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하치스카 요시시게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하치스카 요시시게는 1586년에 태어나 1620년에 사망한 인물로, 아와국 도쿠시마 번의 초대 번주이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시작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다. 이후 도요토미 씨의 성을 하사받고 종4위하 아와노카미에 서임되었으며, 오사카 전투에서도 도쿠가와 측에 참전하여 무공을 세웠다. 요시시게는 내정에서 오카베가키 23개조를 제정하고 염전 개발에 힘쓰는 등 명군으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장남 하치스카 타다히데가 뒤를 이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도쿠시마번주 - 하치스카 모치아키
    하치스카 모치아키는 1846년에 태어나 보신 전쟁에서 신정부군에 가담하고 메이지 유신 이후 도쿠시마현 지사, 주 프랑스 특명전권공사 등을 역임했으며, 시부사와 에이이치와 함께 기업을 설립하고 JTB의 전신인 귀빈회를 창립하는 등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다 1918년에 사망했다.
  • 하치스카씨 - 하치스카 이에마사
    하치스카 이에마사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걸쳐 활약하며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고 시코쿠 정벌 이후 아와 18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으며, 임진왜란 참전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영지를 보전하고 다도에 조예가 깊었던 무장이다.
  • 하치스카씨 - 도쿠시마번
    도쿠시마번은 1585년 하치스카 이에마사가 초대 번주가 되어 아와국을 중심으로 성립되었으며, 오사카 전투 이후 아와지국을 추가로 영유하여 25만 7천 석 규모로 성장했고,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치현으로 도쿠시마현이 되었다.
  • 1586년 출생 - 아사노 나가아키라
    아사노 나가아키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섬긴 에도 시대의 다이묘로, 형의 사망 후 기이 기슈번을 상속받고 오사카 전투에서 공을 세워 아키 히로시마번의 번주가 되었다.
  • 1586년 출생 - 호소카와 다다토시
    호소카와 다다토시는 호소카와 다다오키의 아들로,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가문을 상속받아 고쿠라 번주를 거쳐 구마모토 번 초대 번주가 되었으며, 도쿠가와 가문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가문을 번성시켰다.
하치스카 요시시게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하치스카 요시시게
하치스카 요시시게 상 (도쿠시마 시립 도쿠시마 성 박물관 소장)
시대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생년월일덴쇼 14년 1월 2일 (1586년2월 20일)
사망일겐나 6년 2월 26일 (1620년3월 29일)
아명센쇼마루(千松丸)
이명도요오(豊雄)
다다요시(忠吉)
시호해당 없음
계명峻徳院殿心岳義伝
묘소도쿠시마현도쿠시마시시모스케토마치의 고겐지
관위종4위하아와노카미
막부에도 막부
주군도쿠가와 이에야스
히데타다
아와도쿠시마 번 번주
씨족하치스카 씨
부모아버지: 하치스카 이에마사
어머니: 지코인 (이코마 이에나가의 딸)
형제자매요시시게
소쿠신인
아키히메
짓소인
배우자정실: 교다이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 오가사와라 히데마사의 친딸)
자녀미호히메
다다테루
쇼토쿠인

2. 생애

덴쇼 14년(1586년), 하치스카 이에마사의 장남으로 태어나 처음에는 아버지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겼다.

히데요시 사후인 게이초 5년(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와 혼인하였고, 같은 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다. 전투 후 아버지로부터 가독을 물려받아 아와국 도쿠시마 번의 번주가 되었으며, 게이초 8년(1603년)에는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고 종4위하 아와노카미에 서임되었다.[3]

오사카 전투에서는 도요토미 가문을 배신하고 도쿠가와 측으로 참전하여 무공을 세웠다. 게이초 20년(1615년)에는 쇼군가로부터 마쓰다이라 성을 하사받았고[4], 아와지국을 가증받아 25만 7천 석의 영지를 다스리게 되었다. 내정에서는 법령을 정비하고 산업 개발에 힘써 '명군'으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병약하여 겐와 6년(1620년)에 아버지보다 먼저 향년 35세로 사망하였고, 장남 타다히데가 뒤를 이었다.

2. 1. 출생과 가문 배경

덴쇼 14년(1586년), 하치스카 이에마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이코마 이에나가의 딸인 지코인이다. 처음에는 아버지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섬겼다.

히데요시 사후, 게이초 5년(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이자 오가사와라 히데마사의 딸인 우지히메(만히메・오토라, 게다이인)를 아내로 맞이했다. 우지히메는 이에야스의 증손녀에 해당한다. 이 결혼을 계기로, 같은 해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에 가담하여 본 전투에 직접 참여했다. 이는 히데요시의 고굉지신이었던 아버지 이에마사가 병을 이유로 참전하지 않고 영지에 머무른 것과는 다른 행보였다. 전투 후, 요시시게는 그 공적을 인정받아 이에야스로부터 소령을 안도받았다. 이후 삭발하고 은거한 아버지로부터 가독(家督)을 물려받아 아와국 도쿠시마 번의 번주가 되었다.

게이초 8년(1603년) 3월 25일,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아[3], '''도요토미 도요오'''(豊臣豊雄)라는 이름으로 종4위하 아와노카미에 서임되었다.

2. 2. 세키가하라 전투와 도쿠시마 번주 취임

덴쇼 14년(1586년) 하치스카 이에마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이코마 이에나가의 딸인 지코인이다. 처음에는 아버지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겼다.

히데요시 사후인 게이초 5년(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이자 오가사와라 히데마사의 딸인 우지히메(게다이인)와 혼인하였다. 이 결혼으로 도쿠가와 가문과 인척 관계를 맺게 되었다. 같은 해 발발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히데요시의 고굉지신이었던 아버지 이에마사가 병을 이유로 참전하지 않은 것과 달리, 요시시게는 동군(이에야스 측)에 가담하여 본 전투에 직접 참여했다.

전투가 끝난 후, 동군에 가담한 공적을 인정받아 이에야스로부터 영지를 그대로 인정받았다. 이후 삭발하고 은거한 아버지 이에마사로부터 가독을 물려받아 아와국 도쿠시마 번의 번주가 되었다. 게이초 8년(1603년) 3월 25일에는 도요토미 씨 성을 하사받았고[3], '''도요토미 도요오'''(豊臣豊雄)라는 이름으로 종4위하 아와노카미 관직에 임명되었다.

2. 3. 오사카 전투 참전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관계를 강화했던 요시시게는 오사카 전투에서 과거 주군이었던 도요토미 가문을 등지고 도쿠가와 측으로 참전하였다. 이 전투에서 그는 무공을 세웠다.

2. 4. 번정 개혁과 사망

오사카 전투에서는 도요토미 가문을 배신하고 도쿠가와 측으로 참전하여 무공을 세웠다.

게이초 20년(1615년) 1월 11일, 마쓰다이라 성의 가명을 쇼군가로부터 하사받았고[4], 같은 해 윤6월 4일에는 아와지국도 가증받아 25만 7000석의 소령이 되었다. 내정에서는 오카베가키 23개조를 제정하고, 부양 염전 개발과 비상시 식량 확보에 힘쓰는 등 번정 개혁을 추진하여 명군으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병약했다고 전해지며, 겐와 6년(1620년)에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향년 35세였다. 법명은 슌토쿠인전 아슈 다이슈 시품 신가쿠 기덴 다이코지(春桃院殿阿州大守拾品心嶽義傳大居士)이다.

그의 뒤는 장남 타다히데가 이었다.

3. 가계


  • 아버지: 하치스카 이에마사 (1558-1639)
  • 어머니: 지코인 (히메, 1563-1606) - 이코마 이에나가의 딸
  • 정실: 케이다이인 (만히메/우지히메, 1592-1666) - 오가사와라 히데마사의 장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
  • * 장녀: 미호히메 (아와고젠/호슌인, 1603-1632) - 이케다 타다오의 정실
  • * 장남: 하치스카 타다테루 (1611-1652)
  • * 차녀: 쇼토쿠인 (만, 1614-1683) - 미즈노 나리사다의 정실

4. 일화

명군으로 알려진 하치스카 요시시게에게는 사실 여부는 불명확하지만 그의 총명함을 보여주는 여러 일화가 남아 있다.


  • 요시시게는 외출 시 곁에서 기다리며 지루해하기 쉬운 수행 가신들을 배려하여 "마을에서 놀다 오라"고 말하며 자신의 품에서 돈을 주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젊은 무사들이 서로 수행을 따라가려 했다고 전해진다. 이를 알게 된 다른 영주들이 요시시게의 인심 장악술에 감탄하여 따라 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 요시시게는 책을 많이 읽고 백성과 부하를 아꼈다. 그가 힘쓴 사업으로는 훗날 번 통치의 기반이 된 남(藍, 쪽) 생산 장려가 있었고, 번을 지탱하는 요시노강 치수 사업과 염전 개발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특히 말년에는 요시노강 치수 사업에 직접 붓을 들고 지휘했다고 한다.
  • 요시시게는 몸이 약했지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소극적이었던 아버지 이에마사를 꾸짖고 재빨리 이에야스에게 합류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오사카 전투 때에도 서군 참가를 권유하는 밀서에 응하여 오사카성에 들어가려던 아버지를 설득하여 이에야스에게 밀서를 제출하게 했다. 자신은 기즈가와구치 전투와 바쿠로부치 전투 등에서 많은 무공을 세웠다.

5. 평가

명군으로 알려진 요시시게(지진)에게는 여러 일화가 전해진다.

외출 시 수행하는 가신들이 기다리며 지루해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자신의 돈을 주며 "마을에서 놀다 오라"고 배려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젊은 무사들이 서로 수행을 자원했으며, 이를 알게 된 다른 영주들도 요시시게의 인심 장악술에 감탄하여 따라 했다고 전해진다.

요시시게는 독서를 즐기고 백성과 부하를 소중히 여겼다. 또한 번 재정의 기초가 된 남(藍) 생산을 장려했으며, 번을 지탱하는 요시노강 치수 사업과 염전 개발에도 힘썼다. 특히 말년에는 요시노강 치수 사업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병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아버지 이에마사(家政)를 설득하여 이에야스(家康) 측에 신속히 가담하여 공을 세웠다. 오사카 전투 때에도 서군 합류를 권유하는 밀서를 받은 아버지를 설득하여 밀서를 이에야스에게 제출하게 하고, 자신은 키즈 강구 전투·바쿠로부치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참조

[1] 서적 A New Life of Toyotomi Hideyoshi https://books.google[...] The Kyōbun-Kwan 1904
[2] 서적 Osaka 1615: The last battle of the samurai https://books.google[...] Bloomsbury Publishing 2012-06-20
[3] 논문 羽柴氏下賜と豊臣姓下賜 1996
[4] 논문 蜂須賀氏への『松平氏下賜状』とそのライフサイクル 日本図書刊行会 200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