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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살레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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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곤잘레스 전투는 1835년 10월 2일 멕시코 정부가 곤잘레스 정착민에게서 대포를 회수하려 하자 텍사스 민병대가 저항하면서 발발한 텍사스 혁명의 첫 번째 군사적 충돌이다. 1831년 멕시코 정부는 톤카와 인디언의 공격으로부터 곤잘레스 정착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대포를 지급했다. 1835년 9월, 멕시코 군대가 대포 회수를 시도하면서 곤잘레스 시민들은 "와서 가져가라(Come and Take It)"라는 문구가 적힌 깃발을 내걸고 저항했다. 전투는 텍사스 민병대의 승리로 끝났고, 이 사건은 텍사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 전투는 텍사스인들의 저항 정신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으로, 현재까지도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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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살레스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분쟁텍사스 혁명
날짜1835년 10월 2일
장소미국 텍사스주 곤잘레스
결과텍사스인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멕시코
교전국 2텍사스 민병대, 텍사스 육군
지휘관
멕시코군 지휘관프란시스코 데 카스타녜다
텍사스군 지휘관존 헨리 무어
병력 규모
멕시코군100명 용기병
텍사스군150명 민병대
사상자
멕시코군2명 사망, 1명 부상
텍사스군부상자 없음
기타텍사스 민병대에서 한 명이 말에서 떨어져 코피를 흘림 (반군 측의 유일한 사상자)
추가 정보
전투 전에 텍사스인들이 휘날렸다고 추정되는 "컴 앤 테이크 잇(넘어와서 가져가!)" 깃발을 보여주는 벽화

2. 배경

멕시코 정부는 1831년 톤카와 인디언의 습격을 방비하기 위해 곤살레스의 이주민에게 작은 대포를 지급했다. 산타 안나의 민병대 무장해제 명령에 따라 멕시코 정부는 그 대포를 회수하려고 했다.

텍사스인들이 대포 반환을 거부하자 멕시코령 텍사스의 군지휘관 도밍고 우가르테체아 대령은 프란시스코 카스타네다가 이끄는 100명의 기마병을 곤살레스에 파견했다. 이들은 1835년 9월 27일 곤살레스의 치안 판사 앤드류 폰튼에게 대포 반환을 지시하는 공문을 가지고 샌안토니오 데 벡사를 출발했다. 우가르테체아는 산타 안나의 중앙집권정부와 텍사스 이주민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음을 알고 카스타네다에게 가급적 무력 사용을 자제하도록 지시했다.[18]

9월 29일, 카스타네다 부대는 곤살레스 근처 과달루페 강에 도착했지만, 강 수위가 높고 18명의 텍사스 민병대(후에 "Old Eighteen"라고 함)가 지키고 있어 강을 건너지 못했다. 텍사스 민병대는 "Come and take it"(와서 가져가!)라는 문구가 새겨진 깃발을 내걸고 대포 반환을 거부했다. 이 대포는 스페인이 만든 6파운드 (2.7kg) 청동 포였으나, 1900년에 쓰여진 역사서에서는 철제라고 잘못 기재되기도 했다.

카스타네다는 폰튼에게 공문을 전달하려 했으나, 폰튼은 부재중이었다. 카스타네다는 폰튼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존 헨리 무어 대령이 이끄는 텍사스군은 인근에서 병력을 모았다. 텍사스군이 기습을 준비하는 동안, 카스타네다는 텍사스군이 140명 이상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안전하게 강을 건널 곳을 찾기 위해 상류로 이동했다.

2. 1. 멕시코 중앙집권 강화와 텍사스의 반발

1824년 멕시코 헌법은 국가의 이민 정책을 자유화하여 외국 이민자들이 멕시코령 텍사스와 같은 국경 지역에 정착하고 노예를 데려올 수 있도록 허용했다. 1825년, 미국인 그린 드윗은 400가구가 샌 마르코스와 과달루페 강이 합류하는 지점 근처 텍사스에 정착하는 것을 허가받았다.[4] DeWitt 식민지는 지역 Karankawa, Tonkawa, 코만치 부족의 공격 대상이 되었고, 1826년 7월 수도 곤잘레스를 파괴했다. 드윗이 카랑카와와 톤카와와 평화 조약을 협상한 후, 그 다음 해에 마을이 재건되었다. 코만치는 그 후 몇 년 동안 정기적으로 정착지를 습격했다.[5] 마을을 보호할 군대를 파견할 수 없었던 1831년, 이 지역의 정치 지도자는 대신 곤잘레스 정착민들에게 6파운더 대포를 보냈다.[6] 역사학자 토마스 릭스 린들리는 그린 드윗이 멕시코 당국에 대포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고, 그들은 요청 시 반환하는 조건으로 스페인제 6파운더 청동 대포를 대여해주는 것으로 응답했다고 진술했다. 린들리는 텍사스인들은 또한 구경이 1파운드 이하인 훨씬 더 작은 철제 대포를 가지고 있었다고 진술했다.[1] 작가 티모시 토디시는 6파운더에 대해 "말 경주를 시작하는 것 외에는 쓸모가 없는 작은 구멍이 뚫린 총"이라고 묘사했지만, 이는 약 57mm 구경으로 약 2.72kg 발사체를 발사하는 총이었다.

1829년 멕시코는 노예 제도를 폐지하고 멕시코 전역의 노예를 해방시켰지만, 테하스에 있는 미국 이민자들에게 예외를 두도록 협상했다. 1830년 4월, 멕시코는 기존 식민지에 합류하도록 이미 승인받지 않은 새로운 이민자들의 국경을 폐쇄했다. 1830년대 동안 멕시코 정부는 연방주의 정책과 중앙 집권 정책 사이에서 흔들렸다. 1835년 중앙 집권으로 급격히 기울면서 여러 멕시코 주가 반란을 일으켰다.[8] 6월, 텍사스에 있는 소수의 정착민들이 아나후악 소요로 알려진 사건에서 관세를 반대하기 위한 구실로 정치적 불안을 이용했다.[9] 연방 정부는 텍사스에 더 많은 군대를 파견하여 대응했다.[10]

여론은 극명하게 나뉘었다. 일부 지역 사회는 다양한 이유로 반란을 지지했다. 새로운 정책, 특히 노예 제도와 이민 금지, 그리고 법률 및 수입 관세의 강화는 많은 이민자들의 반란을 부추겼다.[11] 멕시코령 텍사스의 국경 지역은 대부분 미국에서 온 이민자들로 구성되었으며, 일부는 합법적이었지만 대부분은 불법이었다. 이러한 이민자 중 일부는 많은 수의 노예를 데려와서 1836년까지 총 38,470명으로 추정되는 비원주민 인구에 약 5,000명의 노예가 있었다.[12] 곤잘레스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멕시코 대통령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의 중앙 집권 정부에 충성을 선언했다.[13] 지역 지도자들은 다수의 정착민들이 독립, 연방주의로의 복귀 또는 현상 유지를 선호하는지 결정하기 위해 협의회 소집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일부 지도자들은 멕시코 관리들이 이러한 유형의 모임을 혁명으로 가는 단계로 볼까 우려했지만, 8월 말까지 대부분의 지역 사회가 10월 15일로 예정된 협의회에 대표를 파견하기로 합의했다.[14] 그 동안 많은 지역 사회가 군사 세력의 잠재적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텍산 민병대 대대를 결성했다.[10][15]

9월 10일, 멕시코 군인이 곤잘레스 주민을 폭행하여 광범위한 분노와 대중 시위를 촉발했다.[18] 멕시코 당국은 정착민들에게 무기를 남겨두는 것이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했다.[16] 텍사스 주 멕시코 군대의 사령관인 도밍고 데 우가르테체아 대령은 하사와 사병 5명을 보내 식민지 주민들에게 대여했던 대포를 회수하도록 했다.[18][16] 많은 정착민들은 멕시코 당국이 마을을 공격하고 민병대를 제거하기 위한 구실을 만들고 있다고 믿었다. 마을 회의에서 세 명의 시민이 공격을 막기 위해 총을 넘겨주는 것에 찬성했고, 알칼데 앤드루 폰톤을 포함한 나머지는 굳건히 맞서기로 투표했다.[17] 역사학자 스티븐 하딘에 따르면, "대포는 명예의 대상이자 예상치 못한 결집의 상징이 되었다. 곤잘레스 시민들은 긴장이 고조되는 시기에 무기를 넘겨줄 의향이 없었다."[18] 군인들은 대포 없이 마을에서 호송되었다.[18]

2. 2. 곤살레스의 대포

곤살레스 기념박물관의 대포


멕시코 정부는 1831년 곤살레스 정착민들에게 톤카와 인디언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작은 대포를 지급했다. 그러나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가 민병대 무장 해제를 명령하면서 멕시코 정부는 이 대포를 회수하려 했다.

멕시코령 텍사스의 군지휘관 도밍고 우가르테체아 대령은 프란시스코 카스타네다가 이끄는 100명의 기마병을 곤살레스에 파견했다. 이들은 1835년 9월 27일 곤살레스의 치안 판사 앤드류 폰튼에게 대포 반환을 지시하는 공문을 가지고 샌안토니오 데 벡사를 출발했다. 우가르테체아는 산타 안나의 중앙집권정부와 텍사스 이주민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음을 알고 카스타네다에게 가급적 무력 사용을 자제하도록 지시했다.

9월 29일, 카스타네다 부대는 곤살레스 근처 과달루페 강에 도착했지만, 강 수위가 높고 18명의 텍사스 민병대가 지키고 있어 강을 건너지 못했다. 텍사스 민병대는 "Come and take it"(와서 가져가!)라는 문구가 새겨진 깃발을 내걸고 대포 반환을 거부했다. 이 대포는 스페인이 만든 6파운드 (2.7kg) 청동 포였으나, 1900년에 쓰여진 역사서에서는 철제라고 잘못 기재되기도 했다.

카스타네다는 폰튼에게 공문을 전달하려 했으나, 폰튼은 부재중이었다. 카스타네다는 폰튼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존 헨리 무어 대령이 이끄는 텍사스군은 인근에서 병력을 모았다. 텍사스군이 기습을 준비하는 동안, 카스타네다는 텍사스군이 140명 이상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안전하게 강을 건널 곳을 찾기 위해 상류로 이동했다.

2. 3. 멕시코군의 파견과 텍사스 민병대의 결집

1831년 톤카와 인디언의 공격에 대한 방어 수단으로 곤잘레스 정착민들에게 작은 대포가 주어졌다. 산타 안나의 민병대 무장 해제 명령에 따라 멕시코 정부는 그 대포를 회수하려 했다. 텍사스인들이 대포 반환을 거부하자, 멕시코령 텍사스의 군사 사령관 도밍고 우가르테체아 대령은 프란시스코 카스타네다가 이끄는 100명의 기마병을 곤살레스에 파견했다. 이 분견대는 곤살레스 치안 판사 앤드류 폰튼에게 대포 반환을 지시하는 공문서를 가지고 1835년 9월 27일 샌안토니오 데 벡사를 출발했다.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의 중앙 집권 정부와 텍사스 정착민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음을 인지한 도밍고 우가르테체아는 프란시스코 카스타네다에게 가능하다면 무력 행사를 피하도록 지시했다.[18]

3. 곤살레스 전투

도밍고 데 우가르테체아는 앤드루 폰톤이 대여한 대포를 회수하기 위해 더 많은 병력을 보낼 것으로 예상했다. 첫 번째 병력이 곤잘레스를 떠나자마자 폰톤은 미나에 도움을 요청했다.[20] 300명에 달하는 병력이 곤잘레스로 진군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스티븐 F. 오스틴은 주변 공동체에 이 상황을 알리고 텍시언들에게 방어적인 입장을 유지하라고 경고했다.[20]

1835년 9월 27일, 프란시스코 데 카스타녜다 중위가 이끄는 100명의 용기병이 폰톤에게 대포 반환을 명령하기 위해 산안토니오 데 베하르를 떠났다.[18][20] 카스타녜다는 무력 사용을 피하라는 지시를 받았다.[18] 9월 29일, 병력이 곤잘레스 근처에 도착했을 때, 텍시언들이 과달루페 강의 나룻배와 배를 모두 제거한 것을 발견했다. 강 건너편에는 18명의 텍시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곤잘레스 텍시언 민병대 대장 앨버트 마틴은 폰톤이 시내에 없으니, 그가 돌아올 때까지 군대는 강의 서쪽에 머물러야 한다고 알렸다.[18][21]

카스타녜다와 그의 부하들은 강에서 약 274.32m 떨어진 곳에 야영했다. 텍시언 3명이 대포를 묻는 동안, 다른 텍시언들은 지원을 요청하러 갔다.[23] 그날 말, 페이에트와 콜럼버스에서 80명이 넘는 사람들이 도착했다.[22] 텍시언 민병대는 자체 지도자를 선출했는데, 존 헨리 무어가 대장으로, 조셉 워싱턴 엘리엇 윌리스와 에드워드 벌레슨이 각각 2위와 3위에 선출되었다.[23]

9월 30일, 카스타녜다는 대포를 다시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텍시언들은 우가르테체와 직접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4] 카스타녜다는 우가르테체에게 텍시언들이 증원군을 모으기 위해 지연 작전을 펼치고 있다고 보고했다.[25]

우가르테체는 곤잘레스 거주민 라운슬롯 스미스 박사에게 카스타녜다가 정착민들을 설득하도록 요청했다.[23] 10월 1일, 스미스는 민병대 대장 매튜 콜드웰을 만나 정착민들이 평화롭게 대포를 돌려주면 병사들은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콜드웰은 다음 날 아침 카스타녜다를 마을로 데려와 논의하도록 지시했다. 거의 같은 시각, 무어는 전쟁 회의를 소집했고, 회의는 즉시 전투를 시작하기로 결정했다.[26]

텍시언들은 대포를 파내어 수레 바퀴에 장착하고, 금속 조각을 모아 대포를 채웠다.[26] 1812년 전쟁 참전 용사인 제임스 C. 닐이 대포 지휘를 맡았다. 그는 전직 미국 육군 야전 포병 출신인 앨머론 디킨슨 등을 모아 텍시언의 첫 번째 포병대를 구성했다.[27] 지역 감리교 목사인 W. P. 스미스는 미국 독립 전쟁을 언급하는 설교로 그들의 활동을 축복했다.[26]

텍시언들이 공격 계획을 세우는 동안, 카스타녜다는 쿠샤타 인디언으로부터 140명 정도가 곤잘레스에 모여 있으며 더 많은 사람이 올 것이라는 정보를 얻었다. 멕시코 병사들은 강을 건널 안전한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10월 1일 밤, 그들은 이전 지점에서 약 11.27km 떨어진 상류에서 야영을 했다.[28]

곤잘레스 전투 현장의 기념비

3. 1. 전투의 전개

텍사스인들은 오후 7시경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절반도 안 되는 병력이 말을 타고 있었고, 멕시코 군인들을 추적하면서 진행 속도가 느려졌다. 자정 무렵 짙은 안개가 덮쳐 그들의 발길을 더욱 늦췄다. 오전 3시경 텍사스인들은 새로운 멕시코 진영에 도착했다. 개가 짖어 멕시코 군인들에게 경고했고, 멕시코 군인들은 발포하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텍사스 말 한 필이 공황 상태에 빠져 기수를 떨어뜨렸고, 기수는 코피를 흘렸다.[28] 존 헨리 무어와 그의 부하들은 동이 틀 때까지 빽빽한 나무 속에 숨어 있었다. 그들이 기다리는 동안, 일부 텍사스인들은 근처 밭을 습격하여 수박을 먹었다.[29]

어둠과 안개 속에서 멕시코 군인들은 그들을 포위한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추정할 수 없었다. 그들은 약 274.32m 떨어진 근처 절벽으로 물러났다. 오전 6시경 텍사스인들이 나무에서 나와 멕시코 군인들에게 발포하기 시작했다. 그레고리오 페레즈(Gregorio Pérez) 중위는 기병 40명을 이끌고 반격을 가했다. 텍사스인들은 나무 뒤로 물러나 일제 사격을 가해 멕시코 사병 한 명을 부상시켰다. 어떤 설명에 따르면, 대포가 포탄 발사 시 마차에서 떨어져 나왔다고 한다. 나무 사이에서 안전하게 기동할 수 없었던 멕시코 기병대는 절벽으로 돌아갔다.[29]

안개가 걷히자 카스타녜다는 스미더를 보내 두 지휘관 간의 만남을 요청했다. 스미더는 멕시코 군인들 틈에 나타난 것을 수상하게 여긴 텍사스인들에게 즉시 체포되었다.[29] 그럼에도 무어는 카스타녜다를 만나기로 동의했다. 무어는 그의 추종자들이 산타 안나의 중앙 집권 정부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고 산타 안나가 거부한 1824년 멕시코 헌법에 충실하다고 설명했다. 카스타녜다는 그들의 연방주의적 성향을 공유하지만 명령을 따라야 할 명예가 있다고 밝혔다.[2]

무어가 진영으로 돌아가자 텍사스인들은 중앙에 검은색으로 대포 그림이 그려진 "와서 가져가라(Come and Take It)"라는 문구가 적힌 수제 흰색 배너를 게양했다.[2] 그해 늦게 분실된 이 임시 깃발[1]은 미국 독립 혁명 시대의 슬로건인 "나를 밟지 마라(Don't Tread on Me)"를 연상시켰다.[30] 텍사스인들은 멕시코 진영을 향해 대포를 발사했다. 카스타녜다는 자신이 수적으로 열세이고 무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부대를 이끌고 산안토니오 데 베하르로 돌아갔다. 텍사스인들이 재장전을 끝내기 전에 병력은 사라졌다. 우가르테체아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카스타녜다는 "각하의 명령은 멕시코 군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고 철수하라는 것이었으므로, 그렇게 했다"고 적었다.[2]

3. 2. 멕시코군의 퇴각

안개가 걷히자 카스타녜다는 스미더를 보내 두 지휘관 간의 만남을 요청했다. 스미더는 멕시코 군인들 틈에 나타난 것을 수상하게 여긴 텍사스인들에게 즉시 체포되었다.[29] 그럼에도 무어는 카스타녜다를 만나기로 동의했다. 무어는 그의 추종자들이 산타 안나의 중앙 집권 정부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고 산타 안나가 거부한 1824년 멕시코 헌법에 충실하다고 설명했다. 카스타녜다는 자신도 연방주의적 성향을 공유하지만 명령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2]

무어가 진영으로 돌아가자 텍사스인들은 중앙에 검은색으로 대포 그림이 그려진 "와서 가져가라(Come and Take It)"라는 문구가 적힌 수제 흰색 깃발을 게양했다.[2] 그해 늦게 분실된 이 임시 깃발[1]은 미국 독립 혁명 시대의 슬로건인 "나를 밟지 마라(Don't Tread on Me)"를 연상시켰다.[30] 텍사스인들은 멕시코 진영을 향해 대포를 발사했다. 카스타녜다는 자신이 수적으로 열세이고 무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부대를 이끌고 산안토니오 데 베하르로 돌아갔다. 텍사스인들이 재장전을 끝내기 전에 병력은 사라졌다. 우가르테체아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카스타녜다는 "각하의 명령은 멕시코 군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고 철수하라는 것이었으므로, 그렇게 했다"고 적었다.[2]

"와서 가져가라" 깃발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이 전투는 멕시코군 2명의 사망으로 끝났고, 텍사스 측에서는 한 명이 말에서 떨어지면서 코피를 흘린 것이 유일한 피해였다. 이 작은 충돌은 텍사스인들에게 멕시코 군대에 대한 승리로 여겨졌다.[30] 군사적인 영향은 크지 않았지만, 정치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32] 이 전투를 계기로 많은 텍사스인들이 무기를 들고 멕시코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고, 중립적인 태도를 버렸다.[32] 스티븐 F. 오스틴은 "전쟁이 선포되었습니다... 캠페인이 시작되었습니다."라고 선언했다.[33] 이 소식은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가 많은 이들이 텍사스로 와서 멕시코와의 싸움에 참여하게 되었다.[32] 언론은 이 사건을 미국 독립 혁명의 시작점인 렉싱턴 전투에 비유하며 "텍사스의 렉싱턴"이라고 불렀다.[2]

전투 후, 멕시코의 산타 안나 대통령은 텍사스를 진압하기 위해 마르틴 페르펙토 데 코스 장군에게 군대를 이끌고 텍사스로 가도록 명령했다.[9] 코스 장군은 10월 2일 골리아드에 도착했고, 3일 후 곤잘레스 전투 소식을 듣고 산안토니오 데 베하르로 향했다.[34]

곤잘레스는 산타 안나에 반대하는 텍사스인들의 집결지가 되었고,[7] 10월 11일, 텍사스인들은 오스틴을 지휘관으로 선출했다. 오스틴은 코스 부대를 포위하기 위해 산안토니오 데 베하르로 진군했고,[35][36] 그해 말 텍사스인들은 텍사스에서 멕시코 군대를 몰아냈다.[37]

전투에 사용된 대포의 행방은 논란이 있다. 곤잘레스 대장장이 노아 스미스윅의 회고록에 따르면, 대포는 산안토니오 데 베하르로 가는 도중 문제가 생겨 곤잘레스 근처 개울에 묻혔다고 한다.[38] 1936년 홍수로 작은 철제 대포가 발견되었고, 패트릭 와그너 박사는 이 대포가 전투에 사용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미소니언 협회와 텍사스 대학교는 와그너의 대포가 당시 사용된 회전포의 일종이며, 오랫동안 습한 땅에 묻혀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39]

그러나 역사학자 토마스 릭스 린들리는 와그너 대포가 스미스윅의 설명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와그너 대포는 철제이고 6파운더보다 작다. 린들리는 멕시코 측 기록에 곤잘레스에 두 문의 대포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논란이 된 청동 6파운더 대포는 알라모 전투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1] 린들리는 청동 대포는 1852년에 발굴되어 샌안토니오의 교회 종으로 재주조되었고, 텍사스인의 작은 철제 대포는 1936년 홍수로 발견되어 현재 곤잘레스 기념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말한다.[1]

4. 1. 텍사스 혁명의 시작

공격으로 멕시코 군인 2명이 사망했고, 텍사스 측 사상자는 말에서 떨어진 한 명이 코피를 흘린 것이 전부였다. 데이비스는 이를 "한쪽이 싸우려고 하지 않은 사소한 교전"이라고 표현했지만,[30] 텍사스인들은 곧 이 사건을 멕시코 군대에 대한 승리로 선언했다.[30] 하딘은 군사적 영향력은 미미했지만, 이 교전의 "정치적 중요성은 헤아릴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32]

이 사건으로 많은 텍사스인들이 멕시코 군대에 맞서 무장 투쟁을 벌이게 되었고, 산타 안나 정부에 대한 중립적인 입장을 버렸다.[32] 전투 이틀 후, 오스틴은 샌펠리페 데 오스틴 공공 안전 위원회에 "전쟁이 선포되었습니다. — 여론은 군사적 독재에 반대하는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 캠페인이 시작되었습니다."라고 서신을 보냈다.[33]

원래 "윌리엄스 지역의 싸움"이라고 불렸던 이 교전은[2]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가 많은 모험가들이 텍사스로 와서 멕시코와의 싸움을 돕도록 장려했다.[32] 신문들은 이 분쟁을 "텍사스의 렉싱턴"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렉싱턴 콩코드 전투가 미국 혁명을 시작했듯이, 곤잘레스 교전이 텍사스 혁명을 시작했다는 의미였다.[2]

공식적으로 전투가 시작되기 전, 산타 아나는 텍사스의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 더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처남인 마르틴 페르펙토 데 코스 장군에게 약 500명의 군인을 텍사스로 데려오라고 명령했다.[9] 코스와 그의 부대는 10월 2일 골리아드에 도착했고, 3일 후 곤잘레스에서 일어난 사건을 알게 된 후 산안토니오 데 베하르로 떠났다.[34]

곤잘레스는 산타 아나의 정책에 반대하는 텍사스인들의 집결지가 되었다.[7] 10월 11일, 텍사스인들은 군사 훈련 부족에도 불구하고 오스틴을 만장일치로 지휘관으로 선출했다. 다음날, 오스틴은 코스의 군대를 포위하기 위해 산안토니오 데 베하르로 행진을 이끌었다.[35][36] 그해 말까지, 텍사스인들은 텍사스에서 모든 멕시코 군대를 몰아냈다.[37]

4. 2. "와서 가져가라"의 상징성

텍사스인들이 멕시코 진영을 향해 대포를 발사하기 직전인 1835년, 무어가 진영으로 돌아갔을 때 중앙에 검은색으로 대포 그림이 그려져 있고 "와서 가져가라(Come and Take It)"라는 문구가 적힌 수제 흰색 배너가 게양되었다.[2] 1835년 늦게 분실된 이 임시 깃발은[1] 미국 독립 혁명 시대의 슬로건인 "나를 밟지 마라(Don't Tread on Me)"를 연상시켰다.[30]

이 전투는 매년 10월 곤잘레스에서 열리는 ''와서 가져가세요'' 축제[40] 동안 재현된다. 곤잘레스와 그 주변에는 전투의 서막에 사용된 다양한 장소를 기념하는 9개의 텍사스 역사 표지판이 있다.[41]

"와서 가져가라"라는 슬로건은 현재 총기 소유 권리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5. 올드 에이틴(Old Eighteen)

"올드 에이틴(Old Eighteen)"은 멕시코가 곤잘레스 대포를 되찾으려는 시도를 텍사스 민병대가 도착할 때까지 지연시킨 18명의 텍시안들을 지칭하며, 이는 뒤이은 곤살레스 전투를 촉발했다.[19] 이 문구는 올드 쓰리 헌드레드(Old Three Hundred)를 패스티쉬한 것이다.

텍사스 혁명의 첫 번째 전투였기 때문에 "텍사스의 렉싱턴"이라고 불렸던 곤잘레스 전투에서 싸우는 텍시안 병사들의 박물관 벽화

5. 1. 명단

"올드 에이틴(Old Eighteen)"은 멕시코가 곤잘레스 대포를 되찾으려는 시도를 텍사스 민병대가 도착할 때까지 지연시킨 18명의 텍시안들을 지칭하며, 이는 뒤이은 전투를 촉발했다.[19] 이 문구는 "올드 쓰리 헌드레드(Old Three Hundred)"를 패스티쉬한 것이다.

이름
윌리엄 W. 애링턴(William W. Arrington)
시메온 베이트먼(Simeon Bateman)
발렌타인 베넷(Valentine Bennet)
조셉 D. 클레멘츠(Joseph D. Clements)
알몬 코틀(Almon Cottle) (불멸의 32인의 형제)
제이콥 C. 다스트(Jacob C. Darst) (또한 불멸의 32인)
조지 W. 데이비스(George W. Davis)
알마론 디킨슨
그레이브스 풀처(Graves Fulchear)
벤자민 푸쿠아(Benjamin Fuqua)
제임스 하인즈(James Hinds)
토마스 잭슨(Thomas Jackson) (또한 불멸의 32인)
앨버트 마틴 (Albert Martin) (또한 불멸의 32인)
찰스 메이슨(Charles Mason)
토마스 R. 밀러(Thomas R. Miller) (또한 불멸의 32인)
존 소웰(John Sowell)
윈슬로우 터너(Winslow Turner)
에제키엘 윌리엄스(Ezekiel Williams)


6. 기념

곤살레스 전투는 텍사스 혁명의 시작을 알린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전투는 미국 독립 혁명을 촉발한 렉싱턴 콩코드 전투에 비견되며, "텍사스의 렉싱턴"으로 불리기도 했다.[2]

전투 이후 많은 미국인 모험가들이 텍사스로 와서 멕시코와의 싸움에 합류했다.[32] 곤살레스는 멕시코의 산타 안나 정책에 반대하는 텍사스인들의 집결지가 되었다.[7]

전투에 사용된 대포의 행방은 논란의 대상이다. 1936년 곤살레스 근처 홍수 때 작은 철제 대포가 발견되었는데, 이 대포가 전투에 사용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39] 그러나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 대포가 노아 스미스윅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으며, 실제 전투에 사용된 대포는 청동 6파운더 대포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1]

오늘날 곤살레스에서는 매년 10월 이 전투를 기념하는 '와서 가져가세요' 축제가 열린다.[40] 곤잘레스와 그 주변에는 전투와 관련된 여러 장소에 9개의 텍사스 역사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41]

참조

[1] 웹사이트 Gonzales Come and Take It Cannon https://www.tshaonli[...] Texas State Historical Association 2020-07-31
[2] 서적 1994
[3] 간행물 Gonzales County http://www.tshaonlin[...] Texas State Historical Association
[4] 서적 1994
[5] 서적 1994
[6] 서적 1994
[7] 서적 1998
[8] 서적 1998
[9] 서적 1994
[10] 서적 1992
[11] 서적 1998
[12] 웹사이트 The Transformation of the Texas Economy https://texaspolitic[...] University of Texas at Austin
[13] 서적 1992
[14] 서적 1992
[15] 서적 2006
[16] 서적 1998
[17] 서적 2006
[18] 서적 1994
[19] 웹사이트 OLD EIGHTEEN https://tshaonline.o[...] 2010-06-15
[20] 서적 2006
[21] 서적
[22] 서적 2006
[23] 서적 1994
[24] 인용
[25] 서적 2006
[26] 서적 1994
[27] 서적 2006
[28] 서적 1994
[29] 서적 1994
[30] 서적 2006
[31] 서적 1990
[32] 서적 1994
[33] 서적 2004
[34] 간행물 Goliad Campaign of 1835 http://www.tshaonlin[...] Texas State Historical Association
[35] 서적 1994
[36] 서적 Winders 2004
[37] 서적 Barr 1990
[38] 서적 The Evolution of a State, or, Recollections of Old Texas Days University of Texas Press 1900
[39] 간행물 Southwestern Collection http://www.tshaonlin[...] 2008-12-02
[40] 웹사이트 Chamber of Commerce https://web.archive.[...] 2016-04-19
[41] 서적 Groneman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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