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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진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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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곽진은 후한 시대의 인물이다. 어려서 소두율을 익혔으며, 연광 연간에 상서가 되었다. 125년 손정이 강경을 죽이고 순제를 옹립할 때 우림을 이끌고 염경을 격살하여 공을 세웠고, 정영후에 봉해졌다. 이후 하남윤, 정위를 역임했으나 면직되었고, 129년에 사망했다. 곽진은 순제에 의해 소무후로 시호되었으며, 아들 곽시가 작위를 이었다.

2. 생애

곽진은 후한 사람으로, 어릴 때부터 집안에서 전해 내려오는 소두율(小杜律)을 공부했다. 태위부에 임명되었고, 연광 연간에는 상서(尙書)가 되었다.

125년 순제 옹립 당시 중황문(中黃門) 손정이 중상시(中常侍) 강경(江京)을 죽이고, 곽진은 우림을 이끌고 위위 염경을 죽이는 공을 세웠다.[2] 그 공으로 상서령(尙書令)이 되었고, 태부와 삼공들은 곽진의 공적을 전한성양경왕과 같다고 칭송하며 정영(定潁侯)에 봉하고 식읍 2천 호를 내렸다. 이후 하남윤을 거쳐 정위로 승진했다가 면직되었다.

영건 4년(129년)에 사망했으며, 아들 곽시가 작위를 이었다.[1]

2. 1. 초기 생애 및 관직 생활

어려서 집안 대대로 전수된 소두율(小杜律)을 익혔다. 태위부에 벽소되었고, 연광 연간에 상서(尙書)가 되었다.

125년 (연광 4년) 11월, 중황문(中黃門) 손정이 중상시(中常侍) 강경(江京) 등을 살해하고 순제를 옹립하자, 곽진은 우림의 사졸을 이끌고 위위 염경을 격살했다.[2] 곧 상서령(尙書令)이 되었고, 태부와 삼공들이 곽진의 공적을 전한성양경왕과 같다고 칭송하여 정영(定潁侯)에 봉해지고 식읍 2천 호를 받았다. 이후 하남윤을 지냈고, 정위로 옮겨졌다가 면직되었다.

2. 2. 순제 옹립과 공적

어려서 집안 대대로 전수된 소두율을 익혔다. 태위부에 벽소되었고, 연광 연간에 상서(尙書)가 되었다.

125년 순제를 옹립할때, 중황문(中黃門) 손정이 중상시(中常侍) 강경(江京)을 죽이고, 곽진은 우림을 이끌고 위위 염경을 죽여 공을 세웠다.[2] 곧 상서령(尙書令)이 되었고, 태부와 삼공들이 곽진의 공적을 전한성양경왕과 같다고 칭송하여 정영(定潁侯)에 봉해지고 식읍 2천 호를 받았다. 이후 하남윤을 지냈고, 정위로 옮겨졌다가 면직되었다.

2. 3. 사망과 후계

영건 4년(129년)에 곽진이 죽자, 아들 곽시가 작위를 이었다.[1] 곽진의 장남 곽하는 작위를 이을 예정이었으나, 막내 아우와 함께 도망쳤다. 수년 후, 대홍려의 명에 따라 주군의 추격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출두하여 봉해졌고, 관직을 역임하여 정위에 올랐다. 사후에 성후(成侯)로 시호되었다. 곽진의 아들 곽정 또한 법률에 밝았으며, 정위에 올랐다.

3. 가계

관계이름비고
장남곽하작위를 이을 예정이었으나 동생과 도망쳤다. 대홍려의 명으로 주군의 추격을 받고 출두하여 봉해졌다. 정위에 올랐으며, 사후 성후(成侯)로 시호되었다.
차남곽정법률에 밝았으며, 정위에 올랐다.


참조

[1] 서적 東観漢記
[2] 서적 後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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