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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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하일 3세는 842년부터 867년까지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테오필로스와 테오도라의 아들로 태어나, 두 살의 나이에 황위에 올랐으며, 어머니 테오도라가 섭정을 했다. 섭정 기간 동안 제2차 성상 파괴 운동을 종식시키고 성상 공경을 부활시켰다. 친정을 시작한 후에는 삼촌 바르다스를 중용하여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으나, 바르다스와의 갈등, 그리고 측근 바실리오스의 등장과 암살로 인해 바실리오스에게 암살당했다. 그는 통치 기간 동안 경제를 안정시키고, 불가리아의 기독교 개종을 지원하는 등 긍정적인 면모도 보였으나, 음주와 전차 경주에 대한 집착, 그리고 측근과의 기괴한 관계 등으로 인해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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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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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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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칭호 | 로마인의 황제 |
출생일 | 840년 1월 9일/10일 |
사망일 | 867년 9월 24일 (27세) |
사망 장소 | 콘스탄티노폴리스 |
왕조 | 아모리아 왕조 |
아버지 | 테오필로스 |
어머니 | 테오도라 |
통치 | |
즉위 | 842년 1월 20일 |
퇴위 | 867년 9월 24일 |
대관식 | 840년 5월 16일 (공동 황제) |
대관식 유형 | 대관식 |
이전 통치자 | 테오필로스 |
다음 통치자 | 바실리우스 1세 |
섭정 | 테오도라 (842–856) |
섭정 유형 | 섭정 |
공동 황제 | 바실리우스 1세 (866–867) |
배우자 | 에우도키아 데카폴리티사 |
자녀 | 레오 6세 (친부 불확실) 스테파노스 1세 (친부 불확실) |
기타 정보 | |
별칭 | 술주정뱅이 미하일 (그리스어: Μιχαήλ ὁ Μέθυσος, Mikhaēl ho Methysos) |
2. 생애
미하일 3세는 840년 황제 테오필로스와 테오도라 사이에서 태어났다.[1]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에 의해 공동 황제로 지명되었고 842년 아버지가 죽자 두 살의 나이로 황제가 되어 어머니 테오도라가 섭정을 시작했다.
미하일의 미성년 기간 동안 제국은 어머니 테오도라, 그녀의 삼촌 세르기오스, 그리고 내시 테오크티스토스가 이끄는 섭정에 의해 통치되었다.[1] 테오도라 섭정 시기에 제2차 성상 파괴를 끝내고 성상 공경을 부활시켰다.[1] 843년에 성상 숭배의 부활이 선언되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크레타와 시리아 북부에서 압바스 왕조에 밀렸고 파울리키아파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로 동쪽 변방에 대한 방위가 어려워졌다.
미하일은 유도키아 잉게리나라는 여자와 사랑에 빠졌는데, 어머니는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그녀를 맘에 들지 않아 했다. 미하일은 어머니의 반대로 유도키아 데카폴리타나와 결혼했지만, 평생 잉게리나와 관계를 유지했다.
2. 1. 초기 생애와 섭정
미하일 3세는 840년 황제 테오필로스와 테오도라 사이에서 태어났다.[1]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에 의해 공동 황제로 지명되었고 842년 아버지가 죽자 두 살의 나이로 황제가 되어 어머니 테오도라가 섭정을 시작했다.미하일의 미성년 기간 동안 제국은 어머니 테오도라, 그녀의 삼촌 세르기오스, 그리고 내시 테오크티스토스가 이끄는 섭정에 의해 통치되었다.[1] 테오도라 섭정 시기에 제2차 성상 파괴를 끝내고 성상 공경을 부활시켰다.[1] 843년에 성상 숭배의 부활이 선언되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크레타와 시리아 북부에서 압바스 왕조에 밀렸고 파울리키아파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로 동쪽 변방에 대한 방위가 어려워졌다.
미하일은 유도키아 잉게리나라는 여자와 사랑에 빠졌는데, 어머니는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그녀를 맘에 들지 않아 했다. 미하일은 어머니의 반대로 유도키아 데카폴리타나와 결혼했지만, 평생 잉게리나와 관계를 유지했다.
2. 2. 친정과 바르다스의 득세
미하일 3세는 840년 황제 테오필로스와 테오도라 사이에서 태어나, 842년 아버지가 죽자 두 살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다.[1] 어릴 적에는 어머니 테오도라와 환관 테옥티스토스가 섭정을 맡아 제2차 성상 파괴를 끝내고 성상 공경을 부활시켰다.[1]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압바스 왕조에게 크레타와 시리아 북부에서 밀렸고, 파울리키아파에 대한 박해로 동쪽 변방 방위가 어려워졌다.미하일 3세는 성장하면서 어머니 테오도라의 권력에 불만을 품고, 테옥티스토스와 사이가 벌어진 삼촌 바르다스와 손을 잡았다. 855년 테옥티스토스를 살해하고, 856년에는 어머니를 쫓아내 친정을 시작했다.[1] 그러나 제국의 실권은 바르다스에게 넘어갔다. 바르다스는 864년 "카이사르"(부황제)로 임명되었으며, 유능하게 제국을 관리했다.
바르다스 집권 이후 제국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아랍군을 몰아내는 등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다. 859년에는 황제가 직접 원정군을 지휘하여 사모사타를 포위했으나, 860년 루스족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침공으로 원정을 중단하고 귀환해야 했다.[1]
863년 라라카온 전투에서 페트로나스는 멜리테네의 아미르를 격파하고 살해했으며, 수도에서 개선식을 거행했다. 863년은 아랍-비잔틴 전쟁의 전환점으로 여겨지며, 이후 비잔틴은 공세로 전환하여 10세기에 승리를 거두었다.



2. 3. 종교 정책과 포티오스 분열
바르다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이그나티우스를 해임하고 평신도였던 포티오스를 총대주교로 임명했다. 이로 인해 교황 니콜라오 1세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포티오스 분열"). 8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이그나티오스의 폐위가 승인되었으나, 니콜라오스는 863년에 공의회를 소집하여 이를 뒤집고 포티오스를 폐위했다. 미하일 3세는 867년에 시노드를 주재하여 포티오스와 다른 세 명의 동방 총대주교가 교황 니콜라오를 파문하고 성령의 발현에 관한 라틴어 ''필리오케'' 조항을 비난했다.한편, 미하일 3세는 포티오스 총대주교의 지침에 따라 성 키릴로스와 성 메토디오스를 하자르에 파견하여 유대교 확산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863년 대 모라비아 선교는 성공하여 글라골 문자를 고안, 슬라브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정교회 기독교로 개종할 수 있게 했다. 불가리아의 보리스 1세는 프랑크의 영향으로 기독교 개종을 고려했고, 미하일 3세와 바르다스는 불가리아 침공을 위협했다. 결국 보리스 1세는 860년대에 비잔틴 전례를 받아들여 기독교로 개종했고, 미하일 3세는 그의 대리 후원자가 되었다. 불가리아인의 개종은 비잔틴 제국의 가장 위대한 문화적, 정치적 업적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2. 4. 바실리오스 1세의 등장과 암살
미하일 3세는 아르메니아 출신의 농부인 바실리오스를 총애하였고, 바실리오스는 황궁에서 빠른 승진을 거듭하며 황제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미하일은 자신의 첫사랑인 유도키아 잉게리나를 바실리오스와 결혼시켜 황궁으로 끌어들였다. 이 때 미하일은 잉게리나와 계속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이며, 잉게리나가 866년 9월 19일에 낳은 아들 레온은 사실 바실리오스의 아들이 아니라 미하일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바실리오스는 866년 밀레투스 부근에서 바르다스를 암살했는데, 미하일이 암살에 관여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후속 사태를 보면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일 이후에 바실리오스에 대한 미하일의 총애는 더욱 커져 그를 공동황제로 임명했다.

결국 바실리오스는 867년 9월 24일 잠자고 있는 미하일을 침실에서 암살했고 스스로 단독 황제가 되었다.

3. 평가와 유산
미하일 3세의 통치와 인물됨은 바실 1세(867-886)와 그의 계승자들이 쓴 적대적인 비잔틴 기록 때문에 평가하기 어렵다. 비잔틴 기록은 미하일의 상습적인 음주, 전차 경주에 대한 그의 집착, 그리고 교회의 행렬과 의식을 조롱하는 공개적인 전시를 조직한 행위를 묘사한다. 그의 궁정 정치는 바르다스, 테오크티스토스의 암살과 그의 아내 에우도키아 데카폴리티사, 정부 에우도키아 인게리나, 그리고 바실의 정부이자 미하일의 여동생인 테클라와의 기괴한 관계를 포함한 스캔들로 특징지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하일은 그의 신뢰를 받던 측근 바실의 손에 암살당했다. 그러나 아랍 자료에서 얻을 수 있는 인상은 미하일이 활동적이고 종종 성공적인 군 지휘관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을 수리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바실의 연대기 작가들은 미하일이 군 인력 기록의 감소를 허용하여 바실이 자신의 통치 기간 동안 대규모 모집 노력을 수행하도록 강요했다고 비난했지만, 그 감소는 노화로 인한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설명될 수 있다.
성상 파괴 시대의 종말로서 미하일의 통치는 황제가 간섭하지 않는 확립된 정통성과 전례를 가진 종교적 평화의 시작이었다.
자료의 편견에도 불구하고, 미하일과 바실 사이에는 아바스 칼리프조와 제1차 불가리아 제국과의 국경 안보, 그리고 모라비아, 아르메니아인, 루스인에 대한 기회주의와 관련하여 정책의 명확한 연속성이 있었다.
미하일은 돈을 낭비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그의 통치는 경제를 안정시켰고, 850년까지 제국의 연간 수입은 증가했다. 그의 통치 초기에 성상 파괴가 확실히 종식된 것은 놀랍지 않게도 시각 예술의 부흥으로 이어졌다. 제국은 내부 조직과 종교적 결속에서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고, 아바스 칼리프조에 맞서 자체적으로 확고히 입지를 다졌다. 무엇보다도 불가리아는 비잔틴의 종교적, 문화적 위성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에 대한 공로는 대부분 855년까지는 테오도라와 테오크티스토스에게, 그 이후에는 바르다스와 페트로나스에게 돌아가야 한다.
3. 1. 마케도니아 왕조와의 관계
미하일 3세는 부인 에우도키아 데카폴리티사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두지 못했지만, 정부였던 에우도키아 잉게리나와의 사이에서는 아들 레온 6세와 스테파노스 1세를 낳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잉게리나는 바실리 1세와 결혼했다. 레온 6세는 886년 바실리 1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는데, 레온 6세가 미하일 3세의 아들이라면 마케도니아 왕조의 혈통은 아모리아 왕조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4. 문화
4. 1.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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