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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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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권태양은 일제강점기 이후 해방 정국과 한국 전쟁 전후에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김규식의 비서로 활동했으나, 박헌영 프락치 또는 성시백의 직계라는 의혹을 받았다. 한국 전쟁 당시 김규식을 북한에 인도했으며, 이후 북한에서 활동하다 1966년에 사망하여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행적은 간첩 혐의와 김규식의 정치 활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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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양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권태양
사망일1966년

2. 해방 이전 활동

3. 해방 정국 활동

3. 1. 김규식 비서 활동

권태양은 1946년 조선적십자사 총재로 추대된 김규식의 비서로 활동했다.[1] 김규식의 삼청장에 파견된 기자 이본영은 권태양을 '박헌영 프락치'라고 지목했다.[2] 민족자주연맹 비서처장 송남헌은 권태양을 김규식에게 추천했으나, 후에 그가 성시백의 직계였다고 증언하며 속았다고 진술했다.[3] 김규식의 측근이었던 목사 강원룡도 권태양을 첩자로 의심하였다.[3]

3. 2. 북한과의 관계

권태양은 조선공산당남조선로동당북조선로동당으로 분열될 때 성시백을 따라 북조선로동당 김일성 계열에서 활동했다.[3] 송남헌은 권태양이 성시백의 직계 프락치였다고 증언했다.[3]

4. 한국 전쟁 전후 활동

4. 1. 한국 전쟁 당시 활동

1950년 6월 28일 한국 전쟁때 북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다.[4] 북한 인민군이 남한의 정치인들을 소환할 때 김규식 역시 소환을 재촉받았는데, 김규식의 비서인 권태양이 김규식을 서울을 점령한 공산주의자들에게 인도했다.[4] 목사 강원룡은 당시 권태양이 박소붕이라는 사람에게 위협적인 언행을 하는 것을 보고 그의 정체를 의심했다.[5] 강원룡은 남북협상에 기대를 걸지 않던 김규식은 북에 가지 않을 목적으로 권태양을 보냈으나, 권태양이 김규식이 북에 가도록 일을 만든 것은 아닌가 하고 의혹을 제기하였다.[5]

김규식비서였던 송남헌은 권태양이 성시백이 보낸 프락치라고 증언하였다.[6] 송남헌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민족문화연구소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도처에 공산당의 프락치들이 들어가지 않은 곳에 없었다고 증언하였고[6] '권태양은 내(송남헌)가 속을 정도로 은밀히 활동하였'다고 진술했다.[6] 송남헌은 또한 '권태양이 성시백의 직접선'이라 하였고[6] '8월 25일 공산당에서 하는 해주회의에도 갔다'[6] 고 진술했다.

4. 2. 전쟁 이후 북한에서의 활동

권태양은 1966년에 사망했으며, 사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조국통일상'이 수여되었다.

5. 평가 및 논란

5. 1. 긍정적 평가

권태양은 조국통일상을 수여받았다.

5. 2. 부정적 평가

권태양은 김규식의 비서로 활동했으나, 실제로는 북한의 지령을 받는 간첩이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2][3] 이본영은 권태양을 '일종의 박헌영 프락치'로 지목했고,[1] 송남헌 역시 권태양이 성시백의 직계였다고 증언하며 자신이 속았다고 진술했다.[3] 김규식의 또 다른 측근이었던 강원룡 목사도 권태양을 첩자로 의심하였다.

김규식박헌영을 미워하여 조선적십자사 총재직을 수행할 때 박헌영이 이사로 참여하는 것에 항의하기도 했다.[1] 그러나 박헌영은 다른 정치인들에게 프락치를 심었던 것처럼 김규식에게도 권태양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조선공산당남조선로동당북조선로동당으로 분열될 때, 권태양은 성시백을 따라 북조선로동당 김일성 계열에서 활동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김규식의 정치 활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비판을 받는다.

6. 상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부터 조국통일상을 수여받았다.

참조

[1] 뉴스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② 이승만·조봉암 사이에서 양다리 걸친 미국 http://shindonga.don[...] 신동아
[2] 서적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 선인 2001
[3] 서적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 선인 2001
[4] 방송 김규식 KBS 인물 현대사
[5] 서적 역사의 언덕에서 2:전쟁의 땅 혁명의 땅 한길사 2006
[6] 서적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 선인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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