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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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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비 전투는 198년 조조가 여포를 공격하여 승리한 전투이다. 194년 조조가 서주를 공격하는 틈을 타 여포가 연주를 점령했고, 이후 여포는 유비에게 의탁했다. 조조는 여포를 제거하기 위해 하비로 진격했고, 여포는 원술과의 동맹 실패, 내부 배신으로 인해 조조에게 항복했다. 조조는 여포를 처형하고 세력을 확장했으며, 이 전투는 조조가 중원 통일을 위한 기반을 다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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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정보
전투명하비 전투
부분전후한 말의 전쟁
시기198년 겨울 ~ 199년 2월 7일
장소서주 하비 (중화인민공화국 장쑤성 피저우 시)
결과조조와 유비의 결정적인 승리, 여포 처형
교전 세력
교전국 1조조
유비
교전국 2여포
지휘관
지휘관 1조조
유비
하후돈
우금
서황
악진
곽가
순유
장비
지휘관 2여포
고순
장료
진궁
후성
장패
병력
피해

2. 배경

194년, 조조가 서주의 도겸을 공격하러 간 사이, 진궁과 장막이 배반하고 여포연주를 공격하는 것을 도왔다. 조조는 서주 침공을 포기하고 여포를 공격하기 위해 돌아갔다. 195년까지 조조는 연주의 모든 도시를 되찾고 거예에서 여포를 격파했다. 여포와 그의 부하들은 도겸의 뒤를 이어 서주 자사가 된 유비에게 의탁했다.

196년, 조조는 낙양의 폐허에서 헌제를 찾아 허창으로 데려와 새로운 수도와 황실 조정을 세웠다. 같은 해, 여포유비원술의 갈등을 틈타 서주의 수도 하비(오늘날의 장쑤성 피저우시)를 점령하여 사실상 유비에게서 서주의 지배권을 빼앗았다. 유비는 여포에게 서주 자사 자리를 넘겨주고 인근 도시 소패에 정착해야 했다.

2. 1. 조조와 여포의 대립

194년, 조조가 서주의 도겸을 공격하러 간 사이, 그의 부하 진궁과 장막이 배반하고 여포를 끌어들여 연주를 공격했다.[1] 조조는 서주 공격을 포기하고 돌아와 여포와 100일 이상 지속된 연주 전투를 벌였다.[1] 195년 조조는 연주를 회복하고 거예에서 여포를 격파했으며, 여포는 동쪽으로 도망쳐 유비에게 의탁했다.[1]

196년, 여포는 유비원술의 갈등을 틈타 서주의 수도 하비(오늘날의 장쑤성 피저우시)를 점령하여 서주를 차지했다.[1] 유비는 여포에게 서주를 넘겨주고 소패에 정착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여포는 유비를 위협하여 공격했다.[1] 유비는 여포에게 패배하여 조조에게 의탁했고, 조조는 유비에게 물자를 제공하고 소패에 주둔하도록 했다.[1]

2. 2. 원소와 조조의 갈등

197년경, 원소황하 북쪽의 기주, 청주, 병주 세 주를 장악하고 조조에게 거만한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같은 시기 조조는 장수와의 완성 전투에서 패배한 직후였기 때문에 이 편지에 분노했다. 조조는 원소의 세력이 커지는 것에 위협을 느껴 원소를 공격하려 했으나, 자신의 군대가 충분히 강하지 않다고 생각했다.[3]

조조의 책사였던 곽가순욱은 상황을 파악하여 조조가 원소에 비해 우위에 있는 여러 가지 이점을 제시했다. 또한, 원소가 공손찬과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여포를 먼저 제거할 것을 조언했는데, 이는 원소가 여포와 동맹을 맺고 조조를 공격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조조는 여포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3]

3. 전투의 경과

197년 원술이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여포와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진규의 설득으로 여포는 원술과의 동맹을 파기했다. 분노한 원술은 장훈, 교예 등을 보내 하비를 공격했지만, 여포는 진규의 계책으로 한섬, 양봉을 설득해 원술군을 격파했다.[2]

198년, 여포는 다시 원술과 화해하고 고순을 보내 소패를 공격해 함락시켰다. 조조하후돈을 보내 유비를 지원했으나 고순에게 패했다.[2] 이후 조조는 직접 여포 토벌에 나섰다. 진궁은 조조군이 지쳐있을 때 공격할 것을 제안했으나, 여포는 하비에서 기다렸다가 공격하는 전략을 택했다. 그러나 진등의 배신과 계속된 패배로 여포는 하비성에 고립되었다.

조조는 여포에게 항복을 권유했고, 여포는 항복하려 했으나 진궁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여포는 원술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직접 딸을 원술에게 보내려 했으나 실패했다. 조조군은 의수(沂水)와 사수(泗水)의 물길을 돌려 하비를 물에 잠기게 했다.[2]

199년 2월 7일, 여포의 부하 후성이 송헌, 위속과 함께 진궁고순을 사로잡고 조조에게 항복했다.[2][3][4] 백문루에 포위된 여포는 결국 항복했고, 유비의 반대로 정원동탁의 예를 들어 처형되었다.[17] 진궁은 조조의 회유에도 죽음을 택했고, 고순도 처형되었다.[17] 장료관우의 간청으로 조조에게 항복하여 등용되었다.[37]

3. 1. 원술과의 갈등 및 배신

197년, 원술은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부하 한윤(韓胤)을 보내 여포의 딸과 자신의 아들을 결혼시켜 동맹을 강화하려 했다. 여포는 처음에는 동의했으나, 진규의 설득과 과거 원술에게 공격받았던 일로 인해 마음을 바꿔 딸을 되찾고 한윤을 조조에게 보내 처형당하게 했다. 조조는 여포를 좌장군(左將軍)에 임명하고 친서를 보내 위로했으며, 여포는 진등을 보내 감사를 표했다. 진등은 조조에게 여포를 제거해야 한다고 진언했고, 조조는 이에 동의하여 진등을 광릉군 태수로 임명해 여포 군에 첩자로 잠입시켰다.

원술은 여포의 배신에 분노하여 장수 장훈과 교예를 보내고, 한섬과 양봉이 이끄는 백파적과 연합하여 7개 방면에서 하비를 공격하게 했다. 여포는 병력 부족으로 불리한 상황에 놓였으나, 진규의 계책에 따라 한섬과 양봉에게 원술과의 동맹을 끊도록 설득했다. 여포가 원술군을 공격하자 한섬과 양봉은 여포에게 투항했고, 원술군은 패배하여 회하 남쪽까지 쫓겨났다.

3. 2. 소패성 전투 (삼국지 연의)

여포태산의 도적들을 끌어들여 산동연주의 여러 군을 빼앗고, 부하 송헌과 위속을 시켜 여남과 영천을 치게 했다. 그리고 장료고순에게 유비가 있는 소패성을 포위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관우는 오랜 친구이자 의로운 인물인 장료를 설득하여 군사를 물리게 했다.[12]

조조하후돈, 하후연, 여건, 이전에게 군사 5만을 주어 소패성의 유비를 지원하게 했다. 하후돈여포의 부하 고순과 싸우다가, 조성이 쏜 화살에 눈을 맞아 애꾸눈이 되었다. 그러나 하후돈은 용맹을 발휘해 화살을 뽑아 화살에 박힌 눈알을 씹어 먹고 조성을 베어 군사들의 사기를 높였다.[12] 이 장면은 명나라 시대 목판화로도 남아있다.
하후돈이 화살에 맞아 눈을 맞는 명나라 시대 목판화 삽화.


하지만 하후돈의 용맹에도 불구하고 전세는 여포에게 유리하게 기울었고, 결국 하후돈의 군대는 패하고 소패성은 함락되었다. 유비는 패주하였다.[12]

3. 3. 하비성 포위전

198년, 여포는 다시 원술과 화해하고, 그의 장수 고순을 보내 소패에서 유비를 공격하게 했다. 조조하후돈에게 군대를 주어 유비를 지원했으나, 고순에게 패배했다. 198년 10월에 소패는 여포군에게 함락되었고 유비는 탈출했지만 그의 아내들은 사로잡혔다.[2]

그 후, 조조는 공식적으로 여포에 대한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 조조의 군대가 팽성(현재의 쉬저우시, 장쑤성)에 도착하자 진궁은 여포에게 조조군이 허창에서 멀리 행군해 온 탓에 지쳐 있으니 공격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여포는 하비에 머물면서 조조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하려 했다. 한 달 뒤, 조조는 팽성을 점령했다. 동시에 진등은 조조 편으로 돌아섰고, 광릉군에서 자신의 병사들을 이끌고 하비로 향했다. 여포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가 적과 교전했지만 패배하여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여포는 하비로 돌아와 진격하지 않고 성을 굳게 지켰다.

조조는 여포에게 편지를 써서 여포가 처한 위태로운 상황을 설명했다. 여포는 두려움을 느껴 항복하려는 의사를 보였지만, 진궁은 조조의 군대가 먼 거리를 이동했고 장기간의 전투를 치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궁은 여포에게 군대의 일부를 성 밖에 주둔시키고 나머지는 그와 함께 성 안에 남아 서로 지원할 수 있도록 하라고 조언했다. 또한 조조군과 교전하기 가장 좋은 시기는 조조의 보급품이 떨어질 몇 달 후라고 말했다. 여포는 이 계획에 동의했고, 자신이 성 밖에 주둔하는 동안 진궁과 고순을 하비를 방어하도록 남겨두려 했다. 그러나 여포의 아내 엄씨는 진궁과 고순이 서로 잘 지내지 못할 것이며, 여포가 곁에 없으면 문제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또한 조조가 진궁을 (진궁이 여포에게 투항하기 전) 여포가 현재 진궁을 대하는 것보다 더 잘 대했다고 느껴, 진궁이 여포를 배신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여포는 진궁의 계획을 취소했다.

여포는 王楷|왕개중국어와 許汜|허사중국어를 원술에게 보내 지원군을 요청했지만, 원술은 앞서 여포가 결혼 약속을 어겼던 것을 떠올리며 거절했다. 왕개와 허사는 원술에게 여포가 제거되면 고립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구원을 요청하도록 설득하려 했다. 원술은 구원군을 보낼 것을 고려했지만 즉시 행동하지 않았다. 한편 여포는 원술이 결혼 약속 사건 때문에 자신을 돕기를 꺼린다고 생각하여, 직접 딸을 하비 밖으로 호위하여 원술의 영토로 보내려 했다. 그러나 여포는 성 밖에서 조조군과 마주쳐 포위를 뚫지 못하고 되돌아와야 했다.

오랫동안 포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비를 점령하지 못하자 조조의 군대는 지치기 시작했다. 조조는 철수하려 했지만, 그의 책사 순유곽가는 여포의 군대가 이미 여러 번의 패배로 사기가 저하되었으니 포위를 계속하라고 조언했다. 조조는 이후 병사들에게 의수(沂水)와 사수(泗水)의 물길을 돌려 하비를 물에 잠기게 했다. 하비가 한 달 넘게 물에 잠기자 궁지에 몰린 여포는 항복할 준비를 했지만, 진궁이 그를 막았다.

3. 4. 여포의 항복과 최후

순유곽가의 계책에 따라 조조는 기수와 사수의 물길을 돌려 하비성을 물바다로 만들었다.[2] 199년 2월 7일, 여포의 부하 후성은 송헌, 위속과 함께 진궁고순을 사로잡고 조조에게 항복하였다.[2][3][4] 이 과정에서 후성은 여포의 애마 적토마를 훔쳐 달아나 조조에게 투항했다.[16]

백문루에서 조조군에 포위된 여포는 부하들에게 자신의 목을 베어 항복하라고 했으나, 부하들이 거절하자 결국 항복했다.[5] 여포는 조조에게 자신을 살려주면 천하 통일에 힘을 보태겠다고 설득하려 했으나, 유비정원동탁의 예를 들며 반대하자, 여포는 유비를 "가장 믿을 수 없는 자"라고 비난하며 분노했다.[17] 결국 조조는 여포를 교수형에 처하고, 그의 시신을 참수하여 머리를 허창으로 보낸 후 묻었다.[11]

진궁은 조조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했고, 고순 역시 아무 말 없이 처형당했다.[17] 반면, 장료는 조조에게 항복하여 등용되었는데, 이는 관우의 간청 덕분이었다.[37] 조조는 장료의 충의를 높이 사 그를 중랑장에 임명하고 관내후 작위를 내렸다.[38]

4. 결과 및 영향

198년 하비 전투에서 여포를 격파한 조조서주를 확고히 장악하고, 연주예주의 근거지를 위협하는 요소를 제거했다. 이듬해 유비차주를 죽이고 서주를 장악했으나, 조조는 곧바로 유비를 격파하고 서주를 되찾았다. 이로써 조조는 200년 원소와의 관도 대전에서 유리한 입지를 확보했다.[11]

조조는 장료, 진군 등 여포 휘하의 장수들을 등용하고, 장패, 손관, 오돈, 은리, 창희 등 여포에게 협력했던 군벌들을 항복시켜 해안 지역의 군 지휘권을 맡기는 등 세력을 더욱 강화했다.[11]

4. 1. 여포 세력의 멸망

여포와 그의 부하들은 포박되어 조조와 유비 앞에 끌려왔다. 여포는 너무 꽉 묶였다고 불평했지만, 조조는 "호랑이는 꽉 묶어야 한다"고 말했다. 여포는 조조에게 자신을 살려달라고 설득하며 조조를 섬기겠다고 약속했다. 조조가 망설이는 사이, 유비가 "정원동탁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지 못했소?"라고 말했다. 조조는 턱을 만졌다. 여포는 유비를 꾸짖으며 "너는 가장 믿을 수 없는 자다"라고 말했다.[6]영웅기》는 여포가 조조를 섬기겠다고 맹세한 후 조조가 처음에는 여포의 목숨을 살려주려 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조조의 서기관인 왕필(王必)은 즉시 조조를 막아서며 "여포는 강력한 전쟁 포로입니다. 그의 부하들이 근처에 있으니, 살려둘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조조는 여포에게 "나는 당신을 살려주고 싶었지만, 서기관이 거부하는군. 그럼 어떻게 해야겠소?"라고 말했다.[7]

조조가 진궁에게 그의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묻자, 진궁은 조조가 그들을 살려야 한다고 암시했다. 조조는 진궁의 가족을 살려주고 잘 대우했다.[8][9] 진궁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뒤돌아보지 않고 처형장으로 걸어갔다. 조조는 진궁의 죽음에 깊은 슬픔을 느꼈다.[10] 조조는 여포를 교수형에 처했다. 그는 여포, 진궁, 고순 등의 시신을 참수하고 머리를 허창으로 보내게 한 후 묻도록 명령했다.[11]

조조는 이전에 여포를 섬겼던 장료, 진군 등을 받아들여 장군이나 관료로 임명했다. 장패, 손관(손관), 오돈(), 은리, 창희(창희) 등 여포와 협력했던 다른 소규모 군벌들도 조조에게 항복했고, 그는 그들에게 해안선을 따라 여러 군을 맡겼다.

하비 전투가 끝나면서 조조는 여포가 제기한 위협을 완전히 제거했다. 이듬해 유비는 차주(차주)를 죽인 후 조조와 관계를 끊고 서주를 장악했지만, 조조는 곧 유비를 격파하고 서주를 다시 장악했다. 서주를 확고히 장악한 조조는 더 이상 연주와 예주에 있는 자신의 근거지에 임박한 위협을 받지 않았다. 이는 200년 원소와의 관도 전투에서 조조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4. 2. 조조의 세력 강화

198년 하비 전투에서 여포를 제거한 조조서주를 장악하면서 연주예주의 근거지를 확고히 했다. 이듬해 유비차주를 죽이고 서주를 장악했지만, 조조는 곧 유비를 격파하고 서주를 다시 장악했다. 이로써 조조는 200년 원소와의 관도 대전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11]

조조는 여포 휘하의 장수들을 등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 장료, 진군 등을 장군이나 관료로 임명했고, 장패, 손관, 오돈, 은리, 창희 등 여포와 협력했던 군벌들도 항복하여 해안선을 따라 여러 군을 맡겼다.[11]

4. 3. 삼국지 연의에서의 의의

삼국지연의에서 하비 전투는 극적으로 묘사되어, 영웅들의 용맹함과 배신, 권력 투쟁의 허망함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으로 묘사되었다.

소설에서 전투는 소패 근처와 하비 두 곳에서 벌어졌다. 특히, 하후돈의 눈, 후성의 배신, 여포의 최후 등은 삼국지연의의 주요 장면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여포와 그의 부하들은 묶인 채 조조와 유비 앞에 끌려왔다. 여포는 너무 꽉 묶였다고 불평했지만, 조조는 "호랑이는 꽉 묶어야 한다"고 말했다. 여포는 조조에게 자신을 섬기겠다고 약속하며 설득하려 했다. 조조가 망설이자, 유비는 "정원동탁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지 못했소?"라고 말하며 조조에게 여포를 죽일 것을 권했다. 여포는 유비를 꾸짖으며 "너는 가장 믿을 수 없는 자다"라고 말했다.[25]

조조는 진궁에게 그의 가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물었고, 진궁은 조조가 그들을 살려야 한다고 암시했다. 조조는 진궁의 가족을 살려주고 잘 대우했다.[27][28] 진궁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뒤돌아보지 않고 처형장으로 걸어갔다. 조조는 진궁의 죽음에 깊은 슬픔을 느꼈다.[29] 조조는 여포를 교수형에 처하고, 여포, 진궁, 고순 등의 시신을 참수하여 머리를 허창으로 보낸 후 묻도록 했다.[30]

이후 조조는 여포를 섬겼던 장료, 진군 등을 받아들여 장군이나 관료로 임명했다. 장패, 손관(孫觀), , 은리, 창희(昌豨) 등 여포와 협력했던 다른 소규모 군벌들도 조조에게 항복했고, 조조는 그들에게 해안선을 따라 여러 군을 맡겼다.

5. 등장 인물

하비 전투의 등장인물은 조조군과 여포군으로 나뉜다.

'''조조군'''



'''여포군'''

5. 1. 조조군

5. 2. 여포군

6. 대중 문화에서의 하비 전투

코에이의 비디오 게임 시리즈인 ''진·삼국무쌍''에서 4편부터 하비 전투를 플레이 가능한 스테이지로 다루고 있다.[1] 3편에도 수록되어 있다.[1]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vol. 62
[2] 서적 Jiuzhou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7
[3] 서적 Sanguozhi vol. 7
[4] 서적 Houhanshu vol. 75
[5] 서적 Houhanshu vol. 75
[6] 서적 Sanguozhi vol. 7
[7] 서적 Yingxiong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7
[8] 서적 Sanguozhi vol. 7
[9] 서적 Dianlü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7
[10] 서적 Houhanshu vol. 75
[11] 서적 Sanguozhi vol. 7
[12] 서적 Sanguo Yanyi ch. 18
[13] 서적 Sanguozhi vol. 9
[14] 서적 Weilü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9
[15] 서적 Yingxiong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7
[16] 서적 Sanguo Yanyi ch. 19
[17] 문서 Lü Bu was referring to an incident in which he prevented a conflict between Liu Bei and Yuan Shu (represented by Ji Ling) through a gamble. In the gamble, he would fire an arrow through an opening in the blade of his ji from a distance of about 100 paces. If his arrow passed through the opening, Liu Bei and Ji Ling would have to withdraw their forces and make peace. If he failed, then Liu Bei and Ji Ling could prepare for war. Lü Bu succeeded and prevented the conflict. He saw himself as having saved Liu Bei's life because Yuan Shu's forces were more powerful than Liu's at that time, and he was implying that now that he was about to be executed, Liu should also save him.
[18] 서적 Sanguo Yanyi ch. 19–20
[19] 서적 Sanguozhi vol. 17
[20] 서적 資治通監第62巻
[21] 서적 Jiuzhou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7
[22] 서적 Sanguozhi vol. 7
[23] 서적 Houhanshu vol. 75
[24] 서적 Houhanshu vol. 75
[25] 서적 Sanguozhi vol. 7
[26] 서적 Yingxiong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7
[27] 서적 Sanguozhi vol. 7
[28] 서적 Dianlü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7
[29] 서적 Houhanshu vol. 75
[30] 서적 Sanguozhi vol. 7
[31] 서적 Sanguo Yanyi ch. 18
[32] 서적 Sanguozhi vol. 9
[33] 서적 Weilü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9
[34] 서적 Yingxiong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7
[35] 서적 Sanguo Yanyi ch. 19
[36] 문서 呂布は危険な賭けを通して(紀霊により表される)劉備と袁術の紛争を防いだ事件に言及していた。この賭けで呂布は約100歩の距離から戟の刃に穴を通して矢を放つことになる。矢が穴を通れば劉備と紀霊は撤退しなければならず平和になる。失敗すれば劉備と紀霊は戦争の準備ができた。呂布は成功し紛争を防いだ。呂布は当時袁術軍の方が劉備軍より強力であるために劉備の命を救ったと見、処刑されようとする今劉備も助命すべきだと暗示した。
[37] 서적 Sanguo Yanyi
[38] 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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