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타오카 도시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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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타오카 도시아키는 일본의 극좌 운동가로, 개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호세이 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했다. 베트남 반전 운동과 전공투 운동에 참여했으며, 다이도지 쇼지를 만나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에 가담했다. 그는 '늑대'라는 그룹을 결성하여 미쓰비시 중공업 폭파 사건 등 연쇄 기업 폭파 사건을 일으켜 1975년 체포되었다. 1987년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관련 인물들의 해외 도피로 인해 사형이 집행되지 않았으며, 2016년 기준으로 도쿄 구치소에 수감 중이다. 그의 사상은 한국 사회, 특히 진보 진영에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폭력적인 방식은 비판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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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시마 사토시는 1970년대 기업 폭파 사건에 연루된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전갈"의 일원으로, 한국산업경제연구소 폭파 사건 주요 용의자로 49년간 도피 생활을 하다 체포 후 위암으로 사망하여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과거 극좌파 운동과 한일 관계에 대한 논의를 촉발한 인물이다. -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 미쓰비시중공 폭파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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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타오카 도시아키 | |
---|---|
기본 정보 | |
이름 | 가타오카 도시아키 |
원어명 | 片岡 利明 |
로마자 표기 | Kataoka Toshiaki |
본명 | 마스나가 도시아키 |
출생일 | 1948년 6월 1일 |
출생지 | 東京都 |
국적 | 일본 |
학력 | 호세이대학 문학부 사학과 |
직업 | 테러리스트 |
활동 기간 | 1973년 ~ 1975년 |
소속 |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
활동 | |
활동 | 바프테스토 교회 개혁 운동 |
조직 | |
조직 | 늑대 |
사상 | |
사상 | 반일 |
재판 | |
재판 | 1987년 3월 24일에 사형 판결 (2024년 현재, 미집행) |
투옥 | |
투옥 | 도쿄 구치소 |
모교 | |
모교 | 개성고등학교 |
2. 생애 및 활동
가타오카 도시아키는 개성고등학교(개성중학교·고등학교)를 2년 재수하여 법정대학교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했다.[2]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베평연), 전학공투회의(전공투) 운동에 참여하고 침례교 개혁 운동을 했다. 다이도지 마사시를 만나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에 참가, '늑대' 그룹의 이름을 지었다.
1973년 직업훈련학교에서 폭탄 제조 기술을 익히고,[2] 미쓰비시 중공업 폭파 사건 등 연쇄 기업 폭파 사건에 관여했다. 1975년 체포되어 1987년 최고재판소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3] "목숨이 걸린 재판을 서류상의 '업무'로 처리하는 판사들의 태도에 분노한다"고 밝혔다.[3]
일본 적군의 테러 사건 당시 일본 정부의 초법적 조치로 사사키 노리오, 다이도지 아야코가 석방, 해외 도피 후 일본 적군에 합류하여 재판이 중단, 사형은 집행되지 않고 있다. 2016년 현재 도쿄 구치소에 수감 중이다.[4]
2. 1. 학창 시절 및 사상 형성
개성고등학교(개성중학교·고등학교)를 2년 재수하여 법정대학교(법정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했다.[2] 이후,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베평연)에 참가하여 침례교(침례교회) 개혁 운동을 수행했다. 전학공투회의(전공투) 운동을 거쳐, 다이도지 마사시를 만나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에 참가했으며, 자신이 관련된 그룹 "늑대"의 이름을 직접 짓기도 했다.[2]2. 2.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 참여
가타오카 도시아키는 호세이 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한 후,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베평연)과 전학생 투쟁회의(전공투) 운동에 참여했다.[2] 이후 다이도지 쇼지를 만나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에 합류했으며, 자신이 속한 그룹 '늑대'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2] '늑대'라는 명칭은 아이누어의 '오이누'에서 유래했으며, '인간'을 뜻하는 '아이누'와 달리 '배회하는 자', '방랑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2]가타오카는 1973년 4월부터 직업훈련학교 기계과에서 폭탄 제조에 필요한 기술, 지식을 익혔으며,[2] 미쓰비시중공업 폭파 사건을 비롯한 연쇄 기업 폭파 사건에서 폭탄 제조의 중심적인 역할을 맡았다.[2]
2. 3. 연쇄 기업 폭파 사건
가타오카 도시아키는 호세이 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하여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베평연)에 참가하고 침례교회 개혁 운동을 수행했다.[2] 전공투 운동을 거쳐 다이도지 쇼지를 만나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에 참가했으며, 자신이 속한 그룹 '늑대'의 이름을 직접 짓기도 했다. 1973년 4월부터 직업훈련학교 기계과에서 폭탄 제조에 필요한 기술과 지식을 익혔다.[2] 이후 폭탄 제조를 주도하여 미쓰비시 중공업 폭파 사건을 비롯한 연쇄 기업 폭파 사건을 일으켰다.[2]1975년 5월 19일 체포되었고, 1987년 3월 24일 최고재판소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2] 가타오카는 "목숨이 걸린 재판을 서류상의 '업무'로서 형식적으로 처리하는 최고재판소 판사들의 태도에 격렬한 분노를 금할 수 없다"고 밝혔다.[3]
일본적군이 일으킨 쿠알라룸푸르 사건과 다카 항공기 납치 사건 당시, 일본 정부는 일본 적군 측의 요구를 받아들여 초법적 조치로 '늑대' 구성원이자 연쇄 기업 폭파 사건 관련자인 사사키 노리오와 다이도지 아야코를 석방했다. 이들이 해외에서 일본 적군에 합류 후 행방불명이 되면서 재판이 종료되지 않아 가타오카의 사형은 집행되지 않고 있다.
2016년 시점에서 가타오카는 사형수로서 도쿄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다.[4]
2. 4. 체포 및 재판
1975년(쇼와 50년) 5월 19일에 체포[2]되어 기소되었다.일본 최고재판소(最高裁判所 (日本)|최고재판소)에서 1987년(쇼와 62년) 3월 24일에 사형(日本における死刑|사형)이 확정되었다. 이때, "목숨이 걸린 재판(裁判)을 서류(書類)상의 '업무(事務)'로서 형식적으로 처리하는 최고재판소(最高裁判所|최고재판소) 판사(判事)들의 태도에 격렬한 분노를 금할 수 없다"고 밝혔다.[3]
사형이 집행되지 않은 것은, 과거 "늑대(狼)" 구성원이었고 연쇄 기업 폭파 사건에 관련된 사사키 노리오(佐々木規夫)와 다이도지 아야코(大道寺あや子)가 일본 적군(日本赤軍)이 일으킨 두 건의 테러(テロ)·협박(脅迫) 사건(事件)(쿠알라룸푸르 사건(クアラルンプール事件)·다카 항공기 납치 사건(ダッカ日航機ハイジャック事件)) 당시, 일본 적군(日本赤軍) 측의 요구를 받아들인 일본 정부(日本国政府|일본 정부)의 초법적 조치(超法規的措置)로 석방(保釈|출옥)되어 해외(外国|해외)에서 일본 적군(日本赤軍)에 합류 후 행방불명(行方不明|소식이 불명)이 되어 재판(裁判)이 종료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2016년(헤이세이 28년) 시점에서, 가타오카는 사형수(死刑囚)로서 도쿄 구치소(東京拘置所)에 수감(収監)되어 있다.[4]
2. 5. 수감 생활 및 사형 집행 유예
가타오카 도시아키는 1987년 3월 24일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3] 사형 확정 당시 "목숨이 걸린 재판을 서류상의 '업무'로서 형식적으로 처리하는 최고재판소 판사들의 태도에 격렬한 분노를 금할 수 없다"고 밝혔다.[3]2016년 시점에서 가타오카는 사형수로서 도쿄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다.[4] 그러나 사형이 집행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과거 '늑대' 그룹의 구성원이자 연쇄 기업 폭파 사건에 관련된 사사키 노리오와 다이도지 아야코가 일본 적군에 의한 테러 및 협박 사건 (쿠알라룸푸르 사건, 다카 항공기 납치 사건) 당시 일본 정부의 초법적 조치로 석방되어 해외로 도피, 일본 적군에 합류한 후 행방불명이 되어 재판이 종료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3. 저서
3. 1. 『폭탄 세대의 증언』
1985년 三一書房에서 출간된 가타오카 도시아키의 저서 『폭탄 세대의 증언―도쿄 구치소·사형수 감방에서』[1]는 그가 도쿄 구치소에 수감되었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3. 2. 『죄수의 권리』
囚人の権利일본어(통일옥중자조합 출판부, 1986년)는 미국자유인권협회 발행 핸드북을 번역한 것이다.[1]참조
[1]
서적
反日思想を考える 死刑と天皇制
軌跡社
[2]
서적
爆弾世代の証言
[3]
간행물
インパクション
1987-05-25
[4]
서적
死刑と憲法 年報・死刑廃止2016
インパクト出版会
2016-10-10
[5]
서적
反日思想を考える 死刑と天皇制
軌跡社
[6]
서적
爆弾世代の証言
[7]
간행물
インパクション
1987-05-25
[8]
서적
死刑と憲法 年報・死刑廃止2016
インパクト出版会
2016-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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