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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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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겐티우스는 기원전 181년부터 기원전 168년까지 아르디아에 왕국의 마지막 왕이었다. 그의 이름은 "낳다"라는 의미의 인도유럽조어에서 유래되었으며, 알바니아 이름 Gjin의 기원일 가능성이 있다. 겐티우스는 로마와의 관계가 악화되는 시기에 통치했으며, 다르다니 및 마케도니아와 동맹을 맺었다. 그는 통치 기간 동안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고, 제3차 일리리아 전쟁에서 로마에 선전포고했지만 패배하여 아르디아에 왕국은 멸망했다. 겐티우스는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었으며, 그의 이름을 딴 겐티아나 속 식물이 그의 유산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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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티우스
기본 정보
이름겐티우스
원어 이름 (알바니아어)Genti
원어 이름 (고대 그리스어)Γένθιος
활동 시기기원전 2세기
통치 정보
직함일리리아의 왕
통치 기간기원전 181년 ~ 기원전 168년
즉위기원전 181년
퇴위기원전 168년
이전 통치자플레우라투스 3세
후임 통치자 (추정)발라이오스
배우자에투타
왕조라베아테스
인물 정보
아버지플레우라투스
기타 정보
고대 일리리아 주화에 새겨진 겐티우스 왕의 얼굴
사망 시기기원전 167년 이후
사망 장소이탈리아

2. 이름

일리리아어 이름 '겐티우스'는 인도유럽조어 '*ǵenh₁-'에서 유래했으며, "낳다"라는 뜻을 지닌다.[3] 이는 라틴어 'gens', 'gentis]' "친족, 씨족, 종족"과 같은 어원을 갖는다.[3] '겐티우스'는 재구성된 명사 '*gent(i)yos'를 반영하며, 왕을 씨족의 우두머리로 지칭하는 것으로, 게르만조어 '*kun-ing-az]'와 유사하다.[4] 이 이론이 맞다면, '겐티우스'는 변화를 겪고 기독교화된 알바니아 이름 Gjin의 기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5]

3. 생애

겐티우스는 플레라투스의 아들이자 아르디아에 국가의 마지막 왕으로, 기원전 181년에 왕위를 계승했다. 겐티우스의 통치 기간 동안 로마와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테우타에 대항한 제1차 일리리아 전쟁 이후 드리니 강 남쪽 해안과 내륙은 로마의 통제하에 있었고, 겐티우스는 북쪽과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했다. 비스 섬(현재 크로아티아의 비스)의 그리스 도시 이사는 로마의 보호 아래 있었지만, 흐바르 섬(현재 크로아티아의 흐바르)는 일리리아의 소유였다. 겐티우스 즉위 직후 델마타이가 이탈했지만, 일리리아의 힘은 해군과 선박에 있었고, 아드리아 해 운송에 대한 방해는 로마의 관심을 끌었다.

기원전 180년, 로마의 프라에토르가 해적 행위를 하던 겐티우스의 배와 함께 브루디시움에 도착했다. 일리리아에 파견된 사절단은 왕을 찾지 못했고, 로마인들은 코르출라에서 몸값을 요구받았다. 이 사건의 결과는 불분명하며, 원로원이 겐티우스 측 주장을 받아들였을 가능성도 있다. 10년 후, 로마가 마케도니아페르세우스와의 전쟁에 휩싸이자, 이사는 겐티우스를 전쟁 음모 혐의로 고발했고, 일리리아 사절들은 심문을 거부당했다. 로마는 에피다므노스 항구에 정박해 있던 일리리아의 렘비 54척을 압수했다. 전쟁 직전, 로마 상원 의원이 겐티우스에게 로마와의 우호를 상기시켰다.[1]

기원전 169년, 겐티우스는 자신의 형제 플라토르를 살해하고, 플라토르의 약혼녀였던 다르다니 왕 모누니우스 2세의 딸 에투타와 결혼하여 다르다니와의 동맹을 굳건히 했다. 페르세우스는 로마가 점령한 일리리아 지역을 다시 점령하여 아르디아에아 국가로 가는 길을 장악했다. 페르세우스는 겐티우스에게 사절단을 보내 로마와 다르다니를 상대로 승리한 것과 페네스타이족을 상대로 승리한 것을 알렸다. 일리리아인들은 자금 부족을 이유로 로마와의 전쟁을 망설였지만, 페르세우스는 겐티우스를 전쟁에 끌어들이려 했다. 기원전 168년, 로마가 마케도니아를 침공하자 페르세우스는 겐티우스에게 300 탈렌트를 약속했고, 메둔에서 인질 교환이 합의되었다. 겐티우스는 페르세우스의 맹세를 수락하고 사절단을 보내 돈을 받아오게 했으며, 조약은 디움에서 체결되었다. 그러나 겐티우스가 로마 사절 2명을 투옥하자, 페르세우스는 지원금을 회수했다.

겐티우스는 왕국 강화를 위해 재정을 중앙집권화하고, 리수스와 스코درا의 화폐 주조소를 왕실 통제하에 두었다.[1] 이때 겐티우스는 청동 동전을 발행했는데, 일부 동전에는 마케도니아 문장이 새겨져 있었고,[1] 다른 동전에는 겐티우스의 모습과 함께 번개 또는 전쟁선인 렘비가 새겨져 있었다.[1] 로마와의 전쟁 직전, 국가 재무부에는 금 약 12.25kg, 은 약 8.62kg, 일리리아 드라크마 12만 개, 로마 데나리우스 1만 3천 개가 있었다.[1] 겐티우스는 페르세우스와 함께 로도스를 전쟁에 끌어들이려 했고,[1] 270척의 렘비 함대를 건설하여 아드리아해에서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1] 그의 군대는 15,000명에 달했다.[1]

기원전 168년 1월/2월, 겐티우스는 리스스에서 군대를 소집하여 로마 영토로 진격, 바사니아를 포위 공격했지만 함락에는 실패했다.[6] 그의 이복형제 카라반티우스는 카비이를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카라반디스의 밭을 황폐화시켰다.[6] 또한 렘비 함대로 에피다모와 아폴로니아의 해안 도시를 공격했다.[6] 한편, 로마군 사령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님파에움에서 북쪽으로 이동하여 제네수스 강(슈쿰빈 강, 알바니아) 근처에 진영을 구축하고, 새로운 로마 사령관 루키우스 아니키우스 갈루스를 만났다.[6] 아니키우스는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군단과 동맹군을 합쳐 겐티우스 군대의 두 배가 넘는 병력을 갖추게 되었다.[6]

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아니키우스의 함대는 일리리아 함대를 격파하고 렘비를 나포했다.[6] 로마군은 육지에서 일리리아 군을 격파하고, 대부분 도시의 항복을 받아냈다.[6] 겐티우스는 남은 병력을 수도 슈코드라에 집결시켰으나, 아니키우스가 접근하자 도시 안으로 도망갔고, 3일간의 휴전을 요청했다.[6] 휴전 3일째, 겐티우스는 로마 진영으로 가서 항복했고, 아니키우스는 그를 체포했다.[7][8][9] 슈코드라의 일리리아인들은 항복하고 로마 사절들을 석방했다.[6] 로마군은 슈코다르 호수 북쪽으로 진군하여 겐티우스의 왕비, 형제, 아들을 비롯한 일리리아 지도자들을 체포했다.[6] 이로써 겐티우스가 일으킨 전쟁은 30일 만에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10]

3. 1. 로마와의 관계

플레라투스의 아들 겐티우스는 기원전 181년에 왕위를 이었다. 겐티우스의 통치 기간 동안 아르디아에 국가와 로마의 관계는 점차 나빠지기 시작했다. 테우타에 대항한 제1차 일리리아 전쟁 이후 드리니 강 남쪽의 해안과 내륙 지역은 로마의 통제 아래 있었다. 겐티우스는 북쪽과 서쪽에 사는 친족들에 대한 권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섬들 중 비스 섬(현재 크로아티아의 비스)의 그리스 도시인 이사는 로마의 보호 아래 어느 정도 독립을 유지했지만, 흐바르 섬(현재 크로아티아의 흐바르)는 일리리아의 소유였다. 본토에서는 델마타이와 다오르시가 한때 지배를 받았지만, 델마타이는 겐티우스가 즉위한 직후 이탈했다. 일리리아의 힘은 해군과 선박에 있었고, 아드리아 해 운송에 대한 그들의 방해는 다시 로마의 관심을 끌었다.

기원전 180년, 해안 방어를 담당하는 로마의 프라에토르가 해적 행위를 하던 겐티우스의 배 몇 척과 함께 브루디시움에 도착했다. 일리리아에 파견된 사절단은 왕을 찾지 못했고, 프라에토르는 로마인들이 코르출라에서 몸값을 요구받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사건의 결과는 보고되지 않았으며, 원로원이 겐티우스의 사절들이 제기한 혐의가 거짓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10년 후, 로마가 마케도니아의 페르세우스에 대한 전쟁 열기에 휩싸이자, 이사는 겐티우스가 왕과 전쟁을 음모했다고 고발했고, 일리리아 사절들은 원로원 앞에서 심문을 거부당했다. 대신 로마인들은 에피다므노스 항구에 정박해 있던 일리리아의 렘비 54척을 압수했다. 전쟁 직전에 로마 상원 의원이 일리리아로 파견되어 겐티우스에게 로마 공화국과의 공식적인 우정을 상기시켰다.[1]

3. 2. 다르다니 및 마케도니아와의 동맹

기원전 169년, 겐티우스는 자신의 형제 플라토르를 살해했다. 플라토르가 다르다니 왕 모누니우스 2세의 딸 에투타와 결혼하려 하자, 겐티우스는 플라토르의 세력이 너무 강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겐티우스는 플라토르의 약혼녀였던 에투타와 자신이 결혼하여 강력한 다르다니와의 동맹을 굳건히 했다.

마케도니아페르세우스는 로마가 점령한 일리리아에서 여러 로마 전초 기지를 다시 점령하여 아르디아에아 국가로 가는 길을 장악했다. 이때 페르세우스는 일리리아 망명자 플레라투스, 마케도니아인 아다에우스와 베로에아로 구성된 첫 번째 사절단을 겐티우스에게 보냈다. 그들은 리소스에서 겐티우스를 만나 페르세우스가 로마와 다르다니를 상대로 승리한 것과 페네스타이족을 상대로 최근 승리한 것에 대해 알렸다. 일리리아인들은 로마와 싸울 의지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자금이 부족하다고 대답했다. 이 사절단이나 얼마 후 슈테베라에서 파견된 다른 사절단도 이 점에 대해 어떠한 약속도 하지 않았다. 페르세우스는 겐티우스를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계속 노력했고, 가능하면 자신의 재정적 부담 없이 참전시키려 했다. 일리리아 망명자 플레라투스는 페네스타이에서 보병 1,000명과 기병 200명을 모집했다. 기원전 168년, 로마가 마케도니아를 침공하자 페르세우스는 겐티우스에게 지원금을 약속해야 했다. 겐티우스의 배가 로마를 공격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300 탈렌트의 금액이 언급되었고, 페르세우스는 자신의 측근 판타우쿠스를 보내 이 약속을 체결하게 했다. 메둔 (현재 몬테네그로 메둔)에서 인질 교환이 합의되었고, 겐티우스는 페르세우스의 맹세를 수락했다. 겐티우스는 올림피오를 사절단과 함께 페르세우스에게 보내 돈을 받아오게 했고, 조약은 테르마이크 만의 디움에서 일정한 의식을 거쳐 체결되었다. 마케도니아 기병대의 공식 행진이 열렸는데, 이는 일리리아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며, 기병대는 조약 비준 과정에서 마케도니아 측을 대표했을 것이다.

300 탈렌트는 펠라의 왕실 보물에서 꺼내 세었고, 일리리아인들은 자신들의 도장을 찍도록 허락받았다. 10 탈렌트의 선금이 겐티우스에게 전달되었고, 판타우쿠스가 이를 넘겨주자 겐티우스는 로마에 대한 적대 행위를 시작하라고 재촉받았다. 겐티우스가 리크니두스에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보낸 로마 사절 2명을 투옥하자, 페르세우스는 겐티우스가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동맹이라고 믿고 나머지 지원금을 회수했다.

3. 3. 권력 강화

겐티우스는 일리리아 왕국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다. 우선 모든 신민에게 단일 세금을 부과하고, 리수스와 스코درا에 있는 화폐 주조소를 왕실 통제하에 두어 재정을 중앙집권화했다.[1] 이때 겐티우스는 청동 동전을 발행했다. 셀체 호드에는 마케도니아 문장이 있는 겐티우스의 동전 두 개가 있으며,[1] 다른 동전에는 페타소스와 비슷한 모자를 쓰고 머리 주위에 토크를 두른 겐티우스의 모습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번개 또는 전쟁선인 렘비가 새겨져 있다.[1] 로마와의 전쟁 직전, 국가 재무부에는 금 약 12.25kg, 은 약 8.62kg, 일리리아 드라크마 12만 개, 로마 데나리우스 1만 3천 개가 있었다고 로마인들이 기록했다.[1]

겐티우스는 페르세우스와 함께 로도스를 로마와의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공동 사절단을 보냈다.[1] 또한 270척의 렘비 함대를 건설하여 아드리아해에서 적을 기다리고 있음을 보여주었다.[1] 그의 군대는 15,000명에 달했다.[1]

3. 4. 제3차 일리리아 전쟁

기원전 168년 1월/2월, 겐티우스는 리스스에서 15,000명의 병력과 렘비 함대를 소집하여 로마 영토로 진격, 로마의 동맹국인 바사니아를 포위 공격했지만 함락에는 실패하였다.[6] 그의 이복형제 카라반티우스는 보병 1,000명과 기병 50명을 이끌고 카비이를 공격했으나 도시 점령에 실패하고, 카라반디스의 밭을 황폐화시켰다.[6] 또한 8척의 렘비 함대로 에피다모와 아폴로니아의 해안 도시를 공격했다.[6]

한편, 겐티우스가 마케도니아의 페르세우스와 동맹을 맺고 로마 사절들을 체포했다는 소식을 들은 로마군 사령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님파에움의 겨울 주둔지에서 북쪽으로 이동하여 제네수스 강(슈쿰빈, 알바니아) 근처에 진영을 구축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새로운 로마 사령관인 프라에토르 루키우스 아니키우스 갈루스를 만났다.[6] 아니키우스는 이탈리아에서 아폴로니아로 건너온 군단과 동맹군을 합쳐 기병 1,600명, 보병 20,400명, 그리고 함대 선원 5,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6] 여기에 파르티니의 기병 200명과 보병 2,000명을 더하여, 로마군은 겐티우스 군대의 두 배가 넘는 병력을 갖추게 되었다.[6]

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아니키우스의 함대는 바다에서 일리리아 함대를 격파하고 여러 척의 렘비를 나포했다.[6] 이후 로마군은 육지에서 일리리아 군을 격파하고 일리리아 영토 깊숙이 진격하여, 협상을 통해 대부분 도시의 항복을 받아냈다.[6] 겐티우스는 남은 병력을 수도 슈코드라에 집결시켰다.[6] 아니키우스가 접근하자 일리리아인들은 도시 안으로 도망갔고, 겐티우스는 3일간의 휴전을 요청했다.[6]

휴전 3일째, 겐티우스는 로마 진영으로 가서 아니키우스에게 항복했고, 아니키우스는 그를 체포했다.[7][8][9] 슈코드라의 일리리아인들은 항복하고 로마 사절들을 석방했다.[6] 로마군은 슈코다르 호수 북쪽으로 진군하여 메테온(현재 몬테네그로의 메둔)에서 겐티우스의 왕비 테우타, 그의 형제 카라반티우스, 그의 아들 스케르딜라이데스와 플레라투스를 비롯한 일리리아 지도자들을 체포했다.[6]

이로써 겐티우스가 일으킨 전쟁은 30일 만에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10] 아니키우스는 아르디아에안 국가 북부 지역에서 추가 작전을 펼쳐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약탈했다.[10]

4. 유산

로마는 겐티우스에게 승리하면서 왕실 깃발, 전리품, 국왕의 가구, 보물 등을 압류했다. 전리품 판매로 얻은 수백만 세르테르티우스는 국고에 들어간 금과 은에 더해졌다.[11]

원로원의 결정에 따라 겐티우스와 그의 가족은 감시를 받기 위해 스폴레티움으로 보내졌으나, 스폴레티움 주민들이 왕가 감시를 거부하여 이구비움으로 이송되었다. 겐티우스의 사망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남아있다.[11]

일리리아에서 압수된 220척의 선박은 원로원의 법령에 따라 코르키라, 아폴로니아, 에피다무스 주민들에게 주어졌다. 로마는 전쟁에서 로마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던 코이나만을 제외하고, 적대 세력이었던 사람들의 도시, 건물, 공공 기관을 불태우고 철저히 약탈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전의 행정 방식을 유지하면서 매년 관리를 선출하고, 이전에 겐티우스에게 지불했던 세금의 절반만 로마에 지불했다. 연방 기반의 ''코이나''는 해체되었고, 각 단위는 지역 자치를 누리고 자체 화폐를 주조할 권리를 갖는 개별 ''코이논''으로 인정받았다.[11]

남부 일리리아 지역은 완전히 정복되었지만, 로마 군단은 북부 및 동부 영토를 정복하기 위해 약 100년 동안 더 노력을 기울였다.[11]

겐티아나 루테아(Gentiana lutea)의 강장 효능을 발견했을 가능성이 있는 겐티우스의 이름을 따서 ''겐티아나''(Gentiana) 속명이 지어졌다.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간행물 Kanuni i Lekë Dukagjinit dhe emri Lekë në gjuhën shqipe
[6] 서적 Before the State: Systemic Political Change in the West from the Greeks to the French Revolution Before the State: Systemic Political Change in the West from the Greeks to the French Revolution by Andreas Osiander
[7] 서적 Épire, Illyrie, Macédoine: mélanges offerts au professeur Pierre Cabanes
[8] 서적 Rome and the Mediterranean: Books XXXI-XLV of the History of Rome from its Foundation
[9] 서적
[10] 서적 A History of Macedonia: Volume III: 336-167 B.C.
[11] 웹사이트 LacusCurtius • Iguvium (Gubbio) — the Roman Mausoleum https://penelope.uch[...]
[12] 웹사이트 Bank of Albania http://www.bankofalb[...] 2009-03-23
[13] 웹사이트 Bank of Albania http://www.bankofalb[...] 2009-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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