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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비 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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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비 권씨는 조선 태종 때 명나라 영락제의 후궁으로, 조선에서 명나라에 공녀로 보내진 최초의 사례이다. 권집중의 딸이자 권영균의 누이로, 1408년 명나라 환관 황엄의 권유로 영락제에게 간택되어 1409년 현비에 책봉되었다. 영락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1410년 북방 정벌에 동행했다가 사망하여 현인비로 추증되었다. 사후 권씨를 질투한 다른 공녀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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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비 권씨
기본 정보
작위현비 (賢妃)
추증 시호공헌 (恭獻)
본관안동 권씨 (安東 權氏)
출생1391년 11월 22일 (홍무 24년 10월 26일)
출생지조선
사망1410년 11월 20일 (영락 8년 10월 24일)
사망 장소린청현
매장지이현
배우자영락제
아버지권집중 (權執中)

2. 생애

공조전서(工曹典書) 권집중의 딸이자 권영균의 누이로, 경상도 안동부 출신이다.

1408년(태종 8년, 영락 6년), 명나라 영락제의 요구에 따라 조선에서 처음으로 보내는 공녀 중 한 명으로 선발되었다.[9] 같은 해 11월, 명나라 환관 황엄을 따라 명나라로 건너갔다. 이는 조선 공녀 제도의 시초로, 이후 조선 여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준 제도로 평가된다.

1409년(영락 7년) 2월, 북경으로 돌아온 영락제를 처음 만났다. 영락제는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옥소 연주 실력에 반하여 깊은 총애를 보였고, 현비(賢妃)로 책봉하였다. 그녀의 오빠 권영균 역시 명나라에서 광록시경(光祿寺卿)이라는 벼슬을 받았다.[12] 권현비는 1407년 사망한 인효문황후를 대신하여 실질적으로 내명부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1410년(영락 8년), 영락제북원(타타르) 정벌에 동행하였다가 돌아오는 길에 병을 얻어 그해 10월 24일, 산동 임성(臨城)에서 사망하였다.[13] 영락제는 그녀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직접 제사를 지내주었고,[14] 사후 '''공헌현비'''(恭獻賢妃)라는 시호를 내렸다.

영락제는 권현비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의문을 품었다. 3년 뒤인 1413년 혹은 1414년, 그는 같은 조선 출신 후궁 여미인(呂美人)[15]이 권현비를 질투하여 독살했다고 주장하며 관련된 많은 궁인들을 처형하였다. 여미인은 잔혹한 낙형(烙刑, 살을 지지는 형벌)을 당해 사망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후에 다른 궁녀가 동성애를 요구했으나 여미인이 거절하자 앙심을 품고 무고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이를 '어여(魚呂)의 난'이라고 부른다.[16]

2. 1. 조선에서의 삶과 공녀 선발

공조전서(工曹典書) 권집중(權執中)의 딸이자 권영균(權永均)의 누이로, 경상도 안동부 출신이다.

1408년(태종 8년, 영락 6년) 조선에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왔던 명나라 환관 황엄이 귀국을 앞두고, 영락제가 '조선에 예쁜 처녀가 있다면 몇 명 뽑아 데려오라'고 언급했다는 사실을 태종에게 귀띔하였다.[9] 이에 태종은 즉시 진헌색(進獻色)을 설치하고 금혼령을 내려, 각 도에서 노비가 없는 양반서인(庶人)의 딸을 제외한 13세에서 25세 사이 양가(良家)의 처녀를 선발하여 궁으로 데려오도록 명하였다. 이는 과거 태종의 세자(양녕대군)와 명나라 황녀 간의 국혼 논의가 있었을 때, 이를 꺼린 태종이 세자가 이미 장가를 갔다고 거짓말[10]을 했으나 황엄이 중간에서 이를 무마하여 문제가 해결된[11] 것에 대한 보답의 성격도 있었다.

조선에서 명나라공녀를 바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으며, 이는 이후 관례로 굳어져 조선 여성사의 큰 수난 중 하나로 평가된다. 같은 해 11월 12일, 권씨는 다른 선발된 여성들과 함께 황엄을 따라 명나라로 떠났다.

2. 2. 명나라 후궁 생활과 영락제의 총애

1408년(태종 8년, 영락 6년),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명나라 환관 황엄은 귀국을 앞두고 영락제가 '조선에 예쁜 처녀가 있거든 몇 명을 선택해 데려오라'고 언급했음을 태종에게 귀띔했다.[9] 이는 과거 태종이 자신의 세자(양녕대군)와 명나라 황녀의 혼담을 피하고자 세자가 이미 장가갔다고 거짓말[10]한 것을 황엄이 무마해 준 것에 대한 보답 차원이었다.[11] 이에 태종은 즉시 진헌색(進獻色)을 설치하고 금혼령을 내려 13세에서 25세 사이의 양가 처녀들을 선발하게 했다. 이때 권씨도 선발되어 다른 여성들과 함께 명나라로 보내졌는데, 이는 조선이 명나라공녀를 바친 첫 사례였으며 이후 관례화되어 조선 여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같은 해 11월 12일, 권씨는 황엄을 따라 명나라로 가서 후궁전에 머물렀다. 1409년 2월 9일, 북경으로 돌아온 영락제는 조선에서 온 여성들을 만났고, 권씨의 아름다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명사(明史)》 기록에 따르면, 영락제는 백옥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권씨에게 어떤 재주가 있는지 물었고, 권씨가 옥소를 꺼내 불자 그 아름다운 곡조에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영락제는 즉시 권씨를 현비(賢妃)로 책봉하고, 그녀의 오빠인 권영균에게는 3품 광록시경(光祿寺卿) 벼슬과 함께 채단(綵段) 60필, 채견(綵絹) 3백 필, 금(錦) 10필, 황금 2정(錠), 백은(白銀) 10정, 말 5필, 안장 2면(面), 옷 2벌[襲], 초(鈔) 3천 장 등 많은 재물을 하사했다.[12]

권현비는 영락제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으며, 1407년 인효문황후 서씨가 사망한 후 실질적으로 내명부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1410년(영락 8년), 권현비는 영락제북원(타타르) 정벌에 동행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던 중 중병을 얻어 그해 10월 24일, 산동성 임성(濟南路)에서 세상을 떠났다.[13] 영락제는 그녀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직접 제사를 지내주기도 했다.[14] 사후 권현비는 '''공헌현비'''(恭獻賢妃)라는 시호를 받았다.

영락제는 권현비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의문을 품었다. 3년 뒤인 1413년, 그는 권현비와 함께 북방 정벌에 동행했던 다른 조선 출신 후궁 여미인[15]이 권현비를 질투하여 독살했다고 주장했다. 여미인이 내관과 은장이를 통해 구한 비상을 권현비의 차(茶)에 넣어 죽게 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여미인은 잔혹한 낙형(烙刑, 살을 지지는 형벌)을 받고 처형되었으며, 관련자로 지목된 내관과 궁녀 등 많은 사람이 함께 살해되었다. 그러나 이후 이 사건은 여씨 성을 가진 다른 궁녀가 동성애를 요구했으나 여미인이 거절하자 앙심을 품고 무고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사건을 '어여(魚呂)의 난'이라고도 부른다.[16]

2. 3. 북방 원정과 죽음

1410년(영락 8년), 영락제달단(북원) 정벌에 동행하였다. 정벌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병을 얻어, 같은 해 10월 24일 산동 임성(臨城) 제남로(濟南路)에서 사망하였다.[13] 영락제는 권씨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직접 제사를 지내주기도 하였다.[14] 사후 '''공헌현비'''(恭獻賢妃)라는 시호를 받았다.

영락제는 권현비의 죽음에 의문을 품었다. 3년 뒤인 1413년[16] 혹은 1414년[15], 영락제는 같은 조선 출신 후궁인 여미인(呂美人)이 권씨를 질투하여 독살했다고 주장했다.[15] 영락제는 여미인이 북방 정벌 동행 길에 내관과 은장이를 통해 비상을 구해 권씨의 차에 넣었다고 단정하고, 관련 내관과 은장이 등 여러 사람을 처형하였다. 여미인 역시 잔혹한 고문인 낙형(烙刑, 살을 불로 지지는 형벌)을 당한 끝에 죽임을 당했다.[16]

그러나 이 사건은 후에 다른 궁녀 여씨(呂氏)가 여미인에게 동성애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무고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을 '어여(魚呂)의 난'이라고도 부른다.[16]

2. 4. 권씨의 죽음과 어여의 난

권씨는 영락제타타르 (북원) 정벌에 동행하였다가[13] 개선하던 길에 중병을 얻어, 1410년(영락 8년) 10월 24일 산동 임성(臨城) 제남로(濟南路)에서 사망하였다.[13] 영락제는 그녀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친히 제사를 지내주었고,[14] 사후 공헌현비(恭獻賢妃)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러나 영락제는 권현비의 죽음에 의문을 품었다. 3년 뒤, 같은 조선 출신 공녀였던 여미인(呂美人)[15]이 권씨를 질투하여 독살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여미인이 북방 정벌 길에 내관과 은장이를 통해 구한 비상을 권씨의 차에 넣었다는 혐의였다. 이로 인해 은장이와 내관 6명이 처형되었고, 여미인 역시 낙형(烙刑, 살을 지지는 형벌)을 당해 죽임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많은 궁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훗날 이 사건은 명나라의 여씨 성을 가진 궁녀가 여미인에게 동성애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무고한 것으로 밝혀졌다.[16] 이 사건을 어여(魚呂)의 난(亂)이라고도 부른다.[16]

3. 시호 및 칭호

영락제 재위 시기에 다음과 같은 칭호와 시호를 받았다.


  • '''현비'''(賢妃): 1409년 2월 책봉되었다.
  • '''공헌현비'''(恭獻賢妃): 1410년 사후 추증된 시호이다.
  • '''현인비'''(顯仁妃): 1410년에 주어진 칭호이다.

4. 관련 기록

권집중(權執中)의 딸이자 권영균(權永均)의 누이이다. 본관은 안동 권씨이며, 경상도 안동부 출신이다.

1408년(태종 8년), 조선에 사신으로 온 명나라 환관 황엄영락제가 조선의 미녀를 원한다는 뜻을 태종에게 전했다.[9] 이는 과거 태종이 세자(양녕대군)와 명나라 황녀의 혼담을 피하기 위해 세자가 이미 장가들었다고 거짓말[10]한 것을 황엄이 무마해 준[11] 것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에 태종은 즉시 진헌색(進獻色)을 설치하고 금혼령을 내려 13세에서 25세 사이의 양가 처녀를 선발했다. 이때 권씨가 선발되어 조선 역사상 최초로 명나라에 보내진 공녀 중 한 명이 되었다. 이는 이후 조선 여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준 공녀 제도의 시작이었다.

같은 해 11월 12일, 권씨는 황엄과 함께 명나라로 가서 다른 여성들과 함께 후궁전에 머물렀다. 1409년 2월 9일, 북경으로 돌아온 영락제는 권씨를 만나 그 미모에 감탄하여 현비(賢妃)로 책봉했다. 《명사(明史)》 기록에 따르면, 백옥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권씨의 아름다움에 반한 영락제가 그녀에게 어떤 장기가 있느냐고 물었고, 권씨가 옥소를 꺼내 불자 아름다운 곡조가 울려 퍼져 영락제가 매우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녀의 오빠 권영균(權永均)에게는 3품 광록시경(光祿寺卿) 벼슬과 함께 채단(綵段) 60필, 채견(綵絹) 3백 필, 금(錦) 10필, 황금 2정(錠), 백은(白銀) 10정, 말 5필, 안장[鞍] 2면(面), 옷 2벌[襲], 초(鈔) 3천 장 등 많은 재물을 하사했다.[12]

권씨는 영락제의 깊은 총애를 받았으며, 1407년 인효문황후 서씨가 사망한 후 사실상 황후를 대신하여 내명부를 관리했다.

1410년, 권씨는 영락제달단(북원) 정벌에 동행했다가 개선하는 길에 병을 얻어 그해 10월 24일 산동성 임성(臨城)에서 사망했다.[13] 영락제는 그녀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직접 제사를 지내주었고,[14] '공헌(恭獻)'이라는 시호를 내려 '''공헌현비'''(恭獻賢妃)로 추증했다.

권현비 사후 3년이 지난 1414년, 영락제는 그녀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같은 조선 출신 공녀였던 여미인[15]이 권씨를 질투하여 독살했다는 혐의를 씌워 관련자들과 함께 잔혹하게 처형했다. 여미인은 낙형(烙刑: 단근질)을 당해 죽었으며, 은장이와 내관 6명도 함께 처형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후에 다른 궁녀가 여미인에게 원한을 품고 무고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을 '어여(魚呂)의 난'이라고도 부른다.[16]

그녀를 기리는 다음과 같은 궁사(宮詞)가 전해진다.



玉琯携來玉殿吹(옥관휴래옥전취) - 옥피리를 꺼내 옥전에서 부니,

天生艶質自高麗(천생염질자고려) - 고려(조선)에서 온 타고난 미인이구나.

無端北狩蛾眉死(무단북수아미사) - 북벌길에 오른 미인이 까닭 없이 죽으니,

風雨荒城葬盛姬(풍우황성장성희) - 비바람 몰아치는 황량한 성에서 성대한 장례를 치르네.



주요 참고 기록으로는 명성조실록과 조선왕조실록 등이 있다.

5. 기타

그녀를 묘사한 궁사(宮詞)가 존재한다.



玉琯携來玉殿吹(옥관휴래옥전취) - 옥피리를 꺼내 옥전에서 부니,

天生艶質自高麗(천생염질자고려) - 고려에서 온 타고난 미인이구나.

無端北狩蛾眉死(무단북수아미사) - 북벌에 나선 미인이 까닭 없이 죽고,

風雨荒城葬盛姬(풍우황성장성희) - 비바람 몰아치는 성에서 그녀의 장례가 한창이구나.


참조

[1] 문서 "Ming Taizong Shilu"
[2] 문서
[3] 서적 明史藁 https://books.google[...] 古典研究會 1973
[4] 서적 二十四史九通政典類要合編: 320卷 https://books.google[...] 約雅堂 1902
[5]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inese Women, Volume II: Tang Through Ming 618 - 1644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5-01-28
[6] 서적 古代中朝宗藩关系与中朝疆界历史研究 https://books.google[...] Beijing Book Co. Inc. 2021-11-19
[7] 서적 Celestial Women: Imperial Wives and Concubines in China from Song to Qing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2016-04-21
[8] 간행물 《조선왕조실록》태종 16권, 8년(1408 무자 / 명 영락(永樂) 6년) 11월 12일(병진) 1번째기사
[9] 간행물 《조선왕조실록》태종 16권, 8년(1408 무자 / 명 영락(永樂) 6년) 11월 12일(병진) 1번째기사
[10] 문서
[11] 간행물 《조선왕조실록》태종 13권, 7년(1407 정해 / 명 영락(永樂) 5년) 6월 8일(경인) 1번째기사
[12] 간행물 《조선왕조실록》태종 17권, 9년(1409 기축 / 명 영락(永樂) 7년) 4월 12일(갑신) 1번째기사
[13] 간행물 《조선왕조실록》태종 21권, 11년(1411 신묘 / 명 영락(永樂) 9년) 3월 29일(기축) 1번째기사
[14] 문서
[15] 문서
[16]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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