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정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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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효정옹주는 조선 중종과 숙원 이씨의 딸로, 1520년에 태어나 1544년에 사망했다. 1532년 조의정에게 시집갔으나, 남편 조의정의 첩 문제와 불화로 불행한 결혼 생활을 했다. 효정옹주가 출산 후 사망하자 중종은 조의정을 문책하고 유배 보냈으며, 옹주의 이모인 상궁 은대가 풍가이를 죽여 논란이 일었다. 결국 은대는 귀양을 갔으나 명종 즉위 후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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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정옹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왕족 정보 | |
이름 | 효정옹주 |
작위 | 조선 중종의 옹주 |
배우자 | 순원위 조의정(趙義貞) |
자녀 | 1남 조천계(趙天啓) |
휘 | 순환(順環) |
출생일 | 1520년 10월 29일(음력) |
사망일 | 1544년 2월 19일 (음력) |
부친 | 중종 |
모친 | 숙원 이씨 |
2. 생애
1520년(중종 15년) 중종과 숙원 이씨의 둘째 딸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순환(順環)이다.[1] 어머니 숙원 이씨는 효정옹주를 낳고 얼마 뒤 산후병으로 사망하였다. 1532년(중종 27년) 조의정에게 하가하였으나, 남편과의 불화와 시댁의 박대로 불행한 혼인 생활을 하였다. 1544년(중종 39년) 출산 후 사망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남편 조의정의 학대 의혹이 제기되어 논란이 일었다.[2]
2. 1. 출생과 혼인
1520년(중종 15년) 10월 29일, 중종과 숙원 이씨의 둘째 딸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순환'''(順環)이다.[1] 어머니 숙원 이씨는 효정옹주를 낳고 얼마 뒤에 산후병으로 사망하였다. 동복 언니로 정순옹주가 있다.1532년(중종 27년), 순원위(淳原尉) 조의정에게 하가하였다. 당시 사헌부에서 영양군, 의혜공주, 효정옹주의 저택 공사에 대해 폐단이 심하다며 중지할 것을 청하기도 했다.
2. 2. 불행한 혼인 생활
효정옹주는 남편 조의정과 원만하게 지내지 못하였다. 조의정은 부마는 첩을 둘 수 없다는 규율을 어기고 첩을 두어 여러 차례 중종의 꾸지람을 들었다.[2] 그때마다 옹주는 투기하지 않고 남편을 보호하였는데, 조의정은 옹주의 몸종인 풍가이(豊加伊)를 첩으로 삼아 풍가이를 옹주처럼 대접하고 옹주를 몸종처럼 대우하는 등 박대하였다.[2] 중종은 남편을 탓하지 않는 딸이 답답하여 "여자가 되어 투기도 할 줄 모르면 여자가 아니니라"며 나무라기도 했다.[3]2. 3. 죽음과 논란
1544년(중종 39년) 2월 19일, 효정옹주는 아이를 낳고 나흘 만에 죽었다.[4]중종은 사위 조의정이 옹주의 병세가 위독함에도 이를 늦게 알렸으며, 궁에서 치료를 위해 보낸 의원과 의녀를 집에 들이지도 않고 돌려보냈다며 조의정을 의금부로 보내 문초하게 하였다.[2]
중종은 조의정이 궁에서 데리고 온 보모와 시녀를 내보낸 일과, 효정옹주가 출산 후에 외할머니를 불러달라는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일 등을 꾸짖고, 조의정과 풍가이를 가도(家道)를 문란하게 한 죄를 물어 추국하였다.[5]
조의정은 평소 옹주와의 사이가 돈독했으며, 옹주가 풍가이를 첩으로 삼아도 된다고 허락했고, 옹주의 건강도 갑작스럽게 나빠졌으며 옹주를 구하기 위해 의녀를 불러 구호활동을 했다고 주장하였다.
《중종실록》에서는 효정옹주와 조의정 부부의 사건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 사신은 논한다. 이때 투기(妬忌)가 성행하였는데 대궐이 더욱 심하였다. 부마들은 모두 첩을 두지도 못하고 조금이라도 범하는 자가 있으면 혹독한 형벌을 가하여 아들과 어미가 함께 곤장 아래서 죽는 이도 있었다. 의정은 연소하고 성질이 광패하여 비첩(婢妾)을 사랑하다가 여러 차례 견책을 받았으나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옹주가 정숙하여 투기하지 않고 잘 보호하여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런데 옹주가 산후증(産後症)으로 갑자기 죽자 즉시 그의 첩과 함께 금부에 가두고 지난날의 잘못을 낱낱이 적발하면서 죽게 된 사유를 추문했다. 그리하여 사건이 장차 예측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구해 주는 자의 힘을 입어 먼 외방에 유배되는 것에 그쳤다.
결국 조의정은 유배를 가게 되었고, 풍가이는 장 백대를 맞고 풀려났는데, 숙원 이씨의 여동생이자 효정옹주의 이모인 상궁 은대(銀代)가 내수사의 종들을 시켜 풍가이를 잡아가두고 매를 때려 죽게 만들었다.
한편 조정 대신들은 풍가이가 자신의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있을 때 지극정성으로 어머니를 간호한 일을 들어 효녀라고 일컬으며, 국가의 사법체계를 무시하고 사적인 감정으로 풍가이를 응징한 효정옹주의 이모 은대의 처벌을 요구하였다.[6]
중종은 처음에는 은대를 처벌하려 하지 않았으나 조정 대신들의 압박에 못 이겨 은대를 대구로 귀양보냈다.[3] 명종 즉위 후 문정왕후는 은대를 방면할 것을 명하였다.[7]
3. 가족 관계
항목 | 내용 |
---|---|
부왕 | 중종(1488 ~ 1544) |
생모 | 숙원 이씨(? ~ 1520) |
언니 | 정순옹주(1517 ~ 1581) |
남편 | 순원위(淳原尉) 조의정(趙義貞, 1521 ~ 1548) |
아들 | 조천계(趙天啓, 1539 ~ ?) |
며느리 | 강위(姜偉)의 딸 진주 강씨 |
양손자 | 조령(趙玲, 1561 ~ ?) |
참조
[1]
문서
"<효정옹주 태지석>"
1520-10-29
[2]
실록
중종실록 102권
1544-02-19
[3]
서적
조선 공주의 사생활
북성재
2011
[4]
실록
중종실록 102권
1544-02-19
[5]
실록
중종실록 102권
1544-02-21
[6]
실록
중종실록 103권
1544-06-04
[7]
실록
명종실록 2권
1545-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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