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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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규식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 정치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부통령을 역임했다. 그는 부산 동래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미국 유학 후 독립신문 기자로 활동했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파리 강화 회담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임시정부에서 외무총장, 학무총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운동 자금 조달과 외교 활동을 펼쳤으며,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했으나 여운형의 암살로 좌절되었다. 6.25 전쟁 중 납북되어 사망했으며, 사후 건국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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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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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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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규식 |
원래 이름 | 金奎植 |
로마자 표기 | Gim Gyusik |
출생일 | 1881년 1월 29일 |
출생지 | 조선 경상도 동래도호부 |
사망일 | 1950년 12월 10일 |
사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북도 만포진 |
국적 | 대한민국 |
종교 | 개신교 (장로회) |
본관 | 청풍(淸風) |
배우자 | 조은수(사별), 김순애(재혼) |
자녀 | 김진필(男), 김진동(男), 김진세(男), 김한애(女), 김민애(女), 김우애(女) |
부모 | 부친: 김지성(김용원), 모친: 경주 이씨 부인 |
호와 별명 | |
호 | 우사(尤史), 죽적(竹笛) |
별명 | 변갑, 번개비 |
가명 | 김성(金成), 중문(仲文), 일민(一民), 여일민(余一民), 왕개석(王介石) |
가족 관계 | |
형제 | 형 김규찬 |
친인척 | 백부 김우성, 사촌 김은식, 처제 김필례, 당숙 김익남, 친족 김관식, 동서 최영욱, 인척 서병호, 김필순, 김염, 김마리아 |
정당 | |
정당 | 무소속 |
관직 | |
직책 | 임시정부 학무총장 |
임기 | 1920년 4월 10일 ~ 1920년 8월 27일 |
대통령 | 이승만 대한 임정 대통령 |
총리 | 이동휘 대한 임정 국무총리 |
전임 | 이춘숙 대한 임정 학무총장 임시서리 |
임시정부 관직 (2) | |
직책 | 임시정부 학무장 |
임기 | 1920년 8월 27일 ~ 1920년 9월 8일 |
대통령 | 이승만 대한 임정 대통령 |
총리 | 이동휘 대한 임정 국무총리 |
임시정부 관직 (3) | |
직책 | 임시정부 학무부장 |
임기 | 1920년 9월 8일 ~ 1921년 4월 29일 |
대통령 | 이승만 대한 임정 대통령 |
총리 | 이동휘 대한 임정 국무총리 이동녕 대한 임정 총리 권한대행 이동녕 대한 임정 총리 임시서리 |
후임 | 김인전 대한 임정 학무부장 직무대리 |
미군정청 관직 | |
직책 |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 겸 상임위원장 |
임기 | 1946년 12월 12일 ~ 1947년 6월 3일 |
수상 | 안재홍 미군정청 민정장관 |
장관 | 안재홍 미군정청 민정장관 |
후임 | 신익희 |
대통령 |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 |
사령관 | 존 리드 하지 미군정청 군정사령관 |
기타 정보 | |
경력 | 민족자유연맹 총재 |
부통령 |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통령 |
임기 | 1940년 10월 ~ 1947년 3월 3일 |
교육 | 로어노크 대학교 |
2. 어린 시절
김규식은 1881년 경상도 동래부(현 부산광역시)에서 중인 관료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년도와 관련해서는 1877년생 설, 1880년생 설 등이 혼재하며, 첩의 아들이라거나 차남이 아닌 셋째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김규식은 청풍 김씨 중방파 23세손으로 노론가의 방계 후손이었으나, 순조 대 이후 가세가 몰락하여 할아버지 김동선 대에 이르러서야 다시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다.[11] 아버지 김지성은 일본에서 신학문을 공부하고 선전관을 역임하였으며, 개항 이후에는 외무관리로 활동하였다.[12]
어린 시절 김규식은 부모를 여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여섯 살 때부터 언더우드 선교사의 고아원에서 기독교와 서양 학문을 접하며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후 언더우드의 지원으로 언더우드 학당과 한성 관립영어학교를 졸업했다.
2. 1. 불우한 유년기
김규식은 조선 경상도 동래부 (현 부산광역시) 출신으로, 아버지 김지성(아명 김용원)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11] 아버지 김지성은 일본에서 신학문을 익히고 선전관을 지냈으며,[12] 15세 때부터 왕실 시종무관으로 근무했다.[13] 개항 이후에는 외무관리로 일본, 러시아에 파견되었다가 동래부사의 부관으로 근무했다.[11][12]당시 조선에 파견된 청나라 위안스카이의 내정간섭과 일본과의 불평등한 교역으로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김지성은 민씨 정권의 대일 무역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되었다.[12] 이후 형 김규찬은 큰아버지의 양자로 가고, 어머니(혹은 법적 어머니) 경주 이씨마저 사망하자, 4살 된 김규식은 숙부 집에 맡겨졌다. 그러나 숙부와 친척들도 생활 형편이 어려워 김규식을 돌보기 힘들었다.
2. 2. 언더우드와의 인연
언더우드는 김규식을 '번개비'라고 불렀는데[14], 김규식이 온 동네를 휘젓고 잘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어린 김규식을 돌보기 어려웠던 언더우드는 그를 친척들에게 다시 돌려보냈다.[15]가난했던 숙부들은 김규식을 잘 보살피지 못하였고 김규식은 영양실조에 걸렸다. 그러던 중 병약했던 김규식은 여러 잔병치레를 하다가 심한 열병에 걸렸으나 제대로 된 치료 한번 받지 못하고 방치되었다. 이런 소식을 접하게 된 언더우드는 어린 김규식을 자신의 집으로 다시 데리고 와서 간호했고 그 덕분에 김규식은 건강을 회복했다.[10] 건강이 회복된 후 김규식은 그곳에서 기독교와 영어 등을 배우며 언더우드가 세운 학당을 다니며 소년기를 보냈다.[15][16]

2. 3. 청소년기
김규식은 조선 경상도 동래부에서 아버지 김지성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지성을 따라 강원도 홍천의 본가로 갔지만, 아버지 김지성이 민씨 정권의 대일 무역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를 당하면서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12] 형 김규찬은 큰아버지의 양자로 보내졌고,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4살의 김규식은 숙부들의 집에 맡겨졌으나, 숙부들 역시 가난하여 김규식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결국 김규식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운영하는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언더우드는 김규식을 '번개비'라고 불렀는데[14], 이는 김규식이 온 동네를 활발하게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어린 김규식을 돌보기 어려웠던 언더우드는 그를 친척들에게 다시 돌려보냈다.[15]
가난했던 숙부들은 김규식을 잘 보살피지 못했고, 김규식은 영양실조에 걸렸다. 심한 열병까지 앓았으나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방치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언더우드는 김규식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간호했고, 김규식은 건강을 회복한 후 언더우드가 세운 학당에서 기독교와 영어 등을 배우며 소년기를 보냈다.[10][15][16]
김규식은 언더우드 몰래 가출하여 아버지를 찾아 경성부 거리를 헤매다가 기독교인들에게 붙잡혀 다시 언더우드의 집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아버지 김지성(김용원)을 만나 고향 홍천으로 돌아갔으나, 1891년 할머니가, 1892년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17] 1894년 가을에는 할아버지 김동선과 큰형마저 사망하여 김규식은 완전히 고아가 되었다.[17]
청소년기에 겪은 계속된 비극과 주변의 멸시, 차별은 김규식의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17] 성인이 된 후에도 김규식은 다정하기보다는 냉정하고 차가운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17] 이정식은 이러한 성격이 유년기와 소년기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17]
대한민국의 사학자 도진순은 김규식이 가족, 집안, 씨족, 파벌 등과 같은 한국의 토착적 기반과 일찍부터 유리된 것이 훗날 그가 정치적 파벌과 거리를 두고 좌우합작에 노력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평가했다.[17]
언더우드의 배려로 김규식은 언더우드가 세운 사립학당인 예수교학당(민노아학당)에 입학하여 신앙 활동에 투신했다. 그는 한국인 개신교 교역자들 중에서도 성실하고 유능한 사람으로 인정받으며 성장했다.[10] 1894년에는 언더우드 학당을 졸업하고 한성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에 1기생으로 입학했다. 당시 한성 관립영어학교의 교장은 영국인 허치슨(W. F. Hutchison, 轄治臣)이었다.[10]
3. 청년기
김규식은 조선 경상도 동래부에서 아버지 김지성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곧 경상도 양산을 거쳐 강원도 홍천으로 이주하여 성장하였다. 그의 가문은 노론 명문가의 후예였으나 순조 대 이후 몰락하였다. 아버지 김지성은 일본에서 신학문을 공부하고 선전관을 역임하였으며, 개항 이후에는 외무관리로 활동하였다.[12]
어린 시절 고아가 된 김규식은 여섯 살 때부터 언더우드 선교사에게서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고 공부하였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루아노크 칼리지에서 학사 학위를,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05년 귀국 후에는 YMCA 청년회, 경신학교, 배재전문학교, 연희전문학교 등에서 영어 교사 및 교수로 활동하였다. 1910년 대한제국의 일본 병합 이후 1913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시기 | 내용 |
---|---|
1913년 12월 17일 | 상하이 바크달 영어학교 교수 |
1923년 | 복단대학교(復旦大學) 영어 교수 |
1927년–1929년 | 톈진 북해대학교(北海大學) 영어 교수 |
1932년–1937년 | 난징 정치강사학교 정치학 교수 |
1937년–1940년 | 쓰촨 대학 영문학과 외국어학과 학과장 |
학위 | 내용 |
1903년 | 로어노크 대학교(Roanoke College) 문학사(Bachelor of Arts) |
1904년 |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 영문학 석사(Master of English Literature, MA) |
1923년 | 로어노크 대학교(Roanoke College) 명예 법학 박사 |
종류 | 제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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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 《양자유경》(楊子遊經) |
영어 교재 | 《소영문법》(Small English grammar) |
영어 교재 | 《실용 영어》(Practical English) |
영문학 관련 | 《엘리자베스 1세 시대 극장 소개》(Elizabeth I Age's Introduction to Theatre) |
기타 | 《원용사》(WonYongSa) |
3. 1. 미국 유학
1896년 서재필이 귀국하자 그를 찾아가 면담하였다. 서재필이 독립신문사를 설립하자, 입사하여 기자생활을 하였다. 독립신문에서 근무하면서 서재필은 청년들에게 나라의 개화를 위한 길은 서구의 문물을 배워오는 길이라며 미국 유학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김규식에게도 미국 유학을 적극 권고하였다.[18] 1896년 언더우드의 후원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갔다. 1896년부터 1897년까지 미국 버지니아주의 목가적인 환경에서 공부하게 되었다.[19]그곳에서는 조선에서와 달리 그를 괴롭히거나 따돌리는 사람도 없었고 그의 출신 환경을 비웃는 사람도 없었다. 1897년 초 아르바이트와 막노동으로 스스로 학비를 조달하였다. 서재필 등이 학비를 고국에서 부쳐주었으나, 김규식은 고국에서 부쳐주는 학비에만 의존하지 않고, 등록금과 기타 학비를 노동을 하여 스스로 마련하였다.
1897년 9월 버지니아주에 있는 루터교 계열 인문대학 로노크 대학교의 대학 준비과정인 로노크 대학교 예과(예비 고등학교 과정)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19]
3. 2. 대학 시절
1897년 9월 버지니아주에 있는 루터교 계열 인문대학 로노크 대학교의 대학 준비과정인 로노크 대학교 예과(예비 고등학교 과정)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19]1900년 가을 정식으로 로노크 대학교(Roanoke College)에 입학, 1903년까지 영문학을 전공했다.[20] 언더우드 선교사의 지원과 함께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했다.
로노크 대학교 재학 중 대한제국 고종의 서자(庶子) 의친왕(義親王)과 만나 교우관계를 형성하였다. 1900년 5월 학교 잡지에 한국어에 대한 논문을 실었고, 1902년 2월호에는 '동방의 아침'이라는 이름으로 연설논문이 실리기도 했다.[20] 1901년 1월 개최된 연설 경연대회에서 최고상을 받고 대학 잡지에 특집으로 실리기도 했다.[20] 로노크 대학교 재학 당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 등에 뛰어났고[20][21] 웅변부와 데모스테니언 문학회라는 문학클럽에서 활동하였다. 1902년 1월 문학 동호회 회장이 되었다.[20] 1902년 5월 로노크 대학교를 휴학하고, 미국 뉴욕주 어빙턴에서 취직하였다. 1903년 6월 로노크 대학교를 전체 3등으로 졸업하였으며,[20]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 학사였다.
1903년 5월 로노크 대학교 교내 잡지에 《러시아와 한국문제》라는 글을 기고하였는데, 이 글에서 '한국의 정부는 천하고 무능력하며 정직하지 못한 정치인들의 정부이며 한국은 음모와 역 음모, 타성과 보수주의에 잠겨 있고 나라는 반역자들과 비겁한 겁쟁이들로 가득차있다'고 비판하였다.[22]
졸업식에서 '러시아와 극동'이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이때 그는 일본의 러시아 침략과 러일전쟁의 결과를 예견, 분석하였다.[22] 1903년 10월 28일 국내에서 조직된 황성기독교청년회 간사로 선임되었다.[23]
1904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프린스턴에서는 박사 학위 취득을 위한 장학금 수혜자로 선발되었으나, 조국 독립을 위해 거절하고 귀국했다.
3. 3. 귀국 후 활동
1904년 윤치호와 함께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의 이사로 선출되었고, 그해 가을 YMCA 청년회 교육부 간사에 임명되었다.[24] 이후 YMCA 이사회 이사 겸 서기를 거쳐 YMCA 교사가 되었다. 얼마 뒤에는 YMCA 중학교 교장이 되었다.[24] 1904년부터 1913년까지 언더우드의 비서로 있으면서 YMCA 학교 학생부 담당 겸 간사, YMCA 학교 교사, 경신학교 교사, 기독교 주일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YMCA 청년회 학관의 학감으로 재직 중일 때는 양반 출신 학생들이 스포츠를 천하게 여기고 그 시간을 거부하기도 했다.[25] 그러나 김규식은 강제로 체조를 시키고 스포츠를 장려했다.[25] 이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25]배재전문학교, 연희전문학교에서 영어 강사로, 조선기독교 대학교 1학년 2개 반 담당 교수 등으로 활동했다.[26] 배재학당에서 그는 영어 과목과 수사학 과목을 가르쳤다.
1905년 8월 미국 포츠머스에서 개최된 강화회의에 참석하고자 청나라 상하이까지 갔으나 실패하고[22], 11월 7일 귀국하였다. 그해 만주의 뤼순 항구가 일본에 함락되자 로노크 대학의 잡지에 여순항의 함락을 크림 전쟁에서의 세바스토폴의 함락과 비교한 '근대 세바스토폴의 함락'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22]
1907년 '제7회 세계기독학생연맹세계대회'가 일본 동경에서 열렸을 때 윤치호·김정식 등과 함께 대회에 참석하였다.[28] 새문안교회 집사로 교회 예배당 건설을 추진하였고 1910년에 새문안교회 예배당 헌당과 함께 새문안교회 장로가 되었으며[29], 1910년 숭실중학교 교사로 출강하였다. 숭실중학교에서 그는 수사학(修辭學) 과목을 가르쳤다.[30] 조병옥에 의하면 김규식은 수업 시간에 종종 영어 시를 읊어주곤 하였다고 회고하였다. 셀리, 키이츠, 테니슨, 바이런 등의 시들을 잘 읽어 주었다.[30] 조병옥은 숭실중학교 편입생 시절, 가장 재미있게 청강한 과목으로 김규식이 가르치던 수사학이었다고 회고하였다.[30]
1911년 9월 조선총독부는 105인 사건을 날조하여 한국의 독립운동가와 기독교 지도자들을 대거 구속, 투옥했다. 김규식은 극적으로 투옥은 모면하였다.[31]
1913년 봄 김규식은 조선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장학금과 도쿄 외국어대학교 영어교수직, 도쿄 제국대학 동양학과 장학생 특별 입학(入學)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하였고, 조선총독부는 다시 사람을 보내 도쿄 제국대학교 동양학과의 장학금을 제의하였으나 거절하였다.[30]
4. 독립 운동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자, 1911년 105인 사건을 계기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는 가운데, 1913년 김규식은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 여운형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결성하였다.
신한청년당은 1919년 1월부터 시작되는 파리강화회의에 대표 파견을 추진하였다. 김규식은 파리에 파견되었으나, 정식 정부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당하였다. 같은 해 3월 삼일운동을 계기로 4월에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김규식은 외무총장 겸 유럽미주외교위원회 대표로 임명되어 독립운동 자금 조달과 독립 지지 호소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6월에 파리강화회의는 조선의 민족자결을 논의하지 않고 폐막하였다.
1933년 임시정부 학무부장, 1934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1940년 임시정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1942년 10월 임시정부 선전부장, 1944년 4월 부통령에 재선되었다.
김구는 상하이에 본부를 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요 구성원이었으며,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그는 영어에 능통하였고 임시정부 구성원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1935년 상하이(상하이)에서 여러 한국 국민당의 결합을 통해 한국독립당이 결성되었으며, 조직자는 김규식, 김원봉과 조소앙이었다.[2]
4. 1. 중국 망명 시기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자, 1911년 105인 사건을 계기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었다. 이에 1913년 김규식은 인삼 장사를 목적으로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중국에서 신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 결성에 참여했다.김규식은 중국 망명 기간 동안 쑨원, 천치메이, 황싱, 탕사오이 등 중국 혁명 지도자들과 교류하며, 혁명파의 제2혁명에도 관여했다.[1]
1920년 상하이로 돌아와 임시정부 학무총장에 취임하여 재중국 조선인 학생 교육 지원에 힘썼다. 소비에트 연방과의 제휴를 모색하며 1921년 임시정부 학무부장이 되었고, 1922년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 내 활동 방침을 둘러싼 혼란이 심화되자, 김규식은 임시정부 해산 후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려는 "창조파"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한국정부"를 결성하여 시베리아로 이동했으나 해산되었고, 1925년 일소 국교 성립으로 소련의 지원이 끊기면서 소련에서 추방당했다.
이후 김규식은 조선인 스스로의 독립 쟁취를 결심하고, 기관지 『동방민족』을 통해 독립운동 세력의 협력을 호소했다. 1935년에는 상하이에서 여러 한국 국민당의 결합을 통해 조직된 한국독립당 결성에 참여했다.[2]
4. 1. 1. 몽고 무역상 활동 (1914~1917)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한 김규식은 화북과 몽고 지방에서 상업에 종사했다.[34] 이 기간 동안 신채호, 홍명희, 서병호 등과 교류하였다.[35] 1914년에는 독립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변장하고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 신의주에 잠입했으나, 일본 경찰의 추격을 피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야 했다.[36]1916년 김규식은 앤더슨&마이어(Anderson & Meyer) 회사에 입사하여, 몽골 접경 지역인 장가구 지점에서 2년간 근무했다. 1917년에는 아내 조은애와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다. 1918년 앤더슨&마이어 상사의 외몽골 울란바토르 지점장으로 부임하였다.
4. 1. 2. 신한청년당 창당 (1918)
1918년 여운형, 서병호 등의 초청으로 중국 톈진에서 상하이로 건너왔다. 1918년 8월 신한청년당 창립에 참가했다.[41]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종결 후,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파리 강화회담이 1919년 1월 18일에 개최되기로 결정되자, 신한청년당은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 대표단의 수석 대표로 임명하여 프랑스로 파견했다.4. 2. 파리 강화회담 참가 (1919)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자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파리 강화 회의(파리 평화회의)가 1919년 1월 18일에 개최되기로 결정되었다. 이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기한 민족자결주의에 전세계의 독립운동가들이 고무되었다.[39]1918년 12월, 신한청년당은 독립청원서를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보냈다. 신한청년당은 미국 망명 단체들과도 연락하면서, 1919년 1월부터 시작되는 파리 강화 회의를 목표로 민족자결을 호소하는 대표 파견 활동을 추진하였다.[39] 김규식은 파리에 파견되어 강화 회의에 조선을 대표하는 형식으로 참석하려 하였으나, 정식 정부의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당하였다.[39] 1919년 김구는 일본으로부터 한국의 독립을 위해 로비하기 위해 파리 강화 회의(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로 갔다.[1] 그는 1919년 여름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단을 조직한 여운형과 장덕수에 의해 파견되었다.[1] 파리에서의 그의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1]
같은 해 3월의 삼일 운동을 계기로 4월에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김규식은 파리 주재 외무총장 겸 유럽미주외교위원회 대표로 임명되어 독립운동 자금 조달과 독립 지지 호소를 위한 선전 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6월에 파리 강화 회의는 조선의 민족자결을 논의하지 않고 폐막하였다.[39]

4. 3. 미국 활동 시기
김규식은 1903년 로어노크 대학교에서 문학사 학위를, 1904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1] 1923년에는 로어노크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1]연도 | 학교 | 학위 |
---|---|---|
1903년 | 로어노크 대학교 | 문학사 |
1904년 | 프린스턴 대학교 | 영문학 석사 |
1923년 | 로어노크 대학교 | 명예 법학 박사 |
4. 4. 상하이 귀환 이후
1919년 김구는 일본으로부터 한국의 독립을 위해 로비하고자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로 갔다.[1] 그는 1919년 여름 상하이에서 여운형과 장덕수가 조직한 신한청년당에 의해 파견되었으나, 파리에서의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1920년, 상해로 돌아와 임시정부의 학무총장에 취임하여 서병호와 함께 재중국 조선인 학생에 대한 교육 지원을 실시하였다. 1921년에는 임시정부 학무부장이 되었으며, 1922년에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활동 방침을 둘러싸고 혼란이 심화되었다. 김규식은 임시정부를 일시 해산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려는 "창조파"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으며, "한국정부"를 결성하여 시베리아로 이동하였으나, 결국 해산되었다. 1925년에 일소 국교가 성립되자, 소련의 지원을 받던 독립운동가들은 지원을 모두 끊겼고, 김규식 또한 소련으로부터 추방당하였다.
이후 김규식은 조선인 스스로 독립을 쟁취하기로 결심하고, 기관지 『동방민족』을 중심으로 우파와 좌파로 분열되어 있던 독립운동의 협력을 호소하였다. 1933년 임시정부 학무부장, 1934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1940년 임시정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1942년 10월 임시정부 선전부장, 1944년 4월 부통령에 재선되었다.
1935년 상하이(상하이)에서 여러 한국 국민당의 결합을 통해 한국독립당이 결성되었으며, 조직자는 김규식, 김원봉과 조소앙이었다.[2]
5. 광복 이후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하면서 한국은 해방되었지만,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다. (연합군 군정기 (조선사) 참조). 김규식은 독립 국가 건설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했다. 당시 한국은 남쪽은 미국 군정이, 북쪽은 소련 민정이 통치하고 있었다.[1]
1945년 9월, 여운형 등이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김규식을 외교부장으로 임명했지만, 조선인민공화국은 점령군에 의해 승인받지 못하고 좌절되었다. 1945년 11월, 김규식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은 남한으로 귀환했지만, 임정 요인으로서의 귀국은 인정받지 못하고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다.
남한에서는 좌우익 간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김규식은 “'''참된 해방은 본래 하나의 민족 국가로 통일되고 교류하는 데 있으며, 우리 스스로의 상호 신뢰와 보완에 달려 있다'''”고 호소하며 통일과 독립을 주장했다. 국제연합의 신탁통치 움직임에 대해 처음에는 반대 입장을 밝혔으나, 장기적으로 불이익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반탁 운동에서 이탈했다. 이로 인해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우익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김규식은 좌우 합작 운동에 참여하여 1946년 10월 7일 "좌우 합작 7원칙"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좌우 양측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함께 좌우 합작에 참여했던 여운형이 암살되면서 운동은 와해되었다. 그럼에도 김규식은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하여 좌우 합작과 통일 조선 독립을 계속 추구했고, 김구와 함께 평양에서 열린 남북 연석회의에 참석했지만, 결국 조선의 분단을 막지는 못했다.
1946년 11월, 김규식은 김홍일의 조기 귀국을 위해 박시창의 중국 여행 허가를 미군정에 요청했다.[4] 이는 이청천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며, 김규식은 "만약 김홍일 장군보다 이청천 장군이 먼저 귀국하면, 이것은 김홍일 장군의 모욕이 된다"고 주장했다.[4] 그러나 윔즈(William Weems)는 김홍일이 필요한 곳은 한국이 아니라 중국이라며 거절했다.[4]
한국 전쟁 당시 김규식은 북한으로 넘어갔고 (한국 측은 납치라고 주장), 평안북도에서 병사했다. 다른 주장에 따르면 1952년 12월에 총살되었다고도 한다. 사후 1989년에 한국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5. 1. 귀국 직전 (1945)
1945년 8월 15일 광복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9월 7일 김규식은 외교부장에 선임되었으나,[106] 11월 28일 취임을 공식 거절하였다.[111]1945년 9월 초, 임정은 김규식을 미국에 파견하여 전후 대책을 논의하고, 이승만 및 재미 교포 지도자들과 연대하며 미국 정부의 의중을 파악하고자 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불허로 무산되었다.
1945년 11월 3일, 임정 요인 귀국 문제로 한독당계와 민혁당계 간 논쟁이 벌어졌다. 김규식은 임정 요인 제1진으로 귀국하게 되었는데, 김원봉이 한독당계에 1진을 양보하는 조건으로 민혁당 위원장인 김규식의 1진 포함을 요구했기 때문이다.[107]
김규식은 광복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진정한 민족의 광복은 해방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본래 하나였던 우리 한민족이 불편 없이 통일되어 교류하고 상호 신뢰와 보완성을 유지해 나가느냐에 달려 있다. ... 이천만 동포는 애일같이 주인 정신을 살려 단합과 통일을 이루기 위해 전력투구해야 할 것이다."[108]
5. 2. 귀국 직후 (1945)
1945년 11월 3일 김규식은 상하이 비행장에서 김구, 장준하, 안미생 등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경기도 김포 비행장에 도착했다. 귀국 직후 윤치호를 방문했으나, 윤치호는 김규식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지 않았다.[109] 이후 서울 삼청장에 여정을 풀고, 새문안교회 인사들과 면담했으며, 김구와 함께 의친왕을 방문하기도 했다. 중도파 혹은 온건우파 성향이었던 그는 좌익으로 인식되기도 했으며, 김구, 이승만 등이 한민당의 영수로 추대되었을 때 배제되었다.임시정부 부주석으로 귀국했지만, 그는 임정에 대해 소극적이거나 비판적인 입장이었다.[17]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이 무슨 병을 앓고 있느냐는 질문에, '내가 앓고 있지 않는 병이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답하기도 하였다.[57]
1945년 11월 2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때 민혁당 대표이자 임정 부주석 자격으로 김구 등과 함께 임정 1진으로 귀국하였다.[107] 군산비행장에 착륙하여 차로 서울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조국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되어 있었고, 김규식은 "우리가 피흘려 싸운 것이 고작 이런 대가 밖에 없다니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라고 한탄하였다.[110]
1945년 11월 28일 정동교회에서 개최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환영회에 이승만, 김구와 함께 참석, "카이로 회담에 '적당한 시기에 조선독립을 준다'고 한 '적당한 시기'란 우리가 늦출 수도 있는 것이고 빠르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손에 달렸단 말입니다."라고 연설하였다.
1945년 12월 1일 돈암장의 이승만으로부터 초대받았다. 김구와 김규식은 12월 2일 돈암장을 방문, 2시간 동안 회담하였다.[114] 12월 9일 윤치호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삼청장에 기거하며 경교장을 수시로 방문하였다.[115] 귀국 직후 인사차 임정을 방문한 여운형을 만났으나, 뒤이어 여운형이 경비원에게 끌려가 몸수색을 당하고 다시 들여보내지는 것을 목격했으나 이를 말리지 않았다. 12월 경교장 임정 요인을 찾아온 청년 윤판석이 혈서를 쓰자 "일본 놈한테 배웠구먼, 왜놈들한테 배웠다...여보게 청년들 그런 짓은 하지 말게." 하며 만류하였다.[116]
1945년 12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정개선환영대회에 참석하였다.
1945년 12월 24일 한국 소년군 총본부 부총재에 추대되었다.[117]
5. 2. 1. 모스크바 3상회의 이후 (1945~1946)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3상회의) 결과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미·소·영·중 4개국에 의한 5년간의 신탁통치를 협의하게 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김구 등 임정 측은 긴급 국무위원회의를 열고 각 정당, 종교단체, 언론기관 대표들을 초청, 비상대책회의를 개최하여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구성을 결의하였다. 김규식은 김구, 조소앙, 김원봉, 신익희 등 9인의 장정위원(章程委員)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118]1946년 1월 6일 기독교청년연합회가 서울 정동교회에서 주최한 강연회에 초빙되었다.[120]
1946년 1월 16일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 예비회담이 개최되자 각 정당과 사회단체는 서둘러 반탁진영과 찬탁진영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1946년 1월 20일 임정을 중심으로 한 과도정부 수립을 목표로 비상정치회의주비회를 개최하여 전국의 정당과 사회단체를 소집하였다.[121] 1월 21일 비상정치회의주비회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합류시켜 비상국민회의주비회로 개칭하고 이승만·김구을 공동회장으로 추대하였다.[122] 1월 30일 비상국민회의 상임위원회가 설치되었고, 이 상임위원회는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선임권을 이승만·김구에게 위임하였다. 2월 1일 비상국민회의가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김규식은 비상국민회의 대의원에 선임되었다.[125] 2월 13일 이승만·김구는 김규식을 포함한 28인의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을 선발하였다.[126]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가 과도정부 수립을 위한 미군정의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으로 개편되었다. 이승만이 의장에, 김구·김규식이 부의장에 추대되었다.[127]

5. 2. 2. 조선민족혁명당 탈퇴 (1946)
김규식은 한국이 완전한 독립을 찾고 새 국가를 건설하려는 시점에서, 자주독립적인 과도정권을 수립하는 단계에서는 개인이나 당파적 이해를 위한 활동을 할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1946년 2월 18일 조선민족혁명당 주석직을 사임하고 동시에 당을 탈퇴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132]5. 2. 3.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당시 (1946)
1946년 3월 20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가 개최되었다. 김규식은 미소공위에 협력하며, "반탁 문제는 과도정권이 수립된 후에 그 정부에서 의논할 것"이라고 말했다.[140] 3월 24일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은 미소공위에 파견할 대표로 김규식, 조소앙, 안재홍, 원세훈, 김준연 5인을 선정했다.[141]1946년 4월 26일 경성 정동교회에서 한국청년회를 결성하고 초대 총재에 선임되었으며,[148] 4월 29일 대한독립촉성청년총연맹 전국대표자대회에서는 이승만이 총재, 김구가 주석, 김규식이 부총재에 추대되었다.[149] 5월 1일에는 창간된 독립신보의 고문에 추대되었다.[150]
5. 2. 4. 좌우합작운동 전개 (1946)
1946년 6월 14일 김규식·여운형·허헌을 중심으로 좌우합작 구체화가 논의되기 시작했다.[157]1946년 6월 30일 하지는 김규식·여운형의 좌우합작추진을 적극 찬동하는 특별성명을 발표하였다.[158]
1946년 7월 1일 하지의 좌우합작 찬성 담화에 이승만 측은 긴장하며 이승만·김구·김규식은 유기적 관련이 있으며 이신동체(異身同體)라고 하였다.[159]
1946년 7월 25일 김규식과 여운형의 주도 하에 좌우합작운동이 정식으로 시작되었다.[160] 이후 좌우합작위원회의 비공식적인 회의는 계속되었다. 4인의 만장일치에 의하여 하지 중장의 정치고문이 초대되어 중재자로서 그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회의 초에 버치의 노력이 없었다면 그들이 함께 화합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논평하였다.[161]
김규식은 좌우합작이 안 될 것이라고 절망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독립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길이라면 실패하겠지만 기꺼이 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한편 좌우합작위원회에 한민당에서는 대표를 보내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김규식의 설득으로 한민당에서도 좌우합작위원회에 대표를 보냈다. 김규식은 한민당에서 온건한 분파의 지도자인 원세훈을 참가하게 하였다.[161]
1946년 7월 27일 김규식이 조선적십자사 총재에, 구자흥이 부총재에 임명되었다.[162]
5. 2. 5. 남조선과도입법의원 활동 (1946)
1946년 8월 24일 공보부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창설할 것을 발표하였다.[161] 1946년 9월 9일 김규식은 우선 남쪽만이라도 좌우합작을 바란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1946년 10월 7일 좌우합작위원회는 합작7원칙과 입법기관에 대한 건의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회의 초에 버치의 노력이 없었다면 그들이 함께 화합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논평하였다.[161] 한민당은 좌우합작위원회에 대표를 보내기를 꺼려했으나, 김규식의 설득으로 원세훈을 위원으로 참가시켰다.[161]
1946년 11월 4일 김규식은 존 하지에게 과도입법의원 민선의원의 무효화를 요구하였다. 1946년 11월 24일 전국노동조합총동맹 결성식에서 김규식은 고문에 추대되었다. 1946년 11월 29일 민중동맹결성준비회가 조직되었고, 김규식·원세훈·김병로는 이에 적극 찬동하였다.
1946년 12월 7일 김규식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관선의원에 선출되었고, 12월 11일에는 의장에 선출되었다. 1946년 12월 22일 민중동맹(民衆同盟) 결성에 참여하였다.
1947년 1월 20일 과도입법위원회에서 이승만 진영과 한민당계 인사들이 반탁결의안을 통과시켰으나, 수적으로 불리하여 김규식은 손을 쓸 수 없었다.
5. 2. 6.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직전 (1947)
1947년 김규식은 미군정 고문관으로 초빙된 서재필의 귀국을 지지했다. 1947년 2월 10일 김구는 좌우합작위원회를 이끌던 김규식에 대해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생을 희생하였고 탁치 반대자로는 누구보다도 철저한데, 그를 찬탁자로 몰아넣으려는 것은 일종의 모략"이라고 주장했다.[162] 1947년 3월 15일 전재동포원호회는 김규식을 후임위원장에 추대하였고, 3월 16일 대한적십자사 회장에 선출되었다.5. 2. 7.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당시 (1947)
(오른쪽 끝이 여운형, 왼쪽 끝이 허헌)]]5. 2. 8. 좌우합작운동 좌초 (1947)
1947년 7월 19일 서울특별시 혜화동 로터리에서 좌우합작위원회 좌측 대표 여운형이 백의사 단원 한지근 외 4명에게 권총 피격을 당해 절명하였다. 김규식은 여운형의 죽음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1] 1947년 12월 15일 좌우합작위원회는 해체를 선언하였다.6. 생애 후반
1946년 8월 24일 공보부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창설할 것을 발표하였다.[171] 9월 9일 김규식은 우선 남쪽만이라도 좌우합작을 바란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172] 9월 17일 존 하지는 김규식의 좌우합작에 관한 성명서에 전적으로 찬동한다고 하였다.[173] 10월 7일 좌우합작위원회는 합작7원칙과 입법기관에 대한 건의문을 발표하였다.[174] 10월 10일 김규식은 합작7원칙 해명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 중 일부는 "운운하는 문구 중에 신탁통치를 언급치 아니하였다 하여 탁치를 지지한 것처럼 대의(大疑) 소괴(小怪)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들은 3상회의결의를 다시 숙독 연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반역분자를 포용하는 것은 절대로 불허할 것이나 다만 친일분자에 이르러는 죄상이 현저하지 않을 뿐 아니라 건국사업에 공헌이 있는 자에 한하여 채용하는 것이 무방하다고 인정한다."이다.[175]
1946년 11월 4일 김규식은 존 하지에게 과도입법의원 민선의원의 무효화를 요구하였다. 그는 "전체적으로 유능한 애국자가 못 나왔고 더구나 좌익진영은 전면적 검거때문에 피선될 기회가 거의 없었다는 것 때문에 유감이며 더구나 피선된 자가 극도로 편향적인 데다가 친일파라고 지목되는 자가 다수 피선된 것은 입법기구에 대하여 전민중의 실망을 주었고 충분하 민의를 반영시키지 못한 반민주적 선거이라는 것을 국민대중에게 인식케 하여 진실한 입법기구가 아니라는 인상을 주게 되었읍니다. 이상 지적한 바에 인하여 선거가 원만하게 되지 못하고 118호 법령 7항에 위반되는 인물이 다소 등장되었다는 점으로 보아 현명한 장군의 판단에 의하여 지방민선은 전부 혹은 부분적으로 무효로 정하고 재선하든지 또는 지방법으로 하든지 할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176] 이에 11월 8일 한국민주당은 김규식을 맹렬히 비판하였다.[177] 11월 24일 전국노동조합총동맹 결성식이 개최되었고 김규식은 고문에 추대되었다.[178] 11월 29일 민중동맹결성준비회가 조직되었고 김규식·원세훈·김병로는 이에 적극 찬동하였다.[179]
1946년 12월 7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관선의원에 선출되었고,[180] 12월 11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142] 12월 12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개원식에서 김규식은 "이 의원(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결코 미주둔군사령장관이나 미군정의 자문기관으로 행사할 것은 아니며 또 미군정을 연장시키기 위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말하자면 남에 있는 미군정이나 북에 있는 어떠한 군정이나 그 존재를 단축시키려는 것이다. (중략) ...우리는 우리의 땅에서 완전한 자격을 얻어 우리의 일은 우리의 손으로 하며 우리에게 대한 법령제정도 우리의 손으로 하고 우리의 운명을 우리로서 자정하는데 매진할 것이다."라고 개회사를 하였다.[181]
과도입법의원은 좌우합작 7원칙에 따라 출범되었고, 김규식은 과도입법의원을 통해 좌우합작을 모색하였으나 여운형 일파와 장택상 일파가 참가를 거부하여 난항했다.[182] 그는 입법의원들을 위해 미국식, 유럽식 회의 과정, 원탁토의와 직선 회의 등 회의 방법을 설명하고, 동의와 제청, 재청, 삼청의 의미를 설명하였으며, 투표 전후 절차를 훈시하는 등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과도입법의원 의장이었지만 소수파였던 그는 며칠 뒤 신탁통치 반대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가결시켰다.[183]
1946년 12월 22일 민중동맹(民衆同盟) 결성에 참여하였다. 초대 의장은 임의탁(林義鐸)이었다. 이날 김규식은 축사를 하였다.[184] 12월 24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성탄절과 신년 휴회 안건을 거절하였다. 그는 독립운동 당시를 말하며 민족의 자주 독립을 위해서는 희생해야 된다고 설득하여, 회의는 성탄절 당일과 12월 30일까지 계속 개원되었다.
1947년 1월 1일 김규식은 연두사를 통해 "나는 몸이 비록 우익에 속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좌익동지들과 합작할 필요를 느낄 뿐만 아니라, 반드시 합작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나는 오직 이러한 신념을 가지고 좌우합작위원회에 임하였으며, 또 남북통일의 임시정부 수립이 실현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라고 밝혔다.[185]
1947년 1월 20일 과도입법위원회에서 이승만 진영과 한민당계 인사들이 반탁결의안을 통과시켰으나 수적으로 불리하여 김규식은 손을 쓸 수 없었다. 우익 청년단체 회원들이 회의장에 진입해 장덕수, 장택상 등의 지휘 아래 반대파들에게 야유를 보내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고 반탁결의가 통과되었다. 반탁결의안의 통과로 김규식의 위신은 크게 실추당했다.[186] 1월 21일 민중동맹 내에 원세훈파와 김규식파의 의견이 대립하자, 김규식은 민중동맹과 관련을 끊겠다는 절연장을 전달하였다.[187] 1월 30일 김규식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의문에)'신탁문제까지 포함하여'라고 한 것은 탁치 문제가 적당한 시일과 장소에서 문제되기 전에 결코 누구나를 막론하고 찬부 양자 중 일방적이 되어야 되겠다는 말은 아니다"라고 말했다.[188][189]
1947년 1월~2월 독립촉성중앙회는 김규식 중심의 좌우합작위원회를 '독립운동'의 반역집단이라고 규정하고 이들의 회색행동을 철저히 소탕할 것을 결의했으며,[190] 김구가 위원장으로 있는 반탁투쟁위원회에서는 좌우합작위원회를 유령집단으로 매도했다.[190] 1947년, 이승만을 견제할 목적으로 미군정청 사령관 존 하지가 미국에 있던 서재필을 군정 고문관으로 초빙하려 하자 김규식 역시 서재필의 귀국을 원하였다.[191] 그는 군정청과 하지의 의견을 물어본 뒤 서재필 귀국에 적극 찬성, 지지한다. 그는 직접 서재필 귀국 환영 성명서를 지어 발표하였고, 서재필이 귀국하자 김규식은 여운형, 이승만, 김구 등과 친히 공항에 나가 서재필을 환영하기도 했다.[192]
우익 진영과 좌익 진영의 양면 공세에 시달림을 당하면서도 그는 조병옥, 장택상, 김준연, 김성수, 이순탁, 원세훈, 허정 등 우익 인사들을 상대로 미소공위에 참석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 설득하고 다녔다.
1947년 2월 3일 김규식은 제13차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본회의에서 동 의원에서 반탁을 결의한 후 하지 중장과의 회견보고를 하였는데, 하지는 "반탁결의라고 하면 언론자유가 있고 또 민의 대표기관인 만큼 얼마든지 좋다. 그러나 결의문 내용을 보면 반탁을 하는 결의가 아니라 나와 미국정책에 대한 반대표현 밖에 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불쾌하다."라고 말했다.[193] 즉 김규식과 과도입법의원이 한 반탁결의는 언론자유를 넘어 미국반대결의라는 주장이었다. 2월 8일 민족통일총본부는 "탁치반대가 하지와 미국정책을 반대하는 것이라 운운함은 실로 터무니없는 모략적 중상에 불외하다"고 반박하였다.[194]
1947년 2월 남로당은 2.7 사건을 일으키고 3월 초까지 대규모 투쟁을 벌였다. 이들은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을 친일반동이자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싸잡아 비난하며 사회 혼란을 더욱 가속화시켰다.[195] 2월 10일 김구는 "그러나 해당 회의(좌우합작위원회)를 취소한다 하여서 합작공작을 위하여 진심으로 노력한 몇분에 대한 우리의 경의는 감할 바 아니어늘 일시 감정상 충동으로서 그들에게 굴욕을 가하려 하는 것은 천만부당한 것이다. 더구나 좌우합작위원회를 영도하던 김규식은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생을 희생하였고 탁치반대자로는 누구보다도 철저한 터인데 그를 찬탁자로 몰아넣으려는 것은 일종의 공심을 떠난 모략으로 밖에 인정할 수 없다. 우리는 격별히 이런 점에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또 한가지 부언할 것은 근일에 세간에서 운위하는 바 중앙노선은 정치이상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을 이상으로 하는 중간당도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196]
1947년 3월 12일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었다. 미국 본토의 정치적 변화와 함께 1946년 9월 총파업과 대구 10.1 사건도 겪었던 미군정은 북한과 조선공산당 등 극좌익이 우세한 한반도에 극좌부터 극우까지 아우르는 통일정부가 수립될 경우 우익은 결국 살아남을 수 없을 거라고 판단, 좌우합작운동을 외면하고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1947년 3월 15일 전재동포원호회는 김규식을 후임위원장에 추대하였다.[197]
1947년 3월 16일 조선적십자사 회장에 선출되었다.[198] 적십자사 활동 중 그는 정식 대한적십자사의 부활을 위해 노력하였다. 1947년 조선적십자사의 국제적십자사 가입요청 서한을 미국적십자사를 통해 연맹에 보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99]
1947년 5월 17일 김규식은 제2차 미소공위 재개를 앞두고 천재일우의 호기회를 놓치지 말자는 담화를 발표하였다.[200] 6월 3일 퇴원하였다.
1947년 조봉암이 리극로와 손잡고 민주주의독립전선을 만들었으나, 김규식은 이들의 좌우합작위원회 참여를 거부했다.[163] 조봉암은 김규식을 지지하고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김규식은 공산당 전향 여부를 떠나 상대를 하지 않았다.[163]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한국이 해방된 후, 그는 새롭게 독립하는 국가의 건설에 참여하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한국은 남쪽은 미국 군정의, 북쪽은 소련 민정의 통치하에 있었다. 김구는 미군정 사령관 존 R. 호지의 총애를 받았는데, 호지는 그와 여운형을 각각 우익과 좌익의 온건파 지도자로 여겼다. 1947년 9월 미국과 이승만 등은 한국 문제를 새로 설립된 유엔으로 넘기려 했고, 유엔은 북한의 비참여에 반대하는 김규식과 김구 등 남한의 민족주의자들과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한에서의 1948년 대한민국 총선을 허용하는 결정을 내렸다.[1]
6. 1. 민족자주연맹 결성 (1947)
1947년 9월 27일 민족자주연맹준비위원회가 구성되고 김규식은 준비위원장에 추대되었다.[1] 1947년 10월 14일 한미문화협회 명예회장으로 선출되었다.1947년 12월 20일 경운동 천도교강당에서 민족자주연맹이 결성되었다. 의장에 김규식, 부의장에 김붕준, 홍명희, 원세훈, 이극로, 김성규가 추대되었다.[1]
6. 2. 남북협상 참가 선언 (1948)
1948년 1월 12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제188차 본회의에서 김규식은 유엔 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3월 말일 이내로 국회가 구성되어 본 남조선과도입법의원도 속히 휴회되기를 바란다는 요지의 개회사를 하였다.[226]1948년 1월 26일 김구는 김규식을 방문하여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에서 개진할 의견을 협의하였다.[228]
1948년 2월 9일 김구와 김규식은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의 크리슈나 메논에게 남북한 동시 총선거 성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재차 제안하였다.[230]
1948년 2월 16일 김구와 함께 공동명의로 단독선거 강행을 저지하고 통일국가수립을 위해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을 주장하는 내용의 서신을 북한의 김두봉에게 보내 남북 지도자 회담을 제안하였다.[231]
1948년 2월 27일 김규식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직에 대한 사표를 제출하였다.[232]
1948년 2월 28일 김규식은 '''"남조선 선거에는 물론 불참하겠다. 그러나 남조선 선거에는 반대치 않겠고 이 앞으로 아무런 정치행동에도 불참하겠다"'''고 말했다.[233]
1948년 3월 12일 유엔 소총회에서 조선에 가능한 지역만에서라도 총선거를 실시하여 조선의 중앙정부를 수립하자는 미국측 제안이 통과되자 김구, 김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홍명희는 이에 반대하여 총선에 불참한다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236]
1948년 4월 3일 김규식은 서울 필동의 호국역경원에서 열린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 결성식에 참석하여 훈화하였다.[240]
1948년 4월 14일 민족자주연맹 정치상무연석회의의 결의와 측근자의 권고에 따라 김규식은 남북협상에 참석키로 결정하였다.[242]
6. 3. 제1차 남북협상 참가 (1948)
1948년 4월 19일 모란봉회장에서 김일성의 사회로 제1차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약칭 남북연석회의 또는 남북협상)가 개최되었다. 김구, 김규식을 비롯한 남한 측의 한국독립당, 민주독립당, 민족자주연맹 등 중간파 요인들이 참석하지 않은 채 개막하여 일반의 이목을 끌었다. 이날 회의에는 북조선측 요인들과 남조선 민전계열이 주로 참석하였다.[243]1948년 4월 18일 민족자주연맹은 원세훈, 최동오, 신기언, 姜舜, 尹琦燮 등 14인을 남북협상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244]
김구 일행은 1948년 4월 19일 먼저 북한으로 출발했다.[245]
1948년 4월 21일 김규식은 북행에 앞서 다음과 같은 협상 5원칙을 제안하였다. "1) 여하한 형태의 독재정치라도 이를 배격하고 진정한 민주주의국가를 건립할 것, 2) 독점자본주의 경제제도를 배격하고 사유재산제도를 승인하는 국가를 건립할 것, 3) 전국적 총선거를 통하여 통일중앙정부를 수립할 것, 4) 여하한 외국에도 군사기지를 제공치 말 것, 5) 미소양군 조속철퇴에 관하여서는 먼저 양군당국이 철퇴조건 및 기일 등을 협정하여 공포할 것을 주장할 것"[246] 이는 김일성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었다.[241]
1948년 4월 21일 김규식 일행은 38선을 넘어 북행하였다.[247]
1948년 4월 22일 보도에 따르면 남북연석회의의 민족자주연맹 측 참석자는 김규식, 원세훈, 孫斗煥, 최동오, 김붕준, 申肅, 金性馨, 신기언, 송남헌, 姜舞, 朴建雄, 權泰錫, 裵成龍, 申감圭, 韓台圭, 潘日炳, 李炳熙, 여운홍, 金是鎌 외 수행원 몇 명이었다.[248]
평양에 도착한 뒤 평양의 특별호텔에 숙소를 정했다. 평양의 특별호텔에 있을 때 김원봉, 허헌, 박헌영 등의 방문을 받았다.[249] 환영 피로연에서 그는 '우리는 우리 장단에 맞추어 우리 춤을 추자'며 자주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한의 주요 정치인사들은 북행하였으나 연석회의에는 불참하였다. 이는 철저히 소련 군정청의 민정청장 레베데프가 세운 각본대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를 눈치챈 김규식과 김구는 4월 22일 회의에만 참석해 간단한 인사말을 했을 뿐이다. 4월 22일 평양시내에 도착한 김규식은 4김회동에만 참석했을 뿐, 이후 병을 이유로 숙소에 머무르며 한 번도 회의에 참가하지 않았다.[250]
1948년 4월 23일 남북연석회의에서 '조선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와 '전조선동포에게 보내는 격문'이 결정되었다.[251] 4월 25일 평양방송은 이 결정서와 격문을 방송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국내 정계에 일대 파문이 일어났다. 발표된 결의서와 격문이 이때까지 남북협상을 추진해 온 근본이념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발견한 김구·김규식 산하 진영은 그 진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4월 26일 연락원을 급파하였으나 소련측의 입국거부로 인하여 빈손으로 귀경하였다.[252] 같은 날 이승만은 선출되지 않은 김구와 김규식은 남한 대표의 자격이 없으며, "남북협상은 소련에게 이용당한 결과"라고 혹평했다.[253] 4월 27일 민족진영 각계는 남북협상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254]
1948년 4월 30일 평양의 김두봉의 집에서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의 '4김 회동'이 열렸다.[255] 김두봉의 제의 하에 연백평야에 공급하다 중단된 수리조합 개방문제, 남한으로 공급하다 중단한 전력의 지속적인 송전문제, 조만식의 월남허용문제, 만주 여순에 있는 안중근의 유골 국내이장문제 등에 관해 논의하였고, 이에 김일성은 수리조합 개방, 전력 송전에 대해서는 즉석에서 수락하였고, 조만식과 안중근 이장문제는 뒤로 미루었다.[241] 그러나 5월 5일 김구와 김규식이 서울로 돌아와 5월 6일 국민들에게 이 사실을 발표한 며칠 뒤, 다시 수리조합과 전력송전을 중단하고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결국 남북협상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이들 통일정부수립노선을 택하였던 인사들이 배제되는 결과만을 가져왔다.[241]
6. 4. 제1차 남북협상 참가 이후 (1948)
1948년 6월 1일 김구와 김규식은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를 한국독립당·민족자주연맹의 행동통일기구로 전환하기 위한 회담을 개시하였다.[222] 1948년 7월 21일에는 김구와 함께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하였고,[222] 김구와 김규식은 공동 영수로 추대되었다.[222]6. 5. 민족진영 재결합의 노력 (1948~1949)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 결의 195(III)호에서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에서 유엔 임시위원단의 감시와 통제 아래 대다수 주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선거가 치러진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그러한 합법 정부"임을 결의했다.[1] 1948년 12월 15일 민족진영 3영수(이승만·김구·김규식)의 합작운동 태동이 보도되었다.[1] 1949년 1월 1일 김규식은 신년인사차 청와대의 이승만을 방문하였다.[1] 1949년 5월 19일 민족진영 3영수(이승만·김구·김규식)의 재결합이 가시화되었다.[1]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1] 김규식은 김구 국민장의 부위원장을 맡았다.[1]6. 6. 민족진영강화위원회 활동 (1949)
1949년 8월 20일 민족진영강화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김규식은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위원회는 강령과 규약을 채택하였다.[264] 그러나 8월 24일 김규식은 돌연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위원장직을 사퇴하였다.[264]1950년 4월 12일 민족자주연맹 위원장 김규식은 건강 문제로 5월 30일에 예정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단념하였다.[264]
7. 납북과 사망
1950년 6.25 전쟁 발발 직후 김규식은 북한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다.[287] 이승만의 정치적 반대자이자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평양까지 다녀온 자신을 북한 정권이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서울에 남아 피신하지 않았다.[286]
김규식을 북한으로 인도한 권태양은 조선로동당에서 침투시킨 첩자였다는 주장이 있다. 송남헌과 강원룡은 권태양을 첩자로 지목했다. 강원룡은 공산 치하의 서울에서 권태양이 박소붕이라는 사람에게 '당신 지금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 함부로 떠들지 말아.'라고 말한 뒤 박소붕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보고 권태양의 정체를 의심하였다.[289] 김규식의 비서였던 송남헌은 권태양이 성시백이 보낸 프락치라고 증언하였다.[290] 송남헌은 '권태양은 내(송남헌)가 속을 정도로 은밀히 활동하였'고, '권태양이 성시백의 직접선'이며, '8월 25일 공산당에서 하는 해주회의에도 갔다'고 진술했다.[290]
김규식은 조선인민군이 유엔군의 공세에 밀려 평안북도 만포진 부근 압록강까지 끌려갔다. 이후 오랫동안 앓아왔던 심장병, 천식 등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1950년 12월 10일 사망했다.(향년 69세)[291]
7. 1. 사후
1950년 한국 전쟁 때 조선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으며[287], 이때 아무도 그에게 피신할 자동차를 보내주지 않았다. 조선인민군이 유엔군의 공세에 밀려 평안북도 만포진 부근 압록강 한 귀퉁이까지 끌려갔다. 1950년 12월 10일 김규식은 오랫동안 앓아왔던 심장병, 천식 등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숨을 거뒀다. 향년 69세였다.[291] 1950년 12월 10일에 사망했다는 설은 평양 애국열사릉의 김규식 묘소 비석에 적혀있는 것으로[292] 확실하지는 않다.1950년 12월 평안북도 만포진(滿浦鎭)에서 노상발병(路上發病)으로 사망했다는 인민군 정치연대장 출신 남로당원 조석호(趙石虎)의 1953년 증언이 있다.[293] 강원룡은 그가 만포진 부근 별오동에서 사망했다고 보았으나[21] 사망 장소도 만포진의 민가에서 사망하였는가 조선인민군 군병원에서 사망하였는가 여부도 불확실하다.
1951년 4월 6일 김규식, 안재홍 등이 자강도에 연행되었다고 보도되었다.[294] 1951년 10월 18일 김규식이 평양의 감옥에서 별세했다는 설이 보도되었다.[295] 1952년에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296]
1989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3] 1990년 8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3]
8. 평가
1948년 초, 이승만과 김구, 김규식은 단정단선론과 남북협상론이라는 노선 차이로 인해 관계가 틀어졌으나, 우여곡절 끝에 점차 관계를 회복하였다.[266] 장제스는 1948년 9월 6일 이승만, 김구, 김규식의 합작을 희망한다고 밝혔다.[267] 1948년 12월 15일에는 민족진영 3영수(이승만·김구·김규식)의 합작운동 태동이 보도되었다.[269] 유엔 총회의 승인 이후 김규식은 대한민국 정부를 인정하고 현실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270]
1949년 1월 1일, 김규식은 신년인사차 경무대를 방문하여 이승만을 만났다.[271] 1949년 5월 19일에는 민족진영 3영수(이승만·김구·김규식)의 재결합이 가시화되었다.[273] 김구는 "대통령과 김박사와 나의 사이에는 별반 간격은 없었던 것"이라며, "과거 우리들의 노력방법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시간과 공간은 차차로 이러한 차이를 해소하고 합일점으로 도달케 할 것"이라고 말했다.[274]
그러나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안두희에게 암살당하면서 3영수의 재결합은 무산되었다.[274] 김규식은 김구의 국민장에서 추도사를 낭독했다. 김구의 장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국민장이었다.
1949년 8월 20일, 민족진영강화위원회가 조직되어 김규식이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나,[280]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 참여 경력을 문제 삼은 민주국민당과의 갈등으로 인해 8월 24일 위원장직을 사퇴하였다.[282] 그는 "객관적으로 봐서 본인이 의장으로 있으면 본인의 책임이 중대할 뿐만 아니라 어떠한 단체에서는 참가를 않겠다는 등... 과거에 좌우합작이니 남북협상이니 여러 가지로 이론물의(異論物議)가 분분한 것 같고 하여간 이러한 책임을 절대로 맡을 수 없다"고 밝혔다.[282]
1950년 4월 12일, 김규식은 건강 문제로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포기했다.[285]
8. 1. 긍정적 평가
김규식은 뛰어난 어학 능력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는다. 국어는 물론 영어, 한자, 독일어, 라틴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몽골어, 산스크리트어 등 다양한 언어를 구사했다.[285] 이러한 어학 능력을 바탕으로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원, 의열단 단원, 한국인 공산주의자 등에게 영어와 한자를 가르치기도 했다.[285]김규식은 또한 합리주의적인 면모를 보였다. 이철순 교수는 김규식을 현실적인 인물로 평가하며, 그가 남북 협상에 참여하면서도 북한 정권에 대해 신중하게 접근했던 점을 그 예로 들었다.[285]
연도 | 내용 |
---|---|
1913년 12월 17일 | 상하이 바크달 영어학교 교수 |
1923년 | 복단대학교(復旦大學) 영어 교수 |
1927년–1929년 | 톈진(天津) 북해대학교(北海大學) 영어 교수 |
1932년–1937년 | 난징(南京) 정치강사학교 정치학 교수 |
1937년–1940년 | 쓰촨(四川) 대학 영문학과 외국어학과 학과장 |
연도 | 내용 |
---|---|
1903년 | 로어노크 대학교(Roanoke College) 문학사(Bachelor of Arts) |
1904년 |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 영문학 석사(Master of English Literature, MA) |
1923년 | 로어노크 대학교(Roanoke College) 명예 법학 박사 |
제목 |
---|
시집, 《양자유경》(楊子遊經) |
《소영문법》(Small English grammar) |
《실용 영어》(Practical English) |
《엘리자베스 1세 시대 극장 소개》(Elizabeth I Age's Introduction to Theatre) |
《원용사》(WonYongSa) |
연도 | 내용 |
---|---|
1988년 | 국가기초훈장(Order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
1988년 | 국가통일상(National Reunification Prize) |
8. 2. 부정적 평가
김규식은 정치적 카리스마가 부족하고 우유부단하다는 평가를 받았다.[21] 성격이 냉정하고 차갑다는 평과 함께 편협하다는 비판도 있었다.[21] 명분론에 치우쳐 현실 감각이 부족하다는 지적과 제주 4·3 사건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점도 부정적 평가의 한 요인으로 꼽힌다.[21]8. 3. 동시대 인물들에 의한 평가
김규식의 비서였던 송남헌은 김규식을 이상주의자라고 평가했다.[290] 강원룡은 김규식이 직선적이고 날카로웠으며 냉정하고 세심했다고 평가했다.[286]9. 사상과 신념
김규식은 한국인의 온유한 민족성을 들어 자신이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배경을 설명했다.[286] 그는 아들 김진동이 아버지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을 허락할 정도로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이었다.[286]
파리 강화 회의 실패 이후, 김규식은 도덕적 이상주의를 버리고 국제사회가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약소국을 이용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관점을 갖게 되었다. 그는 공산주의의 잔인함과 한국인의 온유한 민족성이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아 공산주의에 반대했다.[286]
1948년 3월, 김규식은 남북협상이 실패하고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될 것을 예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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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②) 이승만·조봉암 사이에서 양다리 걸친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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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법의원비서처,미소공위 재개에 대한 김규식과 하지간의 交翰 내용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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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든 혁명투사에서 청진기 든 의사가 된 서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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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법의원 김규식,하지와의 회견내용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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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통일총본부,김규식의 반탁운동 관련 발언 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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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그 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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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탁독립투쟁위원회위원장 김구,국내외 제반문제에 관해 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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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동포원호회,김규식을 후임위원장에 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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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적십자사 창립,역원과 위원 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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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한국과학사는 그를 아버지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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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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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공위재개와 관련 통일국가건설의 호기라는 담화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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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공위에 민주정부 열망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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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공위대책 정당단체협의회,주석에 김규식 취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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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자택에 괴한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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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 미국에서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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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환영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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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
웹인용
공보부, 마샬이 유엔총회에서 행한 연설내용 전문 발표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ull
[208]
웹인용
입의 김규식, 양군 철퇴 주장에 대해 언급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ull
[209]
서적
여운형 평전
null
null
[210]
서적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2
[211]
간행물
G-2 정보참모부 일일보고서
1947-07-24
[212]
웹인용
좌우합작위원회 주석 김규식, 구국대책위원회와 무관하다는 담화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13]
서적
미국의 배반:미군정과 남조선
과학과 사상
1986
[214]
서적
미국의 배반:미군정과 남조선
과학과 사상
1986
[215]
웹인용
여운형 장례식 거행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16]
웹인용
합작위 주석 김규식, 공위의 난관 타개에 대한 담화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17]
웹인용
러취 장례식 거행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18]
웹인용
좌우합작위원회, 동위원회의 해체를 선언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19]
웹인용
좌우합작위원회 등 중간노선 정당 사회단체의 연락위원회의개최(2)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20]
서적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7
[221]
웹인용
입의의장 김규식, 군정장관 딘소장 취임에 대한 환영담화 발표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22]
웹인용
민족자주연맹 결성식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23]
서적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2
[224]
서적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2
[225]
웹인용
민족자주연맹, 정치위원 선정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26]
웹인용
입의 제188차 본회의 개회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27]
웹인용
유엔소련대표 그로미코, 조선위원단의 북한 입경 정식 거부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28]
웹인용
김구, 김규식을 방문하여 유엔조선임위에서 개진할 의견 협의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29]
웹인용
김구, 유엔조선임위에 보내는 의견서 발표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30]
웹인용
김구와 김규식, 메논의장에게 남북지도자회담에 관한 서신 전달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31]
웹인용
웹진 민족화해 > 통일의 발자취 > 우사 김규식, 민족주의자인가! 미국식합리주의자인가!
https://web.archive.[...]
2020-03-19
[232]
웹인용
김규식, 김구 방문하여 회담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33]
웹인용
소총회의 조선총선거 결의안 가결에 대한 국내 반응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34]
웹인용
한독당·민족자주연맹 등을 중심으로 선거반대전선 모색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35]
서적
역사용어 바로쓰기
역사비평편집위원회, 역사비평사
2006
[236]
웹인용
김구·김규식 등 7인, 총선불참 공동성명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37]
웹인용
입의 신임의장 신익희, 하지와 딘 방문 요담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38]
웹인용
남조선과도입법의원 폐원식이 개최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39]
서적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240]
서적
대한민국의 기원
일조각
2006
[241]
웹인용
남북협상
https://web.archiv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42]
웹인용
김규식 북행결정 보도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43]
웹인용
제1차 남북요인연석회의 개최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44]
웹인용
근민당 대표와 김규식 특사 2명이 북조선에 파견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45]
웹인용
김구 38선을 넘어 북행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46]
웹인용
김규식 북행에 앞서 협상 5원칙 제안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ull
[247]
웹인용
북행중 김규식, 38선 표말 제거를 술회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ull
[248]
웹인용
남북협상차 북행한 한독당 등의 명단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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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
서적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
선인
2001
[250]
뉴스
민족은 主義를 초월하는가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2007-10-03
[251]
웹인용
남북연석회의에서 통과된 조선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와 격문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ull
[252]
웹인용
남북협상의 조선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와 격문에 대한 반응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ull
[253]
웹인용
이승만, 남북협상의 전도에 대해 논평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ull
[254]
웹인용
남북협상에 대한 민족진영 각계 반향보도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ull
[255]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인물과사상사
2004
[256]
웹인용
북조선인민위원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채택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ull
[257]
웹인용
김구·김규식, 남북회담의 성과에 대해 공동성명서 발표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ull
[258]
웹인용
김구·김규식, 남북회담의 성과에 대해 공동성명서 발표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ull
[259]
웹인용
북한의 송전 중단 이후 남한도 북한송전을 단절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ull
[260]
서적
통일운동론
null
null
[261]
웹인용
통일독립운동협의회, 한독당·민족자주연맹의 행동통일기구로 전환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ull
[262]
서적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2
역사비평사
null
[263]
웹인용
통일독립촉진회 발기 겸 결성대회 개최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ull
[264]
서적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2
역사비평사
1996
[265]
서적
송건호 전집 13
한길사
2002
[266]
웹인용
대한민국수립과 해방3주년을 맞이하여 각계 담화 발표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ull
[267]
웹인용
蔣介石 총통, 李承晩 대통령과 金九·金奎植 간의 합작을 희망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ull
[268]
서적
출판인 정진숙
을유문화사
2007
[269]
웹인용
李承晩·金九·金奎植 3영수 합작운동 태동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ull
[270]
뉴스
대한민국은 알고 있나, 대한민국의 아버지들을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null
[271]
웹인용
金奎植, 신년인사차 李承晩 대통령을 방문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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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
웹인용
統一獨立促進會, 민족진영 합작운동에 대한 5원칙 제시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ull
[273]
웹인용
李承晩 대통령과 金九, 덕수궁에서 회동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ull
[274]
웹인용
金九, 李承晩·金奎植과의 3영수합작으로 민족단결이 시급하다고 발언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ull
[275]
웹인용
故白凡金九先生國民葬儀委員會, 葬地를 孝昌公園으로 결정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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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
웹인용
李承晩 대통령 조문 등 金九 국민장에 대한 각계의 반응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ull
[277]
웹인용
각 정당·단체, 民族陣營强化準備委員會를 구성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ull
[278]
웹인용
<본 궤도에 오른 민족진영의 단결 강화>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ull
[279]
웹인용
金奎植의 정부수립 1주년 기념 담화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ull
[280]
웹인용
民族陣營强化委員會, 金奎植을 의장으로 선출하고 강령과 규약을 채택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ull
[281]
웹인용
民族陣營强化委員會의 경과와 선언서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82]
웹인용
金奎植, 民族陣營强化委員會 위원장을 맡을 수 없다는 담화를 발표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83]
웹인용
<民族陣營强化對策委員會의 파국 원인>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84]
웹인용
民族陣營强化委員會, 활동을 재개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85]
웹인용
金奎植 민족자주연맹위원장, 건강문제로 총선거 출마를 단념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86]
서적
역사의 언덕에서 2:전쟁의 땅 혁명의 땅
한길사
2006
[287]
뉴스
[책갈피 속의 오늘]1950년 우사 김규식 사망
https://news.naver.c[...]
[288]
기타
김규식편
KBS 인물 현대사
[289]
서적
역사의 언덕에서 2:전쟁의 땅 혁명의 땅
한길사
2006
[290]
서적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
선인
2001
[291]
웹인용
김규식(金奎植)
https://encykorea.ak[...]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92]
웹사이트
재북임정요인후손성묘 / 행사사진
http://www.kopogo.kr[...]
[293]
서적
해부된 흑막 - 남로당원이 본 북한 (解剖된 黑幕 : 南勞黨員이 본 北韓)
서울신문사
1953
[294]
웹인용
金奎植·安在鴻 등 납북인사들의 소식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95]
웹인용
金奎植 사망설 보도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96]
서적
인명·색인사전
계몽사
1987
[297]
뉴스
臨政-3.1운동 관계자등 22명 납북 독립운동가 포상
조선일보
1989-02-10
[298]
뉴스
북한,조국통일상에 임양ㆍ운동권 학생도
한국일보
1990-08-17
[299]
뉴스
좌우통합 노력 좌절 … 납북당한 뒤 북한에서 숨진 김규식
http://news.joins.co[...]
[300]
서적
청소년을 위한 우리 역사 바로 보기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2007
[301]
서적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
푸른역사
2005
[302]
서적
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일조각
[303]
서적
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일조각
[304]
뉴스
韓赤 100년.."평화위해 헌신할 것"
https://news.naver.c[...]
[305]
뉴스
尤史선생기념사업회 이안성 초대회장
http://www.munhwa.co[...]
[306]
뉴스
해방공간 수놓은 9명의 정치 지도자들
https://news.naver.c[...]
[307]
서적
대한민국의 기원
일조각
2006
[308]
서적
역사의 언덕에서 2:전쟁의 땅 혁명의 땅
한길사
[309]
기타
이승만과의 대화 가능 인물
[310]
뉴스
[학술신간]올 광복절 더 그리워지는 우사 김규식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00-08-04
[311]
서적
역사의 언덕에서 2:전쟁의 땅 혁명의 땅
한길사
2006
[312]
뉴스
‘한국분단사연구’ 출간 신복룡 교수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1-09-14
[313]
서적
대한민국의 기원
일조각
2006
[314]
뉴스
희생 中동포에 ‘독립군 후손’도 있었다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08-01-09
[315]
뉴스
이천 화재로 숨진 김군씨는 독립운동가 후손(종합2보)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08-01-09
[316]
뉴스
이천 화재 참사, 유가족 안타까운 사연들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08-01-09
[317]
뉴스
이천냉동창고 화재가 준 교훈
http://snnews.net/sn[...]
성남뉴스
2008-01-08
[318]
간행물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②] 이승만·조봉암 사이에서 양다리 걸친 미국
http://shindonga.don[...]
신동아
2004-01
[319]
서적
대한민국의 기원
일조각
2006
[320]
방송
KBS 인물현대사 ,-김규식 편-
[321]
서적
이야기 인물한국사(2005)
청아출판사
2007
[322]
서적
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일조각
[323]
서적
일본일기
筑摩書房
1952
[324]
서적
장정2-나의 광복군 시절 (하)
도서출판 나남
1991
[325]
서적
윤치호일기:1916~1943
역사비평사
2001
[326]
뉴스
반세기 넘어서야 성묘라니…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6-09-28
[327]
서적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328]
서적
내일을 위한 증언
도서출판 샘터사
1979
[329]
뉴스
<7>복간과 함께 대한민국 기초를 닦다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10-08-16
[330]
서적
객관적20세기 전반기史
필맥
[331]
서적
해방 3년사 1,2권
까치
1985
[332]
서적
김규식의 생애
신구문화사
1984
[333]
뉴스
북한, 조국통일상에 임양ㆍ운동권 학생도
한국일보
1990-08-17
[334]
기타
박사학위 수여
로노크 대학교
[335]
간행물
연세의료원 뉴스
[336]
웹사이트
신념(信念)의 사람 우사 김규식
http://www.hijcc.com[...]
[337]
서적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선교
대한기독교서회
2004
[338]
서적
윤치영의 20세기:동산회고록
삼성출판사
1991
[339]
기타
경주김씨 관련 설
[340]
기타
청풍김씨 세보
[341]
기타
첩의 소생설
[342]
기타
최영온과 정율성(정부은)의 관계
[343]
기타
좌우합작운동 관련 등장 장면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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