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백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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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허백련은 1891년 전라남도 진도에서 태어나 1977년 사망한 한국의 남화가이다. 일본 유학 후 고실취운에게 남화를 사사했으며,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다. 광복 후 무등산에 정착하여 서화 제작에 힘썼으며,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 작가로 활동했다. 대한민국 문화훈장과 예술원상 등을 수상했으며, 2만 점의 그림을 그렸으나 평생 만족스러운 작품은 없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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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백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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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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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91년 11월 2일 |
출생지 | 조선 전라도 진도 |
사망일 | 1977년 2월 15일 |
국적 | 조선→대한제국→대한민국 |
분야 | 미술 |
학력 | |
스승 | 조석진 안중식 |
제자 | 김옥진 정운면 조규일 김환기 |
소속 | 연진회 |
가족 | |
친척 | 허형 |
2. 생애 및 활동
전라남도 진도군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까지 활동한 한국의 대표적인 남화가이다. 초기에는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 대학 등에서 수학하며 남화를 배웠다.[3][4]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여러 차례 입상하고 수석상까지 수상하며 화가로서 명성을 쌓았다. 특히 1935년부터 1937년까지 조선전람회에서 연이어 수석상을 받았다. 광복 이후에는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의 추천 작가, 초대 작가, 심사위원(1955년~1959년) 등을 역임하며 한국 화단 발전에 기여했다.[3] 교육에도 힘써 1947년 광주에 농촌고등기술학교(현 삼애학원)를 설립하고 직접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53년에는 교장을 지내기도 했다.
1955년 전라남도 문화상, 1962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문화포장, 1966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미술 부문,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 다양한 상훈을 받았다.[3] 1959년부터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했다.[3]
만년에는 광주광역시 무등산 기슭에 '춘설헌'을 짓고 정착하여 직접 차(茶)를 가꾸고 자연을 벗 삼으며 작품 활동에 몰두했다.[3] 그의 화풍은 산수화, 사군자, 서예 등 다방면에 걸쳐 필획(筆劃)이 생동하며 초연한 기품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표작으로는 〈모추(暮秋)〉 등이 있으며, 평생 2만여 점의 작품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3] 친척 중에도 남화가인 박종철이 있다.
2. 1. 초기 생애와 수학 (1891년 ~ 1920년대 초)
1891년 11월 2일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면 쌍정리의 농가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1년부터 1920년까지는 사숙(私塾)에서 한학(漢學)을 배웠다.1913년 일본으로 건너가 1914년까지 릿쿄 대학교에 다녔으며, 1915년부터 1918년까지는 메이지 대학교에서 법률과 정치를 공부했다. 이 시기 남화의 대가인 小室翠雲|고무로 스이운일본어에게 감명을 받아 그의 문하생이 되어 남화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1919년 학업을 마치고 고향인 진도로 돌아와 남화 제작에 몰두했으며, 이듬해인 1920년에는 광주광역시로 거처를 옮겼다. 1921년 봄에는 강원도 금강산으로 2개월간 사생(寫生) 여행을 다녀왔다.
1922년에는 제1회 조선전람회에 〈추경산수〉(秋景山水)를 출품하여 1등 없는 2등상을 받으며 화단에 이름을 알렸다.[2] 같은 해 일본에 5개월간 머물렀다. 1923년에는 제2회 선전 동양 서화부에서 "추산모애"로 삼등상을 수상했으며, 다시 메이지 대학에서 1925년까지 공부했다. 이 무렵인 1925년부터 1926년까지는 일본 화가 小室翠翁|고무로 스이오일본어의 문하에서 여러 화가들과 교류하며 작품 활동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3][4]
2. 2. 작품 활동과 명성 (1920년대 중반 ~ 1945년)
1923년,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 동양화부에서 〈추산모애〉(秋山暮靄)로 3등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1927년까지 매년 선전에 작품을 출품했다. 1924년에는 광주의 일본인 소학교 강당에서 작품전을 열었고, 겨울에는 금강산으로 사생 여행을 떠났다. 1925년부터 1926년까지는 일본 남화의 대가인 소실취옹(小室翠翁) 문하에서 여러 화가들과 교류하며 작품 활동에 몰두했다.[3][4] 1927년에는 다시 일본에 건너가 2개월간 머물렀다.1931년에는 금강산과 북경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고, 1932년에는 경성의 미쓰코시 백화점 (현 신세계 백화점)에서 작품전을 열었다. 1935년부터 1937년까지는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연이어 수석상을 수상하며 화가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했다.
1939년, 광주광역시 금동에 연진회관(鍊眞會館)을 설립하고, 남화(南畫)의 전통 기법을 계승하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연진회(鍊眞會)를 발족했다. 1942년에는 경성의 정자옥 백화점 (현 롯데 영플라자 명동점) 화랑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1945년 광복 후, 일본인이 경영하던 무등산의 다원(茶園)을 인수하여 산기슭에 산장을 짓고 정착했다. 이곳에서 차를 재배하고 가축을 기르는 자급자족적인 생활을 하며 서화(書畫) 제작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이 산장은 수류화개관(水流花開館), 근인재(近仁齋), 적취각(滴翠閣), 춘설헌(春雪軒)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2. 3. 광복 이후의 교육 및 예술 활동 (1945년 ~ 1977년)
1945년 광복 이후 광주광역시 무등산 기슭에 일본인이 운영하던 다원을 인수하여 '춘설헌(春雪軒)'이라는 산장을 짓고 정착했다. 이곳에서 차밭과 농장을 가꾸며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하면서 서화(書畫) 제작에 몰두했다. 이 산장은 수류화개관(水流花開館), 근인도(近仁道), 적취각(積翠閣)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3]교육 활동에도 힘썼다. 1946년 광주상공회의소에서 농촌고등기술학교(현 삼애학원) 설립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서화전을 열었다. 이듬해인 1947년 학교를 설립하여 직접 한문과 국사를 가르쳤으며,[3] 1953년에는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 교장을 지냈다. 그러나 1950년 한국 전쟁 발발로 무등산으로 피난했고 학교 건물이 파괴되는 아픔을 겪었다. 전쟁 후인 1951년에는 학교 재건을 위한 기금 마련 서화전을 다시 열었다.
예술 활동 역시 활발히 전개했다. 1947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가 시작되자 추천 작가 및 초대 작가로 추대되었고, 심사위원(1955년~1959년)을 역임했다.[3] 1949년 제1회 국전에는 추천 작가였으나 출품하지 않았고, 1953년 제2회 국전에는 〈백설홍수(白雪紅樹)〉를 출품했다. 이후 1954년부터 1962년까지 제3회부터 제11회 국전에 꾸준히 작품을 선보였으나, 1963년부터 1973년 사이에는 1964년 제13회 국전을 제외하고는 출품하지 않았다.
국내외에서 여러 전시회를 통해 작품 세계를 알렸다. 1959년에는 미국 뉴욕에서 '의재 화회(毅齋 畵會)'를 열었고, 1961년에는 서울 중앙 공보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1969년에는 무등산 단군 신전 건립 기금 마련을 위해 서울 조흥은행 본점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1971년에는 서울신문사 주최 동양화 전람회에 4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1973년에는 회고전을 가졌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다양한 상훈을 받았다. 1955년 전라남도 문화상을 수상했으며, 1962년에는 대한민국 문화훈장 문화포장을 수여받았다.[3] 1966년에는 대한민국 예술원상 미술 부문상을 수상했고,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3]
1959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고,[3] 1960년에는 제2대 추천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1973년까지 회원 자격을 유지했다.
만년에는 광주광역시 무등산 자락의 춘설헌에서 지내며 차(茶)를 가꾸고 자연을 벗 삼아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3] 그의 화풍은 산수화, 사군자, 서예 모두에서 필획(筆劃)이 생동하며 초연한 기품을 보인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표작 중 하나로 〈모추(暮秋)〉가 있다.[3] 평생 2만여 점의 그림을 그린 것으로 전해지지만, 정작 본인은 만족스러운 작품은 한 점도 없다고 술회했다고 전해진다.
3. 화풍 및 작품
1922년 제1회 조선전람회에서 〈추경산수〉(秋景山水)로 1등 없는 2등상을 받으며 화단에 이름을 알렸다.[2] 이후 1925년부터 1926년까지 일본에서 소실취옹(小室翠翁) 문하에서 활동하며 여러 화가들과 교류하고 작품 활동에 몰두했다.[3][4]
1935년부터 1937년까지 조선전람회에서 연이어 수석상을 수상하며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았다. 1947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가 시작되자 추천 작가 및 초대 작가로 추대되었고, 1955년부터 1959년까지 심사위원을 역임하며 한국 화단의 발전에 기여했다. 1955년에는 전라남도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1959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1962년에는 문화훈장을 받았다.[3] 1966년에는 대한민국 예술원상 미술부문을 수상하는 등 예술적 성취를 인정받았다.[3] 1973년에는 회고전을 가졌으며,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3]
그의 화풍은 산수, 사군자, 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필획(筆劃)이 생동하는 힘과 세속을 벗어난 듯한 초연한 기품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3]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모추〉(暮秋) 등이 있다.[3]
만년에는 광주 무등산 자락에 머물며 자연을 벗 삼아 차(茶)를 가꾸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3]
4. 가족 관계
5. 기타
참조
[1]
웹사이트
(66)양천 허씨(陽川許氏)-130,286명
http://www.seoulecon[...]
2014-09-12
[2]
웹인용
開幕된美術展覽會
http://newslibrary.n[...]
1922-06-02
[3]
백과사전
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한국 근대미술/한국 근대 동양화 “허백련”
https://ko.wikisourc[...]
[4]
뉴스
南畵山水의 마지막大家 他界한 許百鍊옹의 生涯와 作品
http://newslibrary.n[...]
1977-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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