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리 나오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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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리 나오마사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긴 일본의 무장이다. 1547년에 태어나 오다 가문을 섬기며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시즈가타케 전투에서는 시바타 가쓰이에의 금색 말 인장을 빼앗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에는 호리 히데하루를 보좌하며 에치고 지역에서 우에스기 가문과의 갈등을 겪었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지했다. 1608년에 사망했으며, '명장언행록'에서는 나오에 가네츠구,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함께 천하의 삼배신으로 칭송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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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 나오마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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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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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명 | 오쿠다 씨 → 호리 씨 |
이름 | 호리 나오마사 |
이명 | 미기에몬 겐모쓰 (통칭) |
계명 | 센쥬인덴젠조몬로 겟산 도에이 다이코지 |
묘소 | 와카야마현이토군고야정의 고야산 쇼치인 |
시대 | 센고쿠 시대 - 에도 시대 초기 |
출생 | 덴분 16년 (1547년) |
사망 | 게이초 13년 2월 26일 (1608년4월 11일) |
개명 | 마사쓰구 나오쓰구 나오마사 |
관위 | 불명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오다 노부나가 호리 히데마사 히데하루 다다토시 |
번 | 에치고 국산조 번 번주 |
부모 | 아버지: 오쿠다 나오즈미 어머니: 호리 도시후사의 딸 |
형제자매 | 불명 |
배우자 | 정실: 호리 히데마사의 딸 구쓰키 모토쓰나의 딸 |
자녀 | 나오키요 나오토모 나오요리 나오유키 나오시게 나오사토 나오타다 |
봉록 | |
봉록 (고쿠다카) | 4만 석 |
가계 | |
가문 | 호리 씨 |
활동 | |
주요 활동 | 무장, 다이묘 |
2. 생애
호리 나오마사는 덴분 16년(1547년) 오와리국 나카시마군 오쿠다 장에서 오쿠다 나오즈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사촌 형 호리 히데마사와 함께 백부인 잇코슈 승려 밑에서 자랐다. 히데마사가 먼저 공을 세워 나오마사는 그의 가신이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창작이라는 지적도 있다.[1]
히데마사는 13세부터 오다 노부나가의 소년으로 활동했고, 나오마사도 비슷한 시기에 노부나가를 섬기기 시작했다. 이후 나오마사는 히데마사를 보좌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시기 나오마사에 대한 사료는 부족하다. 간에이 제씨계도전에는 이가국 기코 성 공격과 이세국 미네 성 공격에서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오다 노부나가 사후, 호리 히데마사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겼다. 야마자키 전투, 시즈가타케 전투,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사이카 공격, 시코쿠 정벌, 규슈 정벌, 오다와라 정벌 등 주요 전투에 종군했다.[1] 야마자키 전투 후 아케치 미쓰히데의 사카모토 성을 포위했을 때, 미쓰히데가 아끼던 물건들을 나오마사에게 보냈는데, 이 과정에서 미쓰히데가 아끼던 와키자시(腰差)가 목록에 없다는 일화가 전해진다.[1] 시즈가타케 전투에서는 시바타 가쓰이에의 금색 말 인장을 빼앗고, 이를 되찾으려던 코즈카 도에몬을 죽였다고 한다.[1]
히데마사가 오다와라 정벌 중 사망한 후, 아들 히데하루가 뒤를 잇기에는 어리다고 판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영지를 몰수하려 했다. 이에 나오마사는 히데요시에게 강하게 항의하여 히데하루의 승계를 허락받았다.[1] 게이초 3년(1598년), 히데요시의 명으로 우에스기 가게카츠는 아이즈로, 호리 히데하루는 에치고로 영지가 교체되었다.[1]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나오에 가네츠구와 이시다 미쓰나리의 모략으로 우에스기 씨는 호리 가문에게 돌아갈 연공미를 모두 가져갔다.[1] 1599년(게이초 4년), 나오에 가네츠구가 에치고에서 군비를 증강하자 나오마사는 이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보고했고,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가문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가네츠구는 나오에장을 통해 호리 가문을 업신여기는 태도를 보였다.
이에야스가 우에스기 가문 토벌을 준비하자, 나오마사는 이에야스를 지지했다. 미쓰나리는 나오마사에게 우에스기 가문과 협력하라는 서신을 보냈으나, 나오마사는 이에야스 편에 섰다. 나오에 가네츠구는 잇키(반란)를 일으키려 했고, 1599년 8월 산조 성을 공격했으나,[1] 나오키요가 격퇴했다. 나오마사도 각지에서 잇키를 진압했다.
이시다 미쓰나리가 거병하자 이에야스는 에도로 돌아갔고, 게이쇼는 추격을 거부했다. 1600년 9월, 나오마사는 잇키를 평정하고 이에야스로부터 감장을 받았다. 1600년(게이초 5년) 세키가하라 전투를 기점으로 잇키는 자연 소멸했다.
1601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호리 히데하루에게 서신을 보내 사도에서 일어난 잇키 진압을 나오마사에게 명했다.[1] 1605년경 이에야스의 명에 따라 고다이인(기타노만도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실)이 바라는 히데요시의 보리사(菩提寺, 조상신을 모시는 절) 건설에 착수했다.[1] 고토쿠지를 이전·확장하여 고다이지를 짓고, 비용의 절반을 나오마사가 부담했다.[1]
고다이지 건축 중 후시미에 체류하면서 이에야스에게 히데하루의 아들에게 도쿠가와 가문의 며느리를 맞이하게 해달라고 간청했고, 이에야스는 이를 받아들였다.[1] 1605년, 호리 치카요시와 대립했다.[1] 1606년 5월 히데하루가 사망하자 어린 타다토시를 보좌했다.
1608년 12월, 62세로 사망했다. 역전을 거친 용장이었다고 전해진다. 『호리 텟탄코키』에 따르면, 사후 "조토의 엔쇼지"라는 곳에 매장되었다고 한다.
2. 1. 오다 가문 섬김 (1547년 ~ 1582년)
덴분 16년(1547년), 오와리 나카시마군 오쿠다 장에서 오쿠다 나오즈미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촌 형 호리 히데마사와 함께 그의 백부인 잇코슈 승려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백부는 두 사람에게 먼저 공을 세운 쪽에 다른 한 명이 협력하여 가문을 일으키라고 가르쳤는데, 히데마사가 먼저 공을 세워 나오마사는 그의 가신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일화는 가토 기요마사 등 다른 무장에게서도 나타나며, 창작이라는 지적도 있다.히데마사는 13세부터 오다 노부나가의 소년으로 활동했고, 나오마사도 같은 시기에 노부나가를 섬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나오마사는 히데마사를 보좌했다고 전해지지만, 이 시기의 나오마사에 대한 사료는 부족하다. 『간에이 제씨계도전』에는 이가 기코 성 공격에서 정예병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노부나가에게 칭찬을 받았고, 이세 미네 성 공격에서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2. 2. 도요토미 가문 섬김 (1582년 ~ 1598년)
오다 노부나가 사후, 호리 히데마사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겼다. 야마자키 전투, 시즈가타케 전투,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사이카 공격, 시코쿠 정벌, 규슈 정벌, 오다와라 정벌 등 주요 전투에 종군했다.[1]야마자키 전투 후, 아케치 미쓰히데의 사카모토 성을 포위했을 때, 미쓰히데는 명품들이 없어지는 것을 우려하여 호리 히데마사의 일족인 나오마사에게 보냈다. 이때 나오마사는 목록대로 받았다는 답장을 보냈지만, 미쓰히데가 아끼던 고 요시히로의 와키자시(腰差)가 목록에 보이지 않는다고 물었다. 그러자 미쓰히데는 이 와키자시는 자신의 비장품이므로, 죽음의 산에서 자신에게 넘겨주기 위해 직접 허리에 차겠다고 답했다고 전해진다.[1]
시즈가타케 전투에서는 십자창을 한 손에 들고 시바타 가쓰이에의 금색 말 인장을 빼앗았으며, 이것을 되찾으려던 코즈카 도에몬을 덮쳐 죽였다고 전해진다.[1]
2. 3. 호리 히데하루 가신 시대 (1598년 ~ 1600년)
히데마사는 오다와라 정벌 중에 진중에서 병사했다. 히데마사가 사망한 후, 아들 히데하루가 뒤를 잇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판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영지인 기타노쇼를 몰수하려 했고, 히데하루의 승계는 지체되었다. 분노한 나오마사는 차남 나오요리를 히데요시에게 사자로 보내 "사에몬(히데마사)은 다년간 공을 세웠으니, 만약 후계자가 되지 못한다면 찾아뵙고 폐하의 은혜를 더럽히겠습니다."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고, 히데요시는 히데하루의 승계를 허락했다.[1] 게이초 3년(1598년), 히데요시의 명으로 우에스기 가게카츠를 아이즈로, 호리 히데하루를 에치고로 옮기는 영지 교체가 이루어졌다.[1] 에치고 45만 석을 일족과 가신으로 통치하여, 가스가야마성에 히데하루, 조오도성에 히데하루의 동생 지카요시, 사카도성에 나오마사의 차남 나오요리, 산조성에 나오마사(성 대리인으로 적남 나오키요), 니이보성에 미조구치 히데카츠, 혼조성에 무라카미 요시아키(후에 지명을 무라카미로 개명)가 들어갔다.[1]2. 4. 우에스기 가문과의 갈등 (1599년 ~ 160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영지가 바뀌었을 때, 연공미는 절반만 징수하고 나머지는 새 영주를 위해 남겨두는 것이 관례였으나, 나오에 가네츠구와 이시다 미쓰나리의 모략으로 우에스기 씨는 호리 가문에게 돌아갈 연공미를 모두 가져가 버렸다.[1] 호리 가는 어쩔 수 없이 2천 섬의 쌀을 빌려야 했다.1599년(게이초 4년), 나오에 가네츠구는 에치고에서 군비 증강을 추진했다. 호리 나오마사는 이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보고했고,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가문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가네츠구는 나오에장을 통해 호리 가문을 업신여기는 태도를 보였다.
이에야스가 우에스기 가문 토벌을 준비하자, 나오마사는 "히데요리 공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이에야스의 승리가 필연적이다"라며 이에야스를 지지했다. 미쓰나리는 나오마사에게 우에스기 가문과 협력하라는 서신을 보냈으나, 나오마사는 이를 간파하고 이에야스 편에 서기로 결정했다.
나오에 가네츠구는 우에스기 가문의 옛 가신들을 모아 잇키(반란)를 일으키려 했다. 1599년 8월, 잇키는 산조 성을 공격했으나,[1] 나오키요가 격퇴했다. 호리 나오마사도 각지에서 잇키를 진압했다.
이시다 미쓰나리가 거병하자 이에야스는 에도로 돌아갔고, 게이쇼는 추격을 거부했다. 1600년 9월, 나오마사는 잇키를 평정하고 이에야스로부터 감장을 받았다. 1600년(게이초 5년) 세키가하라 전투를 기점으로 잇키는 자연 소멸했다.
2. 5.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1600년 ~ 1608년)
1601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호리 히데하루에게 서신을 보내 도쿠가와 가문의 직할령이 된 사도에서 일어난 잇키 진압을 나오마사에게 명했다.[1] 1605년경 이에야스의 명에 따라 고다이인(기타노만도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실)이 바라는 히데요시의 보리사(菩提寺, 조상신을 모시는 절) 건설에 착수했다.[1] 히데요시가 생전에 지은 고토쿠지를 이전·확장하여 고다이지를 짓고, 비용의 절반을 나오마사가 부담했다.[1] 개산당 내진에는 나오마사의 목상이 모셔져 있다.[1]고다이지 건축 중 후시미에 체류하고 있었는데, 이때 이에야스에게 히데하루의 아들에게 도쿠가와 가문으로부터 며느리를 맞이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1] 이에야스는 이를 받아들여 외손녀인 혼다 타다마사의 딸 유리히메를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양녀로 삼아 시집보냈다.[1] 히데타다는 편휘를 주어 타다토시로 개명하게 하고 마쓰다이라 성도 주었지만, 평생 도쿠가와 쇼군가의 친번·후다이로 대우받지는 못했다.[1] 1605년, 호리 치카요시와 대립했다.[1] 1606년 5월 히데하루가 사망하자 어린 타다토시를 보좌했다.[1]
1608년 12월, 62세로 사망했다. 역전을 거친 용장이었다고 전해진다. 『호리 텟탄코키』에 따르면, 사후 "조토의 엔쇼지"라는 곳에 매장되었다고 한다. 후에 나오요리의 손에 의해 고야산 쇼치인으로 개장되었다.
3. 평가
『명장언행록』에서는 호리 나오마사를 천하의 삼배신 중 한 명으로 언급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나오에 가네츠구, 고바야카와 사에몬, 호리 겐모쓰(나오마사)를 두고 "천하를 다스린다고 해도, 감당할 수 없을 자들"이라고 칭찬했다고 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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