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스 뉴턴 알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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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러스 뉴턴 알렌은 1880년대 조선에 파견된 미국의 의료 선교사이자 외교관으로, 조선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후에 제중원)을 설립하고, 의료 활동과 함께 외교 및 이권 개입에도 관여했다. 그는 갑신정변 당시 민영익의 치료를 통해 고종의 신임을 얻어 외교관으로 활동했으며, 미국 자본의 조선 진출에 기여했다. 러일전쟁 시기에는 미국의 불개입 정책을 비판했으나, 1905년 한국을 떠났다. 알렌은 긍정적인 평가와 더불어 식민주의적 이권 침탈에 관여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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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스 뉴턴 알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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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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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호러스 뉴턴 앨런 |
원어명 | Horace Newton Allen |
한자 표기 | 안련 |
출생일 | 1858년 4월 23일 |
출생지 |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 |
사망일 | 1932년 12월 11일 |
사망지 | 미국 오하이오주 톨레도 |
국적 | 미국 |
종교 | 개신교 (장로회) |
배우자 | 프랜시스 앤 앨런 (Frances Ann Allen) |
자녀 | 2명 |
직업 | |
직업 | 의사 외교관 선교사 |
학력 | |
학력 |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이학사) 마이애미 의과대학 (학사) |
외교관 경력 | |
직책 | 주한 미국 공사관 서기관 |
임기 | 1890년 ~ 1891년 |
직책 | 주한 미국 공사 |
임기 시작 | 1901년 10월 1일 |
임기 종료 | 1905년 6월 9일 |
대통령 | 윌리엄 매킨리 시어도어 루스벨트 |
직책 | 주한 미국 총영사 |
임기 시작 | 1897년 9월 13일 |
임기 종료 | 1901년 10월 1일 |
대통령 | 윌리엄 매킨리 |
전임자 | 존 M. B. 실 (총영사) 본인 (총영사) |
후임자 | 본인 (공사) 에드윈 버논 모건 (공사) |
정당 | |
소속 정당 | 미국 공화당 |
2. 생애
1858년 미국 오하이오주 데라웨어에서 태어나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교와 마이애미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1883년 미국 장로교 의료 선교사로 중국을 거쳐 1884년 9월 조선에 입국했다. 처음에는 미국 공사관 의사 신분으로 활동했으나, 갑신정변 당시 민영익을 근대 의술로 치료한 것을 계기로 고종의 신임을 얻었다.
고종의 지원을 받아 1885년 조선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곧 제중원으로 개칭)을 설립했으며, 이는 현재 연세대학교 의료원의 기원이 되었다.[8] 이 사건은 조선 정부가 선교사의 활동을 점진적으로 허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의료 활동 외교관으로서도 활동하여, 1887년 조선의 첫 주미 사절단 파견 시 참찬관으로 참여했고, 1890년 주조선 미국 공사관 서기관, 1897년에는 주한 미국 공사 겸 총영사로 임명되었다. 재임 기간 중 미국의 이권을 확보하는 데 힘써, 조선의 전차, 전등, 철도, 광산 개발 등 여러 이권 사업에 관여했다.
러일전쟁 전후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자 조선의 독립 유지를 위해 노력했다. 1903년 미국 방문 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일본의 팽창 정책을 경고하고 한국의 독립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친일적인 미국 정부의 외교 방침과 충돌하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9] 결국 1905년 3월 해임이 결정되었고,[10] 같은 해 6월 한국을 떠났다.[11] 그의 퇴임 직후 미국과 일본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상호 인정했다.
말년에는 미국에서 활동하며 1932년 오하이오주 톨레도에서 사망했다. 그는 한국 체류 중 고려청자를 수집하여 미국으로 가져갔으며, 이는 현재 프리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1889년 조선의 민담과 문화를 소개하는 『조선민담집』(Korean Taleseng)을 출간하기도 했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호러스 뉴턴 앨런(Horace Newton Alleneng)은 1858년 4월 23일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Delaware)에서 태어났다.[13] 그는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Ohio Wesleyan University)에 진학하여 1881년 이학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생 시절, 미국 전역에 영향을 미친 제2차 대각성 운동의 영향으로 많은 학생들이 선교사의 길을 택했는데, 알렌 역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의료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13] 이후 오하이오주 신시내티(Cincinnati)에 있는 마이애미 의과대학(Miami Medical School)에서 의학을 공부해 1883년에 졸업하고 의사 면허를 취득했다.[13]2. 2. 중국 선교와 조선 입국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에서 태어나 웨슬리언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대학 시절 제2차 대각성 운동의 영향을 받아 의료선교 봉사를 결심하고, 신시내티의 마이애미 의대에 다시 진학하여 1883년 의사 면허를 취득했다. 졸업 직후 결혼했으며, 같은 해 25세의 나이로 미국 장로교회 의료 선교사로 임명되어 중국 상하이에 파송되었다.[13]1883년 10월 상하이에 도착했으나, 동료 선교사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동료들의 조언을 받아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 조선으로의 파송을 요청했고, 허락을 얻어냈다.
알렌은 1884년 9월 14일, 선교사 자격으로 조선에 도착했다.[18][19][20][21] 이로써 그는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 입국한 조선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가 되었다.[12] 그러나 당시 조선은 기독교 선교가 공식적으로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알렌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선교사 신분을 숨겨야 했다. 미국 공사 루시어스 푸트의 조언에 따라 '미국 공사관 소속 의사'라는 공식 직함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비록 고종이 같은 해 7월 교육과 의료 활동에 한해서는 개신교 선교 사업을 허락했지만,[22] 선교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된 상황은 아니었기에 불가피한 조치였다.[23] 일부 기록에 따르면, 알렌은 9월 20일 탐색 차 먼저 입국한 뒤, 10월 26일에 아내 프랜시스 "패니"와 아들 해리를 데리고 돌아와 정식으로 체류를 시작했다고도 한다.
알렌의 조선 입국은 한국 천주교 최초의 세례 교인인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지 정확히 100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라는 점에서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2. 3. 제중원 설립과 의료 활동
1883년 10월 미국 북장로교 의료 선교사로 임명된 앨런은 이듬해인 1884년 9월 20일, 아내 프랜시스 "패니"와 아들 해리와 함께 조선에 도착했다.[3] 당시 조선 정부는 외국 종교를 금지하고 있었기에, 그는 서울 주재 미국 공사관의 의료관 신분으로 활동하며 실제 선교사 신분을 숨겼다.조선 도착 약 3개월 뒤인 1884년 12월 4일, 김옥균 등 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이 발생했다. 우정총국 개국 축하 연회장에서 왕비의 조카인 민영익이 자객의 공격으로 7군데의 심한 자상을 입고 빈사 상태에 빠졌다.[24][3] 당시 한의사들이 치료를 포기했으나, 독일인 묄렌도르프의 주선[24] 또는 미국 공사관 서기관 J. C. 폴크의 추천[3]으로 알렌이 긴급 호출되었다. 알렌은 14명의 궁중 어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3] 외과 수술을 포함한 서양 의술로 민영익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상처 감염 등 위기가 있었으나, 알렌의 지속적인 치료 덕분에 민영익은 3개월 만에 완쾌되었다.[8][3] 이 사건은 조선 사회에 서양 의술의 우수성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24]
민영익 치료 성공으로 알렌은 고종의 깊은 신임을 얻어 왕실의 의사이자 정치 고문 역할을 맡게 되었다.[25] 알렌은 고종에게 서양식 병원 설립을 건의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1885년 4월 10일, 한성 재동(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재동)에 조선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인 광혜원(廣惠院, House of Extended Grace)이 문을 열었다.[3][8] 광혜원은 곧 제중원(濟衆院, House of Universal Helpfulness)으로 개칭되었다.[3]

제중원은 5개의 입원실, 백내장 수술을 위한 안과 치료실, 천연두 예방 접종실 등을 갖춘 근대식 병원이었다.[3] 알렌은 초대 원장으로서 1887년 미국으로 잠시 돌아가기 전까지 환자 진료와 함께 서양 의술 교육에 힘썼다.[26][8] 늘어나는 환자를 감당하기 위해 의사이자 선교사인 윌리엄 스크랜턴의 도움을 받았고, 이후 추가로 파견된 존 헤론 등도 진료에 참여했다.[26]
1886년, 알렌은 존 윌리엄 헤론, 언더우드 호러스와 함께 제중원 내에 조선 최초의 서양식 의학교인 '대한제국 왕립 병원 의학 과학 학교'(Medical School of the Korean Royal Hospital)를 설립하고 16명의 의학생을 선발하여 교육했다.[3] 학교에는 큰 교실, 화학 실험실, 기숙사 등이 마련되었다.[3] 제중원과 그 의학교는 이후 연세대학교 의료원의 모태가 되었다.[8][4][5]
알렌의 의료 활동과 제중원 설립은 선교사의 활동을 엄격히 제한했던 조선 정부의 정책에 변화를 가져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조선 정부는 선교사들의 입국을 허가하고, 기독교 전도 활동뿐만 아니라 학교 및 병원 설립 등 공익 활동을 점진적으로 허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8]
2. 4. 외교관 활동과 이권 개입
1887년 참찬관에 임명되어 주미 전권 공사 박정양의 고문으로 미국 워싱턴으로 갔다.[8] 그는 청나라의 간섭을 문제 삼고 조선이 독립국임을 미국 국무부에 밝히며, 독립국 사절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도록 도왔다. 알렌은 1888년 1월 박정양 공사가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출하며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이 설립되는 과정에 기여했으며, 이후 공사관 운영과 외교 활동을 보좌했다.1890년 주한 미국 공사관 서기관으로 임명되어 본격적인 외교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후 총영사 및 대리 공사 등을 역임했다. 1897년에는 주한 미국 공사 겸 총영사로 승진했다. 이 시기 알렌은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며 조선 내 다양한 이권 획득에 깊이 관여했다. 특히 1897년 전차와 전등 설치권을 미국에 넘겨주는 데 역할을 했으며, 조선 최초의 전력 회사와 철도 회사 설립 과정에서도 미국 자본 도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알렌은 외교 활동 외에도 한국 관련 문화 사업에도 관여했다. 1892년부터 <코리안 레포지토리> 간행에 참여했고, 1900년에는 왕립 아시아 학회 한국 지부를 결성하여 회보를 발행했으며, 1902년부터는 《한국 위보》를 간행했다. 이러한 활동은 당시 서구에 한국을 알리는 데 기여했다. 1904년 고종으로부터 훈 1등과 태극 대수장을 받기도 했다.
러일전쟁을 전후하여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자, 알렌은 조선의 독립 유지를 위해 노력했다. 그는 미국 정부의 불개입 정책을 비판했으며, 1903년 일시 귀국했을 때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일본의 팽창 정책으로부터 한국을 보호해야 한다고 직접 진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과의 관계를 중시하던 루스벨트 행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9] 결국 미국 정부는 1905년 3월경 알렌을 에드윈 V. 모건으로 교체하기로 결정했고,[10] 알렌은 같은 해 6월 9일 한국을 떠났다.[11] 알렌이 떠난 직후인 7월, 미국과 일본은 필리핀과 대한제국에 대한 각자의 지배권을 상호 인정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비밀리에 체결했다. 이는 알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지 않은 미국의 정책 방향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2. 5. 말년
1905년 3월경 미국 정부는 알렌의 후임으로 Edwin V. Morgan|에드윈 V. 모건영어을 주한 미국 공사로 임명하기로 결정했고,[10] 알렌은 같은 해 6월 9일 한국을 떠났다.[11] 알렌이 한국을 떠난 직후인 1905년 7월, 미국과 일본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하여 사실상 일본의 한국 지배를 용인하는 입장을 취했다.미국으로 돌아간 알렌은 1932년 12월 11일 오하이오주 톨레도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톨레도의 우드론 묘지에 안장되었다. 알렌은 아내 Frances Ann "Fannie"|프랜시스 앤 "패니"영어와의 사이에 두 아들, Horace Ethan "Harry"|호레이스 이선 "해리"영어(아들 3명)와 Maurice|모리스영어(자녀 없음)를 두었으며, 사망 당시 5명의 증손자가 있었다.
3. 평가
한국의 의학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가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국익을 앞세워 조선의 이권 침탈에 관여한 인물이라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27] 학계 일각에서는 앨런이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최우선으로 추구한 외교관이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27]
3. 1. 긍정적 평가
서양 의술을 한국에 도입하고 제중원 설립에 기여하여 의료 근대화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의료 혜택을 제공하는 데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있다. 알렌 박사가 한국에 기여한 바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6]고종황제로부터 세 차례 훈장을 받았으며, 마지막으로 받은 최고 훈장인 태극훈장은 그의 증손녀 리디아 앨런에 의해 2015년 연세의료원에 기증되었다.
3. 2. 부정적 평가
한국의 의학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이익을 위해 조선의 이권 침탈에 앞장선 인물이라는 비판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일부 학계에서는 알렌을 결코 친한적 인물로 볼 수 없으며, 그의 외교 정책은 철저히 미국의 경제적 이익에 기반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27] 알렌은 1885년 4월 제중원 설립 이후 동료 선교사들과의 갈등을 겪으며 선교 활동에 회의를 느끼고, 미국 외교관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889년 선교사 신분으로 조선에 다시 입국한 알렌은 1890년 주한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임명되어 본격적인 외교 활동을 시작했다.[28] 그는 이 시기부터 이완용, 명성황후 등 조선 정부 고위층에게 로비를 벌여 1895년 운산금광채굴권을 따냈고, 이를 미국인 사업가에게 넘기면서 수수료를 챙겼다.[29] '노다지(no-touch)'라는 말이 유래된 것으로 알려진 운산금광에서는[30][31] 이후 약 40년간 900만 톤의 금광석이 채굴되어 당시 가치로 5600만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수익을 미국이 가져갔다. 또한 알렌은 아관파천을 주선하여 친미 세력이 정계에 대거 등용되도록 도왔고, 이후 1896년에는 제임스 모스와 함께 경인철도부설권을 획득했다.[32] 그러나 제임스 모스가 설립한 회사가 자금난으로 공사를 중단하자, 결국 철도 부설권은 일본의 경인철도 합자회사에 매각되었다.[33]
실제로 알렌은 선교사로 조선에 처음 입국했을 때부터 조선 내 광산의 매장량과 위치 등을 면밀히 조사했다. 그는 이 조사를 바탕으로 평안북도 운산금광의 가치를 확인하고, 그 채굴권을 미국 회사에 넘기도록 조선 왕실에 지속적으로 요청했다. 또한, 미국인 회사들이 조선 관료나 민간인과 마찰을 빚을 때마다 알렌은 자국민의 권익 보호를 명분으로 적극 개입했다. 이러한 행적을 근거로 한미외교관계사 연구가 손정숙은 알렌을 철저히 '미국 중심적인' 외교관으로 평가했다.[34]
알렌의 식민주의적 시각은 하와이 이민자 모집 과정에서 사탕수수 농장 관리인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편지에서 “조선인들은 인내심이 많고, 부지런하며, 유순한 인종이라 그들이 갖고 있는 오랜 복종의 습성 때문에 지배하기가 쉽다. 조선인들은 중국인에 비하면 교육하기가 쉬운 족속이라”며 조선인을 낮춰 평가했다.
나아가 친미파 세력이 약화되자 알렌은 미국의 이권 확보에 협조적이었던 친일파 세력을 간접적으로 지원했으며, 일본의 조선 지배가 기정사실화되자 일본 측에 친미파 인사들의 명단을 넘겨주고 이들에게 일본에 협력할 것을 권고했다고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전해진다.[35] 이와 관련하여, 1908년 세브란스의학교 첫 졸업생 7명의 의사 면허 발급을 위해 당시 세브란스 병원의 제4대 병원장이던 에비슨이 조선통감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협조를 구했고, 이에 이토 히로부미가 졸업식에 직접 참석해 축사를 하기도 했다.[36] 이는 알렌이 설립에 기여한 기관과 일제 침략의 핵심 인물 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지적되기도 한다.
3. 3. 종합적 평가
알렌은 한국 근대사에서 의료와 외교 분야에 영향을 미친 인물이지만, 그의 활동에 대해서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한국의 의학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가 있는 반면, 미국의 이익을 앞세워 조선의 이권 침탈에 관여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27]학계에서는 알렌이 '친한적 인물'이 아니며, 그의 외교 활동은 철저히 미국의 경제적 이익에 기반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27] 실제로 그는 1885년 4월 제중원 설립 이후 동료 선교사들과의 불화 등으로 선교 활동에 회의를 느끼고 미국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89년 선교사 자격으로 조선에 다시 돌아온 알렌은 1890년 주한 미국 공사관 서기관으로 임명되면서 본격적인 외교 활동을 시작했다.[28] 이 시기부터 그는 이완용, 명성황후 등 조선 정부 고위층을 상대로 로비를 벌여 1895년 운산금광채굴권을 획득하고, 이를 미국인 사업가에게 넘겨 수수료를 챙겼다.[29] '노다지(no-touch)'라는 말이 유래된 것으로 알려진[30][31] 운산금광에서는 이후 약 40년간 9000000ton의 금광석이 채굴되어 5600만달러 상당의 막대한 수익이 미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또한 아관파천 이후 친미 세력이 정계에 등용되자, 1896년 제임스 모스와 함께 경인철도부설권을 따내는 데 관여했다.[32] 그러나 모스가 자금난으로 공사를 중단하자 철도 부설권은 결국 일본의 경인철도 합자회사에 매각되었다.[33]
알렌은 선교사로 입국한 초기부터 조선 내 광물의 매장량과 위치를 조사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평안북도 운산금광의 가치를 확인하고 미국 회사에 채굴권을 넘기도록 조선 왕실에 요구했다. 또한 미국인 회사들이 조선 관리나 민간인과 갈등을 겪을 때마다 자국민의 권익 보호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러한 활동 때문에 한미 외교 관계사 연구자인 손정숙은 알렌을 '미국적인' 미국 외교관으로 평가하기도 했다.[34] 그는 하와이 이민자 모집 과정에서 사탕수수 농장 관리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인들은 인내심이 많고, 부지런하며, 유순한 인종이라 그들이 갖고 있는 오랜 복종의 습성 때문에 지배하기가 쉽다. 조선인들은 중국인에 비하면 교육하기가 쉬운 족속이라"고 언급하며 조선인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기도 했다.
나아가 알렌은 친미파 세력이 약화되자 미국의 이권 확보에 협조적이었던 친일파 세력을 간접적으로 지원했으며, 일본의 조선 지배가 가시화되자 친미파 인사들의 명단을 일본 측에 넘기고 이들에게 일본에 협력할 것을 권유했다고 스스로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35] 이러한 맥락에서 1908년 세브란스의학교 첫 졸업생 7명의 의사면허 발급을 위해 당시 세브란스 병원 원장이던 에비슨이 조선통감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협조를 구했고, 이토 히로부미가 졸업식에 참석해 축사를 하는 일도 있었다.[36]
한편, 알렌은 1884년 입국하여 조선에 온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오랫동안 알려졌으나, 독일 루터교 소속의 칼 귀츨라프가 그보다 앞서 조선을 방문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37][38]
알렌은 고종황제로부터 세 차례 훈장을 받았으며, 그중 최고 등급인 태극훈장은 2015년 그의 증손녀에 의해 연세의료원에 기증되었다. 그의 활동은 한국에 서양 의학을 도입하고 기독교 전파의 계기를 마련했으며, 철도, 전차 등 초기 산업화에 일부 영향을 주었다는 긍정적 측면도 있다.[6] 하지만 그의 행적 전반을 고려할 때, 미국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며 제국주의 시대의 이권 침탈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따라서 알렌에 대한 평가는 그의 공과 과를 균형 있게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4. 저서
5. 관련 문화재
- 알렌 수증 훈공일등 태극대수장 - 등록문화재 제651호, 동은의학박물관 소장
6. 대중문화
참조
[1]
저널
The Legacy of Horace Newton Al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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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3
[2]
저널
Allen (Horace N. Allen, 安連, 1858–1932)
2017
[3]
기타
Allen's Diary
[4]
기타
letter by Dr. Jesse Hurst and 이하영 서신 규장각
[5]
기타
documents from letters to Dr. Ernest Weiss from U. S. Eighth Army
[6]
서적
Things Korean: A Collection of Sketches and Anecdotes, Missionary and Diplomatic
F. H. Revell Company
[7]
기타
馬越
[8]
뉴스
서울 온 알렌 박사의 두 증손녀 할아버지와 '1세기 만의 대화'
http://news.chosun.c[...]
The Chosun Ilbo
2010-01-08
[9]
저널
韓国保護国化過程における日英関係 : イギリスの対韓政策を中心に
https://kansaigaidai[...]
関西外国語大学・関西外国語大学短期大学部
2014-09
[10]
웹사이트
米國公使 「알렌」 後任으로 「에드윈 모간」 任命 件
http://db.history.go[...]
[11]
웹사이트
Former Chiefs of Mission in Korea
http://seoul.usemb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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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13]
서적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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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
The Legacy of Horace Newton Al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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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알렌 [Horace Newton Al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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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복음화 130년' 부산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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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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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은 순수 의료 선교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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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2년 우리나라 최초 칼 귀츨라프 선교사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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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는 독일인 ‘칼 귀츨라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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