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겐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호겐은 1156년 5월 18일부터 1159년 5월 9일까지 사용된 일본의 연호이다. 고시라카와 천황의 즉위와 함께 제정되었으며, 호겐 시대에는 호겐의 난, 고시라카와 천황의 양위 및 인세이 개시 등의 주요 사건이 발생했다. 1159년 헤이지로 개원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헤이안 시대 - 교토
교토는 혼슈 중앙부에 위치하며 약 천 년간 일본의 수도였던 도시로, 헤이안쿄로 설계되어 전란과 화재를 겪었으나 복구 노력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고, 에도 시대에는 문화와 상공업의 중심지로, 오늘날에는 세계적인 관광 도시로 번영하며 수많은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헤이안 시대 - 헤이지의 난
헤이지의 난은 1160년 일본에서 발생한 내란으로, 후지와라 노 미치노리의 독단적인 정치와 미나모토 씨의 불만, 니조 친정파와 고시라카와 상황의 대립을 배경으로 후지와라 노 노부요리와 미나모토 노 요시토모의 반란으로 시작되었으나 다이라 노 키요모리의 반격으로 헤이케가 권력을 장악하며 겐페이 전쟁과 가마쿠라 시대의 도래에 영향을 미쳤다. - 일본의 연호 - 다이쇼 시대
다이쇼 시대는 1912년부터 1926년까지 일본의 연호로,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국제 연맹 이사국 진출, 국내 사회 변화, 민주주의 사상 발전 등을 특징으로 하며, 1920년대 후반 세계 경제 불황의 영향을 받았다. - 일본의 연호 - 쇼와 시대
쇼와 시대는 1926년부터 1989년까지 이어진 일본의 연호로, 히로히토 천황의 치세 동안 일본 제국의 군국주의, 태평양 전쟁, 패전 후 민주화와 경제 성장을 겪었으며, 쇼와 천황의 사망으로 헤이세이 시대로 전환되었다.
호겐 | |
---|---|
개요 | |
이름 | 호겐 |
유형 | 연호 |
지속 기간 | 1156년 4월 27일 ~ 1159년 4월 13일 |
이전 | 규주 |
다음 | 헤이지 |
천황 | 고시라카와 니조 |
막부 | 헤이안 시대 |
일본어 표기 | |
한자 | 保元 |
로마자 표기 | Hōgen |
주요 사건 | |
호겐의 난 | 1156년 |
2. 연호 제정
규주 久寿|규주일본어 3년 4월 27일(율리우스력 1156년 5월 18일), 고시라카와 천황의 즉위에 따라 개원되었다.[3] 이전 연호인 규주는 같은 해 4월 24일에 종료되었다.
규주 3년 4월 27일(율리우스력 1156년 5월 18일), 고시라카와 천황의 즉위에 따라 개원되었다. 연호의 출전은 『안씨가훈』의 "深宜防慮,以'''保元'''吉" 구절에서 따왔다.
호겐 4년 4월 20일(율리우스력 1159년 5월 9일)에 헤이지 平治|헤이지일본어로 개원되면서 호겐 연호는 사용이 중지되었다.
3. 호겐 시대의 주요 사건
호겐 시대에는 일본 역사상 중요한 전환점이 된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즉위 직후인 호겐 원년(1156년)에는 황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호겐의 난이 발발하였다. 이 난은 무사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패배한 스토쿠 상황은 사누키국으로 유배되었다.[4][5] 난 이후 조정 내 인사가 개편되고 천황 중심의 통치를 강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6]
호겐 3년(1158년)에는 고시라카와 천황이 아들 니조 천황에게 양위하고 상황(上皇)으로서 인세이(院政)를 시작하여 정치적 실권을 유지하고자 했다.[7][8] 또한 이 시기에는 주요 관직의 인사이동이 있었고[6], 시라카와 천황 시대 이후 중단되었던 궁궐 다이리(大極殿)의 건설이 재개되기도 했다.[6]
호겐 연호는 4년 4월 20일(율리우스력 1159년 5월 9일)에 헤이지로 개원되면서 종료되었다.
3. 1. 호겐의 난 (1156년)
호겐 원년(1156년) 7월 2일, 도바 천황이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 그의 사망은 황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의 도화선이 되었다. 같은 해 7월 10일부터 29일까지 호겐의 난이 발생했다. 이는 호겐의 반란 또는 호겐 전쟁이라고도 불린다.[5] 이 난에서 패배한 스토쿠 상황은 사누키국으로 유배되었다.
난이 진압된 후인 9월에는 조정의 주요 인사가 개편되었다. 내대신(naidaijin)이었던 후지와라 사네요시가 좌대신(sadaijin)으로 임명되었고, 대납언(dainagon) 후지와라 고레미치가 내대신 자리를 이어받았다. 전쟁 후 제국 전역에 평화가 회복되었으며, 천황이 직접 정부를 책임지는 친정(親政) 체제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고산조 천황 시대를 본받아 백성들의 요청과 불만을 접수하고 검토하기 위한 특별 건물이 교토에 건설되기도 했다.[6]
3. 2. 고시라카와 천황의 양위와 원정 (1158년)
호겐 3년(1158년) 8월 6일(음력 8월 11일), 고시라카와 천황은 재위 3년 만에 자신의 장남인 니조 천황에게 양위하였다.[7] 이 양위와 함께 고시라카와 천황은 상황(上皇)으로서 인세이(院政, 원정)를 개시하여 정치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 니조 천황은 같은 해 8월에 즉위하였다.[8]
3. 3. 기타 주요 사건
4. 서력과의 대조표
(병자)
(정축)
(무인)
(기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