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구드프레드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구드프레드는 9세기 초 덴마크의 왕으로, 804년부터 810년까지 재위했다. 그는 샤를마뉴의 프랑크 왕국과 외교적 갈등을 겪었으며, 오보드리테스족을 공격하고 다네비르케를 건설하는 등 영토를 확장하려 했다. 810년 프리슬란트 침공 이후 용병에게 살해되었으며, 그의 조카 헤밍이 왕위를 계승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9세기 덴마크 사람 - 라그나르 로드브로크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는 9세기 스칸디나비아와 서유럽에서 활동한 전설적인 바이킹 영웅으로, 뛰어난 전사이자 전략가로 묘사되며, 845년 파리 약탈과 잉글랜드 침략을 통해 명성을 얻었고, 바이킹 시대를 대표하는 영웅으로 다양한 작품에서 재해석되고 있다.
  • 810년 사망 - 아부 누와스
    아부 누와스는 8세기 압바스 왕조 시대의 아랍 시인으로, 술과 소년애를 주제로 한 파격적인 시를 통해 명성을 얻었으며, 아랍 문학사에서 새로운 시풍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 810년 사망 - 피피누스 카를로마누스
    샤를마뉴의 아들 피피누스 카를로마누스는 롬바르디아 분국왕으로 책봉되어 교황으로부터 정통성을 부여받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쳤으나 베네치아 원정 실패 후 사망, 그의 사후 아들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반란을 일으켜 처형되었다.
  • 살해된 9세기 군주 - 레온 5세
    9세기 초 비잔틴 제국의 황제 레온 5세는 아르메니아 출신 군인으로, 불가르족과의 전투 패배 후 황제가 되어 불가리아 침입을 막고 국경을 안정시키는 데 힘썼으나, 성상 파괴 운동 재개로 종교적 논쟁을 일으키다 암살당했다.
  • 살해된 9세기 군주 - 미하일 3세
    미하일 3세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어린 시절 즉위하여 어머니의 섭정을 받다가 바르다스의 영향력 아래 통치하며 성상 숭배 부활, 군사적 성공, 슬라브족 선교 등의 업적을 이루었지만, 방탕한 생활과 바실리오스 1세에게 암살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구드프레드
기본 정보
군주 칭호덴마크 국왕
통치 기간기원후 804년경 - 810년
이전 통치자시그프레드
다음 통치자헤밍
출생 시기8세기 후반
출생 장소덴마크
사망 연도810년
사망 장소덴마크
가문시그프레드 가문
왕조왕조
아버지시그프레드
자녀호리크 1세
1670년에 묘사된 관대한 왕 고트리크 (구드프레드)
상세 정보
다른 이름고드프레드 (Godfred)

2. 가계 및 경쟁 세력

구드프레드는 적어도 다섯 명의 아들과 다섯 명 이상의 조카를 두었다. 이들 중 다수는 810년에서 854년 사이에 데인족의 통치자 또는 공동 통치자로 활동했다. 구드프레드의 아들들은 호리크 1세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구드프레드의 아들들"이라고 불렸다. 여러 현대 학자들은 스칸디나비아, 프랑크, 아일랜드 자료를 바탕으로 그의 다른 아들들의 이름을 올라프, 라그나르, 케틸 등으로 추정했지만,[2] 확실한 것은 아니다.[3] 왕립 프랑크 연대기에는 헤밍이 구드프레드의 이름 없는 형제의 아들로 언급되어 있다. 다른 조카로는 라그나발드, 호콘, 앙간티르, 시그프레드가 있었다. 호리크 1세는 형제와 사촌들보다 오래 살아 828년경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하랄 클라크(812-813, 819-827)를 중심으로 하는 경쟁 왕족 분파는 이전 왕 하랄드의 친족임을 주장하며 왕위를 요구했다. 이 하랄드는 시그프레드의 선임자, 공동 통치자 또는 단명한 후계자였을 가능성이 있다.[2]

2. 1. 가계

구드프레드는 적어도 다섯 명의 아들을 두었고, 다섯 명 이상의 조카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 중 여러 명이 810년에서 854년 사이에 데인족의 통치자 또는 공동 통치자로 활동했다. 그의 아들들은 호리크 1세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구드프레드의 아들들"이라고 불린다. 여러 현대 학자들은 이후 스칸디나비아, 프랑크, 아일랜드 자료를 추측하여 그의 다른 아들들의 이름을 올라프, 라그나르, 케틸 등으로 보았으나,[2] 이 중 어느 것도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3] 헤밍은 왕립 프랑크 연대기에 구드프레드의 이름 없는 형제의 아들로 언급되어 있다. 다른 조카로는 라그나발드, 호콘, 앙간티르, 시그프레드가 있었다. 호리크 1세는 형제와 사촌들보다 오래 살아 828년경 단독 통치자가 된 것으로 보인다.

2. 2. 경쟁 세력

하랄 클라크(812-813, 819-827)를 중심으로 하는 경쟁 왕족 분파는 전 왕 하랄드의 친족임을 주장하며 왕위를 요구했다. 이 하랄드는 시그프레드의 선임자, 공동 통치자 또는 단명한 후계자였을 수 있다.[2]

3. 샤를마뉴와의 외교적 접촉 및 갈등

8세기 말, 덴마크인들은 프랑크 왕국 샤를마뉴의 팽창 정책으로 위협을 느꼈다. 798년 작센족은 샤를마뉴와 동맹을 맺은 오보드리테스에게 본회베데 전투에서 패배했고, 804년 프랑크 군대는 덴마크의 남쪽 경계였던 아이더강까지 진격했다.[5]

이러한 상황에서 구드프레드는 샤를마뉴와 직접 담판을 짓겠다고 제안했고, 슬리에스토르프(슐레스비히, 헤데비)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구드프레드는 측근들의 반대로 나타나지 않았고, 샤를마뉴는 엘베의 홀렌슈테트에 진영을 설치하고 덴마크 왕국에 망명한 반역자들을 보내라고 요구했지만, 그 결과는 알려지지 않았다.[5]

808년, 구드프레드는 오보트리테족의 상업지 레리크를 습격하여 수장을 살해하고 상인들을 헤데비로 이주시켰다. 809년, 프랑크 왕국과 구드프레드는 회담을 가졌지만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후 샤를마뉴는 엘베강 건너편에 거점을 마련했다.

810년, 구드프레드는 200척의 배를 이끌고 프리슬란트 해안을 약탈하고, 상인과 농민에게 100파운드의 은화를 요구하며 북 프리슬란트가 데인족의 영토라고 선언했다. 같은 해 여름, 구드프레드는 용병 중 한 명에게 살해당했다. 노토케르 발불루스에 따르면, 그를 살해한 호위병은 그의 아들들이었다고 한다.

3. 1. 외교적 접촉 시도 (804년)

8세기 말, 덴마크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가 팽창 정책을 펼치면서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5] 798년, 작센족은 샤를마뉴와 동맹을 맺은 오보드리테스에게 본회베데 전투에서 패배했다.[5] 804년, 프랑크 군대는 덴마크의 남쪽 경계인 아이더강까지 진격했다.[5]

이러한 상황에 구드프레드는 샤를마뉴와 직접 만나 담판을 벌이겠다고 제안했다.[5] 그는 슬리에스토르프(슐레스비히, 헤데비)에 나타났으나, 측근들의 반대로 샤를마뉴를 만나지 않았다.[5] 샤를마뉴는 엘베에 있는 홀렌슈테트에 진영을 설치하고, 덴마크 왕국에 망명한 반역자들을 인도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결과는 알려지지 않았다.[5]

3. 2. 할프단의 배신 (807년)

807년, 덴마크 족장 할프단은 샤를마뉴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보호를 요청했다.[6] 할프단은 아이더 강 남쪽의 부유한 시장 마을의 백작이 되었으며, 노르트프리슬란트를 점령했을 가능성이 있다.[6] 이는 왕조 다툼으로 인해 구드프레드에게 충성을 거부했음을 의미할 수 있다.[6] 할프단은 후일의 왕이자 왕위 찬탈자인 하랄드 클라크의 아버지이자 전 국왕 하랄드의 형제로 추정되기도 한다.[6]

4. 오보드리테스 공격과 다네비르케 축조

808년, 프랑크 왕국과 국경을 접하게 된 구드프레드는 프랑크인의 침략을 우려하여 오보드라이트족의 상업 중심지 레릭을 공격하고 그 수장을 살해했다. 이후 상인들을 헤데비로 이주시켰는데, 헤데비는 다네비르케 방어선과 연결되어 있어 구드프레드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7][8]

809년, 구드프레드는 카롤루스 대제와 회담을 가졌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회담 이후 카롤루스 대제는 엘베 강 건너편에 에세스펠트(de:Esesfelth)라는 거점을 마련했다.[11][12]

810년, 구드프레드는 200척의 배를 이끌고 프리슬란트 해안을 약탈하고, 상인과 농민에게 100파운드의 은화를 요구하며 북 프리슬란트가 데인족의 영토임을 선언했다. 같은 해 여름, 구드프레드는 용병 중 한 명에게 살해당했는데, 노토케르 발불루스에 따르면, 그를 살해한 호위병은 그의 아들들이었다고 한다.[12]

4. 1. 오보드리테스 공격 (808년)

프랑크족의 침략을 두려워한 구드프레드는 프리시아를 정복하고 구 작센을 정복한 프랑크족이 침략해 올 것을 우려하여, 구 작센 영토 내의 오보드라이트족을 공격하기로 결심했다.[7] 덴마크 측의 상당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해상 침략은 성공했다. 포위 공격 중에 구드프레드의 형제의 아들 라그날드(Ragnvald)와 왕국 내 제2인자, 여러 족장들이 전사했다. 구드프레드는 슬라브족의 요새 여러 곳을 정복하고 두 지역에 세금을 부과했다. 오보드라이트 공작 드로즈코(트라스코)는 그의 영토에서 추방되었고, 고델라이브(Godelaib)라는 다른 족장은 속임수로 사로잡혀 교수형에 처해졌다. 슬라브족 리노네스(Linones), 스멜딩기, 빌체스(마지막은 오보드라이트족의 오랜 적)는 덴마크 편에서 싸우는 것을 선호했다.[7]

구드프레드는 왕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발트해 연안의 중요한 항구 레릭(현재 블로바츠 시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을 파괴했다. 레릭은 덴마크식 이름이며, 구드프레드의 왕국에 수수료 징수를 통해 큰 이점을 가져다주었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 행위로 그는 샤를마뉴 대제가 레릭을 전략적 무역로의 일부로 사용하는 것을 방해했을 수 있다. 상인들은 바이킹 함대를 따라 슬리에스토르프(Sliesthorp)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왕은 잠시 머물며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웠다.[8]

4. 2. 다네비르케 축조 (808년 이후)

프랑크족의 보복을 두려워한 구드프레드는 작센과의 국경에 다네비르케로 알려진 벽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8] 다네비르케는 약 737년부터 존재했으나, 구드프레드는 이를 개선하고 확장했다. 고고학자들은 이를 약 800년에 건설된 다네비르케의 한 단계인 소위 코비르케(Kovirke)와 동일시했다. 개선된 다네비르케는 슐라이에서 덴마크 서해안까지 트렌데(Trende) 강을 따라 이어졌으며, 나무 울타리로 덮인 흙 제방으로 건설되었고, 깊은 도랑으로 남쪽에서 보호받았다. 기병과 마차가 드나들 수 있는 문은 하나뿐이었다.[9]

덴마크의 가장 중요한 도시인 슬리에스토르프 또는 헤데비(슐라이에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보임)는 확장되어 덴마크 군인이 주둔했으며, 벽의 초기 부분은 이를 보호하도록 설계되었다.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이 도시는 810년경부터 본격적으로 번성하기 시작했다.[9]

4. 3. 샤를마뉴의 대응 (808-809년)

샤를마뉴는 아들 젊은 샤를에게 프랑크족과 작센족 군대를 이끌고 엘베 강으로 가도록 명령했다. 이는 구드프레드가 작센 영토에 대해 어떤 시도를 할 경우를 대비한 조치였다. 샤를은 덴마크 본토를 공격하는 대신 리노네스와 스멜딩기 족의 땅을 약탈하고 돌아갔다.[10]

809년, 구드프레드는 샤를마뉴에게 평화 협상을 제안했다. 그는 상인들을 통해 자신이 침략에 대한 황제의 분노를 알고 있으며, 정치적 해결책을 협상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샤를마뉴의 사절단은 아이더 강가의 바덴플리오트에서 덴마크 귀족들과 만났으나, 평화 협상은 실패로 끝났다.[11]

한편, 오보드라이트 공작 드로즈코(트라스코)는 작센 보조군과 함께 구드프레드의 동맹국인 빌체스를 공격했다. 자신의 아들이 구드프레드의 궁정에 인질로 잡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드로즈코는 덴마크 왕을 인정한 슬라브족 영토를 정복하고 자신의 옛 지위를 되찾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드로즈코는 얼마 지나지 않아 구드프레드가 보낸 암살자들에 의해 재건된 레릭에서 살해당했다.[12]

샤를마뉴는 "덴마크 왕의 자만심과 오만함"에 대해 심각하게 걱정했고, 엘베 강 북쪽에 에세스펠트(Esesfelth)라는 주둔지를 건설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신하들에게 이교도의 위협을 막기 위한 특별 종교 의식을 거행하도록 지시했다.[12]

5. 프리슬란트 침공과 죽음

810년, 샤를마뉴는 아헨에서 구드프레드를 상대로 대규모 군사 원정을 계획했다. 그러나 덴마크의 지배자는 그의 계획을 가로막았다. 같은 해 구드프레드는 200척의 배를 이끌고 프리슬란트 해안에 상륙하여 약탈을 감행했고, 상인과 농민에게 은 약 45.36kg를 지불할 것을 요구하며 북 프리슬란트가 데인족의 영토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격노한 황제는 가능한 모든 군대를 소집하여 알러와 베저 강의 합류 지점에 야영지를 구축하고 덴마크 지배자의 다음 행보를 기다렸다. 연대기에 따르면, "승리의 희망에 취한 이 왕은 황제와 공개된 곳에서 싸우고 싶다고 자랑했다"라고 한다. 그러나 더 많은 일이 일어나기 전에, 바이킹 함대의 철수와 구드프레드의 급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다. 같은 해 여름, 구드프레드는 용병 중 한 명에게 살해당했는데, 노토케르 발불루스(장크트 갈렌의 노케르)에 따르면, 그를 살해한 호위병은 그의 아들들이었다고 한다.

5. 1. 프리슬란트 침공 (810년)

810년, 200척의 배로 이루어진 바이킹 함대가 프리슬란트를 공격했다.[13] 구드프레드는 함대에 합류하지 않고 덴마크에 머물렀다. 덴마크인들은 해안가의 섬들을 약탈한 후, 본토에 상륙하여 지역 군대와 세 번의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했다. 이후 덴마크인들은 주민들에게 항복을 받고 "세금" 명목으로 은 약 45.36kg를 지불하도록 강요했는데, 이는 구드프레드가 북부 프리슬란트를 덴마크 영토로 주장했음을 의미한다.[13] 당대 역사가인 아이난트는 구드프레드가 "독일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할 정도로 허황된 희망에 사로잡혔고, 프리슬란트와 작센을 자신의 지방으로 여겼다"라고 기록했다.[14]

5. 2. 죽음 (810년)

810년, 구드프레드는 그의 호위병() 중 한 명에게 살해당했다.[15] 장크트 갈렌의 노케르 (c. 883)는 이 사건에 대해 자세히 전하지만, 신뢰하기는 어렵다. 노케르의 기록에 따르면 구드프레드는 매 사냥 중 자신의 아들에게 공격받아 칼에 찔려 죽었다. 왕이 아내를 버렸기 때문에 아들이 모욕에 대한 복수를 해달라는 아내의 간청으로 살해가 일어났다고 한다.[9][16][17]

구드프레드의 죽음으로 카롤링거 제국과의 전쟁은 끝났다. 그의 조카 헤밍이 왕위를 계승했고, 헤밍은 811년에 프랑크 왕국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18]

6. 구드프레드 왕국의 영역

구드프레드의 왕국 (대략적인 경계)


현대 고고학은 구드프레드보다 여러 세대 앞선 덴마크 왕국의 흔적을 발견했다. 리베의 초기 도시 중심지 및 주화(c. 700), 삼쇠의 칸하베 운하 건설(c. 726), 다네비르케의 초기 단계(c. 737)는 현재 덴마크의 적어도 일부 지역이 8세기에 초기의 왕권에 의해 지배되었음을 시사한다.[19] 9세기 초 왕권의 더 넓은 영역에 대한 힌트가 있는데, 811년의 평화 조약은 외레순 해협 양쪽에 덴마크 왕국을 대변할 수 있는 스칸(스코나오웨)의 대표자를 언급한다. 813년에는 베스트폴에서 덴마크 왕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 남부 노르웨이 일부 지역에 대한 일시적인 종주권을 시사했다.[20]

7. 전설과의 연관성

12세기~14세기 노르드 사가 문학에는 구드프레드에 대한 명확한 흔적이 없다. 삭소 그라마티쿠스는 그를 고트리크(Gøtrik)라는 이름으로 언급하지만, 그의 정보는 아담 브레멘의 연대기(약 1075년)와 관련 없는 예타 사가 등장인물을 결합하여 얻은 것이다. 삭소에 따르면, 고트리크의 아들 올라프가 왕위를 계승했으며, 올라프는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다 덴마크를 내전에 휘말리게 했다. 이 올라프는 프랑크 출처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현지 덴마크 전통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21]

연대기 시인 ''잉글링가탈''(Ynglingatal)은 그 시기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하르드라데의 아들이자 노르웨이의 하랄드 하르파그레의 할아버지인 베스트폴의 구드뢰드 사냥꾼 왕을 언급하는데, 그는 복수심에 불타는 아내 아사의 하인에게 살해당했다.[22] 장크트갈렌의 노케르의 설명과의 명백한 유사성으로 인해, 많은 학자들은 이 두 인물이 동일하다고 추정하게 되었다.[23] 이는 스노리 스투를루손헤임스크링글라가 구드뢰드를 덴마크 왕(스쾨네)으로 언급한다는 점으로 강화될 수 있다.[24]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동일시를 추측성으로 일축한다.[25]

구드프레드는 대륙 중세 문학에도 등장한다. 시 "La Chevalerie Ogier de Danemarche"(약 1200년)에서 그는 가우프로이 드 다네마르슈(Gaufroi de Danemarche)라고 불리며, 유명한 영웅 오지에르 르 다누아의 아버지이다. 이 시에서 구드프레드는 그의 아들을 샤를마뉴에게 인질로 준다.[26] 고즈프레즈는 고대 프랑스어의 기사도 이야기에 덴마크 왕이자 오지에 르 다노와(홀거 댄스크)의 아버지 조프로와(Geoffroi)로 등장한다. 오지에 르 다노와는 788년에 카롤루스 대제의 궁정에 속했다고 전해진다.

참조

[1] 서적 Gesta Danorum 1200
[2] 서적 Det norske Folks Historie https://runeberg.org[...] Instituttet for Historisk Forskning 1941
[3] 서적 Europäische Stammtafeln: Stammtafeln zur Geschichte der Europäischen Staaten, Neue Folge J. A. Stargardt 1978
[4] 웹사이트 Gesta Hammaburgensis ecclesiae pontificum http://hbar.phys.msu[...] 2005-02-07
[5] 간행물 Einhards Jahrbücher http://www.mgh-bibli[...] 804
[6] 논문 De senaste undersökningarna rörande ynglingasagan https://kulturbilder[...] 1895
[7] 간행물 Einhards Jahrbücher http://www.mgh-bibli[...] 808
[8] 간행물 Einhards Jahrbücher http://www.mgh-bibli[...] 808
[9] 서적 Danmarks Riges Krønike
[10] 간행물 Einhards Jahrbücher http://www.mgh-bibli[...] 808
[11] 간행물 Einhards Jahrbücher http://www.mgh-bibli[...] 809
[12] 간행물 Einhards Jahrbücher http://www.mgh-bibli[...] 809
[13] 간행물 Einhards Jahrbücher http://www.mgh-bibli[...] 810
[14] 서적 Life of Charlemagne http://www.thelatinl[...]
[15] 간행물 Einhards Jahrbücher http://www.mgh-bibli[...] 810
[16] Runestone Ørbæk runestone
[17] 서적 De Carolo Magno http://www.fordham.e[...]
[18] 간행물 Einhards Jahrbücher http://www.mgh-bibli[...] 811
[19] 서적 Danmarks runesten. En fortælling Gyldendal 2016
[20] 간행물 Einhards Jahrbücher http://www.mgh-bibli[...] 813
[21] 서적 The first nine books of the Danish history https://archive.org/[...] David Nutt 1894
[22] 서적 Heimskringla http://vsnrweb-publi[...] 2016
[23] 서적 Guldhornens tale 1979
[24] 서적 Heimskringla http://vsnrweb-publi[...] 2016
[25] 서적 Studier över Ynglingatal Vetenskaps-societeten i Lund 1939
[26] 논문 Ogier le Danois https://tidsskrift.d[...] 196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