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드로 대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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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 베드로 대성전은 로마의 4대 성전 중 하나로, 바티칸 시국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다. 기독교 세계의 성지 중 하나로, 사도 베드로가 묻힌 곳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의 대성전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건설한 옛 대성전을 대체하기 위해 16세기 초부터 17세기 초까지 여러 건축가들의 설계를 거쳐 완성되었다. 미켈란젤로가 설계를 대폭 수정하고 돔을 재설계하는 등 건축 과정에 크게 기여했으며, 베르니니는 발다키노, 베드로의 의자, 성 베드로 광장 등을 설계했다. 대성전 내부에는 100개가 넘는 무덤과 다양한 예술 작품, 조각상, 수공예품들이 있으며, 1984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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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대성전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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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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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바티칸 시국 |
봉헌 대상 | 성 베드로 |
종파 | 가톨릭교회 |
독립 교회 | 라틴 교회 |
전례 | 로마 전례 |
지위 | 교황의 주요 대성전 |
건축 양식 | 르네상스 건축, 바로크 건축 |
수용 인원 | 스탠딩: 60,000명 좌석: 20,000명 |
길이 | 220m |
너비 | 150m |
최대 높이 | 136.6m |
네이브 높이 | 46.2m |
돔 외부 지름 | 42m |
돔 내부 지름 | 41.5m |
축성 날짜 | 1626년 11월 18일 |
웹사이트 | 성 베드로 대성당 |
건축 | |
건축가 | 베르나르도 로셀리노 줄리아노 다 상갈로 도나토 브라만테 라파엘로 산치오 조반니 조콘도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 발다사레 페루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도메니코 폰타나 자코모 델라 포르타 자코포 바로치 다 비뇰라 피로 리ഗോ리오 카를로 마데르노 잔 로렌초 베르니니 프란체스코 보로미니 |
기공 | 1506년 4월 18일 |
완공 날짜 | 1626년 11월 18일 |
교구 | |
교구 | 로마 교구 |
수석 사제 | 마우로 감베티 |
세계 문화 유산 지정 정보 | |
지정 종류 | 문화 유산 |
공식 명칭 | 바티칸 시국 |
지정 날짜 | 1984년 (제8차 세계 유산 위원회) |
지정 번호 | 286 |
지정 기준 | i, ii, iv, vi |
지역 | 유럽 및 북미 |
2. 지위
성 베드로 대성전은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과 함께 로마의 4대 주요 바실리카 가운데 하나이다.[120] 이 지위는 성 베드로 대성전에 전 세계 모든 소 바실리카보다 우선하는 지위를 부여한다. 그러나 다른 모든 교황 주요 바실리카와 달리, 성 베드로 대성전은 전적으로 바티칸 시국의 영토 내에 있으며, 따라서 이탈리아가 아닌 바티칸 시국의 주권적 관할권에 속한다.[14]
성 베드로 대성전은 세계 최대 규모의 교회 건축물이다.[64] 4세기경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처음 지어졌을 때는 목조 천장을 가진 바실리카 양식의 교회당이었다.[67] 그러나 16세기에 이르러 건물이 낡고 손상되자, 교황 율리오 2세는 재건 계획을 세웠다.[65]
이곳은 바티칸 시국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며, 기독교와 가톨릭 전통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 중 하나로 여겨진다.[121] 전통적으로 이곳은 예수의 열두 사도의 수장이자, 최초의 안티오키아 주교이자 로마 주교였던 성 베드로의 묘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첫 번째 교황으로 여겨진다. 신약성경에는 로마에서 성 베드로가 순교했다는 언급이 없지만, 교회 교부들의 저술을 바탕으로 한 전통에 따르면 그의 무덤은 "고해소" 내의 바실리카의 발다키노와 제단 아래에 있다.[118]
성 베드로 대성전은 교황의 공식적인 자리도 아니고 로마의 주요 바실리카 중 첫 번째도 아니다. 이 영예는 교황의 주교좌 성당인 성 요한 대성당이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가톨릭 교회와 친교를 이루는 모든 교회의 모 교회이다. 그러나 성 베드로 대성전은 규모, 교황 관저와의 근접성, 바티칸 시국 내 위치로 인해 대부분의 교황 전례와 의식이 이곳에서 열리기 때문에 기능적으로는 교황의 주요 교회이다.[122] 성 베드로의 의자 또는 교황좌는 때때로 성 베드로 자신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대머리 카를의 선물이었고 많은 교황이 사용했던 고대 의자는 성 베드로에서 재위 교황에 이르기까지 사도 계승의 지속적인 계열을 상징한다. 이는 바실리카의 앱스에 높은 위치를 차지하며, 교회 박사들에 의해 상징적으로 지지되고 성령에 의해 상징적으로 계몽된다.[15]
3. 역사
1506년, 도나토 브라만테의 설계안이 채택되어 십자형 평면 중심에 대형 돔을 얹는 방식으로 착공되었다.[65] 브라만테 사후 공사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으나, 1546년 교황 율리오 3세가 미켈란젤로에게 공사 수행을 명하면서 재개되었다.[66] 미켈란젤로는 브라만테의 안을 바탕으로 중앙 돔을 강조하는 웅장한 설계를 통해 공사를 진행했다. 미켈란젤로 사후에도 여러 건축가들이 참여하여 1589년에 거의 원안대로 완공되었다.[66]
현재의 성당은 1626년에 완성된 두 번째 건물이다. 높이 약 120m, 최대 폭 약 156m, 길이 211.5m, 총면적은 49,737m2에 달한다. 르네상스 건축과 바로크 건축 양식을 거쳐 로마 교황에게 걸맞은 거대한 규모로 재건되었으며,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건축에 참여했다.
원래 로마 교황의 주교좌 성당은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이었으나, 아비뇽 유수로 인해 라테라노 궁전이 황폐해지면서 1377년부터 성 베드로 대성전이 로마 교황의 자리소가 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전(Basilica di San Pietro in Vaticano)이라는 명칭은 '바티칸 언덕에 있는 성 베드로의 바실리카'라는 뜻이다. 여기서 '바실리카'는 로마 건축에서 초기 기독교 건축으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바실리카 양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 교황에게 종교적 특권을 부여받은 일곱 개의 교회당 중 하나임을 의미한다.[68]
건축에 참여한 교황들은 다음과 같다.교황 재위 기간 율리오 2세 1503년 - 1513년 레오 10세 1513년 - 1521년 하드리아노 6세 1522년 - 1523년 클레멘스 7세 1523년 - 1534년 바오로 3세 1534년 - 1549년 율리오 3세 1550년 - 1555년 마르첼로 2세 1555년 바오로 4세 1555년 - 1559년 비오 4세 1559년 - 1565년 성 비오 5세 1566년 - 1572년 그레고리오 13세 1572년 - 1585년 식스토 5세 1585년 - 1590년 우르바노 7세 1590년 그레고리오 14세 1590년 - 1591년 인노첸시오 9세 1591년 클레멘스 8세 1592년 - 1605년 레오 11세 1605년 바오로 5세 1605년 - 1621년 그레고리오 15세 1621년 - 1623년 우르바노 8세 1623년 - 1644년 인노첸시오 10세 1644년 - 1655년
3. 1. 성 베드로의 매장 장소
Sanctus Petrus|성 베드로la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이자 초대 교황으로, 로마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유해는 바티카누스 언덕 위 비아 코르넬리아로 통하는 인근 길, 이교도와 그리스도인의 공동묘지에 묻혔다고 전해진다.[40] 베드로의 무덤은 처음엔 기념비 없이 그의 이름을 상징하는 붉은 돌만 있는 단순한 형태였다.[40]
전통에 따르면 베드로의 유해는 원형 경기장 바로 바깥쪽, 코르넬리아 가도 건너편 바티칸 언덕의, 죽은 장소에서 150m 이내에 묻혔다. 코르넬리아 가도는 원형 경기장의 북쪽 벽을 따라 동서로 뻗어 있는 도로였으며, 현재는 성 베드로 대성전과 성 베드로 광장의 남쪽 부분에 덮여 있다. 몇 년 후 이 장소에 신사가 세워졌고, 거의 300년 후 옛 성 베드로 대성전이 이 부지 위에 건설되었다.[40]
1950년 12월 23일, 교황 비오 12세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성 베드로의 무덤을 발굴했다는 소식을 전 세계에 알렸다.[25] 이는 9세기 이래 접근하기 어려웠던 대성전 지하실 아래 구역을 10년간 조사하고 탐구한 결과였다. 매장 장소는 1세기에 교황 아나클레토가 지은 것으로 여겨지는 건물보다 위에 있는 지하 공간인 듯하다.
역사적으로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했다는 확실한 자료는 없기에, 건설 부지가 실제로 베드로의 묘지였는지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반론이 있었다.[69] 1939년부터 시작된 발굴 조사에서 대성당 지하에서 묘비와 트로페움(제단 기둥)이 발견되었고,[70] 네크로폴리스(묘지)의 전체 모습도 밝혀졌다.[71] 그러나 이것이 베드로의 것임을 확증할 수는 없다. 다만 트로페움에서는 고대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동전도 발견되어, 당시부터 숭배 대상이었음이 밝혀졌다.[69]
현재 내부 일부를 견학할 수 있는 네크로폴리스는 전체 길이 60m 정도의 통로 양쪽에 크고 작은 약 20개의 집 모양 묘소(마우솔레움)가 늘어서 있다. 베드로의 묘로 여겨지는 부분 위에는 '붉은 벽'이 있고, 그곳에 트로페움이 세워져 있었다. 이 장소는 '캄포 P'라고 불린다.[71] 네크로폴리스는 현재 성당 지하(그로타) 바닥에서 6m 아래, 현재 대성당 바닥에서 10m 아래에 있다.[71] '캄포 P' 위에는 콘페시오네가 있으며, 그 안쪽에는 '붉은 벽'을 뚫는 형태로 '바리움의 벽감'이 놓여 있다. 이 벽감 바로 위에는 교황의 제단이 있다. 이것들은 베드로의 묘 위치를 알리기 위한 배치이다.[71]
3. 2. 옛 대성당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지시로 326년에서 333년 사이에 건설된 4세기 성당이다. 동쪽 끝에 나온 부분에서부터 넓은 중랑(中廊)과 양쪽 통로가 있는 전형적인 라틴 십자가 양식이었다. 당시 넓이가 103.6m를 넘었으며, 입구는 거대한 열주 안뜰 앞에 있었다. 이 성당은 성 베드로가 묻힌 곳이라고 믿어진 작은 성소 위에 건립되었다.[123] 이곳에는 15세기까지 성 베드로를 시작으로 대다수 교황을 포함한 수많은 무덤과 기념비가 세워졌다. 지금의 대성당이 건립된 이후, 두 건물을 구별하고자 전에 사용했던 성당은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이라고 부른다.[123]
3. 3. 개축 계획
교황 니콜라오 5세(1447–1455)는 아비뇽 유수로 인해 옛 성 베드로 대성전이 노후화되자 재건축을 처음으로 고려했다. 그는 레오네 바티스타 알베르티와 베르나르도 로셀리노에게 옛 성당의 보수 공사를 맡겼고, 로셀리노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대성당의 설계 또는 옛 대성당의 대대적인 변경 설계를 맡겼다. 그러나 니콜라오 5세의 통치는 정치적 문제로 좌절되었고, 그가 죽었을 때 이루어진 것은 거의 없었다.[130] 다만, 그는 대성당을 짓는 데 필요한 돌 2,522개를 콜로세움에서 가져오도록 하였다.[40]
교황 율리오 2세는 옛 건물을 헐고 새로운 대성당을 짓기로 결정했다. 1505년, 율리오 2세는 옛 대성당을 철거하고 자신의 거대한 무덤을 안치할 기념비적인 구조물로 대체하기로 결정했다.[33] 설계 공모가 시행되었고, 우피치 미술관에 여러 설계안이 보존되어 있다. 이후 120년 동안 수많은 교황과 건축가들이 건축 사업을 이어갔다.
다음은 건축에 참여한 교황들의 목록이다.
교황 | 재위 기간 |
---|---|
율리오 2세 | 1503년 - 1513년 |
레오 10세 | 1513년 - 1521년 |
하드리아노 6세 | 1522년 - 1523년 |
클레멘스 7세 | 1523년 - 1534년 |
바오로 3세 | 1534년 - 1549년 |
율리오 3세 | 1550년 - 1555년 |
마르첼로 2세 | 1555년 |
바오로 4세 | 1555년 - 1559년 |
비오 4세 | 1559년 - 1565년 |
성 비오 5세 | 1566년 - 1572년 |
그레고리오 13세 | 1572년 - 1585년 |
식스토 5세 | 1585년 - 1590년 |
우르바노 7세 | 1590년 |
그레고리오 14세 | 1590년 - 1591년 |
인노첸시오 9세 | 1591년 |
클레멘스 8세 | 1592년 - 1605년 |
레오 11세 | 1605년 |
바오로 5세 | 1605년 - 1621년 |
그레고리오 15세 | 1621년 - 1623년 |
우르바노 8세 | 1623년 - 1644년 |
인노첸시오 10세 | 1644년 - 1655년 |
4. 건축
성 베드로 대성당은 바티칸 시국의 테베레 강 서쪽, 자니콜로 언덕과 하드리아누스 영묘 근처에 있는 르네상스 양식의 교회이다. 중앙의 돔이 로마의 스카이라인을 지배하며, 성 베드로 광장을 통해 성당으로 들어갈 수 있다. 성 베드로 광장은 높은 열주로 둘러싸여 있으며, 타원형 공간과 사다리꼴 공간으로 나뉜다. 열주로 이루어진 거대한 오더를 갖춘 바실리카의 정면(파사드)은 광장 끝에 있으며, 베드로와 바울의 5.55m 조각상이 있는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다.[12][10]
바실리카는 십자형이며, 라틴 십자가 형태의 긴 내부 통로를 가지고 있지만, 초기 설계는 중앙 집중식 구조였고 이는 건축물에서도 나타난다. 중앙 공간은 세계에서 가장 큰 돔 중 하나에 의해 지배된다. 입구는 건물 전체에 걸쳐 있는 나르텍스(입구 홀)를 통하며, 나르텍스의 장식된 청동 문 중 하나는 성년에만 열리는 성스러운 문이다.[12]
내부 크기는 다른 교회에 비해 매우 크다.[3] 중앙 돔으로 이어지는 내부 통로는 3개의 구획(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교회의 가장 높은 배럴 볼트를 지지하는 기둥이 있다. 내부 통로는 여러 개의 예배당이 있는 넓은 통로로 둘러싸여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 내부는 대리석, 부조, 건축 조각 및 도금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바실리카에는 교황과 저명한 인물들의 무덤이 많으며, 그중 많은 수가 뛰어난 예술 작품으로 여겨진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포함하여 틈새와 예배당에 여러 조각품이 있다. 중앙의 발다키노(천개)는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디자인했으며, 후진에는 베르니니가 제작한 ''성 베드로의 옥좌'' 조각 앙상블이 있다.
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 자금 조달을 위해 면죄부 발행이 사용되었다. 마인츠 및 마그데부르크 대주교 알브레히트는 로마 교황청에 진 빚을 갚기 위해 이 방식을 적극 추진했다. 그는 독일 도미니크회 설교자 요한 테첼을 임명했는데, 그의 판매 방식은 큰 논란을 일으켜 종교 개혁의 원인이 되었다.[32]
성 베드로 대성당은 세계 최대 규모의 교회 건축물이다.[64] 4세기 창건 당시에는 목조 천장을 얹은 바실리카 양식(장당식) 교회였으나, 16세기에 낡고 손상되어 교황 율리오 2세가 재건 계획을 세웠다.[65] 십자형 평면 중심에 대형 돔을 얹는 브라만테의 안이 채택되어 1506년에 착공되었고,[65] 미켈란젤로 등 여러 건축가가 공사에 참여하여 1589년에 거의 원안대로 완료되었다.[66]
현재 성당은 1626년에 완성된 두 번째 건물이다. 높이 약 120m, 최대 폭 약 156m, 길이 211.5m, 총면적 49,737m2이다. 교회당 앞에는 장경 200m, 단경 165m의 성 베드로 광장이 있고, 북쪽에는 바티칸 궁전, 남쪽에는 교황 알현소와 보물관이 있다.
르네상스 건축과 바로크 건축을 거쳐 로마 교황에게 어울리는 거대한 교회당으로 재건되었으며,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건축에 참여했다. 웅장함, 장엄함, 내부 장식의 화려함 등 모든 면에서 '성당 중의 성당'이라 불릴 만하다.
원래 콘스탄티누스 1세가 성 베드로의 묘로 여겨지는 곳을 참배하기 위해 순교자 기념 교회당으로 건설했다.[67] 14세기까지 로마 주교(현재 로마 교황)의 주교좌 성당은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이었다. 아비뇽 유수로 라테라노 궁전이 황폐해지자, 1377년 로마로 돌아온 교황에 의해 로마 교황의 자리소가 되었다. 최초 교회당은 대성당이 아닌 성 베드로 묘지 순례를 위해 설계되었기에, 동쪽을 향해야 할 앱스가 서쪽을 향하고 동쪽에 입구가 설치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이탈리아어 명칭은 Basilica di San Pietro in Vaticano (바티칸 언덕 위 성 베드로의 바실리카)이지만, '바실리카'라는 명칭은 로마 건축에서 초기 기독교 건축으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바실리카 양식 때문이 아니다. 현재 가톨릭 교회에서 중요한 교회당이나 대성당에 바실리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원래는 로마 교황에게 종교적 특권을 부여받은 일곱 개 교회당 중 하나임을 의미한다. 현재 성당은 전통적인 바실리카 양식의 교회 건축은 아니다.
4. 1. 계속된 계획들
율리오 2세는 설계 공모를 통해 브라만테의 설계안을 선정하여 1506년에 공사를 시작했다.[124] 브라만테의 설계안은 그리스 십자가 형태였으며, 건물의 돔은 판테온의 영향을 받았다.[124] 브라만테가 죽은 후 줄리아노 다 상갈로, 프라 조콘도, 라파엘로가 그 뒤를 이었으며, 라파엘로는 설계를 변경하여 중랑에 다섯 개의 공간 구획을 만들고 경당을 설치하는 등 변화를 주었다.[126]1520년 라파엘로가 사망한 후에는 페루치가 그의 설계를 이어받아 주요 후진 세 곳의 내부 배열을 유지하면서도 브라만테의 그리스 십자가 평면으로 돌아갔다.[127] 그러나 당시 교황령의 어려움과 1527년 신성 로마 제국 카를 5세에 의한 로마 약탈로 인해 공사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124] 페루치가 1536년에 사망한 후,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소 상갈로')가 설계안을 제출했는데, 그는 페루치, 라파엘로, 브라만테의 특징들을 결합하여 건물을 폭이 넓은 정면과 돌출된 열주 현관, 그리고 길이가 짧은 중랑을 갖도록 설계했다.[128]
4. 2. 미켈란젤로의 기여
미켈란젤로는 1547년 1월 1일, 70대의 나이로 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 프로그램의 총 책임자인 "카포마에스트로"가 되었다.[39] 그는 안토니오 다 상갈로 더 주니어의 뒤를 이은 것이었다. 미켈란젤로는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해 이 직책을 맡게 되었는데, "나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사도의 영광을 위해 이것을 맡습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뜻대로 최종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자유로운 권한을 요구했다.[40]미켈란젤로는 도나토 브라만테의 원래 설계안이 가진 그리스 십자가 형태의 본질적 가치를 인식하고 이를 다시 채택했다. 헬렌 가드너는 “브라만테의 계획안에서의 중심성을 무너뜨리지 않고서, 미켈란젤로가 펜으로 그은 몇 개의 필치는 복잡성을 단단하고 응집력 있는 통일성으로 전환했다.”라고 평가했다.[131]
현재 남아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카를로 마데르노가 중랑을 확장한 부분을 제외하면, 성단소의 끝(성당의 동쪽 끝)과 거대한 중앙 돔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다. 바티칸 시국 내 돔의 위치와 광장 앞에서 건물을 보았을 때 중랑이 돔을 가리는 문제 때문에,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멀리서 보아야 가장 잘 감상할 수 있다.[132]
미켈란젤로는 브라만테의 기하학적 형태와 라파엘로의 반원형 광장 계획안을 축소하고, 외부에 석조 건축물을 만들고 각 모퉁이에 제의실과 계단통을 배치하여 기하학적 명확성을 흐리게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여러 각도에서 보았을 때 연속하는 벽 표면이 접히거나 부러진 것처럼 보이게 되었고, 건물의 모퉁이에서 방향이 바뀌는 것을 알려주는 직각 형태는 부족해졌다. 외부는 조금씩 서로 다른 각도로 배치된 거대한 코린트식 열주의 벽기둥으로 둘러싸여 벽 표면에서 계속해서 바뀌는 각도를 따라가게 했다. 벽기둥들 위에는 연속하는 띠 장식에 굴곡이 있는 거대한 벽돌림띠가 있어 전체 건축물을 둘러싸는 듯한 인상을 준다.[133]
4. 3. 돔 - 성공적인 도안과 최종 해결책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은 총 높이가 136.57m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돔이다.[134] 안쪽 지름은 41.47m이다. 도나토 브라만테, 상갈로, 미켈란젤로, 자코모 델라 포르타 등 여러 건축가들이 돔 설계에 참여했다.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가들은 판테온과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참고하여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돔을 만들고자 했다. 브라만테는 판테온의 돔을 본떠 석회화 콘크리트로 돔을 만들 계획이었다. 상갈로는 판테온의 우물천장과 피렌체 대성당의 외부 석조 뼈대의 가치를 이해하고, 브라만테의 설계를 발전시켜 열주랑을 아치형 개구부로 단순화하고 두 번째 아케이드를 추가했다.
미켈란젤로는 피렌체 대성당의 돔처럼 벽돌로 된 두 겹의 외피로 돔을 설계했으며, 16쌍의 코린트 양식 기둥으로 돔을 둘러쌌다. 그는 돔을 달걀 모양으로 설계하여 바깥으로 향하는 힘을 줄였다.
미켈란젤로 사후, 자코모 다 비뇰라가 조르조 바사리와 함께 감독으로 임명되어 공사가 계속되었다. 1585년 교황 식스토 5세는 자코모 델라 포르타를 작업 책임자로, 도메니코 폰타나를 조수로 임명하여 빠른 속도로 건설을 진행했다. 델라 포르타는 미켈란젤로의 목재 모형을 수정하여 돔의 외형을 변경했는데, 대부분 표면적인 부분이었다.
미켈란젤로의 도면에는 달걀 형태의 돔이 나타나 있으며, 이는 그가 반구형보다 달걀 형태를 선호했음을 보여준다. 델라 포르타가 최종적인 돔 형태에 대한 책임을 졌다는 의견도 있다. 헬렌 가드너는 미켈란젤로가 돔의 형태를 통해 건물의 수직적 요소와 균형을 맞추려고 했다고 평가했다.
자코모 델라 포르타와 폰타나는 1590년에 돔을 완공했다. 이후 교황 그레고리오 14세는 돔에 식스토 5세를 기리는 명각을 새기게 했고,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십자가를 세웠다.
4. 3. 1. 브라만테와 상갈로
브라만테의 성 베드로 대성전 돔 계획안은 판테온의 돔을 본받아 매우 흡사하였는데, 그가 재발견한 제조 방식으로 만들어진 석회화 콘크리트로 지어졌다. 돔 위에 있는 정탑을 제외하면 두 돔의 윤곽은 매우 흡사하며, 판테온의 지지벽은 대성당에서는 지면에서 네 개의 육중한 기둥 위에 올려진 원통으로 바뀌었다. 판테온에서 쓰였던 것처럼, 성 베드로 대성당의 단단한 벽은 브라만테가 벽에 창문들을 뚫고 늘어선 기둥들로 벽을 둘러싸게 하여 가벼워질 수 있었다.[124]상갈로는 앞서 돔을 계획한 브라만테와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만든 브루넬레스키의 선례에 주목했다. 그는 판테온에 있는 우물천장과 피렌체 대성당의 외부에 있는 석조 뼈대의 가치를 이해했다. 그는 브라만테가 계획한 열주랑을 기단 주위의 잘 정돈된 아치로 이루어진 개구부들로 단순화하고, 강화했으며 확장하였다. 또한, 두 번째 아케이드는 첫 번째 아케이드의 층 위로 쌓도록 하였다. 그의 손에서, 피렌체 대성당에서 기초한 정탑의 섬세한 형태는 돌출한 토대들로 둘러싸인 육중한 구조물이 되어, 늘어선 기둥들이 원뿔형의 첨탑들로 둘러싸일 것이었다.[137]
4. 3. 2. 미켈란젤로와 자코모 델라 포르타
미켈란젤로는 70대의 나이에 성 베드로 대성전의 건축 책임자인 "카포마에스트로"가 되었다.[39] 그는 이전에 안토니오 다 상갈로 더 주니어가 맡았던 이 직책을 교황 바오로 3세의 강요로 마지못해 수락했다.[40] 미켈란젤로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사도의 영광을 위해" 이 일을 맡는다고 말하며, 자신의 뜻대로 건축을 완성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요구했다.[40]미켈란젤로는 이전에 여러 건축가와 기술자들이 제안했던 설계안들을 참고하여 자신만의 웅대한 비전을 발전시켰다. 그는 도나토 브라만테의 원래 설계안이 가진 그리스 십자형 형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다시 도입했다. 헬렌 가드너 (미술사학자)는 미켈란젤로가 브라만테의 설계를 단순화하고 통일성을 부여했다고 평가했다.[41]
미켈란젤로는 건물의 외부 형태를 단순화하여 명확한 기하학적 형태를 만들었다. 그는 거대한 코린트 양식 기둥으로 건물을 둘러쌌으며, 벽면의 각도를 따라 기둥들을 배치하여 연속적인 흐름을 만들었다. 이 기둥들 위에는 거대한 벽돌림띠가 있어 건물을 압축된 상태로 보이게 했다.[43]
성 베드로 대성전의 돔은 미켈란젤로가 재설계했으며, 벽돌로 된 두 겹의 외피로 만들어졌다. 돔은 16쌍의 코린트 양식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다. 미켈란젤로 사후, 자코모 델라 포르타는 미켈란젤로의 설계를 바탕으로 돔을 완성했다. 교황 식스토 5세 시대에 돔이 완성되었고, 이후 교황 그레고리오 14세는 돔에 식스토 5세를 기리는 명각을 새기게 했다.
4. 4. 완성
자코모 델라 포르타와 도메니코 폰타나는 1590년에 성 베드로 대성전의 중앙 돔을 완공했다.[40] 돔 내부에는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4. 5. 미켈란젤로의 도면 발견
2007년 12월 7일, 바티칸 문서 보관소에서 미켈란젤로가 붉은색 분필로 직접 그린 성 베드로 대성전의 돔 단면도가 발견되었다.[139] 이 도면은 돔의 원통 부분부터 두 개의 원기둥 위에 있는 엔타블레이처(기둥이 떠받치는 수평 부분)의 설계도를 정밀하게 보여준다. 미켈란젤로는 죽기 전에 수천 장의 도면을 없앤 것으로 알려졌는데,[138] 이 단면도가 살아남은 것은 작은 종잇조각에 불과하고, 도면 윗부분에 상세한 수학적 계산식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139]4. 6. 계획 변경
1602년 교황은 카를로 마데르노를 건설 총책임자로 임명하였다. 도메니코 폰타나의 조카인 마데르노는 자신이 정력적인 건축가임을 증명해 보였다. 그는 미켈란젤로의 건물에 경당을 둥글게 에워싸는 아이디어를 제시했지만, 교황은 미켈란젤로가 이미 40년 전에 사망했음에도 그의 고안에서 벗어나는 것을 주저하였다. 대성당을 모든 기독교도의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로마에 속하는 것이라고 보았던 교황청으로부터 멸시를 받았기 때문에, 다양한 나라에서 모집한 건축가들로 구성된 건축 위원회(Fabbrica)는 앞으로 건축 작업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교황청의 생각에 영향을 끼친 것 가운데 하나는 가톨릭 개혁의 영향으로, 당시 그들은 그리스 십자가 고안을 이단과 연관된 것으로 취급하고, 라틴 십자가를 진정한 기독교의 상징으로 보고 있었다.[130]1607년 위원회에서 호출받은 열 명의 건축가는 미켈란젤로의 건물에 중랑을 확장하기로 결정했다.
4. 6. 1. 나르텍스와 입구
성 베드로 대성전의 외관 뒤에는 이탈리아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긴 열주 현관, 즉 '나르텍스'가 있다. 이곳의 반원통형 둥근 천장은 화려한 회칠과 도금이 되어 있고, 삼각 궁륭들 사이의 작은 창들로 빛이 들어온다. 화려한 대리석 바닥은 광장에서 들어온 빛을 반사하여 빛을 발한다. 나르텍스의 각 끝에는 이오니아식 기둥으로 틀이 짜인 다소 극적인 공간이 있으며, 각각의 공간 안에는 기마상들이 있다. 남쪽에는 코르나키니의 샤를마뉴(18세기경)가 있고, 북쪽에는 베르니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 기마상이 있다.다섯 개의 입구들은 대성당으로 통하는 출입구이다. 가운데 입구는 안토니오 아베를리노가 1455년 옛 대성당을 위해 만든 청동 문으로, 새로운 공간에 맞도록 어느 정도 확장되었다.[32]
4. 6. 2. 마데르노의 중랑
미켈란젤로의 그리스 십자가형 평면에 베이 3개를 더했다. 마데르노는 미켈란젤로의 베이와 면적을 약간 다르게 하여 두 건축 작업의 조화를 이루었다. 또한 중랑(中廊)의 축을 약간 비스듬하게 하였는데, 이는 바깥 광장에 있는 고대 이집트 오벨리스크가 미켈란젤로의 건물과 일직선으로 맞지 않아 두 건물을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130]중랑은 미켈란젤로의 작업과 조화를 이루는 한 쌍의 거대한 벽기둥을 가지고 있다. 내부 공간의 크기는 건물 내부 규모라는 감각을 갖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나게” 넓다.[130][140] 중랑의 첫 번째 기둥들을 등지고 날개를 퍼덕이는 두 쌍의 커룹상이 있으며, 그 사이에는 두 개의 성수반이 있다. 이 성수반은 높이가 모두 2m가 넘어, 실제 어린이들은 대리석 커튼을 기어오르지 않으면 닿을 수 없다. 측랑에는 각각 두 곳의 작은 경당과 그보다 더 큰 직사각형의 경당, 즉 성사(聖事) 경당과 성가대석 경당이 있다. 이 경당들은 대리석, 치장 벽토, 도금, 조각과 모자이크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5. 대성당의 가구
성 베드로 대성전에는 수많은 예술 작품과 역대 교황들의 무덤이 있다. 1979년 피렌체의 정신과 의사 가지엘라 마게리니는 이탈리아를 방문한 관광객들이 겪는 "스탕달 증후군"을 지적했는데, 이는 방대한 예술 작품을 보려는 강박 관념 때문에 두통 등의 증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1975년 갈라시 파루치의 책에 따르면, 대성당에는 트라베르티노상 165점, 스투코상 125점, 대리석 조각상 110점, 청동상 40점이 있으며, 제단화는 대부분 모자이크 복제화로 교체되었다. 성당 내에는 역대 교황의 무덤 147기가 있으며, 대부분 지하 예배당에 있지만 돔 안에서도 많은 묘비를 볼 수 있다.[32]
5. 1. 교황 우르바노 8세와 베르니니
잔 로렌초 베르니니는 어린 시절 화가 안니발 카라치와 함께 성 베드로 대성당을 방문하여 성 베드로를 위해 거대한 옥좌를 세우고 싶어했다. 그의 소원은 이루어져, 1626년 교황 우르바노 8세의 후원을 받아 50년 동안 대성당을 꾸미는 작업에 매달렸다. 1629년 마데르노의 후임자로 정해진 그는 바로크 시대의 위대한 건축가이자 조각가로 평가받게 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그의 작품은 발다키노, 성체 경당, 네 개의 벽감 계획, 창문과 창문 사이의 벽 부분에 있는 로지아, 성 베드로의 의자 등이다.[40][41]
교황 우르바노 8세는 베르니니에게 파사드의 종탑에 대한 새로운 설계를 제출하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종탑 건설 과정에서 균열이 발생했고, 교황은 베르니니를 공개적으로 질책했다. 결국 1642년에 두 탑에 대한 모든 작업이 중단되었고, 베르니니는 철거 비용을 지불해야 했으며, 종탑 완공 계획은 무산되었다.
5. 1. 1. 발다키노와 벽감
성 베드로 대성전 한가운데에는 교황이 미사를 집전하는 중앙 제대가 있고, 그 위를 닫집 모양의 발다키노가 덮고 있다. 이 발다키노는 베르니니의 작품으로, 꼭대기의 황금 십자가 부분까지 높이가 29m이며 무게는 37000kg에 달한다. 1625년 교황 우르바노 8세의 명령에 따라 1633년 6월 29일 성 베드로의 축일에 완성되었다. 발다키노의 지붕을 받치는 네 개의 나선형 기둥은 사람의 영혼이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내부 중앙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부조되어 있고, 위쪽으로 네 명의 천사가 화관을 하늘로 끌어올리고 있다. 또 다른 작은 천사들은 삼중관과 열쇠, 칼과 복음서를 들고 있는데, 삼중관과 열쇠는 성 베드로를, 칼과 복음서는 성 바오로를 상징한다. 그러나 이 발다키노는 높은 예술성에도 불구하고 제작 당시에는 과다한 청동 사용 때문에 비난을 받았으며, 판테온 내부 천장에서 수십 톤의 청동을 떼어와야 했다고 한다.[141]중앙 제대 아래쪽에는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봉헌한 은으로 장식된 작은 상자가 있는데, 그 안에는 교황 리노가 사용했다고 전해오는 팔리움이 들어 있다. 이 팔리움은 성녀 아녜스 축일에 봉헌된 하얀 양털을 축성하여 그 실로 다시 짜서 만들었다. 이곳은 전통적으로 새로 임명된 주교 또는 로마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세계 각국의 주교단들이 자신들이 맡은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며 교계제도에 순종하겠다는 서약이나 갱신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전통은 6세기경부터 생겼다. 중앙 제대 밑에는 성 베드로를 포함한 역대 교황의 시신이 안치된 지하 묘지가 있다.
중앙 제대를 사이에 놓고 쿠폴라를 받치는 네 모서리 벽에는 각각 네 개의 커다란 대리석상이 있다. 1629년~1640년 사이에 조각한 작품들로 성 론지노(베르니니의 작품), 성녀 베로니카(프란체스코 모키의 작품), 성 안드레아(프랑수아 뒤케스노이의 작품), 성녀 헬레나(안드레아 볼지의 작품)의 석상들이다. 이 석상들 위 난간에는 각각 두 개씩 모두 여덟 개의 대리석 원주가 있는데, 이 원주들은 신축 이전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의 발다키노 기둥이었다.[142] 그 위로는 경당이 하나 있는데, 이곳에서는 사순절 마지막 시기인 성주간 동안에만 예수의 땀을 닦았다고 전해지는 수건, 예수가 못 박혔다고 전해지는 성십자가의 나무 조각, 예수의 허리를 찔렀다고 전해지는 성창 등의 성유물들이 일반인들에게도 특별히 공개된다.
5. 1. 2. 베드로의 의자와 성체 경당

베드로의 의자(Cathedra Petri)는 중앙 제대 뒤쪽 부분에 자리 잡고 있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성 베드로가 로마에서 선교 활동을 할 때 앉았던 나무 의자의 조각들을 모아 5세기경 상아로 장식된 의자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 후 교황 알렉산데르 7세가 베르니니를 시켜 그 의자 위를 무게가 약 75000kg에 달하는 청동으로 입히고 장식을 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의자의 네 다리는 무게 39000kg, 높이 4m~5m의 청동상들이 잡고 있는데, 앞의 두 명은 서방 교회의 교부들인 성 암브로시오와 성 아우구스티노이며, 뒤쪽으로는 동방 교회의 교부들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성 아타나시오이다. 의자를 받치는 네 인물 형상들은 망토를 펄럭이며 경배와 환희의 감정을 표현하는 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의자 위쪽을 보면 천연대리석을 얇게 깎아 유리처럼 보이는 타원형의 창 안에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하늘에서 비치는 빛을 타고 내려오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비둘기 날개의 폭은 1.75m에 달한다. 그리고 이 창을 잘 살펴보면 열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를 뜻한다. 그리고 타원형의 둥근 모양이 세 부분으로 구성된 까닭은 삼위일체를 표현하기 위함이다. 비둘기 주위는 구름에 둘러싸인 천사들이 에워싸고 있다. 안드레아 사키는 베르니니가 이 형상들을 크게 만들도록 설득했으며, 그리하여 네이브의 중앙 입구로 들어섰을 때 이 작품들이 뚜렷하게 보이게 되었다. 베드로의 의자는 1666년 1월 16일 성대한 의식을 통해 대성전에 안치되었다.
베르니니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한 마지막 작업은 1676년에 맡은 성체 경당의 장식이다. 그는 성체를 보관하기 위한 장소로서 브라만테의 템피에토를 축소한 형태를 한 경당을 도금한 청동으로 만들었으며, 이 작은 경당은 성 베드로가 순교한 위치를 가리키고 있다. 양쪽에는 천사상들이 있는데 한 천사는 경외심으로 가득 찬 얼굴로 경배하고 있으며 다른 천사는 감상자를 향해 환영의 눈빛을 보내고 있다. 베르니니는 1680년에 82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130]
5. 2. 성 베드로 광장
성 베드로 광장(Piazza di San Pietro)은 1656년부터 1667년까지 베르니니의 설계로 조성되었다. 베르니니는 단순한 균형미를 광장 설계의 중심 주제로 삼았다. 광장 양쪽에는 타원형의 대회랑이 있는데, 284개의 원기둥 모양 대리석 기둥이 각각 네 줄로 서 있고, 기둥 하나의 높이가 16m나 된다. 그 위에는 성인과 교황의 모습이 대리석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모두 140개이며 대리석상 하나의 높이는 3.24m이다. 광장은 폭이 246m이며 광장 입구에서 대성당 입구까지 길이는 300m이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오벨리스크가 있는데, 원래는 네로 전용 경기장에 있던 것이다. 식스토 5세 교황의 명령에 따라 1586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받침대를 제외한 오벨리스크의 높이는 25m이며 무게는 약 300t이다. 이전을 위해 동원된 근로자는 900여 명, 말은 140여 필, 권선기 47대 등 당시로써는 엄청난 대공사였다고 한다. 오벨리스크 위에는 청동 십자가가 있는데, 이 십자가 안에는 성녀 헬레나가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 원본의 일부가 들어 있다.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양쪽에는 두 개의 분수대가 있다. 대성당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오른쪽 분수대는 카를로 마데르노의 작품이며, 왼쪽의 것은 도메니코 폰타나가 설계한 작품이다. 이 두 분수대는 광장의 아름다운 조화와 균형을 위해 건축했다고 하며, 종교적인 의미로는 하느님의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물로써 죄를 깨끗이 씻어야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오른쪽 회랑 너머에는 교황의 거처인 사도 궁전과 바티칸 미술관이 있다. 성 베드로 광장이 끝나는 곳에는 산탄젤로 성과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화해의 길이 있다. 이 도로는 1929년에 바티칸과 이탈리아가 체결한 라테란 조약을 기념하고자 1937년 착공하여 1950년 성년에 개통되었다.[143]




6. 명화·명조각
성 베드로 대성당에는 수많은 교황과 저명인사들의 무덤이 있으며, 이 중 상당수는 뛰어난 예술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틈새와 예배당에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비롯한 여러 조각품이 있다. 중앙에는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설계한 교황 제단 위 발다키노가 있고, 후진에는 베르니니의 조각 앙상블인 ''성 베드로의 옥좌''가 있다.[12]
성 베드로 대성당 내부는 대리석, 부조, 건축 조각 및 도금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1975년 갈라시 파루치의 책에 따르면, 대성당에는 트라베르티노상 165점, 스투코상 125점, 대리석 조각상 110점, 청동상 40점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대작이다. 제단화는 대부분 모자이크 복제화로 교체되었는데, 이 또한 방대한 수이다.[12]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그가 스물다섯 살에 완성한 작품으로, 다비드상, 모세상과 함께 그의 3대 걸작으로 꼽힌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작품에 서명을 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지만, 피에타는 그가 유일하게 서명한 작품이다. 1972년에 훼손되었다가 복구되어 현재는 유리 뒤에 전시되어 있다.[147]
베르니니는 '성 베드로의 왕좌'라고 불리는 카테드라 페트리에 주목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7세는 베드로의 후계자 계보를 상징하는 이 유물을 안치하기로 결정했고, 베르니니는 교회 학자 4명의 조각상이 받치고 있는 청동 왕좌를 만들었다. 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아타나시우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조각상은 역동적인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왕좌 뒤에는 노란색 설화석고 창을 통해 빛이 들어오며, 창 중앙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있다. 이 의자는 1666년 1월 16일 대대적인 축하 행사와 함께 안치되었다.[40][41]
베르니니는 1676년에 성사 예배당 장식을 마지막으로 성 베드로 대성전 작업을 마쳤다.[52] 그는 성체 성사를 보관하기 위해 브라만테의 템피에토를 금도금 청동으로 축소하여 만들었는데, 양쪽에는 천사가 한 명씩 있다.[40]
6. 1. 무덤

대성당 내부에는 백 개가 넘는 무덤들이 있는데, 대부분 대성당 바로 밑 지하 동굴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는 성 베드로를 시작으로 역대 교황의 대부분을 비롯하여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신성 로마 제국의 오토 2세 황제, 작곡가 조반니 피에르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도 매장되어 있다.[121] 본국에서 추방당해 교황 클레멘스 11세에게 망명을 신청해 의탁한 영국의 가톨릭교도 왕족인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와 그의 두 아들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헨리 베네딕트 스튜어트도 이곳에 묻혀 있다. 또한,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의 아내인 마리아 클레멘티나 소비에스카와 왕위를 포기하고 가톨릭 신앙으로 회심한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도 이곳에 묻혀 있다.
6. 2. 수공예품
베르니니는 '성 베드로의 왕좌'라고 불리는 카테드라 페트리에 주목했다. 이 의자는 사도 베드로가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로는 12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의자가 낡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자, 교황 알렉산데르 7세는 베드로의 후계자 계보를 상징하는 이 유물을 적절하게 안치하기로 결정했다. 베르니니는 교회 학자 4명의 조각상이 받치고 있는 청동 왕좌를 만들었다. 라틴 교회를 대표하는 암브로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 교회를 대표하는 아타나시우스와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조각상은 역동적인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왕좌 뒤에는 노란색 설화석고 창을 통해 빛이 들어오며, 창 중앙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있다. 안드레아 사키는 베르니니에게 조각상들을 크게 만들어 성당 중앙 입구에서 잘 보이도록 권했다. 이 의자는 1666년 1월 16일 대대적인 축하 행사와 함께 안치되었다.[40][41]베르니니는 1676년에 성사 예배당 장식을 마지막으로 성 베드로 대성전 작업을 마쳤다.[52] 그는 성체 성사를 보관하기 위해 브라만테의 템피에토를 금도금 청동으로 축소하여 만들었는데, 템피에토는 성 베드로의 죽음을 기리는 작은 예배당이다. 양쪽에는 천사가 한 명씩 있는데, 한 명은 숭배하는 시선을, 다른 한 명은 환영하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베르니니는 1680년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0]
1979년 피렌체의 정신과 의사 가지엘라 마게리니는 성 베드로 대성전을 포함한 이탈리아를 방문한 관광객들이 겪는 "스탕달 증후군"을 지적했다. 이는 방대한 예술 작품들을 보려는 강박 관념 때문에 관광을 즐길 여유를 잃고 두통 등의 증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1975년 갈라시 파루치의 책에 따르면, 대성당에는 트라베르티노상 165점, 스투코상 125점, 대리석 조각상 110점, 청동상 40점이 있으며, 모두 대작들이다. 제단화는 대부분 모자이크 복제화로 교체되었는데, 이 또한 방대한 수이다.
6. 2. 1. 종탑과 나르텍스
성 베드로 대성전 정면 양쪽에는 두 개의 시계가 있는 종탑이 있다. 왼쪽에 있는 시계는 1931년부터 전기로 작동하고 있으며, 대성당의 종은 1288년에 제작되었다. 중앙 입구 위에 있는 "나비첼라(Navicella)"라고 불리는 모자이크 그림은 조토의 설계를 기반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상징하는 배를 표현한 것이다.[12]본당으로 들어가려면 길이 71m, 폭 13m, 높이 20m의 입구 회랑을 통과해야 한다. 바닥에는 교황 요한 23세의 문장이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오른쪽에는 베르니니가 1670년에 완성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대리석상이 있다. 그 반대편에는 1725년에 아고스티노 코르나키니가 만든 샤를마뉴의 대리석상이 있다.[12]
입구 회랑에서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은 다섯 개 있는데, 맨 오른쪽에 있는 청동 문이 ‘성년의 문(Porta Santa)’이다.[144] 1950년 성년을 기념해 스위스의 신자들이 제작하여 기증한 이 문에는 열여섯 편의 성경 이야기가 부조되어 있다.[144] 이 문은 전통적으로 성년에만 열리며, 오직 교황만이 이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다.[144] 현재의 문은 1950년 비코 콘소르티가 설계하고 피렌체의 페르디난도 마리넬리 예술 주조소에서 주조했다. 문 위에는 성년의 문 개방을 기념하는 비문이 있다.[144]
FRANCISCVS PP PORTAM SANCTAM ANNO MAGNI IVB MM- MMI A IOANNES PAVLVS PP II RESERVATAM ET CLAVSAM APERVIT ET CLAVSIT ANNO IVB MISERICORDIAE MMXV- MMXVI | IOANNES PAVLVS II P.M. PORTAM SANCTAM ANNO IVBILAEI MCMLXXVI A PAVLO PP VI RESERVATAM ET CLAVSAM APERVIT ET CLAVSIT ANNO IVB HVMANE REDEMP MCMLXXXIII – MCMLXXXIV | IOANNES PAVLVS II P.M. ITERVM PORTAM SANCTAM APERVIT ET CLAVSIT ANNO MAGNI IVBILAEI AB INCARNATIONE DOMINI MM-MMI | PAVLVS VI PONT MAX HVIVS PATRIARCALIS VATICANAE BASILICAE PORTAM SANCTAM APERVIT ET CLAVSIT ANNO IVBILAEI MCMLXX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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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이 2015~2016년 자비의 희년을 맞이하여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2000~2002년 대희년을 맞이하여 여닫은 성문을 여닫다. |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1976년에 닫힌 성년의 문을 1983년-1984년 인류 구원의 성년을 맞이하여 여닫다. |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그리스도 강생 사건 기념으로 2000년-2001년 대희년을 맞이하여 성년의 문을 여닫다. | 바오로 6세 교황이 1975년 성년을 맞이하여 바티칸 총대주교좌 대성당의 성년의 문을 여닫다. |
6. 2. 2. 중랑
- 청동 문을 통해 대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바닥에 반암을 박아 표시해 놓은 원형의 붉은 대리석을 밟게 된다. 서기 800년 성탄 자정 미사 때 바로 이 자리에서 샤를마뉴가 무릎을 꿇고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왕관을 받았다.[145] 이 원을 지나면 반암으로 만든 커룹 한 쌍이 지키는 2m 높이의 성수대 두 개가 나온다.[145]
- 중랑에서부터 각종 천연대리석을 사용해 아름답게 깔아 놓은 바닥이 있다. 이 바닥 위에는 전 세계의 이름난 성당들과 성 베드로 대성당의 크기를 비교해 놓은 수치가 새겨 있다.
- 중랑의 장식 벽기둥 표면은 대형 메달과 초기 서른여덟 명의 교황을 묘사한 부조가 있다.
- 중랑의 벽기둥 사이 벽감에는 서른아홉 명의 수도원 창립자들을 묘사한 대리석상들이 세워져 있다.
- 돔의 북동쪽 피어의 반대편에 의자에 앉은 성 베드로 청동상이 있다. 13세기 조각가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제작한 것으로 피에타와 함께 대성당의 명물로 통한다.[141] 성 베드로 청동상은 고대 로마식 복장에다 왼손에는 열쇠를 들고 오른손은 곧추세운 채 의자에 똑바로 앉은 모습을 하고 있다.[146] 중세 때부터 이곳을 찾는 수많은 순례자가 청동상의 발에 입맞춤하고 손으로 만지며 기도하는 습관 때문에 오른쪽 발가락은 거의 다 닳아서 원형이 사라졌고 이제는 왼쪽 발가락도 많이 닳은 상태다. 성 베드로의 축일인 6월 29일에는 이 청동상에 금실로 수놓은 제의를 입히고 미사를 집전한다. 청동상 위쪽에는 살레시오회의 창립자인 성 요한 보스코와 교황 비오 9세의 모자이크 초상화가 걸려 있다.
- 바티칸 동굴 방향으로 움푹 들어간 고해소(告解所)에는 안토니오 카노바가 제작한 교황 비오 6세의 무릎 꿇은 거대 조각상이 있는데, 그는 나폴레옹의 군대에 의해 포로로 잡혀 학대받은 교황이다.
- 중앙 제대 위에는 베르니니의 발다키노가 얹어져 있다.
- 돔을 받치는 네 모서리 벽 안의 벽감에는 대성당의 성유물들과 함께 석상들을 배치하였다: 예수의 십자가를 든 성녀 헬레나(안드레아 볼지);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창을 쥔 성 론지노(베르니니); 성 안드레아 십자와 성 안드레아(프랑수아 뒤케스노이); 예수의 얼굴이 찍힌 수건을 든 성녀 베로니카(프란체스코 모키).
6. 2. 3. 북쪽 측랑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북쪽 측랑의 제1경당에 있다.[147] 이 조각상은 미켈란젤로가 스물다섯 살에 완성한 작품으로, 다비드상, 모세상과 함께 그의 3대 걸작으로 꼽힌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작품에 서명을 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지만, 피에타는 그가 유일하게 서명한 작품이다. 1972년에는 헝가리계 호주인 라즐로 토프트가 이 조각상을 훼손하는 사건이 발생했으나, 이후 복구되어 현재는 유리 뒤에 전시되어 있다.성 세바스티아노에게 봉헌된 제2경당에는 교황 비오 11세와 교황 비오 12세의 기념 동상이 있다.
측랑 끝 부분에는 성녀 베드로닐라의 유해가 안장된 제대와 구에르치노 (조반니 프란체스코 바르비에리)가 1623년에 그린 “성녀 베드로닐라의 매장” 제대화가 있다.
6. 2. 4. 남쪽 측랑
세례대는 교황 인노첸시오 12세에게 임명받은 카를로 폰타나(도메니코 폰타나의 종손)가 설계했다.[12] 세례반은 한때 황제 하드리아누스의 유해를 담았던 보라색 석관 덮개에서 조각되었으며, 그 위에는 금빛 청동으로 조각된 "하느님의 어린 양"상이 올려져 있다. 폰타나의 개조된 반암 석관 덮개 세례반은 이전 세례반을 대체했는데, 이는 4세기의 로마의 장관 섹스투스 클라우디우스 페트로니우스 프로부스의 석관에서 재활용되었으며, 15세기부터 17세기 후반까지 폰타나의 작업이 완료될 때까지 세례에 사용되었다.측랑의 첫 번째 피어를 배경으로 신고전주의 조각가 안토니오 카노바가 제작하여 1819년 공개된 스튜어트 일족의 무덤이 있다. 여기에는 "보니 공 찰리"로 알려진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와 그의 아들 찰스 에드워드, 추기경이자 요크 공작인 헨리의 무덤이 있다.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의 아내 마리아 클레멘티나 소비에스카의 기념비는 무덤 맞은편에 있다.
제2경당에는 《동정 마리아의 자헌》 성화와 교황 베네딕토 15세, 교황 요한 23세의 기념 동상이 있다.
피어들을 배경으로 교황 비오 10세와 교황 인노첸시오 8세의 기념 동상들이 있다. 제의실 입구에는 교황 비오 8세의 기념 동상이 있다.
남쪽 익랑에는 성 토마스와 성 요셉의 제대,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힌 성 베드로’ 성화가 있다.
측랑 끝쪽에는 교황 알렉산데르 7세의 기념상이 있는데, 베르니니의 작품으로 “바로크 시대의 훌륭한 대리석상 가운데 하나”로 불리고 있다. 대리석상 위쪽에는 교황이 무릎을 꿇고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며 마지막 기도를 바치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고, 그 곁에는 교황의 권위를 상징하는 삼중관이 놓여 있다. 그 아래에는 구겨 놓은 종이처럼 정교하게 다듬어진 천연대리석이 보이는데, 이는 교황의 시신을 덮은 천을 뜻한다. 천 속에는 모래시계를 든 해골의 모습이 보인다. 모래시계는 이승의 마지막 순간을 상징하고, 머리를 천으로 감싼 해골은 죽음이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기념 동상 주위에는 정의, 현명, 자비, 진실을 각각 상징하는 네 여인의 석상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중 진실을 뜻하는 여인의 석상은 원래 나체로 조각된 것을 교황 인노첸시오 11세가 그 위에 옷을 입혔다.[12]
7. 기타
성 베드로 대성당은 바티칸 시국의 테베레 강 서쪽, 자니콜로 언덕과 하드리아누스 영묘 근처에 있는 르네상스 양식의 교회이다. 중앙의 돔이 로마의 스카이라인을 지배한다. 바실리카는 성 베드로 광장을 통해 접근하며, 광장은 두 부분으로 나뉜 앞마당으로 높은 열주로 둘러싸여 있다. 첫 번째 공간은 타원형이고 두 번째 공간은 사다리꼴이다. 열주로 이루어진 거대한 오더를 갖춘 바실리카의 파사드는 광장의 끝자락에 걸쳐 있으며, 로마의 1세기 사도인 성 베드로와 성 바울의 5.55m 조각상이 서 있는 계단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12][10]
바실리카는 십자형이며, 라틴 십자가 형태의 길쭉한 내부 통로를 가지고 있지만, 초기 설계는 중앙 집중식 구조를 위한 것이었고 이는 건축물에서도 여전히 나타난다. 중앙 공간은 외부와 내부 모두 세계에서 가장 큰 돔 중 하나에 의해 지배된다. 입구는 건물 전체에 걸쳐 있는 나르텍스, 즉 입구 홀을 통한다. 나르텍스에서 이어지는 장식된 청동 문 중 하나는 성년 동안에만 열리는 성스러운 문이다.[12]
내부 치수는 다른 교회에 비해 방대하다.[3] 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가 사람들이 이 기념물이나 저 기념물에 가까이 가는 것을 보면서 서서히 깨닫게 된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작아 보이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건물 내 모든 것의 규모에 압도당한다. 이는 결국 우리를 압도한다."[11]
중앙 돔으로 이어지는 내부 통로는 3개의 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교회의 가장 높은 배럴 볼트를 지지하는 기둥이 있다. 내부 통로는 여러 개의 예배당이 있는 넓은 통로로 둘러싸여 있다. 돔 주변에도 예배당이 있다. 바실리카를 시계 방향으로 돌면 다음과 같다. 세례당, 성모 마리아 봉헌 예배당, 더 큰 성가대 예배당, 변용 제단, 클레멘스 예배당, 성 그레고리오 제단, 성물실 입구, 거짓의 제단, 성 베드로의 십자가형, 성 요셉, 성 토마스 제단이 있는 왼쪽 트랜셉트, 예수 성심 제단, 기둥의 마돈나 예배당, 성 베드로와 중풍병자를 위한 제단, 성 베드로의 옥좌가 있는 후진, 다비다를 살리는 성 베드로 제단, 성 페트로닐라 제단, 대천사 미카엘 제단, 나비첼라 제단, 성 에라스무스, 성 프로체소와 마르티아노, 성 바츨라프의 제단이 있는 오른쪽 트랜셉트, 성 제롬 제단, 성 바실 제단, 자비를 베푸시는 성모의 제단이 있는 그레고리 예배당, 더 큰 성사 예배당, 성 세바스찬 예배당 및 피에타 예배당.[12]
시계 방향으로 기념물은 다음과 같다. 마리아 클레멘티나 소비에스카, 스튜어트 왕가, 베네딕토 15세, 요한 23세, 성 비오 10세, 인노첸시오 8세, 레오 11세, 인노첸시오 11세, 비오 7세, 비오 8세, 알렉산데르 7세, 알렉산데르 8세, 바오로 3세, 우르바노 8세, 클레멘스 10세, 클레멘스 13세, 베네딕토 14세, 성 베드로 (청동 조각상), 그레고리오 16세, 그레고리오 14세, 그레고리오 13세, 카노사의 마틸다, 인노첸시오 12세, 비오 12세, 비오 11세, 크리스티나, 레오 12세. 바실리카의 중심부, 높은 제단 아래에는 성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관련하여 "Confessio" 또는 "고백 예배당"이 있으며, 이는 그의 순교로 이어졌다. 2개의 곡선형 대리석 계단은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교회 수준의 이 지하 예배당으로 연결되며, 성 베드로의 추정 매장지 바로 위에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내부는 대리석, 부조, 건축 조각 및 도금으로 호화롭게 장식되어 있다. 바실리카에는 교황과 다른 저명한 인물들의 무덤이 많이 있으며, 그 중 많은 수가 뛰어난 예술 작품으로 여겨진다. 또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포함하여 틈새와 예배당에 여러 조각품이 있다. 중앙 특징은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디자인한 교황 제단 위의 발다키노 또는 천개이다. 후진은 베르니니가 제작한 조각 앙상블로, 상징적인 ''성 베드로의 옥좌''를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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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서적
石鍋 (2000)、p.152-160、Ⅳ広場と聖堂の装飾、教皇たちの墓碑
2000
[100]
서적
石鍋 (2000)、p.172-173、サン・ピエトロ大聖堂見学案内、広場
2000
[101]
서적
石鍋 (2000)、p.173-174、サン・ピエトロ大聖堂見学案内、ファサード
2000
[102]
서적
石鍋 (2000)、p.174-176、サン・ピエトロ大聖堂見学案内、ポルティコ(玄関廊)
2000
[103]
서적
石鍋 (2000)、p.195、サン・ピエトロ大聖堂見学案内、ピエタ礼拝堂
2000
[104]
서적
石鍋 (2000)、p.196、サン・ピエトロ大聖堂見学案内、サン・セバスティアーノ礼拝堂
2000
[105]
서적
石鍋 (2000)、p.197-198、サン・ピエトロ大聖堂見学案内、サクラメント(聖体)礼拝堂
2000
[106]
서적
石鍋 (2000)、p.194、サン・ピエトロ大聖堂見学案内、洗礼礼拝堂
[107]
서적
石鍋 (2000)、p.193、サン・ピエトロ大聖堂見学案内、洗礼礼拝堂への接続部分
[108]
서적
石鍋 (2000)、p.193、サン・ピエトロ大聖堂見学案内、プレゼンタツィオーネ(宮参り)礼拝堂
[109]
서적
石鍋 (2000)、p.193、サン・ピエトロ大聖堂見学案内、第二・第三ベイの接続部分
[110]
서적
石鍋 (2000)、p.191-192、サン・ピエトロ大聖堂見学案内、コーロ礼拝堂
[111]
서적
室内学入門
建築資料研究社
[112]
서적
St Peter's
[113]
서적
"...The greatest of all churches of Christendom"
[114]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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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roma2000.[...]
[115]
문서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의 「스미르나 서간」
[116]
문서
로마의 성 클레멘스 주교 순교자의 「코린토 서간」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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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용의 성 이레네오 주교의 「이단반론」
[118]
간행물
Columbia Magazine
2006-04
[119]
웹사이트
The Eschatological Dimension of Church Architecture
http://www.sacredarc[...]
2005
[120]
문서
Claims made that the Basilica of Our Lady of Peace of Yamoussoukro in Africa is larger appear to be spurious, as the measurements include a rectorate, a villa and probably the forecourt. Its capacity is 18,000 people against St. Peter's 60,000. Its dome, based on that of St. Peter's, is lower but carries a taller cross, and thus claims to be the tallest domed church.
[121]
서적
로마 똘레랑스의 제국
살림출판사
2004
[122]
웹인용
St. Peter's Basilica, monuments
http://www.vaticanst[...]
2009-01-02
[123]
저널
The Building of the Vatican: The Papacy and Architecture
[124]
서적
The History of Architecture on the Comparative Method
[125]
문서
Bramante's plan
[126]
문서
Raphael's plan
[127]
문서
Peruzzi's plan
[128]
문서
Sangallo's plan
[129]
서적
Michelangelo
[130]
문서
Saint Peter's
[131]
서적
Art through the Ages
[132]
문서
Michelangelo's plan
[133]
강연
Michelangelo and the architecture of St. Peter's Basilica
1982
[134]
문서
성 베드로 대성당을 모델로 만든 야무수크로 대성당의 돔이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보다 높이는 더 낮지만 십자가는 더 높다는 주장이 최근에 제기되었다.
[135]
문서
피렌체 대성당의 돔은 돔이 실제로 세워지기 약 100년 전부터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서 프레스코화로 묘사되었다.
[136]
서적
A History of Italian Renaissance Art
[137]
문서
Sangallo's plan
[138]
뉴스
Rare Michelangelo sketch for sale
http://news.bbc.co.u[...]
BBC
2005-10-14
[139]
웹인용
Michelangelo 'last sketch' found
http://news.bbc.co.u[...]
BBC News
2007-12-08
[140]
문서
“엄청난”은 많은 저술가들이 내부공간의 거대함을 적절하게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이다. 이들 중에서는 제임스 리스밀른과 배니스터 플레처가 포함되어 있다.
[141]
서적
로마 똘레랑스의 제국
(주)살림출판사
2004
[142]
서적
물의 도시 돌의 도시 영원의 도시 로마
청년사
[143]
서적
로마 똘레랑스의 제국
(주)살림출판사
2004
[144]
서적
로마 똘레랑스의 제국
(주)살림출판사
2004
[145]
웹사이트
http://tour.bugs.co.[...]
[146]
서적
백과사전에도 없는 바티칸 이야기
생활성서사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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