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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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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사용은 민족주의적 의식을 가진 낭만파 시인으로, 극단 토월회와 산유화회에서 희곡 창작 활동을 했다. 일제강점기 후반 친일 행위를 하지 않은 시인으로, 대표작으로는 〈나는 왕이로소이다〉가 있다. 1900년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나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3.1 운동에 참여했으며, 문예지 백조를 창간하는 등 문단 활동을 했다. 이후 방랑 생활을 하다가 1947년 사망했으며, 사후 노작문학상이 제정되어 그의 문학 정신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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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용 - [인물]에 관한 문서
홍사영 기본 정보
이름홍사용
한글홍사용
한자洪思容
히라가나こうしよう
가타카나ホン・サヨン
작가 정보
이름홍사용
출생일1900년 5월 17일
출생지대한제국 경기도 화성
사망일1947년 1월 7일
사망지미 군정 조선 서울 마포 공덕동
국적대한제국
필명호(號)는 노작(露雀)·소아(笑亞)·백우(白牛)
언어한국어
학력경성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장르
희곡
수필
배우자원효준
직업시인
극작가
수필가
경력토월회 문예부 부장
활동 기간1922년~1947년

2. 생애

호는 노작(露雀), 소아(笑亞), 백우(白牛)이다.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용인에서 성장했으며, 경성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민족주의적 의식을 지닌 낭만파 시인으로 평가받으며, 극단 토월회와 산유화회에서 희곡 창작 활동에도 참여했다. 삼일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된 경험이 있으며, 이후 『백조』 등의 문예지를 창간하며 문단 활동을 펼쳤다.

일제강점기 말기, 많은 문인들이 친일 작품을 남겼던 상황 속에서도 홍사용은 친일시를 쓰거나 친일 활동에 가담하지 않은 문인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1][2] 대표작으로는 〈나는 왕이로소이다〉가 널리 알려져 있다.

1920년대 후반부터 건강 악화와 생활고로 방랑 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한의학을 배우기도 했다. 1945년 해방 후에는 근국청년단 활동을 시도했으나 건강 문제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47년 1월 7일 사망했다.

2. 1. 출생과 성장

1900년 음력 5월 17일 경기도 화성에서 출생하였으며, 한때 수원에서 유아기를 보낸 후 용인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는 대한제국 통정대부 육군 헌병 부위였던 홍철유로, 관리이자 지주였으며 홍사용은 그의 외아들이었다.

여덟 살 때 아버지가 관직을 그만두고 가족과 함께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로 이사하여 목가적인 환경에서 자랐다. 아버지로부터 직접 시를 배웠으며, 서당에 다니며 『맹자』, 『자치통감』 등 한학을 공부했다. 아홉 살에는 큰아버지 홍승유의 양자로 들어갔다. 1912년, 열두 살의 나이로 두 살 연상의 원주 원씨 원효순과 집안의 결정으로 결혼했다.

2. 2. 학창 시절과 3.1 운동

1916년 휘문의숙에 입학하여 박종화 등과 친분을 쌓았으며, 활판 인쇄로 『피는 꽃』이라는 책자를 발행하기도 했다.

1919년 3월 1일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선두에 섰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자유분방했던 젊은 홍사용에게 더욱 거침없는 시 창작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해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정지현(정백)과 교류하며 수필 『청산백운』과 시 「푸른 언덕으로」를 창작했다.

2. 3. 문단 활동과 극단 활동

1919년 휘문의숙 졸업 후 고향에서 정백과 함께 수필 『청산백운』과 시 「푸른 언덕으로」를 썼다. 1920년부터 본격적인 문예 활동을 시작하여, 박종화, 정백 등과 함께 문예 동인지 『문우』를 창간했다. 1922년에는 문예지 『백조』를 창간하여 시와 희곡을 발표했으나, 잡지 발간 비용 때문에 재산을 소진해야 했다.

1923년 극단 토월회에 참가하면서 시 창작보다는 희곡 집필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박승희, 김복진 등과 조선극장을 중심으로 연극 활동에 힘썼으나, 1925년 자금 문제로 토월회는 해체되었다. 이후 1927년 극단 "산유화회"를 결성했다. 산유화회에서 상연된 「고향의 마음」은 대사가 지나치게 시적이라는 이유로 관객의 공감을 얻지 못해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1928년에는 불교사 건물 2층에 머물며 불교 잡지 『여시』를 창간하고, 희곡 「옹초」와 『흰 젖』 등을 집필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2. 4. 방랑 생활과 한의학

1929년부터 1930년까지 홍사용은 박진의 집에 머물며 그의 아들 가정교사를 맡았다. 하지만 이 무렵 그의 건강은 객혈을 할 정도로 크게 악화되었다. 결국 박진의 집을 나온 뒤, 그는 주소도 없이 떠도는 방랑 생활을 시작했다. 이 방랑 생활 도중 충청도에서 만난 한 여성과 사이에서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생계를 위해 한의학을 배우기도 했는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이지만 생활고는 여전했다. 지인들을 찾아 도움을 청하기도 했으나, 당시 시를 쓰지 않고 방황하는 모습 때문에 도움을 받기는 어려웠다. 한편, 이광수의 산장을 자주 방문했던 사실은 이광수의 일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2. 5. 일제강점기 말기와 해방 이후

1941년 일제 당국은 홍사용에게 희곡김옥균전」의 집필을 강요했다. 그러나 홍사용은 이를 거부하며 완성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일제로부터 거주 제한 조치를 받았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근국청년단을 중심으로 청년 운동을 일으키려 했으나, 오랜 방랑 생활과 건강 악화로 심신이 쇠약해져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46년 장남의 간청으로 집으로 돌아왔고, 이듬해인 1947년 1월 7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경기도 화성시 동탄면(현 동탄동) 묵동에 안장되었다.

2. 6. 사망

1946년 장남의 간청으로 집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육체적, 정신적으로 매우 쇠약해진 상태였다. 귀가한 지 두 달 만인 1947년 1월 7일에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경기도 동탄면 묵동에 안장되었다.

3. 사후

1984년 5월 26일 홍사용의 고향에 있는 그의 무덤 옆에 시비가 세워졌다.[3] 2002년에는 그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경기도 문학인과 화성시 문학인들이 주도하여 노작문학상이 만들어졌다.

4. 연보


  • 1900년 음력 5월 17일,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용수리에서 아버지 홍철유의 외아들로 태어남.
  • 1908년, 가족과 함께 서울에서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로 이사함.
  • 1912년, 두 살 위의 원효순과 결혼함.
  • 1916년, 상경하여 휘문의숙에 입학, 박종화 등과 교류함.
  • 1919년 3월, 삼일운동에 참여하여 시위 선두에 섰다가 체포됨.
  • 1919년 6월, 휘문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감.
  • 1919년, 장남 규선이 태어남.
  • 1920년, 박종화, 정백 등과 함께 문예 동인지 『문우』를 창간함.
  • 1921년, 장녀 여선이 태어남.
  • 1922년, 박종화, 나도향, 현진건 등과 함께 낭만주의 문예지 『백조』를 창간함.
  • 1923년, 극단 토월회에 가입하여 문예부장으로 활동하며 희곡 창작에 주력함.
  • 1927년 2월, 박진, 이소연 등과 함께 극단 “산유화회”를 조직함.
  • 1928년, 불교사 건물에서 불교 잡지 『여시』를 창간함.
  • 1929년, 박진의 집에 기거하며 그의 아들 가정교사 역할을 함. 건강이 악화되어 객혈을 시작함.
  • 1932년, 문단 활동을 중단하고 은퇴함. 이후 방랑 생활을 함.
  • 1935년, 생계를 위해 한의학을 배우기 시작함. 충청도에서 만난 여성과 동거하며 세 자녀를 둠.
  • 1941년, 일제 당국으로부터 김옥균을 다룬 희곡 집필을 강요받았으나 거부하여 완성하지 않음. 이로 인해 거주 제한 조치를 받음.[2]
  • 1945년, 광복 후 근국청년단 운동을 시도했으나 건강 악화로 실패함.
  • 1947년 1월 7일, 자택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함. 유해는 경기도 화성시 동탄면 묵동(현 반송동)에 안장됨.

참조

[1] 뉴스 인터뷰/ '친일문인' 파인 김동환 3남 김영식씨 - "부친의 '친일 죄과' 민족 앞에 사죄"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2-08-17
[2] 뉴스 책으로 엮어진 노작 홍사용의 일대기 http://www.hani.co.k[...] 연합뉴스 2000-11-08
[3] 서적 수원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수원문화원 2003-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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