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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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창녕 조씨는 조계룡을 시조, 조겸을 중시조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창녕 조씨는 조선 시대에 문과 급제자 110명을 배출했으며, 조민수, 조석문, 조위, 조식 등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쳐 주요 인물을 배출했다. 주요 인물로는 조봉암, 조희연, 조국 등이 있으며, 경상남도, 경상북도, 전라남도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2015년 대한민국 인구는 366,798명으로 30위권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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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조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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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조씨 | |
나라 | 한국 |
관향 | 경상남도 창녕군 |
시조 | 조계룡(曺繼龍) |
중시조 | 조겸(曺謙) |
주요 인물 | |
인물 | 조익청 조민수 조상치 조비형 조석문 조효문 조숙기 조위 조신 조계상 조광원 조식 조호익 조성환 조만식 조정환 조봉암 조재천 조일환 조명희 조국 |
년도 | 2015 |
인구 | 366,798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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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창녕 조씨의 시조는 조계룡이며, 그의 탄생 설화는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화왕산과 관련되어 있다. 조계룡은 신라 진평왕 48년(626년)에 태어났으며, 겨드랑이에 붉은 '曺'자가 새겨져 있어 왕이 성을 조(曺)씨로 하고 이름을 계룡(繼龍)이라 하였다고 전해진다.[1] 다만, 창녕 조씨 일각에서 주장하는 조계룡과 김덕만의 결혼은 역사적 기록과 차이가 있다.
조겸은 신라 아간시중 조흠(曺欽)의 아들로 태악서승(太樂署丞)을 지냈으며,[1] 그의 후손들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주요 관직을 역임하며 가문을 번성시켰다. 《창녕조씨 만가보(昌寧曺氏萬家譜)》에 따르면, 조겸의 손자 조연우(曺延祐)부터 15세 조자기(曺自奇)에 이르기까지 8대에 걸쳐 문하시랑평장사를 배출하였다고 한다.
고려 말 조민수는 문하시중을 지내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우 조경수(曺敬修)의 손자인 조석문은 영의정에 올랐다. 조선시대에는 조위, 조식 등 뛰어난 학자와 관료들을 배출하였다. 조위는 성리학의 대가이자 서예가였으며, 조식은 《남명집(南冥集)》, 《파한잡기(破閑雜記)》 등을 저술하고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조상치의 후손 계열에서도 조계상, 조문수, 조한영, 조하망, 조명교, 조윤형 등 주요 관직을 역임한 인물들이 나왔다. 그 외에도 조숙기, 조윤손, 조계형, 조우인 등이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조계룡의 후손 계휘(季輝)의 아들 정통(精通)은 시중을 지냈으며, 슬하에 5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들을 오룡파(五龍派)라 하는데, 이 중 둘째 응룡(應龍)과 셋째 한룡(漢龍)의 후손들이 창녕 조씨를 이어오고 있다.
2. 1. 시조
창녕 조씨 시조(始祖)는 '''조계룡'''이다. 조계룡의 득성설화지는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화왕산이다. 창녕 조씨 일각에서는 조계룡이 신라 김덕만과 결혼했다고 주장하지만, 《화랑세기》에는 김덕만의 남편은 음갈문왕, 김용춘, 을제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에는 갈문왕인 음(飮)이 선덕여왕의 남편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경잡기》에는 김덕만은 김인평과 결혼했다는 기록이 있어 역사적 사실과는 차이가 있다.2. 1. 1. 설화
창녕 조씨 시조 조계룡의 탄생 설화는 1924년 윤창현이 저술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기록되어 있다.[1] 예향|예향중국어은 창녕현 고암촌(鼓岩村) 태생으로, 혼기가 찼을 때 복중에 병이 생겨 화왕산 용지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올리니 병이 완쾌되고 태기가 있었다. 어느 날 밤 꿈에 한 남자가 나타나 “이 아이의 아버지는 동해신룡(東海神龍)의 아들 옥결|옥결중국어이다. 잘 기르면 경상이 될 것이며 자손만대 번영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그 후 626년 (진평왕 48년)에 아들이 태어났는데, 용모가 준수하고 겨드랑이 밑에 조(曺)자가 붉게 쓰여 있었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확인해 보니 조(曺)자가 선명하므로 성을 조(曺)라 하고 이름을 조계룡(繼龍)이라 하도록 하니 창녕 조씨의 시조가 되었다.[1]2. 2. 중시조 이후
조겸은 신라 아간시중 조흠(曺欽)의 아들로, 태악서승(太樂署丞)이라는 벼슬을 지냈다.[1] 그의 후손들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주요 관직을 역임하며 가문을 번성시켰다.《창녕조씨 만가보(昌寧曺氏萬家譜)》에 따르면, 조겸의 손자 조연우(曺延祐)부터 15세 조자기(曺自奇)에 이르기까지 8대에 걸쳐 문하시랑평장사를 배출하였다고 한다.
고려 말기 조민수(曺敏修)는 문하시중을 지내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조민수의 아우 조경수(曺敬修)의 손자인 조석문(曺錫文)은 영의정에 올랐다. 조석문의 조카 조위(曺偉)는 성종 때 성리학의 대가로 서예에도 뛰어났으며, 문집 《매계집(梅溪集)》을 남겼다. 조위의 서제(庶弟) 조신(曺伸)은 역관(譯官) 출신으로 사역원정(司譯院正) 등을 역임했으며 시에도 뛰어났다. 조위의 현손 조효창(曺孝昌)은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고, 숙종 때 시·서·화의 삼절(三絶)로 불렸다.
조선 중기의 석학인 조식(曺植)은 《남명집(南冥集)》, 《파한잡기(破閑雜記)》 등을 저술하였고, 그의 문하에서는 김효원(金孝元)·정인홍(鄭仁弘)·정탁(鄭琢)·최영경(崔永慶)·곽재우(郭再祐) 등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조선시대에는 110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한편, 다른 파계(派系)인 조상치(曺尙治)의 후손에서는 중종 때 우참찬을 지낸 조계상(曺繼商), 인조 때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조문수(曺文秀), 현종 때 예조참판을 역임한 조한영(曺漢英), 영조 때 대사간을 지낸 조하망(曺夏望), 영조 때 이조참판·예문관제학을 지낸 조명교(曺命敎), 초서와 예서에 뛰어났으며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었던 조윤형(曺允亨) 등이 있다. 그밖에 연산군 때 대사헌을 지내고 주역(周易)에 조예가 깊었던 조숙기(曺淑沂), 중종 때의 무신으로 왜구와 야인 토벌에 공을 세워 병조판서·우찬성 등을 역임한 조윤손(曺潤孫), 중종반정 공신 조계형(曺繼衡), 시·서예·음악에 뛰어났던 조우인(曺友仁) 등이 있다.
조계룡의 후손 계휘(季輝)의 아들 정통(精通)은 시중을 지냈으며, 아들 5명을 두었다. 이들을 오룡파(五龍派)라 하는데, 첫째 경룡(慶), 둘째 응룡(應), 셋째 한룡(漢), 넷째 변룡(變), 다섯째 견룡(見)이다. 이 중 둘째 응룡(應龍)과 셋째 한룡(漢龍)의 후손들이 창녕 조씨를 이어오고 있다.
3. 분파
창녕 조씨는 여러 분파로 나뉘어 발전해 왔다.
분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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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학공파(副提學公派) |
감사공파(監司公派) |
상호군공파(上護軍公派) |
사의공파(司議公派) |
낭장공파(郎將公派) |
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 |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
문익공파(文翊公派) |
문장공파(文莊公派) |
문정공파(文貞公派) |
문간공파(文簡公派) |
충정공파(忠貞公派) |
밀직사공파(密直使公派) |
병조참의공파(兵曹參議公派) |
부사직공파(副司直公派) |
사성공파(司成公派) |
사정공파(司正公派) |
사직공파(司直公派) |
수찬공파(修撰公派) |
시랑공파(侍郞公派) |
시중공파(侍中公派) |
양평공파(襄平公派) |
장양공파(壯襄公派) |
좌시중공파(左侍中公派) |
중추공파(中樞公派) |
지중추공파(知中樞公派) |
진사공파(進士公派) |
청구당공파(靑邱堂公派) |
충간공파(忠簡公派) |
충순위공파(忠順衛公派) |
태복경공파(太僕卿公派) |
부위공파(副尉公派) |
태학사공파(太學士公派) |
현감공파(縣監公派) |
헌납공파(獻納公派) |
시직공파(侍直公派) |
승지공파(承旨公派) |
지평공파(持平公派) |
직장공파(直長公派) |
희천공파(熙川公派) |
참의공파(參議公派) |
부사공파(府使公派) |
병사공파(兵使公派) |
찬성공파(贊成公派) |
충익공파(忠翼公派) |
판윤공파(判尹公派) |
해공파 |
상서공파 |
4. 주요 인물
창녕 조씨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인물들을 배출했다.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 조익청(曺益淸): 고려 공민왕 때 연저수종공신(燕邸隨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고, 좌정승에 올라 하성부원군(夏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 조민수(曺敏修): 1383년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388년 요동정벌군의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로 출정하였다가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 회군을 하였으나 이성계에 대항하다가 유배되었다.
- 조상치(曺尙治): 길재(吉再)의 문인으로 1419년(세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455년(단종 3) 부제학을 역임하고,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뒤 예조참판에 임명하였으나 사직하고 은거하였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 조비형(曺備衡, 1376년 ~ 1440년): 1402년(태종 2) 무과에 급제하여 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 평안도절제사 등을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안무(安武)이다.
- 조석문(曺錫文, 1413년 ~ 1477년):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1467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책록되고 영의정에 올랐으며,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 조효문(曺孝門):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455년(세조 1) 세조의 즉위에 협력한 공으로써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책록되었으며 창성군(昌城君)에 봉해졌다. 1461년 예조참판으로 악학도감제조(樂學都監提調)를 겸직하였다. 시호는 성도(成度)이다.
- 조숙기(曺淑沂, 1434년 ~ 1509년): 1475년(성종 6)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507년(중종 2)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재직 중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 조위(曺偉, 1454년 ~ 1503년): 1474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 성균관대사성, 호조참판, 충청도관찰사,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나, 1498년(연산군 4)에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시고(詩稿)를 수찬한 장본인이라 하여 유배되었다. 두시언해(杜詩諺解)를 완성하고 서문을 지었고 순천 유배지에서 유배가사의 효시인 만분가(萬憤歌)를 지었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저서로 매계집(梅溪集)이 있다.
- 조신(曺伸, 1454년 - 1528년): 역관으로 외국에 10차례나 다녀왔고 내시교관, 사역원정(司譯院正) 등을 역임했으며 공조판서가 증직되고 시호는 효강(孝康)이다. 시에도 뛰어났으며 저서로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 소문쇄록(謏聞鎻錄), 백년록(百年錄), 적암유고(適庵遺稿)가 있다.
- 조계상(曺繼商, 1466년 ~ 1543년): 조상치의 증손. 1495년(연산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에 책록되고 창녕군(昌寧君)에 봉해졌다. 1539년 우찬성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 조광원(曺光遠, 1492년 ~ 1573년): 조계상의 아들. 152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61년 판중추부사에 이르렀고, 창녕군(昌寧君)에 습봉되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 조계형(曺繼衡): 호조참판, 좌부승지
- 조식(曺植, 1501년 ~ 1572년): 성리학자, 종성부사
- 조탁(曺倬): 공조참판
- 조광익(曺光益): 형조좌랑, 의금부도사
- 조호익(曺好益): 형조정랑, 정주목사
- 조상(曺塽, 1876년 ~ 1945년): 성리학자
- 조봉암(曺奉岩, 1899년 ~ 1959년): 초대 농림부 장관. 제2대 국회 부의장
- 조재천(曺在千, 1912년 ~ 1970년): 제11대 법무부 장관
- 조일환(曺逸煥, 1916년 ~ 1980년): 제 4, 5, 7, 8대 국회의원
- 조해녕(曺海寧, 1943년 ~ ): 제63대 내무부 장관, 제13대 대구광역시장
- 조경수(1948년 ~ ): 가수, 작사가, 작곡가. 조승우의 아버지이다.
- 조훈현(曺薰鉉. 1953년 ~ ): 프로 바둑 기사 출신 정치인
- 조희연(曺喜昖, 1956년 ~ ): 사회학자, 제20대 서울특별시교육감
- 조희대(曺喜大, 1957년 ~ ): 前 대법관 (2014. 3. ~ 2020. 3.), 제17대 대법원 대법원장(2023.12~ )
- 조해진(曺海珍, 1963년 ~ ): 제 18, 19, 21대 국회의원
- 조국(曺國, 1965년 ~ ): 법학자, 교수, 제66대 법무부 장관
5. 집성촌
지역 | 세부 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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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곡성군 | 입면 금산리, 약천리 |
경상북도 고령군 | 다산면 송곡리 |
경상북도 김천시 | 남면, 봉산면 인의리, 신리, 예지리(봉계), 대항면 운수리 |
경상북도 청도군 | 이서면 |
경상북도 영천시 | 금호읍, 화북면 오산리 |
경상북도 울릉군 | 울릉읍 |
경상남도 남해군 | 고현면 남치리 |
경상남도 창녕군 | 고암면 원촌리, 대합면 이방리 |
경상남도 산청군 | 시천면, 삼장면 |
경상남도 합천군 | 묘산면 도옥리, 안성리, 봉곡리, 봉산면 압곡리, 김봉리, 쌍책면 덕봉리 |
경상남도 의령군 | 화정면 상정리 |
경상남도 창원시 | 가음동 |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 계화면 창북리 |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 공음면 용수리 |
전라남도 진도군 | 고군면 오산리 |
전라남도 화순군 | 백아면, 동면 |
전라남도 담양군 | 고서면 교산리, 금현리, 동운리, 분향리, 성월리, 용면 추성리 |
전라남도 보성군 | 조성면 대곡리, 겸백면 평호리 평화, 겸백면 석호리 선돌 |
충청북도 진천군 | 덕산읍 기전리 |
충청북도 옥천군 | 옥천읍 |
충청남도 보령시 | 주포면 봉당리 |
서울특별시 중구 | 명동 |
서울특별시 서초구 | 염곡동 |
대구광역시 중구 | |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 난곡동 |
경기도 파주시 | 탄현면 금산리 |
경기도 여주시 | 대신면 |
충청남도 부여군 | 내산면 지티리 |
6. 항렬자
更始祖중국어 삼송 형제 조송무(曺松茂), 조송군(曺松君), 조송학(曺松鶴)을 1세로 하는 대동항렬을 사용한다.
22세 | 23세 | 24세 | 25세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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口승(承) | 병(秉) | 口환(煥) | 규(圭)희(喜)기(基) | 口현(鉉)口호(鎬)口종(鐘) | 영(永)해(海)수(洙) | 口근(根)口식(植)口목(穆) | 용(容)형(炯)연(然) | 口재(載)口곤(坤)口훈(塤) | 일(鎰)건(鍵)용(鏞) | 口태(泰)口순(淳)口연(淵) | 동(東)상(相)영(榮) | 口섭(燮)口열(烈)口걸(杰) | 균(均)중(重)원(垣) | 口용(鎔)口진(鎭)口석(錫) | 윤(潤)준(準)문(汶) | 口직(稷)口백(栢)口표(杓) | 희(熙)영(煐)형(螢) | 口육(堉)口돈(墩)口배(培) | 전(鐫)전(銓)찬(鑽) | 口호(浩)口하(河)口락(洛) | 화(和)정(楨)환(桓) | 口훈(勳)口묵(黙)口우(愚) |
7. 인구
연도 | 가구 수 | 인구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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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 72,213가구 | 299,669명 |
2000년 | 105,282가구 | 338,222명 |
2015년 | 366,798명 |
창녕 조씨는 2015년 기준 대한민국 인구 순위 30위권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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