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발렌티노
1. 개요
교황 발렌티노는 827년 5월부터 같은 해 9월까지 재위한 교황이다. 로마에서 태어나 라테라노 궁전에서 수학했으며, 교황 파스칼 1세에게 부제로 서품받은 후 수석부제로 임명되었다. 에우제니오 2세 사후 로마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교황으로 즉위했으나, 사제로 서품되기 전에 교황으로 선출되어 이례적인 사례로 기록되었다. 그의 선출은 로마 귀족들의 영향력 확대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10세기 교황청이 로마 귀족의 영향 아래 놓이는 암흑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발렌티노는 40일간 재위하며 자비로운 사목자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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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7년 사망 -
교황 에우제니오 2세
교황 에우제니오 2세는 824년부터 827년까지 재위했으며, 로마 시민의 지지를 받아 선출되어 프랑크 왕국과의 관계를 다지고 교회 규율 회복, 빈민 구제 정책을 시행하며 북유럽 선교를 지원했다. -
827년 사망 -
아가보디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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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우토카
라우토카는 피지 비치레부섬 서부에 위치한 피지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서부 지방의 행정 중심지로, 사탕수수 산업이 발달하여 "설탕 도시"로 알려져 있으며, 인도에서 온 계약 노동자들의 거주와 미 해군 기지 건설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피지 산업 생산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는 주요 기관들이 위치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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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넛
코코넛은 코코넛 야자나무의 열매로 식용 및 유지로 사용되며, 조리되지 않은 과육은 100g당 354kcal의 열량을 내는 다양한 영양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코코넛 파우더의 식이섬유는 대부분 불용성 식이섬유인 셀룰로오스이며, 태국 일부 지역에서는 코코넛 수확에 훈련된 원숭이를 이용하는 동물 학대 문제가 있다. -
9세기 대주교 -
교황 파스칼 1세
교황 파스칼 1세는 98대 교황으로, 프랑크 황제 루트비히 1세의 승인 하에 동로마 제국의 성상 파괴 운동을 피해 망명한 수도자들을 보호하고 로마의 여러 성당을 재건 및 장식하는 데 힘썼으며, 특히 성녀 체칠리아의 유해를 찾아 산타 체칠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을 재건하고 산타 프라세데 성당을 보수하는 데 기여한 후 시성되었다. -
9세기 대주교 -
교황 레오 4세
교황 레오 4세는 847년부터 855년까지 재위하며 사라센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로마 성벽을 보수하고 오스티아 해전에서 승리했으며, 파괴된 성당들을 재건하고 세 차례의 시노드를 소집했다.
2. 약력
로마 태생으로 로마인 귀족 레온티우스의 아들이라고 전해진다. 어릴 적부터 학업에 소질이 보였던 발렌티노는 라테라노 궁전에 부속된 학교에 다녔으며, 교황 파스칼 1세(817년 ~ 824년)으로부터 부제로 서품받았다고 한다. 발렌티노의 능력을 눈여겨 본 파스칼 1세는 얼마 안 있어 그를 수석부제로 서임하였다. 파스칼 1세 뿐만 아니라 그의 후임자인 교황 에우제니오 2세 또한 발렌티노를 중용했으며, 이 때문에 한때 그가 사실 에우제니오 2세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퍼지기도 하였다. 교황 연대기라틴어의 발렌티노 전기 작가는 그의 경건함과 도덕적 순수성을 칭찬했으며, 이는 파스칼 1세의 호의를 얻어 그를 대부제의 지위로 승진시켰다고 한다. 루이-마리 드코르메닌에 따르면, 발렌티노와 에우제니오가 부적절한 관계에 있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에우제니오 2세가 선종한 후, 발렌티노는 로마 성직자, 귀족, 백성들로부터 교황으로 추대되었다. 그들은 그를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에서 데려와 라테라노 궁전에 앉혔으며, 그의 항의는 무시되었다. 서두른 나머지 그들은 그가 사제 서품을 받기도 전에 그를 즉위시켰다. 이것은 일반적인 절차의 이례적인 번복이었으며, 실제로 교황청 기록 역사상 처음 일어난 일이었지만, 교황 베네딕토 3세의 교황 재위 기간에도 반복되었다. 그 다음 일요일에 그는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정식으로 주교 서임을 받았다. 한편 발렌티노는 40일간 베드로좌에 있으면서 자비롭고 관대한 사목자로 평판이 높았다.
3. 유산
발렌티노의 선출은 로마 귀족의 교황 선거 과정에 대한 영향력이 증가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징표였다. 로마 귀족들은 자신들의 사람을 선출하는 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선거 자체에도 참여했다. 스테파노 3세 치하의 769년 라테라노 공의회는 교황 선출이 오직 로마 성직자들의 책임이며, 귀족은 교황이 선택되고 즉위한 후에야 존경을 표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이 공의회의 칙령은 817년의 루도비쿠스 협약에 의해 폐지되었고, 로마 평신도 귀족이 교황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교황 선거 과정에 대한 점진적인 침해는 10세기에 절정에 달했고, 이 시기에 교황청(papacy)은 로마 귀족의 장난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