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기하라 지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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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기하라 지우네는 1900년 일본 기후현에서 태어난 일본 제국의 외교관이다. 그는 육군에 복무했으며, 일제강점기 한국에 주둔하기도 했다. 1939년 리투아니아 카우나스 주재 일본 영사관 부영사로 부임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점령 하의 폴란드에서 탈출한 유대인 난민들에게 일본 통과 비자를 발급하여 약 6,000명의 생명을 구했다. 그의 인도주의적 행위는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야드 바셈 상을 수상하고, '열방의 의인'으로 기려지는 등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일본 정부는 2000년에 그의 명예를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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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기하라 지우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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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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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스기하라 치우네 |
출생일 | 1900년 1월 1일 |
출생지 | 고즈치, 기후, 일본 |
사망일 | 1986년 7월 31일 |
사망지 | 가마쿠라, 가나가와, 일본 |
묘지 | 가마쿠라 묘지 |
다른 이름 | "셈포",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스기하라 |
직업 | 리투아니아 주재 일본 제국 부영사 |
알려진 이유 |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5,558명의 유대인 구조 |
배우자 | 클라우디아 세묘노브나 아폴로노바(1918년 결혼, 1935년 이혼) 기쿠치 유키코(1936년 결혼) |
자녀 | 4명 |
수상 | 훈5등 서보장(1944년) 열방의 의인(1984년) 폴란드 부흥 훈장(2008년) |
거주지 | |
거주지 | 가나가와현 후지사와시구게누마(1947년 - 1980년) 가마쿠라시 쓰 (1980년 - 1986년) |
학력 | |
학력 | 와세다 대학교 고등사범부 영어과 (현: 교육학부 영어영문학과) 중퇴 하얼빈 학원 |
외교관 경력 | |
외무성 | 외무성 직원 (1924년 - 1947년) 주 리투아니아 카우나스 일본 영사관 영사 대리 (1939년 - 1940년) |
2. 생애
1900년 기후현 무기군 가미노치초(현재의 미노시)에서 출생.[4] 육군에 입대하여 일본 제국 치하의 한국에 주둔하기도 하였다.[28] 출생 등록증에는 출생지가 기후현 미노시의 코즈치 마을로 표시되어 있다.[75][78]
아버지 스기하라 요시미는 세무 관료였고,[75][78] 어머니는 스기하라 야츠였다.[4]
- 1901년 (메이지 34년) 부친 스기하라 요시미즈의 가미노치 세무서 근무에 따라 동지에 계속 거주.
- 1903년 (메이지 36년) 후쿠이현 니뉴군 아사히촌(현재의 에치젠정)으로 전거.
- 1904년 (메이지 37년) 미에현 요카이치시로 전거.
- 1905년 (메이지 38년) 10월 25일 기후현 에나군 나카쓰초(현재의 나카쓰가와시)로 전거.
- 1906년 (메이지 39년) 4월 2일 나카쓰정립 심상고등소학교 심상과(현재의 나카쓰가와시립 미나미 초등학교)에 입학.
- 1907년 (메이지 40년) 3월 31일 미에현 구와나군 구와나정 제1심상소학교(현재의 구와나시립 닛신 초등학교)로 전학. 같은 해 12월에 부친 스기하라 요시미즈가 한국 통감부의 초빙으로 단신 부임. 그 후, 나고야시 고와타 심상소학교(현재의 나고야시립 헤이와 초등학교)로 전학.
- 1909년 (메이지 42년) 3월 1일 아이치현으로부터 "품행 방정 학력 우수"로 표창.
- 1912년 (메이지 45년) - 고와타 심상소학교(현・나고야시립 헤이와 초등학교)를 전갑(현재의 "올 5")의 성적으로 졸업. 아이치현립 제5중학교 (현・아이치현립 즈이료 고등학교)에 입학. 그의 아버지는 그가 의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지우네는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여 영어를 전공했다.[28]
- 1917년 (다이쇼 6년) - 아이치현립 제5중학교 (현・아이치현립 즈이료 고등학교) 졸업, 경성부로 전거.
- 1918년 와세다 대학 고등사범부 영어과예과에 입학했다. 그는 침례교 목사 해리 벅스터 베닝호프가 설립한 기독교 교우회인 유아이 각샤에 입학하여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려 했다.[28]
- 1919년 (다이쇼 8년) - 와세다 대학 중퇴. 외무성 유학생 채용 시험에 합격. 외무성 러시아어 유학생으로 하얼빈으로 건너감.
- 1920년 (다이쇼 9년) - 조선 경성부 용산 보병 제79연대 9중대에 1년 지원병으로 입영.1920년부터 1922년까지 스기하라는 일본 제국 육군에서 소위로 제79보병 연대에서 복무했다.
- 1922년 11월에 임관을 사임하고 이듬해 외무성의 언어 자격 시험을 치러 러시아어 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일본 외무성은 그를 채용하여 중국 만주의 하얼빈으로 배치했고, 그곳에서 러시아어와 독일어를 공부했으며 나중에 러시아 문제 전문가가 되었다.[28]
- 1924년 (다이쇼 13년) - 재만주리 영사관에 외무 서기관보로 채용(현지 임관). 재하얼빈 일본 총영사관 근무를 명받음.
- 1926년 (다이쇼 15년) - 『소비에트 연방 국민 경제 대관』을 외무성에서 간행.
- 1929년 (쇼와 4년) - 일로 협회 학교 강사로 임명됨.
- 1932년 (쇼와 7년) - 만주국 외교부 특파원 공서 사무관(천임 6등)이 됨.
- 1933년 (쇼와 8년) - 만주국 측 서기관에 임명됨.
- 1934년 (쇼와 9년) - 만주국 외교부 이사관, 정무국 러시아과장 겸 계획과장에 임명됨.
- 1935년 (쇼와 10년) - 동청철도 양수 교섭의 만주 측 실무 담당관으로서 대소련 외교를 유리한 해결로 이끌다. 만주국 외교부 의원 퇴관 후, 외무성 대신관방 인사과 근무, 정보부 제1과 근무를 명받음.
- 1936년 (쇼와 11년) - 일로 어업 교섭의 통역관으로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캄차츠키에 부임, 반년 후 모스크바 일본 대사관 2등 통역관으로 임명됨. 가와세군 시도 상업고등학교 교장)의 장녀 사치코와 결혼.
- 1937년 (쇼와 12년) - 소련으로부터 스기하라의 입국 거부 통보를 받아, 핀란드의 헬싱키 공사관으로 전근.
- 1939년 (쇼와 14년) - 7월, 리투아니아 주 카우나스 영사관·영사 대리로 임명됨. 부임 4일 후에 독일의 폴란드 침공 발생[181]. 독일이 폴란드 서부 침략으로부터 16일 후에 소련의 폴란드 침공도 발생.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스기하라는 더 큰 일본-폴란드 협력 계획의 일환으로 폴란드 정보부와 협력했다.[12]
- 1940년 (쇼와 15년) - 7월, 영사관에 구원을 요청해 온 유대인 피난민 등에게 동정심을 느껴, 본성의 훈령에 반하여 통과 비자를 발급. 1940년 8월 3일에 리투아니아의 친소파 대표단이 모스크바에서 소련 편입을 신청. 같은 날에 소련 최고 회의가 이를 인정하면서 리투아니아는 소련 구성 공화국 중 하나가 됨.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이후 외무성에서 영사관 퇴거 명령. 8월 31일 영사관 폐쇄. 9월 4일, 카우나스 역에서 국제 열차로 퇴거, 베를린 경유로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 총영사관에 부임[74].
- 1941년 (쇼와 16년) - 2월 28일, 독일 영토의 쾨니히스베르크 총영사관 근무를 명받음. 11월,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 공사관 근무 임명, 1등 통역관으로 임명됨[74].
- 1943년 (쇼와 18년) - 3등 서기관에 임명.
- 1944년 (쇼와 19년) - 훈5등 서보장을 수훈.
- 1945년 (쇼와 20년) - 소련군에 의해, 부쿠레슈티 교외의 겐차 수용소에 연행·수감.
- 1946년 (쇼와 21년) - 소련에서 출국 허가가 나와, 부쿠레슈티를 떠나 귀국의 길에 오름.
- 1947년 (쇼와 22년) - 4월, 하카타 경유로 귀국. 6월 7일, 외무성을 의원 퇴직. 같은 해 9월에 외무성의 현역 외교관이나 OB로 구성된 "하세키회"의 회보에, 동성과 관계 있는 재단법인에 재취업한 근황을 기고[180].
- 1981년 (쇼와 56년) - 게르하르트 담프먼의 『고립하는 대국 일본』에 스기하라에 대한 헌사가 게재.
- 1985년 (쇼와 60년) -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일본인으로 처음으로 야드 바솀 상을 수상하고, "열방의 의인"에 칭해짐. 수상 메달에는 탈무드에서 인용된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은 온 세상을 구하는 것과 같다"라는 구절가 새겨져 있었다. 현재도, 예루살렘 교외의 베트 셰메쉬 언덕에는 지우네의 현창비가 세워져 있다.
- 1986년 (쇼와 61년) - 7월 31일, 가마쿠라시 시내 병원에서 서거(86세).
- 1990년 (헤이세이 2년) - 6월 30일, 『6천 명의 생명의 비자』의 초판 간행.
- 1991년 (헤이세이 3년) - 7월 7일, 니혼 TV 계열국, 『알고 있다고?!』가, 스기하라 지우네를 주인공으로 다룸. 9월, 리투아니아 정부의 비타우타스 란즈베르기스 의장은, 스기하라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빌뉴스 (수도)의 거리 하나를 "스기하라 거리"로 명명함.
- 1992년 (헤이세이 4년) - 12월 18일, 스기하라 사치코 부인의 저서에 기초한 『생명의 비자』가, 후지 TV 계열에서 방영. 가토 고와 아키요시 구미코의 연기로, 일본 전역에서 "스기하라 지우네"의 이름이 알려짐.
- 1996년 (헤이세이 8년) - 8월 26일, 주일 폴란드 대사, 헨리크 리프시츠로부터, 사치코 부인에게 폴란드 부흥 훈장 중 "코만도르스키 십자 훈장"(3등)이 수여됨.
- 1997년 (헤이세이 9년) - 영화 『비자와 미덕』(지우네 역은 일본계 미국인 크리스 타시마)이 미국에서 상영되어, 이듬해, 제70회 아카데미상 단편 실사 부문상 수상.
- 1998년 (헤이세이 10년) - 이스라엘을 시작으로, 일본[182](2000년), 감비아, 그레나다령 그레나딘 제도 (2002년), 리투아니아(2004년) 등, 각국 우정성에서 지우네의 기념 우표가 발행됨[183].
- 2000년 (헤이세이 12년) - 스기하라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스기하라의 업적을 기리는 현창 플레이트가 외무성 외교사료관에 설치됨. 현창 플레이트에는 "용기 있는 인도주의적 행위를 한 외교관 스기하라 지우네 씨를 기리며" 등의 문구가 기재되어 있다. 10월 10일의 제막식에는, 이스라엘 및 리투아니아 각 임시 대리 대사, 스기하라 사치코 부인 등이 참석하는 가운데, 당시 고노 요헤이 외무대신이 현창 연설을 하고, 일본 정부에 의한 공식적인 명예 회복이 이루어졌다. 11월 18일, "평화의 종(지우네 차임)"이 지우네의 모교인 나고야시립 헤이와 초등학교에 설치됨. 11월 19일, 캐나다에 거주하는 천문학자 양광우가 새롭게 발견한 소행성을 "스기하라(25893 Sugihara)"라고 명명. 기후현 야오쓰정에 스기하라 지우네 기념관이 설립되었으며, 이후 방문객은 연간 약 2만 명을 기록함[184].
- 2001년 (헤이세이 13년) - 모교인 와세다 대학의 구내에 기념비가 건립됨. 미국에서 스기하라 지우네 기념 "Do the Right Thing"(바른 일을 하자) 에세이 콘테스트 시작. 7월 31일, 도쿄 타워의 밀랍 인형관에 스기하라 지우네상이 설치됨.
- 2002년 (헤이세이 14년) 리투아니아의 작곡가, 요나스 탐리요니스가 위촉한 "Natus in curas"(고난 속의 사자)가, 와세다 글리 클럽의 제50회 정기 연주회에서 다루어짐[185].
- 2005년 (헤이세이 17년) 10월 11일 - 소리마치 타카시와 이이지마 나오코를 주연으로 와타나베 타카오시 감독에 의해 제작된 『일본의 신들러 스기하라 지우네 이야기 6천 명의 생명의 비자』가, "종전 60주년 기념 드라마"로 요미우리 TV 계열에서 방송됨. 미국 TV 방송 Sugihara: Conspiracy of Kindness[186]를 방영.
- 2006년 (헤이세이 18년) - 후쿠이 TV, 『문을 열고 쓰루가에 내려선 유대인의 궤적』을 방영.
- 2007년 (헤이세이 19년) - 5월 26일, 아키히토 천황·미치코 황후 부부가 리투아니아의 스기하라 지우네의 기념비를 방문[187]. 같은 날 빌뉴스 발 공동 통신은, 리투아니아 대통령 발다스 아담쿠스가 환영 오찬회 때, 스기하라 영사 대리가 "양국 사이에 특별한 가교를 만들고", "인도적인 공적으로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다"고 찬사를 보냈다. 10월 10일에, 폴란드 대통령 레흐 카친스키로부터 서훈이 결정됨.
- 2008년 (헤이세이 20년) - 1월 16일, 도쿄도 메구로구에 있는 폴란드 대사관에서 폴란드 대사로부터, 지우네의 손자·지히로(장남・히로키의 아들)에게 폴란드 부흥 훈장 중 "별이 달린 코만도르스키 십자 훈장"(2등)이 수여됨. 이것은 5단계 중 위에서 두 번째 훈장이지만, 가장 위의 훈장이 수여되는 것은 거의 없고, 실질 최고위로 여겨지고 있다. 10월 8일 사치코 부인 서거(94세).
- 2009년 (헤이세이 21년) - 7월, 오리콘의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일본인"의 랭킹에서, 외교관으로서 유일하게 베스트 10에 들었다[188]. 10월 13일, 주시카고 일본 총영사관에서, "스기하라 지우네를 기리는 저녁"을 개최.
- 2010년 (헤이세이 22년) - 5월 5일부터 7월 25일까지, 미국 애틀랜타의 킹 목사 기념관에서, "생명의 비자 유대인들을 구한 외교관"이라는 제목의 전시회가 열림. 5월 28일,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서, 빌기니아 부데네 대통령 수석 보좌관이나 일본 최초의 여성 대사인 아카시 미요코 일본 대사 등 약 20명이 참석하는 가운데, 히로시마시의 폭심지에서 원폭의 열선을 받은 노면 전차의 敷石에 평화를 기원하는 여성상을 새긴 "기도의 돌"이, 스기하라 지우네와 관련된 공원에서 증정됨. 10월 18일, "아이치 트리엔날레 2010"에서, 무용가 스티븐 코헨이 『The Wandering Jew – 스기하라 지우네의 숭고한 기억에 바침』이라는 제목의 퍼포먼스(재일 프랑스 대사관 후원)를 함.
- 2011년 (헤이세이 23년) - 1월 27일, 일독 수교 150주년 기념 행사로, "열방의 의인으로 여겨진 일본의 신들러 스기하라 지우네 부영사"라는 제목의 강연이 파사우에서 열림. 3월, 미국의 유대인 단체인 정통 연합이, 동일본 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 대한 의연금을 모금하면서, "궁지에 처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주의 자비의 업에 따르는 것"이며, "지금이야말로, 직업을 걸고 통과 비자를 발급하여, 리투아니아에서 6,000명이나 되는 유대인을 구했던 스기하라 부부의 은혜에 보답할 때이다"[189]라는 성명. 10월 24일, 지우네의 모교인 와세다 대학에서, 현창비가 건립됨.
- 2012년 (헤이세이 24년) - 2월 27일, 방일한 리투아니아의 큐빌리우스 총리가 노다 요시히코 총리에게 "고 스기하라 씨가 유대인을 도운 것은 리투아니아의 일본 이해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함. 3월 22일, 플로리다주 보카레이턴시에서 지우네의 공적을 기념하는 식전이 거행되어, 뉴욕 총영사관에서 가와무라 야스히사 수석 영사를 비롯하여 약 100명이 참석. 5월 5일, 연 4회 발행하는 계간지로서, 스기하라 지우네 연구회에서 『센포 -- The World of Chiune Sugihara』가 창간됨.
- 2013년 (헤이세이 25년) - 2월 21일, 시라이시 가즈코 주 리투아니아 대사가, 기후 대학에서 "일본과 리투아니아의 관계에 대해"라는 제목의 강연을 함[190]. 3월 9일, "생명의 비자"의 실태 조사를 한 쓰루가의 일본해 지지 조사 연구회(회장: 이노우에 슈)가 "들꽃 문화상"을 받음[191]. 9월 10일, 지우네의 증손녀 스기하라 오리하가, 뮤지컬 "SEMPO"에 출연[192].
- 2015년 (헤이세이 27년) - 12월 5일, 도호 영화 『스기하라 지우네 스기하라 치우네』(지우네 역은 가라사와 토시아키)가 개봉됨[193]. 6월 18일, 기후현 야오쓰정이 스기하라가 쓴 비자 등의 자료를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신청할 것을 발표[194]. 9월 4일, 스기하라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 행사가 카우나스에서 열림[154].
- [195].
- }}.
- [196].
- [197].
- 2015년 (헤이세이 27년) 지우네의 현창 플레이트가 카우나스 시내 호텔 메트로폴리스와 카우나스 철도역에 설치됨[198].. 시라이시는 2015년 현재, 외무성 특명 전권 대사, 여성, 인권 인도 담당 겸 북극 담당. 호텔 메트로폴리스는 스기하라가 영사관을 퇴거한 후 체류하며 비자를 계속 발급했던 기념의 장소. 카우나스 역은 출발하는 기차 창문에서도 마지막 비자를 발급했던 기념의 장소.

- 2016년 (헤이세이 28년) 스기하라 지우네 서거 30주년을 기념하여, 이스라엘의 지중해 연안의 도시 네타냐 시에 스기하라 치우네 거리가 조성됨. 같은 해 6월 7일에 미리암 파이어벨그 (Miriam Feirberg) 시장 주최로 인접한 마이다메 리쿠코 플라네타륨에서 스기하라 지우네 4남의 노부오 에신 부부, 일본에서는 마이다메 부부와 가족을 포함한 40여 명의 친구, 다수의 서바이버 참석자를 맞이하여 이 거리의 명명식과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마이다메 리쿠코 씨 기증의 플라네타륨은 플라네타니아라고 불리며 이스라엘의 어린이도 어른도 대우주를 바라보고 이 지구상의 평화를 생각하게 하는 동 씨의 소망으로 만들어졌다. 스기하라 지우네 거리는 동 씨로부터 네타냐 시에 대한 추천.
- 2016년 (헤이세이 28년) 6월 30일, 스기하라 종언의 땅인 가마쿠라시 의회에서, "인도적인 행위를 다한 스기하라 지우네 씨를 현창하는 것에 관한 결의"가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156][199].
- 2016년 (헤이세이 28년) 7월 13일, 4남 노부오가 에신 부인과 함께 가마쿠라 시청을 방문, 마쓰오 다카시 가마쿠라 시장, 나카자와 가쓰유키 가마쿠라 시의회 의장과 면담. 그 후 가마쿠라 시의회 의사당에서, 나카자와 가쓰유키 의장으로부터 "인도적인 행위를 다한 스기하라 지우네 씨를 현창하는 것에 관한 결의"문을 받았다. "매우 영광입니다. 아버지도 기뻐하고 있습니다"라고 의회에서 감사를 표하고 있다[158].
- 2018년 (헤이세이 30년) 10월 1일, [https://www.sugihara-foundation.org/ 일반 재단 법인 스기하라 지우네 기념 재단] (도쿄도 미나토구, 대표 이사 마쓰모토 요)이 인가됨.
- 2018년 (헤이세이 30년) 10월 12일, 스기하라가 다녔던 당시 나고야의 아이치 제5중학교(현재의 아이치현립 즈이료 고등학교)에, 아이치현에 의한 현창 시설 "스기하라 지우네 광장 센포·스기하라·메모리얼"이 설치되어, 완성 기념식 및 리셉션이 열림.
- 2019년 (헤이세이 31년) 2월 12일, 1985년에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야드 바솀 상"을 수여받아, 베트 셰메쉬 근교에서 행해진 식림과 현창비에 대해, 15년 정도 전에 행해진 택지 조성 공사로 인해, 식림의 일부 벌채와 현창비가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현창비는 현재 소재 불명이라고 보도되었다[200].
- 2019년 (헤이세이 31년) 3월 23일 [http://www.chiune-sugihara.jp/jp/ NPO 스기하라 지우네 생명의 비자], 뮤지컬 SEMPO 주최 [http://sempomuseum.com/ "스기하라 지우네 Sempo Museum"]이 도쿄, 야에스에 개관(2021년 9월 30일, 지구 재개발 사업을 위해 폐관). 이스라엘 대사, 폴란드 대사, 네덜란드 대사, 리투아니아 대사, 미국 수석 공사, 캐나다 수석 공사가 오프닝에 참석. 또한, 캐나다에서 서바이버 유족을 대표하여 불먼가가 참가. 식전은 성대한 것이 되었다. 뮤지엄에는 스기하라 비자를 이야기하는 역사적 자료가 전시되었고, 도쿄에서 처음으로 유대인의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장소로 개관했다. 전시는 첫 공개로 스기하라 지우네 자필 수기, 훈장, 가족의 추억 자료 등도 전시되었으며, 스기하라 리스트 2139명의 이름도 벽면에 가득 붙어 있었다.
- 2019년 (레이와 원년) 5월 3일, 이스라엘에서의 홀로코스트 기념일에 맞춰, 이스라엘 중부의 공립학교에서 스기하라의 공적을 기리는 식전이 열렸고, 새롭게 식림과 기념비의 설치가 이루어졌다[201].
- 2022년 (레이와 4년) 10월 11일, 예루살렘시는, 시 남서부에 있는 광장을 "치우네 스기하라 광장"으로 명명하고, 기념식을 열어 현창했다[202][203].
2. 1. 어린 시절과 교육
1900년 기후현 코우즈찌 도시(미노정(기후)/美濃町(岐阜)일본어)에서 태어났다.[4] 육군에 입대하여 일본 제국 치하의 한국에 주둔하기도 하였다.[28] 출생 등록증에는 출생지가 기후현 미노시의 코즈치 마을로 표시되어 있다.[75][78]아버지 스기하라 요시미는 세무 관료였고,[75][78] 어머니는 스기하라 야츠였다.[4] 가족은 근처 불교 사찰인 교센지의 셋방에서 살았다.[79][80] 1903년 그의 가족은 후쿠이현 니우군의 아사히 촌으로 이사했고, 1904년에는 미에현 욧카이치시로 이사했다. 1905년에는 기후현 에나군의 나카츠가와시로 이사했다.[28] 1906년, 지우네는 나카츠 마을립 초등학교(현재 기후현 나카츠가와시 미나미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1907년에는 미에현의 쿠와나 시립 쿠와나 초등학교(현재 쿠와나 시립 닛신 초등학교)로 전학했고, 같은 해 나고야 시립 후루와타리 초등학교(현재 나고야 시립 헤이와 초등학교)로 전학했다.[28]
1912년, 후루와타리 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아이치 현립 제5 중학교(현재 주이료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의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지우네는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여 영어를 전공했다.[28] 1918년 와세다 대학 고등사범부 영어과예과에 입학했다. 그는 침례교 목사 해리 벅스터 베닝호프가 설립한 기독교 교우회인 유아이 각샤에 입학하여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려 했다.[28]
1919년, 외무성 장학 시험에 합격했다. 1920년부터 1922년까지 스기하라는 일본 제국 육군에서 소위로 제79보병 연대에서 복무했다. 1922년 11월에 임관을 사임하고 이듬해 외무성의 언어 자격 시험을 치러 러시아어 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일본 외무성은 그를 채용하여 중국 만주의 하얼빈으로 배치했고, 그곳에서 러시아어와 독일어를 공부했으며 나중에 러시아 문제 전문가가 되었다.[28]
2. 2. 외교관 경력
1900년 기후현 코우즈찌 도시(美濃町(岐阜)일본어)에서 태어났다. 구 아이치현립 제5중학교(현 아이치현립 즈이료고교)를 졸업한 뒤, 1918년 와세다 대학 고등사범부 영어과예과에 입학했다. 이듬해인 1919년에는 대학교를 중퇴하고, 외무성의 관비 유학생으로서 중국 하얼빈에 파견되어 러시아어를 배웠다.[86] 1920년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 제국 육군에 입대했다(지원병). 1924년에는 외무성 서기생으로 채용되어 정식 외교관이 된다.1924년에 중국의 하얼빈에서 스기하라는 소련 여성인 클라브디아 세묘노브나 아폴로노바와 결혼했으나 1935년에 이혼했다. 이 때 스기하라는 정교회의 신자가 되었다.[5] 1932년에서 1935년 사이에 괴뢰 만주국에서 보낸 외교관 시절에는 소련과 북만주 철도를 둘러싼 교섭을 러시아 외교의 전문가로서 담당했다.[88] 1934년 스기하라는 일본의 중국인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여 만주국 부외무대신직을 사임했다.[7]
1935년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에 아내와 이혼했으며, 일본에서 유키코([8])와 결혼했다.[9][10] 스기하라 지우네는 또한 외무성 정보부에서 근무했으며 핀란드 헬싱키에서 일본 대표단의 통역관으로도 활동했다.[31]
1939년, 스기하라는 리투아니아의 임시 수도인 카우나스에 있는 일본 영사관의 부영사가 되었다. 그의 임무에는 소련군과 독일군의 움직임 보고,[28] 독일이 소련 공격을 계획하는지, 계획한다면 그 세부 사항을 베를린과 도쿄의 상사에게 보고하는 것이 포함되었다.[11]
스기하라는 더 큰 일본-폴란드 협력 계획의 일환으로 폴란드 정보부와 협력했다.[12]
1940년 8월 29일 카우나스 일본 영사관 폐쇄일이 다가오면서, 업무 효율성을 위해 지우네는 중간부터 기록하는 것을 중단했고, 규정 수수료를 징수하는 것도 중단했다. 같은 해 9월 5일 스기하라는 카우나스역에서 독일행 국제선 열차로 피난했고, 이후 1941년 2월에 독일 근무가 될 때까지 체코 프라하 영사관에서 근무했다[74]。
1941년에 들어서면서 독소전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독일과 소련으로 분할된 동유럽 유대인들의 운명은 더욱 가혹해졌다. 독소전이 시작되자, 발터 슈탈레커친위대 소장가 이끄는 아인자츠그루페 A는 북방 집단군을 따라 이동하였고, 리가 (라트비아)·탈린 (에스토니아)·프스코프와 레닌그라드 (둘 다 소련)로 향하는 중계지인 카우나스에 먼저 몰려들었기 때문에, 지우네의 부임지였던 카우나스에 있어서의 유대인 사회는 특히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1941년(쇼와 16년) 8월 7일, 독일 국가보안본부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외무대신 리벤트로프에게 "독일 제국 내 일본인 스파이에 관하여"라는 보고서를 제출했고, 그곳에는 독일의 "군사 정보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며 "일본 영사 스기하라"의 이름이 맨 앞에 언급되어 "폴란드 및 영국에 친한 인물"[105]로 지목되어 비난받았다.
카우나스 영사관이 폐쇄된 후 지우네는 1940년(쇼와 15년), 당시 독일의 보호령이었던 체코의 프라하 일본 총영사관에서 근무했다. 1941년(쇼와 16년)에는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 총영사관으로 부임하여, 폴란드 첩보 기관의 협력을 얻어 독소 개전 정보를 입수, 5월 9일 발신 전보로 본국에 상세히 보고했다. 같은 해 11월부터 1946년(쇼와 21년)까지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 공사관과 핀란드 등 유럽 각지의 우호국을 전전하며 여러 직책을 역임했다. 지우네가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 공사관에 근무하던 시대에는 철위대의 선동으로 루마니아 유대인의 역사상 특히 잔혹한 포그롬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2. 3. 유대인 난민 구출
1940년 여름, 나치 점령 하의 폴란드에서 탄압을 피해 리투아니아로 도망쳐온 많은 유대인들이 각국 영사관 및 대사관으로부터 비자를 얻고자 했다.[98] 그러나 소련이 리투아니아를 병합하고[99] 리투아니아에 있던 여러 나라들의 영사관과 대사관의 폐쇄를 요구했기 때문에, 유대인 난민들은 아직 업무 중이던 일본 대사관에 통과 비자를 얻기 위해 몰려들었다.당시 일본 정부는 유대인에 대한 중립 정책이 공식 입장이었으나, 통과 비자 발급은 충분한 여비를 갖추고 규정을 충족할 것 등의 자세한 조건이 많았다. 일본 외무성은 표면적으로 유대인 난민을 다른 난민과 공평하게 다루기 위한 중립적 정책이라고 하였으나, 비자 발급 자격 조건을 다른 난민에 비해 까다롭게 함으로써 사실상 유대인들에 대한 비자 발급을 제한한 것이었다.
유대인 난민 대부분은 자격 미달 상태였기 때문에 스기하라가 본국 외무성에 문의하였으나, 비자 발급은 허가되지 않았다. 일본 정부의 이런 지시에 반하여 1940년 7월 말, 지우네는 일본 통과 비자를 자격 조건 미달의 유대인에게도 제한 없이 발급하기로 결단하였다.
소련 정부와 본국 일본에서 거듭된 퇴거 명령을 받으면서도 스기하라 부부는 베를린으로 옮겨가는 9월 초까지 약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비자를 계속 발급한 것으로 보인다. 그 기간 동안 발행된 비자 수는 번호를 붙여 기록에 남은 것만 해도 2,139장에 이르며, 도중에 기록을 그만두었으므로 실제 발행된 비자와 도항 증명서는 그 밖에도 수천 장에 이를 것이라 보기도 한다.[104] 또 가족 가운데 1장의 비자만 있어도 가족이 모두 건너갈 수 있었으므로, 이런 점을 감안하여 스기하라의 도움으로 국외 탈출한 유대인 수를 약 6,000명으로 추산하기도 한다.
탈출에 성공한 유대인은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일본 쓰루가(敦賀)에 상륙하여 유대계 러시아인의 공동체가 있었던 고베에 다다랐다.[114] 그들 가운데 1,000명 정도는 미국과 팔레스타인으로 떠났고, 나머지 사람들은 뒤에 상하이로 송환될 때까지 일본에 남아 있었다. 상하이에도 유대 난민 공동체가 있어서, 그곳에서 유대인들은 일본이 항복하는 1945년까지 지내게 되었다.
한편 그들이 떠나왔던 리투아니아는 독소전쟁이 발발한 1941년에 나치 독일의 맹공격을 받아 소련군이 물러났으며 이후 1944년 여름에 소련군이 다시 이곳을 탈환할 때까지 나치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그 기간 동안 리투아니아에서 희생된 유대인은 약 20만 명을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102]
1939년, 스기하라는 리투아니아의 임시 수도인 카우나스에 있는 일본 영사관의 부영사가 되었다. 그의 임무에는 소련군과 독일군의 움직임 보고,[28] 독일이 소련 공격을 계획하는지, 계획한다면 그 세부 사항을 베를린과 도쿄의 상사에게 보고하는 것이 포함되었다.[11]
스기하라는 더 큰 일본-폴란드 협력 계획의 일환으로 폴란드 정보부와 협력했다.[12]
1940년, 소련이 리투아니아를 점령하자 많은 유대인 난민들이 폴란드 출신 (폴란드계 유대인)은 물론 리투아니아계 유대인들 또한 출국 비자를 얻으려고 했다. 비자가 없으면 여행이 위험했지만, 비자를 발급해 줄 의향이 있는 국가를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시 전쟁 직전 리투아니아 유대인들은 리투아니아 도시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했고, 모든 도시 주민의 절반을 차지했다.[15]
스기하라는 세 차례에 걸쳐 충실하게 일본 외무성에 지시를 요청했다. 매번 외무성은 예외 없이 일본을 떠나기 위해 제3국으로 가는 비자를 소지해야 비자를 발급할 수 있다고 답했다.[28]
신청자들이 뒤에 남겨지면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스기하라는 지시를 무시하기로 결정하고 1940년 7월 18일부터 8월 28일까지 일본을 경유하는 유대인에게 10일짜리 비자를 발급했다. 그는 소련 관리들과 대화하여 유대인들이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통해 그 나라를 여행할 수 있도록 합의를 얻어냈고, 이는 일반 요금의 5배에 달했다.

스기하라는 비자를 계속 손으로 작성했으며, 보고에 따르면 하루에 18~20시간을 들여, 한 달 치의 비자를 매일 생산했다고 한다. 9월 4일 영사관이 폐쇄되기 전에 직무를 떠나야 할 때까지 그랬다. 증언에 따르면, 그는 호텔에서 이동하는 동안과 카우나스 기차역에서 기차를 탈 때까지 비자를 계속 작성했으며, 기차가 출발할 때 절망에 빠진 난민의 무리에게 기차 창밖으로 비자를 던져주었다고 한다.

마지막 절망 속에서 영사관 인장과 그의 서명(나중에 비자로 작성될 수 있는)만 있는 백지가 급하게 준비되어 기차에서 던져졌다. 떠날 준비를 하면서 그는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더 이상 쓸 수 없습니다. 행운을 빕니다."라고 말했다. 그 앞에서 깊이 고개를 숙이자 누군가 "스기하라! 우리는 당신을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 다시 만날 것입니다!"라고 외쳤다.[31]
2. 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69년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았고, 1985년에는 야드바셈상을 수상하며 "열방의 의인"으로 기려졌다. 현재 예루살렘 언덕에는 그 당시의 표창비가 세워져 있다.[46] 일본 외무성의 외무자료관에는 "용기있는 인도적 행위를 실행한 외교관 스기하라 지우네 씨를 기리며"라고 기록된 스기하라의 표창비가 있으며, 2000년 10월 10일 제막식에는 이스라엘 및 리투아니아 임시 대리 대사, 당시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외상, 스즈키 무네오, 스기하라 유키코 부인 등이 참석했다. 기타 국가에서도 오스카 쉰들러에 비해 지명도는 낮지만, 의인으로서 일정한 평가를 받고 있다.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로 전근[42]된 후, 1941년 3월부터 1942년 말까지 독일 점령 하의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프라하에서 총영사, 1942년부터 1944년까지 루마니아 왕국 부쿠레슈티 주재 일본 공사관에서 근무했다. 1943년에 3등 서기관으로 승진, 1944년에는 서보장 5급 훈장을 받았다. 소련군이 루마니아에 진입했을 때, 스기하라와 그의 가족을 18개월 동안 포로 수용소에 감금했다. 1946년 석방되어 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나홋카 항을 통해 소련을 경유하여 일본으로 귀국했다. 1947년, 일본 외무성은 인원 감축을 이유로 사임을 요청했다. 스기하라 유키코를 포함한 일부 출처에 따르면, 외무성은 스기하라에게 리투아니아에서의 "그 사건" 때문에 해고되었다고 말했다.[42][45]
가나가와현 후지사와시에 정착한 스기하라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전구를 팔거나, 수출 회사에서 주한 미군 부대 매점 총괄 관리자로 일했다. 그는 러시아어 구사 능력을 활용하여 16년 동안 소련에서 조용히 일하며 살았고, 가족은 일본에 머물렀다.
1968년, 스기하라의 은혜를 입은 예호슈아 니시리가 그를 찾아 연락했다. 1969년 스기하라는 이스라엘을 방문, 이스라엘 정부의 환영을 받았다. 스기하라를 도운 사람들은 야드 바셈에서 그를 인정해 줄 것을 로비했다. 1984년, 야드 바셈은 그를 열방의 의인으로 인정했다.[46] 스기하라는 건강이 좋지 않아 아내와 막내 아들 노부키가 대신 영예를 받았다.
1985년, 소련의 리투아니아 침공 45년 후, 그는 유대인들에게 비자를 발급한 이유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스기하라는 난민들은 인간이며, 그저 도움이 필요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47] 1940년 스기하라로부터 비자를 받은 모셰 주프닉이[48]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경력을 걸었던 이유를 묻자, 그는 "저는 단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은 나가고 싶어했고, 그래서 저는 그들에게 비자를 주었습니다."라고 답했다.
스기하라 지우네는 1986년 7월 31일 가마쿠라시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이스라엘과 다른 국가에서 그에 대한 홍보가 있었음에도 그는 조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전 세계에서 온 유대인 대표단, 심지어 주일 이스라엘 대사까지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에야 그의 이웃들은 그가 한 일을 알게 되었다.[45]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부쿠레슈티의 일본 공사관에서 스기하라 가족은 소련군에 신병이 구속되었다. 1946년 11월 16일에는 방문한 소련군 장교로부터 귀국을 위해 즉시 출발하라는 통보를 받았고, 오데사, 모스크바, 나홋카,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치는 혹한의 여정을 거쳐 이듬해 1947년 4월 5일 "혜산환"으로 하카타항에 입항했다. {{Sfn|전보 제100호
후쿠오카 발 쇼와 22년 4월 7일 09:30 발
소네 사무국장
본성 착 4월 8일 14:20 분 착
요시다 총재
(루마니아 쓰쓰이 공사 일행 하카타 입항의 건) 귀전합 제184호에 관해
"혜산환 방인 76명 승선 5일 입항함
一、(생략)
二、쓰쓰이 공사 일행 시마누키, 스기하라, 나카무라, 코누마, 신무라, 니와타 및 가족 총 17명은 건강하며 시베리아・블라디를 경유한 것으로 7일 상륙 9일경 현지 출발 예정(자세한 사항은 우편으로 보고)||p=}}
일본 귀국 후, 가족은 가나가와현후지사와시・구게누마 마쓰가오카에 정착했다. 그곳은 히로타 코키 전 총리가 전쟁 중에 살았던 추억의 장소였다. 지우네는 장남에게 히로키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로 히로타를 존경했다。1946년 6월 7일, 오카자키 가쓰오・외무 차관으로부터 퇴직 통보서가 전달되었다. 구게누마에서 잡화상을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했다[137]。
외무성 퇴직 후 얼마 동안은 삼남을 백혈병으로 잃고, 의붓 여동생도 사망하는 등 가족의 불행을 겪었지만, 넷째 아들 노부오가 태어나는 등 다행스러운 일도 있었다. 그 후, 연합국 군의 도쿄 PX 일본 총지배인, 미국 무역 상회, 니콜라이 학원 강사 등 직업을 전전했다[138]。
1947년 9월에는 외무성의 현역 및 OB로 구성된 가스미가세키회의 회보에, 외무성 관계 재단법인에 재취업한 근황을 기고했다[180]。
1948년에는 참의원 사무국에 이력서를 제출하여 채용되었으며[180], 1949년 2~10월에는 참의원 자료과 주사를 역임했다[138]。러시아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1960년에 가와카미 무역의 모스크바 주재원이 되었다. 그리고 1969년에는 전문 상사 조리에 근무, 1971년부터는 조리의 국제 무역 모스크바 사무소장 등을 역임했다.
'''재일 이스라엘 대사관과의 교류 후'''
1968년 여름, "스기하라 비자" 수혜자 중 한 명으로, 신생 이스라엘의 참사관이 된 니슈리(Yehoshua Nishri)와 이스라엘 대사관에서 재회했다. 니슈리가 Sugihara라는 이름을 외무성에 조회했으나 "해당자 없음"이었지만, 지우네가 이전에 이스라엘 대사관에 직장을 찾기 위해 자신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려주었기 때문에 지우네를 찾아낼 수 있었다。
1969년 12월, 이스라엘의 종교 장관이 된 조라프 바르하프티크와 예루살렘에서 재회했다. 이때 처음으로, 본부와의 전신 연락이 밝혀졌고, 실직 각오로 지우네의 독단적인 비자 발급을 알게 된 바르하프티크가 경악했다.
이후 인터뷰에서 바르하프티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Quotation|
실제로는 일본 정부의 허가 없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된 것은 1969년, 스기하라 씨와 이스라엘에서 재회했을 때입니다. ... 스기하라 씨의 면직은 의문입니다. 일본 정부가 훌륭한 분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에 의문을 느낍니다. 상을 주지 않은 것은 이상합니다. 표창하지 않은 것은 유감입니다. ...|1998년 5월 25일 예루살렘 교외에서의 인터뷰
}}
1978년에 국제 무역 모스크바 지점을 퇴직하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1980년,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니시가마쿠라로 이주했다.
"스기하라는 유대인에게 돈을 받고 했다, 돈 문제로 곤란하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악의에 찬 중상에서, 니슈리에 의한 지우네 이름 조회 시의 융통성 없는 대응까지, 구 외무성 관계자들의 지우네에 대한 적대감과 냉담함은 2000년 고노 요헤이 외무 장관에 의한 명예 회복이 이루어질 때까지 일관되었다.
1983년 9월 29일, 후지 TV가 심야 방송으로 "운명을 나눈 1장의 비자 - 4,500명의 유대인을 구한 일본인"을 방영했다. 지우네 본인도 고령임에도 출연하여, 리포터 기모토 교코의 인터뷰에 응하는 등 했다[139]。
1985년 1월 18일,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이자 유일하게 "열방의 의인"으로서 "야드 바셈 상"을 수상했다. 지우네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찬사와 함께, 정부의 훈령에 반한 것에 대해 "국적이다, 용서하지 않겠다" 등의 중상적인 편지도 보내졌다。
'''죽음과 그 후'''
같은 해 11월, 예루살렘의 언덕에서 기념 식수제와 현창비 제막식이 거행되었지만, 심장병과 고령으로 인해 지우네의 해외 여행을 허락하지 않아, 지우네 대신 넷째 아들 노부키가 참석했다. 1986년 7월 31일, 입원 중이던 가마쿠라 시내의 병원에서 사망(향년 86세).
지우네의 죽음을 알자, 주일본 이스라엘 대사인 야코브 코헨이 달려왔고, 장례식에는, 과거의 닛소 협회 학교(후의 루빈 학원의) 제자나 모스크바 주재원 시절의 동료 등, 생전의 지우네를 아는 300여 명이 참석했다。
일본국 정부에 의한 공식적인 명예 회복이 이루어진 것은, 2000년 10월 10일이 되어서였다。
{{Quotation|
지금까지 외무성과 고 스기하라 씨의 유족 여러분과의 사이에, 여러 가지 무례한 점이 있었던 점, 명예에 관한 의사 소통이 부족했던 점을, 외무대신으로서, 이 기회에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 고 스기하라 씨는 ... 인도적이고 용기 있는 판단을 함으로써, 인도적 고려의 중요성을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이러한 훌륭한 선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2000년 10월 10일 외무대신 고노 요헤이에 의한 연설
}}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하여, 지진과 쓰나미로 인한 막대한 피해가 세계에 보도되자, 내외 유대인 사회로부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대 난민 구제에 헌신했던, 스기하라의 업적을 상기해야 한다는 호소가 있었다。
3월 21일, 이스라엘의 유력 신문 '예루살렘 포스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주 리투아니아 일본 공사, 치우네 스기하라가, 훈령에 반하여 비자를 발급하여, 6,000명의 유대인을 구했다"는 점에 주의를 환기하며, "재일 유대인 공동체가 협력하여, 모든 것을 잃고 궁핍한 사람들의 구제를 시작했고, 재경 유대인들은 모금을 위한 계좌를 개설했다"[143]고 보도했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위한 의연금을 모금하는 데 있어, 미국의 유대인 단체인 정통 연합은, 회장 심카 카츠 박사와 부회장 스티븐 베일 목사 명의로, 다음과 같은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189]。
{{Quotation|
궁핍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주의 자비의 업에 따르는 것입니다. 1940년, 스기하라 영사 부부는 직무를 걸고 통과 비자를 발급하여, 6,000명의 유대인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그 은혜에 보답할 때입니다. |동일본 대지진에 대한 의연금을 모금할 때 미국의 유대인 단체 정통 연합의 공식 성명
}}
6월 23일, 로스앤젤레스의 스카이볼 문화 센터에서 배우 와타나베 켄이, 메시지 "일본을 위한 단결"을 낭독한 후, 지우네를 그린 미국 영화 "Sugihara:Conspiracy of Kindness"가 상영되었고, 수익금 전액이 "일본 지진 구제 기금"에 기부되었다[144]。
1946년부터 외무성뿐만 아니라 행정 조직 전체에 걸쳐 실시된 "행정 정리 임시 직원령(쇼와 21년 칙령 제40호)"에 따른 기구 축소에 의한 구조조정의 일환(당시 외무성 직원의 3분의 1이 퇴직)으로, 지우네 본인이 스스로 사직한 것이다.[180] 리투아니아에서의 생명 비자 발급 후, 피난 명령으로 인해 다른 나라의 영사관으로 전속되었다. 최종적으로는 1945년(쇼와 20년)의 소련에 의한 1945년부터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 수용소 수용, 그리고 1947년 송환까지, 체코슬로바키아의 주프라하 총영사관 총영사 대리(1940년-1941년 2월 28일)나 독일의 주쾨니히스베르크 총영사관 총영사 대리(1941년 2월 28일-11월), 루마니아의 주부쿠레슈티 일본 공사관 1등 통역관(1941년 11월-1945년 소련에 의한 포로 수용소 수감까지)을 역임[70]했고, 7년 동안 외무성에서 근무하는 동안 승급과 승진을 거듭하여, 1944년(쇼와 19년)에는 훈5등 서보장을 수여받았으며, 퇴직금과 연금도 지급받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스기하라에게 불명예스러운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부의 공식 견해이다. 스기하라는 1947년 9월, 외무성의 현역 및 OB로 구성된 "하세키 회"의 회보에, 외무성과 관계 있는 재단법인에 재취업한 자신의 근황을 기고했다. 1948년, 스기하라가 참의원 사무국에 취업 활동을 할 때 제출한 이력서도 발견되었다. 외무성을 그만둔 것은 의원 면직이었으며, 1947년 귀국 전부터 GHQ에 의한 인원 정리("행정 정리 임시 직원령(쇼와 21년 칙령 제40호)")의 대상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80]
3. 일본 정부의 대응과 논란
치우네의 유대인 비자 발급에 대해 일본 정부의 태도는 여러 견해가 엇갈린다.
1946년부터 1947년까지 미국 통치하의 일본에서 행정 정비 및 임시 직원령에 근거한 국가 기구 축소(약 700명이 축소로 인한 퇴직)의 결과, 스기하라를 포함한 당시 외무성도 직원의 3분의 1이 의원 퇴직했다. 또한 1944년이라는 종전 전 근무 중에 "훈5등 서보장"을 수훈했고, 비자 발급 활동에서부터 전후의 인원 정리로 인한 퇴직에 이르기까지 승급·승진도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스기하라는 외무성에 입성했지만, 처음에는 통역관이라는 속관이라는 비(non) 커리어 그룹이었다. 실제로 스기하라는 생명의 비자를 발급했던 리투아니아의 카우나스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로 전속, 최종적으로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로 전근하여 1943년 재 루마니아 공사관에서 근무 중, 빈 조약에 의해 "외교관" 신분인 3등 서기관으로 승진했다. 그 전까지는 영사관원이라는 비외교관의 입장이었다. 또한 규정 위반 대상에 대한 발급 행위에 대한 주의는 있었지만, 견책을 포함한 처분은 없었다. 그 때문에 다른 퇴직금·연금에 대해서도 감액 등은 받지 않았다. 당시 외무차관이었던 오카자키 가쓰오로부터 그동안의 근무에 감사하는 친필의 사신과 특별히 금일봉을 받았다. 라비(유대교 랍비)인 마빈 토카이어는 스기하라가 비자 발급으로 처분을 받았다면, 서훈(1944년)을 받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고 하며, 전후의 의원 퇴직에 대해서도 당시 일본 정부는 미국 점령군의 아래에서 일체의 외교 기능을 빼앗긴 시기였으며, "외무성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꾸며낸 이야기"라고 말했다. 그리고 스기하라가 일본에서도 "유대인을 구한 인도주의자"라고 찬미받고 있다면, 대일본 제국 육군 군인이자, 전전에 수많은 유대인을 구한 히구치 기이치로나 야스에 노리히로를 똑같이 칭찬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빈은 "나는 히구치나 야스에도 (일본 국내에서) 똑같이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146]。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지우네(千畝)라는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워했기 때문에, 지우네는 부르기 쉽도록 이름을 음독하여 '센포'라고 칭했다. 그래서 리투아니아에서는 '센포 스기하라'라는 이름이 정착되었다. 종전 후,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센포 스기하라'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어 일본 외무성에 문의했지만, 본명이 아니었기 때문에 외무성은 그런 외교관은 없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종전 후, 지우네의 소식을 묻는 유대인 협회의 문의에 대해, 외무성은 구 외무성 관계자 명부에 스기하라 씨 성을 가진 사람은 세 명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외무성에는 SEMPO SUGIHARA라는 외교관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또한 가족 외에 '카우나스 사건'에 입회한 유일한 증인인 니이세키 킨야는 지우네의 사망 다음 해인 1987년, "NHK의 텔레비전 칼럼에서, '내가 본 베를린의 마지막'이라는 이야기"를 했고, 회상록 『제2차 세계 대전 하 베를린 최후의 날』(1988)을 간행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리투아니아 영사관의 스기하라 지우네를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공사관에 유대인 난민이 쇄도하는 전대미문의 외교 사건에 한 줄도 언급하지 않았다.
니이세키는,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함락된 베를린에 거주하던 백 수십 명의 일본인과 함께 만주 경유로 귀국한다. 만주에서는 짐 인수를 위한 교섭을 위해 2주간 만저우리에 체류했고, 이때 니이세키에게 협력한 사람이 사토 데쓰마쓰·하얼빈 부영사이다. 사토는, 유럽 시대에는 쾨니히스베르크에 재직했고, 스기하라를 보좌했던 인물로서, 지우네의 러시아어 서한 (바르샤바 군사 박물관 소장)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또한 지우네 퇴직 시 외무성 측에서 "스기하라는 유대인에게 돈을 받아서 한 것이니, 돈에는 곤란하지 않을 것이다" 등 근거 없는 소문이 돌았을 때에도, 니이세키는 그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역사학자 스기하라 세이시로는, "이 인물은 몰려드는 유대인 난민을 헤치고 영사관에 들어가, 그리고 영사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고 했으니, "이 소문이 근거 없는 것이라는 것을, 니이세키 킨야는 맨 먼저 증언해야 할 도의적 입장에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종전 후, 외무성의 소노 아키라가 "모든 저항을 배제하고, 소련 관계 직원의 확보에 필사적으로 노력했다"고 하는 바로 그 시기에 의원 퇴직을 요구받은 스기하라 지우네는, 26세 때 『소비에트 연방 국민 경제 대관』을 외무성에서 간행하여 러시아 문제의 전문가로 두각을 나타내고, 북만주 철도 매수 교섭을 성공시키는 등, 성내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외무성 최고의 러시아통"으로 여겨졌기에, 지우네의 배제를 "종전 후의 인원 정리"로 돌리는 정부 견해에 대해 의문을 품는 연구자는 적지 않았다.
토시카와 타카오는, 일본 외무성 내에는 혈연 관계자가 많고, 입성 시의 어학 연수에 근거한 파벌이 성내 인사나 외교 정책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하며, 외무성 인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다카하시 타모츠의 유럽 체류 일기에, "스기하라 지우네 씨의 집에 초대받아, 식사를 함께 한다. 거기에 고노스 서기관생, 가메이 터키 상무관, 다나카 서기관생 등이 온다. 매우 재미있지만, 여러 가지 외무성의 결점, 인사 등 예의 이야기한다"라고 적혀 있으며, 스기하라 수기에 "만사가 공부 부족으로 유명한 외무성"라고 언급된 것처럼, 지우네 자신도 실제 능력이나 업적보다 혈연 관계나 학벌이 우선시되는 외무성의 인사 시스템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외무성 퇴직 (해고) 후, 예전 외무성의 동료들이 "스기하라는 유대인에게 돈을 받아서 한 것이니, 돈에는 곤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소문내는 것을 알게 되자, 평소 온화한 스기하라는 진심으로 화를 냈고, 이후, 스기하라는 외무성 관계자와 절연했다.
스기하라는, 대공사로 가는 길을 여는 문관 고등 시험 (커리어 채용 시험)의 응시를 위해, "아이 교육 관계상"이라는 구실로 반복해서 귀국원을 신청했지만, 외무대신으로부터 "1등 통역관 스기하라 지우네, 휴가 귀국 허가"라고 된 것은, 미드웨이 해전의 반년 후인 1942년 12월 2일이 되어서였고, 추축국 측의 패색이 짙은 유럽으로부터의 귀국이 실현되지 않은 채, 패전을 맞이했다.
지우네 자신은, 카우나스 사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본 건에 대해, 내가 오늘까지 그다지 말하지 않는 것은, 카우나스에서의 비자 발급이, 박애 인도 정신에서 결행한 것이었어도, 폭도에 가까운 대군중의 청을 용납함과 동시에 그것은, 본성 훈령의 무시였고, 따라서 종전 후의 철수 (쇼와 22년 4월의 일), 귀국과 동시에, 이 점 때문에 47세에 의원 면관이 되었다는 기억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도쿄 대학 이학부를 졸업하고 미쓰이 물산에 근무했던 후루사키 히로시는 1940년, 중요한 군수 물자였던 수은 조달에 대한 상담을 위해 다롄 특무 기관장 야스에 노리히로 대좌를 방문했을 때 "리투아니아에 있던 일본 영사가 외무성의 반대를 무릅쓰고 만주로 도망쳐 오는 천 명 가까운 유대인에게 사증을 발급하여 구출한 적이 있다. 이 영사는 외무성으로부터 질책을 받고 본국 소환된 것 같다" [173]고 야스에가 말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1940년의 이 면담 날짜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난민들이 카우나스 영사관에 몰려든 7월부터 야스에가 아직 예비역으로 편입되기 전인 9월 사이임은 틀림없다. "본국 소환" 등은 사실과 다르지만, "카우나스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외무성 내에서 문제시되었던 지우네에 관련된 사건이 재유럽 무관부에서 도쿄의 육군 중앙까지 전해졌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사카이야 다이치, 가토 히로시, 와타나베 쇼이치 등의 대담에 따르면, 지우네의 의원 퇴직과 관련하여, 전후 일본의 성청 기능을 재건할 때 외무성 관계자들 사이에서 "카우나스 사건"에서의 불복종이 문제가 되어, 종전 연락 중앙 사무국 연락관 겸 관리국 제2부 제1과에서 지우네의 해고가 진언된 것은 사실이라고 주장했다[174]。
와타나베 쇼이치가 자신의 저서에서 "스기하라는 본성의 명령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해고되는 것이 당연하다. 해고한 것은 나다"라고 증언했다고 하는 소노 아키라에 대해, 가토 히로시가 그 내용을 조회한 결과, "일본국을 대표하지도 않는 일개 관리가 이토록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언어도단이며, 절대 조직으로서 용납할 수 없다"라고 소노가 말했다고 한다. 이 소노 아키라와 소노에게 발탁된 도쿠라 에이지, 그리고 앞서 언급한 신세키 킨야야말로 지우네 없는 외무성에서 전후 대소 외교를 주도한 캐리어 관료 3인이었다.
정치학자 고무로 나오키는 "이것은 인도적인 입장에서 불가피한 훈령 위반이며, 실책이 아니다. 스기하라 지우네 전 영사는 전후 즉시 외무성으로 불러들였어야 했다. 일본 외무성은 일본의 외교적 입지를 훨씬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라고 일본 정부가 스기하라를 실질적으로 면직시킨 것을 비판하고 있다.
1991년 (헤이세이 3년) 10월에는 소련의 붕괴를 겪은 리투아니아와의 국교 수립에 맞춰 당시 스즈키 무네오・외무정무차관이 사치코 부인을 초청하여 "스기하라 부영사의 인도적이고 용기 있는 판단을 높이 평가하며, 스기하라 부영사의 행동을 일본인으로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고, 반세기 동안 외무성과 스기하라 부영사 가족 간의 의사 소통이 부족했던 무례함을 사과했다. 이 명예 회복에 즈음하여 스즈키 정무차관은 당시 사토 요시유키외무성 대신관방 장관으로부터 지우네의 퇴관은 "일본의 항복에 따른 외무성의 대규모 구조 조정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징계 처분이 아니므로 명예 회복의 필요성도 없고, 오히려 이 문제는 언급하지 않는 것이 득책이다"라는 취지의 설명을 들었지만, 그럼에도 명예 회복의 필요성을 설파하여 최종적으로 사토 관방장관으로부터 스즈키 정무차관에게 일임한다는 승인을 받았다고 증언했다[175]。 또한, 2006년 3월 24일 고이즈미 준이치로내각총리대신의 답변서 (내각 질의 164 제155호)에서도 외무성에는 징계 처분의 증거 문서가 없다고 되어 있다[176]。
그러나 당시 외무성 주 모스크바 대사관에 재직했던 사토 마사루는 이후 출간한 『국가의 함정』에서, 그 명예 회복조차 "당시 외무성 간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루어진 것이었다"고 하며, 지우네의 불복종에 대한 외무성 관계자들의 집요한 적의가 존재했음을 증언하고 있다.
"외무성이 사과할 필요는 없다며, 회담 자체에 반대했다"는 등 『아사히 신문』 (1994년 10월 13일자)에서 보도되었고, 스기하라의 명예 회복에 반대했다고 일부 언론에서 보도된 당시 외무사무차관 오와다 히사시 (전 유엔 대사)는 "그런 보도는 유감입니다. 저는 반대했다는 기억이 없고, 제 생각으로는 반대할 리가 없다"고 말했으며, 자신이 스기하라 영사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했을지에 대한 『AERA』 (2000년 11월 13일자)의 취재에 대해, "조직의 일원으로서 훈령을 따를지 따르지 않을지는, 최종적으로 그 사람이 양심에 비추어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답하며, 지우네의 행위에 대해 일정 부분 이해를 표했다.
1992년 (헤이세이 4년) 3월 11일 제123회 국회중의원예산위원회 제2분과회에서 쿠사카와 쇼조 의원의 질문에 대해 효도 나가오・외무성구주국장은 "확실히 훈령 위반, 당시의 복무 명령의 차원에서 생각하면 그랬지만, 그러나 더 큰 차원에서 생각하면, (...) 수천 명의 인명을 구할지 여부라는, 더 큰 문제가 거기에 관련되어 있었고, 결과적으로 보면 우리도 이 이야기는 미담이었다고 지금 생각합니다"라고, 분명히 "훈령 위반"이기는 하지만, "수천 명의 인명을 구할지 여부라는, 더 큰 문제"[177]가 있었다며, 긴박한 상황에서의 스기하라 영사의 판단을 지지했다.
2000년 (헤이세이 12년), 당시 고노 요헤이・외무대신의 현창 연설을 통해 일본국 정부에 의한 공식 명예 회복이 이루어졌다[178]。 그것은 지우네의 사망 14주년, 그리고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2019년 10월 21일에 "스기하라 지우네 기념 재단"이 스기하라가 참의원에 제출한 이력서와 인사 기록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력서에 따르면, 외무성 퇴직은 본인 의원 퇴직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138][179]。
1946년(쇼와 21년)부터 외무성뿐만 아니라 행정 조직 전체에 걸쳐 실시된 "행정 정리 임시 직원령(쇼와 21년 칙령 제40호)"에 따른 기구 축소에 의한 구조조정의 일환(당시 외무성 직원의 3분의 1이 퇴직)으로, 지우네 본인이 스스로 사직한 것이다.[180] 리투아니아에서의 생명 비자 발급 후, 피난 명령으로 인해 다른 나라의 영사관으로 전속되었다. 최종적으로는 1945년(쇼와 20년)의 소련에 의한 1945년부터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 수용소 수용, 그리고 1947년 송환까지, 체코슬로바키아의 주프라하 총영사관 총영사 대리(1940년-1941년 2월 28일)나 독일의 주쾨니히스베르크 총영사관 총영사 대리(1941년 2월 28일-11월), 루마니아의 주부쿠레슈티 일본 공사관 1등 통역관(1941년 11월-1945년 소련에 의한 포로 수용소 수감까지)을 역임[70]했고, 7년 동안 외무성에서 근무하는 동안 승급과 승진을 거듭하여, 1944년(쇼와 19년)에는 훈5등 서보장을 수여받았으며, 퇴직금과 연금도 지급받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스기하라에게 불명예스러운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부의 공식 견해이다. 스기하라는 1947년 9월, 외무성의 현역 및 OB로 구성된 "하세키 회"의 회보에, 외무성과 관계 있는 재단법인에 재취업한 자신의 근황을 기고했다. 1948년, 스기하라가 참의원 사무국에 취업 활동을 할 때 제출한 이력서도 발견되었다. 외무성을 그만둔 것은 의원 면직이었으며, 1947년 귀국 전부터 GHQ에 의한 인원 정리("행정 정리 임시 직원령(쇼와 21년 칙령 제40호)")의 대상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80]
전 이스라엘 대사인 도쿠라 에이지는 자신이 "행정 정리 임시 직원령(쇼와 21년 칙령 제40호)"에 따른 기구 축소로, 당시 외무성 직원의 3분의 1이 구조조정되었을 때에도 외무성에서 고용이 유지된 이유로, 대소련 인재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시, 소련과의 젊은 과장 대리로서 활약하던 외교관인 소노 아키라가, "앞으로의 일본은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해질 것이다. 특히 소련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므로, 우리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면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소련 관련 인재를 확보해야 한다."라고 말한 것을 증언하고 있다. 도쿠라는, 지우네보다 3개월이나 늦게 시베리아 억류에서 복귀했음에도 불구하고, 외무성 근무가 즉시 인정되어, "소련 관련 조사국 제3과로 오지 않겠는가"라고 소노로부터 직접 제안받았다. 종전 후 소련의 수용소에서 귀국한 후, 지우네는 1947년 (쇼와 22년)에 외무성을 사직했다. 사치코 부인에 따르면 오카자키 가쓰오 외무 사무 차관으로부터 구두로 "그 일"에 대한 책임을 면직 사유로 통보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3. 1. 양자대립구조론
우선 이미 동맹 관계였던 나치 독일과 관계를 중시하여, 유대인을 방관하도록 한 비정한 외무성과 그런 외무성에 반대한 지우네라는 양자 대립 구도로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근거 중 하나는 지우네가 전후 소련의 수용소에서 귀국한 다음, 1947년 외무성에서 사직하도록 압력을 받았던 사실이다. 명목상으로는 1946년부터 외무성뿐 아니라 일본 행정 조직 전체에 대해 실시되었던 "행정정리임시직원령 쇼와21년 칙령 제40호"에 근거한 기구 축소에 따른 정리해고이나, 부인 스기하라 유키코는 구두로 "그때 그 일"에 대한 책임으로 면직을 통보받았다고 증언하고 있다.3. 2. 묵인론
일본 정부가 독일과의 관계 때문에 공식적으로 유대인을 도울 수 없었지만, 스기하라 지우네의 비자 발급을 묵인했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전전 일본을 미화하려는 의도가 있을 수 있다는 비판도 있다.만약 일본 정부가 유대인 통과를 적극적으로 반대했다면, 스기하라의 비자로 일본에 입국하려는 유대인들을 막았어야 했지만, 실제로는 많은 유대인들이 고베의 유대인 공동체에 도착했고, 미국이나 팔레스타인으로 떠난 사람 외에도 일본 세력권에서 종전 때까지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실제로 스기하라 비자로 일본에 입국하려던 유대인들 중 일부는 입국 심사에서 거부당하기도 했지만, 고베 유대인 협회와 주일 네덜란드 대사관의 노력으로 입국이 가능하게 되었다. 태평양 전쟁 발발 후에는 체류 기간이 만료된 유대인들이 비자가 필요 없었던 상하이 조계로 이동해야 했고, 상하이에서는 독일의 사례를 따라 유대인 게토가 설치되어 유대인들이 수용되기도 했다.
스기하라 지우네가 외무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비자 발급을 계속했고, 이후에도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 주재 총영사관, 독일 쾨니히스베르크 주재 총영사관,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주재 일본 공사관 등에서 근무했으며, 1944년에는 훈5등서옥장을 받은 사실 등은 일본 정부의 묵인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스기하라 지우네가 비자 발급 후에도 외교관 직책을 유지한 것은 그의 뛰어난 러시아어 실력과 첩보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반론도 있다. 실제로 스기하라 지우네는 페르소나 논 그라타(외교적 기피 인물)로 지정되어 소련 부임이 좌절되고 리투아니아로 부임하게 될 정도로 뛰어난 러시아어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3. 3. 일본 외무성의 사과
1991년 10월, 외무성 스즈키 무네오 정무차관(당시)은 스기하라 지우네 영사대리의 부인 스기하라 유키코 여사를 초청하여 일본 정부의 대응에 대하여 사죄했다.[50] 소련의 붕괴를 겪은 리투아니아와의 국교 수립에 맞춰, 스즈키 무네오 외무 정무차관은 "스기하라 부영사의 인도적이고 용기 있는 판단을 높이 평가하며, 스기하라 부영사의 행동을 일본인으로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고, 반세기 동안 외무성과 스기하라 부영사 가족 간의 의사 소통이 부족했던 무례함을 사과했다. 스즈키 정무차관은 당시 사토 요시유키 외무성 대신관방 장관으로부터 지우네의 퇴관은 "일본의 항복에 따른 외무성의 대규모 구조 조정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징계 처분이 아니므로 명예 회복의 필요성도 없고, 오히려 이 문제는 언급하지 않는 것이 득책이다"라는 취지의 설명을 들었지만, 그럼에도 명예 회복의 필요성을 설파하여 최종적으로 사토 관방장관으로부터 스즈키 정무차관에게 일임한다는 승인을 받았다고 증언했다.[175]1992년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당시 외무대신 와타나베 미치오는 비자 발급 건으로 퇴직했다는 기록은 외무성에 남아 있지 않다고 답변했다. 또한 퇴직금과 연금에 대해서도 불리한 처우는 없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 근거로 스기하라 유키코 여사는 저서에서 퇴직금을 받았다고 했다. 같은 해 3월 11일 제123회 국회 중의원 예산위원회 제2분과회에서 효도 나가오 외무성 구주국장은 "확실히 훈령 위반, 당시의 복무 명령의 차원에서 생각하면 그랬지만, 그러나 더 큰 차원에서 생각하면, (...) 수천 명의 인명을 구할지 여부라는, 더 큰 문제가 거기에 관련되어 있었고, 결과적으로 보면 우리도 이 이야기는 미담이었다고 지금 생각합니다"라고, 분명히 "훈령 위반"이기는 하지만, "수천 명의 인명을 구할지 여부라는, 더 큰 문제"[177]가 있었다며, 긴박한 상황에서의 스기하라 영사의 판단을 지지했다.
그러나 전후 스기하라 지우네의 소식을 묻는 유대인 협회의 문의에 대해 일본 외무성에는 센포 스기하라라고 하는 외교관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답변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외무성 내의 스기하라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미루어 볼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견해도 존재한다. 당시 외무성 주 모스크바 대사관에 재직했던 사토 마사루는 이후 출간한 『국가의 함정』에서, 그 명예 회복조차 "당시 외무성 간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루어진 것이었다"고 하며, 지우네의 불복종에 대한 외무성 관계자들의 집요한 적의가 존재했음을 증언하고 있다.
"외무성이 사과할 필요는 없다며, 회담 자체에 반대했다"는 등 『아사히 신문』 (1994년 10월 13일자)에서 보도되었고, 스기하라의 명예 회복에 반대했다고 일부 언론에서 보도된 당시 외무사무차관 오와다 히사시 (전 유엔 대사)는 "그런 보도는 유감입니다. 저는 반대했다는 기억이 없고, 제 생각으로는 반대할 리가 없다"고 말했으며, 자신이 스기하라 영사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했을지에 대한 『AERA』 (2000년 11월 13일자)의 취재에 대해, "조직의 일원으로서 훈령을 따를지 따르지 않을지는, 최종적으로 그 사람이 양심에 비추어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답하며, 지우네의 행위에 대해 일정 부분 이해를 표했다.
그의 죽음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그의 인도주의적 행위를 조명했고, 자국에서 외교관으로서 그의 평판을 회복할 기회를 만들었다.[50] 2000년 10월 10일, 일본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명예를 회복시켰으며, 고노 요헤이 외무대신은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열린 스기하라 기념식에서 상패를 설치하고 칭찬 연설을 했다.[51] 그것은 지우네의 사망 14주년, 그리고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178]
2019년 10월 21일에 "스기하라 지우네 기념 재단"이 스기하라가 참의원에 제출한 이력서와 인사 기록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력서에 따르면, 외무성 퇴직은 본인 의원 퇴직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138][179] 2006년 3월 24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총리대신의 답변서 (내각 질의 164 제155호)에서도 외무성에는 징계 처분의 증거 문서가 없다고 되어 있다.[176]
4. 스기하라에 대한 평가
스기하라 지우네는 1969년에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았고, 1985년에는 일본인 최초로 야드바셈상을 수상하며 "열방의 의인"으로 기려졌다.[28] 현재 예루살렘 언덕에는 그 당시의 표창비가 세워져 있으며, '일본의 오스카 쉰들러'로도 불린다.[28] 2000년 10월 10일에는 일본 외무성 외무자료관에 "용기있는 인도적 행위를 실행한 외교관 스기하라 지우네 씨를 기리며"라는 표창비 제막식이 열렸고, 고노 요헤이 당시 외상 등이 참석했다.
오스카 쉰들러에 비해 지명도는 낮지만, 여러 국가에서 의인으로 평가받고 있다.[52] 리투아니아 빌뉴스, 이스라엘 자파, 소행성 25893 스기하라(25893 Sugihara) 등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52] 1992년 야오쓰 시에 '인류 공원'이 개장되었고, 2000년에는 스기하라 지우네 기념관(Chiune Sugihara Memorial Hall)이 개관하여 많은 방문객이 찾고 있다. 인도주의의 항구 쓰루가 박물관(Port of Humanity Tsuruga Museum)과 리투아니아 카우나스의 스기하라 하우스 박물관[53], 미국 매사추세츠주 체스넛 힐의 템플 에메스[54], 뉴욕주 올버니의 라울 발렌베리 공원[55][56] 등에도 기념 시설이 있다.
1998년 스기하라 유키코 여사가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생존자들은 남편이 서명한 비자를 보이며 눈물을 흘렸다.[28] 2001년 리투아니아 빌뉴스에 벚나무 공원이 조성되었고,[57] 2002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리틀 도쿄(Little Tokyo, Los Angeles)에는 기념비가 설치되었다.[58] 2007년 폴란드 부활 훈장(Order of Polonia Restituta) 사령관 십자 훈장[59]과 폴란드 공화국 공로 훈장(Order of Merit of the Republic of Poland) 사령관 십자 훈장[60]을 사후 훈장(posthumous award)으로 받았으며, 1993년 리투아니아 생명 구조 십자 훈장을 받았다. 2014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사후 훈장(posthumous award) 사쿠라 상을 받았다.[61]
2016년 이스라엘 네타냐에 '지우네 스기하라 거리'가 명명되었고,[61] 2020년 리투아니아 정부는 '스기하라 지우네의 해'를 선포하고 기념비를 세웠다.[62] 2021년 예루살렘에 스기하라 지우네 광장이 생겼다.[64] 1944년 훈5등 서보장을 받았다.[145][146]
2011년 와세다 대학 출신 의원들이 '스기하라 지우네 현창회'를 발족하고 현창비를 건립했다.[147] 2012년 리투아니아 총리는 노다 요시히코 총리에게 스기하라의 업적이 양국 관계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149] 2013년 스기하라의 메시지를 담은 기록 영상이 야오쓰정에 기증되었다.[151] 2015년 일본 정교회에서 처음으로 스기하라를 위한 추도 예배가 행해졌다.[153] 2016년 가마쿠라시 의회에서 스기하라 현창 결의가 가결되었다.[156][157] 2017년 러시아 비로비잔 I역에 기념 플레이트가 설치되었다.[159] 2018년 아이치현립 즈이료 고등학교와[160] 미노시에 현창 시설과 안내판이 설치되었다.[161] 2021년 나고야 시립 미즈호가오카 중학교에 스기하라 소년상이 세워졌다.[162]
스기하라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등 여러 외국어에 능통했으며,[113] 히로타 코키 전 총리를 존경했다. 그는 "상대가 유대인이든 아니든 도왔을 것",[173] "청렴하고 고결한 사람"[105], "'고무사'와 같은 분"[159] 등의 평가를 받았다.
5. 한국과의 관계
6. 유산과 기념
스기하라 지우네는 외무성 퇴직 후 무역상 및 번역자로서 생활했다. 1969년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고, 1985년에는 야드바셈상을 수상하며 "열방의 의인"으로 기려졌다.[28] 예루살렘 언덕에는 당시의 표창비가 세워져 있으며, '일본의 오스카 쉰들러'로도 불린다. 2000년 10월 10일 외무자료관에 설치된 표창비 제막식에는 고노 요헤이 외상, 스즈키 무네오, 스기하라 유키코 부인 등이 참석했다.
리투아니아 빌뉴스와 이스라엘 자파, 소행성 25893 스기하라(25893 Sugihara)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992년 야오쓰 시에 '인류 공원'이 개장되었고, 2000년에는 스기하라 지우네 기념관(Chiune Sugihara Memorial Hall)이 공개되어 60만 명 이상이 방문했다. 쓰루가 항 근처 인도주의의 항구 쓰루가 박물관(Port of Humanity Tsuruga Museum)과 리투아니아 카우나스의 스기하라 하우스 박물관에도 관련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52][53]
1998년 스기하라 유키코는 예루살렘에서 남편이 서명한 비자를 가진 생존자들을 만났고, 예루살렘의 한 공원과 1998년 이스라엘 우표에 그의 이름이 새겨졌다.[28] 2001년 빌뉴스에 벚나무 공원이 조성되었고,[57] 2002년 로스앤젤레스 리틀 도쿄(Little Tokyo, Los Angeles)에는 탈무드의 인용구가 새겨진 기념비가 설치되었다.[58] 2007년 폴란드 부활 훈장(Order of Polonia Restituta) 사령관 십자 훈장,[59] 1996년 폴란드 공화국 공로 훈장(Order of Merit of the Republic of Poland) 사령관 십자 훈장,[60] 1993년 리투아니아 생명 구조 십자 훈장을 받았다.
2014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사후 훈장(posthumous award) 사쿠라 상을 받았고, 2016년 이스라엘 네타냐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명명되었다.[61] 2020년 리투아니아 정부는 '스기하라 지우네의 해'를 선포하고 기념비를 세웠다.[62][63] 2021년 예루살렘에는 스기하라 지우네 광장과 정원이 있다.[64]
2011년 와세다 대학에 현창비가 건립되었고,[147] 2012년 리투아니아 총리는 노다 요시히코 총리에게 스기하라의 업적이 양국 관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언급했다.[149] 2015년 스기하라의 묘 앞에서 정교회식 추도 예배가 처음으로 행해졌다.[153] 2016년 가마쿠라시 의회는 스기하라를 현창하는 결의를 채택했다.[156][157] 2017년 러시아 비로비잔에 기념 플레이트가 설치되었다.[159]
2018년 즈이료 고등학교와 미노시 교센지에 현창 시설과 안내판이 설치되었다.[160][161] 2021년 미즈호가오카 중학교에 스기하라 소년상이 세워졌다.[162]
- 인도의 항구 쓰루가 박물관
- 인도의 언덕 공원과 스기하라 지우네 기념관
- 나고야 시립 평화 초등학교 치우네 차임
- 스기하라 지우네 광장 센포 · 스기하라 · 메모리얼
- [http://sempomuseum.com/ 스기하라 지우네 Sempo Museum]
- '생명의 비자 · 스기하라 지우네 부부 현창회'
- 나고야 시립 미즈호가오카 중학교 스기하라 지우네의 소년상
1944년 훈5등 서보장을 받았다.[145][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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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五国風土記 ひょうご彩祭 第2部 都市のモザイク【9】 パンと風見鶏 ユダヤの苦難発想の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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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新五国風土記 ひょうご彩祭 第2部 都市のモザイク【9】 パンと風見鶏 ユダヤの苦難発想の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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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戸新聞N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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杉原千畝氏の唯一存命の四男 杉原伸生氏 「僕のオヤジ、チウ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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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のビザ」発給後、被整理者に 杉原千畝の履歴書発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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杉原千畝に感謝示した森消える イスラエルの団体が謝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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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畝の母校に友好植樹 イスラエルが愛知の高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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杉原千畝さん描いた舞台 ひ孫がユダヤ人役で出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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鎌倉霊園で杉原千畝氏を記憶する祈り 初めての「パニヒダ」献じられる : 教会 : クリスチャントゥデ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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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のビザ」の杉原千畝たたえる記念行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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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のビザ”発給の故杉原千畝氏たたえる「スギハラ通り」がお目見え イスラエル中部で記念式典開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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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ノシンドラー」杉原千畝の顕彰決議を可決 鎌倉市議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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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道的行為を尽くされた杉原千畝さんを顕彰することに関する決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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顕彰決議文を進呈 杉原千畝の親族に鎌倉市議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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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シア極東に杉原千畝氏のプレート ユダヤ自治州、功績たた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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杉原千畝広場:名古屋で完成式典 きょうから一般公開 「彼の功績学べれば」イスラエル代理大使語る /愛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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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のビザ」杉原千畝の生誕地を示す案内板が岐阜県美濃市の教泉寺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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杉原千畝の記念像が完成 少年期過ごした名古屋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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リトアニア・カウナス 今も息づく杉原千畝の勇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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内閣衆質一六四第一五五号 平成十八年三月二十四日 内閣総理大臣 小泉純一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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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のビザ」発給で免官ではなく…杉原千畝氏は「外務省を依願退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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岐阜・八百津町「杉原千畝記念館」。ウクライナ問題の中、振り返りたい“日本のシンドラー”杉原千畝の功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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杉原記念碑お立ち寄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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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に誇れる日本人、イチロー3連覇達成「野球の神様だと思う」|キャリア関連ニュース|オリコン顧客満足度ランキン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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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のビザ、記憶遺産に」外交官の故杉原千畝氏の出身地、岐阜・八百津町が申請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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杉原千畝演じ230回 一人芝居の水澤さん、3日に帰国公演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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杉原千畝が題材 一人芝居「命のビザ」 11月にカナダ公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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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人芝居 日本のシンドラー・杉原千畝の精神学んで 水澤心吾さん、千代田で17日 /東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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権代敦彦《桜の記憶》 世界初演レポー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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