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비에르 솔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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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비에르 솔라나는 스페인 출신의 정치인으로, 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학자 및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스페인 사회노동자당(PSOE)에서 활동하며 문화부 장관, 교육부 장관,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NATO 사무총장으로 재직하며 발칸 반도 평화 유지에 기여했다. 이후 유럽 연합(EU)에서 공동 외교 및 안보 정책 고위 대표를 맡아 중동 평화 프로세스, 이란 핵 문제 협상, 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 중재 등 외교적 활동을 펼쳤다. 퇴임 후에도 다양한 국제기구에서 활동하며, 유럽 통합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카를 대제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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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에르 솔라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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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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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솔라나 데 마다리아가 |
출생일 | 1942년 7월 14일 |
출생지 | 마드리드, 스페인 |
서명 | Firma de Javier Solana.svg |
직업 | |
직업 | 정치인, 물리학자 |
학력 | |
출신 학교 |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 버지니아 대학교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스페인 사회노동당 |
주요 직책 | |
외무안보 정책 고위 대표 | 임기 시작: 1999년 10월 18일 임기 종료: 2009년 12월 1일 이전 대표: 위르겐 트룸프 다음 대표: 캐서린 애슈턴 (외교 및 안보 정책) |
유럽 연합 이사회 사무총장 | 임기 시작: 1999년 10월 18일 임기 종료: 2009년 12월 1일 이전 대표: 위르겐 트룸프 다음 대표: 피에르 드 부아시에 |
서유럽 연합 사무총장 | 임기 시작: 1999년 11월 20일 임기 종료: 2009년 12월 1일 이전 대표: 호세 쿠틸레이루 다음 대표: 아르노 자코메 |
NATO 사무총장 | 임기 시작: 1995년 12월 5일 임기 종료: 1999년 10월 6일 이전 대표: 세르조 발란치노(대행), 빌리 클라스 다음 대표: 조지 로버트슨, 포트 엘런 남작 로버트슨 |
스페인 외무부 장관 | 총리: 펠리페 곤살레스 임기 시작: 1992년 6월 16일 임기 종료: 1995년 12월 18일 이전 대표: 프란시스코 페르난데스 오르도녜스 다음 대표: 카를로스 웨스텐도르프 |
2. 학자 및 초기 정치 경력
하비에르 솔라나는 마드리드의 저명한 스페인 가문 출신으로, 그의 형 루이스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독재에 반대하는 정치 활동으로 투옥되기도 했다.[7] 솔라나는 누에스트라 세뇨라 델 필라르 학교를 졸업하고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UCM)에 진학했다. 1963년, 대학 개혁 주간에 반대 포럼을 조직했다는 이유로 제재를 받았으며, 1964년에는 스페인 사회노동자당(PSOE)에 비밀리에 가입했다.[1]
이후 솔라나는 학자 및 초기 정치 경력을 쌓았다. 자세한 내용은 '학자 경력' 및 '초기 정치 활동' 하위 섹션을 참조하면 된다.
2. 1. 학자 경력
하비에르 솔라나는 마드리드의 저명한 스페인 가문 출신으로,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 하에서 불법화된 스페인 사회노동자당(PSOE)에 1964년 비밀리에 가입했다.[1]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를 졸업하고 스페인 과학 연구 고등 위원회(CSIC)와 영국에서 연구를 계속했다.1965년,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가 6년간 유학했다.[9] 시카고 대학교,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디에이고를 거쳐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조교로 물리학을 가르치고 독립적인 연구를 수행하며 반전 운동에 참여했다. 1971년 ''초유동체 헬륨의 기본 여기 스펙트럼 이론: 로톤 수명'' 논문으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스페인으로 돌아온 후, 마드리드 자치 대학교(UAM)에서 고체 물리학 강사가 되었고, 1975년에는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30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했으며, 니콜라스 카브레라의 조수로 일하기도 했다. 그가 지도한 마지막 박사 논문은 1990년대 초반에 나왔다.
2. 2. 초기 정치 활동
1971년 스페인으로 귀국한 솔라나는 스페인 사회노동자당(PSOE) 대표로서 민주화 운동 단체인 민주세력 조정기구에 참여했다.[10]1976년, 스페인 내전 이후 처음으로 열린 사회노동당 대회에서 솔라나는 연방 집행위원회 서기, 홍보위원으로 선출되어 이후 5년간 서기를 역임했다. 또한 당 서기장이었던 펠리페 곤잘레스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프랑코 이후 당의 노선 전환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고 있다. 같은 해 파리 근교의 슈렌느와 1977년 스페인에서 각각 열린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대회에 사회노동당 대표로 참가했다. 1977년 5월 20일, 후안 카를로스 1세와 곤잘레스의 회담에 동행했다.[11]
이후 콤플루텐세 대학교 교직원 조합 대표가 되었고, 1977년 6월 15일 하원 의원 선거에 당선되었다. 1981년 2월 23일, 안토니오 테헤로가 이끄는 치안 경비대 부대가 왕정 복고를 목표로 쿠데타 (23-F)를 일으켜 하원을 점거했을 때, 솔라나도 18시간 동안 구속되었다.
1982년 10월 28일, 사회노동당은 하원 선거에서 350석 중 202석을 획득하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2월 3일, 제1차 곤잘레스 내각에서 문화부 장관에 취임하여 약 6년간 재임한 후 1988년 교육과학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1985년 7월 5일부터 3년간 문화・정부 대변인을 겸임했다.
1992년 7월 22일, 병을 앓고 있던 프란시스코 페르난데스 오르도녜스를 대신하여 외무부 장관에 취임했다. 이날은 마드리드에서 열린 제2회 이베로 아메리카 정상 회의 전날이었다. 1995년 11월 27~28일, 스페인이 유럽 연합 이사회 의장국이었던 당시, 솔라나는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이사회의 의사 진행을 맡아 지중해 지역의 문화 교류와 경제 통합을 위한 과정인 바르셀로나 선언 채택에 기여했다.
13년간 각료를 역임하며 쌓은 정치적 역량으로 솔라나는 착실한 외교력을 갖춘 인물로 평가받았다. 곤살레스 정권 후반기에 외무 장관에 취임했기 때문에, 이후 드러난 정권 내 부정부패와 반테러리스트 해방 그룹(GAL)과 바스크 조국과 자유(ETA) 간의 분쟁 관련 스캔들에 휘말리지 않았다. 1995년 말, 솔라나는 곤살레스 정권 출범 초기부터 각료로 남은 유일한 인물이었으며, 이듬해 3월 사회노동당 서기장 선거에서 곤살레스의 유력한 후계자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그는 국제 정치 무대로 진출했다.
NATO 사무총장 재임 기간에도 솔라나는 사회노동당과 스페인 국내 정치에서 활동했다. 1997년 6월, 제36회 사회노동당 대회에서 집행위원회를 떠나 연방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이후 3년간 두 번 재선되었다. 2003년 2월 5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 콜린 파월 미국 국무 장관이 이라크의 대량 살상 무기 보유를 주장하는 연설(파월 보고서)을 지지하면서, 솔라나는 당 서기장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와 대립했다. 사파테로는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국민당 정권의 이라크 전쟁 지지에 반대했다. 솔라나는 곤살레스와 함께 사회노동당 구세대 대표로 여겨진다. 2005년 2월 15일, 솔라나는 바스크 독립에 관한 이바레체 플랜(바스크와 스페인 간의 자유 연합 제창)에 대해, 유럽 헌법 초안에 분리된 바스크 대표권은 존재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3. 스페인 장관 경력
1982년 10월 28일 스페인 사회노동자당(PSOE)은 하원 선거에서 350석 중 202석을 차지하는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982년 12월 3일, 솔라나는 펠리페 곤잘레스의 첫 내각에서 문화부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1988년에 교육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문화부 장관직을 수행했다. 1983년 7월, 그는 알폰소 게라의 입장을 지지하며 스페인의 NATO 탈퇴를 요구했다.[10][11] 1985년 7월 5일부터 3년간 정부 대변인을 겸임했다.
1992년 7월 22일, 이베로-아메리카 제2차 마드리드 정상 회담 개막 전날, 솔라나는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던 프란시스코 페르난데스 오르도네스를 대신하여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95년 11월 27일~28일, 스페인이 EU 이사회 의장국을 맡고 있는 동안, 솔라나는 바르셀로나 회의를 소집하고 의장을 맡았다. 솔라나가 "지중해 지역에서 문화적, 경제적 통합을 촉진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칭한 회의에서 27개국 간의 조약(바르셀로나 선언)이 체결되어 그는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 13년간의 내각 장관 재임 기간 동안 솔라나는 신중하고 외교적인 정치인으로서의 명성을 쌓았다. 곤잘레스 행정부 말기에 외무부로 간 것은 그의 말년을 특징짓는 부패와 더러운 전쟁 (ETA를 상대로 벌어진 것으로 추정) 관련 정치 스캔들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4. NATO 사무총장 (1995-1999)
솔라나는 NATO 사무총장 재임 기간(1995-1999) 동안 보스니아 전쟁과 코소보 전쟁에 개입하고, NATO와 러시아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보스니아 전쟁 종식을 위해 데이턴 협정에 따라 평화유지군(IFOR, SFOR)을 지휘했고, 코소보 전쟁에서는 유고슬라비아 공습을 주도하여 인도적 개입 명분을 내세웠지만, 민간인 피해로 인해 비판받기도 했다.
또한, NATO의 정치·군사 구조를 재편하고,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여 1997년 NATO-러시아 기본 협정을 체결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4. 1. 임명 배경 및 논란
1995년 12월 5일, 솔라나는 부패 스캔들로 사임한 빌리 클라스를 대신하여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의 사무총장이 되었다. 그의 임명은 과거 NATO에 반대했었기 때문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솔라나는 'NATO에 반대하는 50가지 이유'라는 소책자를 썼고, 미국은 그를 전복 명단에 올렸었다.[12] 1982년 5월 30일 스페인은 NATO에 가입했다. 그해 말 스페인 사회노동당(PSOE)이 집권하면서 솔라나와 당은 이전의 반 NATO 입장을 대서양주의적, 친 NATO 입장으로 바꿨다. 1986년 3월 12일 스페인은 NATO 잔류 여부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정부와 솔라나는 찬성 운동을 성공적으로 펼쳤다. 자신의 반 NATO 과거에 대한 비판에 대해, 솔라나는 NATO가 냉전 시대의 기원과 분리되었기에 그의 대표가 된 것에 기쁘다고 주장했다.4. 2. 보스니아 내전 개입
1995년 12월, 솔라나는 정치 스캔들로 사임한 빌리 클라스의 뒤를 이어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사무총장에 취임했다. 솔라나가 과거 NATO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기 때문에 그의 임명은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NATO에 반대하는 50가지 이유'라는 소책자를 쓴 적이 있으며, 이로 인해 미국의 감시 대상 목록에 오르기도 했다.[12] 1982년 5월 30일, 스페인은 NATO에 가입했지만, 그해 말 스페인 사회노동당(PSOE)이 집권하면서 솔라나와 당은 이전의 반 NATO 입장에서 대서양주의적, 친 NATO 입장으로 전환했다. 1986년 3월 12일, 스페인에서는 NATO 잔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고, 정부와 솔라나는 찬성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과거의 반 NATO 행적에 대한 비판에 대해 솔라나는 NATO가 냉전 시대의 기원과 분리되었기 때문에 NATO를 대표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주장했다.솔라나는 사무총장 취임 직후, 보스니아 전쟁과 관련하여 1995년 12월 20일에 유엔 임무를 인계받은 6만 명의 다국적 평화 유지군인 ''합동 노력''(IFOR)으로 구성된 발칸 NATO 임무 작전인 '합동 노력'을 처리해야 했다. 이는 NATO가 그해 8월과 9월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선택된 표적을 폭격한 후 데이턴 협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는 연합 신속 대응군(ARRC)을 배치하여 이 임무를 수행했다. 1996년 12월, ARRC는 다시 활동을 시작했고, IFOR는 '합동 경비'와 나중에 '합동 단조'라는 암호명으로 운영되는 3만 2천 명 규모의 안정화군(SFOR)으로 대체되었다.
솔라나의 임기 동안 NATO는 정치 및 군사 구조를 재편하고 기본 전략을 변경했다. 그는 다양한 NATO 회원국 간, 그리고 NATO와 비 NATO 국가 간의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외교적인 사무총장으로 평가받았다. 1995년 12월 프랑스는 NATO 군사 구조로 부분 복귀했고, 1996년 11월 스페인도 NATO에 가입했다. 1997년 5월 27일, 러시아 외무장관 예브게니 프리마코프와 5개월간의 협상 끝에 파리에서 NATO-러시아 창립 협정이 체결되었다.[12] 같은 날, 솔라나는 유럽 NATO와 비 NATO 국가 간의 관계 개선을 위해 유로-대서양 파트너십 위원회를 설립했다.
구 유고슬라비아에서의 평화 유지는 여전히 어렵고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IFOR와 SFOR는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와 라트코 믈라디치를 체포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1998년 말, 코소보에서 유고슬라비아 당국과 코소보 해방군인 코소보 알바니아인 게릴라 사이의 분쟁이 악화되었고, 라차크 학살로 45명의 알바니아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NATO는 두 세력을 강제로 억제하기 위해 그들의 후원 아래 적절한 군사 평화 유지군을 도입하여 분쟁을 해결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 1999년 1월 30일, NATO는 유고슬라비아 표적에 대한 공습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고 발표했다. 2월 6일, 솔라나는 랑부예 성에서 양측과 협상을 가졌지만 실패했다.
1999년 3월 24일, NATO군은 유고슬라비아의 군사 및 민간 목표물에 대한 공습을 시작했다. 솔라나는 인도적 이유와 유럽의 평화를 유지하고 보스니아 전쟁 (1992–1995) 중에 발생했던 것과 유사한 인종 청소 및 대량 학살의 재발을 방지할 NATO의 책임에 따라 공습을 정당화했다.
솔라나와 NATO는 폭격으로 인한 민간인 사상자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13][14] 1999년 4월 23–24일, 북대서양 위원회는 워싱턴 D.C.에서 회의를 열었고, 회원국들의 국가 원수들은 조직의 기본 방어적 성격을 변경하고 이전보다 더 광범위한 상황에서 NATO의 개입을 허용한 '새로운 전략 개념'에 동의했다.
1999년 6월 10일, 세르비아군은 코소보에서 철수했고 NATO는 공격을 중단하여 코소보 전쟁이 종결되었다. 같은 날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1244는 NATO가 ARRC를 활성화하도록 승인했고, 코소보군은 '합동 가디언' 작전을 시작하여 6월 12일 코소보를 점령했다. 솔라나는 1999년 10월 6일, 예정보다 2개월 일찍 NATO 사무총장직을 떠났고, 조지 로버트슨이 그의 뒤를 이었다.
4. 3. NATO-러시아 관계 개선
솔라나는 1995년 12월 5일, 정치 스캔들로 사임한 빌리 클라스의 후임으로 NATO 사무총장에 취임했다. 취임 당시, 과거 솔라나가 NATO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논란을 일으켰다.[1] 솔라나가 이전에 저술한 "NATO에 NO라고 말하는 50가지 이유"(''50 Reasons to say no to NATO'')라는 논문 때문에 미국은 솔라나를 위험 인물 리스트에 올렸다.[1] 1982년 5월 30일, 스페인은 NATO에 가입했지만, 그해 말 사회노동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사회노동당과 솔라나는 이전의 반 NATO에서 친 NATO, 친미 노선으로 변경했다.[1] 1986년 3월 12일, 스페인에서는 NATO 잔류 여부를 묻는 국민 투표가 실시되었고, 사회노동당과 솔라나는 찬성 운동을 펼쳐 잔류 찬성표가 반대표를 넘어섰다.[1] 과거의 반 NATO 활동에 대해 비판을 받았을 때, 솔라나는 "그 비판은 NATO의 냉전 시대와의 결별을 결의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기뻐했다.[1]솔라나는 사무총장 취임 직후, 보스니아 전쟁과 관련하여 12월 20일에 유엔 작전을 인계받아, 6만 명의 병력을 가진 다국적 평화유지군(IFOR)이 중심이 되는 NATO의 ''Joint Endeavour'' 작전을 지휘했다.[1] 이는 전년 8월과 9월 NATO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폭격 이후 체결된 데어턴 협정에 근거한 것이다.[1] 작전 수행을 위해 솔라나는 동맹 유럽 사령부 긴급 대응 부대(ARRC)를 전개했다.[1] 1996년 12월, ARRC는 활동을 재개, 3만 2천 명의 병력을 가진 평화 안정화 부대(SFOR)가 임무를 인계받아 ''Joint Guard'' 작전을 전개했고, 1998년 6월 이후에는 ''Joint Forge'' 작전을 수행했다.[1]
솔라나의 지휘 하에, 냉전 이후 시대에 대응하여 NATO는 정치·군사 기구를 재편하고, 기본 전략을 변경했다.[1] NATO 가맹국과 그 협상 상대국 간에 서로 다른 요구가 오가는 가운데, 원만하게 의견을 조율한 그의 외교 수완은 높이 평가받았다.[1] 1995년 12월에 프랑스가 NATO 군사 기구에 복귀했고, 1996년 11월에는 스페인도 군사 기구에 가입했다.[1] 1997년 5월 27일, 5개월에 걸친 장기간의 어려운 협상 끝에, 러시아 외무장관 예브게니 프리마코프와 기본 문서에 합의하여 파리에서 조인했다.[1] 이 사건은 러시아와 NATO 중심국 간의 전투 상태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음을 의미하며, 외교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다.[1] 또한 같은 날, 유럽의 NATO 가맹국과 비가맹국 간의 관계 개선을 목적으로 유럽-대서양 파트너십 이사회가 창설되었다.[1] 7월에는 마드리드에서 구 동구권의 체코, 헝가리, 폴란드가 NATO 가입을 위한 협의를 시작했고, 1999년 3월 12일에 가입이 실현되었다.[1]
4. 4. 코소보 전쟁 개입
솔라나는 1995년 12월 빌리 클라스의 후임으로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사무총장에 취임했다. 과거 솔라나가 NATO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이 임명은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NATO에 반대하는 50가지 이유'라는 소책자를 썼고, 미국은 그를 위험 인물 목록에 올렸었다.[12] 그러나 1982년 스페인 사회노동당(PSOE) 집권 후, 솔라나와 당은 이전의 반 NATO 입장을 친 NATO 입장으로 바꾸었다. 1986년 스페인의 NATO 잔류 국민투표에서 찬성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는 NATO가 냉전 시대와 분리되었기에 대표가 된 것에 기쁘다고 말했다.[12]솔라나는 1998년 말 코소보에서 유고슬라비아 당국과 코소보 해방군인 코소보 알바니아인 게릴라 간의 분쟁이 라차크 학살로 악화되자, NATO를 통해 개입을 결정했다. 1999년 1월 30일, NATO는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공습 준비를 발표했다. 2월 6일, 솔라나는 랑부예 성에서 양측과 협상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1999년 3월 24일, NATO군은 유고슬라비아의 군사 및 민간 목표물에 대한 공습을 시작했다. 솔라나는 인도적 이유와 보스니아 전쟁 (1992–1995)과 같은 인종 청소 및 대량 학살 재발 방지를 위한 NATO의 책임을 들어 공습을 정당화했다.[13][14]
솔라나와 NATO는 폭격으로 인한 민간인 사상자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13][14] 1999년 4월 23–24일, 북대서양 위원회는 '새로운 전략 개념'에 동의하여, NATO의 개입 범위를 넓혔다.
1999년 6월 10일, 세르비아군 철수와 함께 NATO는 공격을 중단했고,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1244에 따라 코소보군이 코소보를 점령하며 코소보 전쟁이 종식되었다. 솔라나는 1999년 10월 6일 NATO 사무총장직에서 물러났다.
5. EU 공동 외교 안보 정책 고위 대표 (1999-2009)
솔라나는 1999년 10월 18일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사무총장직을 떠난 후 유럽 연합의 공동 외교 및 안보 정책 고위 대표(CFSP) 직을 맡아 EU를 대표하여 외교 및 안보 정책을 총괄하였다. 그는 4000만유로의 예산을 가지고 발칸 지역 문제에 관여하였고, 서유럽 연합(WEU) 사무총장을 겸임하며 WEU의 기능을 EU로 이관하는 작업을 감독했다. 또한 유럽 방위청의 회장을 역임했다.
2003년 12월에는 유럽 안보 전략을 발표하여 테러를 포함한 EU 안보 위협을 식별하였고, 2004년 3월에는 대테러 조정관을 임명하여 EU의 대테러 대응을 강화했다.
솔라나는 유고슬라비아 지역의 안정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게 연방 국가 형성을 제안하기도 했다. 또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해결을 위해 중동 4자 회담에서 평화를 위한 로드맵 작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와 회담을 가지는 등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펼쳤다.
2004년 11월에는 이란 핵 문제 해결을 위해 영국, 프랑스, 독일과의 협상을 지원했으며, 우크라이나 대선 이후 오렌지 혁명 당시 대통령 후보 간 중재에 참여하여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과 EU 가입에 대해 논의했다. 2004년 말에는 하마스 지도자들과 비밀 협상을 가졌고 "국제 사회가 원하는 것을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혔다.[16]
2002년 1월 21일 솔라나는 관타나모 만의 구금자들을 제네바 협약에 따라 전쟁 포로로 대우해야 한다고 말했다.[17]
5. 1. 역할 및 권한

솔라나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를 떠난 후 유럽 연합에서 역할을 맡았다. 1999년 6월 4일, 쾰른 유럽 이사회에서 유럽 연합 이사회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사무총장은 행정직이었지만, 공동 외교 및 안보 정책 고위 대표(CFSP)로도 임명되어 합의된 공동 정책이 있는 곳에서 EU를 대표했다. 그는 NATO에서 물러난 직후인 1999년 10월 18일에 이 직책을 맡았으며, 4000만유로의 예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대부분은 발칸 작전에 사용되었다. 1999년 11월 25일부터는 서유럽 연합(WEU)의 사무총장으로도 임명되어 해당 조직에서 CFSP로 책임 이전을 감독했다. 2004년에는 5년 임기가 갱신되었다. 그는 또한 유럽 방위청의 회장이었다.
2000년 5월, 빌 클린턴 행정부는 솔라나가 헨리 키신저가 유럽과 대화할 수 있는 전화번호를 갖기를 원했던 소망을 충족했다고 주장했다. 2003년 12월, 솔라나는 유럽 안보 전략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주요 우선순위가 제시되어 있으며 테러를 포함한 EU 안보에 대한 주요 위협이 식별되어 있다. 2004년 3월 25일, 솔라나는를 CFSP의 대테러 조정관으로 임명하고 EU의 대테러 전쟁을 간소화, 조직 및 조정하는 것을 그의 임무로 제시했다.
2004년 6월 29일, 그는 유럽 헌법 조약에 의해 만들어진 EU의 첫 번째 "외무부 장관"이 되도록 지정되었는데, 이 직책은 CFSP의 수장과 대외 관계 담당 유럽 집행 위원을 결합한 것이었다. 이는 외교 정책에 단일한 목소리를 부여하고 두 직책의 권한과 영향력을 더 큰 예산, 더 많은 직원 및 일관된 외교단을 통해 결합하는 것이었다. 이 직책 (구어체로 "미스터 유럽"으로 알려짐)은 리스본 조약에서 ''대외 관계 및 안보 정책 담당 연합 고위 대표''로 부분적으로 유지되었지만, 솔라나는 임기가 끝날 때 물러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에 이 직책을 맡지 않을 것이다.[15]
1999년 6월 3~4일에 쾰른에서 열린 유럽 이사회에서 솔라나는 유럽 연합의 공동 외교·안보 정책 고위 대표로 지명되었다. 공동 외교·안보 정책은 마스트리흐트 조약에 의해 유럽 연합의 3개의 기둥 중 제2, 제3의 기둥으로 도입되었으며, 고위 대표에게는 4000만유로의 예산 권한이 주어졌으며, 그 대부분이 발칸 문제에 할당되었다. 또한 동시에 공동 외교·안보 정책 고위 대표는 유럽 연합 이사회 사무총장도 겸임하게 되어, 반년마다 교대하는 의장국의 인수인계 시 조정에 임하고 있다.
이사회 결정의 정리 및 실행 시에도 사무총장으로서 직무에 종사하고 있다. 게다가 유럽 연합을 대표하여 의장국의 동의 하에 타국과의 교섭에 임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유럽 이사회의 지명을 받아 솔라나는 같은 해 10월 18일에 공동 외교·안보 정책 고위 대표, 유럽 연합 이사회 사무총장에 취임했다.
공동 외교·안보 정책의 기본 이념은 암스테르담 조약으로 도입된 유럽 안보 방위 정책이다. 쾰른, 1999년 12월 헬싱키에서의 유럽 이사회 회의에서, 군사·안보 행동에 대해 정리한 페테르스베르크 임무 수행을 위해 6만 명의 병력을 가진 강력한 유럽 긴급 대응 부대 창설에 합의했다. 11월 20일 솔라나는 또한 서유럽 연합의 사무총장을 겸임하게 되었다. 다만 서유럽 연합은 유럽의 방위·안보 기관으로는 거의 활동 휴지 상태에 있었다. 솔라나가 서유럽 연합의 사무총장에 취임한 이후에는 활동의 기회가 늘었다고 말해지고 있지만, 서유럽 연합의 기능은 유럽 연합으로 이관되고 있으며, 솔라나는 이 이관 과정을 감독하고, 또한 서유럽 연합의 공동 외교·안보 정책으로의 부분적 통합 작업에 임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한때 서유럽 연합의 기관이었던 안보 연구소와 위성 센터는 현재 공동 외교·안보 정책으로 이관되었다.
2000년 5월 클린턴 행정부는 솔라나에 대해, 헨리 키신저가 바라 마지않았던 유럽과의 핫라인이 실현되었다고 평했다. 2003년 2월에는 유럽 안보 전략을 발표하여, 테러리즘을 포함한 유럽 연합의 안전에 대한 위협을 열거, 정의했다. 2004년 3월 25일, 공동 외교·안보 정책 대테러리즘 조정관에 임명하고, 그 사명은 유럽 연합의 테러리즘과의 대결에 대해 정비, 계획, 조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2004년 6월 29일, 솔라나의 직책은 더욱 확대되었다. 유럽 연합 초대 외무 장관으로 지명됨으로써, 공동 외교·안보 정책과 유럽 위원회 외교 담당 위원 양쪽 모두를 수행하게 되었다. 또한 2006년, 유럽 헌법 조약의 비준이 완료되었다면, 유럽 연합 이사회의 "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이 외에도 2004년 7월 12일, 유럽 연합 가맹국의 방위 지출 효율성을 확보, 향상시키기 위해 신설된 유럽 방위 기관의 수장으로 지명되었다.
솔라나는 유럽 헌법 조약 초안에서 새롭게 부여될 권한에 관해 비판과 칭찬을 받았다. 그 때, 신 헌법 하에서도 가맹국의 만장일치 동의가 없으면, 이 직책은 어떠한 행동도 인정받지 못한다고 반론했다.
5. 2. 발칸 반도 안정화 노력
1999년 6월 3~4일에 쾰른에서 열린 유럽 이사회에서 솔라나는 유럽 연합의 공동 외교·안보 정책 고위 대표로 지명되었으며, 이 직책에는 4,000만 유로의 예산 권한이 주어졌고, 그 대부분이 발칸 문제에 할당되었다. 또한 공동 외교·안보 정책 고위 대표는 유럽 연합 이사회 사무총장도 겸임하게 되어, 의장국의 인수인계시 조정역할을 수행했다.솔라나는 유고슬라비아에 남은 국가들의 안정과 관련하여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1]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 연방 국가 형성을 제안했는데, 이는 코소보와 보이보디나의 독립 요구가 도미노처럼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다.[1] 현지 언론은 이를 비꼬아 새 국가의 명칭을 "솔라니아(Solania)"라고 보도했다.[1]
5. 3. 중동 평화 프로세스 관여
솔라나는 중동 국가와 볼리비아, 콜롬비아와 같은 라틴 아메리카 국가와 유럽 연합 간의 협정에 관한 협상에 임해 왔다. 또한 유고슬라비아에 남은 국가의 안정과 관련하여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 완전한 독립 대신 연방 국가를 형성하는 것을 제안했고, 이는 코소보와 보이보디나의 독립 요구가 도미노처럼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현지 언론은 이 제안을 비꼬아 새로운 국가의 명칭을 "솔라니아(Solania)"라고 보도했다.[16]2002년 1월 21일, 솔라나는 관타나모 미 해군 기지에 수용된 범죄자에 대해 제네바 협약에 근거한 처우를 해야 한다고 발언했다.[17] 유럽 연합은 이라크 침공과 같은 전쟁은 앞으로 협상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표명했다. 솔라나는 자신의 직무에서 가장 어려움을 느꼈던 것은 유럽 연합 가맹국 중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상임 이사국인 영국과 프랑스가 대 이라크 방침에서 노선이 일치하지 않았을 때라고 말했다.
이라크 체제 변혁을 노린 미국을 동유럽 국가들이 지지하는 Vilnius letter영어이나, 영국, 이탈리아를 포함한 8개국이 발신한 서한은 공동 외교·안보 정책의 권위가 실추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솔라나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의 분쟁 해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유럽 연합 외에 국제 연합, 러시아, 미국으로 구성된 중동 쿼텟의 틀 안에서 "평화를 위한 로드맵" 구축에 힘썼다. 2004년 7월 22일, 솔라나는 그동안 거부되어 온 이스라엘 총리 아리엘 샤론과의 회담에 임해, 유럽 연합의 로드맵 관여에 성공했다. 2005년 1월 9일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대통령 선거를 방해하고 있다며 이스라엘을 비난했지만, 4일 후 다시 샤론과 회담했다.

2004년 11월, 솔라나는 영국, 프랑스, 독일 3개국과 이란 간에 이루어진 핵 물질 농축 중단을 요구하는 협상을 지원했다. 같은 달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자 2명의 중재를 맡았고, 이듬해 1월 21일에는 정식으로 대통령에 취임한 빅토르 유셴코와 장래의 유럽 연합 가입에 대해 논의했다.[18]
5. 4. 이란 핵 문제 협상 지원
솔라나는 2004년 11월 영국, 프랑스, 독일 3개국과 이란 간의 핵 물질 농축 중단을 요구하는 협상을 지원했다.[15] 2006년 베를린에서 열린 이란 핵 물질 농축 문제에 관한 외무 장관 회담 후 기자 회견에는 필립 도스트-블라지(프랑스), 잭 스트로(영국),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독일)와 함께 참석했다.
5. 5. 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 중재
2004년 11월, 솔라나는 영국, 프랑스, 독일 3개국과 이란 간의 핵 물질 농축 중단을 요구하는 협상을 지원했다. 또한 같은 달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자 간 중재를 맡았으며, 이듬해 1월 21일에는 정식으로 대통령에 취임한 빅토르 유셴코와 장래의 유럽 연합 가입에 대해 논의했다.[16]6. 퇴임 이후 활동
- 바르셀로나 글로벌 보건 연구소(ISGlobal), 이사회 구성원[20]
- 외교 협의회(CFR), 글로벌 자문 위원회 위원[21]
- 엘카노 왕립 국제 전략 연구소, 이사회 구성원[22]
- 글로벌 리더십 재단(GLF), 구성원[23]
- 국제 위기 감시기구(ICG), 이사회 구성원 (2010년 이후)[24]
- 뮌헨 안보 회의, 자문 위원회 위원[25]
- 프로젝트 신디케이트, 기고가 (2004년 이후)
- 유럽 리더십 네트워크(ELN), 선임 네트워크 구성원[26]
솔라나는 아내 콘셉시온 히메네스와 그 사이에서 낳은 성인 자녀 디에고와 베가가 있다. 현재 브뤼셀에 거주하고 있으며, 자택으로 삼고 있는 맨션은 스페인 정치인에게 브뤼셀에서 중요한 장소로 여겨진다. 솔라나는 영어 외에 프랑스어에도 능통하다.
NATO의 사령관이었던 웨슬리 클라크|Wesley Clark영어는 솔라나에게 외교 비결에 대해 물었고, 솔라나는 "적을 만들지 않는 것과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불필요한 질문을 절대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답했으며, "외교는 원적 문제와 같은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미국의 NATO 전권 대표 알렉산더 벌시보|Alexander Vershbow영어는 솔라나가 대서양으로 격리된 NATO 가맹국 각국 수뇌의 단결이 요구될 때, 수면 아래에서 조정에 나서 의견을 취합하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미국의 외교 정책에 중요한 영향력을 가진 외교 문제 평의회(CFR)에서의 연설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뉴욕에 본부를 둔 동서 연구소와 외교 정책 협회(FPA)에서도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 외 수상 경력으로는 성 마이클 및 성 조지 훈장, 로마 클럽 스페인 지부 회원, 스페인 이사벨 여왕 대십자 훈장, 독일 국방부 만프레드 뵈르너 메달, 마다리아가 유럽 재단 이사장(1998- ), the Vision for Europe Award (2003년), 동서 연구소 Statesman of the Year Award (2003년), 카네기 재단 (네덜란드)|Carnegie Foundation (Netherlands)영어 평화상(2006년)이 있다. 2007년에는 유럽 통합에 대한 뛰어난 공적을 평가받아 카를 대제상을 수상했다.
7. 평가 및 유산
솔라나는 브뤼셀에 거주하며, 그의 아파트는 스페인 정치인들의 만남의 장소로 알려져 있다. 그는 스페인어 외에도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하다.[18] 웨슬리 클라크 장군은 솔라나에게 외교적 성공 비결에 대해 "적을 만들지 말고, 답을 모르거나 좋아하지 않는 질문은 절대 하지 마세요"라고 답했다고 한다.[18] 그는 "난제 해결사"로 묘사되기도 한다.
알렉산더 버시보우 전 미국 NATO 대사는 솔라나가 "대서양 양측의 지도자들과 협력하여 NATO가 중요할 때 단결하도록 보장하는 탁월한 합의 구축자"라고 평가했다. 그는 외교 협회(CFR)에서 자주 연설하며, 외교 정책 협회(FPA)와 뉴욕의 동서부 연구소에서도 활동한다. 2010년 인도주의 대화 센터 명예 회장, 2011년 글로벌 리더십 재단 회원 및 휴먼 라이츠 워치 이사회 회원이 되었다.[27]
그는 성 미카엘 및 성 조지 훈장 명예 기사단장, 로마 클럽 스페인 지부 회원이다. 스페인에서 이사벨라 가톨릭 여왕 훈장 대십자 훈장과 독일 국방부 만프레드 뵈르너 메달을 받았다. 1998년부터 마다리아가 - 유럽 대학 재단 회장, 2003년 유럽 비전상과 이스트웨스트 연구소 '올해의 정치가상', 2006년 와텔러 평화상, 2007년 카롤루스 대제상을 수상했다.[28] 2009년 ESADE 비즈니스 스쿨 글로벌 경제 및 지정학 센터 회장, 2010년 후안 카를로스 1세에 의해 금양모 기사단 기사로 임명되었다.[29]
2020년 3월, 스페인의 코로나19 유행 중 코로나19에 감염되어 병원에 입원했다.[30]
7. 1. 수상 내역
연도 | 수상 내역 |
---|---|
1996 | |
1997 | |
1998 | |
2000 | |
2000 | |
2002 | 만프레트 뵈르너 메달 (독일) 독일 연방 국방부[32] |
2003 | 유럽 비전상, 에드몽 이스라엘 재단 |
2003 | 올해의 정치가상, 이스트웨스트 연구소 |
2004 | |
2005 | |
2005 | ![]() |
2006 | 와텔 평화상, 카네기 재단 |
2007 | |
2007 | 대화를 통한 평화 훈장, 뮌헨 안보 회의 |
2007 | 카롤루스 대제상 |
2008 | 세계 어린이 의회 평화상 |
2009 | 스페인 국방부 특별상 |
2009 | 공존상, 마누엘 브로세타 재단 |
2010 | |
2010 | |
2010 | |
2010 | 카를 5세 유럽상, 유스테 재단 유럽 아카데미 |
2010 |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상, 뮌헨 안보 회의 |
자유의 기사상, 카지미에시 푸와스키 재단 | |
명예 학위 (정치학),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 |
2011 | 유럽을 위한 장 모네 재단 금메달 |
8. 저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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