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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름 시구르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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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토름 시구르손은 시구르 라바르의 사생아이자 스베레 시구르손 국왕의 손자였다. 1204년 호콘 3세의 사망 후 비르케베이네르에 의해 왕으로 지명되었으나, 같은 해 8월 갑작스러운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 이후 노르웨이는 내전에 휩싸였고, 잉에 2세와 바글레르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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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름 시구르손
기본 정보
칭호노르웨이 국왕
출생1199년경
사망1204년 8월 11일
사망 장소트론헤임, 노르웨이
매장 장소니다로스 대성당
가문스베레 가문
통치
즉위1204년 1월 2일
이전 통치자호콘 3세
이후 통치자잉에 2세
섭정미친 호콘
가족 관계
아버지시구르 라바르

2. 생애

구토름 시구르손은 시구르 라바르의 사생아로 태어났으며 스베레 시구르손 국왕의 손자였다.[3] 1204년 1월 2일 호콘 3세 국왕이 사망하면서 노르웨이 국왕으로 즉위했다. 즉위 당시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미치광이 호콘이 섭정 역할을 수행했다.[6][7]

호콘 3세의 죽음 이후, 덴마크의 지원을 받은 바글레르가 에를링 스테인베그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비켄 지역을 장악하고 에를링을 왕으로 추대했다.[10]

한편, 구토름은 트론헤임의 외라팅에서 비르케베이네르에 의해 왕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1204년 8월 11일 갑작스러운 병으로 사망했고, 니달로스 대성당에 안장되었다.[3]

2. 1. 배경

구토름은 시구르 라바르의 사생아였으며, 스베레 시구르손 국왕의 손자였다. 그의 어머니는 누구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3] 시구르 라바르는 아버지 스베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스베레는 1202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호콘 3세가 즉위했다. 호콘 3세는 1204년 1월 1일에 사망할 때까지 재위했다.[3]

호콘 3세는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비르케베이네르와 바글레르 간의 평화와 재통합을 추구했지만, 그가 죽은 후 양측의 관계가 무너졌고 노르웨이 내전의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었다.[4] 비르케베이네르의 일부는 바글레르와의 화해 정책에 불만을 품었고, 이것이 그의 죽음으로 이어졌을 수 있으며, 그 후 비르케베이네르 내의 권력 균형은 즉시 미치광이 호콘 주변의 파벌로 넘어갔다.[5]

2. 2. 즉위

1204년 1월 2일, 호콘 3세가 사망하자 비르케베이네르는 히르드 회의에서 베르겐의 마르틴 주교와 협의하여 구토름을 국왕으로 지명했다.[6][7] 스베레의 조카인 미치광이 호콘은 히르드와 군대의 지도자로서 섭정으로 임명되었다.[6][7] 《Bǫglunga sǫgur》(바글레르 사가)에 따르면, 어린 구토름은 호콘에게 칼과 방패를 주고 백작 칭호를 수여했으며, 호콘은 왕과 같은 높이의 자리에 앉았다.[8] 이는 백작에게 관례적인 낮은 자리가 아닌, 왕과 같은 높이에 앉아 호콘의 이례적으로 강력한 지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스베레의 또 다른 조카인 페테르 스토이페르와 스베레의 딸 세실리아의 남편인 에이나르 콩스모그가 구토름의 후견인으로 임명되었다.[9]

2. 3. 바글레르의 반란과 죽음

호콘 3세의 죽음 이후, 미친 호콘의 임명은 비르케베이네르 내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바글레르와의 관계를 악화시켰다.[5][10] 바글레르는 덴마크로 건너가 전 국왕 마그누스 5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에를링 스테인베그를 중심으로 결집했다. 이들의 반란은 비켄에 대한 덴마크의 지배권을 되찾으려 했던 덴마크의 발데마르 2세의 지원을 받았다.[5][10]

발데마르 2세의 동전.


발데마르 2세는 300척 이상의 배와 함께 비켄에 도착했고, 에를링은 퇸스베르그에서 신벌을 치렀다. 덴마크 왕은 에를링에게 35척의 배를 주었고, 필립 시몬손과 함께 발데마르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바글레르는 Haugating과 Borgarting에서 에를링을 왕으로, 필립을 백작으로 선포하고 비켄을 장악했다.[10]

한편, 구토름은 봄 또는 초여름에 트론헤임의 외라팅에서 비르케베이네르에 의해 왕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미친 호콘이 바글레르와 싸우기 위해 군대를 소집하는 과정에서,[3] 구토름은 갑자기 병에 걸려 1204년 8월 11일에 사망했다. 그는 트론헤임의 니달로스 대성당에 묻혔다.[3]

《바글레르 사가》의 긴 버전에서는 구토름의 병과 죽음이 스웨덴 출신 크리스티나 닐스다터에 의해 유발되었다는 암시가 있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이 주장이 의심스럽다고 본다.[3]

2. 4. 사후

미친 호콘은 구토름의 뒤를 이어 왕이 되려고 시도했으나, 신뢰를 얻지 못하고 강력한 적들을 만들어 실패했다.[12] 구토름 사후, 그의 후계자인 잉에 보르드손과 바글러 사이에 내전이 이어졌다. 1207년, 잉에, 호콘, 그리고 새로운 바글러의 왕위 요구자(참칭자) 필립 시몬손 사이에 협상이 이루어져 왕국이 분열되었다.[13]

참조

[1] 웹사이트 Håkon Galen http://snl.no/.nbl_b[...] 2012-10-10
[2] 웹사이트 Den norske kongerekken 2010-02-23
[3] 웹사이트 Guttorm Sigurdsson http://snl.no/.nbl_b[...] 2012-10-10
[4] 서적 1974
[5] 서적 1976
[6] 서적 1974
[7] 서적 1972
[8] 서적 1972
[9] 서적 1972
[10] 서적 1974
[11] 서적 1972
[12] 서적 1976
[13] 서적 1974
[14] 웹사이트 Håkon Galen http://snl.no/.nbl_b[...] 2012-10-10
[15] 웹사이트 Den norske kongerekken 2010-02-23
[16] 웹사이트 Guttorm Sigurdsson http://snl.no/.nbl_b[...] 2012-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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