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무라 아라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기무라 아라와는 일본의 축구 선수이다. 1931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났으며, 간세이 가쿠인 대학과 주고쿠 대학 선수 및 졸업생들로 구성된 클럽에서 활동했다. 광학 클럽 소속으로 1950년, 1953년, 1955년 천황배에서 우승했고, 추다이 클럽에서는 1957년 천황배에서 우승했다. 1954년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1954년 FIFA 월드컵 예선과 1954년 아시안 게임에 출전했으며, 1955년까지 A매치 6경기에서 1골을 기록했다.

기무라 아라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기무라 아라와
본명(정보 없음)
애칭아시아의 검은 표범
가타카나 표기기무라 아라와
로마자 표기Kimura Arawa
원어 이름(정보 없음)
원어 표기(정보 없음)
출생일1931년 7월 8일, 일본1889, 히로시마현히로시마시
출생지(정보 없음)
사망일2007년 2월 21일, 일본, 가나가와현에비나시
(정보 없음)
체중(정보 없음)
포지션미드필더
현 소속팀(정보 없음)
등번호(정보 없음)
주발(정보 없음)
선수 경력
유소년 클럽1히로시마 고등 사범학교 부속 중학교
유소년 클럽 연도1(정보 없음)
유소년 클럽2간세이 가쿠인 대학
유소년 클럽 연도2(정보 없음)
클럽1간가쿠 클럽/전간가쿠
연도1(정보 없음)
출장1(정보 없음)
득점1(정보 없음)
클럽2주다이 클럽
연도2(정보 없음)
출장2(정보 없음)
득점2(정보 없음)
통산 출장(정보 없음)
통산 득점(정보 없음)
국가대표 경력
국가대표팀일본
대표팀 연도11951-1956
대표팀 출장16
대표팀 득점11
대표팀 성적 갱신일(정보 없음)
수상
메달 템플릿올 간가쿠
수상 내역천황배 1950년
천황배 1953년
천황배 1955년
메달 템플릿주다이 클럽
수상 내역천황배 1957년
📚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의 남자 축구 선수 - 교토쿠 고지
    교토쿠 고지는 일본의 축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다양한 클럽과 국가대표팀을 지휘하며, 2008년 부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남아시아 축구 연맹컵 준결승 진출, 2003년 시미즈 에스펄스 감독으로 J리그컵 준결승과 천황배 준결승 진출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 일본의 남자 축구 선수 - 스가마타 데쓰오
    스가마타 데쓰오는 일본의 전 축구 선수로, 수비수로 활약하며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23경기에 출전했고, 히타치 제작소 축구부에서 선수 생활을 하며 1980년과 1982년 일본 사커 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는 등 다양한 국제 대회에 출전했다.
  • 2007년 사망 - 보리스 옐친
    보리스 옐친은 소련 공산당에서 활동하다가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이 되어 소련 해체 후 시장 경제 개혁을 추진했으며, 헌법 위기와 체첸 전쟁을 겪고 1999년 사임 후 2007년 사망했다.
  • 2007년 사망 - 박승재
    박승재는 대한민국의 정치학자이자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3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으로,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한양대학교 교수 및 한국정치학회 이사,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 1931년 출생 - 보리스 옐친
    보리스 옐친은 소련 공산당에서 활동하다가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이 되어 소련 해체 후 시장 경제 개혁을 추진했으며, 헌법 위기와 체첸 전쟁을 겪고 1999년 사임 후 2007년 사망했다.
  • 1931년 출생 - 돈 오버도퍼
    돈 오버도퍼는 워싱턴 포스트에서 25년간 활동한 미국의 언론인이자 작가로, 한국전쟁 참전 경험과 냉전 종식 및 한국 현대사에 대한 저술 활동을 통해 저널리즘과 국제 관계 분야에 기여했다.

2. 클럽 경력

기무라는 간세이 가쿠인 대학 선수와 졸업생들로 구성된 광학 클럽에서 뛰었다. 또한 주고쿠 대학 선수와 졸업생들로 구성된 추다이 클럽에서도 활약했다. 올 광학의 멤버로 1950년, 1953년 그리고 1955년 천황배에서 우승했으며, 추다이 클럽에서는 1957년 천황배에서 우승했다.

나가누마 켄, 타루야 케이조는 히로시마 대학 부속 초등학교 출신의 소꿉친구이다. 기무라를 포함한 히로시마 고사범 부속 중 멤버 8명이 졸업 후 간세이 가쿠인 대학에 입학했고, 이들과 토키타 마사노리 등 OB를 더해 전 간세이 가쿠인으로 1950년 천황배에서 게이오기주쿠 대학을 6-1로 꺾고 우승했다. 기무라는 간세이 가쿠인 졸업 후에도 야부 직물 등에 소속되면서 전 간세이 가쿠인 멤버로 1953년, 1955년 천황배를 제패하는 등 간세이 가쿠인 황금 시대의 기초를 다졌다.

오사카에서 근무하던 회사의 상사 아들이 오사카 부립 기시와다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던 인연으로 해당 학교를 지도하여 1953년 전국 고교 축구 선수권 우승으로 이끌어 무명 학교를 단번에 강호로 만들었다. 그 후 도쿄로 전근하여 1957년에는 오노 타쿠지가 감독을 맡은 주오 대학 클럽 멤버에 합류하여 카마다 미츠오, 센다 스스무 (후 일본 강관 감독) 등과 주오 대학 클럽 첫 우승에 공헌했다.

3. 국가대표팀 경력

기무라는 1954년 3월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1954년 월드컵 예선에 참가했다. 3월 7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서 국가대표팀 데뷔전을 치렀고, 1954년 아시안 게임에도 출전했다. 1955년까지 일본 대표팀 소속으로 6경기에 출전하여 1골을 기록했다.

3.1. 국가대표팀 통계

👆
좌우로 밀어서 보기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연도출전
195420
195541
| 6 || 1

기무라는 1954년 3월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1954년 월드컵 예선에 참가했다. 1954년 3월 7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서 국가대표팀 데뷔전을 치렀다. 1954년 아시안 게임에도 출전했다. 기무라는 1955년까지 일본 대표팀 소속으로 6경기에 출전하여 1골을 기록했다.

* 국제 A매치 6경기 1득점 (1954-1955)

4. 개인사

기무라 아라와는 나가누마 켄, 타루야 케이조와 히로시마 대학 부속 초등학교 시절부터 소꿉친구였다. 1945년 피폭을 경험했다.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부속 중학교 (현 히로시마 대학 부속 고등학교)에서 나가누마, 타루야와 함께 강력한 3톱의 오른쪽 윙으로 활약하며 전국 중등 학교 선수권 (현 전국 고등학교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전후 첫 우승을 이끌었다. 이들의 빠른 스피드는 당시 중학생 수준에서 막기 어려웠으며, 4경기에서 총 21득점을 기록했다. 결승전에서 7-1로 승리했는데, 이는 전후 최다 득점 및 대회 최다 득점 차 기록으로 현재까지 남아있다. 이듬해 국체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히로시마 고사범 부속 중 멤버 8명은 졸업 후 간세이 가쿠인 대학에 진학했고, 이들과 토키타 마사노리 등 OB를 더해 전 간세이 가쿠인으로 1950년 전일본 선수권 대회 (천황배의 전신)에서 게이오기주쿠 대학을 6-1로 꺾고 우승했다. 기무라는 간세이 가쿠인 졸업 후에도 야부 직물 등에 소속되면서 전 간세이 가쿠인 멤버로 1953년, 1955년 천황배를 제패하는 등 간세이 가쿠인 황금 시대의 기초를 다졌다. 오사카에서 근무하던 회사의 상사 아들이 오사카 부립 기시와다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던 인연으로 해당 학교를 지도하여 1953년 전국 고교 축구 선수권 우승으로 이끌며 무명 학교를 단숨에 강호로 만들었다. 사상 첫 양교 우승 상대는 모교인 히가시센다였고, 당시 도요 공업에 있던 타루야 케이조가 코치를 맡았다. 이후 도쿄로 전근하여 1957년 오노 타쿠지가 감독을 맡은 주오 대학 클럽 멤버로 합류하여 카마다 미츠오, 센다 스스무 (후 일본 강관 감독) 등과 함께 주오 대학 클럽 첫 우승에 공헌했다. 이때 결승 상대는 도요 공업이었고, 장소는 히로시마 국태사 고등학교의 운동장이었다.

당시 "일본 최고의 윙"으로 칭송받았으며, 1954년 일본이 처음 참가한 1954 FIFA 월드컵 예선 첫 경기인 대한민국 전에도 선발 출전했다. 국제 A매치 출전은 4경기이지만, 국제 C매치를 포함하면 12경기 출전, 7골을 기록했으며, 빠른 발과 강력한 슈팅을 바탕으로 "아시아의 흑표범"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74년 제29회 국민체육대회에서는 가나가와현 리그 시절의 닛산 자동차를 중심으로 토호 티타늄과 고베 제강 선수로 구성된 일반부 가나가와현 선발팀 감독을 맡아 준우승을 이끌었다. 현장 담당은 카모 슈가 맡았다. 결승 상대는 고가, 미쓰비시, 히타치의 2군 선수로 구성된 도쿄도 선발팀이었고, 감독은 미야모토 마사카츠였다.

"센터링의 신"으로 불린 토키타를 존경하여, 토키타의 2004년 장례식에서 "영원한 목표였던 토키타 씨의 오른발 뼈를 가져가고 싶다"라고 유족에게 요청한 일화가 있다.

2007년 2월 21일, 가나가와현 에비나시에서 사망했다.