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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와 미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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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자와 미치오는 일본 제국의 관료이자 정치인으로, 메이지 신궁 경기대회의 발안자이며, 내무대신, 중화민국 임시정부 설립 지원, 대일본 산업 보고회 의장을 역임했다. 1942년 도조 히데키 내각에서 내무대신으로 임명되어 도쿄도 창설을 감독했으나, 의회와의 대립으로 경질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숙청되었으나, 추방 해제 후 여러 직책을 맡았으며, 1959년 참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어 활동하다 1963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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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와 미치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유자와 미치오
이름유자와 미치오
원어 이름湯沢三千男
로마자 표기Yuzawa Michio
출생일1888년 5월 20일
출생지가미쓰가군, 도치기현, 일본
사망일1963년 3월 21일
사망 원인알 수 없음
안장 장소알 수 없음
국적일본
직업정치인, 각료
학력도쿄 제국대학
정치 경력
소속 정당자유민주당
전 직업내무 관료
칭호/훈장정3위, 훈1등 욱일대수장
친족 (정치인)알 수 없음
배우자알 수 없음
서명알 수 없음
관직
직책제58대 내무대신
내각도조 내각
임기 시작1942년
임기 종료1943년
의회 경력
직책참의원 의원
선거구도치기현 선거구
당선 횟수1회
임기 시작1959년 6월 2일
임기 종료1963년 2월 21일

2. 생애

유자와 미치오는 도치기현 가미쓰가군(현 가누마시)에서 신토 신관의 아들로 태어나,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내무성에 들어갔다. 미야기현, 히로시마현, 효고현 지사 등을 역임하고 내무차관을 거쳐, 히로타 고키 내각 하에서는 중화민국 임시정부 설립을 지원하기 위해 중국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1940년에는 대일본 산업 보고회 의장을 맡았다.

1942년 도조 히데키 내각의 내무대신으로 임명되어 1942년 총선에서 대정익찬회를 지원하고, 도쿄도 창설을 감독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귀족원 의원을 지냈으며, 전후에는 공직에서 추방되었다가 복귀하여 참의원 의원을 역임하고 1963년에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및 내무 관료 시절

유자와 미치오는 1888년 도치기현 가미쓰가군 (현 가누마시)에서 신토 신관 (간누시)의 아들로 태어났다.[4] 구제 제1고등학교를 거쳐 1912년 도쿄 제국대학 법과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내무성에 들어갔다.[4] 내무성에서 후쿠시마현 소속으로[4] 지방관을 역임한 후, 위생국 보건과장, 사회국 보험부장, 노동부장을 역임했다.[5] 그는 공중 보건 분야에서 일했으며, 1924년부터 1943년까지 매년 개최된 메이지 신궁 경기대회의 설립을 감독했는데, 이는 그의 발안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1929년 미야기현 지사로 임명되었고, 1931년에는 토목국장이 되었으며, 히로시마현 지사를 역임했다. 1935년에는 효고현 지사가 되었다. 1936년에는 내무 대신 시오 노리에스케 밑에서 내무차관을 역임했다. 히로타 내각의 붕괴 후에는 퇴임하였다.

1929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 노동 회의에 정부 대표로 참가한 유자와(가장 앞줄 중앙)

2. 2. 중국 파견 및 전시 체제 관여

1938년, 히로타 고키 내각 하에서 유자와 미치오는 중화민국 임시정부 설립을 돕기 위해 중국으로 파견되었다.[1] 그는 일본 북중국 방면군과 긴밀히 협력하면서, 참모장인 무토 아키라 장군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중일 전쟁 발발 다음 해인 1938년에 중화민국 임시 정부의 고문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일본 육군 북지나 방면군의 참모 부장이었던 무토 아키라와 친해졌다.[5] 무토와의 인연으로 육군과 강력한 파이프를 구축하게 되었다. 1940년에는 전쟁 당시 정부 통제 하에 있던 이전의 모든 노동 조합을 포괄하는 기구인 대일본 산업 보고회 의장으로 임명되었다.[1]

2. 3. 내무대신 시절

1942년 2월 7일, 도조 히데키 내각에서 내무대신으로 임명되었다.[1] 도조는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몇 달 동안 내무대신과 총리직을 겸임하려 했는데, 이는 전쟁 상황이 악화될 경우 내무성이 통제하는 강력한 보안 장치가 자신의 행정부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내무대신으로서 유자와는 1942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대정익찬회에 대한 정부 지원을 조직했지만, 당의 준군사 청년 단체인 익찬소년단의 급진화가 심화되는 문제에 직면해야 했다.[1] 그는 또한 1942년 도쿄시도쿄부의 합병으로 도쿄도를 창설하는 것을 감독했다.

내무대신 취임 후, 익찬의원동맹의 실력자 야마자키 다쓰노스케의 친동생으로 내무성의 요직을 역임한 야마자키 이와오를 내무 차관으로 임명하여 기존 정당 관계자와의 연계를 도모했다. 같은 해 4월 30일의 제2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대규모 선거 간섭이 행해지는 한편, 대정익찬회 내부에서는 강력한 후원회와 정부와의 관계를 배경으로 공천을 획득하는 기존 정당 출신의 전직 의원과, 기존 세력의 배제와 신인에 의한 신생 의회 형성을 주장하는 군부 일부나 혁신파, 대일본익찬장년단과의 대립 격화, 선거 진행 방식을 둘러싼 유자와와의 대립에 기인하는 경보국장 이마마츠 지로, 경시총감 토메오카 유키오의 사임 등 혼란이 이어졌다.

1942년 말에 소집된 제81회 제국 의회에서 유자와는 도쿄도제 법안과 시제 정촌제 개정안을 제출했다. 도쿄도 장관, 시정촌장을 모두 관선 또는 준관선으로 한다는 제안에 대해, 도조는 의회나 여론의 정부 비판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여 내각 서기관장호시노 나오키, 법제국 장관모리야마 에이이치, 기획원 총재 스즈키 데이이치, 정보국 총재 타니 마사유키와 함께 제안 연기를 설득했고, 익찬 정치회에서도 중지 요청이 나왔지만, 유자와는 전시 상황에서 내무성에 인사권을 되찾을 기회라고 판단하여 제출했다. 그러나 의회는 이를 내무성의 강권으로 보고 격렬하게 반발했고, 더욱이 익찬 선거의 비추천 의원으로부터 "익찬 선거의 위헌성" 문제가 제기되었다. 도조 등의 정치 공작으로 양 법안은 일부 수정되어 통과되었지만, 유자와는 "거국 일치"성을 의심받을 수 있는 정부와 의회의 대립을 일으킨 것으로 인해 도조로부터 신뢰를 잃고, 1943년 4월 20일에 경질되었다.

2. 4. 전후 활동

1943년 4월부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귀족원 의원을 지냈다.[1] 일본의 항복 이후, 유자와는 (전시 정부의 다른 모든 구성원들과 함께) 미국 점령 당국의 명령에 따라 공직에서 추방되었다.[1] 이후 중앙사회보험의료심의회 명예의장을 역임했다. 1959년, 전후 상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출마하여 한 임기를 역임했다. 1963년에 사망했다.[1]

공직 추방 해제 후에는 중앙사회보험의료협의회 회장, 시정촌 건설 촉진 중앙 심의회 회장, 메이지 신궁총대 등을 역임했다. 1959년(쇼와 34년) 제5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자유민주당 공천으로 도치기현 선거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재직 중 사망했다.[3] 사망일에 훈1등 욱일대수장이 추증(훈2등에서 승서)되었고, 종3위에서 정3위로 추서되었다.[2]

3. 저서

支那に於ける思ひ|지나에 있어서 생각함일본어[1] (소겐샤, 1940년) doi:10.11501/1268091

참조

[1] 서적 Shillony
[2] 간행물 『官報』第10855号 1963-02-25
[3] 뉴스 【戦後77年】内務大臣 終戦時の日記/昭和天皇「街頭に立つ決意」 画壇との交流も記す https://www.yomiuri.[...] 読売新聞 2022-08-05
[4] 서적 日本官僚制総合事典 東京大学出版会 2001-11
[5] 웹사이트 湯沢 三千男 2023-02-24
[6] 문서 これについて元警保局長の貴族院議員松本学は「従来軍部に余りにも因縁をむすびすぎた応報として内務省を雍せんとする彼ら(軍部)の意図の先棒をかつがされることになった」と書き記して前途を憂いている。
[7] 간행물 貴族院要覧(丙) 1946-12
[8] 간행물 貴族院要覧(丙) 194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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