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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구치 기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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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구치 기이치로는 일본 육군 중장으로, 1888년 효고현에서 태어났다. 그는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폴란드 주재 무관, 만주 관동군 등에서 복무하며 러시아어에 능통했다. 특히, 하얼빈 특무 기관장으로 재직하며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만주로 탈출하려는 유대인 난민들을 지원하는 '오트포르 사건'에 관여하여 인도주의적 면모를 보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알류샨 열도 전역과 북부 일본 방어를 지휘했으며, 종전 후에는 소련으로부터 전범으로 지목되었지만, 연합군에 의해 보호받았다. 히구치는 유대인 난민 구출, 뛰어난 군사적 지휘, 긍정적 평가를 받지만, 아투 섬 전투에서의 옥쇄 강요와 소련과의 강경한 태도에 대한 부정적 평가, '오트포르 사건'의 진위 논란 등 다양한 평가와 논란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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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구치 기이치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히구치 기이치로 장군
이름히구치 기이치로
출생일1888년 8월 20일
사망일1970년 10월 11일
출생지미나미아와지, 효고, 일본
사망지해당 정보 없음
별명해당 정보 없음
군사 복무
소속일본 제국 육군
복무 기간1910년–1945년
최종 계급중장
지휘9사단
제5방면군
참전 전투제2차 세계 대전
소련-일본 전쟁
훈장
훈장 내역정4위
훈1등
[[파일:POL Polonia Restituta Oficerski BAR.svg|50px]] 폴란드 복구 오피체르스키 십자 훈장
[[File:DEU Deutsche Adlerorden 1 BAR.svg|50px]] 독일 독수리 훈장 공로 십자성장
가족
가족 정보해당 정보 없음
이후 활동
이후 활동 정보해당 정보 없음

2. 생애

히구치 기이치로는 1888년 효고현 아와지섬(현재의 미나미아와지시)에서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1살 때 부모가 이혼하여 어머니의 가족 밑에서 자랐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21기, 육군 참모 대학 30기를 졸업하고 러시아어에 능통하여 러시아만주에서 근무했다.[1]

1919년 시베리아 출병에 참여하여 블라디보스토크 특무 기관원으로 근무하였고, 1925년에는 공사관주재 무관 (소령)으로 소련 서쪽의 폴란드에 부임했다.[1] 1933년부터 1935년까지 제41 보병연대장, 1935년부터 1937년까지는 일본 제3사단 참모장으로 복무했다. 1937년에는 군사 대표단의 일원으로 독일에 파견되었다.[2]

1937년 소장으로 승진하여 일본이 점령한 중국 하얼빈 특별 지부장이 되었다. 이때 마쓰오카 요스케의 도움을 받아 나치 독일에서 도망쳐 나온 유대인 난민 2만 명이 오트포르(소련)에서 만주(일본 괴뢰 국가 만주국의 도시)로 국경을 넘을 수 있도록 허용했는데, 이 사건은 나중에 오트포르 사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4]

1938년 말 일본으로 소환된 히구치는 일본 제국 육군 참모 본부에서 잠시 복무한 후 1939년 제9사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42년 중장으로 진급하여 삿포로에 주둔한 제5방면군에 배속되었고, 알류샨 열도 전역에 참여하여 아투 섬 전투와 코티지 작전을 지휘했다. 이후 북부군 사령관으로서 연합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북부 일본의 방어를 조직했으며, 북부 쿠릴 열도의 슈무슈 섬과 남사할린 섬 방어를 강화했다.

그의 이름은 유대인을 도운 개인의 이름을 기록하는 데 사용된 골든 북에 등재되어 있다.[5]

2. 1. 초기 생애

1888년, 효고현 아와지섬 (현재의 미나미아와지시)에서 아버지 오쿠하마 큐하치와 어머니 마츠 사이의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 오쿠하마가는 해운 도매상이자 대대로 지주였으나, 메이지 시대 이후 증기선 보급으로 가세가 기울었다. 히구치가 11살 때 부모가 이혼하여 어머니의 가족 밑에서 자랐다.[1]

1901년 미하라 고등소학교 2학년을 마치고 사립 심상 중학 호메이 의숙에 입학, 1902년 오사카 육군 지방 유년학교를 거쳐 18세에 기후현 오가키시 호코초의 히구치가의 양자가 되었다.[1] 일본 육군사관학교 21기, 육군 참모 대학 30기를 졸업하고 러시아어에 능통하여 러시아만주에서 근무했다.[1]

2. 2. 군 경력

1919년, 시베리아 출병에 참여하여 블라디보스토크 특무 기관원으로 근무하였다. 러시아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만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방면 부서를 전전하며 근무했다. 1925년에는 공사관주재 무관 (소령)으로 소련 서쪽의 폴란드에 부임했다.[1]

1937년, 소장으로 승진하여 일본이 점령한 중국 하얼빈 특별 지부장이 되었다. 이때 마쓰오카 요스케의 도움을 받아 나치 독일에서 도망쳐 나온 유대인 난민 2만 명이 오트포르 (소련)에서 만주 (일본 괴뢰 국가 만주국의 도시)로 국경을 넘을 수 있도록 허용했는데, 이 사건은 나중에 오트포르 사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4] 히구치의 부하들은 난민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하얼빈이나 상하이에 정착시키고, 출국 비자를 마련하는 일을 담당했다. 당시 관동군 참모장이었던 도조 히데키 장군은 유대인에 대한 독일 정책이 심각한 인도주의적 문제라는 히구치의 견해에 동의했다. 히구치의 부관 야스에 노리히로이타가키 세이시로 장군에게 유대인 난민 보호를 옹호했고, 이는 1938년 일본 유대인 정책 프로그램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1938년 말 일본으로 소환된 히구치는 일본 제국 육군 참모 본부에서 잠시 복무한 후 1939년 제9사단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42년에는 중장으로 진급하여 삿포로에 주둔한 제5방면군에 배속되었다. 그는 알류샨 열도 전역에 참여하여, 아투 섬 전투와 코티지 작전을 지휘했다. 이후 북부군 사령관으로서 연합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북부 일본의 방어를 조직했으며, 북부 쿠릴 열도의 슈무슈 섬과 남사할린 섬 방어를 강화했다.

2. 3. 오트포르 사건과 유대인 난민 구출

1937년 12월 26일(사가라 슌스케가 쓴 히구치의 전기 『유빙의 바다』에서는 1938년 1월 15일), 제1회 극동 유대인 대회가 열렸을 때, 히구치는 나치 독일반유대 정책을 "유대인 추방 전에 그들에게 토지를 주어라"고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축사를 했다.[8]

1938년 3월, 수천 명의 유대인이 독일의 박해를 피해 소련-만주 국경 근처의 시베리아 횡단 철도 오토폴역(Otpor)까지 도망쳐 왔다. 이들은 망명지인 미국상하이 조계로 가기 위해 만주국을 통과해야 했지만, 만주국 외교부가 입국을 주저하여 발이 묶였다. 히구치는 극동 유대인 협회의 대표로부터 상담을 받고, 즉시 유대인에게 급식, 의류, 연료를 배급하고, 요보호자에 대한 치료를 실시했다. 또한 출국 알선, 만주 국내 이주 및 상하이 조계로의 이동 수속 등을 지원했다. 히구치는 남만주 철도(만철) 총재였던 마쓰오카 요스케에게 직접 담판하여 만철 특별 열차로 유대인들을 상하이로 탈출시켰다.[9]

당시 관동군 참모장이었던 도조 히데키는 유대인에 대한 독일 정책이 심각한 인도주의적 문제라는 히구치의 견해에 동의했다. 히구치의 부관 야스에 노리히로이타가키 세이시로에게 유대인 난민 보호를 옹호했고, 이는 1938년 일본 유대인 정책 프로그램 수립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이설도 많고, 애초에 이러한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다.[14]

2. 3. 1. 이설과 이론

히구치 기이치로의 회고록과 다른 자료들 사이에는 몇 가지 차이점이 존재한다. 특히, 1938년 독일에서 탈출한 유대인 난민을 구출한 오트포르 사건에 대한 내용이 그러하다. 히구치의 회고록에는 수천 명의 유대인이 만주국 국경에서 발이 묶였고, 만주국 외교부와 협의하여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그들의 입국을 허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특별 열차나 식사, 숙소 제공에 대한 언급은 없다.[12]

반면, 히구치의 고별식에 참석한 일본 이스라엘 우호 협회 관계자들과 당시 아사히 신문의 기사에서는 2만 명의 유대인이 오트포르에서 발이 묶였고, 히구치가 특별 열차를 편성하여 하얼빈으로 보내고 식사와 숙소를 제공했다고 전해진다.[11]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이스라엘 하이파 대학의 로템 코넬 교수는 다음과 같은 비판적 견해를 제시한다.[14]

로템 코넬 교수의 비판적 견해
* 히구치에게 구원받았다고 증언하는 유대인이 없다.
* 오트포르 사건에 대한 자료는 히구치의 유고뿐이다.
* 1938년 당시 만주로 이동한 유대인은 수십 명 정도였고, 이동 중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 카우프만은 히구치의 유대인 구원 활동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 최근 도조 히데키를 재평가하려는 역사 수정주의 움직임과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일각에서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히구치 루트'라고 불리는 이동 경로가 존재했으며, 2만 명은 이 경로를 따른 피난민의 수라는 주장도 제기된다.[15] 그러나 이 역시 누계가 2만 명에 도달했는지는 불분명하다.[15]

한편, 히구치의 이름이 유대 민족 기금의 골든 북(Golden Book)에 등재된 것을 둘러싼 논란도 있다. 히구치는 회고록에서 세계 유대인 협회가 자신의 이름을 예루살렘 유대교 총본산의 은본(銀本)에 기록하기로 결정했다고 들었다고 주장한다.[33] 그러나 코넬 교수는 골든 북이 단순한 기부금 모금 캠페인의 일환이며, 하얼빈 유대인 협회 대표가 히구치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름을 기록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14]

2. 4. 제2차 세계 대전

1937년 소장으로 진급한 히구치는 일본이 점령한 중국 하얼빈 특별 지부장이 되었다. 그는 마쓰오카 요스케의 도움을 받아 나치 독일에서 도망쳐 나온 유대인 난민 2만 명이 오트포르(소련)에서 만주(일본 괴뢰 국가 만주국의 도시)로 국경을 넘을 수 있도록 허용했는데, 이 사건은 나중에 오트포르 사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4] 히구치의 부하들은 난민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하얼빈이나 상하이에 정착시키고, 출국 비자를 마련하는 일을 담당했다. 당시 관동군 참모장이었던 도조 히데키 장군은 유대인에 대한 독일 정책이 심각한 인도주의적 문제라는 히구치의 견해에 동의했다. 히구치의 부관 야스에 노리히로이타가키 세이시로 장군에게 유대인 난민 보호를 옹호했고, 이는 1938년 일본 유대인 정책 프로그램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1938년 말 일본으로 소환된 히구치는 일본 제국 육군 참모 본부에서 잠시 복무한 후 1939년 제9사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42년 중장으로 진급하여 삿포로에 주둔한 제5방면군에 배속되었고, 알류샨 열도 전역에 참여하여 아투 섬 전투와 코티지 작전을 지휘했다. 이후 북부군 사령관으로서 연합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북부 일본의 방어를 조직했으며, 북부 쿠릴 열도의 슈무슈 섬과 남사할린 섬 방어를 강화했다. 북부군에서는 원래 대소련전을 주로 전략으로 구상하고 있었지만, 태평양 전쟁 중반부터는 대미국전을 주로 생각하여 특히 미군이 직접 홋카이도에 오는 것을 우려했다.

1945년 8월 10일 일본의 항복 직전 소련의 대일 참전이 발생했다. 8월 16일 대본영은 부득이한 자위 전투를 제외하고 전투 행동을 정지하도록 전군에 명령했지만, 히구치 기이치로 중장은 남사할린 (아마 슈무슈 섬 등의 지시마 열도도)에서의 소련군에 대한 항전을 명령하여 전투를 계속하게 했다.

스탈린은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당시 군인으로서 삿포로에 거주하고 있던 히구치를 "전범"으로 지명했다. 세계 유대인 회의는 이 움직임을 감지하고 전 세계의 유대인 커뮤니티를 움직여 재유럽 및 미국 유대인 금융가에 의한 로비 활동을 시작했다. 일본 점령 통치를 주도하던 연합군 최고 사령관 총사령부(GHQ)의 더글러스 맥아더는 소련으로부터의 인도 요구를 거절하고 히구치의 신변을 보호했다.[50][51][52]

2. 4. 1. 알류샨 열도 전역

1942년 8월 1일, 삿포로에 사령부를 둔 북부군 사령관으로서 북동 태평양 육군 작전을 지휘했다. 1943년 5월 히구치 지휘 하의 육군 부대 중 알래스카 준주 아투 섬 수비대는 옥쇄했다. 대본영이 아투 섬 수비대의 증원 요청을 거부하고 수비대를 버리기로 결정했을 때, 히구치는 이 결정에 격노했다고 알려졌지만, 수비대의 항복을 인정하려는 조치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북방군 사령부는 아투 섬 수비대에 미군을 상대로 선전하여 옥쇄할 각오를 바란다는 전문을 보냈다.[38] 아투 섬 수비대장 야마자키 대장으로부터 부상자 처분을 마치고 옥쇄하겠다는 회신이 왔고, 실제로 아투 섬 수비대는 옥쇄했다. 전후 히구치가 방위청 전사실에 보낸 편지에서는 이를 세계 전사상 희유한 일이라고 칭찬했다.[33]

키스카 섬은 해군이 수비 담당 지역이었지만, 아투 섬에서 육군 부대가 이전되어 해군 부대와 거의 같은 수의 부대가 존재했다. 육해군 장병들의 키스카 섬 철수는 성공했다. 히구치는 키스카 섬 철수 작전에 즈음하여 해군 측의 요청에 응해 육군 중앙의 결재를 받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여 "구원 함대가 키스카에 입항하여 대발동정을 타고 육지를 떠나는 즉시, 병원은 휴대하는 소총을 모두 해중에 투기할 것"이라는 명령을 키스카 섬 수비대에 내려 수용 시간을 단축시키고 무혈 철수를 성공시켰다.[39]

2. 4. 2. 소련-일본 전쟁

1945년 8월, 소련의 대일 참전 이후 히구치는 제5방면군 사령관으로서 슈무슈 섬 전투와 남사할린 전투를 지휘했다.[38] 일본이 항복한 이후에도 전투를 계속하여 소련군의 홋카이도 진공을 저지하려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33]

소련은 히구치를 전범으로 지명했으나, 미국의 반대로 신변이 보호되었다.[7]

3. 전후

히구치 기이치로의 손자이자 음악학자인 히구치 류이치 메이지 가쿠인 대학 명예 교수는 할아버지에 관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일본에서 강연 등을 하거나 2018년에 이스라엘을 방문하기도 했다.[53] 류이치는 24세까지 기이치로와 함께 살았다.[54] 기이치로의 또 다른 손녀인 시노다 에리코(삿포로 시 의회 의원)는 조부가 조용히 러시아어 책을 읽고 있었다고 회상했다.[7]

4. 평가 및 논란

히구치 기이치로는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도망쳐 온 유대인 난민들을 지원하여 그들의 생명을 구하는 데 기여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투 섬 전투에서 옥쇄를 강요했다는 비판을 받는다.[56] 또한, 소련-일본 전쟁에서 포츠담 선언 수락 후에도 소련군과의 전투를 강경하게 지속하여 점령 섬과 남 사할린 방위전을 지휘한 점은 부정적 평가의 주된 이유이다.

히구치 기이치로에 대한 논란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제기된다.


  • 오트포르 사건의 진위 여부 및 역사적 평가: 히구치는 유대인 난민 2만 명이 소련에서 만주로 국경을 넘을 수 있도록 허용했지만,[4] 도조 히데키가 유대인에 대한 독일 정책이 인도주의적 문제라는 히구치의 견해에 동의했는지, 야스에 노리히로이타가키 세이시로 장군에게 유대인 난민 보호를 옹호했는지, 그리고 이것이 1938년 일본 유대인 정책 프로그램의 수립으로 이어졌는지에 대한 주장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 아투 섬 옥쇄 책임 문제: 히구치는 알류샨 열도 전역에서 아투 섬 전투와 코티지 작전을 지휘했는데, 특히 아투 섬에서 일본군이 전멸한 사건에 대한 책임론이 제기되고 있다.


한편, 히구치는 복어 계획을 추진했지만, 시베리아 출병에 참가한 군 관계자들 대부분이 유대인 음모론에 기울어진 것과 달리, "'반유대주의' 부정이면 충분할 것이다"라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사카이 쇼군의 일유동조론을 비웃고, 시온 의정서를 미심쩍어했으며, 유대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동일시할 수 없다고 보았다.

4. 1. 긍정적 평가

히구치 기이치로는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유대인 난민들을 지원하여 그들의 생명을 구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도망쳐 온 유대인 난민 2만 명이 소련에서 만주로 국경을 넘을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난민들에게 음식, 정착지, 출국 비자를 제공했다.[4] 이러한 인도주의적 노력은 유대인을 도운 개인의 이름을 기록하는 골든 북에 등재될 정도로 높이 평가받았다.[5]

또한 히구치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뛰어난 군사적 지휘 능력을 발휘했다. 알류샨 열도 전역에서 아투 섬 전투와 코티지 작전을 지휘했으며, 이후 북부군 사령관으로서 북부 일본의 방어를 조직하고 슈무슈 섬과 남사할린 섬 방어를 강화했다.

4. 2. 부정적 평가

아투 섬 전투에서 옥쇄를 강요했다는 비판을 받는다.[56] 히구치는 1943년 5월 20일 대본영으로부터 "해군과 협동하여 서부 알류샨의 부대를 후방으로 철수시킬 것"이라는 지시를 받았으나,[57] 실제로는 아투 섬 수비대에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깨끗하게 옥쇄하여 황국 군인 정신의 정화를 발휘할 각오를 갖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38] 이에 수비대장은 부상병을 처분하고 전원이 야습을 하겠다는 답전을 보냈다.[38] 히구치는 이를 "세계 전사상 희유한 사건"이라고 칭찬했다.[33]

또한, 소련-일본 전쟁에서 포츠담 선언 수락 후에도 소련군과의 전투를 강경하게 지속하여 점령 섬과 남 사할린 방위전을 지휘했다.

4. 3. 논란

히구치 기이치로에 대한 논란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제기된다.

첫째는 오트포르 사건의 진위 여부 및 역사적 평가와 관련된 논란이다. 히구치는 1937년 소장이자 일본이 점령한 중국 하얼빈 특별 지부장으로 재직하던 중, 나치 독일에서 도망쳐 나온 유대인 난민 2만 명이 소련에서 만주로 국경을 넘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4] 이 사건은 오트포르 사건으로 알려져 있으며, 히구치의 부하들은 난민에게 음식, 정착지, 출국 비자를 제공했다.[4] 당시 관동군 참모장이었던 도조 히데키는 유대인에 대한 독일 정책이 인도주의적 문제라는 히구치의 견해에 동의했다는 주장이 있다. 히구치의 부관 야스에 노리히로이타가키 세이시로 장군에게 유대인 난민 보호를 옹호했고, 이는 1938년 일본 유대인 정책 프로그램의 수립으로 이어졌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진위 여부 및 역사적 평가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둘째는 아투 섬 옥쇄와 관련된 책임 문제이다. 히구치는 알류샨 열도 전역에 참여하여 아투 섬 전투와 코티지 작전을 지휘했다. 특히, 아투 섬에서 일본군이 전멸한 사건에 대한 책임론이 제기되고 있다.

한편, 히구치는 복어 계획을 추진했지만, 시베리아 출병에 참가한 군 관계자들 대부분이 유대인 음모론에 기울어진 것과 달리, "'반유대주의' 부정이면 충분할 것이다"라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사카이 쇼군의 일유동조론을 비웃고, 시온 의정서를 미심쩍어했으며, 유대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동일시할 수 없다고 보았다.

5. 기타

히구치는 일본 육군 내에서 러시아 전문가로 알려져 있었다.[1] 그는 여러 권의 저서와 회고록을 남겼다.

다음은 히구치 기이치로와 관련된 서적 및 자료들이다.

제목출판일출판사비고
도쿄의 방공 부록・각 도시 방공법1932년 5월제국국방협회출판부
아츠 키스카 군사령관의 회상1971년 10월부용서방
육군 중장 히구치 기이치로 회상록 (신판)1999년 4월부용서방출판히구치 본인의 친필 원고와 대조 결과 수정된 부분이 있어 주의 필요[74]
육군 중장 히구치 기이치로 회상록 (복각신판)2022년 9월계문사서방친필 원고를 바탕으로 한 신판
육군 중장 히구치 기이치로의 유훈 유대인 난민과 홋카이도를 구한 장군2020년 3월면성출판히구치 류이치 편저
유빙의 바다 어떤 군사령관의 결단 (총 5판)1973년 4월, 1988년 5월, 1994년 1월, 2003년 8월, 2010년 3월광인사, 광인사NF문고사가라 슌스케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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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의 일본 인텔리전스 세계가 칭찬한 제국 육군의 기적2022년 3월와니북스오카베 신 저, 오노데라 마코토, 후지와라 이와이치와 함께 다룸
육군 중장 히구치 기이치로의 결단2024년 4월WAC시노노메 쿠니요시 저, 만화 작품



2009년에는 주일본 이스라엘 대사가 히구치가 기후현 오가키시에 약 30년간 본적을 두었던 것을 기념하여 오가키시에 2그루의 올리브 묘목을 증정하고 식수 행사를 거행했다. 히구치는 유대 민족에게 공헌한 인물을 기록한 이스라엘의 "골든 북"에도 등재되어 있다.[70]

2020년 9월, 홋카이도 이시카리시 고노사와 지구에 히구치 기이치로 기념관이 개설되었다.[71] 2022년 10월 11일에는 히구치의 기일을 기하여 그의 탄생지인 아와지 섬의 이자나기 신궁에 동상이 건립되었다.[72] 2023년 5월 21일, 가마쿠라시 야마노우치의 엔가쿠지 셋간 절인 류인안에 현창비가 건립되어 제막식이 거행되었다.[73]

히구치 기이치로 동상 제막식


히구치 기이치로를 현창하며 주일본 이스라엘 대사가 기증한 올리브 나무 설명 패널 (오가키시 마루노우치 공원, 2019년 2월 27일 촬영)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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