된 신겐은 다음 해 겐키 3년(1572년)에 서상 작전을 개시한다.
1572년 10월, 동쪽의 경쟁자들(후호조 씨의 오다와라와 아와의 사토미 씨)과 동맹을 맺고, 북쪽의 경쟁자 우에스기 겐신에 대항하기 위해 눈이 북쪽 산길을 막히기를 기다린 후, 다케다 신겐은 30,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그의 수도 고후에서 남쪽으로 도토미 국으로 진군했고, 야마가타 마사카게는 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동쪽의 미카와 국으로 진군했다. 그들은 곧 요시다 성과 후타마타 성을 점령했다.[2]
신겐은 8,000명의 병력을 가진 하마마츠 성에 주둔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의 동맹인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받은 3,000명의 증원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러나 다케다의 의도는 이에야스를 공격하거나 하마마츠를 점령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노부나가를 멸망시키고 교토로 진군하기 위해 가능한 한 충돌을 피하고자 했다.[3]
노부나가로부터 파견된 사쿠마 노부모리와 다키가와 가즈마스, 그리고 그의 장군들인 마쓰다이라 고레타다 (후코즈)와 이시카와 가즈마사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이에야스는 다케다 군대가 그의 영토를 방해 없이 통과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을 거부하고, 당시 하마마츠 바로 북쪽에 위치한 미카타가하라라고 불리는 고원에 군대를 배치했다.[2][4]
2. 2. 신겐의 상락 작전
겐키 3년(1572년), 다케다 신겐은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오다 노부나가 토벌령에 호응하여 상락 작전을 개시했다. 신겐은 병력을 셋으로 나누어 도토미국, 미카와국, 미노국에 대한 동시 침공 작전을 감행했다.[2]- 야마가타 마사카게 군세 5천 명: 9월 29일, 시나노국 스와군에서 동미카와로 침공, 도쿠가와 가문의 지성을 공략하며 남진하여 나가시노성을 공략한 후 도토미국으로 진입했다.
- 아키야마 노부토모 군세 5천 명: 다카토 성에서 동미노에 침공, 이와무라 성을 포위하여 함락시켰다.
- 다케다 신겐의 본대 2만 2천 명( 호조 가문의 원군 2천 명 포함): 10월 3일, 고후시에서 출진하여 스와로 우회한 뒤, 아오쿠즈레 고개를 넘어 도토미국으로 침공했다. 이누이성에서 바바 노부하루가 이끄는 5천 명의 별동대를 다다라이 성으로 보내고, 본대는 후타마타성으로 향했다.
다케다 군은 총 3만여 명으로, 당시 다케다 가문의 최대 동원 병력이었다. 이들은 빠른 속도로 성들을 함락시켰다. 반면, 도쿠가와 가문의 최대 동원 병력은 1만 5천 명에 불과했고, 병력 분산으로 인해 도토미 방위에는 8천여 명밖에 동원할 수 없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노부나가 포위망으로 인해 긴키 각지의 반란 진압에 바빠 도쿠가와에게 즉시 원군을 보낼 수 없었다.[3] 이러한 상황에서 도쿠가와 군은 다케다 군의 기동력과 세 방향 동시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4]
2. 3. 히토코토자카 전투·후타마타성 전투
겐키 3년(1572년) 10월 3일, 다케다 신겐이 이끄는 다케다 군은 병력을 둘로 나누어 도토미 국과 미카와 국으로 동시에 침공을 시작했다.[1]- 야마가타 마사카게는 아키야마 토라시게와 함께 별동대를 이끌고 시나노에서 미카와로 침공했다. 군세는 5,000명으로 추정된다. 9월 29일, 시나노 국 스와에서 도쿠가와 씨의 지성인 타케후시 성 공략을 시작으로 동미카와로 침공하여 남진했다. 동미카와의 중요한 지성인 나가시노 성을 공략한 후, 도토미 국으로 침공했다.[1]
- 다케다 신겐이 이끄는 22,000명의 본대(그 중 호조 씨의 원군 2,000명)는 10월 3일, 고후에서 출진하여 야마가타 부대와 마찬가지로 스와로 우회한 후, 아오쿠즈레 고개에서 도토미 국으로 침공했다. 도중에 이누이 성에서 바바 노부하루 부대 5,000명을 별동대로 서쪽의 타다라이 성으로 향하게 하여 갈라진 후, 남진하여 요지인 후타마타 성으로 향했다.[1]
총 2만 7천 명의 군세는 당시 다케다 씨의 최대 동원 병력이었다. 원래 작은 지성 하나를 함락시키는 데에도 한 달 가까이 걸리는 것을 평균 3일 만에 함락시켰다. 한편 도쿠가와 씨의 동원 병력은 최대 15,000명 정도에 불과했고, 게다가 미카와 국에 야마가타 부대가 침공했기 때문에, 도토미 국 방어를 위해 실제로는 8,000명 남짓밖에 동원할 수 없었다.[1]
10월 13일 다다키 성을 함락시킨 바바 노부하루 부대는 도쿠가와 씨의 본성인 하마마츠 성과 지성인 가케가와 성・다카텐진 성을 잇는 요충지인 후타마타 성을 포위했고, 다케다 신겐이 이끄는 다케다 군 본대도 후타마타 성으로 향했다. 10월 14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후타마타 성을 지키기 위해 정찰에 나섰지만, 히토코토자카에서 다케다 군 본대와 조우하여 패주했다. (히토코토자카 전투)[1]
10월 16일에는 다케다 군 본대도 포위에 가담하여 항복을 권고했다. 후타마타 성에는 1,200명의 병력밖에 없었지만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10월 18일부터 다케다 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11월 초순에 야마가타 마사카게 부대도 포위에 가담했고, 성의 식수원을 끊긴 것이 치명적이 되어 12월 19일, 목숨을 살려주는 것을 조건으로 개성・항복했다. (후타마타 성 전투) 이로 인해 도토미 국 북부가 다케다 영토가 되었다.[1]
2. 4. 미카타가하라 전투
후타마타 성 함락 직전, 사쿠마 노부모리와 다키가와 가즈마스 등이 이끄는 오다 가문의 원군 3천 명이 도착하여 도쿠가와 군은 1만 1천여 명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다케다 군과의 병력 차이가 컸기 때문에, 도쿠가와 군은 다케다 군이 본성 하마마쓰 성을 노릴 것이라 생각하고 농성 준비를 했다. 한편, 다케다 군은 12월 22일에 후타마타 성에서 출발하여 엔슈 평야를 지나 하마마쓰 성을 그냥 지나치고 호리에 성을 목표로 삼아 서진하여, 미카타가하라 대지를 통과하려고 하였다.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이에야스는 일부 가신의 반대를 물리치고, 농성전을 포기하고 미카타가하라에서 다케다 군의 배후를 치기로 결정하여, 하마마쓰 성에서 출격하였다. 같은 날 저녁에 미카타가하라 대지에 도착하였으나 후방을 치기는커녕, 다케다 군은 어린진(魚鱗陣)을 펴고 도쿠가와 군을 맞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도쿠가와 군은 학익진(鶴翼陣)을 편 상태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병력·전술 면에서 떨어지는 도쿠가와 군에게 승산이 있을리가 없어, 도쿠가와 군은 단 2시간여의 전투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주하게 된다.
다케다 군의 사상자는 겨우 2백 명 정도였는데 비하여, 도쿠가와 군은 도리이 시로자에몬, 나루세 마사요시같은 유력 가신과 오다 군의 히라테 히로히데 등 많은 무장을 잃고 2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4] 도쿠가와 군을 유인하여 야전으로 끌어들인 것을 포함하여 전투는 대부분 다케다 군의 계산대로 진행되었으나, 다만 전투 개시 시각이 늦었기 때문에 도쿠가와 군을 궤멸시키지 못하고 이에야스도 놓치고 말았다.
오후 4시쯤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도쿠가와 측의 조총병들은 다수의 농민 투석병들과 함께 다케다 군을 향해 사격을 시작했다. 일본 전쟁에서 다소 생소했던 화기는 기병 돌격을 억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우월한 무기가 신겐의 압도적인 병력과 대형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이러한 예상은 나이토 마사토요의 선봉 기병대가 공격을 시작하여 도쿠가와 우익의 혼다 타다카츠 부대를 빠르게 제압하면서 곧바로 깨졌다.
다케다 기병대는 이 틈을 이용하여 오다의 지원군[5]을 빠르게 공격한 후 도쿠가와 후방으로 돌격했다. 오다군은 곧 제압되어 궤멸되었고, 장교 히라테 히로히데는 전사했으며, 사쿠마 노부모리와 다키가와 카즈마스는 전투에서 도주했다. 도쿠가와 부대가 지세를 양보하지 않고 다케다 우익의 진격을 떨쳐내며 좌익에 대한 유사한 공격이 좌절되어 도쿠가와 중앙의 포위를 막았다.[6]
신겐은 선봉대를 물리고 휴식을 취할 기회를 주었다. 그는 군대의 본대에서 새로운 기병대를 불러내 다케다 가쓰요리, 오바타 마사모리, 사에구사 모리토모에게 약해진 도쿠가와 진영으로의 2개 방향 기병 돌격을 명령했다. 그들은 다케다 군의 보병 중심의 본대에 바싹 뒤따랐고, 그들의 연합된 공격은 이미 붕괴된 도쿠가와 군을 무질서한 후퇴로 몰아넣었다.
급속히 붕괴되는 군대를 재정비하기 위해 이에야스는 그의 지휘관 오쿠보 타다요에게 그의 금색 부채 깃발(''우마지루시'')을 언덕에 꽂고 병사들을 사이가다케 성읍으로 집결시키라고 명령했다. 이에야스는 갇힌 그의 장군 미즈노 타다시게를 구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다케다 군과 다시 교전하려 했지만, 그의 가신 나쓰메 요시노부의 설득으로 후퇴했다.
도쿠가와 씨족의 수장으로서 그의 생명은 너무나 중요하다고 가신들이 설득하자 이에야스는 전장에서 도주했다. 도쿠가와 군의 퇴각을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나쓰메 요시노부는 그의 지휘 아래 남아 있던 소수의 병사들을 이끌고 진격하는 다케다 군을 향해 자살 돌격을 감행하다가 전사했다. 전투에서 사망한 다른 주요 도쿠가와 가신들로는 마쓰다이라 고레타다, 나루세 마사요시, 도야마 고사쿠, 엔도 우콘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다케다 군에게 포위되어 전멸했다.[4]
이에야스가 하마마쓰 성으로 돌아왔을 때는 단 5명의 수행원만이 함께였다. 하마마쓰에는 이미 전투가 좋지 않게 흘러갔다는 소문이 퍼져서, 마을은 공황 상태에 빠지기 직전이었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야스는 성문을 열어두고 퇴각하는 군대를 안전하게 안내하기 위해 화로에 불을 지피라고 명령했다. 사카이 타다쓰구는 큰 군용 북을 쳐서, 돌아오는 병사들에게 용감한 퇴각을 하고 있다고 설득하려 했다. 바바 노부하루와 야마가타 마사카게가 이끄는 다케다 선봉대가 북소리를 듣고 화로와 열린 성문을 보자, 이에야스가 함정을 계획했다고 오해하여 하마마쓰 바로 앞, 현 위치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야영을 했다.[4]
밤에 오쿠보 타다요와 아마노 야스카게가 이끄는 약 100명의 도쿠가와 보병과 16명의 조총병 부대가 타케다 진영을 공격하여[8] 타케다 군의 선봉을 혼란에 빠뜨렸다. 도쿠가와군의 잔여 병력에 대한 확신이 없고, 오다 노부나가 또는 우에스기 겐신으로부터의 증원군이 오고 있다는 우려로 다케다 신겐은 자신의 영토로 군대를 철수하기로 결정했다.[9]
간세이 조슈 쇼카후에 따르면, 유명한 이가 닌자 핫토리 한조는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훌륭한 공을 세웠다. 이후 도쿠가와 막부가 편찬한 주요 사무라이 계보에 따르면 한조는 "치쿠안"이라는 타케다 첩자를 생포했으며, 단 30명의 비대칭적인 반격으로 텐류강에서 진격하는 타케다군을 지연시켰다.[10]

처음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사쿠마 노부모리는, 다케다 군의 다음 목표는 본성인 하마마츠 성이라고 생각하고, 농성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한편 다케다 군은 후타마타 성 공략 3일 후인 12월 22일에 후타마타 성을 출발하여 엔슈 평야 내를 서진한다. 이것은 하마나 호에 돌출된 쇼나이 반도 북부에 위치한 호리에 성(현재의 하마마츠시주오구칸잔지초)을 표적으로 하는 듯한 진군이었으며, 다케다 군은 하마마츠 성을 지나쳐 그 너머에 있는 미카타가하라 대지를 목표로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를 알게 된 이에야스는 일부 가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농성책을 미카타가하라에서 호리타 언덕을 내려오는 다케다 군을 배후에서 습격하는 적극적인 공격책으로 변경하고, 오다로부터의 원군을 더한 연합군을 이끌고 하마마츠 성에서 추격에 나섰다. 근세의 군기물에서는 군의가 하마마츠 성에서 열렸다고 되어 있지만, 본인은 참전하지 않았지만 형이 참전하고 있는 오쿠보 타다요의 『미카와 이야기』에서는 이에야스가 하마마츠 성에서 출진한 후(즉 다케다 군에 더 가까운 장소)에 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같은 날 저녁 미카타가하라 대지에 도착하지만, 다케다 군은 어린의 진을 펼치고 만반의 태세로 기다리고 있었다. 눈앞에 있을 리 없는 적의 대군을 본 이에야스는 학익의 진을 펴고 양군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불리한 형태로 전투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연합군은 다케다 군에게 격파되어, 해 질 녘까지 불과 2시간 정도의 회전에서 연합군은 다수의 무장이 전사하여 괴주한다.
다케다 군의 사상자 200명에 비해 도쿠가와 군은 사상자 2,000명을 냈다. 특히 토리이 시로자에몬, 나루세 토조, 혼다 타다자네, 타나카 요시츠나와 같은 유력한 가신을 비롯하여, 앞선 후타마타 성 전투에서의 치욕을 풀려 했던 나카네 마사테루, 아오키 사다하루와, 이에야스의 몸을 대신한 나츠메 요시노부, 스즈키 큐자부로와 같은 가신, 또한 오다 군의 히라테 히로히데와 같은 무장을 잃었다. 야전으로 몰고 간 것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다케다 군의 노림대로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전투 개시 시각이 늦었던 점과 나이토 노부나리, 혼다 타다카츠 등의 무장의 방어전으로 인해, 이에야스 본인을 쳐 죽일 수는 없었다.
이 전투에서 도쿠가와 군은 학익진을 펼쳤고, 다케다 군은 어린 진으로 대기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학익진은 일반적으로 수적으로 우세한 측이 상대를 포위할 때 사용하는 진형이며, 반대로 어린 진은 열세인 측이 적진 돌파를 노릴 때 사용하는 진형이다. 수적으로 열세인 도쿠가와 군, 수적으로 우세한 다케다 군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양측 모두 정석과는 다른 진형을 펼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도쿠가와 군이 학익진을 펼친 이유에 대한 설
# 애초에 다케다 군 본대는 떠났고, 대기하고 있는 것은 소수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 처음부터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병력을 크게 보이게 하여 상대의 동요를 유발하려 했다.
; 다케다 군이 어린 진을 펼친 이유에 대한 설
# 학익진을 보고 대장 목(이에야스)을 쳐 죽이는 데 목표를 두었다(학익은 양 날개에 비중을 두기 때문에 중앙은 필연적으로 얇아진다).
# 오다 군 중에서도 특히 증원 병력이 많은 사쿠마 노부모리가 원군으로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에, 오다 군의 지원을 고려하여 상대방을 많게 예상했다.
이 외에도 여러 설이 있지만, 어느 것도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사실 미카타가하라 전투의 주 전장은 밝혀지지 않았다. 현재의 미카타가하라 묘원(하마마츠시주오구 네아라이초)에 옛 전장의 비석은 있지만, 특정된 것은 아니다.
히라야마 유에 따르면, 현재 주로 4가지 유력한 설이 있다고 한다. 즉, "아즈키모치"설, "네아라이"(이와이다자카 상)설, "오오시바라"설, "오오야"설이다. 다만, 주 전장에 대해 직접 기록한 사료가 적다는 점과 관련 사적이 개발로 인해 이전되거나 소멸된 것이 있어 검증이 어려워 결론이 나지 않았다.
한편, 사이가야 전투의 옛 전장으로는 사이가야 자료관(하마마츠시 주오구 시가야초)이 있으며, 또한 전투의 고사에서 하마마츠시에 누노바시라는 지명이 있다.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오야마다 노부시게가 투석대를 이끌었다는 일화가 알려져 있다. 미카타가하라에서의 투석대에 관해, 『노부나가 공기』 여러 판본에서는 다케다 씨가 "수역지자(水役之者)"라고 불린 200~300명의 투석 부대가 조약돌을 던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미카와 이야기』에서도 다케다 씨가 "고닌바라(郷人原)"라고 불린 투석대를 이끌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료에서는 투석대를 이끈 인물이 오야마다 노부시게라고 기술되어 있지 않지만, 에도시대에는 쇼토쿠 4년 (1714년)의 토야마 노부하루 『총견기(소켄키)』에서는 신겐은 노부시게에게 선봉을 명하고, 그와는 별도로 "수역지자"를 선두에 세워 조약돌을 던지게 했는데, 이는 "수역지자"를 이끈 인물이 오야마다 노부시게라고 오독될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
1910년 (메이지 43년)에는 육군 참모본부 편찬 『일본전사 미카타가하라 역』에서 노부시게가 투석대를 이끌었다고 기록되었고, 1938년 (쇼와 13년)의 『대일본전사』에서는 육군 중장 이노우에 이치지가 마찬가지로 투석대를 이끈 인물이 오야마다 노부시게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노부시게가 투석대를 이끌었다는 점이 명확히 부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속설이 성립되었다고 생각된다.
2. 5. 이에야스의 패주와 사이가가케 전투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가신인 나쓰메 요시노부와 스즈키 규자부로가 이에야스의 대역을 맡은 사이, 몇 안 되는 병사의 호위를 받으며 하마마쓰성으로 도망쳤다. 이때, 이에야스는 너무 공포에 쌓인 나머지 대변을 봤다고 전해질 정도로, 후의 이가고에와 함께 이에야스 인생 최대의 위기로 꼽힌다.[4] 하마마쓰성에 돌아온 이에야스는 모든 성문을 열고 화톳불을 피우는 공성계를 썼다. 그리고 유명한 시카미 상을 그리게 하고, 더운물에 만 밥을 먹고 바로 코를 골면서 잤다고 한다.한편, 하마마쓰까지 추격해온 야마가타 마사카게는 공성계에 걸려들어 성내에 돌입하지 않고 철수하였다. 그날 밤, 이에야스는 오쿠보 다다요 등에게 명령하여 하마마쓰 성 북쪽 약 1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사이가가케 부근의 다케다 군 숙영지에 야습을 가하였다(사이가가케 전투(犀ヶ崖の戦い)). 혼란에 휩싸인 병사들이 절벽에 떨어져 죽는 등 다케다 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4]
단, 사이가가케 전투는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편찬된 사료에 처음 등장하며, 그 기록에 황당무계한 일화가 많아서 사실 여부는 불투명하다.
3. 전투의 결과
다케다 군은 대부분의 병력을 온존한 상태로 도토미국에서 해를 넘기고 동 미카와로 침공하여, 1개월 만에 미카와의 방위 요충지 노다 성을 공략하였다(노다성 전투). 그러나 곧 신겐이 병으로 급사하여 다케다 군은 가이국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도쿠가와 가문 뿐만 아니라 오다 가문에게도 큰 위기였으나, 결과적으로 신겐의 병사라는 행운을 만나 무사할 수 있었다.[12][13]
그 뒤, 다케다 가문은 다케다 가쓰요리가 가독을 상속하나, 그 틈을 노리고 이에야스는 다케다군 철수 후 반년도 지나지 않은 8월에 나가시노성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오쿠다이라 사다요시·사다마사 부자에 대한 계략도 성공시켜, 그 뒤 벌어진 나가시노 전투에서 크게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가쓰요리는 기본적으로 전투의 공적을 유지하는 데는 성공하여, 신겐도 함락시키지 못했던 다카텐진성을 함락시키는 등 도토미 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노부나가 포위망의 유지에도 노력하였으나, 나가시노 전투에서 대패하여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
밤에 오쿠보 타다요와 아마노 야스카게가 이끄는 약 100명의 도쿠가와 보병과 16명의 조총병 부대가 타케다 진영을 공격하여[8] 타케다 군의 선봉을 혼란에 빠뜨렸다. 도쿠가와군의 잔여 병력에 대한 확신이 없고, 오다 노부나가 또는 우에스기 겐신으로부터의 증원군이 오고 있다는 우려로 다케다 신겐은 자신의 영토로 군대를 철수하기로 결정했다.[9]
간세이 조슈 쇼카후에 따르면, 유명한 이가 닌자 핫토리 한조는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훌륭한 공을 세웠다. 이후 도쿠가와 막부가 편찬한 주요 사무라이 계보에 따르면 한조는 "치쿠안"이라는 타케다 첩자를 생포했으며, 단 30명의 비대칭적인 반격으로 텐류강에서 진격하는 타케다군을 지연시켰다.[10]
미카타가하라 전투는 다케다 신겐의 군사 작전 중 가장 유명한 전투 중 하나였으며, 전국 시대의 "가장 주목할 만한 기병 전술" 시연 중 하나였다. 이 전투는 또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있어 가장 결정적인 패배였으며, 이에야스의 군대가 효과적으로 전멸하고 다이묘 자신은 허세와 위험한 야간 기습을 통해 간신히 죽음을 면했다.[11]
1573년 4월 12일, 신겐은 시나노국 이나군 고마바에서 병사하였다.[17][18]
다케다 씨에서는 신겐의 죽음을 은폐하고, 넷째 아들인 다케다 가쓰요리가 가독을 이었다. 1574년에는 히가시미노 도야마 씨의 본거지 이와무라성을 포위(이와무라성 전투)하고, 아케치성을 함락(아케치성 전투)시켰다.
1575년 5월 21일에 미카와에서 일어난 나가시노 전투에서는 다케다 측이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에게 패배하였다.
1581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도토미국 다카텐진성 포위에 대해 가쓰요리는 구원을 보내지 못한 채 다카텐진성은 함락되고, 1582년 3월에는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의 다케다령 침공(고슈 정벌)으로 인해, 다케다가는 멸망했다.
4. 미카타가하라 전투를 둘러싼 논점
통설에 따르면, 미카타가하라 전투에 이르는 다케다 신겐의 서상 작전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오다 노부나가 토벌을 요청한 데 따른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와 반대로,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다케다 신겐의 승리를 본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오다 노부나가를 포기하고 신겐과 결탁하여 정권 유지를 꾀했다는 설이 등장했다. 즉, '''요시아키의 거병이 신겐의 서상의 원인이 된 것이 아니라, 신겐의 서상이 요시아키의 거병의 원인이 되었다'''는 해석이다.[17][18] 이 설에 따르면,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오다 노부나가 토벌을 제국에 호소한 것은 다음 해 1573년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굳이 출격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가신이나 구니](국인)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혹은 오다・다케다 씨 중 어느 쪽이 이기든 전투 후 도쿠가와에게 유리하도록 전략적 어필을 노렸다는 설 등이 있다. 또한, 도발에 넘어가는 척하며 하마마쓰 성 근처에 다케다 군을 묶어두기 위한 시간 벌기를 노리고 있었다는 전술적인 설도 있다.[19]
『당대기』, 『사전기문』 등의 사료에 따르면, 이에야스는 싸울 생각이 없었지만 정찰을 나갔던 부하가 작은 싸움을 시작했고, 그들을 성으로 돌려보내려는 사이에 전투에 휘말렸다는 기록도 있다.
최근에는 신겐이 처음부터 하마마쓰 성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호리에 성을 함락시켜 하마마쓰 성을 병량 공세로 하려고 했고, 그 의도를 이에야스가 눈치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이 전투에서 도쿠가와 군은 학익진을 펼쳤고, 다케다 군은 어린 진으로 대기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학익진은 일반적으로 수적으로 우세한 측이 상대를 포위할 때 사용하는 진형이며, 어린 진은 열세인 측이 적진 돌파를 노릴 때 사용하는 진형이다. 수적으로 열세인 도쿠가와 군과 우세한 다케다 군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양측 모두 정석과는 다른 진형을 펼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쿠가와 군이 학익진을 펼친 이유에 대해서는 다케다 군 본대가 떠났고 소수만 대기하고 있다고 예상했기 때문이라는 설, 처음부터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병력을 크게 보이게 하여 상대의 동요를 유발하려 했다는 설 등이 있다. 다케다 군이 어린 진을 펼친 이유에 대해서는 학익진을 보고 대장(이에야스)을 쳐 죽이는 데 목표를 두었다는 설, 오다 군 중에서도 증원 병력이 많은 사쿠마 노부모리가 원군으로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오다 군의 지원을 고려해 상대를 많게 예상했다는 설 등이 있다.
5. 참전 무장
도쿠가와 군 | 오다 군 | 다케다 군 |
---|---|---|
오다 노부나가가 파견한 원군 무장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신장공기에는 사쿠마 우에몬, 히라테 진자에몬, 미즈노 시모노노카미가 대장으로 파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쓰다이라기에는 히라테(히로히데), 미즈노(노부모토), 하야시(히데사다), 사쿠마(노부모리)가, 사쿠마 군기에는 사쿠마 우에몬노조를 대장으로 7명의 대장(사시코사루)이 파견되었다고 한다. 아케치 군기에는 사쿠마 우에몬노조, 하야시 사도노카미, 다키가와 사콘쇼겐이 5천여 기를 거느리고 참전했다고 하며, 소켄키에는 사쿠마 우에몬노조, 히라테 진자에몬을 양대장으로 하야시 사도노카미, 미즈노 시모노노카미, 모리 가와치노카미, 미노 삼인중(이나바 요시미치, 안도 모리나리, 우지이에 나오모토)을 포함하여 총 3천 명을 보냈다고 한다.[15][16]
6. 일화
- 패주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배가 고파 주막 노파에게 떡을 사 먹던 중 적의 습격을 받았다. 돈을 내지 못하고 도망갔으나, 노파가 끝까지 따라가 돈을 받아냈다고 한다. 이 일화에서 주막이 있던 지역은 아즈키모치(小豆餅), 노파가 돈을 받은 지역은 제니토리(銭取)라는 지명이 붙었다. 하지만, 간신히 도망가던 이에야스가 주막에 들렀거나, 말을 탄 이에야스를 노파가 걸어서 따라갔다는 점은 신빙성이 낮아 보인다.[11]
- 사이가가케 전투 후, 사이가가케 절벽 아래로 추락사한 다케다 병사들의 신음 소리가 들려 사람들이 두려워했다. 이에야스는 승려를 초청해 병사들의 넋을 기리는 공양을 했고, 이후 신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 공양이 엔슈 다이넨부쓰의 기원이라고 전해진다.[20]
- 정월에 문 앞에 소나무나 대나무를 장식하는 가도마쓰는 헤이안 시대부터 있었던 풍습이다. 하지만, 현재 일반적인 방식인 소기(そぎ, 대나무를 비스듬하게 잘라 장식하는 방법)를 처음 한 것은 이에야스라고 한다. 대나무의 일본식 음 '다케'를 다케다 가문에 빗대어 "(미카타가하라에서는 대패했지만) 다음에는 꼭 베겠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 하마마츠 시내의 "아즈키모치"(중앙구)와 "제니토리"(와고초)는 패주 중인 이에야스가 찻집 노파에게 아즈키모치를 샀지만, 다케다 군의 습격으로 돈을 지불하지 않고 도망쳤고, 나중에 노파가 쫓아와 떡값을 받아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출처가 불분명하고,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대에 성립된 전승으로 여겨진다.
- 패주 중이던 이에야스는 농가에 음식을 청했고, 집주인이 죽을 제공했다. 훗날 이에야스는 이 농민에게 "오가이"라는 성을 주고 촌장으로 삼았다. 또한, 이에야스가 하마마츠 하치만구 동굴에 숨었을 때, 말의 흰 꼬리가 밖으로 나와 있었다. 이를 알아챈 농민이 알려주어 이에야스는 꼬리를 숨기고 무사히 도망쳤고, 훗날 이 농민에게 "시라오"라는 성을 내렸다.
- 사이가 절벽 전투 후, 절벽 아래에서 다케다 병사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이에야스는 승려 소엔을 불러 공양을 했고, 이후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이 공양이 엔슈 다이넨부쓰의 기원이며,[20] 전승으로 인해 "누노바시"라는 지명이 생겼다. 하마마츠에는 "누노바시의 눈"이라는 과자가 있다.
- 패주 중인 이에야스가 변실금을 하자, 가신에게 "'''이것은 된장이다!'''"라고 우겼다는 일화가 있지만, 출처가 불분명하다. 비슷한 이야기가 『미카와 후도키』에는 히토코토자카 전투 후의 이야기로 되어 있다.
- 문송의 습관은 헤이안 시대부터 있었지만, 현재 일반적인 형태인 "소기"로 한 것은 이에야스이며, 대나무를 다케다 가문에 비유하여 "(미카타가하라에서는 대패했지만) 다음은 베겠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 철수 전 이에야스는 기마 사격으로 다케다 군 몇 명을 쓰러뜨렸다고 『노부나가 공기』에 기록되어 있다.
- 패배 후 이에야스가 하마마츠 성으로 돌아왔을 때, 밤늦게 적은 수행원만 데리고 와서 영주의 귀환으로 믿어지지 않아 한동안 성에 들어가지 못했다.
- 사카이 다다쓰구가 성 망루에서 북을 쳐 아군을 고무시키고, 다케다 군에게 복병이 있는 척하여 물러서게 했다는 "사카이의 북" 이야기는 가와타케 모쿠아미의 『북소리 지용삼략』(후에 신 가부키 십팔 번의 한 편)이 1873년(메이지 6년) 무라야마자에서 초연되어 인기를 얻으면서 알려졌다. 『미카와 후도키』가 근거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해당 내용은 없고 성문을 열어둔 이야기를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 전초전에서 이와타·미쓰케 정 사람들이 도쿠가와 군에 협력하여 다케다 군에 대항했고, 이에야스에게서 특권을 받았다(『미쓰케 정 밭 토지 정납 유래서』).[21]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용 |
---|
마을 사람들이 봉화를 올려 다케다 군의 움직임을 하마마츠 성의 이에야스에게 알렸다. |
야습해 온 다케다 군이 물러가는 곳을, 쇼코지 뒷산에 숨어 있던 마을 사람들이 매복하여 습격해 몇 명을 죽였다. |
아사바의 우치시바라에 신겐이 진을 쳤을 때, 혼다 다다카쓰와 나이토 마사나리가 미쓰케 동쪽 언덕 위까지 정찰을 갔는데, 신겐대가 갑자기 덮쳐오자, 마을 사람들은 스스로 마을에 불을 지르고 혼다대의 철수를 도왔다. |
7. 미카타가하라 전투를 테마로 한 작품
- 악곡
- * 『내일의 대가』 사쿠라 유키 (작사: 오구리 사쿠라, 작곡: 이세 켄지)
- 보드 게임
- * 다케다 세이스이키 (츠쿠다 하비)
- * SAMURAI (GMT Games, 1996, 리처드 H. 베르크)
- * 신겐 상락 (게임 저널판 미니 시나리오)
- * 미카타가하라 전투 (워 게임 일본사)
- 강담
- * 「미카타가하라 군기」
강담사가 처음 배우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으며, 한 자리에 나오는 대부분이 수라장 읽기로 채워진다.
- 무대
- * 2023 Office KAN 전국 뮤지컬 「패왕의 빛 ~미카타가하라~」
참조
[1]
서적
The Samurai Warrior: The Golden Age of Japan's Elite Warriors 1560–1615
https://books.google[...]
Amber Books Ltd
[2]
서적
Battles of the Samurai
Arms and Armour Press
1987
[3]
서적
[4]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0
2000
[5]
서적
[6]
문서
Koyo Gunkan
[7]
서적
[8]
문서
[9]
문서
Koyo Gunkan
[10]
문서
Kansei Chōshū Shokafu
[11]
문서
Kōyō Gunkan
[12]
서적
[13]
서적
The Samurai
Macmillan Publishing Co., Inc.
1977
[14]
서적
織田信長合戦全録
[15]
문서
『朝野旧聞裒藁』を含む。
[16]
뉴스
『「家康大敗」の真相は』「古今をちこち」磯田道史
読売新聞
2013-11-27
[17]
간행물
足利義昭政権と武田信玄―元亀争乱の展開再考―
2016-06
[18]
간행물
足利義昭政権滅亡の政治的背景
[19]
학술
武田信玄の西上作戦小考―新史料の信長と信玄の文書―
[20]
기타
寺社縁起の文化学
森話社
[21]
서적
戦国の群像
学習研究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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