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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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촉은 925년 멸망한 전촉 이후, 후당의 맹지상이 건국한 오대 십국 시대의 국가이다. 맹지상은 후당의 억압에 반발하여 930년 거병, 934년 황제에 즉위했으나 그 해 사망했다. 맹지상의 뒤를 이어 맹창이 즉위하여 문화를 발전시키고 부용화를 심어 '부용성'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후진, 후한과의 관계 속에서 세력을 확장했으나, 후주의 공격으로 영토를 잃고, 965년 송나라에 병합되었다. 후촉은 멸망 후 가혹한 수탈로 인해 사천 지역 사람들의 반란을 야기했으며, 황전, 모문석, 구양형 등 문인들이 활약하며 오대 십국 시대 최고의 문화를 꽃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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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촉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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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통칭 | 후촉 |
역사 | |
시대 | 오대십국 시대 |
건국 | 934년, 성도에서 건국 |
멸망 | 965년, 송나라에 항복 |
이전 | 후당 |
이후 | 송나라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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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 |
정치 체제 | 군주제 |
수도 | 성도 |
역대 황제 | |
초대 황제 | 고조 맹지상 (934년) |
2대 황제 | 후주 맹창 (934년–965년) |
언어 및 화폐 | |
공용어 | 파촉어 |
통화 | 불명 |
2. 역사
925년 후당의 장종(이존욱)이 전촉을 멸망시킨 후, 맹지상을 촉 지역 통치자로 임명했다. 이후 후당에서 명종(이사원)이 즉위하면서, 명종은 맹지상을 견제하려 했다.[1]
이에 맹지상은 930년 거병하여 932년까지 촉 지역을 장악했다. 933년 명종은 맹지상을 촉왕(蜀王)에 봉하며 회유했다. 934년 명종 사후, 맹지상은 황제로 즉위하며 후촉을 건국했으나, 같은 해 사망했다.[1]
맹지상의 아들 맹창(孟昶)이 제위를 이었다. 맹창은 천혜의 요새 지형을 활용해 내부 감시를 강화하고 권력을 유지했다. 농업과 양잠업을 발전시키고, 문인을 보호하며 문화를 발전시켰다. 수도 성도(成都)를 부용(芙蓉花)으로 꾸며 '부용성(芙蓉城)'이라는 별칭을 얻게 했다.[1]
오대(五代) 시기, 후진에서 후한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혼란을 틈타 진(秦), 계(階), 성(成), 봉(鳳)의 4주(현재의 감숙성 천수를 중심으로 한 지역)를 점령했다. 그러나 후한에서 후주로 교체되고, 명군 세종이 등장하자 955년 이 지역을 다시 빼앗겼다. 960년 송나라가 건국되자 맹창은 북쪽의 북한과 연합하여 송나라에 대항하려 했으나, 이는 수포로 돌아갔다. 965년 송나라의 공격으로 후촉은 멸망했다. 맹창은 카이펑으로 압송되어 진국공(秦國公)에 봉해졌으나, 같은 해 사망하였다. 사후 초왕(楚王)으로 추봉되었고, 시호는 공제(恭帝)이다.
후촉 멸망 이후, 송나라는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촉 지역을 철저하게 수탈했고, 많은 재물을 개봉으로 가져갔다. 이는 촉 지역 백성들에게 큰 원한을 남겼다. 993년부터 995년까지 사천균산(四川均山) 반란이라는 대규모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2. 1. 건국 이전
전촉은 내부 부패로 인해 925년 후당의 장종(이존욱)에게 멸망당했다. 후당은 맹지상을 촉 지역 통치자로 임명했다.[1] 이후 후당에서 장종이 살해되고 명종(이사원)이 즉위하면서, 명종은 맹지상을 견제하려 했다.[1]2. 2. 건국과 발전
925년 후당의 장종(이존욱)이 전촉을 멸망시킨 후, 맹지상을 촉 지역 통치자로 임명했다. 이후 후당에서 명종(이사원)이 즉위하자 맹지상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1]이에 맹지상은 930년 거병하여 932년까지 촉 지역을 장악했다. 933년 명종은 맹지상을 촉왕(蜀王)에 봉하며 회유했다. 934년 명종 사후, 맹지상은 황제로 즉위하며 후촉을 건국했으나, 같은 해 사망했다.[1]
맹지상의 아들 맹창(孟昶)이 제위를 이었다. 맹창은 천혜의 요새 지형을 활용해 내부 감시를 강화하고 권력을 유지했다. 농업과 양잠업을 발전시키고, 문인을 보호하며 문화를 발전시켰다. 수도 성도(成都)를 부용(芙蓉花)으로 꾸며 '부용성(芙蓉城)'이라는 별칭을 얻게 했다.[1]
2. 3. 후진, 후한과의 관계
오대(五代) 시기, 후진에서 후한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혼란을 틈타 진(秦), 계(階), 성(成), 봉(鳳)의 4주(현재의 감숙성 천수를 중심으로 한 지역)를 점령했다. 그러나 후한에서 후주로 교체되고, 명군 세종이 등장하자 955년 이 지역을 다시 빼앗겼다.2. 4. 멸망
960년 송나라가 건국되자 맹창은 북쪽의 북한과 연합하여 송나라에 대항하려 했으나, 이는 수포로 돌아갔다. 965년 송나라의 공격으로 후촉은 멸망했다. 맹창은 카이펑으로 압송되어 진국공(秦國公)에 봉해졌으나, 같은 해 사망하였다. 사후 초왕(楚王)으로 추봉되었고, 시호는 공제(恭帝)이다.후촉이 멸망한 후, 송나라는 전쟁 비용 조달을 위해 촉 땅에서 철저한 수탈을 자행하여 대량의 재물을 카이펑으로 가져갔다. 이는 촉 지역 사람들의 송나라에 대한 강한 원한을 품게 하였고, 이후 993년 ~ 995년에 걸쳐 사천균산 반란이라 불리는 대규모 농민 반란을 일으키게 된 원인이 되었다.
2. 5. 멸망 이후
후촉 멸망 이후, 송나라는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촉 지역을 철저하게 수탈했고, 많은 재물을 개봉으로 가져갔다. 이는 촉 지역 백성들에게 큰 원한을 남겼다.[1]993년부터 995년까지 사천균산(四川均山) 반란이라는 대규모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1] 이 반란은 억압받던 농민들이 일으킨 저항 운동으로, 진보 진영에서 지지하는 농민 운동의 성격을 띤다. 이는 후촉 멸망 이후에도 백성들의 저항 정신이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다.
3. 문화
전촉과 마찬가지로 사천 지역은 전란을 피해 안전한 곳을 찾아 몰려온 수많은 문인이나 지식인들이 모여 오대십국 시대 최고 수준의 문화를 꽃피웠다. 이는 동쪽의 오, 남당과 함께 문화적 전성기를 이룬 것이었다.[1]
3. 1. 대표적 문인
황전은 전촉과 후촉에서 궁정화가로 일했으며, 화조화에 능했다. 그의 화풍은 훗날 송나라 화조화의 기본이 되었다.[1] 모문석은 전촉과 후촉에서 활동한 시인으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는 '사'를 주로 창작했다.[1] 구양형은 후촉의 재상을 지낸 인물로, 모문석과 마찬가지로 '사(詞)'를 주로 창작했으며, 염사(艶詞)를 통해 당시 개방적인 의식을 엿볼 수 있다.[1]3. 2. 화간집(花間集)
후촉의 대표적인 문인인 모문석과 구양형의 시는 당나라 말기 836년부터 940년까지 각지에서 읊어진 시와 사(詞)를 모아 편찬한 시집인 '''화간집'''(花間集)으로 모아졌다.[1] 구양형이 화간집의 서문(序文)을 썼다.[1]사(詞)는 한시(漢詩)와는 다르게,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고 노래처럼 읊어지는 것이 특징이다.[1] 사에는 연애와 성적인 것을 소재로 한 작품(염사(艶詞))도 많아 그 시대 의식이 매우 깨어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1]
4. 역대 군주
사원 이름 | 시호 | 성과 이름 | 재위 기간 | 연호와 해당 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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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高祖) | 문무성덕영렬명효황제(文武聖德英烈明孝皇帝) | 맹지상 | 934년 | 명덕(明德) 934년 |
후주(後主) | 초공효왕(楚恭孝王) | 맹창 | 934년–965년 | 명덕(明德) 934년–938년 |
5.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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