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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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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종화는 대한민국의 소설가, 시인, 문학 평론가, 교육자이며, 필명은 월탄이다. 1901년 서울에서 태어나 1981년 사망했다. 낭만주의 시인으로 시작하여, 일제강점기에는 항일 민족 문학을 전개했으며, 해방 후에는 한국 문학계의 중진으로 활동했다. 역사 소설에 주력하여, 소설과 삶 모두에서 한국 정체성에 대한 헌신을 보여주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시집 《흑방비곡》, 소설 《금삼의 피》, 《임진왜란》, 《여인천하》, 《세종대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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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화 - [인물]에 관한 문서
박종화
출생일1901년 10월 29일
출생지대한제국 한성부
사망일1981년 1월 13일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필명월탄(月灘)
직업소설가, 시인, 작가, 교육인, 대학 교수
국적대한민국
장르소설, 시문학, 수필, 평론
자녀박돈수(아들)
부모박대혁(부), 안동 김씨 부인(모)
주요 작품역사 소설 《금삼지혈(錦衫之血)》
언어한국어
배우자김창남(金昌男, 1970년 하세)
형제형 1명, 남동생 1명
수상문화훈장 대통령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대한민국 예술원 문학상
5·16 민족상 민족문학상
본관밀양(密陽)
학력경성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1920)
경력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친척현화수(자부)
박동숙(친손녀)
전형필(고종제)
현진건(사돈)
전성우(내종 오촌 조카)
웹사이트두피디아 박종화
활동 기간1920년~1980년 1월 3일

2. 생애

박종화(朴鍾和)는 1901년 10월 29일 서울 대한제국에서 태어났다.[2] 월탄(月灘)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썼으며, 회문의숙(會文義塾)에 다녔다. 그는 1922년 백조(白鳥) 문예동인회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1946년 조선문학가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1947년 서울예술위원회 위원장과 1949년 한국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1955년 한국예술원 원장, 1964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그는 1981년 1월 13일에 사망했다.[3]

박종화는 1901년 10월 29일, 서울(漢城) 반석방자암동에서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통훈대부 내부주사 박대혁(朴大赫), 어머니는 안동김씨였다. 조부는 통정대부 정삼품 훈련원첨정 박대윤(朴台胤)이었다. 5세부터 사숙에서 한문을 공부했다. 1916년, 16세 때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했다. 17세에 김창남(金昌男)과 결혼했다. 1920년 3월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10월 홍사용(洪思容)과 함께 문학 동인지 『문우(文友)』를 발간했다. 이를 통해 박종화의 문학 활동이 시작되었다.

1921년에는 시인들의 동인지 『장미촌(薔薇村)』의 동인이 되었다. 동인으로는 황석우(黄錫禹), 변영로(卞榮魯), 박영희(朴英熙) 등이 있었다. 『장미촌』은 조선 자유시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다. 박종화는 창간호에 처녀작 「고뇌의 청춘(懊悩の青春)」「우유빛 길(牛乳光の路)」 두 편을 실었다. 1922년에는 『백조(白潮)』의 동인이 되어 홍사용(洪思容), 나도향(羅稲香), 현진건(玄鎭健), 이상화(李相和), 박영희(朴英熙), 노자영(盧子泳), 김기진(金基鎭) 등과 교류를 깊게 했다. 『백조』 3호에 실린 「목매이는 여자(首をしばられた女子)」는 조선 문학에서 최초의 역사소설로 일컬어진다.

이후 박종화는 역사소설가로서 능력을 발휘했다. 1935년, 『매일신보(毎日申報)』에 연재된 장편 『금수의 피(錦袖の血)』를 비롯하여, 『대춘부(待春賦)』(1935년), 『아랑의 정조(アランの貞操)』(1937년), 『다정불심(多情佛心)』(1940년) 등을 발표했다. 그는 역사소설이 결코 현실 도피가 아니며, 역사소설이 지닌 효과는 현실 소설보다 더 강하다고 믿었다.

일제(日帝)의 압력으로 조선 문학계에서 많은 작가들이 친일 문학(親日文學)을 발표하는 가운데, 박종화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항일을 주제로 한 민족 문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전야(前夜)』(1942년), 『여명(黎明)』(1944년), 『민족(民族)』(1946년)은 민족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들이다.

해방 후 혼란기에 박종화는 소설을 쓰는 것뿐만 아니라, 전조선문필가협회(全朝鮮文筆家協會) 부회장을 비롯하여 한국문학가협회 회장,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대한민국예술원(大韓民國藝術院) 원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회장, 민족문화추진위원회 위원장, 문화예술윤리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줄곧 문단의 중진으로서 한국 문학을 이끌었다.

1981년 1월 13일 오후 7시 45분,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 80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2. 1. 유년 시절 및 학창 시절

박종화는 1901년 10월 29일 대한제국 서울에서 태어났다.[2] 월탄(月灘)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썼다. 상방소학교(前)를 거쳐 한선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회문의숙(會文義塾)에 다녔다.[3]

2. 2. 문단 활동

박종화는 1920년 3월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10월 홍사용과 함께 문학 동인지 『문우』를 발간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2] 1921년에는 시인들의 동인지 『장미촌』의 동인이 되었으며, 황석우, 변영로, 박영희 등이 참여했다. 『장미촌』은 조선 자유시의 효시로 평가받는다.[3] 박종화는 창간호에 처녀작 「고뇌의 청춘」,「우유빛 길」 두 편을 실었다.

1922년 『백조』의 동인이 되어 홍사용, 나도향, 현진건, 이상화, 박영희, 노자영, 김기진 등과 교류했다. 『백조』 3호에 실린 「목매이는 여자」는 조선 문학에서 최초의 역사소설로 평가받는다.[3]

이후 박종화는 역사소설가로서 능력을 발휘했다. 1935년 『매일신보』에 연재된 장편 『금수의 피』를 비롯하여, 『대춘부』(1935년), 『아랑의 정조』(1937년), 『다정불심』(1940년) 등을 발표했다. 그는 역사소설이 현실 도피가 아니며, 현실 소설보다 더 강한 효과를 지닌다고 믿었다.[3]

일제 강점기, 많은 작가들이 친일 문학을 발표하는 가운데 박종화는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항일을 주제로 한 민족 문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전야』(1942년), 『여명』(1944년), 『민족』(1946년)은 민족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들이다.[3]

해방 후, 박종화는 전조선문필가협회 부회장, 한국문학가협회 회장,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대한민국예술원 원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회장, 민족문화추진위원회 위원장, 문화예술윤리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 문학을 이끌었다.[3]

2. 3. 해방 이후

박종화는 해방 후 혼란기에 소설 창작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학 관련 단체에서 활동하며 한국 문학을 이끌었다. 전조선문필가협회(全朝鮮文筆家協會) 부회장, 한국문학가협회 회장,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대한민국예술원(大韓民國藝術院) 원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회장, 민족문화추진위원회 위원장, 문화예술윤리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46년 조선문학가협회 부회장을 역임했고,[2] 1947년 서울예술위원회 위원장, 1949년 한국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2] 1955년에는 한국예술원 원장, 1964년에는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을 역임하며 문단의 중진으로서 활동했다.[2]

1981년 1월 13일 오후 7시 45분,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 80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2. 4. 사돈 현진건과의 관계

박종화는 생전 현진건의 딸인 현화수를 외아들 박돈수의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현화수의 회고에 따르면 그 혼담은 젊은 시절 현진건과 박종화 사이에 있었던 약조로 이루어진 것이었다.[13] 박종화는 생전에 현화수에게 "새벽에 손님이 찾아와도 닭 잡고 말없이 술상을 차리는 네 친정 어머니의 딸이라면 괜찮겠지 싶어서 데려왔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13]

현진건은 어느 날 "너 선 봐라"라는 말에 덕수궁 미술관에 박돈수와 함께 현화수를 들여 보냈는데, 그때 박씨 집안에서 온 할머니들이 따라다니면서 두 사람을 관찰하다시피 했고, 그다음날 박종화의 집으로부터 제기동의 현진건 집으로 약혼 반지가 보내져 왔다고 한다.[13] 한번은 한밤중에 박종화가 갑자기 제기동의 현진건의 집으로 찾아왔는데, 그때 현진건은 집에 마침 없었다. 박종화는 문을 열고 나온 현화수를 보고 "담배를 피워야 하는데 성냥이 없으니 좀 켜 다오"라고 하고서 성냥 불빛으로 현화수의 얼굴을 얼굴을 찬찬히 보았다고 한다(이는 굳이 현화수 한 사람을 보기 위해서 일부러 찾아오면 현진건이 화를 낼까 봐 몰래 온 것이었다고).[13]

당시 박종화의 집안과 현진건의 집안은 경제적인 면에서 격차가 크게 났는데, 당시 현진건은 거의 절필 상태로 미두 투자도 실패하여 부암동의 집을 팔고 제기동의 다 낡은 집으로 이사해 거의 궁핍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13] 이를 이유로 박씨 집안에서 다 반대했지만, 박종화의 아버지 박대혁(朴大赫)이 "너희가 반대하면 뭐 하느냐? 시아버지(박종화)가 좋다면 그만이지" 하고 영(令)을 내려 혼인이 이루어지게 되었다.[13]

현화수가 박돈수와 혼인하고 두 달 뒤에 친정아버지 현진건은 사망, 친정어머니 역시 대구로 돌아갔다가 이듬해 사망하였다.[13] 현화수는 박종화에 대해 "엄하셨지만, 짓누르지 않고 다정하게 대해 주셨어요. 항상 자애와 미소가 가득했던 분이셨어요."라고 회고하였다.[13] 이미 혼인 전에 돈이 없었던 현진건의 집에 돈을 보내 주고, 혼인에 쓸 이바지 음식도 박종화가 몰래 뒤에서 돈을 다 보내 주기도 하였다고 한다.[13]

2. 5. 말년

박종화는 1981년 1월 13일 오후 7시 45분,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 80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3] 그는 해방 후 혼란기에 소설 창작뿐만 아니라 전조선문필가협회 부회장, 한국문학가협회 회장,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대한민국예술원 원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회장, 민족문화추진위원회 위원장, 문화예술윤리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 문학을 이끌었다.[3]

3. 작품 세계

3. 1. 초기: 낭만주의 시

박종화는 1921년 《장미촌》 창간호에 「오뇌의 청춘」과 「우유빛 거리」를, 1922년 《백조》 창간호에 「밀실로 돌아가다」와 「만가」를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했다. 그의 첫 시집 《흑방비곡》(1924)으로 그는 낭만주의 시인으로 명성을 얻었다.[4]

일제강점기에는 공개적인 문학 저항은 검열, 투옥, 심지어 사망으로 이어졌으며, 1920년대 한국 작가들의 주된 감정은 절망에 가까웠다. 따라서 박종화와 이상화와 같은 시인들은 유럽의 퇴폐주의 운동을 어둡게 모방했다.[4] 그러나 박종화는 「고려청자」와 같은 시에서 미적 주제를 사용하여 국민적 자부심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는데, 이는 후에 그의 소설에서도 이어졌다.[4]

12세기 청자


:푸른 녹색에 가는 선이 은은히 감도는,

:오, 부드럽고 매끄럽게 굽어진,

:보살/བོདbo의 어깨와 같은,

:우아함과 기품이 어우러진.

:제비는 물결을 뿌리치고

:4월의 바람을 가른다.

:그러나 깨어나라! – 이것이 고려청자다.

:이것은 우리 것이 천 년 동안이었다.

:깊이 있는 색깔, 부드럽게 음영이 지어진;

:무지개 빛깔의 왜가리;

:가을 구름 사이로 비치는 푸른 하늘

:소나기가 지나가면서;

:혹은 이슬 머금은 흰 구름,

:높이 날갯짓한다.

:그러나 깨어나라! – 이것이 고려청자다.

:이것은 우리 것이 천 년 동안이었다.

:술병, 주전자, 그릇과 접시,

:먹돌, 향로, 향합,

:꽃병, 술잔, 베개, 북;

:그것들은 흙이지만 – 그러나 그것은 옥이다![5]

천 년 전 고려 시대에는 독특한 회청색의 고려청자(청자)가 한반도에서 생산되는 주요 도자기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공예 도자기가 거의 사라졌다. 과거에는 특히 불교 의식과 관련이 있었기에 첫 연에서 보살/བོདbo을 언급했다. 이 시는 이후 청자의 계승자인 백자와 두 번째 연에 언급된 왜가리의 남색을, 세 번째 연에서는 도자기의 용도를 다룬다.[6]

3. 2. 중기: 역사소설로의 전환과 민족의식

박종화는 한국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역사 소설을 쓰는 데 남은 생애를 바쳤다.[1] 그의 소설과 삶 모두에서 한국 정체성에 대한 헌신이 주요한 주제였다.[1] 일제 강점기 말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박종화는 일본식 성을 채택하거나 친일 문학 단체에 참여하지 않았다.[1] 식민지 시대에 박종화는 『금삼의 피』(1936), 『대춘부』(1939), 『전야』(1942), 『대정불심』(1942)을 포함한 여러 편의 역사 소설을 발표했다.[1] 해방 후 박종화는 전조선문필가협회와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을 역임하며 민족주의 진영에서 활동했다.[1] 그는 또한 『전야』와 『대정불심』에 이은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민족』에서 국권 회복에 대한 환희를 표현했다.[1]

그 후 박종화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한국 역사를 계속해서 조명했다. 『임진왜란』(1955), 『홍경래』(1958), 『여인천하』(1959)는 모두 한국 역사의 책장에서 활기찬 민족적 자긍심을 발굴하려는 그의 열망을 보여준다.[1] 꼼꼼한 연구와 역사의 웅장한 범위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박종화는 이러한 역사 소설에서 다양한 한국적 사고방식과 민속 풍습을 보존하는 데 성공했다.[1]

마지막 주요 작품은 1969년부터 1977년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된 2456회에 달하는 『세종대왕』이며, 이후 이를 바탕으로 TV 드라마 『용의 눈물』이 제작되었다.[7]

3. 3. 후기: 역사소설의 심화와 대중화

박종화는 한국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역사 소설을 쓰는 데 남은 생애를 바쳤다.[1] 한국문학번역원은 그의 작가 경력의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박종화는 소설과 삶 모두에서 한국 정체성에 대한 헌신을 주요한 주제로 삼았다. 일제 강점기 말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일본식 성을 채택하거나 친일 문학 단체에 참여하지 않았다. 식민지 시대에 『금삼의 피』(1936), 『대춘부』(1939), 『전야』(1942), 『대정불심』(1942)을 포함한 여러 편의 역사 소설을 발표했다. 해방 후 전조선문필가협회와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을 역임하며 민족주의 진영에서 활동했다. 또한 『전야』와 『대정불심』에 이은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민족』에서 국권 회복에 대한 환희를 표현했다.[1]

이후 박종화는 더욱 먼 과거로 눈을 돌려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한국 역사를 계속해서 조명했다. 『임진왜란』(1955), 『홍경래』(1958), 『여인천하』(1959)는 모두 한국 역사의 책장에서 활기찬 민족적 자긍심을 발굴하려는 그의 열망을 보여준다. 꼼꼼한 연구와 역사의 웅장한 범위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다양한 한국적 사고방식과 민속 풍습을 보존하는 데 성공했다.[1]

마지막 주요 작품은 1969년부터 1977년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된 2456회에 달하는 『세종대왕』이며, 이후 이를 바탕으로 TV 드라마 『용의 눈물』이 제작되었다.[7]

4. 연보


  • 1901년 10월 29일, 한성 반석방자암동에서 출생하였다.
  • 1916년, 휘문의숙에 입학하였다.
  • 1917년, 김창남과 결혼하였다.
  • 1920년, 동인지 『문우』를 발간하였다.
  • 1921년, 『장미촌』 동인이 되었다.
  • 1922년, 『백조』 동인이 되었다. 장남 돈수가 출생하였다.
  • 1946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9월, 동국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였다. 연희대학교 강사로도 취임하였다.
  • 1947년, 성균관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였다.
  • 1948년 5월, 문교부 예술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9월, 서울대학교 대학원 강사로 취임하였다.
  • 1949년 5월, 한국문학가협회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6월, 서울신문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2월, 서울시문화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 1950년 5월, 중앙선거위원으로 취임하였다.
  • 1951년 5월,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 1952년 3월, 국무총리 정책위원으로 취임하였다.
  • 1953년 10월, 문교부 국어심의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2월, 고등고시위원으로 선출되었다.
  • 1954년 4월, 유네스코 한국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예술원 회원, 서울시사편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5월, 국무총리 전례위원으로 선출되었다. 6월, 예술원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 1955년 7월, 예술원 제1회 문학공로상을 수상하였다.
  • 1957년 9월, 성균관대학교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 1961년 3월, 대한성서공회 성서개역 자문으로 선출되었다.
  • 1962년 2월, 성균관대학교 정년퇴임하였다. 5월, 대한민국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수훈하였다.
  • 1963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
  • 1964년 2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재단법인 3·1문화상 심사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 1965년 1월, 3·1문화상 재단 이사, 대한적십자사 조직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2월, 민족문화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 1966년 3월, 문화예술윤리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5월, 제1회 5·16민족상 대상을 수상하였다.
  • 1967년, 5·16민족상 부리사장으로 취임하였다.
  • 1969년, 국토통일원 고문.
  • 1981년 1월 13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 서거하였다.

5. 수상

1962년 대통령장 문화훈장, 1966년 5·16 문학상, 1970년 대한민국 무궁화장을 수상하였다.

6. 작품 목록

'''소설'''


  • 금삼의 피 () 1936년 매일신보에 연재[9]
  • 봄맞이 노래
  • 친절한 부처
  • 나의 사람들
  • 일본 침략
  • 쉬는 구름
  • 김시종 역, 「가라타치」, 『재역 조선시집』, 이와나미쇼텐, 2007년
  • 김시종 역, 「청자부」, 『재역 조선시집』, 이와나미쇼텐, 2007년
  • 김시종 역, 「석굴암」, 『재역 조선시집』, 이와나미쇼텐, 2007년
  • 김시종 역, 「내무재령」, 『재역 조선시집』, 이와나미쇼텐, 2007년


'''시집'''

  • 〈흑방비곡〉(1924)
  • 〈청자부〉(1946)[9]


'''단편 소설'''

박종화는 〈오뇌의 청춘〉(1920), 〈우유빛 거리〉(1920), 〈밀실로 돌아가라〉(1922), 〈목매이는 여자〉(1923), 〈아버지와 아들〉(1924), 〈순대국〉(1924) 등의 단편 소설을 발표했다.[9] 1937년에는 〈아랑의 정조〉를 발표하였고, 1955년에는 〈황진이의 역천〉을 발표하였다.

'''역사 소설'''

박종화는 다음과 같은 역사 소설들을 집필했다.

  • 〈금삼의 피〉(1938)
  • 〈대춘부〉(1938)
  • 〈다정불심〉(1942)
  • 〈임진왜란〉(조선일보 연재, 1957)
  • 여인천하〉(1959)
  • 〈자고 가는 저 구름아〉(조선일보 연재, 1962)
  • 〈제왕삼대〉(부산일보 연재, 1962)
  • 〈월탄 삼국지〉(한국일보 연재, 1968)
  • 〈양녕대군〉(부산일보 연재, 1966)
  • 〈세종대왕〉(1969)
  • 금삼의 피는 1936년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다.
  • 봄맞이 노래
  • 친절한 부처
  • 나의 사람들
  • 일본 침략
  • 쉬는 구름

6. 1. 시집


  • 〈흑방비곡〉(1924)
  • 〈청자부〉(1946)[9]

6. 2. 단편 소설

박종화는 〈오뇌의 청춘〉(1920), 〈우유빛 거리〉(1920), 〈밀실로 돌아가라〉(1922), 〈목매이는 여자〉(1923), 〈아버지와 아들〉(1924), 〈순대국〉(1924) 등의 단편 소설을 발표했다.[9] 1937년에는 〈아랑의 정조〉를 발표하였고, 1955년에는 〈황진이의 역천〉을 발표하였다.

6. 3. 역사 소설

박종화는 다음과 같은 역사 소설들을 집필했다.

  • 〈금삼의 피〉(1938)
  • 〈대춘부〉(1938)
  • 〈다정불심〉(1942)
  • 〈임진왜란〉(조선일보 연재, 1957)
  • 여인천하〉(1959)
  • 〈자고 가는 저 구름아〉(조선일보 연재, 1962)
  • 〈제왕삼대〉(부산일보 연재, 1962)
  • 〈월탄 삼국지〉(한국일보 연재, 1968)
  • 〈양녕대군〉(부산일보 연재, 1966)
  • 〈세종대왕〉(1969)
  • 〈금삼의 피〉는 1936년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다.
  • 봄맞이 노래
  • 친절한 부처
  • 나의 사람들
  • 일본 침략
  • 쉬는 구름

7. 참고 사항

본인의 역사소설 〈세종대왕〉을 원작으로 한 KBS 1TV 《용의 눈물》은 당초 정하연 작가가 집필자로 낙점됐으나 스스로 포기했는데 정하연 작가의 집필작 중 하나인 MBC 《신돈》은 박종화 작가의 〈다정불심〉을 원작으로 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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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Naver Search http://people.search[...] Naver 2013-11-08
[3] 서적 Who's Who in Korean Literature Hollym
[4] 웹사이트 Korean Perspectives on Poetry http://hompi.sogang.[...]
[5] 서적 Poems from Korea University of Hawaii
[6] 웹사이트 Korean Arts http://korean-arts.c[...]
[7] 웹사이트 [창간특집] 연재 역사소설 '세종대왕' (Serial historical novel ‘King Sejong the Great’) https://www.chosun.c[...] 2023-10-13
[8] 웹사이트 King Sejong : a novel / Park Chongwha ; translated by Ahn Junghyo - Catalogue {{!}} National Library of Australia https://catalogue.nl[...] 2023-10-13
[9] 웹사이트 금삼의 (Geumsam's blood) https://encykorea.ak[...] 2023-10-13
[10] 웹사이트 (2)밀양 박씨(密陽朴氏)-3,031,478명 http://www.seoulecon[...] 2022-08-15
[11] 뉴스 문단원로 朴鐘和氏 別世 한국일보 1981-01-14
[12] 백과사전 박종화
[13] 뉴스 문인의 遺産, 가족 이야기 ① 현진건의 딸이자 박종화의 며느리 玄和壽 http://monthly.chosu[...] 월간조선 2014-12
[14] 뉴스 [KBS 왕과비] `아류' 한계 극복할 수 있을까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8-08-03
[15] 뉴스 손창민, ‘신돈’ 캐스팅 되기 전 제목은 ‘다정불심’ https://entertain.na[...] 헤럴드POP 2018-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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